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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 / 곡식예물과 언약적 교제
레 2:1-16
1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2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3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4 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
5 철판에 부친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섞어
6 조각으로 나누고 그 위에 기름을 부을지니 이는 소제니라
7 네가 냄비의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어 만들지니라
8 너는 이것들로 만든 소제물을 여호와께로 가져다가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으로 가져가서
9 그 소제물 중에서 기념할 것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10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11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12 처음 익은 것으로는 그것을 여호와께 드릴지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제단에 올리지 말지며
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14 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네 소제를 삼되
15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위에 유향을 더할지니 이는 소제니라
16 제사장은 찧은 곡식과 기름을 모든 유향과 함께 기념물로 불사를지니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
레 2:1-16 / [소제는 이렇게 드려라] 여호와께 곡식을 예물로 바치려는 사람은 밀가루를 바쳐라. 밀가루에 기름을 섞고 향을 그 위에 얹어 2) 아론의 피를 물려받은 제사장들에게 갖다 바쳐라. 제사장은 기름을 섞은 밀가루 한줌과 향 전부를 가져다가 주께 모든 것을 바친다는 뜻으로 번제단 위에서 모조리 불살라라. 이렇게 곡식제물을 불살라 바치는 것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겨 여호와를 흐뭇하게 해드리려는 것이다. 3) 불에 태우고 남은 것은 제사장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돌아갈 몫이다. 불에 살라 바치는 이 곡식제물은 여호와께 바치는 지극히 거룩한 예물이다. 4) 곡식제물을 가마에 구워 바치려거든 고운 밀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만 섞어 잘 반죽하여 구워 바쳐라. 좀 두껍게 떡을 만들어 바쳐도 되고 또는 얇게 과자로 만들어 바쳐도 된다. 5) 곡식제물을 가마에 굽지 않고 넓적한 판에 구워서 바치려거든 고운 밀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잘 섞어 반죽한 다음 6)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기름을 두르고 구워서 바쳐라. 7) 또 곡식제물을 자루와 뚜껑이 달린 냄비에 쪄서 바치려거든 고운 밀가루에 기름만 넣고 쪄야 한다. 8) 이렇게 만든 떡을 여호와께 바치려고 제사장에게 가져오면 제사장은 번제단으로 가지고 가서 9) 그 제물 가운데에서 얼마를 떼어 주께 모든 것을 바친다는 뜻으로 번제단 위에서 불살라라. 이렇게 하는 것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겨 여호와를 흐뭇하게 해드리려는 것이다. 10) 불에 태우고 남은 것은 제사장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돌아갈 몫이다. 불에 살라 바치는 이 곡식제물은 여호와께 바치는 지극히 거룩한 예물이다. 11) 여호와께 바치는 곡식제물에는 누룩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불살라 여호와께 바치는 제물에는 누룩이나 꿀을 넣어서는 안 된다. 12) 너희가 해마다 곡식을 거두어들여 그 가운데에서 처음 익은 햇곡식으로 누룩과 꿀을 여호와께 바칠 수 있으나 그것을 번제단에 살라 향기로운 냄새를 풍겨 여호와를 흐뭇하게 해드려고 여호와께 바칠 때에는 누룩과 꿀을 넣어 바쳐서는 절대로 안 된다. 13) 너희가 곡식제물을 드릴 때에는 소금을 넣어 바쳐라. 이것은 소금이 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너희가 영원히 변치 않는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14) 처음 익은 햇곡식을 여호와께 갖다 바칠 때에는 그 곡식을 볶아서 바치든지 또는 찧어서 15) 기름을 붓고 향을 그 위에 얹어서 바쳐라. 16) 그것을 받아 든 제사장은 기름을 부은 곡식 가운데 얼마를 떼어 여호와께 그 모든 것을 바친다는 표시로 향과 함께 불살라 바쳐라. 이것이 여호와께 불살라 바치는 예물이다.
본문은 소제에 관한 교훈입니다. 소제는 이름대로 곡물을 드리는 감사제사입니다. 소제는 구약의 제사 중에 유일하게 짐승을 잡지 않고 짐승의 피를 뿌리지 않습니다. 이유는 다른 제사 후에 드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피 없는 제사' 또는 '부속된 제사'라고도 합니다.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1-3) 먼저 고운 가루를 만들어 드리라고 하였습니다(1). 이는 곡식을 곱게 갈아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양식을 구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유일하게 공급되는 양식이었습니다. 그 양식을 성별하여 하나님께 드린 것이 소제의 기원입니다. 영국의 신학자 매튜 헨리는 성도들은 소제의 제물 곧 고운 가루처럼 순결과 경건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고, 독일의 신학자 델리취는 소제는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육적 양식과 더불어 영적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2절의 고운 가루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름은 성령님을 상징하고 유향은 성도의 향기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종합하면 소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별하여 드리는 거룩한 제사(예배)라는 것입니다.(참고 고후 1:21)
처음 익은 것으로 여호와께 드리라(4-16) 본문 4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소제를 드리는 방법입니다. 소제는 곡식을 드리는 방법에 따라 3종류로 나뉩니다. 첫째로 고운 가루로 드리는 소제는 거칠어진 인간 성품을 복종시키는 것입니다(1-3). 둘째로 불에 익힌 것으로 드리는 소제는 제물의 발효성 있는 식품을 첨가하지 않고 소금을 넣습니다. 이것은 신앙 정결의 필요를 의미합니다(4-10). 셋째는 첫 이삭으로 드리는 소제입니다(14).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온갖 고난을 당하면서 당신의 몸을 찢어 속죄의 제물이 되어주실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라는 것입니다. 소제물을 처리하는 방법은 2가지입니다.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소제물 중 불사르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9). 다음은 제사장에게 주는 것입니다(10). 제사 후에 남은 제물은 모두 제사장 몫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제사장들과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은 제사를 드리는 일에만 전념하라고 주시는 것입니다.(참고 눅 12:1; 민 18:13, 19)
적용: 사순절 2주차입니다. 당신의 몸을 소제의 제물로 내어주신 예수를 깊이 묵상하세요. 당신의 기도, 찬양, 봉사의 제물에 누룩과 꿀을 섞지는 않습니까?
펩소던트 컴퍼니라는 기업의 찰스 럭맨 회장은 중년의 나이에 무일푼에서 이룬 성공 신화의 비결은 "제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11년 전 했던 단 하나의 결심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을 중요한 순서대로 처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 오늘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며 어떤 순서대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어려운 순간들이 있었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바로 그 계획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난 11년 동안 두 가지 결심을 지켰기에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 설 교 >
소제(1)
레위기 2장 / 마경훈 목사
오늘은 레위기 5대 제사 중에서 소제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소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민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선물' 혹은 '공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보다 높은 사람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드리는 예물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뇌물이라는 의미보다는 받은 호의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바치는 예물을 뜻합니다.
소제는 하나님께 대하여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충성하겠다는 표시로 드린 제사의 방법입니다.
소제의 제물은 다른 제사와 달리 피 없이 곡식으로 드렸습니다. 세 가지 제물을 사용했습니다. 고운 가루를 드리는 경우가 있었고, 굽거나 찌는 방법으로 드리는 경우가 있었고, 첫 이삭을 볶아 찧어서 드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소제물의 몫을 따지자면 소제물 중 기념물로 하나님께 불사라서 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 불사르지 않은 나머지 부분은 제사장에게 돌렸습니다. 제사장에게 돌린 부분에 대하여 성경학자들은 신자는 자신의 신앙을 위하여 수고하는 교역자의 생활을 책임져야 한다고 해석을 합니다. 고전9:14에 보면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소제물에는 첨가되어야 할 것은 '유향', '기름', '소금'입니다. 그리고 첨가 되서는 안될 것은 '누룩'과 '꿀'입니다.
소제를 그리스도와 연관시켜서 해석한다면 '그리스도의 인격의 무죄성'과 '순수한 충성'을 보여줍니다. 신자와 연결시켜 해석하면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충성의 다짐'을 보여줍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죄와 사망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 땅에서 나그네와 외인으로 살며 고난을 당한다 하여도 영생을 얻은 사실 하나로 충분히 감사하며 충성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영생의 축복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을 맛보며 하나님의 도움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은혜를 받은 것을 생각한다면 늘 감사하고 더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소제를 성도의 감사와 충성에 초점을 맞춰서 풀어보겠습니다.
1. 고운 가루로 드렸습니다(1절)
고운 가루는 인간의 노동과 부서짐과 부드러움을 의미합니다.
신자의 감사와 충성이 고운 가루처럼 드려지려면 노동과 깨어짐과 부드러움이 겸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곡식은 농부의 땀의 결실입니다. 수고하지 않고 곡식을 거둬들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는 농사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농부가 얼마나 수고해야 곡식을 거둬들이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농부가 가만히 있어서는 농사가 되지 않는 것을 압니다. 농부는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서 부지런히 몸을 움직입니다. 비바람과 맞서야 할 때도 있고, 뜨거운 태양 아래서 땀을 흘려야 하는 것은 압니다.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것 그리고 그분에게 충성하는 것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의 수고로 열매가 열리듯이 성도들의 땀 즉 몸을 움직이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를 드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입술로 마음으로 또는 물질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귀하고 아름답지만 본문에서는 몸을 움직이는 수고를 통해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것과 하나님의 일에 여러분 자신의 몸을 움직이십시오. 뒤에서 기도하고 물질로 후원하는 것도 좋은 일이나 소제를 드리듯이 감사하고 충성하는 것은 몸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고운 가루는 부서져야 합니다. 절구에 넣고 찧어야 합니다. 자아가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자연적인 모습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본래의 내 모습은 없어지고 가루가 돼야합니다.
이 말은 연단 받은 신앙이 진짜 신앙이며 연단 받은 신자가 진짜 감사와 충성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운 가루로 소제의 삶을 살기 원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절구에 넣고 찧어대십니다. 돈의 절구, 사람의 절구, 환경에 절구에 넣고 찧으실 때가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 합당한 사람으로 만드시고 그 과정을 통과하게 하신 후에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욥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고운 가루는 부드럽습니다. 하나님 앞에 참된 감사와 충성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부드러운 사람이 돼야 합니다.
부드럽다는 말은 거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가루를 절구에 넣어 찧고 체에 받아 흔들어 골라냅니다. 거친 것은 다시 절구에 집어 넣고 찧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부드러운 가루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훈련을 받은 사람일수록 부드러워집니다.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소제로 드려져야 하는데 아직 거친 것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성격의 거친 것, 말의 거친 것, 행동의 거친 것, 대인 관계의 거친 것 등...
거친 것은 눈에 띕니다. 거친 것은 만져보면 거칠게 만져집니다. 자신을 보십시오. 눈에 띄게 거친 것이 없습니까? 다른 사람이 나와 대화를 하거나 함께 일하면 쉽게 느끼는 거친 것이 없습니까? 있다면 그것이 고운 가루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소제로 드려져서 당신의 감사와 충성이 지금 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가 고운 가루가 되었는가 아닌가는 다른 신자와 연합할 줄 아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반죽은 가루와 가루가 붙어서 되는 것입니다. 가루 속에 물이 들어가면 가루는 다른 가루와 합쳐집니다. 금새 한 덩어리가 됩니다. 그런데 알맹이는 어떻습니까? 물이 들어가도 절대 다른 알맹이와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2. 기름을 넣어서 드렸습니다(1절).
소제를 드리는 제주는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기름을 붓는다는 말은 성령의 충만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님을 기름으로 상징합니다. 눅4:18에 보면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과 관련된 이사야의 예언을 읽으셨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성령께서 예수님에께 임한 사건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감사와 충성은 신앙생활을 대표하는 단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두 단어 안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등 신앙생활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감사와 충성을 상징하는 소제의 제물에 기름을 부으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신앙생활은 성령님의 역사로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성령과 동행하십시오, 성령님을 인정하십시오, 성령님께 물어 보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이 소제물 위에 기름을 붓는 것입니다.
사람이 다른 일은 성령 없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성령 없이 불가능합니다. 성령 없는 신앙생활은 마치 물 없는 오아시스와 같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그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됩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평범했던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면 그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을 세울 때 그들에게 기름을 붓고 구별하여 특별한 일을 하게 했습니다.
성령께서 사람에게 역사하시면 그는 예수를 믿게 되며,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벧전 2:9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며, 하나님의 나라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구별된 사람입니다.
