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집에 도착하면 엄마와의 포옹을 예상하는 아이는 그런 기대에 차서 엄마를 보기도 전에 이미 팔을 움직이기까지 한다. 이를 심리학적 용어로 '점화(priming)'라고 한다. 점화는 뇌가 특정한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준비되는 과정을 말한다. 즉, 점화는 기억에 저장된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priming의 사전적 의미는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수도 펌프에 넣는 마중물이라는 뜻인데, 이를 우리의 뇌와 기억에 은유적으로 적용한 개념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네덜란드 경영대학원 첸보중(Chen Bo Zhong)교수는 'w_h', 'sh_er', 's_p'라는 모호한 단어 조각들과 관련된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최근 겪었던 창피한 행동을 떠올리라는 부탁을 받은 사람들은 이 조각 단어들을 wash(씻다)와 shower(샤워)와 soap(비누)로 완성할 가능성이 높은 반면, wish(바라다)와 shaker(셰이커)와 soup(수프)로 볼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동료 몰래 그의 험담을 하는 자신을 생각만 했는데도 마트에서 배터리나 주스, 아이스크림보다는 비누나 소독약, 세제를 구매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는 2006년 9월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한 「죄를 씻기: 위협받은 도덕성과 물리적 세척(Washing Away Your Sins: Threatened Morality and Physical Cleansing)」이라는 논문에서 이런 점화 효과에 '맥베스 부인 효과(Lady Macbeth effect)'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신의 영혼이 더럽혀졌다는 느낌은 자신의 몸을 씻고 싶다는 욕구를 유발한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맥베스 부인 효과'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맥베스』에서 맥베스 부인이 남편과 공모해 국왕을 살해한 뒤 손을 씻으며 "사라져라. 저주받은 핏자국이여"라고 중얼거린 데서 유래된 작명이다. 그녀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지 않았지만 손을 씻으면 죄의식도 씻겨 내려간다고 여겼으리라. '맥베스 부인 효과'는 '맥베스 효과'라고도 하는데, 마음이 윤리와 같은 추상적 개념을 이해할 때 몸의 도움을 받는 증거, 즉 "몸으로 생각한다"는 '신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의 증거로 여겨지고 있다.
어떤 거래에 대해 협상할 때 부드럽고 푹신한 의자보다는 딱딱하고 튼튼한 의자에 앉는 게 낫다거나, 상거래를 할 때 상대에게 차가운 음료보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게 하면 따뜻한 느낌을 갖게 되어 계약을 성사시킬 확률이 높아진다거나, 입사 면접 시 무거운 물건을 들고 있는 지원자가 더 신뢰할 만한 인물로 보이기 때문에 무게감 있고 단단한 손가방에 이력서를 넣어가는 게 좋다거나, 이성과 데이트를 할 때에 촉감이 거친 물건을 치우고 식탁을 부드럽게 꾸며야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 등은 모두 신체화된 인지 이론을 활용하는 사례다.
종교 혹은 신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인류학자 라이어넬 타이거(Lionel Tiger)와 생의학자 마이클 맥과이어(Michael McGuire)는 부모들이 아이가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가르치기 위해 신의 존재를 들먹이는 것은 '맥베스 효과'를 유발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자신의 도덕적 순결에 위협을 느끼거나 도덕성을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몸을 깨끗이 하려하고(손을 자주 씻는 행위 등) 몸을 씻음으로써 자신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치료한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걱정과 공포가 어린 시절의 가르침과 결합되면, 사람은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믿음과 의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심리학자 캐슬린 보(Kathleen Vohs)는 점화 현상을 광범위하게 연구한 결과, 사람들에게 돈에 관한 글을 읽게 하거나 자리에 앉아 여러 종류의 통화가 그려진 포스터를 보게 하는 등 돈과 관련된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그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할 확률을 높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닐 매크래(Neil Macrae) 등의 실험에선 F1 자동차 경주의 세계 챔피언인 마이클 슈마허(Michael Schumacher)에 대한 생각을 떠올린 실험 참여자들의 말하는 속도가 더 빨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리학자 마거릿 쉬(Margaret Shih), 토드 피틴스키(Todd Pittinksky), 날리니 암바디(Nalini Ambady) 등은 동양인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수학 시험을 치르게 하면서 한 집단은 '동양인'이라는 정체성으로, 다른 집단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 사전 자극했다. 이 실험에서 전자의 점수는 매우 높게 나온 반면 후자의 점수는 낮게 나왔다. 동양인에 대한 고정관념은 수학을 잘한다는 것이고,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은 수학을 잘 못한다는 것인바, 이 고정관념이 사전 자극되어 시험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 게임 실험에서도 실험 참가자들에게 게임의 이름을 '커뮤니티 게임'이라고 했을 때와 '월스트리트 게임'이라고 했을 때 게임 결과는 확연히 다른 차이를 보였다. '커뮤니티 게임'이라는 말을 듣고 게임에 임한 사람들은 '월스트리트 게임'에 참여한 학생들보다 게임 상대방에게 훨씬 협조적인 모습을 나타냈고 최종적으로 얻는 보상의 크기도 컸다. 이는 '커뮤니티 게임'이라는 말이 협동을 필요로 하는 공동체를 떠올리게 한 반면, '월스트리트 게임'이란 말은 처절한 경쟁을 기반으로 하는 약육강식(弱肉食)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점화 효과를 이용한 창의성 자극 실험도 있다. 독일 브레멘 국제대학의 심리학자 옌스 푀르스터(Jens Förster)는 실험 참가자들을 둘로 나누어 한쪽에는 자유와 일탈의 상징인 펑크족을 떠올리게 하고 한쪽에는 보수적이고 논리적인 엔지니어의 이미지를 제시했다. 이후 두 집단을 대상으로 창의력 테스트를 실시한 결과, 펑크족 이미지를 떠올렸던 사람들이 엔지니어를 떠올렸던 사람들보다 훨씬 높은 창의력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점화 효과는 무의식적으로 갖게 된 생각들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극하면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점화를 받은 사람들은 이를 전혀 알지 못하거니와 이에 대해 물어보아도 완강히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 코넬대학 마케팅 교수 브라이언 완싱크(Brian Wansink)는 "진짜 위험은 우리 모두 환경적인 암시에 영향을 받기에는 자신이 너무 똑똑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고 말한다.
이치가 이렇다면 점화 효과는 인간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독일 심리학자 폴커 키츠(Volker Kitz)와 마누엘 투쉬(Manuel Tusch)는 점화 효과를 이용해 평소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나는 직장 동료와의 관계를 개선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출근하기 전 '편안하다, 유쾌하다, 재미있다, 예의바르다……' 등의 단어들을 되뇌인 다음 직장 동료를 만나는 것이다. 그러면 그를 대할 때의 태도가 조금은 긍정적으로 바뀐 자신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만약에 회사의 대표와 중요한 면담을 앞두고 있고 그 사람이 여자라면 미인을 상대한다고 생각하라.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긍정적 단어들을 많이 말하며 점화를 시켜라. 그러면 그녀가 긍정적으로 상대해 줄 것이다."
뭐 썩 와 닿진 않지만, 실패한다 해도 손해 볼 일은 없으니 일단 시도를 해보는 것도 좋겠다. 우리의 무궁무진한 잠재 기억에서 점화되어 좋은 것들만 골라내 우리의 삶을 유쾌하고 풍요롭게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을 망설이랴. 태교(胎敎)를 하는 임산부의 심정처럼 가급적 좋은 생각만 하면서 사는 것을 일상화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