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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제 / 화목을 누리는 교제
레 3:1-17
1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제물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2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3 그는 또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4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5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의 번제물 위에서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6 만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는 화목제의 제물이 양이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드릴지며
7 만일 그의 예물로 드리는 것이 어린 양이면 그것을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8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9 그는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그 기름 곧 미골에서 벤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10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11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음식이니라
12 만일 그의 예물이 염소면 그것을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13 그것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14 그는 그 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15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16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17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레 3:1-17 / [화목제는 이렇게 드려라] 소를 화목제물로 바치려 할 때에는 수컷이든 암컷이든 아무런 흠이 없는 것으로 골라 바쳐야 한다. 2)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먼저 그 소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나서 만남의 장막 문간에서 그 소를 잡아라. 아론의 피를 물려받은 제사장들은 번제단 사방에 그 소의 죄를 뿌려라. 3) 평화를 기원하는 화목제사에서 여호와께 불살라 바칠 부분은 다음과 같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잡은 제물 가운데에서 내장을 덮고 있는 기름 덩어리와 거기에 붙어 있는 기름 덩어리와 4) 허리 양쪽에 붙어 있는 두 콩팥과 거기에 붙어 있는 기름 덩어리와 간을 감싸고 있는 꺼풀을 떼어 내야 한다. 5) 제사장인 아론의 자손들은 그것을 받아서 번제단 장작불 위에 가지런히 펼쳐 놓은 제물과 함께 올려놓고 불살라라. 이렇게 모조리 불살라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 나게 하여 여호와를 흐뭇하게 해드려라. 6) 화목제로 드릴 제물이 양이나 염소일 경우에는 암컷이든 수컷이든 아무런 흠이 없는 것을 골라 바쳐야 한다. 7) 양을 여호와께 바칠 경우 바치는 사람이 끌고 와 8) 그 머리 위에 손을 얹은 후 만남의 장막 앞에서 잡아라. 제사장인 아론의 자손들은 그 양의 피를 번제단 사방에 뿌려라. 9) 그 사이에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양을 부분별로 나누어 놓으면 제사장은 이것을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불살라 바쳐야 한다. 기름 덩어리는 따로 떼어놓아야 한다. 엉덩이뼈 부근에서 뽑아 낸 고리와 내장을 덮고 있는 기름 덩어리와 거기에 붙어 있는 기름덩어리와 10) 허리에 붙어 있는 두 콩팥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기름 덩어리와 간을 감싸고 있는 꺼풀을 떼어 놓아라. 11) 그러면 제사장은 그것을 받아다가 번제단 위에서 올려놓고 모조리 여호와께 불살라 바쳐라. 12) 염소를 화목제물로 바칠 경우에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염소를 여호와 앞으로 끌고 와 13) 그 머리 위에 손을 얹은 다음 만남의 장막 앞에서 잡아라. 제사장인 아론의 자손은 그 염소의 피를 번제단 사방에 뿌려라. 14) 그런 다음 제사장은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떼어놓은 부분을 불살라 여호와께 바쳐라.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염소의 내장을 덮고 있는 기름 덩어리와 거기에 붙어 있는 기름 덩어리와 15) 허리에 붙어 있는 두 콩팥과 그것을 뒤덮고 있는 기름 덩어리와 간을 감싸고 있는 꺼풀을 떼어놓아야 한다. 16) 그러면 제사장은 그것을 받아다가 번제단 위에 올려 놓고 모조리 불살라야 한다. 이렇게 제물을 번제단 위에서 불살라 향기로운 냄새를 풍겨 여호와를 흐뭇하게 해드려라. 기름 덩어리는 모두 다 여호와의 차지이다. 17) 그러니 너희는 기름 덩어리와 피는 먹지 말아라. 이 규정은 너희가 어디에서 살든지 대대로 꼭 지켜야한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 곧 평화를 위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히브리어로 '쉘렘'입니다. 이 단어는 살롬(평화)에서 파생된 단어로 '하나님과 사람의 완전한 관계' 더 나아가 '평화로운 관계를 얻고자 드리는 희생제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제물을 예물로 드리되(1-5) 소, 양이나 염소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1, 6, 12). 위에서 언급한 대로 화목의 의미는 '화해'입니다. 곧 화해의 제사라는 뜻입니다. 번제 등 다른 제사는 예물을 다 태워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화목제는 주요 부분만 태워서 바치고 나머지는 나누어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즉 고기를 먹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과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초막절(추수감사절)과 초실절(맥추감사절)에는 이런 자세와 모습으로 화목제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신 26:1-11). 이런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을 깨달은 성도라면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고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는 화목제의 삶을 날마다 살아야 합니다.(참고 말 1:8)
화목제의 특징(6-17) 첫째는 피가 있는 제사로 화목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 보혈의 예표입니다. 둘째는 죄 사함 후에 오는 감격과 감사입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의 순서는 통상 번제, 소제 그리고 화목제입니다. 번제는 구원(대속)을 위한 것이고 소제는 구원해 주신 것에 감사해서 헌신하는 것이고 화목제는 하나님께 헌신한 후에 감사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세 번째로 화목제는 짐승의 가장 내적인 부분을 드리는 것입니다. 동물의 육체 안 깊숙이 있는 기름, 콩팥, 간을 드리는 것입니다(4, 10, 15). 이는 우리가 예배드릴 때 몸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깊은 부분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화목제는 육신의 양식을 넘어 영적 양식인 신령한 기쁨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잠시 있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참된 기쁨이요, 영원한 기쁨입니다. 따라서 신명기 27장 7절에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화목제의 기쁨은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요, 하늘에서 오는 기쁨입니다.(참고 요 1:29; 벧전 1:19)
적용: 자원하는 마음이 아니라 마지못해 드리는 예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화목 제물로 삼으셨습니다(롬 3:25; 요일 2:2). 날마다 화목제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십시오. 그 교제를 통하여 오는 기쁨과 축복을 부모님과 자녀 그리고 이웃에게 나누어 줍시다.
김해 삼계동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강현준 약사는 19년 전 당한 불의의 사고로 인해 하반신 마비가 됐습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그는 하루아침에 못 걷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좌절하기보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고민하던 중 활동량이 적으면서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직업으로 '약사'를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약사가 되기까지 물리적인 상황과 신체적인 불편함이 있음에도 좌절하지 않고 매 순간 노력하며 삶을 그려온 약국을 운영하며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타인의 시선이나 편견을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남이 어떤 부정적인 말을 하든 상처받지 않고 그러려니 하고 살면서 넘겨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 설 교 >
화목제
레위기 3장 / 이경훈 목사
우리는 지난 4주 동안 번제와 소제에 대하여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5대제사중에 세 번째 제사인 화목제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화목제는 감사와 서원 그리고 자원의 예물로 하나님께 드렸으며 제주는 하나님과 화목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화목을 위하여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화목제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 그리고 이웃과의 화목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차별이 없어야 화목할 수 있습니다(1절).
화목제의 제물은 다른 제물과 달리 암컷이나 수컷의 차별이 없습니다. 다른 제사는 수컷으로 드려야 했는데 화목제는 암컷이나 수컷 상관없이 드렸습니다.
화목제의 제물이 차별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화목하시는데 차별이 없으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인종의 차별을 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노아가 홍수 후에 포도주를 먹고 취하여 벗고 누워있을 때에 노아의 아들인 가나안의 아비 함이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노아가 술에서 깨어난 후에 그 사실을 알고 함을 저주한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해석하면서 노아의 세 아들은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의 조상이며 이 셋 중에 함이 흑인종의 조상이기 때문에 흑인들은 저주를 받은 것처럼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해석은 올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어디서도 인종적인 차별을 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13장에 보면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 이름이 나옵니다. 그 이름 가운데 니게르라하는 시므온이 있는데 그 사람이 흑인이었습니다. 또 빌립이 성령에 충만하여 복음을 증거하다가 에디오피아 영왕의 재무장관에게 복음을 증거했는데 그 사람 역시 흑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국가의 차별을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히브리민족을 세우신 것은 그 민족만을 사랑하셔서가 아닙니다. 그 민족을 통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독선적인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서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자신들만 신앙생활 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하나님은 오순절 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받은 자들을 통하여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증거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화목에 있어서 남녀의 차별을 하시지 않습니다. 수컷만 드렸던 다른 제사와는 달리 화목제에 있어서는 암컷이나 수컷을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갈3:28에서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빈부귀천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부요한자라고 은혜를 더 주시고 가난한 자라고 덜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은 사람을 차별하지 몰라도 주님은 언제나 육신적이고 인간적인 것들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주님이 이렇게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들도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화목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루려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따지며 차별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차별은 화목을 깹니다. 이번 동계 올림픽에서 우리는 호주 주심에게 미국인들보다 차별을 당했습니다. 차별을 당한 우리의 마음 속에는 미국에 대한 적대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결국 차별이 인류 화합의 장인 올림픽 정신을 깨버린 것입니다.