신자는 거룩한 소제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곡식과 같습니다. 이제 가루가 되고 기름이 부어져서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감사와 충성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유향을 넣어서 드렸습니다(1절).
소제 때는 두 가지 향기가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고운 가루에 유향을 섞어서 향기롭게 하였으며, 드려진 소제물을 불에 태워서 화제로 드렸는데 이 화제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드려졌습니다.
소제물에서는 향기가 났으며 그 향기를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처럼 우리들도 거룩한 향기를 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가셨습니다. 거기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나사로와 함께 집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라는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준 일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신자가 거룩한 향기를 발하는 삶을 사는 것은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것이 됩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향기를 발하는 삶을 살게 될까요?
첫째, 신자가 되는 것만으로도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 속에 주님이 오시고 주님이 신자를 통해서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향수병에 들어 있는 향수는 구멍만 있으면 그리로 자신의 향기를 발하게 됩니다. 만찬가지로 사람이 자신 속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면 그리스도가 신자의 깨어진 부분을 통하여 자신의 향기를 발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고운 가루에 유향을 넣는 것은 신자 속에 그리스도가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둘째, 거룩한 말을 해야 합니다.
말은 그 사람의 속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은 그 사람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자신 속에 그리스도가 가득하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로 채워진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 속에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면 그 사람은 더러운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내뱉은 무익한 말 한 마디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고, 우리가 내 뱉은 말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입에서 나간 말은 창조의 능력이 있어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10명의 정탐꾼은 자신들이 내뱉은 부정적인 말대로 되어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됐습니다. 반대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신들이 내뱉은 말 그대로 가나안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자의 입에서 사악한 말이 나와서는 안됩니다. 무슨 말을 하든지 덕이 되는 말을 하시고 긍정적인 말을 하시고 남을 세우는 말을 하십시오. 그렇게 사는 것이 소제물로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셋째, 기도해야 합니다.
계5:8에 보면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신자가 기도하는 것은 소제물에서 향기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소제물의 향기를 맡으시고 기뻐하셨던 것처럼 신자의 기도를 향기롭게 맡으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넷째, 전도를 해야 합니다.
고후2:12 이하에 보면 바울과 일행들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드로아와 마게도냐에 간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증거하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향기로 삼았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그들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사망으로 쫓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었고, 믿는 자들에게는 생명으로 쫓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었습니다.
다섯째, 헌신된 생활을 통해서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소제물이 태워짐으로 향기를 발하게 됩니다. 소제물은 불에 태워져서 없어져버리면서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가정과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때 소제물처럼 불살라지는 것입니다. 소제물이 불살라질 때 그 향기는 성막에 가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득한 냄새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성막에 제사하기 위하여 찾아온 모든 사람들이 맡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행실, 희생적인 생활은 향기가 되어 하나님만 맡으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이웃이 맡게 될 것입니다.
소제(2)
레위기 2장 / 마경훈
레위기 2장
지난 주에 이어서 소제를 살펴봅니다. 소제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충성하겠다는 표시로 드린 제사의 방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주에는 소제에 첨가되어야 할 것 세 가지를 살펴봤습니다. 고운 가루와 유향 그리고 기름이 들어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5. 일상생활과 관련해서 드렸습니다.
소제물로 드렸던 고운 가루와 화덕에 구운 무교전병 그리고 솥에 삶은 떡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늘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 말은 신자의 감사와 충성은 특별한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언제나 자연스럽게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롬12장에서 말하는 거룩한 산제사는 우리의 몸으로 드리는 것으로서 생활이 예배요 제사라는 말입니다.
신자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특별하게 감사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주일은 다른 6일 보다 특별하게 구별해서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지키는 절기는 다른 주일보다 더 특별하게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결혼기념일이라든지 생일 등 특별한 날도 다른 날과 달리 구별해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일상생활은 하나님께 감사와 충성 없이 보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소제의 제물이 일상생활 속에서 늘 보는 것이듯이 신자의 생활은 감사와 충성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참 모습은 위기를 만났을 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위기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산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진짜입니다. 하지만 위기 중에 드러나는 신앙은 일상생활 속에서 그렇게 살아야 가능합니다.
운동을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운동을 하면 몸에 무리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평상시 운동을 안 하다가 갑자기 심한 운동을 하여 쓰러져 죽은 경우도 있습니다. 평상시 운동하던 사람은 갑자기 많은 양의 운동을 해도 그렇게 무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신앙도 위기 가운데 빛을 보려면 평상시 생활이 중요합니다. 다니엘은 평상시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창문 앞에서 하루 세 번씩 기도하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신앙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사자 굴에 들어가야 하는 위험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사자 굴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신앙이 위기 속에서 빛을 발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하나님은 다니엘의 원수들을 다니엘이 들어가려고 했던 사자 굴에 던져 넣었습니다.
제가 설교하면서 신앙은 교회 중심, 목회자 중심, 주일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교회와 상관없는 신앙이 되서는 안되고, 목회자의 가르침 없이 안되고, 주일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교회 중심이 되서는 안되고, 목회자 중심이 되서도 안되고, 주일 중심이 되서도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니 조금 혼동이 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교회와 연관된 신앙이 되야 하지만 교회를 떠나서도 거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목회자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지만 목사만 바라보고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지만 주중에도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6. 누구든지 드릴 수 있었습니다.
고운 가루에 유향을 넣는 것은 누구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유향의 가격이 상당히 비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교전병이나 솥에 삶은 떡은 누구든지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이스라엘 상황에서는 드리지 못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신앙생활은 특별한 사람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부르심은 육신의 조건으로 선택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말하면서 '누구든지'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 사55:1에서는 '목마른 자', '돈 없는 자'도 오라고 말씀합니다.
신자의 구원은 주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인간적인 조건과 상관없이 주님의 은혜를 받아드리기만 하면 신앙생활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인간적으로 잘난 사람들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되었습니까? 정말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기도의 응답에 대해서도 누구든지 받을 수 있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부분이지만 엘리야를 보십시오, 엘리야는 한번의 기도로 엄청난 일을 한 사람입니다. 그가 기도하자 하늘의 문이 닫혔고, 다시 기도하자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늘에서 비가 내렸던 엄청난 기도 응답의 체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 즉 보통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감사와 충성도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 없는 사람은 감사 헌금도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착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여러 사람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많이 넣을 때도 가만히 계시던 주님이 가난한 과부가 동전 넣는 것을 보시고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많이 넣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주님은 헌금의 양을 보신 것이 아니라고 그 사람의 중심을 보셨던 것입니다.
신자가 감사하고 충성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최선을 다하여 기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양보다 질을 보십니다. 양보다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감사와 충성은 특별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7. 누룩을 넣지 않고 드렸습니다(11절).
무교전병은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빵을 말합니다. 여기서 누룩은 죄의 부패와 전염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감사와 충성을 하려면 죄가 제거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감사와 충성이 잘 차려진 밥상에 놓인 음식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맛깔스럽고 냄새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 음식에 코가 떨어졌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음식이 아무리 맛있어 보이고 냄새가 좋아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절대 먹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음식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음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음식에 들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사와 충성도 하나님은 그렇게 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와 충성이 아무리 좋아도 죄악이 섞여있다면 하나님도 받으실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죄의 영향력을 알아야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에덴에서 추방 된 것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죄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질병과 저주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상달되지 않는 것도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렸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거룩하신 성령의 역사가 죄로 인하여 약해질 수 있습니다. 삼손에게 역사하셨던 성령께서 죄로 인하여 삼손을 떠나셨고, 사울에게 역사하셨던 성령께서도 죄악 때문에 사울을 떠나셨습니다. 사울에게는 성령께서 떠나신 것뿐만 아니라 악신이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문에 신자는 항상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나의 죄 때문에 가려지지는 않는가 부지런히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죄가 있다면 요일1:9말씀처럼 하나님 앞에 자백하시고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씻김을 받아야 합니다.
자백과 사죄의 진리가 참으로 감사한 것입니다. 가루에 누룩이 들어갔다면 누룩을 제거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의 생활에 누룩과 같은 죄가 들어갔을 때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총을 확신하고 겸손히 잘못을 고백하십시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능력이 고백하는 그 시간 역사하여 깨끗이 씻어내실 것입니다.
8. 꿀을 넣지 않고 드렸습니다(11절).
성경에서 꿀이 말씀의 달콤함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아닙니다. 잠언 5:3에 보면 육신의 안락과 세상의 쾌락을 상징합니다. 소제에 꿀을 넣지 말라는 것은 신앙생활을 육신의 안락과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하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안락과 세상 쾌락은 당장에는 달콤함을 주지만 결국 파멸로 이끕니다. 솔로몬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축복 속에 얼마나 화려하게 왕이 됩니까? 하지만 그에게 약한 것이 바로 육신의 안락과 세상 쾌락이었습니다. 특별히 솔로몬은 여색을 밝혔던 사람입니다. 솔로몬에게는 아내와 첩의 수가 천명이나 되었으니 보통 쾌락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이 신앙을 버리고 잠시 엉뚱한 길로 갔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인들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 여인들이 가지고 들어온 이방의 신들을 섬기는 죄를 범하게 되면서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보다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때문에 거룩한 소제로 자신을 드려 하나님 앞에 감사와 충성을 하기 원하는 사람은 육신이 원하는 것을 부인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육신의 편안함과 쾌락을 위하여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 16:24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영성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는 훈련입니다. 육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영혼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신앙이 잘못되면 이상하게 됩니다. 간혹 상대에 대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잘못되었는데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그것을 들어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면 은혜를 받은 것이고,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합니다.
신앙생활은 나의 원함을 위해 시작하지만 주의 원함을 위해 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주를 위하여 살면 주님이 나를 위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항상 어린아이처럼 나만을 위해달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어린아이는 옳은 것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합니다. 하지만 성장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옳은 것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9. 소금을 넣어서 드렸습니다(13절).
소제물에 소금을 첨가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소금을 "네 하나님이 언약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십시다. 소금은 변하지 않습니다. 또 음식물을 변하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소금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은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소금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드려야 할 소제에 소금을 치라는 말은 신자의 감사와 충성에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작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 그 말은 변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닮는 다는 것은 예수님의 동일하심처럼 신자도 항상 동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에녹의 강점은 하나님과 동행함입니다. 하지만 그가 단 몇 년이나 몇 일만 동행하고 그 후에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다면 그의 신앙은 그렇게 빛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에녹은 300년이나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감사가 충만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감사를 잃어버립니다. 또 어떤 때는 굉장한 충성을 하는 것 같은데 잠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소제로 하나님 앞에 드려진 수 없습니다.
신자는 사람에 대해서도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변함이 없다는 것은 발전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변덕스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변덕을 부리고 자신의 생각에 따라 변덕을 부려서는 안됩니다.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 두 사람 모두 다 다윗을 처음 봤을 때 다윗에게 특별한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오래지 않아서 변해버렸고, 요나단은 항상 변함없이 다윗을 아꼈습니다. 요나단은 주님을 향한 변함없는 신자의 신앙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소제의 규례
레위기 2:1-3, 11-13, 6:14-23 / 피영민 목사 / 강남중앙침례교회
서 론
레위기에 기록된 5대제사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는 방법은 네 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로 태워 드리는 것은 화제, 흔들어서 제사하는 것은 요제, 들었다 놓았다하여 드리는 것은 거제, 포도주와 같은 것을 부어서 드리는 방법은 전제라고 합니다.
다섯 가지 제사가 갖는 기본적인 의미는 인간이 희생제사 없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희생제사를 거쳐야 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은 5대제사 가운데 두 번째 제사인 소제에 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소제는 여러 가지 영단어로 번역되었습니다. ‘Grain Offering’, ‘Cereal Offering’, ‘Meal Offering’ 등입니다. 그런데 흠정역(KJV)에는 ‘Meat Offering’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Meat Offering’이라고 했을까요? 보통 ‘Meat’가 ‘고기’라는 의미로 알고 있지만, 고대에는 ‘Meat’가 고기가 아니라 ‘곡식을 가지고 구운 떡이나 빵’을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고기 제사’로 번역하면 안 되고, ‘소제’라고 번역해야 맞습니다.
