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립트의 [키스]
사람이 불순한 생각으로 사는지는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이 그림을 참 좋아 한다
편안하게 남자에게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 화려한 드레스의 여인. 그 화려한 색에 눈의 현람함을 느끼지만 오히려 가슴속에 가득찬 슬픔이라도 쏟아져 내려 올 듯 오히려
한참을 보다가 보면 속이 후련해진다.
그림이 내 대신 다 드러내어 준 대리 만족이라고 할까. 이 그림을 우연히 한장 얻었는데 (물론 복사판) 한달을 넘게 이 그림앞에서 발길이 저절로 멈추어졌다. 나는 구스타프에 대하여 잘은 몰랐었는데 그 길로 서점에 달려가 그의 화보집을 사서 밤을 새워
사전을 찾아가며 해석을 하고 ..적어도 그 사람의 세계는 알아야 내가 이 그림을 더 이해를 하지 않을 까 싶은 마음에서 이다. 구스타프에 대하여 알아보자.
GUSTAV KLIMT
구스타프 크림트는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제국의 수도 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른스트는 보헤미아출신의 동판조각사이자 금세공사였다. 구스타프는 7형제중
장남이었으며, 일가는 모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크림트는 청년기에 이미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극장이나 미술관의 장식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관습적인 주제를
아카데미적 양식으로 그리는 벽화가로 출발했으나 1900-1903년에 그가 그린 비엔나
대학의 벽화가 공개되자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 결국 이 벽화는 거부되고 말았다.
이 벽화에서 그는 인간의 행로에 수반되는 고통과 두려움, 인간의 정신적 방황이 추상적 패턴을 복합시켜 왜곡된 양식으로 표현되었다. 크림트 예술의 큰 특징은 세밀하고
아름다운 장식성과 여성의 이미지 표출이라 하겠다.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민감함은 여성의 초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매력과 신비적인 특질을 강조하는 크림트의 독창성이 돋보인다.
그의 작품들은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베토벤. 후리즈]에서
보여준 것 처럼 선의 리듬을 나타내는 솜씨와 멋진 장식적 표현은 키스처럼 놀라울 정도로 화려한 문양을 낳게 한 재능을 보였다. 크림트는 그가 처한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이기보다는 언제나 개인의 자유와 예술의 자유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항상 여유있고 풍성한 푸른 '수도사'스타일의 스모크를 입고 방랑하는 쪽이 성격에 맞을 정도로 보헤미안다운 기질을 갖고 있었다. 진보적인 예술의식을 갖고있던 크림트는 유럽의 인상파나 상징파의 작품을 접하게 되면서 시야가 넓어짐에 따라 그가
속해 잇던 '빈미술가협회'의 보수적인 체제에 불만을 갖게되어 1897년 친구들과 협회를 탈퇴하여 독자적인 조직을 결성했다. 이 그룹비엔나 제세션(Vienna Secession 분리파)은 예술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가졌고 유럽 여러나라이 움직임을 인식함에 따라
빈의 폐쇄적인 향토주의를 비판했다. 말수가 별로 없던 크림트였지만 분리파의 회장에 선임되어 열정적으로 활동하며 비엔나에서 모더니즘 미술운동의 지도적 위치로 진보적인 미술가들을 이끌게 된다. 이 분리파 전시에서는 아르누보양식이 지배적이었고
분리파 양식은 바로 아르누보를 가리키는 말이 되어 버렸고 이러한 운동은 후에 비엔나에서 기능적 디자인의 효시가 되었다. 1905년 크림트의 탈퇴로 처음과 같은 생명력은 상실되었으나 크림트의 특이한 색채, 공간구성은 그후 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1918)와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와 같은 본격적인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전수되었다
첫댓글 불순한 생각이시라뇨....그런 불순한 생각은 안 하셔도 됩니다 인상파의 작품은 우리같은 사람이 이해 하기 어려운데 요것도 그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