2. 감정과 생각이 죽어야 화목할 수 있습니다(3-4절).
화목제를 드릴 때 반드시 불살라서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내장과 콩팥과 간과 기름입니다. 유대인들은 콩팥을 영혼의 좌소로 봤습니다. 콩팥 안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콩팥과 내장과 간에 인간의 감정과 생각이 들어 있다고 봤습니다.
주로 여성들은 감정적입니다. 물건 하나를 골라도 그것이 어떤 면에서 유용한가를 따지기 보다 육체의 감각을 자극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맺어나가는데도 상대의 됨됨이를 따지기 전에 자신에게 어떤 느낌인가를 따집니다. 나와 관계가 불편한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지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지식을 따르기 보다 자신의 감정을 따릅니다. 물론 모든 여성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또 남자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콩팥을 불살라 드리는 것은 나의 감정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 앞에 굴복하고 그분의 능력으로 처리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감정을 여과 없이 표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습니까? 절대 누구하고도 화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지식을 따르지 않고 감정을 따른다면 하나님과도 불화 하게 될 것이 뻔한 일입니다.
여성들이 감정적이기 때문에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잘못된 자신의 감정을 따라가는 오류를 범하기 쉽지만 반면에 하나님의 감동은 잘 받습니다. 그래서 남자보다 은혜도 더 잘 받습니다.
여성이 감정적이라면 남성들은 의지와 지성 쪽에 더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이 자신에게 있어도 내 생각으로 그것을 판단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유익이 되거나 아니면 정당하다고 판단되어지는 경우에만 움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의 판단으로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의 상식에 어긋나고 내가 가진 고정관념과 다른 것을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쉽게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여자들이 내 감정이 죽어져야 하는 것처럼 남성들에게는 내 생각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과 감정이 죽어지는 것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사람과의 화목을 위해서도 반드시 내 생각과 감정이 죽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 드릴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화목할 수 있습니다(3-4절).
화목제가 끝나면 남은 고기는 제주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식사를 하며 소비합니다. 공동식사를 하는 것이 화목을 이루는 방법이지만 반드시 화목제를 드릴 때 하나님께 드릴 것을 구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콩팥과 내장과 간 등이 하나님 앞에 구별하여 드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을 다른 대상에게 돌리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예를 들어서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데 그것을 다른 대상에게 돌리면 그것이 우상숭배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앞에 돌려야 할 주일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사람과의 화목을 위하여 사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구약의 백성들이 다른 사람들과 화목제 공동의 식사를 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돌려야 할 콩팥과 내장과 간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돌려야 할 십일조를 자신의 마음대로 사용하기도합니다. 사용 용도가 선하고 좋은 일인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선하고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하나님 앞에 구별되게 받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별되게 하나님 앞에 돌려드려야 합니다. 구별되게 받은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각 사람의 재능이나, 물질, 시간 등,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기를 원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돌려드리십시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은 하나님 앞에 드려진 제물을 자신들의 육체의 만족을 위하여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했으며 그 결과 전쟁에서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엘리의 아들 비느하스의 아내가 그 날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어떤 엄마가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라고 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 하나님의 것을 자신들을 위하여 사용한 사람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4. 속죄를 통하여 참된 화목이 이루어집니다(5절).
화목제의 제물인 콩팥 등은 번제물 위에 함께 불사르도록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번제에 대해서 살펴볼 때는 신자의 헌신의 측면에서 봤는데, 두 가지 측면에서 풀이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신자의 헌신과 그리스도의 희생입니다. 본문에서 화목제를 드리는데 번제물 위에 드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온전한 화목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엡2:16에 보면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안에 십자가가 이룬 두 가지 화목이 나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과 화목입니다. 인류가 범죄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고 죄의 삯으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죄의 종이 된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죄 있는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도 볼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종교성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으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장벽이 놓이게 되고 죄의 장벽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 값을 치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공로로 죄 용서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또 하나의 화목은 사람과 사람의 화목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담이 십자가로 무너지고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고 할례당과 무할례당이 하나되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화목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드리는 사람은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화목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은 원수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아직 내게 원수가 남아 있다면 원수를 풀기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는 십자가를 붙잡는 노력을 하십시오. 죄를 이기기 위해 노력해서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죄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붙잡으면 그분이 죄를 이기게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원수를 내 노력으로 풀지 마시고 주의 십자가를 붙잡으십시오. 그리고 십자가의 정신이 내 것이 되어지면 자연스럽게 원수와의 관계가 화목하게 될 것입니다.
5. 예배자는 화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나면 제물의 나머지 부분을 가지고 이웃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신자는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화목제를 드린 제주가 제물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공동의 식사를 했던 것처럼 희생 제물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는 다른 사람과 화목해야 합니다.
화목제물를 가지고 식사를 하는 것을 통하여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과의 화목은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 좋은 방법입니다.
요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떡을 떼며 교제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떡을 떼었다는 것은 성만찬의 의미보다는 식사를 함께 한 것으로 보면 좋습니다. 또 초대교회에서는 공예배로 모일 대마다 성찬식을 했습니다. 그 때는 지금처럼 작은 잔에 포도주를 담겨나 작은 떡을 나눴던 것이 아니라 한끼의 식사가 되도록 먹었습니다.
우리는 주일에 교회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함께 식사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 시간은 성도가 교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바뿐 현대인들에게는 몸된 교회의 지체와 교제하기에 주일 식사 시간이 가장 적당합니다.
성도의 교제를 위하여 식사를 할 때 주의하여야 할 것은 먼저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는 것이고 부정적인 말로 사단이 역사할 기회를 제공해서는 안됩니다.
둘째, 화목 제물의 남은 것으로 공동의 식사를 했던 것은 인간의 화목은 영혼의 양식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나눔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의 풍성함이 임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전함으로 영적인 떡을 떼는 교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화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
레위기 3:1-4(P.148),에베소서 2:15-18(P.311) / 이성희 목사
서 론
어느 목사님이 화해에 관한 설교를 하는 도중 “원수가 없는 분은 손들어 보세요”라고 하였습니다. 좌석 뒤쪽에 앉은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손을 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원수가 없나요?”라고 다시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그 때 할아버지는 “나도 왜 원수가 없었겠습니까? 원수가 있었는데 다 죽었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원수는 죽어야 원수가 없어지는 것은 일반적 방법입니다.
그러나 원수를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원수가 죽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죽으면 원수는 없어집니다. 사람들 사이에 원수를 맺고 화목하지 못하는 것은 네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수는 인간사에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악습입니다. 인간의 피 가운데 복수의 피는 가장 멀리 튀깁니다. 우리가 옛날에 많이 보던 서부영화나 중국의 무술영화를 보면 거의 복수혈전입니다. 한 무리가 가문을 파멸하고, 그 가문에 살아남은 한 사람이 무술을 연마해서 하산하여 복수를 끝내고 멀리 떠나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입니다.
중국속담에는 “복수하기로 마음먹은 자는 무덤을 두 개 파는 자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복수하는 사람은 자기 무덤도 파는 자입니다. 복수하는 자는 자기도 복수를 당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킬레스건’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킬레우스라는 신의 이야기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는 아킬레우스가 갓난아기일 때 스틱스 강에 몸을 담갔습니다. 어머니는 아킬레우스의 발목을 빼놓고 몸을 담갔습니다. 아킬레우스는 몸 전체가 괴력을 발휘하였지만 발목 부분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큰 공훈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트로이 전쟁에서 발뒤꿈치에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습니다. ‘아킬레스건’은 치명적 결함을 의미합니다. 그를 죽게 한 원인은 배신, 탐욕, 적의, 변절, 무소신, 경직성, 불성실, 복수심, 거만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인간에게 복수심은 인격을 말살하고, 죽게 하는 치명적인 결함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복수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증오는 주인에게 달려드는 미친 개입니다. 복수심은 불을 지른 그 자신까지 태워버리는 맹렬한 불길입니다. 반면에 자비는 그 모든 것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선택입니다. 증오와 복수심은 자신을 올무에 걸리게 하고, 수렁에 빠지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없앤 방법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입니다. 용서하시고 잊으시고 기억도 않으심입니다. 돌아온 자를 용납하심입니다.