히브리어로는 ‘민하’(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제물’이라는 뜻도 되고, ‘예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는 것을 ‘제물’, ‘헌물’, ‘선물’ 등으로 표현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경우는 ‘제물’이라고 하고,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것을 ‘예물’이라고 합니다.
‘민하’는 창세기 4장 3절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단어인데, “가인이 제사를 드릴 때, 땅의 소산(민하)으로 여호와께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의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또 창세기 32장 13절에 보면, 사람이 사람에게 드리는 ‘예물’의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야곱이 거기서 경야하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민하)을 택하니.” 야곱이 형의 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드린 예물 역시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소제에 관한 말씀은 같은 내용이 레위기 2장과 6장에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두 번씩이나 기록되었을까요? 2장은 ‘제물’, 6장은 ‘제사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강조점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제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본문을 모두 살펴봐야 합니다.
Ⅰ. 번제와의 유사점과 차이점
소제가 번제와 비슷한 점은 무엇일까요? 네 가지 면에서 비슷합니다.
첫째, 번제의 제물이 흠 없는 수컷이어야 하듯이, 소제의 제물도 고운 가루로 아무 흠이 없어야 합니다. 밀가루든, 보릿가루든 맷돌로 곱게 갈아서 제물로 사용해야 합니다. 제물에 아무 흠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흠 없고 죄가 없는 분이심을 예표합니다.
둘째, 번제와 소제 모두 불로 태워서 드리는 화제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셋째,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밀가루에 유향을 섞어서 태우면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어 하나님이 만족하시고 죄인들에게 죗값을 묻지 않으시게 된다는 점이 공통적입니다.
넷째, 번제와 소제는 독립적으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항상 같이 치러집니다. 번제가 밥이라고 한다면 소제는 반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찬 없이 밥만 먹는 사람 없고, 밥 없이 반찬만 먹는 사람도 없습니다.
출애굽기 29장 38~40절에 상번제에 대한 규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침에 양 한 마리, 저녁에도 양 한 마리를 매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번제를 드릴 때 항상 가루를 가지고 소제를 함께 드려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고운 가루 한 에바의 십분 지 일(2.2L)을 아침저녁으로 한 번 씩 소제로 드려야 했습니다. 이렇듯 번제와 소제는 함께 드려져야 합니다. 번제와 소제는 항상 함께 나오는데, 그 순서가 중요합니다. 번제가 나온 후에 소제가 나옵니다. 이는 번제의 피 뿌림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난 후에 소제의 성화, 또는 헌신이 가능하게 된다는 기본 원리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헌신해서 정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먼저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화와 헌신은 그 이후에 가능합니다.
소제와 번제는 비슷한 점이 많이 있지만 다섯 가지 면에서 차이점도 있습니다. 첫째, 번제의 제물은 짐승이어야 하지만, 소제의 제물은 반드시 곡식의 가루여야 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둘째, 번제는 피가 있는 제사이지만, 소제는 피 뿌림이 없는 제사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번제는 피 흘림이 있기 때문에 죄 사함을 주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소제는 피 흘림이 없기 때문에 죄 사함이 목적이 아닙니다. 소제의 목적은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만드는 데 있습니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로 목축을 하는 백성들이기 때문에 번제의 제물은 비교적 구하기가 쉽습니다. 양이나 소는 항상 살 수 있는 동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제의 제물은 곡식이기 때문에 광야에서 구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소제의 제물을 드린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소제는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드리는 제사입니다.
넷째, 번제는 제물의 전체를 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소제는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레위기 6장에 기록된 소제는 일반 백성들이 드리는 소제와 제사장의 위임식 때 드리는 소제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앞부분의 내용은 일반 백성들이 드리는 소제에 대한 규례이고, 뒷부분은 제사장의 위임식 때 드리는 소제에 관한 규례입니다. 제사장의 위임식 때 드리는 소제의 경우는 모두 다 태워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레위기 6장 14~16절에 “소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단 앞 여호와 앞에 드리되 그 소제의 고운 기름 가루 한 움큼과 소제물 위의 유향을 다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살라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그 나머지는 아론과 그 자손이 먹되 누룩을 넣지 말고 거룩한 곳 회막 뜰에서 먹을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반 백성이 드리는 것은 제사장이 한 움큼만 가지고 태워서 드린 후 나머지는 제사장 몫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 움큼 잡아서 태워 드리는 부분은 ‘기념물’이라고 했습니다. 기념물은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취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2장 2~3절에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 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기름 가루 한 줌과 그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루 한 줌은 기념물이라고 했고, 나머지는 지극히 거룩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번제의 경우는 다 태워 드리지만, 소제의 경우는 무조건 다 태워드린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제가 예수님에게 적용이 되고, 일반 성도들에게도 적용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위임식을 할 때 온전히 불사르고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온전히 죽는 것을 예표합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섯째, 번제의 경우 제물에 아무 것도 첨가할 수 없고, 제사의 방식도 획일적입니다. 동물의 머리에 안수한 후 죽여 피는 뿌리고 나머지는 다 태워야 합니다. 여기에는 더하거나 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에는 인간이 기여할 부분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의지해서 죄 사함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원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옥 갈 사람이 천국에 가려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달리 인간의 공헌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 사함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는 것 밖에 없다고 성경이 말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이루셨고, 우리는 그 분을 믿기만 하면 되는데, 소제의 경우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헌신의 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레위기 2장 1~3절에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 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기름 가루 한 줌과 그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운 가루로 요리하지 않고 그대로 태워 드릴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면 화덕에 구워서 드릴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5절에는 번철에 부쳐서 드릴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삶거나 볶아서 드릴 수도 있습니다. 소제의 경우 고운 가루를 사용하되, 다양한 요리 방법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Ⅱ. 소제 제물의 4대 요소와 첨가할 수 없는 두 가지
번제는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그대로 다 태워 드립니다. 거기에 인간이 첨가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소제는 제물에 인간이 첨가하거나 첨가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소제 제물에 첨가되어야 할 4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고운 가루’(Fine flour)입니다. 밀가루든 보릿가루든 가루면 되는데, 거칠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과 완전성을 상징합니다. 밀이든 보리든 곡식이라면 반드시 수순이 있습니다. 땅에 씨가 묻혀야 하고, 자라야 하고, 열매를 맺어야 하고, 추수해서 맷돌에 갈아야 합니다. 고운 가루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음의 수난을 겪어야 함을 예표합니다.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수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 고운 가루가 상징하는 바입니다.
둘째, ‘기름’(Oil)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름은 ‘감람유’, 즉 올리브기름을 가리킵니다. 고운 가루 속에 기름이 속속 배어 들어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100% 성령 충만을 받은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은 성령의 능력으로 행한 것임을 예표합니다.
그러면 기름을 부어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는 하나님을 위해 구별하여 하나님만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28장 18~19절에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자기 형 에서와 아버지를 속여 모든 복을 다 받고 도망가는데 외삼촌 라반이 사는 밧단아람까지 가야 하니 길이 얼마나 멉니까? 날이 저물어 잠을 자야 하는데, 아무 것도 없이 광야에서 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자는데, 꿈속에서 하늘과 땅 사이에 놓인 사닥다리와 그 끝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베고 자던 돌을 세우고 거기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이제 이 장소(벧엘)는 구별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으로 사용하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소제 제물에 기름을 붓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따로 구별하여 성령의 지배 가운데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짐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충만함을 입고 우리 죄를 위해 구별된 희생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셋째, ‘유향’(Frankincense)입니다. 유향은 유향나무에 상처를 내면 나오는 진액을 고체로 만든 것입니다. 유향을 불로 태우면 향기로운 냄새가 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장 11절에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경배하며 보배합을 열어 세 가지 진귀한 물건을 드렸습니다. 바로 황금과 유향과 몰약입니다. 황금은 왕이 사용하는 것이고, 유향은 제사장이 소제 때 사용하는 것이며, 몰약은 선지자들에게 기름 부을 때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로 황금, 유향, 몰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 제사장, 선지자 직분을 한 몸에 지니신 분이심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향이 되셔서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누그러지고 공의가 만족된 것입니다.
넷째, ‘소금’입니다. 소금은 짠 맛을 낼 때 사용하지만, 썩음을 방지하는 방부제로도 사용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이 부활하여 썩지 않을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소제 제물에는 소금이 첨가되어 부패가 방지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31절에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죽었고, 장사 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썩지 않는 육신을 가지고 영원히 살아계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누구나 한 번 죽어 무덤에 들어가게 되고, 화장을 하면 가루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 육신도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그 날이 되면 썩지 않는 육신이 되어 영생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독교는 적선을 많이 하라고 가르치는 차원의 종교가 아닙니다. 물론 선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슬람교처럼 선행하면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영생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영혼구원과 육신구원에 관한 진리를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목적은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활과 영생이 없으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소제 제물에 소금이 첨가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육신이 썩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도들의 육신도 부활 후에는 썩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소금을 ‘언약의 소금’(Salt of Covenant)이라고 했습니다.
레위기 2장 13절에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근동 지방 사람들은 상대와 친구관계를 맺을 때, 서로 소금을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서로 소금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소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하나님과 친구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소제 제물에는 4대 요소, 즉 고운 가루, 기름, 유향, 소금이 들어갑니다. 이는 1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2차적으로는 성도의 삶을 예표합니다.
그러면 소제 제물에 첨가되지 말아야 할 두 가지는 무엇일까요? 첫째, ‘누룩’입니다. 레위기 2장 11절에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누룩은 대부분 죄와 부패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누룩은 악한 영향력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죄악을 가리킵니다.
고린도전서 5장 6절에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아주 못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아내와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고린도교회에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도 치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을 속히 징계하여 물리치라고 말했습니다. 누룩은 죄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소제 제물에 누룩이 첨가될 수 없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교훈에는 조금의 악한 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가리킵니다.
둘째, ‘꿀’입니다. 소제 제물에는 절대로 꿀을 첨가하지 못했습니다. 꿀은 사치, 정욕, 탐욕의 상징입니다. 잠언 25장 27절에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꿀을 너무 많이 먹는 사람은 당뇨병과 같은 병에 시달릴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꿀을 아침저녁으로 계속 먹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소제 제물에 꿀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 영예를 위해 살지 않으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도들은 자기 삶에 누룩이나 꿀과 같은 죄악을 멀리 해야 합니다. 탐욕, 사치, 향락에 눈이 멀어 죄와 가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소제 제물에는 누룩과 꿀을 첨가할 수 없었습니다.
Ⅲ. 소제가 증거하는 두 가지 진리
소제가 증거하는 진리를 예수님과 성도의 삶에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죄나 오염이나 부패가 전혀 없으신 분으로 희생제물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고운 가루에 누룩이나 꿀이 첨가될 수 없다는 것은 제물 되신 예수님께 아무런 흠이 없음을 가리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연애를 했다는 괴이한 소리로 해를 가하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누룩이나 꿀이 없는 분으로 조금의 부패도 없으십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19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 가는 것은 금이나 은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열납하셨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존하여 믿음으로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받으셨을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의로운 제물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도의 삶에 적용해 보면 번제로 말미암은 죄 사함을 받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과 화친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헌신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소제 제물에 기름이 들어간 것처럼 기름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구별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사신 바 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의 주인은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몸이 조금만 병들고 아파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우리 생명의 주인이 우리가 아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음을 느끼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결 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과 달라도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유향을 첨가하듯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예수님의 향기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회의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또 우정을 상징하는 소금은 덕과 사랑을 베푸는 삶을 가리킵니다.
아울러 두 가지는 멀리해야 합니다. 죄를 가까이 하지 마시고, 탐닉과 쾌락에 빠져 사는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누룩과 꿀을 제거하여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담백하게 헌신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소제 : 여호와깨 드리려거든!
레 2:1-13 / 지태일 목사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소중한 유산입니다. 물론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법들을 그대로 지키지는 않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정신들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교훈들을 가르쳐줍니다.
특히 레위기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법 다섯 가지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를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교제를 갖습니다.
제사가 무엇입니까? 제사가 왜 필요합니까?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가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자신 대신 짐승이 피를 흘리는 겁니다. 그런데 피와 관계없이 드리는 곡식으로 드리는 유일한 제사가 바로 ‘소제’입니다.
‘소제’를 히브리어로 ‘민하’라고 하는데 번역하면 ‘선물’이란 뜻입니다. 소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과 같은 제사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와 헌신의 표현으로 드리는 제사, 그래서 다른 제사와 같이 반드시 드려야만 하는 의무제가 아니라, 마음에 기쁨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드리는 자원제입니다.
