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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스크랩 김민기
isunamana 추천 0 조회 28 15.01.28 16: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김민기











김민기는 1951년 전북 이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이미 그의 부친은 인민군에 의해 피살되어 그는 유복자로 태어난 것이다. 그는 서너 살 때부터 어머니와 형과 누나들이 각기 직장과 학교로 나간 후 늘 혼자 집을 지켜야 했는데, 텅 빈 집에서 하루 종일 혼자 지내야 하는 어린 그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작대기를 가지고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글자를 배우기 훨씬 이전부터 그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스스로 대화를 나누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1966년 초.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던 셋째 누나가 그를 음악의 세계로 이끈 최초의 스승이었다. 그는 피아노 밑에서 누나의 연주를 듣다가 잠이 들곤 했는데 그의 음악적 감각은 거기서 크게 자랐다. 고등학교 입학 기념 선물로 셋째 누나가 사준 클래식 기타가 그가 최초로 소유한 악기였다. 그는 혼자서 누나의 피아노 악보를 이용해 기타를 익혀나갔고, 얼마 안 가서 학교 내의 소문난 기타 연주자가 되어 있었다. 누나가 선물한 기타는 그 후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뒤바꾸어 놓은 계기가 된 셈이었다.
1969년 서울대 미대에 진학했을 때에도 중.고교 시절 내내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렸던 그는 더욱 그림에 몰입했는데, 1학년 때 이미 개인전을 열만큼 왕성한 창작의욕을 보였다고 한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림물감 값을 조달하던 그에게 고교시절 친구(김영세)가 찾아와 노래를 함께 하자는 제안을 했다. 고교 시절에 이미 소문난 기타 연주자였던 그는 그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여 다방에서 듀엣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란 이름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러던 중 1970년 어느 날 고교 동창생인 임문일의 소개로 양희은과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집안 사정으로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던 양희은이 가수활동을 시작하면서 그는 양희은의 노래를 반주해 주며 1971년 1집 [아하 누가 그렇게/길 : 김민기 노래모음] 출반을 시작으로 가수 겸 작곡가의 삶을 시작한다

1970년 양희은의 데뷔작으로 발표된 '아침이슬'을 비롯하여 그녀가 부른 많은 노래들이 이때 만들어졌는데, 이 노래는 발표 당시 '한국가요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높여놓은 곡'이라는 평가를 받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아침이슬'은 1974년 공윤에 의해 금지곡이 되어 방송을 통해서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1971년 그때 통기타 가수들의 성지였던 YMCA 청개구리 홀의 후원자인 경음악 평론가 최경식씨의 주선으로 김민기는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독집 음반을 출반했다. 그러나 이 음반은 발매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압수 조치를 당했다.1972년 봄 서울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대되어 노래를 불렀다('우리 승리하리라'(Pete Seeger의 'We Shall Overcome'의 번안곡), '해방가', '꽃 피우는 아이' 등 3곡)는 이유에서 그는 동대문서로 연행됐고, 시중에 유통 중이던 그의 앨범은 전량 수거 압수되었으며, 그의 노래 '꽃 피우는 아이'가 그의 노래 중 처음으로 방송금지 되었다. 이것이 그가 그 후 수도 없이 되풀이하게 되는 연행 행로의 시작이었다.

그가 가수 및 작곡가로서 조금씩 알려지고 있던 1971년 무렵 김지하 등을 중심으로 유수한 詩人, 학자, 화가, 음악인, 영화인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한국문화의 방향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모임을 가져오고 있던 'Pontra'(Poem on Trash : '잿더미위에 시를'이란 뜻)를 통해 詩人 김지하를 만나게 된다. 이 모임에 참여하게 되면서 그는 서울의 빈민촌에서 야학을 열고, 인천 도시산업 선교회 활동에도 참가하며, 노동자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어 공연하기도 하고, 가톨릭 문화운동과 국악 대중화 운동, 마당극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1973년 무렵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詩人을 중심으로 가톨릭권의 문화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 일환으로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를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하였다.