14절에는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원수 된 것을 그의 몸으로 허셨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으라고 합니다. 흔히 말하는 ‘탈리온 법’이 구약의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에는 사랑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레위기 19:18에는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5:44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면 이미 원수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사랑해야 원수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올해는 우리 모두가 원수를 없애고 화목케 하는 그리스도를 좇아 화목한 삶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16에는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로 인해 원수된 것을 제거하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원수 된 것을 소멸하였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원수를 없앴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원수가 아니다는 말입니다. 원수가 어떻게 원수가 아닐 수 있습니까? 원수의 잘못을 완전히 잊고 사랑하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게 한 죄를 완전히 씻어주셨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은 죄를 대강, 조금 씻어주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말끔히, 기억도 않으실 만큼 씻어주셔서 원수가 아닌 친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지난 2천년동안 인류가 고안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과학자 더글러스 러시코프는 “지난 2천년 동안 가장 감동적인 발명품은 바로 지우개이지요. 지우개는 인간의 실수를 수정하고, 아픔을 지울 수도 있고 용서하죠”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우개는 인간에게 위대하고 고마운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지우개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지우는 지우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지우고 이전 것은 흔적도 남기지 않으시고, 기억도 아니 하십니다. 인간의 회개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기억력은 ‘제로’입니다.
사람은 지우개로 지워도 흔적이 남습니다. 잊는다고 해도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용서해도 섭섭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난 뒤끝이 없어”라고 하지만 거짓말입니다. 똑 같은 일을 또 당하면 그 때는 분노가 폭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끔히 잊으시고 정말 뒤끝이 없으십니다.
이사야 43:25에는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 되고, 우리 신앙의 경험에서 봐도 하나님은 회개한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하다가 지쳐서 침상에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그 때 마귀가 큰 두루마리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루터의 평생의 죄를 다 기록한 죄목들이었습니다. 죄들이 얼마나 많고 더러운지 루터는 낙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죄목을 다 읽은 후에 용기를 내어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한 가지 잊은 것이 있으니 이렇게 쓰라,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이 말을 들은 마귀는 물러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로마서 5:10에는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이라고 합니다. 죄는 사람과 하나님이 원수가 되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을 다시 화목하게 합니다.
구약의 ‘화목제’라는 제사에는 화목제물이 필요합니다. 소나 양을 잡아 완전히 태워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제물을 받으시고 화목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피와 물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완전히 다 쏟으셨습니다. 화목제물처럼 완전히 태워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빚을 다 갚았다”는 뜻입니다. 노예를 속전이라는 값을 지불하고 자유케 하듯 다 갚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는 도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도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우리는 남을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죽는 사람입니다.
로마서 12장 17절에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3:9에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악을 갚지 말아야 합니다. 원수 갚는 최선의 길은 선한 일을 도모하는 것이며, 복을 비는 것입니다.
항상 원수에 대하여 좋은 말만하는 링컨 대통령을 못 마땅하게 생각한 사람이 한 번은 대통령에게 항의하였습니다. “원수는 없애야하지 않습니까?” 그 때 링컨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없애야 하구 말고요. 저도 바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원수를 친구로 만들어 원수를 없애버리는 걸요.” 원수를 친구로 만드는 것이 최선의 교제입니다. 적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최고의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원수가 된 우리를 친구로 만드시고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영화 ‘대부’ 2편에는 마피아 두목인 마이클 콜레오네가 “친구들을 가까이 하되 적은 더욱 가까이 하라”고 말합니다. 마피아도 아는 일을 하나님의 백성이 모르면 되겠습니까? 원수를 만들지 맙시다. 적을 가까이 하면 원수는 사라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원수가 아닌 친구가 된 것을 감사하며 우리도 원수를 친구로 만드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둘이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18에는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우리 둘’이란 유대인과 이방인, 이 둘이 함께 함을 말합니다. ‘나아감’이란 ‘프로사고겐’이란 헬라어로서 제의적 표현으로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을 표현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였던 옛 범주, 제도, 관습을 폐지하고 성령 안에서 하나이며,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더 이상 인종이나, 성별이나, 직분이나, 빈부의 차이가 없음을 선언했습니다. 이 모두가 함께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질로 만드신 것을 동질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함께 하는 동성애를 금지하였습니다. 다르게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술입니다. 쌍둥이도 같지 않습니다. 10만개의 느티나무 잎도 다 다르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 되라”고 하셨지 “같아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다르게 만드신 것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같아지라고 하시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다른 인격, 배경, 인종, 취향을 갖도록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단지 참아내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여기고 즐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획일성이 아닌 하나 됨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하나 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셨습니다.
에베소서 4:3에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평안의 줄에 묶이면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그 백성들에게 묶으십니다(bind). ‘묶는다’는 말은 히브리어 ‘하사크’인데 밧줄로 잡아맨 사랑, 무언가 혹은 누군가에게 속박된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령의 띠로 매십니다. 매어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널리 전하세.”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될 때에 사람과 사람이 하나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인종분리정책 때문에 30년 가까이 로벤섬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넬슨 만델라에게 “어떻게 억압한 사람들에게 원한을 갖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는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원한을 가질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은 원한을 가지고 살기에는 너무 짧습니다. 사랑하기에도 모자라는 시간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용서는 관용이 아니라 재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보다 용서하시는데 더 많은 힘이 필요하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엿새 동안 하셨지만 용서는 아담의 범죄 이후 지금까지 계속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정신의학자인 칼 메닝거는 이 땅에 많은 정신병은 용서와 관계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서로 용서하고 산다면 전 세계의 정신병원 70%가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갈등을 가지고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므로 얼마나 육체적으로 많은 고통을 받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비용을 소모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한, 그 사람에게 묶여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나를 해방시킵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용서는 아름다운 보복입니다. 나를 사로잡을 모략도 나를 힘들게 할 목적도 물거품이 됩니다. 용서하면 기이하게도 덫을 놓은 사람들이 제 덫에 걸립니다.” 용서야 말로 가장 긍정적인 보복입니다.
심리학자 글렌 헤른덴은 용서는 화해의 가능성을 증진시킨다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용서는 생리학적 문제와 관련 있는 고질적인 분노와 화 그리고 스트레스로부터 가해자를 해방시킵니다. 심장, 혈관 질병, 고혈압, 긴장, 향진증 암을 비롯한 여러 가지 심신성 질병 등이 용서하지 못하는 데 기인합니다. 용서하면 육체와 정신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드와이트 에드워즈의 ‘내면의 혁명’이란 책에는 하나 됨을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 주의해야 할 5가지 매우 중요한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둘째는 우리에게 범죄한 사람들과 더 이상 대면하려고 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셋째는 우리가 고의로 해를 끼친 사람들과 화해하려고 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넷째는 남에 대한 험담을 말하거나 듣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다른 성도들을 판단하는 일입니다.
기독교 격언에는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는 사랑을”이란 말이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성도의 기본적인 삶은 일치입니다. 원수가 아니라 친구로, 둘이 아니라 하나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결 론
원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예수님과 스데반과 바울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던 거룩한 마음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흔히 원수에 대한 사랑을 거룩함의 핵심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20세기 그리스 정교회 수사인 스타레츠 실루안(Staretz Silouan)은 말했습니다.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면 평안이 찾아온다. 원수를 사랑하면 자신 안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거한다고 확신해도 좋다.”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원수를 소멸하시고 서로 다른 둘이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는 원수 중의 원수인 나를 ‘친구’가 되게 하셨습니다. 나에게 원수가 있습니까? 내가 죽으면 됩니다. 내가 죽읍시다.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말고 원수를 없애고, 우리 모두가 화목케 하시는 주님의 은혜로 하나 되는 화해의 은총이 충만한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화목제 희생의 규례
레위기 3:1-5, 7:11-18 / 피영민 목사
향기로운 냄새니라
[ 레위기 7:11-18 ]
서 론
오늘은 레위기 3장과 7장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5대 제사 가운데 세 번째 제사인 ‘화목제’에 관해 말씀을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5대 제사는 이스라엘의 예배입니다. 예배의 기본적인 원리들을 통해 죄인들이 제물의 희생을 근거로 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제사에 관한 율법을 주셨지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의 은혜를 예표로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화목제는 히브리어로 ‘쉘렘’이라고 합니다. 번제는 ‘위로 올라간다’는 의미의 ‘올라’, 소제는 ‘제물’이나 ‘예물’을 뜻하는 ‘민하’라고 했습니다. 화목제는 ‘보답’을 뜻하는 ‘쉘렘’이 사용되었습니다. ‘쉘렘’은 ‘평화’를 의미하는 ‘샬롬’과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서로 ‘샬롬’이라고 인사하며 안부를 묻고 있습니다.