1. 먼저 소제의 의미 이해를 위해 번제와의 차이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번제와 소제와의 외형적 차이입니다.
번제는 짐승이 제물입니다. 그러나 소제는 곡물이 제물입니다. 번제는 피가 있는 제사입니다. 그러나 소제는 피가 없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제라고 할 때에 이 ‘소(素)’자는 한자로 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피가 없기 때문에 흰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번제의 경우에는 가죽을 뺀 나머지 제물 전체를 다 태워서 여호와께 향기를 올려 드립니다. 그러나 소제는 일부분만 취하여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갖게 됩니다. 번제의 경우는 그 효과가 사람의 죄를 속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제는 번제를 드려서 죄를 속함 받은 사람이 감사와 헌신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런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2) 번제와 소제의 신학적인 차이입니다.
구원의 측면에서 중요한 두 가지는 칭의와 성화입니다.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앞에 의롭다하심을 받을 것인가?가 칭의이고, 의롭다하심을 받은 성도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문제는 성화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번제는 속죄제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아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칭의(justification)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소제는 이미 예수 믿어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의 성화(sanctification)의 삶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번제의 경우에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제물에 손을 얹어서 안수합니다. 그 안수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소제는 안수하는 과정이 없습니다. 이것은 회개를 통해 죄사함을 받은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번제와 소제는 외형적 신학적으로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번제는 기본제사이고 소제는 부수제사인 것입니다. 번제가 밥이라면 소제는 반찬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밥을 먹을 때 반찬이 같이 가야 합니다. 밥만 먹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번제와 소제는 병행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번제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반드시 소제의 제물도 가져가서 제사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9:39-40절을 보면 제사장들이 해야 할 일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매일 해야 할 일은 아침과 저녁으로 1년 된 어린양을 한 마리씩 잡아서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번제를 드릴 때에는 아울러 고운 밀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소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에바는 22ℓ입니다. 그러므로 십분의 일은 2.2ℓ입니다. 또 민수기 15:6절의 말씀을 보아도 수양을 번제로 드리는 경우에는 고운 가루 한 에바의 십분지 2에다가 기름 한 힌의 삼분지 1을 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번제에는 반드시 소제가 따라가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번제는 모든 제사의 기본이요 소제는 따라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린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나중 문제입니다. 죄인이 예수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먼저입니다. 먼저 번제를 통과해야 소제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번제가 출발이요 기본입니다. 그 위에 감사와 헌신과 의로운 삶이 첨가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은혜로 주어진 의롭다하심의 칭의 없이는 거룩한 삶, 성화가 없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거룩한 삶, 의로운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선한 행실과 충성과 기독교 윤리적 삶을 강조해도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왜 기본 자격 안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가지고 기름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무엇으로 드렸습니까? 번제 없이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소제는 잘못된 제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도 바른 제사입니다.
그러나 번제 없는 소제를 드린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번제 없는 소제는 잘못된 것입니다. 먼저 번제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위에 안수함으로 회개하고 그 피의 효력으로 죄사함을 받은 사람만이 감사와 충성과 헌신과 의로운 삶의 소제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으로도 바른 길입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성도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로서, 주의 종들로서 의롭고 복된 삶을 살고 싶으시다면 먼저,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는 예수 믿지 않고도 윤리 도덕을 가지고 의롭게 살 수 있다.’ 그것은 꿈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번제 없는 소제는 받지 않으십니다.
2. 그렇다면 이 소제의 재료는 무엇입니까?
본문 2:1절입니다.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소제는 한 마디로 말해서 고운 가루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려면 그것이 밀가루냐 보리가루냐가 문제 아니라 고운 가루로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곡식을 알맹이 그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고운 가루로 드리라는 것, 여기에는 영적 교훈이 있습니다. 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제물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신앙 생활할 때는 딱딱한 알맹이 그대로입니다. 한번 가보자고 하니까 하는 수 없이 나왔지만 아직도 세상에 미련이 그대로 남아 있고 교회가 어떤 곳인지도 몰라 뻣뻣한 모습으로 그렇게 예배에 참석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이 얼마나 좋아하십니까? 하지만 계속 그런 모습을 하면 절대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본문 14절 말씀처럼 절구에 넣고 찧어 빻고 깨어진 것을 갈고 가는 체로 걸러 고운 가루가 될 때 소제물이 됩니다.
밀이 가루가 되기 위해서는 빻아지고 으스러지고 갈아져 가는체로 걸러야 고운 밀가루가 되어 떡이 되고 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진설병이 되어 제사장이 먹고 힘을 내는 것입니다. 밀이 깨어질 때 으스러질 때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습니까? 그렇다고 덩어리 그대로 있으면 아무 것도 안됩니다. 고집 덩어리가 깨어져야 합니다. 욕심과 탐욕의 덩어리가 그대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제사는 자아가 깨어져야 하고, 온갖 위선과 교만이 깨어져야 하고, 내 모든 혈기도 깨어져야 합니다.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온유한 마음 겸손한 마음이 될 때 비로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깨어져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물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깨어지는 고난의 과정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공통 과목입니다. “왜 내게만 이런 고통을 주느냐고?” 아니요. 고난의 터널을 빠져나오지 않으면 절대로 영광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욥보다 더한 고통을 당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가 고백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욥은 고운 가루가 되기 위해 고난이라는 과정이 따른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단련, 연단, 고난 후에 정금같이 순수한, 고운 가루가 됨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고운 가루가 되었는지 아닌지는 다른 성도들과 얼마나 연합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운 가루가 되면 금방 반죽이 됩니다. 그런데 알맹이들은 아무리 물을 부어도 절대 다른 알맹이와 하나가 되지 않습니다. 따로 놉니다. 그래서 깨뜨려져야 합니다. 으깨져야 합니다. 만약에 깨어지고 부드러워지지 않으면 문제가 더 일어납니다. 고운 가루는 문제를 일으키지 아니합니다. 성도는 가루로 존재해야 하나님도 받으시고 모든 성도들과 쉽게 연합되어 하나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어디에서나 덩어리로 존재하지 맙시다. 왜 그렇습니까? 가루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덩어리는 하나되기도 어렵지만 소리가 많이 납니다. 그래서 주님도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1:30)
한 알, 덩어리 그대로 있으면 열매가 없습니다. 쓸 수가 없습니다. 죄의 본성도, 혈기도, 질투도, 조급한 마음도, 인색한 마음도 다 깨어져 부드러운 마음이 될 때 비로서 열매를 맺습니다. 생명의 떡이 되어 많은 영혼들을 먹여 살립니다. 깨어지지 아니하고 부서지지 아니하고 자기 고집을 가지고 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도 그것입니다. 예수님도 인성을 가지고 계시고 자신의 뜻이 있으셨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38-39절을 보면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2:42절에도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온 몸의 살을 다 찢기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친히 십자가위에서 내 뜻도 내 몸도 하나님께 드리는 고운 가루가 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 모두 고운 가루가 되어 하나님께 헌신하고 감사하고 충성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바르게 사는 삶이요, 옳게 사는 삶인 것입니다. 고운 가루가 되지 않고 “나는 내 멋대로 살겠다.”고 하면 나중에 삶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후회일 것입니다. 끝내 회개하지 아니하고 고집하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망하게 하시려고 고운 가루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은혜요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른 인생길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 돌리는 귀한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사를 드립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고운 가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깨어져야 할 부분이 많이 있습니까? 빨리 고운 가루가 되어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는 제물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깰수 있는 모든 덩어리들을 날마다 깨어져 겸손하고 온유하며 옥토같이 됩시다. 거친 돌과 같은 말이나 행동을 버립시다. 내 심령이 먼저 고운 가루가 된 다음에 거기에 기름을 넣어야 하는 것이고 그 기름 위에 유향을 넣어야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사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앞에서 고운 가루가 되시는 축복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소제!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소중한 유산입니다. 물론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법들을 그대로 지키지는 않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정신들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교훈들을 가르쳐줍니다.
특히 레위기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법 다섯 가지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를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교제를 갖습니다.
제사가 무엇입니까? 제사가 왜 필요합니까?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가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자신 대신 짐승이 피를 흘리는 겁니다. 그런데 피와 관계없이 드리는 곡식으로 드리는 유일한 제사가 바로 ‘소제’입니다.
‘소제’를 히브리어로 ‘민하’라고 하는데 번역하면 ‘선물’이란 뜻입니다. 소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과 같은 제사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와 헌신의 표현으로 드리는 제사, 그래서 다른 제사와 같이 반드시 드려야만 하는 의무제가 아니라, 마음에 기쁨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드리는 자원제입니다.
1. 먼저 소제의 의미 이해를 위해 번제와의 차이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번제와 소제와의 외형적 차이입니다.
번제는 짐승이 제물입니다. 그러나 소제는 곡물이 제물입니다. 번제는 피가 있는 제사입니다. 그러나 소제는 피가 없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제라고 할 때에 이 ‘소(素)’자는 한자로 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피가 없기 때문에 흰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번제의 경우에는 가죽을 뺀 나머지 제물 전체를 다 태워서 여호와께 향기를 올려 드립니다. 그러나 소제는 일부분만 취하여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갖게 됩니다. 번제의 경우는 그 효과가 사람의 죄를 속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제는 번제를 드려서 죄를 속함 받은 사람이 감사와 헌신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런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2) 번제와 소제의 신학적인 차이입니다.
구원의 측면에서 중요한 두 가지는 칭의와 성화입니다.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앞에 의롭다하심을 받을 것인가?가 칭의이고, 의롭다하심을 받은 성도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문제는 성화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번제는 속죄제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아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칭의(justification)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소제는 이미 예수 믿어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의 성화(sanctification)의 삶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번제의 경우에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제물에 손을 얹어서 안수합니다. 그 안수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소제는 안수하는 과정이 없습니다. 이것은 회개를 통해 죄사함을 받은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번제와 소제는 외형적 신학적으로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번제는 기본제사이고 소제는 부수제사인 것입니다. 번제가 밥이라면 소제는 반찬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밥을 먹을 때 반찬이 같이 가야 합니다. 밥만 먹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번제와 소제는 병행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번제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반드시 소제의 제물도 가져가서 제사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9:39-40절을 보면 제사장들이 해야 할 일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매일 해야 할 일은 아침과 저녁으로 1년 된 어린양을 한 마리씩 잡아서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번제를 드릴 때에는 아울러 고운 밀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소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에바는 22ℓ입니다. 그러므로 십분의 일은 2.2ℓ입니다. 또 민수기 15:6절의 말씀을 보아도 수양을 번제로 드리는 경우에는 고운 가루 한 에바의 십분지 2에다가 기름 한 힌의 삼분지 1을 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번제에는 반드시 소제가 따라가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번제는 모든 제사의 기본이요 소제는 따라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린다ais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나중 문제입니다. 죄인이 예수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먼저입니다. 먼저 번제를 통과해야 소제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번제가 출발이요 기본입니다. 그 위에 감사와 헌신과 의로운 삶이 첨가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은혜로 주어진 의롭다하심의 칭의 없이는 거룩한 삶, 성화가 없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거룩한 삶, 의로운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선한 행실과 충성과 기독교 윤리적 삶을 강조해도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왜 기본 자격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가지고 기름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무엇으로 드렸습니까? 번제 없이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소제는 잘못된 제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도 바른 제사입니다.
그러나 번제 없는 소제를 드린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번제 없는 소제는 잘못된 것입니다. 먼저 번제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위에 안수함으로 회개하고 그 피의 효력으로 죄사함을 받은 사람만이 감사와 충성과 헌신과 의로운 삶의 소제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으로도 바른 길입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성도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로서, 주의 종들로서 의롭고 복된 삶을 살고 싶으시다면 먼저,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는 예수 믿지 않고도 윤리 도덕을 가지고 의롭게 살 수 있다.’ 그것은 꿈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번제 없는 소제는 받지 않으십니다.
2. 그렇다면 이 소제의 재료는 무엇입니까?