1974년 10월 군에 입대한 그가 처음 배치 받은 곳은 카추샤 중의 카추샤로 불리는 AFKN 방송국이었다. 그가 비교적 편한 군대생활을 보내고 있던 1975년 전국은 소위 유신 찬반 국민투표 문제로 온통 들끓고 있었다. 가톨릭 권을 중심으로 국민투표 보이콧 운동이 맹렬히 전개되었고, 투표 당일에 명동성당에서 하루 종일 투표를 반대하는 집회와 공연을 벌이려는 계획이 세워졌다. 이 모임의 계획에서 김민기의 노래들이 주 레퍼토리로 채택되었다. 소위 '운동권 가요'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무산되었지만 이 일로 김민기는 영문도 모른 채 보안부대로 소환되었고, 곧 이어 최전방으로 재배치되었다. 전방으로 배치되어 갔을 때 그를 기다린 것은 2월 혹한 속의 차디찬 사단 영창이었다. 내복도 못 입은 채 15일간의 독방 영창생활을 마친 후 그 곳에서 그는 나머지 군대생활을 보냈다.

한 음악평론가는 "1970년대는 김민기의 '아침이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했지만 정작 김민기 자신에겐 암울한 시기였다. 1975년 최전방에서의 혹독한 군대생활을 마치고 제대했을 때 그는 '위험인물'로 단단히 낙인찍혀 있었고, 모든 공식적인 활동에 제약을 받아야 했다. 대학가에서는 여전히 그의 노래들이 애창되고 있었지만 그를 인기가수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학가에서 불리는 노래 가운데에는 그의 노래 외에 작자 미상의 구전가요들도 상당히 많았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들도 김민기의 노래일 것이라고 지레 단정 짓곤 했다. 그는 본의 아니게 대단한 투사로 인식되고 있었다.

제대한 지 얼마 후에 겨우 부평 부근의 공장에 취업할 수 있었던 그는 공장에서 노동자들을 모아 새벽마다 공부를 가르쳤다. 소위 말하는 '의식화 교육'과는 무관하게 노동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이었다. 거의 매일 계속되는 야근 때문에 밤에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夜學이 아닌 早學인 셈이었다. 이 때 그와 함께 생활한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을 위해 그는 '상록수'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러주기도 했다. 공장에 다니던 중에 그는 당시 서울 미대 학장의 배려로 대학 졸업장을 받게 된다. 중등교사 자격증도 함께였다. 대학에 입학한 지 9년만의 졸업이었다. 더 이상의 공장 근무가 곤란해지자 그는 퇴사했다. 그 후 한동안 그는 노동자들과 함께 기숙하며 노무자 생활을 하면서 '교대', '야근', '음모'와 같은 노래들을 만들고, 소리굿 '아구'의 극본도 썼다.
1978년 군대시절 만든 '늙은 군인의 노래', '식구 생각' 등과 제대 후에 만든 '밤배놀이', '상록수' 등으로 음반 제작을 시도한다. 노래는 양희은이 부르고 곡은 그가 썼으나 그의 이름으로는 공윤의 심의를 통과할 수 없었으므로 남의 이름을 빌려 썼다. 그러나 그렇게 낸 음반마저 얼마 안가 일부 삭제되고 다시 판금되었다. 말썽이 된 것은 '늙은 군인의 노래'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더 이상의 합법적인 음악활동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김민기는 새로운 작업에 착수한다. 1970년대 대표적인 노조 탄압 사례의 하나인 동일방직 사건을 소재로 하여 노래 굿이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카세트 테이프에 담아낸 것이었다. 한국교회 사회선교 협의회의 후원으로 제작된 이 테이프에 김민기는 자신의 이름 석 字를 비로소 떳떳이 밝힐 수 있었다. '공장의 불빛'은 나오자마자 커다란 화제가 되었고, 그는 당연히 연행되어 조사를 받아야 했다.
1979년의 초봄 무렵 김민기는 경찰이 겹겹이 둘러싼 공연장에서 '공장의 불빛'을 공연했다. ?공장의 불빛?은 그가 시쳇말로 '빵에 갈 각오'를 하고 만든 것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구속되지 않고 곧 풀려나왔다. 조사를 마치고 나온 그는 이제 더욱 더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고 있었고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다. 몇 차례 공연과 관련하여 기관에 연행,조사, 석방 등을 되풀이하다가 전북 익산으로 낙향하여 어느 집에서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 머슴살이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를 고용한 주인은 정기적으로 그에 관해 경찰에 보고를 해야 했다. 그러다가 1979년 10.26이 터진 후 그는 김제로 옮겨 소작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980년 봄에 대학시절 야학 후배 강학들이 찾아와 여성 해고 노동자들에게 보모교육을 시켜 유아원을 설립할 기금 마련을 위한 자선공연의 기획을 맡게 된다. 프로그램에 그의 이름은 한 줄도 비치지 않았지만 소문을 듣고 문화체육관에 몰려든 젊은이들이 그에게 열광적인 박수를 쏟았다. 그는 마지막 공연에서 계속되는 앵콜 요청으로 다섯 곡이나 더 불러야 했다. 이 공연에서 마련된 자금으로 '해송 아기둥지'라는 이름의 유아원이 설립되었다.