Ⅰ. 화목제의 적용에 관한 두 가지 관점
이스라엘의 제사는 언제나 번제, 소제, 화목제 순으로 나옵니다. 성경 어디에도 화목제가 먼저 나오고 소제와 번제가 나오는 순서로는 기록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선 화목제의 의미를 생각하기에 앞서 순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아모스 5장 22절에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들이 말할 때도 번제, 소제, 화목제 순서로 언급하였습니다. 제사의 순서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화목제가 갖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1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고, 2차적으로는 성도의 삶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1차적으로 번제, 소제, 화목제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속죄 제사 드린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고, 그 몸을 다 찢기심으로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소제’는 고운 가루를 드리는 것으로, 예수님이 한 알의 밀이 되어 죽고 싹이 나 열매 맺힌 후 곱게 갈아져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소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고운 가루가 될 때까지 겪은 수난의 전 과정을 계시해 주는 것입니다. 화목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주심으로, 죄인들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고 죄인들 상호 간에도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신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18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었고, 유대인과 이방인도 화목할 수 있게 되었고, 죄인들끼리도 화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번제, 소제, 화목제는 2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자가 사죄와 칭의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소제는 칭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그 삶 속에 성령의 기름과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유향, 그리고 세상의 방부제 역할을 하는 소금이 있어야 함과 동시에 죄를 상징하는 누룩과 사치와 방탕을 상징하는 꿀은 없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성도의 삶에 실제적인 지침이 될 만한 교훈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목제는 이미 사죄와 칭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는 삶을 살도록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과 화목을 얻고자 하는 목적에서 화목제를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화목을 얻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한 목적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목제를 다른 말로 ‘감사제’(Thanksgiving offering)라고도 하고, ‘찬미의 제사’(Offering of Praise), 또는 ‘교제를 위한 제사’(Fellowship offering)라고도 합니다.
또한 화목제의 의미를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레위기 3장 5절입니다.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단 윗불 위에 있는 나무 위 번제물 위에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화목제물을 태우는 곳이 ‘번제물 위’라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화목제물은 번제물 위에서 불살라야 합니다. 성막 뜰에는 번제단이 있습니다. 번제단 가운데 놋망이 있습니다. 놋망 위에는 나무를 벌여놓고 불을 붙여 번제 제물을 태웁니다. 그래서 재가 놋망 아래로 떨어지게 되는 것인데, 화목제물은 번제물 위에 불태웠습니다. 이것이 화목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화목제는 결코 번제 없이 드려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번제는 제사장들이 아침저녁으로 하나님께 양을 한 마리 씩 드리는 ‘상번제’(Regular burnt offering)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전제되어야만 인간이 그 공로 위에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은 성도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속죄 제사를 드리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찬미의 제사는 화목제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 제사는 예수로 말미암아 드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근거가 히브리서 13장 12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사람이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바른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전혀 없이 늘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사람은 바른 정신의 소유자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는데, 왜 하나님을 향해 욕을 합니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고 지혜의 근본입니다. 화목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함을 계시해 줍니다.
Ⅱ. 화목제를 드리는 절차에 관한 규례
화목제 제사 절차에 관한 규례는 레위기 3장, 7장, 17장, 19장까지 총 네 개의 장에 걸쳐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제사의 규례는 이렇게 여러 차례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복잡한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아무 생각 없이 무관심하게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은 지대한 관심을 쏟으며 제사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도들 중에도 어떤 사람은 무관심하게 예배에 임하는 방관자가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배하는 자세도 삐딱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목사가 뭐라고 떠드는가 한 번 들어나 보자고 하는 심산으로 앉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예배는 예배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주 잘못된 예배자입니다. 예배하는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나 뵙고 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준비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준비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헌금도 주머니에 구겨진 천 원짜리 지폐를 드리지 않고, 미리 정성껏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런 사람들의 예배가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예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 대한 규례를 정신 차리고 잘 공부해서 똑바로 예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열납하실 만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화목제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번제와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화목제는 번제와 비슷한 점도, 전혀 다른 점도 있습니다. 먼저 번제와 비슷한 점 가운데 첫 번째는 제물입니다. 번제와 화목제 예물은 소나 양이나 염소입니다. 그러나 야생동물을 잡아서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 동물들은 반드시 자기가 기르는 동물들 중 흠 없는 것을 취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제물을 드리는 경배자가 제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안수하여 자신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동물에게 전가합니다. 그리고 성막 북편에서 제물을 잡아 피는 제사장에게 줍니다. 피를 받은 제사장은 번제단 사면에 뿌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제물을 불로 태워 여호와께 향기로운 향기가 되게 합니다.
이처럼 번제와 화목제는 경배자가 제물을 가져와 안수하고 잡은 후 제물을 태워서 드린다는 점에서 세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습니다.
첫째, 번제는 소나 양이나 염소가 반드시 수컷이어야만 하지만, 화목제는 암수의 구별이 없습니다.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예표하기 때문에 반드시 수컷을 제물로 사용해야 하지만, 화목제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성별 또는 국적의 차별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번제는 경제적인 형편이 좋지 못한 사람의 경우에 집비둘기나 산비둘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화목제는 비둘기가 제물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태워도 먹을 고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비둘기 고기를 드셔 보신 분이 계십니까? 저는 갈매기 고기는 먹어 봤지만 비둘기 고기를 먹어본 적은 없습니다. 참새는 맛있지만, 비둘기를 먹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비둘기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기 때문에 화목제 제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는데 돈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저 받으라는 것입니다. 돈이 있는 사람도 오고, 돈 없는 사람도 오고, 돈의 많고 적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감사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주머니를 열어야 합니다. 노력이 좀 필요합니다.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을 갖다 드리면 되겠습니까?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고 수고와 노력이 담겨 있어야 감사입니다.
셋째, 번제는 제물의 가죽을 벗겨서 제사장이 취합니다. 그리고 가죽을 제외한 모든 것을 불로 태워버립니다. 그러나 화목제는 제물의 기름만 태웁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의 내장 기름만 떼 내어 태우는 것입니다. 내장에 붙은 기름이나 주변의 기름, 콩팥이나 간에 붙은 기름을 다 떼 내어 불로 태워 드리고, 소나 염소는 그렇지 않지만 양의 경우에는 꼬리에도 기름이 많이 있어서 꼬리까지 태운다고 합니다.
그러면 화목제물을 드릴 때 기름을 태워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감사할 때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얼마나 감사한 분이십니까? 우리 생명을 지금까지 살려주셨고, 영혼을 구원해 주셨고, 영생을 주셨고, 내세의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올바른 정신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저 체면치레나 하듯 드려서 감사를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둘째는 기름이 고기보다 사람을 살찌게 하는 생명의 본체라는 점에서, 기름을 태워드린 다는 것은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린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최상의 것으로 감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때는 최상의 것으로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6~13절에 보면 예수님이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죄인으로 소문난 여자가 식사하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 향유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향유가 얼마나 비싼 것인가 하면 당시 노동자의 일 년 연봉에 해당합니다.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제자 중 유독 계산이 빨랐던 가룟 유다가 그 여인을 야단치며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자의 행한 일은 나의 장례를 준비한 행동이었다고 칭찬하시며,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을 꼭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일 년치 임금을 다 써버렸지만, 엄청난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번제는 제물을 다 태우지만 화목제는 기름만 태운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넷째, 번제는 경배자가 얻는 몫이 전혀 없는 반면, 화목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사장의 몫도 있고, 경배자의 몫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하면서 고기를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오소리나 고라니 같은 고기는 먹을 수 있었지만, 소나 양, 염소와 같은 고기를 먹으려면 반드시 화목제를 드리고 나서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동물을 아무데서나 도살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경배자는 성막 뜰 북편에서 동물을 잡고 하나님께 드린 후 제사장의 몫을 드리고 나머지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날 두고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루 이틀 안에 다 먹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런 규정을 만드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우상숭배를 근절하시기 위함입니다.
성막 뜰이 아닌 다른 곳에서 동물을 잡는 사람은 우상숭배하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피도 먹고 기름도 먹으며 우상 숭배하는 백성들을 바로 잡기 위해 하나님은 모세에게 광야에서는 이런 짓을 절대로 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 규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바뀌게 됩니다. 신명기 12장 15~16절에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복을 따라 각 성에서 네 마음에 즐기는 대로 생축을 잡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나니 곧 정한 자나 부정한 자를 무론하고 노루나 사슴을 먹음과 같이 먹으려니와 오직 그 피는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을 것이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각 성에서도 짐승을 잡아 피는 땅에 묻고 나머지는 먹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화목제에는 하나님의 몫이 있고, 제사장의 몫이 있고, 경배자의 몫이 있습니다. 피와 기름은 하나님의 것이고, 가슴고기(갈비)와 소의 네 다리 중에서 우편 뒷다리는 제사장의 것입니다. 제사장은 ‘요제’(搖祭)를 통해 가슴고기를 들어서 한 번 흔든 후에 취했고, 우편 뒷다리는 무겁기 때문에 들었다가 놓았다고 해서 ‘거제’(擧祭)를 한 후에 취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 몫은 ‘흔든 가슴’과 ‘든 우편 뒷다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경배자가 먹을 수 있었습니다.
