대구형무소 역사관
일제강점기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던 독립투사들의 숭고한 희생 정신을 기리고, 시민들에게 역사교육과 애국심 함양의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대구형무소
대구형무소는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감옥으로, 1908년 대구부에 처음 설립된 뒤 1910년에 중구 삼덕동으로 이전 됐다. 대구형무소에서는 잠정 2,386명의 서훈 독립운동가가 투옥 됐고, 이 가운데 216명(국가 서훈 212명)은 순국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로 추모된 195명(국가 서훈 175명)보다 많은 숫자이다.
대구형무소 연혁
- 1908년 7월 대구감옥 개청(경상감영 관하/현, 중부경찰서 뒤편)
1910년 4월 신축 이전(대구 중구 삼덕동 102)
1923년 5월 대구형무소로 명칭 변경
- 1961년 12월 대구교도소로 명칭 변경
1971년 6월 신축 이전 (대구 달성군 화원읍 천내리 472)
- 2023년 11월 현재 대구교도소로 신축 이전 (대구 달성군 하빈면 하빈로 204)
시설개요
- 위치 : 대구 중구 공평로 22 (삼덕교회60주년기념관 2층)
- 규모 면적 121,83m² 주요시설: 전시존, 영상존, 추모존
- 관람시간 : 오전 10시 ~ 오후 6시 무료개방 ※ 휴관일 일요일
- 문의: 053)255-2194
오시는 길
대구 중구 공평로 22(삼덕교회60주년기념관 2층)
문의전화 053.255.2194
자료 제공 : 대구광역시 중구청
(관련 사진) - 역사관 내 시설 일부 촬영
주요인물 소개
이육사
호적등본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綠)이고 어릴 때 이름이 원심(源三)이었다. 1930년 말경 중국으로 가서 북경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중외일보'와 '조광' 등의 잡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 후 여러 사건에 연루되어 17회에 걸쳐 붙잡혀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월 16일 북경 김목에서 순국하였다.
(이육사라는 이름은 그의 수인번호였다.)
장진홍
1895년 칠곡군 인동면 옥계동에서 태어났으며, 일찍이 조선보병대에 들어가 2년 간 복무하였다. 1918년 4월 광복단에 가입하고, 러시아에서 한국인 청년들을 대상 으로 군사훈련을 시켰다. 1925년 10월 베이징에서 폭탄 제조법을 익히고, 돌아온 이정기가 이원록 이원기 이원유 등과 함께 비밀 결사에 가담하면서 1927년 10월 18일에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던져 건물과 도로를 파손시켰다.
박상진
일제강점기 대한광복회 총사령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1904년 양정의숙 전문부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해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되었으나 사퇴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2년 대구에 상덕태상 회를 설립해 독립운동의 연락본부로 삼았다. 1915년 1월 안일암에서 조선 국권회복단을 결성하였다.
김영랑
영랑(永部) 김윤식(金允植)은 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성 리에서 태어났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이듬해 기독청년회관에서 영어를 수학한 후 휘문의숙에 진학하였다.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구두 안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기고 강진에 내려와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 등에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종암
1896년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백안동에서 태어났다. 1916년 대구은행에 취직하였지만 1917년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은행 돈(10,500원)을 갖고 1918년 중국 만주로 망명한다. 망명 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후 3.1운동이 발발하자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의열단을 설립하였다. 1925년 국내로 잠입하였다가 붙잡혀 1926년 징역 13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다 1930년 5월 29일 순국하였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현장까지 찾아 촬영 정리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정보 고맙습니다.
방문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