1980년 봄 광주지역 대학출신의 문화패들이 극단 ?광대?를 조직하여 창립공연으로 마당극 ?돼지풀이?를 공연했다. 이 창립무대에서 소설가 황석영이 축사를 했고, 김민기가 기획, 양희은 등이 찬조 출연하여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김제에 자리를 잡고 농사를 짓는 동안 그의 집에는 전라도 지역의 문화패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문화예술인들이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모내기철이나 추수 때면 각지의 친구, 후배들이 모여들어 일을 도와주었고 그의 집은 마치 장터처럼 떠들썩하기 마련이었다. 이때 김제 전주지방의 젊은 연극패들이 자주 그를 찾아왔었는데 그는 이들을 규합하여 근대사 세미나를 겸한 마당극 '1876년에서 1984년까지'를 창작했고, 1981년 전주에서 소규모 워크숍 형식으로 공연을 가졌다.

1981년 김민기는 전곡으로 옮겨 작은 아버지와 함께 소작을 시작했다. 그때 그는 영농자금 마련을 위해 겨울 내내 해태 양식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1983년 겨울 그가 살고 있던 집에 화재가 나 가재도구와 가지고 있던 책까지도 몽땅 불타 버리는 액운을 만난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이 새로 집을 지어줄 테니 계속 머물러 달라고 했고, 그 자신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때 미국에 유학중이던 김석만이 돌아왔다. 김민기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그는 돌아오자마자 김민기를 만나 함께 일할 것을 종용했다. 마침내 김민기는 농촌생활을 일단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김석만, 오종우 등과 함께 사무실을 내고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계약금을 받아 시작한 이 기획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뮤지컬의 창작자체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던 데다 내용상 아무런 하자가 있을 수 없었던 작품임에도 그것이 김민기의 작품이라는 이유 때문에 공윤 심의를 위한 접수가 거부되어 심의를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 때문이었다. 레코드사로부터 받아낸 계약금만 고스란히 빚으로 떠넘겨진 결과가 되고 말았다. 아직까지도 그의 이름으로 레코드를 낸다는 것은 그 내용을 불문하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새로운 각오로 추진한 모처럼의 시도는 또 한 번의 좌절을 겪어야 했지만 그 작업을 계기로 한 여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뮤지컬 출반계획을 추진하던 사무실에 상근하며 그의 작업을 도왔던 이미영씨였다.
1985년 8월 31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서른 다섯의 노총각 김민기는 결혼식을 올렸다. 쏟아지는 비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이 열렸던 서울 미술관에는 수많은 하객들이 모여 그들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그들은 불광동의 두 칸짜리 전세방에서 새살림을 시작했고, 김민기 그는 결혼 이후 1970년대의 '신화적 인물'이라는 배역을 거부하고 조용한 '생활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83년 연극 ?멈춰 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의 극본, 연출을 맡았고, 1991년에는 '겨레의 노래'를 총감독했다. 현재 소극장 학전과 극단 '학전'의 대표로 있으며, 1991년부터 락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연출과 기획을 했고, 이것으로 2007년 독일 바이마르 괴테 메달을 수상했다.