Ⅲ. 화목제의 세 가지 종류
화목제는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감사제와 서원제와 낙헌제입니다. 감사제의 경우, 고기를 당일에 다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서원제나 낙헌제의 경우는 이틀까지 먹을 수 있었습니다. 삼일 째까지 남은 것은 모두 불로 태워 없애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철저한 위생관리도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러운 것에 접촉한 것은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부정한 것에 접촉된 사람도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시며 모든 감염의 원인을 차단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 철저하게 위생관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화목제의 희생제물을 먹되 제물이 소 한 마리라면 그것을 어떻게 하루 이틀에 경배자가 다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가족, 친지, 이웃들과 나눠 먹어야 합니다. 화목제는 주변의 사람들과 나눠먹을 수 있도록 하시는, 교제를 위한 제사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는 이웃을 생각하고 좋은 것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외국 사람들은 자녀들 교육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가 ‘나눔’(Sharing)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누는 일을 했을 때, 많은 칭찬을 하고 격려해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죔죔’을 가르치지 않습니까? 한 번 쥐면 놓지 말라고 가르치니 나눔을 모르는 것입니다. 움켜쥐기만 하는 아이들로 교육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화목제는 “혼자 먹지 말고 나눠 먹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받은 복이 있으면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눠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화목제는 감사할 때 드립니다. 이를 ‘감사제’(Thanksgiving offering)라고 합니다. 감사제를 드릴 때는 제물도 드릴 뿐만 아니라 무교병과 유교병을 한꺼번에 드립니다. 그러면 무교병은 하나님께 태워서 소제로 드리고 유교병은 고기 먹을 때 나눠 먹는 것입니다. 감사제를 드리며 누룩이 들어 있는 유교병을 먹는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도 우리 속에는 여전히 죄가 남아 있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또 서원을 했거나 서원을 성취했을 경우 제물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이를 ‘서원제’(Votive offering)라고 합니다. 그리고 ‘낙헌제’ 또는 ‘자원제’(Freewill offering)라고 합니다. 자원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헌물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결 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소나 양이나 염소 고기를 먹고 싶으면 반드시 화목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복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화목제를 드린 사람은 고기를 먹을 수 있고, 고기를 먹으려면 화목제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미국 유학 후 신학교에서 교수로 생활했고, 이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목회사역을 감당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잘 보니까 복을 받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감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아무 복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 속에 감사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감사가 있고 불평과 원망이 없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복을 받습니다. 화목제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최상의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항상 복을 받고 누리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라
레 3:1-5 고후 5:18-21 / 김중석 목사
‘Be reconciled to God’. 한 30대 젊은 남자가 있었다. 동네사람은 입을 모아 그를 ‘친절하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했다. 매력적이라 할 만큼 준수한 외모와 선량한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이 외모와 미소로 여자들을 자기 차로 유인해 강간을 하고 목을 졸라 죽였다. 시체는 자기 집 근처 벌판과 야산에 묻었다. 그리고 다시 싹싹한 동네 청년으로 돌아가 태연하게 트럭을 몰고, 가축을 기르고, 스포츠마사지사 일을 했다. 지난 2년 간에 무려 7명의 부녀자를 살해 암장한 강호순 이야기다. 2004년에는 유영철(39)이 20명을 살해하고 붙잡혔고, 2006년에는 정남규(40)가 13명을 살해하고 붙잡혔다. 사회는 이들을 ‘인간의 몸을 빌린 사악한 악마’로 표현했다. 그렇다. 사악한 악마에 사로잡히지 않고서야 이렇게 할 수는 없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누구든지 사악한 악마에 사로잡히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말도 된다.정 반대의 현상도 있다. 자기를 살해하는 것이다. 자살. 남을 해하지 않았으니 살해보다 낫다 하겠고,나라를 위한 순국, 책임을 진다는 의미의 자살, 자살 공격, 등에 보다 나은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자살이라는 이 극단적인 방법은 사실 없어야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살인마에게는 벌을 주고, 자살자에게는 동정을 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과 화목할 수만 있다면, 남을 죽이거나 자기를 죽이는 일을 해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럴 원인까지도 제거하게 된다. 살인을 할 만큼 지옥 같은 상황도 정 반대인 천국 같은 상황으로 바꾸게 된다. 할렐루야!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제와 영원히!
1. 나부터 하나님과 화목해야. 고후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월드비전의 긴급구호팀장 한비야씨 경험담. 7년 전 아프리카 잠비아가 에이즈 창권 지역일 뿐 아니라 지독한 가뭄까지 겹쳤을 때, 차를 타고 지나가는데 다 쓰러져가는 집 벽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고 그 밑에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문구가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었다. 호기심에 찾아 들어가니 스무살 전후의 한 청년이 마당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얼굴이며 목 양손에 부스럼이 가득, 한 눈에도 에이즈 말기환자임을 알았다. 성경책을 읽고 있었다. 이 청년은 마을에서 성실하기로 이름난 교사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데 재작년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수술을 받을 때 수혈을 통해 에이즈에 걸렸다고 한다. 성경 어디를 읽어요? 욥기요. 하나님이 저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 알고 싶어서요. 한가지 분명한 건 고통도 사랑의 다른 이름이랍니다. 우리가 모를 뿐이죠. 하나님이 원망스럽지 않나요? 원망은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시죠. 지금은 솔직히 몰라요 왜 하나님이 에이즈에 걸리게 하셨는지.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고통 중에 있는 저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죠. 하면서 조용히 웃더라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화목이다!
‘고통 중에 있는 나를 하나님은 더욱 사랑하신다’ 이 고백은 하나님과 화목자만 할 수 있다. 하나님과 화목하기 전에는 ‘잘된 것은 다 내 탓이고 안된 것은 다 네 탓’이다. 그러나 화목하면 ‘잘된 것은 다 하나님 덕분이니 감사하고, 안된 것은 다 내 탓인데 안된 나를 하나님이 더 사랑하시니 또 감사’한다. 우리가 거부할 것은 오로지 [마귀와 죄]뿐이지 다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서 받아드리고 감사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19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마귀와 죄 외에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화목할 수 있다. (수직적으로)가장 선한 사람으로부터 가장 악한 사람까지 화목할 수 있다.(횡적으로) 진보-보수 막론하고, 남북-남남 막론하고, 일본-한국(민족주의) 막론하고, 잘사는 나라-못사는 날 막론하고, 우리에게 우호적이거나 적대적이거나 막론하고 화목할 수 있다.
18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 하는 방법은 그리스도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만이 죄 없는 피를 가지셨고 그리스도 만이 우리의 죄 값으로 죄 없는 피를 흘려 나의 죄를 청산하셨기 때문이다. 19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찬252)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정케 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2.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 고후5:18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우리가 세상과 화목하고, 또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당연하다. 하나님의 방법, 예수님의 방법이다. 그들의 짐을 우리가 짊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기보다 정죄하기 보다 그들의 죄를 나의 죄로 짊어지는 것이다. 세상의 잘못과 죄를 지적하기 보다 그 죄와 연약함을 나의 죄와 연약함으로 간주하고 내가 대신 짊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처음에는 세상적인 기대를 가지고, 세상에서 크게 되고픈 욕심이 있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신 다음에는 그 생각 버리고 예수님처럼 남의 짐을 대신 졌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더라면 세상적으로는 잘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고 나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았다. 이기선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여러 번 옥고를 치른 분이다. 본래 포목장사를 하며 교회 영수로서 잘 지내던 분인데 전도사가 되라는 요청을 받았다. 고민이 되었다. 경제적 여유가 없어질 터인데---. 그러나 헌신했다. 한끼도 굶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자인 김창인 목사님에게 이런 글을 남겼다. 세상부귀여분토(世上富貴如糞土)상제능력자영부(上帝 能力자靈富). 한국교회의 4대 신앙산맥을 이루는 성령론의 길선주목사님, 능력의 김익두목사님, 일사각오 순교신앙의 주기철목사님,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목사님이 다 그랬다. 어떤 집사님은 변호사인데 돈 벌어서 몇 십억 원을 가출청소년센터에 쏟고 있다. 핵물리학자요 교수인데 신학을 공부하여 교회를 개척한 분, 중국여행 갔다가 탈북자를 만나고 사로잡혀 북한선교사가 된 분, 죽을 고비를 넘어 탈북 했는데 예수 믿고 나서 예수 못 믿고 죽는 북한사람 불쌍하다고 다시 북한으로 들어갔다가 결국은 순교 당한 북한인들. 이들은 다 자기는 잘 살수도 있을 터인데, 마다하고 예수님 사랑 때문에, 남을 위하여, 남의 죄와 연약함을 자기 것으로 간주하고 대신 짊어지는 사람들이다. 나도 대신 짊어지고 화목하게 해보자!