본문 2:1절입니다.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소제는 한 마디로 말해서 고운 가루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려면 그것이 밀가루냐 보리가루냐가 문제 아니라 고운 가루로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곡식을 알맹이 그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고운 가루로 드리라는 것, 여기에는 영적 교훈이 있습니다. 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제물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신앙 생활할 때는 딱딱한 알맹이 그대로입니다. 한번 가보자고 하니까 하는 수 없이 나왔지만 아직도 세상에 미련이 그대로 남아 있고 교회가 어떤 곳인지도 몰라 뻣뻣한 모습으로 그렇게 예배에 참석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이 얼마나 좋아하십니까? 하지만 계속 그런 모습을 하면 절대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본문 14절 말씀처럼 절구에 넣고 찧어 빻고 깨어진 것을 갈고 가는 체로 걸러 고운 가루가 될 때 소제물이 됩니다.
밀이 가루가 되기 위해서는 빻아지고 으스러지고 갈아져 가는체로 걸러야 고운 밀가루가 되어 떡이 되고 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진설병이 되어 제사장이 먹고 힘을 내는 것입니다. 밀이 깨어질 때 으스러질 때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습니까? 그렇다고 덩어리 그대로 있으면 아무 것도 안됩니다. 고집 덩어리가 깨어져야 합니다. 욕심과 탐욕의 덩어리가 그대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제사는 자아가 깨어져야 하고, 온갖 위선과 교만이 깨어져야 하고, 내 모든 혈기도 깨어져야 합니다.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온유한 마음 겸손한 마음이 될 때 비로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깨어져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물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깨어지는 고난의 과정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공통 과목입니다. “왜 내게만 이런 고통을 주느냐고?” 아니요. 고난의 터널을 빠져나오지 않으면 절대로 영광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욥보다 더한 고통을 당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가 고백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욥은 고운 가루가 되기 위해 고난이라는 과정이 따른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단련, 연단, 고난 후에 정금같이 순수한, 고운 가루가 됨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고운 가루가 되었는지 아닌지는 다른 성도들과 얼마나 연합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운 가루가 되면 금방 반죽이 됩니다. 그런데 알맹이들은 아무리 물을 부어도 절대 다른 알맹이와 하나가 되지 않습니다. 따로 놉니다. 그래서 깨뜨려져야 합니다. 으깨져야 합니다. 만약에 깨어지고 부드러워지지 않으면 문제가 더 일어납니다. 고운 가루는 문제를 일으키지 아니합니다. 성도는 가루로 존재해야 하나님도 받으시고 모든 성도들과 쉽게 연합되어 하나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어디에서나 덩어리로 존재하지 맙시다. 왜 그렇습니까? 가루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덩어리는 하나되기도 어렵지만 소리가 많이 납니다. 그래서 주님도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1:30)
한 알, 덩어리 그대로 있으면 열매가 없습니다. 쓸 수가 없습니다. 죄의 본성도, 혈기도, 질투도, 조급한 마음도, 인색한 마음도 다 깨어져 부드러운 마음이 될 때 비로서 열매를 맺습니다. 생명의 떡이 되어 많은 영혼들을 먹여 살립니다. 깨어지지 아니하고 부서지지 아니하고 자기 고집을 가지고 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도 그것입니다. 예수님도 인성을 가지고 계시고 자신의 뜻이 있으셨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38-39절을 보면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2:42절에도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온 몸의 살을 다 찢기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친히 십자가위에서 내 뜻도 내 몸도 하나님께 드리는 고운 가루가 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 모두 고운 가루가 되어 하나님께 헌신하고 감사하고 충성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바르게 사는 삶이요, 옳게 사는 삶인 것입니다. 고운 가루가 되지 않고 “나는 내 멋대로 살겠다.”고 하면 나중에 삶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후회일 것입니다. 끝내 회개하지 아니하고 고집하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망하게 하시려고 고운 가루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은혜요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른 인생길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 돌리는 귀한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사를 드립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고운 가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깨어져야 할 부분이 많이 있습니까? 빨리 고운 가루가 되어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는 제물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깰수 있는 모든 덩어리들을 날마다 깨어져 겸손하고 온유하며 옥토같이 됩시다. 거친 돌과 같은 말이나 행동을 버립시다. 내 심령이 먼저 고운 가루가 된 다음에 거기에 기름을 넣어야 하는 것이고 그 기름 위에 유향을 넣어야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사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앞에서 고운 가루가 되시는 축복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소제의 교훈
레 2:1-16 / 손샹률 목사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시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조건은 수없이 많습니다. 구약의 경우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백성들이 그 구원의 은혜를 기념하며 자자손손 감사의 예물을 드리며 제사의식을 행하였습니다. 소와 양과 같은 동물을 제물로 드리는 번제(燔祭)는 유월절에 희생된 어린양을 상징하는 것이며, 곡식의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서 드리는 소제는 손으로 하는 일에 축복해주신 은혜를 감사하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오늘 뜻 깊은 추수감사절에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린 소제의 교훈을 생각하면서 감사절의 교훈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1. 감사의 의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가 행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도록 힘써야만 됩니다. 여기 본문에 소개된 소제의 제물과 의식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뜻을 나타내는 예배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1) 받은 은혜를 생각합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자연과 만물을 다스리며 그것들을 통하여 혜택을 누리도록 특권을 부여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자연의 은총 또는 일반적인 은혜라고 합니다. 그중에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성도에게는 세상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은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은혜뿐만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신령한 축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1:3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라고 하였습니다. 중생한 성도는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이와 같은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
2) 수고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여러 가지 제사 제도 중 본문에 명시된 소제의 경우는 땅에서 나는 곡식으로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2:1에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람이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것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축복을 감사하게 하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른 봄에 씨를 뿌리고 한여름 내내 땀 흘리며 가꾸는 것에 하나님께서 자연의 은택을 주셔서 탐스러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고전 3:6). 옛날 솔로몬왕은 사람이 아침 일찍 일어나고 저녁 늦게 잠을 자며 하루 종일 수고를 하여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다 헛일이 된다고 하였습니다(시 127:2).
3)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켜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드리는 예배와 헌신을 기뻐 받으십니다. 이사야 43:21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헌신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찬송하는 것이며 또 온갖 정성을 드려 예배하는 일입니다(시 116:17).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께 보답하는 예물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이 있는 제사를 원하십니다. 신명기 16:16-17에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고 하였습니다.
2. 헌신의 의미
본문 9절에 “그 소제물 중에서 기념할 것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고 하였습니다. 제물을 불태워 화제(火祭)로 드리는 것은 제사하는 사람 자신을 온전히 바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헌신(獻身)을 뜻합니다.
1) 구별된 제물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은 구별된 것이라야 됩니다. 소와 양떼 중에서도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을 골라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였습니다(출 12:5).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22:20에 “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너희가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할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소제 예물의 특징은 구별되고 또한 정결하여야 됩니다. 본문말씀 1절에는 그것을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이라고 했으나 거기에 누룩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11절). 성경에는 누룩을 불결하거나 불순물처럼 여기고 있습니다(마 16:11). 고린도전서 5:8에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 하였습니다.
2) 희생을 뜻합니다.
소제 예물의 중요재료는 곡식의 가루입니다. 추수한 곡식 가운데 충실한 알곡을 가루를 만들고 반죽을 하여 그 위에 기름과 유향을 바른다고 하였습니다. 곡식 종자를 빻아서 정교하게 가루를 만드는 것은 자기를 완전히 희생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번제의 제물이 제단 위에서 완전히 불태워지는 것이나 곡식을 갈아서 고운 가루를 만들어 반죽을 하는 것은 모두 자기 자신을 완전히 드린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곧 몸으로 산제사 드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몸을 속죄의 제물로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희생시킨 것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어떤 형태로든지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삼아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3) 성령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고운 가루 위에 기름과 유향을 바르게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주식은 주로 밀가루에 누룩을 섞어 반죽을 하고 그것을 번철에나 숯불에 구어서 전병(煎餠)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에 따라 유월절의 음식이나 또는 소제와 같은 제물에는 누룩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딱딱하고 맛도 덜했습니다. 그 대신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발라서 떡이 부드럽거나 맛과 향기를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물의 주재료가 되는 곡식의 가루가 제사를 드리는 우리 자신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첨가되는 기름과 유향은 성령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을 기름으로 표현하였습니다(삼상 16:13, 슥 4:1-3). 주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과 봉사위에 성령께서 기름 부으시고 온전하게 이끌어주십니다(빌 2:17).
3. 서원의 의미
성도가 드리는 감사와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뢰와 약속이라는 특수한 의미를 지닙니다. 구약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으로 구별한 민족에게 특별한 언약을 선포하셨고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헌신을 다짐하게 하였습니다(신 7:6-11).
1) 최상의 예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최상의 축복을 약속하였습니다. 그 약속의 실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 받은 성도는 그 은혜에 감격하여 제게 있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께
산제사 드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롬 12:1).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신 6:5). 성도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 기울여 하나님께 예배하고 헌신하여야 됩니다. 성도가 드리는 감사의 예물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의지를 표하는 것이기에 최상의 헌물을 드려야 합니다. 출애굽기 23:19에 “네 토지에서 처음 거둔 열매의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고 하였습니다.
2) 불변의 약속을 뜻합니다.
본문 13절에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소금은 음식의 조미료와 방부제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소금을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람을 사랑하며 섬기는 신앙행위로 표현했는데 이는 불변의 약속을 뜻 합니다. 이 언약이 선택받은 그의 백성에게 축복의 근거가 됩니다. 역대하 13:5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였습니다(막 9:50).
3) 기념물 또는 증거가 됩니다.
16절에 “제사장은 찧은 곡식과 기름을 모든 유향과 함께 기념물로 불사를지니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드리는 정성스러운 예물을 오래도록 기억하시는 기념물로 삼으십니다.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던 여인의 헌신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천하 어디에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인의 행한 일을 기념으로 삼겠다고 하였습니다(마 26:13). 민수기 18:19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감사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로 받게 될 무궁한 축복의 언약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와 헌물도 성도가 받게 되는 축복의 증거가 됩니다(말 3:10-11).
소 제
레위기 2:1-16 / 창녕감리교회
소제, 레위기 2:1-16
골로새서 2:16-17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 의식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표상입니다. 소제도 역시 오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드림'(바침)이 될 것인지 알게 해주는 제사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어떻게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합당한 삶인지 생각케 해주는 제사이기도 합니다.
1. 소제(素祭)의 뜻과 의의
소제(素祭)의 원어 '민하'는 '선물' '공물'의 뜻으로서, 기본적으로 어떤 사람이 자기 보다 높은 사람의 호의를 얻기 위해 드리는 예물의 의미로 씌였습니다.(창32:21,43:15,삼하8;12). 그러다 후에 받은 호의나 은혜에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드리는 예물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 의미가 제사에 사용된 것은 소제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드려지기 때문입니다.
번제(燔祭)는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였으나 소제(素祭)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번제가 생명을 중시한다면 소제는 노력에 대한 결실의 헌납을 중시하는 제사입니다. 번제가 우리의 생명을 요구한다면 소제는 우리의 생활을 요구하는 제사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제를 통해 우리의 모든 인격과 생활의 결실을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그리스도를 기초해야 합니다. 소제는 단독적으로 드려지는 제사가 아니고, 대체로 번제나 화목제와 함께 드려지는 제사입니다(출29:40,민15:1-10). 하나님께서는 피흘림없는 제사를 단독적으로 받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소제는 화제(火祭)로 드려야 했는데(2下,9,16) 그 때 쓰는 불도 번제단에서 가져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소제물은 본인이 아닌 제사장이 단위에 올려 놓아야 했습니다. 그런 사실들은 우리가 전인격과 생활의 열매를 드리는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믿음이 기초가 되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의 도움이 있어야 함을 알게 해 줍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그리스도를 중심한 삶이 아니라면 아무리 좋은 것과 많은 것을 드려도 그것은 의미없는 헌물에 불과한 것입니다(고전3:10-15)
2. 소제(素祭)의 재료
①고운가루입니다(1절). 소제에서 드리는 곡식은 알맹이 그대로 드리지 않고 고운 가루가 되도록 빻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떡(진설병)으로 만들어 드려야 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드려질 것을 예표함인데(요6:35,49), 그가 고난 가운데 희생적 순종으로 온전한 제물이 될 것에 대한 예표입니다(마20:28,빌2:7-8). 예수님은 생명뿐아니라 그의 인격과 생활 전부를 하나님께 온전한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것은 고난 가운데 이루어진 제물이었습니다. 그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할 때 오는 고난이었습니다. 우리가 바침이 될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 해야 하고 그 뜻을 순종하려할 때 오는 고난을 믿음으로 통과하므로 연단된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고후4:10~).