* KBS1 TV '단박 인터뷰'
김영선 : "반갑습니다. KBS '단박 인터뷰' 김영선 PD라고 합니다. 너무 쑥스러워하세요. 제가 다 쑥스럽습니다."
김민기 : "원래 좀 그래요."

김영선 :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김민기 : "뭐, 일이 많죠."

김영선 : "그래도 대표께서 만드신 노래들이 참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상징이었지 않습니까. '아침이슬' 같은 노래들은요. 근데 만드신 본인은 직접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김민기 : "작게 말을 했는데 그렇게 굉장히 크게 울렸을 때 굉장히 당혹스럽죠. 그리고 너무 과분하고 과중한 짐이었던 것 같아요. '아침이슬' 같은 노래는 저한테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크게 이렇게 되니까 그건 책임지기가 버겁죠."

김영선 : "남들이 보기에 굉장히 의지와 사회적인 의식을 가지고 만든 노래처럼 알려져 있잖아요."
김민기 : "그냥 보이는 것을 일기 쓰듯이 이렇게 기록했던 것이지. 그게 무슨 어떤 의지를 가지고 주장을 펼치거나 뭐 그랬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김영선 : "그런데 '지하철 1호선'도 그렇고 사회적인 어떤 메시지를 담고 이런 것들이잖아요."
김민기 : "그건 메시지가 아니라 지금 사회를 그린 것이니까 기록이겠죠. 예전에 노래 만들고 그럴 때 그런 오해를 받았던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공이 있으면 빛을 받으면 절반은 어차피 그늘일 수밖에 없는데 다들 밝은 쪽만 얘기를 하니까 이쪽은 왜 얘기를 안 하느냐 이쪽이 보이잖아요. 그래서 이쪽을 얘기한 것뿐인데 그럼 전체를 평형감각으로 봐주면 될 텐데 이쪽을 얘기하는 것이 마치 무슨 사회를 선동하려고 한다거나 그런 것으로 오해를 받았던 것 같아요."

김영선 :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원작자인 Volker Ludwig가 시상식에서 김민기씨를 가리켜 "그는 자신의 노래로 이득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대의 양심이 되었고 목소리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는데요, '시대의 양심과 목소리'라는 표현이 마음에 드세요?
김민기 : "부담스러워요. 그렇지 않거든요, 제가..."

김영선 : "제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예요. 선생님께 직접 청해 듣고 싶지만 경악하실 것 같아서..."
김민기 : "혈액형이 바뀌기 전에는 못할 거예요."

* Volker Ludwig (뮤지컬 'Line 1-das Musical'(지하철 1호선)의 원작자)
자신과 비슷한 영혼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드물고 대단한 체험이다. 나는 김민기와 같은 천재가 내 영혼을 받아준 데 대해 너무 행복하고 고맙기 그지없다. 그를 벗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은 더더욱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71[초반:친구/길]-A01. 친구


1971[초반:친구/길]-A04. 저 부는 바람


1971[초반:친구/길]-A05. 꽃 피우는 아이





VA-1992[하나옴니버스 2집]-B04. 김민기 - 봉우리





1993[김민기 1]-A03. 두리번거린다





1993[김민기 2]-A02.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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