레3:1-5에는 화목제사가 나온다. 화목제는 여호와 앞에 드린다. 1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이는 ‘화목’이란 본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란 의미이다. 가축을 끌고 가서 잡아서 그 피와 살과 내장까지 드린다. 이는 ‘화목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죽=우리의 체면과 명예, 내장=속이 다 타서 녹아난다, 피=마지막에는 목숨까지 바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화목제물이 소일수도 있고 양일 수도 있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희생하고, 조금 받은 사람은 조금 희생한다. ‘부자’란 그 소유에 있지 않고 ‘베풂’에 있다. 경주 최부자 댁은 만석지기 부자로 200-300년이 계속되었다고. 어떻게 그리 지속할 수 있었을까? 어느 중이 얘기했다고 한다. 재물은 똥과 같아서 쌓아놓으면 냄새가 나고 파리가 꼬이고 구더기가 나고 독이 나온다. 그러나 똥도 풀면 거름이 되고 곡식이 나고 많은 사람이 먹고 살게 된다.
험악한 세상! 어떻게 할 것인가? 두려워 떨 것인가? 아니다. 두려움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과 화목하라] 이제 기도하자/ 주여! 이 백성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소서. 그래서 지옥 같은 현실을 천국 같은 낙토로 바꾸게 하소서! 나부터 하나님과 화목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값으로 나의 죄와 사망의 사슬을 끊고 하나님과 화목하여 이 땅에서부터 영원까지 생명과 영광의 복을 누리게 하시니, 그 은혜에 감사하고 그 사랑을 찬양합니다! 내게 맡기신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하겠습니다. 남의 죄와 연약함을 나의 죄와 연약함으로 간주하고 대신 짊어지겠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그 뜻을 이루소서!(아멘)
(고후5:18-21)
화목제(和睦祭)에 대한 규례
레위기 3;1-17 / 김근중 목사
골로새서 2:16-17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 의식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표상입니다. 화목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어떻게 화목시켰는지 알게 해주는 제사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다른 사람과 어떻게 화목해야 하는지 알게 해 주기도 합니다.
화목제(和睦祭)의 뜻
화목제(和睦祭)의 원어는 '제바흐 쉘라밈'입니다. '제바흐'는 '짐승을 잡다' '도륙하다'의 뜻을 가진 '자바흐'에서 파생된 말로서 '희생물'이라는 뜻입니다. '쉘라밈'은 '화평하다' '교제하다'의 뜻을 가진 '솰람'에서 파생된 말로서 '화평' '친교'의 뜻입니다. 곧 '제바흐 쉘라밈'은 '화평의 희생제' '친교의 희생제'라는 말입니다. 희생제물의 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제사요 더 나아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친교를 나누는 제사입니다.
①화목제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화목케 하는 제사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대해 원수된 자로서 불화했던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희생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없이하고 하나님과 화목시키셨습니다. 에베소서2:1,3,15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하였고, 골로새서1:20-22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라고 했고, 로마서5:10에는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법적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된 우리는 더욱 화평을 누려나가야 합니다. 로마서5:1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했습니다(고후5:21).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를 근거하여 죄를 회개하므로 하나님과 가까워져야 합니다. 그로 인하여 평안과 만족과 기쁨과 감사가 넘쳐야 합니다.
②화목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요구하는 제사입니다. 고린도후서5:18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한 은혜를 사람 사이에서 화장시키기를 원하십니다. 마치 신약에서 성찬식은 자연스레 애찬식으로 연결되었듯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자는 사람과 화목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여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포용하고 사랑하려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평안이 충만하게 됩니다.
2. 화목제(和睦祭)의 방법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자들입니다(엡2:1,2:3,15,골1:21-22,롬5:10). 화목제의 방법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는 법을 알 수 있습니다.
①헌납입니다.(1절)
먼저 희생 제물을 가져와야 합니다. 번제에서는 흠없는 수컷으로 드리라고 했는데 화목제에서는 수컷이든지 암컷이든지 구별하지않고 흠없는 것으로 드리면 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실 것을 가리킵니다(갈1:4,히9:14). 예수님은 친히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요한일서2:2에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화목케 하는 희생 제물이 되어 주시는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적용되는 효과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용서 받고 은혜를 받는 데에는 남녀의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별뿐 아니라 외부적 어떤 요소들도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원리는 성도간의 교제도 마찬가지입니다.
②안수입니다.(2절)
희생 제물을 가져온 자가 자신의 양손을 펴서 양뿔 사이에 얹고 힘껏 내리누릅니다. 그 의식은 자신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기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희생제물이 되어주신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전가받아 그 죄값을 치룰 것을 암시합니다(사53:6,히9:28,벧전2:24).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언제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맡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③죽임입니다.(2절)
희생제물인 짐승은 그 짐승을 가져온 자가 안수한 다음에 회막문에서 잡습니다. 자기가 죽어야할 자리에서 생축이 대신 자기 죄값으로 죽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값으로 죽으셨습니다(롬5:8). 그는 우리의 죄값으로 우리의 손에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예수님을 나 자신이 죽인 사실을 깊이 인식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④피뿌림입니다.(2절)
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받아 제단 사면에 뿌렸습니다. 죄값은 죽음이요 죽음을 피흘림으로 확인되었습니다(롬6:23,9:22). 곧 피뿌림은 그 피흘림의 재확인이며 피흘림의 효과를 구하는 의식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림으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피흘림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에 대한 상징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겼던 것입니다(마27:51,히10:20). 우리가 하나님게 나아갈 땐 보혈의 피공로를 근거해야 합니다.
⑤불사름입니다.(3-5절)
희생제물 가운데 내장에 덮인 기름 부위, 내장에 붙어 있는 모든 기름 부위, 두 콩팥과 허리 주변에 붙어있는 모든 기름 부위, 간을 덮고 있는 꺼플 부위는 불살라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기름은 2장의 소제에서 나온 기름과 다른 종류입니다. 소제에서의 기름은 식물성 기름이고 화목제에서 나온 기름은 동물성 기름입니다. 이 기름들은 희생 제물의 속 부분으로서 당시에 가장 귀하게 여기는 부위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것을 드리는 것은 전체를 드리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전체를 드렸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 전체를 드려야 합니다(롬12:1,딤후2:15,롬6:13). 특히 가장 중하게 여기는 부분을 주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롬1:9).
마태복음22:37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막12:30).
⑥잔치함입니다.(7:15-18)
화목제물로 태워드리고 남은 고기는 당일에 제사장과 가족과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라고 했습니다. 화목제의 결과는 제사를 드리는 이에게 기쁨과 행복과 번영과 복지의 복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인한 기쁨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도 화목제의 연장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얻은 기쁨이 구원얻은 자의 심령뿐아니라 전 생활에 나타날 것을 의미합니다(롬5:11).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된 은혜를 목회자와 가족과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하겠습니다(고후5:18).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생활입니다.
3. 화목제(和睦祭)의 종류
화목제의 종류는 제물의 종류에 따라 나눌 수도 있고 제사를 드리는 성격에 따라 나눌 수도 있습니다.
제물에 따른 분류는, ①소로 드리는 화목제가 있고(1~5절), ②양으로 드리는 화목제가 있고(6~11절), ③염소로 드리는 화목제가 있습니다(12~17).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있어서 형편에 따라 드릴 수 있도록 배려된 것입니다. 형편이 어렵다고 해서 사죄의 은총이나 교제의 은혜에서 제외될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후서8:12에는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것을 가지고도 큰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생각으로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오해입니다. 문제는 제물의 크기가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자의 마음입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면하나님이 받으시고 그것으로 의미있는 일을 나타내십니다. 떡 한조각을 드린 사렙다 과부나 오병이어를 드린 어린 아이나 두 렙돈을 드린 과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왕상17:8-17,마14:17-21,마12:42-44). 물질 뿐아니라 우리 자신을 제물로 드릴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하고 부정한 사람이라해도 순전한 마음으로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 때문에 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 때문에 하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족보에 들어있는 네 여인, 다말 라합 룻 밧세바는 여인들이요 이방인들이요 죄인들이었지만 구속역사에 씌임받았습니다. 그들의 순전한 언약적 신앙 때문입니다(마1;1-6).