②기름입니다(1절). '기름'의 원어 '쉐멘'은 감람나무 열매에서 짜낸 올리브 기름을 말합니다. 이 기름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표징입니다. 고운가루에 이 기름을 넣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구속 사역이 성령에 의해 되어질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탄생부터 성령에 의해 시작하여 모든 사역에 성령의 도움을 받았습니다(사61:1~3,마3;16,막1:10,눅3:21~22).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령에 의해 일을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시인하고 말씀을 깨달은 것은 순전한 성령님의 도움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하나님 앞에 합당한 인격을 만들고 바른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성령님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한 줄 알고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줄 알고 홀로 하려 할 때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모세와 바울이 처음에 실패했던 것과 같습니다. 예배와 교회 봉사와 사정 생활의 전 영역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해야 합니다(요4:24,벧전4:11).
③유향입니다(1절). 유향(乳香)의 원어 '레보나'는 감람나무과에 속하는 유향나무로부터 짜낸 고급향료를 가리키는데, 제물에 이를 첨가하는 이유는 제물이 향기를 풍기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혹자는 이를 요한계시록 5:8(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을 근거하여 '기도'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하나, 그러나 계시록의 향은 피우는 향이고 본문의 향은 음식에 넣는 향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실 구속의 향기, 곧 예수님께서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의지와 계획을 나타내실 것에 대한 표상입니다(엡5:2). 우리는 구원얻을 자들에게나 망할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역할을 해야 합니다(고후2;15). 마리아의 향유부은 사건에서 잘 묘사되듯이(마26:6~13),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신 비밀들을 나타내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을 본받아 예수님을 나타내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의로운 행실입니다(마7:12). 우리의 목적과 목표와 생각과 판단 기준과 행동 방식 생활 양식 등 삶의 전 영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위치요 본분이요 사명인 것입니다.
④소금입니다(13절). 소금은 맛보다는 부패방지를 위해 넣었습니다. 소금은 고대로부터 계약을 체결하고 그 체결한 계약을 확증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계약 당사자들이 소금을 먹음으로서 계약을 지속적으로 변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냈습니다. 그것은 소금이 갖는 불변성(부패를 방지하는)에 대한 상징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에 대해서도 '소금언약'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민18:9,대하13:5). 곧 소금은 불변의 언약에 대한 상징인 것입니다. 소제물에 소금을 치게 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과 맺은 언약이 진실되고 불변할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금을 치는 것은 그 언약에 대한 신뢰감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동시에 그 언약의 내용을 지키겠다는 결단을 나타내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언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약한 그리스도로 인한 구속사적 축복과 성경을 통해 약속하신 모든 종말적 축복을 믿고 소망해야 합니다. 그 약속의 말씀대로 변치않고 주를 위해 살겠다는 결단이 매 예배때 마다 이루어져야 합니다.
※ 주의할 점
11절에서 소제물에 누룩과 꿀은 넣지 말라고 했습니다. 12절에 보면 "처음 익은 것으로는 그것을 여호와께 드릴지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단에 올리지 말지며"라고 했습니다. 누룩과 꿀을 첫소제로는 드리되 일반 소제로는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23:15-17). 첫소제는 처음 익은 열매에 대한 감사제 의미를 가지므로 드릴 수 있으나 향기로운 제물의 의미를 가진 일반 소제에서는 넣지 말라는 것입니다. 첫소제로 드린 경우에는 드릴 수 있으나 그런 경우에도 하나님께 요제(搖祭)로 드린 다음 제사장 몫으로 돌아가게 하고 제단에 화제(火祭)로 불사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23:30). 곧 소제의 기본 정신은 누룩과 꿀을 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①누룩을 넣지 말아야 합니다(11절).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누룩없는 떡'(무교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누룩이 죄와 부패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오실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는 분으로 오실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물에 누룩을 넣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4:15에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했고, 요한일서3:5에도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범죄 뿐 아니라 어떠한 가식이나 외식도 없었습니다.
우리도 죄짓는 생활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묵은 누룩 곧 괴악하고 악독한 죄를 가지고는 우리의 인격과 생활이 온전하게 바쳐질 수 없습니다(고전5:7-8). 또한 외식을 멀리해야 합니다. 누가복음12:1에는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미간에 붙이고 다니기도 했고, 옷술을 길게 하여 거기에 기록하여 다니기도 했습니다. 기도할 때도 금식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씻지 않고 다녔고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손을 높이 들고 기도했습니다. 헌금을 드릴 때도 다른 사람이 보는 데서 드리기를 좋아했습니다. 봉사나 구제를 할 때도 자기 이름을 나타내기 좋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신앙생활의 전반에 걸쳐서 자기를 드러내려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외식이 들어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아니니아와 삽비라가 잘못된 헌물을 드리려다가 죽임을 당한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행4:34~5:11).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신앙적 열심, 곧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드러내려 것은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②꿀을 넣지 말아야 합니다(11절). 꿀은 다른 식품과 합치면 발효하게 됩니다. 꿀은 사람이 끌리기 쉬운 달콤한 인정과 육욕과 쾌락 등의 상징입니다(잠5;3).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인정에 끌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느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나 혼인 잔치에서 어머니가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고 하면서 하시는 일에 간섭하려 할 때에 "이 여자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하면서 물리쳤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려 할 때 베드로의 말류에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면서 물리쳤습니다. 예수님은 인정에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2:48-50에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세상 것에 가치와 소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9:58-62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도다~"고 했습니다. 그는 오병이어의 이적 후에 무리가 임금 삼으려는 것을 알고 혼자 산으로 기도하러 가신 사건에서도 잘 나타납니다(요6:15).
하나님은 인본주의(人本主義)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이 좋아하는대로 행해서는 안됩니다. 육욕에 좋아보이는대로 행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택하지 말고 인간적으로 좋아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지시대로 순수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단을 쌓을 때 돌을 정으로 조지 말고 자연석 그대로 쌓으라고 했는지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출20:25 ,렘6:16). 그리고 다윗이 법궤(언약궤)를 실로로 옮기고 법궤를 새수레에 싣고 갈 때 왜 웃가가 징계로 죽임을 당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삼하6:1-7).
3. 소제(素祭)의 방법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소제는 곡식을 그리는 방법에 따라 3종류로 나뉩니다. ①고운가루로 드리는 소제입니다(1-3절). 고운 가루 한줌에 기름과 유향을 더하여 드리는 소제가 있습니다. ②불에 익힌 것으로 드리는 소제입니다(4-10절). 무교병(누룩없는 떡)과 무교전병을 화덕에 구워서 드리는 경우가 있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조각을 내어 번철(후라이팬)에 부쳐서 드리는 경우가 있고, 솥에 삶아서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유향을 넣지 않습니다. ③첫 이삭으로 드리는 소제입니다(14절). 첫이 삭을 볶아서 찧은 것을 드리는 소제가 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드리든지 공통점은 곡식을 그대로 드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곡식을 빻거나 불에 익히거나 볶아 찧어서 드려야 했습니다. 이는 오실 그리스도께서 여러 종류의 환난을 당하면서 온전한 제물이 되어주실 것을 예표합니다. 히브리서5:8-9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낳을 때부터 마굿간에서 태어났고, 유년 시절에 애굽에서 피난 생활을 했고 공생에 기간에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유대인들의 방해를 받았고 금식기도 때 사탄의 방해를 받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를 했고 심문을 받으면서 침뱉음과 갈대로 침과 홍포 입힘과 가시관을 씌움을 받았고 마침내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주님께서 그런 고난을 통해 더욱 온전한 제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온전한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인격적 연단이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여러 시련 가운데서 죄가 그쳐지고 부패한 성품이 부서지고 온전한 신앙 인격이 만들어 집니다. 베드로전서1:7에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고, 야고보서1:2-4에도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로마서5:3-4에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야곱의 밧단아람 생활, 요셉의 애굽 생활, 모세의 미디안 생활, 바울의 아라비아 생활은 그들을 더욱 온전케 되는 계기였습니다. 마치 돌이 강 상류에 있던 뾰쪽 뾰쪽한 돌이 강물에 쓸려 내려오면서 부딪히고 깨어져서 강 하류에 내려왔을 때는 둥글 둥글한 조약돌이 된 것 처럼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인격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 원리를 안 욥은 하루 아침에 자녀와 집과 소유를 잃고 몸이 병들고 아내와 친구들이 모욕하는 환난을 당했을 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연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한 것입니다(욥23:10).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오는 일반적인 고난을 하나님 앞에 씌임받을 인격으로 만드어지는 기회로 알고, 원망과 불평과 분노로 통과하지 말고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으로 통과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당하는 고난을 당할 때에 믿음으로 통과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머무르지 말고 적극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믿음까지 소유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하고 사명을 감당하려 하면 당연히 고난이 옵니다. 디모데후서 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고난을 참으로 아름다운 고난입니다(벧전2:19-20). 하나님을 위한 근심이 더욱 온전케 해 나가게 됩니다(고후7:10-11). 바울은 주의 교회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즐거워 했고(골1;24), 환난을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했습니다(행20:22-24). 그것이 주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요 주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주의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빌3:10).
4. 소제물(素祭物)의 처리
①하나님께 드리는 몫이 있습니다. 1,9,16절에 보면 소제물 중 여호와 하나님께 불사르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게 드리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②제사장에게 드리는 몫이 있습니다. 3절에 보면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리라고 했습니다. 번제에서는 가죽을 드리고(7:8), 화목제에서는 요제로 드려지는 가슴과 거제로 드려지는 우편뒷다리(레7:30~)를 드리고, 속죄제와 속건제는 여호와께 불살라지지 않는 부분을 드리라고 했습니다(레6:26~,7:6~). 곧 모든 제물 중에서 하나님께 불살라 드리는 것 외에 물려나오거나 남은 것은 모두 제사장 몫입니다(레6:16-26,민5:9-10).
제사장들과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은 여호와께 기업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운 규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때에 땅을 배분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땅을 분배받으면 일반적인 일 때문에 성전 봉사에 전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일을 하지 않은 대신 성소에서 물려나온 제물과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十一條)를 먹고 살게 했습니다. 신명기18:1에 "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 분깃도 없고 기업도 없을지니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물과 그 기업을 먹을 것이라"라고 했고, 민수기18:21-24에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
그런 원리에 의해 오늘날에 목회자도 성전 봉사에 전무하기 위해 세상 일을 하지 않고 교회에서 나오는 십일조와 헌금을 받아서 생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고린도전서9:9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고 했습니다. 11절에는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 했고, 갈라디아6:6에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고, 디모데전서5:18에는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가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는 일에 대한 논란이 몇가지 있습니다.