제사를 드리는 성격에 따른 분류는, ①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구원과 은혜에 대한 감사 의미로 드리는 감사제가 있고, ②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의미로 드리는 서원제가 있고, ③하나님께 조건없이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때 드리는 자원제(낙헌제)가 있습니다(7:15-18). 고린도후서9:7에는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4. 화목제물(和睦祭物)의 처리
①하나님의 몫으로 태워 드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장 부분과 꼬리 부분입니다(3-5절). 이는 오늘날 헌물을 성전 유지에 사용하고 있는 것에 해당합니다.
②제사장 몫으로 돌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무교병, 무교전병, 과자, 유교병을 그 예물 중에서 하나씩을 하나님께 거제로 드린 다음 그것을 제사장에게 주라고 했습니다(7:11-14). 하나님께 화제로 드리고 남은 고기중 가슴과 우편 뒷다리는 제사를 드려준 제사장에게 돌리라고 했습니다(7:31-14). 이는 소제에서 자세히 살펴본대로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라는 의미입니다. 고린도전서9:9에는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라고 했고, 갈라디아서6:6에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말씀연구와 기도에 전무할 수 있도록 생활에 염려없이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목회자는 바울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이 복음과 하나님의 일이 권위를 얻게 하기 위해 어떻게든지 교인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 한 것 같이 자비량하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고전9:15). 목회자 뿐 아니라 교회에서 사역을 돕는 모든 직원과 봉사자가 그와같은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엘리 제사장 때에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 보다도 제사에서 물려나올 제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후에 백성들로 하여금 선지자와 제사장을 거부하고 왕을 세워 달라고 한 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본인들은 길보아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서 넘어지므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삼상2:12-17, 4:17-18).
③백성들의 몫으로 돌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몫과 제사장에게 돌리는 몫 외에 그 남은 것은 가족과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먹게 했습니다. 그것은 기쁨의 잔치 곧 애찬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7:15-18). 우리는 신약의 초대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서로 떡을 떼며 유무상통했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행2:42-47).
※ 주의할 점
화목제물을 처리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돌리는 몫이 있고, 제사장에게 돌리는 몫이 있고, 제사를 드리는 자들의 몫 (백성들의 몫)이 있습니다. 백성들의 몫은 서로 나누어 먹는 것인데 그 규례에서 절대로 취해서는 안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몫에 해당하는 기름과 피였습니다. 17절에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 모든 처소에서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고 했습니다. 기름(fat)와 피(blood)는 어떠한 경우에도 식용(食用)으로 금지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과 피를 금지시킨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기름은 먹지 말아야 합니다.
동물의 기름은 생명을 유지시키는 힘과 능력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화목제 뿐아니라 모든 제사에서 기름은 하나님 몫으로 돌려졌습니다. 본문 3-5절에 "그는 또 그 화목제의 희생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취할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단 윗불 위에 있는 나무 위 번제물 위에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생명을 유지시키는 모든 힘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②피는 먹지 말아야 합니다.
피는 신약성경에서도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도행전15:29에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목매어 죽인 것은 먹지 말라고 한 것도 그 속에 피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피를 먹지 못하게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우상숭배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한 의식(儀式)으로서 피를 마셨습니다. 피채 마시는 행위가 만연하게 되면 우상숭배자들의 풍속 습관에 쉽게 동화되게 됩니다. 그들의 잔인성과 포학성을 본받게 되고 우상숭배에 참여하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시16:4참조). 그래서 사도시대에도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 가운데 먹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행15:28-29). 그것은 바울이 우상의 제물을 먹지 못하게 한 이유와도 같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지 못하게 한 이유가 여럿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그것을 먹다가 이방의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10:6-9,18).
둘째,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피에 생명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창세기9:4에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고 했고, 레위기17:11에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느니라"고 했고, 레위기17:14절에는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고 했습니다. 피를 생명의 근원으로 본 것입니다. 곧 피를 즐겨 먹지 못하게 한 것은 생명에 대한 귀중성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 주권에 달린 것이므로 인간이 임의로 처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귀히 여기는 규례를 주신 것입니다.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오해하여 출혈이 심한 위급한 환자의 수혈을 금하는 것은 오히려 생명을 존중하지 못한 어리석은 범죄 행위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과를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인에게 죽음을 요구합니다(롬6:23). 죄값을 치루고 사(赦)함을 받기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 대로 생명을 상징하는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죄인이 짐승에게 죄를 전가시킨 다음 그 짐승을 죽여 흘린 피를 제단 아래 쏟고 제단 사면에 뿌리라고 한 것입니다. 레위기17:11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의식(儀式)을 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고 그 죄값으로 대신 피흘려 죽을 것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골로새서2:17에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그런 제사 규례를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 계획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피를 먹지 못하게 한 것은 하나님께 속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존중히 여기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히10:29참조).
17절 마지막 부분에 "이는 너희 모든 처소에서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고 했습니다. 기름과 피에 대한 규례는 광야시대 뿐아니라 가나안 정착 이후에도 계속 지켜야 했습니다. 만일 이 규례를 어긴 자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추방되거나 처형되었습니다(레7:27,17:10). 오늘날 우리는 이에 대한 영적인 뜻을 잘 새겨야 합니다. 모든 생명을 귀히 여기고 구속의 은혜에 감격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 모든 주권을 사람의 것으로 취하지 말고,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화목제를 배우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를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사랑하여야 합니다.(마5:9, 23-24, 고후5:18, 벧전4:8, 요일1:7-8). 다른 사람과 화목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메난드로스는 "쉽게 화목할 수 있는 자는 죽은 자 뿐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 힘을 얻어야 합니다.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고 수평적으로 사람과 화목해야 합니다. 사람과의 교제를 함에 있어서는 기름과 피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안에서 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식
레 3:1-17 / 김선종 교수
화목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말은 '쉴라밈'인데, 완전과 평화를 뜻하는 '샬롬'의 어간이 들어 있다. 그래서 화목제를 평화의 제사로 부를 수도 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사람의 수직의 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의 관계에서 평화를 도모한다. 화목제의 제물은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뿐 아니라, 번제와 달리 암컷도 드릴 수 있었다. 레위기 7장의 화목제 규례를 따르면, 제물의 흔든 가슴과 등 우편 뒷다리는 제사장의 몫이 된다(7:34). 나머지 제물은 예배자의 몫으로 되돌려지고, 그는 가족과 이웃과 함께 잔치를 열어 함께 제물을 먹고 즐긴다. 이처럼 화목제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은 예배하는 사람이 제물의 일부를 되돌려 받아, 가족이나 이웃과 함께 잔치를 베풀고 기쁨으로 제물을 나누어 먹는 데에 있다. 그래서 주일 예배가 끝난 다음에 교회에서 점심을 먹는 것은 그저 주일 점심을 한 끼 해결하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배의 연장선, 아니 화목제의 예배 자체라고 생각해야 한다. 교우들이 함께 음식과 삶을 나누며, 하나님이라는 같은 근원에서 온 형제요 자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예배에서 수직과 수평의 차원이 균형을 이루게 된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해를 가져오는 제사, 평화를 가져오는 제사이다(마 5:23~24).
번제와 화목제 사이에 있는 차이에서 볼 수 있는 화목제의 정신은 제물을 처리하는 방식에 있다. 번제의 경우에는 가죽을 제외한 모든 고기를 제단불 위에서 살라 하나님께 드려야 했지만, 화목제물의 경우에는 고기의 기름과 피만 불태웠다. 나머지 고기는 제사를 드린 사람과 제사장이 먹을 수 있었다(레 3:16~17). 백성들은 화목제물에서 기름과 피는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었는데, 기름과 피는 하나님께만 속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름에는 힘과 에너지가 들어 있다고 생각했고(겔 34:16), 피에는 생명이 있다고 생각했다(창 9:4~6; 레 17:12~14). 이스라엘 백성은 음식물을 먹으면서도 생명과 힘의 근원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것은 힘에 대한 절제를 말한다. 또한 두 콩팥을 내장 등의 기름과 함께 드린 것은 이 부위가 사람의 여러 감정을 담는 기관으로 여겨,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뜻과 정성을 모아 드리는 의미가 있다.