①오늘날 목회자가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으면 안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주 이유는 사도 바울은 일을 하면서 자비량으로 사역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알 것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이 잘되겠느냐에 표준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례비를 받지 않고 자비량한 것은 당시에 복음을 전하면서 사례비를 받게 되면 오히려 자신이 전한 복음이 가리워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당시에는 순례전도였기 때문에 성경을 지속적으로 가르치지 못했기에 사역자를 물질로 공궤해야 한다는 관념이 없었고 그로 인하여 방해자들로부터 비방의 빌미를 줄 우려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도하면서 사례비를 받지 않았지만 일정 기간 동안 가르칠 기회가 있는 곳에서는 앞에서 제시한 성구대로 사역자가 물질 공궤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②오늘날 목회자가 세상 일을 하면 절대로 안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성경에서 목회자에게 사례비를 주게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간단히 풀립니다. 기본적으로는 목회자의 생활을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이 잘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사례비를 감당할 수 있는 교회라면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고 세상 일을 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래야 교회 일에 전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례비를 감당할 수 없는 개척교회라면 생활을 위해 일시적 혹은 부분적으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한인 교회들에서는 대부분 사모님들이 직업을 가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런 경우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목회자가 아무리 힘들어도 일을 하지 않아야 교회가 빨리 안정된다는 생각이지만 그런 중심을 모두에게 적용시켜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③오늘날 목회자가 십일조를 모두 사용해야 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목회자가 십일조를 모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모든 헌금을 관리하고 처리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규례도 그렇고 신약에서의 바울도 생활비에 대해서는 자비량했지만 헌금 종용과 관리와 처리의 권한을 가지고 사역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도 하나님의 교회가 잘되겠는지에 표준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도들의 정신입니다. 오늘날에는 건덕을 위해 모든 재정은 믿음이 건실한 집사들에게 맡기고 목회자는 성경연구와 기도와 심방과 상담과 기획 등에 전무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제정 집사들은 제정 처리의 권한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생활비도 제직회에서 정하게 하여 받는 것이 좋습니다(행6:2-4). 금액의 정도도 마음대로 쓸 권리가 있지만 생활할 수 있는 정도만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은 그래야 교회에 덕이 되고 사례비는 생활을 목적으로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④오늘날 성도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십일조를 드리게 한 이유는 첫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위해서입니다(창2:16-17,시24:1). 하나님이 모든 소유를 주신 것을 인정하고 감사하므로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성이 유지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는 성전 봉사자의 생활을 위해서입니다. 성전 봉사자들이 생활에 염려 없이 사역에만 힘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단순히 일상 생활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특별한 기쁨을 사역자들과 함께 나누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성전 봉사자에 대한 감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매년 내는 원 십일조(신28:1-7) 외에 또 다른 십일조(원 십일조와 합치면 십의 이조)를 내게 했는데, 그 십일조는 1-2년째 것은 가족을 위해 사용하고, 3년째 것은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와 극빈자와 나그네를 위해 사용하게 했습니다(신14:22-29). 셋째는 성전 유지를 위해서입니다. 성막과 성전의 유지 관리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 의미를 가졌던 십일조는 신약에 와서 헌금으로 대치되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의미가 이해된다면 율법적인 의미가 아닌 은혜 아래 있는 자는 더욱 열심으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⑤오늘날 성도가 십일조를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이론입니다. 십일조와 헌물은 앞에서 말한대로 3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번째 의미만 생각하면 어느 교회에다 하든 상관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번째와 세번째 의미를 생각한다면 본 교회에 하는 것이 옳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자기가 거주하는 곳의 레위인들에게 드렸고, 신약시대에도 자신이 은혜받고 있는 목회자와 교회에 드렸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의 유지와 목회자의 생활을 생각하면 본교회에 십일조와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꼭 도와야할 교회와 목회자가 있다면 자신은 십일조를 본교회에 하고 본교회 목회자에게 말씀드려서 교회적으로 돕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과 교회에 대한 일체감과 건덕을 위해 좋습니다.
우리가 목회자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서입니다. 목회자를 잘 공궤하는 것은 물질로만이 아니라 기도로 영적인 면을 도와야 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 더울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골로새서 2:16-17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 의식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표상입니다. 소제도 역시 오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드림'(바침)이 될 것인지 알게 해주는 제사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어떻게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합당한 삶인지 생각케 해주는 제사이기도 합니다.
1. 소제(素祭)의 뜻과 의의
소제(素祭)의 원어 '민하'는 '선물' '공물'의 뜻으로서, 기본적으로 어떤 사람이 자기 보다 높은 사람의 호의를 얻기 위해 드리는 예물의 의미로 씌였습니다.(창32:21,43:15,삼하8;12). 그러다 후에 받은 호의나 은혜에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드리는 예물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 의미가 제사에 사용된 것은 소제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드려지기 때문입니다.
번제(燔祭)는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였으나 소제(素祭)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번제가 생명을 중시한다면 소제는 노력에 대한 결실의 헌납을 중시하는 제사입니다. 번제가 우리의 생명을 요구한다면 소제는 우리의 생활을 요구하는 제사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제를 통해 우리의 모든 인격과 생활의 결실을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그리스도를 기초해야 합니다. 소제는 단독적으로 드려지는 제사가 아니고, 대체로 번제나 화목제와 함께 드려지는 제사입니다(출29:40,민15:1-10). 하나님께서는 피흘림없는 제사를 단독적으로 받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소제는 화제(火祭)로 드려야 했는데(2下,9,16) 그 때 쓰는 불도 번제단에서 가져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소제물은 본인이 아닌 제사장이 단위에 올려 놓아야 했습니다. 그런 사실들은 우리가 전인격과 생활의 열매를 드리는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믿음이 기초가 되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의 도움이 있어야 함을 알게 해 줍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그리스도를 중심한 삶이 아니라면 아무리 좋은 것과 많은 것을 드려도 그것은 의미없는 헌물에 불과한 것입니다(고전3:10-15)
2. 소제(素祭)의 재료
①고운가루입니다(1절). 소제에서 드리는 곡식은 알맹이 그대로 드리지 않고 고운 가루가 되도록 빻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떡(진설병)으로 만들어 드려야 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드려질 것을 예표함인데(요6:35,49), 그가 고난 가운데 희생적 순종으로 온전한 제물이 될 것에 대한 예표입니다(마20:28,빌2:7-8). 예수님은 생명뿐아니라 그의 인격과 생활 전부를 하나님께 온전한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것은 고난 가운데 이루어진 제물이었습니다. 그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할 때 오는 고난이었습니다. 우리가 바침이 될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 해야 하고 그 뜻을 순종하려할 때 오는 고난을 믿음으로 통과하므로 연단된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고후4:10~).
②기름입니다(1절). '기름'의 원어 '쉐멘'은 감람나무 열매에서 짜낸 올리브 기름을 말합니다. 이 기름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표징입니다. 고운가루에 이 기름을 넣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구속 사역이 성령에 의해 되어질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탄생부터 성령에 의해 시작하여 모든 사역에 성령의 도움을 받았습니다(사61:1~3,마3;16,막1:10,눅3:21~22).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령에 의해 일을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시인하고 말씀을 깨달은 것은 순전한 성령님의 도움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하나님 앞에 합당한 인격을 만들고 바른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성령님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한 줄 알고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줄 알고 홀로 하려 할 때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모세와 바울이 처음에 실패했던 것과 같습니다. 예배와 교회 봉사와 사정 생활의 전 영역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해야 합니다(요4:24,벧전4:11).
③유향입니다(1절). 유향(乳香)의 원어 '레보나'는 감람나무과에 속하는 유향나무로부터 짜낸 고급향료를 가리키는데, 제물에 이를 첨가하는 이유는 제물이 향기를 풍기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혹자는 이를 요한계시록 5:8(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을 근거하여 '기도'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하나, 그러나 계시록의 향은 피우는 향이고 본문의 향은 음식에 넣는 향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실 구속의 향기, 곧 예수님께서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의지와 계획을 나타내실 것에 대한 표상입니다(엡5:2). 우리는 구원얻을 자들에게나 망할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역할을 해야 합니다(고후2;15). 마리아의 향유부은 사건에서 잘 묘사되듯이(마26:6~13),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신 비밀들을 나타내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을 본받아 예수님을 나타내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의로운 행실입니다(마7:12). 우리의 목적과 목표와 생각과 판단 기준과 행동 방식 생활 양식 등 삶의 전 영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위치요 본분이요 사명인 것입니다.
④소금입니다(13절). 소금은 맛보다는 부패방지를 위해 넣었습니다. 소금은 고대로부터 계약을 체결하고 그 체결한 계약을 확증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계약 당사자들이 소금을 먹음으로서 계약을 지속적으로 변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냈습니다. 그것은 소금이 갖는 불변성(부패를 방지하는)에 대한 상징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에 대해서도 '소금언약'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민18:9,대하13:5). 곧 소금은 불변의 언약에 대한 상징인 것입니다. 소제물에 소금을 치게 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과 맺은 언약이 진실되고 불변할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금을 치는 것은 그 언약에 대한 신뢰감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동시에 그 언약의 내용을 지키겠다는 결단을 나타내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언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약한 그리스도로 인한 구속사적 축복과 성경을 통해 약속하신 모든 종말적 축복을 믿고 소망해야 합니다. 그 약속의 말씀대로 변치않고 주를 위해 살겠다는 결단이 매 예배때 마다 이루어져야 합니다.
※ 주의할 점
11절에서 소제물에 누룩과 꿀은 넣지 말라고 했습니다. 12절에 보면 "처음 익은 것으로는 그것을 여호와께 드릴지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단에 올리지 말지며"라고 했습니다. 누룩과 꿀을 첫소제로는 드리되 일반 소제로는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23:15-17). 첫소제는 처음 익은 열매에 대한 감사제 의미를 가지므로 드릴 수 있으나 향기로운 제물의 의미를 가진 일반 소제에서는 넣지 말라는 것입니다. 첫소제로 드린 경우에는 드릴 수 있으나 그런 경우에도 하나님께 요제(搖祭)로 드린 다음 제사장 몫으로 돌아가게 하고 제단에 화제(火祭)로 불사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23:30). 곧 소제의 기본 정신은 누룩과 꿀을 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①누룩을 넣지 말아야 합니다(11절).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누룩없는 떡'(무교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누룩이 죄와 부패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오실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는 분으로 오실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물에 누룩을 넣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4:15에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했고, 요한일서3:5에도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범죄 뿐 아니라 어떠한 가식이나 외식도 없었습니다.
우리도 죄짓는 생활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묵은 누룩 곧 괴악하고 악독한 죄를 가지고는 우리의 인격과 생활이 온전하게 바쳐질 수 없습니다(고전5:7-8). 또한 외식을 멀리해야 합니다. 누가복음12:1에는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미간에 붙이고 다니기도 했고, 옷술을 길게 하여 거기에 기록하여 다니기도 했습니다. 기도할 때도 금식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씻지 않고 다녔고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손을 높이 들고 기도했습니다. 헌금을 드릴 때도 다른 사람이 보는 데서 드리기를 좋아했습니다. 봉사나 구제를 할 때도 자기 이름을 나타내기 좋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신앙생활의 전반에 걸쳐서 자기를 드러내려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외식이 들어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아니니아와 삽비라가 잘못된 헌물을 드리려다가 죽임을 당한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행4:34~5:11).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신앙적 열심, 곧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드러내려 것은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②꿀을 넣지 말아야 합니다(11절). 꿀은 다른 식품과 합치면 발효하게 됩니다. 꿀은 사람이 끌리기 쉬운 달콤한 인정과 육욕과 쾌락 등의 상징입니다(잠5;3).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인정에 끌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느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나 혼인 잔치에서 어머니가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고 하면서 하시는 일에 간섭하려 할 때에 "이 여자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하면서 물리쳤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려 할 때 베드로의 말류에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면서 물리쳤습니다. 예수님은 인정에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2:48-50에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세상 것에 가치와 소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9:58-62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도다~"고 했습니다. 그는 오병이어의 이적 후에 무리가 임금 삼으려는 것을 알고 혼자 산으로 기도하러 가신 사건에서도 잘 나타납니다(요6:15).
하나님은 인본주의(人本主義)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이 좋아하는대로 행해서는 안됩니다. 육욕에 좋아보이는대로 행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택하지 말고 인간적으로 좋아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지시대로 순수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단을 쌓을 때 돌을 정으로 조지 말고 자연석 그대로 쌓으라고 했는지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출20:25 ,렘6:16). 그리고 다윗이 법궤(언약궤)를 실로로 옮기고 법궤를 새수레에 싣고 갈 때 왜 웃가가 징계로 죽임을 당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삼하6:1-7).
3. 소제(素祭)의 방법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소제는 곡식을 그리는 방법에 따라 3종류로 나뉩니다. ①고운가루로 드리는 소제입니다(1-3절). 고운 가루 한줌에 기름과 유향을 더하여 드리는 소제가 있습니다. ②불에 익힌 것으로 드리는 소제입니다(4-10절). 무교병(누룩없는 떡)과 무교전병을 화덕에 구워서 드리는 경우가 있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조각을 내어 번철(후라이팬)에 부쳐서 드리는 경우가 있고, 솥에 삶아서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유향을 넣지 않습니다. ③첫 이삭으로 드리는 소제입니다(14절). 첫이 삭을 볶아서 찧은 것을 드리는 소제가 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드리든지 공통점은 곡식을 그대로 드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곡식을 빻거나 불에 익히거나 볶아 찧어서 드려야 했습니다. 이는 오실 그리스도께서 여러 종류의 환난을 당하면서 온전한 제물이 되어주실 것을 예표합니다. 히브리서5:8-9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낳을 때부터 마굿간에서 태어났고, 유년 시절에 애굽에서 피난 생활을 했고 공생에 기간에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유대인들의 방해를 받았고 금식기도 때 사탄의 방해를 받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를 했고 심문을 받으면서 침뱉음과 갈대로 침과 홍포 입힘과 가시관을 씌움을 받았고 마침내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주님께서 그런 고난을 통해 더욱 온전한 제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온전한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인격적 연단이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여러 시련 가운데서 죄가 그쳐지고 부패한 성품이 부서지고 온전한 신앙 인격이 만들어 집니다. 베드로전서1:7에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고, 야고보서1:2-4에도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로마서5:3-4에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야곱의 밧단아람 생활, 요셉의 애굽 생활, 모세의 미디안 생활, 바울의 아라비아 생활은 그들을 더욱 온전케 되는 계기였습니다. 마치 돌이 강 상류에 있던 뾰쪽 뾰쪽한 돌이 강물에 쓸려 내려오면서 부딪히고 깨어져서 강 하류에 내려왔을 때는 둥글 둥글한 조약돌이 된 것 처럼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인격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 원리를 안 욥은 하루 아침에 자녀와 집과 소유를 잃고 몸이 병들고 아내와 친구들이 모욕하는 환난을 당했을 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연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한 것입니다(욥23:10).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오는 일반적인 고난을 하나님 앞에 씌임받을 인격으로 만드어지는 기회로 알고, 원망과 불평과 분노로 통과하지 말고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으로 통과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당하는 고난을 당할 때에 믿음으로 통과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머무르지 말고 적극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믿음까지 소유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하고 사명을 감당하려 하면 당연히 고난이 옵니다. 디모데후서 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고난을 참으로 아름다운 고난입니다(벧전2:19-20). 하나님을 위한 근심이 더욱 온전케 해 나가게 됩니다(고후7:10-11). 바울은 주의 교회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즐거워 했고(골1;24), 환난을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했습니다(행20:22-24). 그것이 주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요 주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주의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빌3:10).
4. 소제물(素祭物)의 처리
①하나님께 드리는 몫이 있습니다. 1,9,16절에 보면 소제물 중 여호와 하나님께 불사르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게 드리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②제사장에게 드리는 몫이 있습니다. 3절에 보면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리라고 했습니다. 번제에서는 가죽을 드리고(7:8), 화목제에서는 요제로 드려지는 가슴과 거제로 드려지는 우편뒷다리(레7:30~)를 드리고, 속죄제와 속건제는 여호와께 불살라지지 않는 부분을 드리라고 했습니다(레6:26~,7:6~). 곧 모든 제물 중에서 하나님께 불살라 드리는 것 외에 물려나오거나 남은 것은 모두 제사장 몫입니다(레6:16-26,민5:9-10).
제사장들과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은 여호와께 기업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운 규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때에 땅을 배분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땅을 분배받으면 일반적인 일 때문에 성전 봉사에 전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일을 하지 않은 대신 성소에서 물려나온 제물과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十一條)를 먹고 살게 했습니다. 신명기18:1에 "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 분깃도 없고 기업도 없을지니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물과 그 기업을 먹을 것이라"라고 했고, 민수기18:21-24에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
그런 원리에 의해 오늘날에 목회자도 성전 봉사에 전무하기 위해 세상 일을 하지 않고 교회에서 나오는 십일조와 헌금을 받아서 생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고린도전서9:9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고 했습니다. 11절에는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 했고, 갈라디아6:6에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고, 디모데전서5:18에는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가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는 일에 대한 논란이 몇가지 있습니다.
①오늘날 목회자가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으면 안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주 이유는 사도 바울은 일을 하면서 자비량으로 사역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알 것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이 잘되겠느냐에 표준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례비를 받지 않고 자비량한 것은 당시에 복음을 전하면서 사례비를 받게 되면 오히려 자신이 전한 복음이 가리워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당시에는 순례전도였기 때문에 성경을 지속적으로 가르치지 못했기에 사역자를 물질로 공궤해야 한다는 관념이 없었고 그로 인하여 방해자들로부터 비방의 빌미를 줄 우려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도하면서 사례비를 받지 않았지만 일정 기간 동안 가르칠 기회가 있는 곳에서는 앞에서 제시한 성구대로 사역자가 물질 공궤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②오늘날 목회자가 세상 일을 하면 절대로 안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성경에서 목회자에게 사례비를 주게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간단히 풀립니다. 기본적으로는 목회자의 생활을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이 잘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사례비를 감당할 수 있는 교회라면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고 세상 일을 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래야 교회 일에 전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례비를 감당할 수 없는 개척교회라면 생활을 위해 일시적 혹은 부분적으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한인 교회들에서는 대부분 사모님들이 직업을 가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런 경우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목회자가 아무리 힘들어도 일을 하지 않아야 교회가 빨리 안정된다는 생각이지만 그런 중심을 모두에게 적용시켜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③오늘날 목회자가 십일조를 모두 사용해야 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목회자가 십일조를 모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모든 헌금을 관리하고 처리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규례도 그렇고 신약에서의 바울도 생활비에 대해서는 자비량했지만 헌금 종용과 관리와 처리의 권한을 가지고 사역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도 하나님의 교회가 잘되겠는지에 표준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도들의 정신입니다. 오늘날에는 건덕을 위해 모든 재정은 믿음이 건실한 집사들에게 맡기고 목회자는 성경연구와 기도와 심방과 상담과 기획 등에 전무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제정 집사들은 제정 처리의 권한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생활비도 제직회에서 정하게 하여 받는 것이 좋습니다(행6:2-4). 금액의 정도도 마음대로 쓸 권리가 있지만 생활할 수 있는 정도만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은 그래야 교회에 덕이 되고 사례비는 생활을 목적으로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④오늘날 성도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십일조를 드리게 한 이유는 첫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위해서입니다(창2:16-17,시24:1). 하나님이 모든 소유를 주신 것을 인정하고 감사하므로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성이 유지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는 성전 봉사자의 생활을 위해서입니다. 성전 봉사자들이 생활에 염려 없이 사역에만 힘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단순히 일상 생활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특별한 기쁨을 사역자들과 함께 나누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성전 봉사자에 대한 감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매년 내는 원 십일조(신28:1-7) 외에 또 다른 십일조(원 십일조와 합치면 십의 이조)를 내게 했는데, 그 십일조는 1-2년째 것은 가족을 위해 사용하고, 3년째 것은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와 극빈자와 나그네를 위해 사용하게 했습니다(신14:22-29). 셋째는 성전 유지를 위해서입니다. 성막과 성전의 유지 관리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 의미를 가졌던 십일조는 신약에 와서 헌금으로 대치되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의미가 이해된다면 율법적인 의미가 아닌 은혜 아래 있는 자는 더욱 열심으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⑤오늘날 성도가 십일조를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이론입니다. 십일조와 헌물은 앞에서 말한대로 3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번째 의미만 생각하면 어느 교회에다 하든 상관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번째와 세번째 의미를 생각한다면 본 교회에 하는 것이 옳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자기가 거주하는 곳의 레위인들에게 드렸고, 신약시대에도 자신이 은혜받고 있는 목회자와 교회에 드렸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의 유지와 목회자의 생활을 생각하면 본교회에 십일조와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꼭 도와야할 교회와 목회자가 있다면 자신은 십일조를 본교회에 하고 본교회 목회자에게 말씀드려서 교회적으로 돕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과 교회에 대한 일체감과 건덕을 위해 좋습니다.
우리가 목회자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서입니다. 목회자를 잘 공궤하는 것은 물질로만이 아니라 기도로 영적인 면을 도와야 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 더울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고운 가루
레 2:1-16 / 김선종 교수
소제는 화덕이나 철판이나 냄비로 빵이나 떡이나 부침개나 과자를 만들어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곡식제사이다. 첫 곡식의 이삭을 볶아 드리거나, 갓 찧은 곡식을 드려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제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고운 밀가루와 올리브기름과 유향(향신료)과 소금이 필요하다. 반면에 제물에 넣지 말아야 할 재료에는 꿀과 누룩이 있다.
소제를 드리기 위해 먼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곡식 예물로 고운 가루를 준비하고, 그 위에 기름과 유향을 붓는다. 소제를 드리는 사람은 제물을 아론 자손 제사장들께 가져가고, 제사장은 그 소제물에서 고운 가루 한 줌과 기름과 모든 유향을 집는다. 제사장은 그것을 '기념물'로 제단 위에 불사르고, 소제물의 남은 것은 지극히 거룩한 성물로 아론과 그 자손들의 몫으로 삼아 제사장의 소득이 되게 한다.
소제물의 핵심은 고운 가루에 있다. 들에서 추수한 밀의 거친 낟알을 모아 그대로 제단에 바치면 안 되었다. 낟알이 아니라 고운 가루로 갈고 빻아 바쳐야 한다. 제분기가 없던 시대에 낟알을 부수어 고운 가루를 얻는 것은 고된 일이었다. 소제를 드리는 사람은 낟알을 곧게 빻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부수어지고 깨져야 한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었을 것이다. 고운 가루가 소제의 기본 재료라면 넣어야 하고, 넣지 말아야 하는 물질이 있다. 소제에 들어가는 물질은 올리브기름과 유향과 소금이다. 먼저 기름은 땅에서 난 곡물을 기름지게 하는 물질로,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 대표적으로 임금과 예언자와 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었다.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메시야라고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성별하시는 동시에 그들에게 능력을 주셨다. 기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삼상 10:1)과 기쁨(사 61:3)을 상징한다. 다음으로 제물에 유향을 넣는다. 유향은 제물을 향기 나게 하는 물질로서 성도의 기도를 상징하기도 한다(시 141:2, 계 5:8). 마지막으로 소제에는 반드시 소금을 넣어야 했다. 소금은 다른 물질을 변하지 않게 한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을 소금 언약(민 18:19)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과 소금을 넣어야 한다면, 반대로 넣지 말아야 하는 물질이 있는데 누룩과 꿀이다. 이는 발효 물질인 누룩과 꿀이 다른 물질을 변하도록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물을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은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배경으로 한다. 성경은 누룩과 꿀이 가지고 있는 나쁜 성질에 대해서 비유한다. 예수님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는데(마 16:6, 막 8:16), 여기에서 누룩은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뜻한다. 바울도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고 경고한다. 레위기 2장 2절과 16절에서 제단 위에 태우는 소제물인 '기념물'은 '기억하다'의 어간에서 온 낱말로, 하나님이 소제물을 기억해 주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복음서가 번제를 통하여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부름으로써 예수님의 속죄 사역을 변증한 바 있다(요 1:29).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떡이라고도 말씀하신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 6:35)."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 소제물로 바치셨다고 하는 희생의 삶을 보여준다. 또한 번제와 마찬가지로 소제 역시 '야웨께 향기로운 냄새'라고 레위기 2장 2절과 9절은 말한다.
제물로서의 밀을 거친 낟알로 드리지 않고 고운 가루로 갈고 빻아 드리는 것은 소제를 드리는 사람이 먼저 고운 가루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먼저 자신을 부인하는 자기 부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쉽게 사용하실 수 있도록 고운 가루처럼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사람이 드리는 소제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고운 가루로 만들고 태우는 과정을 기억하신다.
철학자 르네 지라르(R. Girard)는 '폭력과 성스러움'(1972년)에서 종교 행위와 폭력 사이에 있는 경계에 대해 날카롭게 관찰하였다. 짐승을 죽여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번제는 생명 살해라는 피할 수 없는 폭력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폭력성을 대가로 성스러움을 구현하는 무의식의 메커니즘이 제사 안에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다른 한편 구약 제의의 전문가 알프레드 맑스(A. Marx)는 '구약의 소제: 존경의 공물에서 종말론적 식사로'(1994년)에서 소제야말로 번제와 같은 폭력과 생명의 희생을 수반하지 않는, 종말론적 시대의 이상적인 제사라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들이 애써 기르고 경작한 집짐승과 곡식을 하나님께 정성껏 드림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고백하고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있는 연대성을 표현하였다. 그래서 '제물'이라는 종교의 전문용어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음식'이라는 민중의 생활언어로 친근하게 불린다(레 3:11, 16, 21:6, 8, 17, 21, 22, 22:25). 이 표현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다.
김선종 교수/호남신대 구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