화목제 규례는 사람의 먹을거리를 제한한다. 이것은 백성이 먹는 것을 통해서도 거룩함을 유지하기를 하나님이 바라신다는 점을 보여준다. 오늘날 가장 시끄러운 문제 가운데 하나가 살충제 달걀, 광우병, 메르스, 조류 독감 등의 먹을거리의 문제이다. 사람들은 먹을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적 방법을 도입하거나, 짐승들을 학대하면서까지 짐승들을 좁은 공간에서 공장식으로 대량 생산하고 학살한다. 식물도 마찬가지이다. 친환경 농법과 유기농이 쉽지 않아, 생산성과 이윤을 높이기 위해 유해한 농약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이익을 얻기 위해 하는 일이 결국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일으켜 사람을 죽게 만든다. 먹을거리에 제한을 두고, 힘과 생명의 원천을 침해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유전자 조작, 살충제 달걀 등에 암시하는 바가 많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사람이 먹는 음식에도 적용해야 하고, 그럼으로 짐승과 식물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이 사람과 함께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바울 사도는 모든 피조물의 구원을 간구한다(롬 8:21~22).
화목제에 나타나는 중요한 표현은 레위기 3장 11절과 16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음식'이다. 말라기 1장 12절에는 '야웨의 식탁'이라는 표현이 나와 제단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음식'은 '제물'에 비해 매우 거칠고 조야한 표현이다. '하나님의 음식'이라는 표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자신들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고백한다. 하나님은 백성과 함께 삶을 나누시는 분, 먹을거리도 함께 나누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레위기 21장 6절과 8절은 제사장이 거룩해야 하는데 하나님께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거룩해야 한다면, 그것은 거룩한 시간에 거룩한 장소에서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하기 때문이다. 거룩함이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제물을 '하나님의 음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식탁에 하나님을 초대하여 하나님과 함께 나누어 먹고자 하는 백성의 갈망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음식을 생존을 위한 수단, 입을 만족시키는 도구로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먹을거리는 하나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생명의 끈이다. 하나님과의 화해와 사귐, 이웃과의 화해와 사귐은 음식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가능해진다. 이러한 하나님과 백성을 이어주는 연대 사상은 신약에도 나타나는데(롬 3:25; 요일 2:2; 요일 4:10),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셨다. 그리고 이러한 화목제는 예수님이 제정하신 성만찬과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구체적으로 구현된다(마 26:17~19; 고전 11:25; 히 10:19).
화목제
레 3:1-17 / 코너스톤장로교회
번제가 죄 사함 받는 것이 목적이라면, 화목제는 죄를 용서 받았음으로 하나님과 더 깊은 친교와 교제의 자리로 나아가기 위한 제사 입니다. 영어성경인 NIV 성경에는 화목제가 Fellowship Offering 즉 “친교의 제사”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화목제사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우리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RSV 성경 번역에는 화목제를 “Sacrifice of Peace” ‘평화의 제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자, 그렇다면 화목제는 어느 상황 속에서 드렸을까요? 화목제를 드리는 경우는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세가지 경우에 따라서 우리는 화목제 속에 3가지 제사가 포함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첫번째는 ‘감사제’입니다. 감사할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둘째는, ‘서원제’입니다. 서원을 하거나 서원한 것을 갚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셋째는 ‘자원제’입니다. 하나님께 더 드리고자 하는 자원하는 마음이 있을 때 자발적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처럼 화목제는 3가지 상황에 드려졌습니다. 그리고 화목제는 3가지 상황에 따라 ‘감사제’, ‘서원제’, ‘자원제’로 불려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화목제를 드릴 때 나타나는 특징은 무엇일까요? 다섯 가지 제사 중 가장 기초가 되는 번제와 한 번 비교해 보겠습니다. 번제는 제물로 드릴 동물의 가죽을 제외한 나머지를 다 제단 불 위에 태워버립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에 하나도 남김없이 불에 타 태워버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화목제는 다릅니다. 3-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레 3:3) 그는 또 그 화목제의 희생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레 3:4)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취할 것이요 (레 3:5)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단 윗불 위에 있는 나무 위 번제물 위에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복잡해 보입니다만 쉽게 정리하면 화목제는 기름과 간, 콩팥 같은 ‘내장’만 제단에서 태워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왜 하나님께 ‘기름’을 드렸을까요? 오늘날 현대인들이 성경을 읽으면 이 기름을 ‘지방’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기름’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최고 값진 것’, ‘최고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름은 가장 값진 것, 가장 좋은 것을 말합니다. 레위기 3장 9절에 보면 양으로 화목제사를 드릴 때도 하나님께 “기름진 꼬리”를 바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학자들 사이에서 이 부위는 가장 귀한 부위를 말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레위기에서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릴 때 “‘기름’ 혹은 ‘지방’을 불살라 드리라”는 이 말은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려라.’ 너무나도 당연한 명령 같지만 정말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 삶에서 가장 값진 것을 하나님께 드리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목제를 드릴 때 기름을 드렸다는 것은 가장 값지고 귀한 것을 드렸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화목제사를 드리는 자는 제물의 [콩팥]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의 콩팥 즉 신장 안에 그의 깊은 감정과 마음 그리고 양심까지 담겨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마음이란 단어는 ‘콩팥’이란 단어로 쓰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서 11장 20절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와 있습니다. “(렘 11:20)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그런데 이것을 한글 성경이 아닌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사람의 마음 대신 사람의 콩팥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물의 간을 드린 것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간은 장기 중에서도 무겁습니다. 인간이 겪는 깊은 기쁨과 기쁜 슬픔을 간이란 장기를 통해서 표현합니다. 따라서 화목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 콩팥과 간을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새벽에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을 수 있습니다. 몸은 교회 안에 있지만, 마음은 세상에 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계속 돈 걱정하고 있고, 비즈니스 염려하고 있고,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에 마음을 빼앗긴 채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목제사를 드릴 때 콩팥과 간을 드리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이 자리에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이 예배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 우리의 중심을 원하십니다.
번제는 동물의 가죽을 제외한 나머지를 다 태워버렸습니다. 그러나 화목제는 이처럼 하나님께 기름, 콩팥, 간과 같은 내장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물을 가지고 온 사람은 제사장에게 제물의 가슴 부위와 오른쪽 뒷다리를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해 주실 때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땅을 기업으로 주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기업에 참여하게 하셔서 제사를 통해 나오는 제물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화목제사를 드릴 때 가슴부위와 오른쪽 뒷다리는 제사장의 몫으로 정해 주셨습니다.
3) 제사 드린 사람의 몫
자,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화목제를 드릴 때 소를 드려도 되고, 양을 드려도 되고 염소를 드려도 됩니다. ‘기름’ 즉 가장 좋은 부위, 간, 콩팥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가슴부위와 오른쪽 뒷다리는 제사장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은 제사 드린 사람의 몫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 화목제의 중요한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만약 화목제를 드린 사람이 감사제로 드린 것이면 그 고기를 이튼날 아침까지 다 먹어야 합니다. 레위기 7장 1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레 7:15)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이처럼 감사제로 드린 고기는 이튿날이 되기 전에 다 먹어야만 했습니다. 화목제를 드린 사람이 서원제 혹은 자원제로 드린 것이면 하루를 더 주어서 2틀에 걸쳐서 다 먹어야만 했습니다. 레위기 7장 16-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레 7:16) 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레 7:17) 그 희생의 고기가 제삼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레 7:18) 만일 그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제삼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못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죄를 당하리라” 만일 화목제물로 바친 사람이 제물을 다 먹지 않고 남기면 어떻게 됩니까? 7장 18절에 보니 하나님께 드린 화목제가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십니다. 공들여 드린 자가 하나님께 정죄를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린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바친 제물을 정해진 시일 안에 남김없이 다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럼 한 번 상상해 보시겠습니까? 화목제물로 어떤 동물들이 쓰인다고 했습니까? 소, 양, 염소 입니다. 예를 들어서 화목제로 소 한 마리를 바쳤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기름, 콩팥, 간과 같은 내장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가슴부위와 오른쪽 뒷다리는 화목제사를 집도한 제사장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소의 나머지 부분은 제사 드린 사람이 다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소 한 마리가 얼마나 큽니까? 웬만한 한우 한 마리 잡으면 먹을 수 있는 부위의 무게가 약 600kg 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소 한 마리 잡으면 100명은 충분히 배부르게 먹습니다. 소 한 마리 잡으면 100명은 충분히 배부르게 먹습니다.
레위기 7장에 따르면 이 큰 소를 이튿날까지 다 먹지 못하고 남기면 화목제사는 부정한 것이 되고, 그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제사 드린 사람이 하루에 다 먹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나누어 줘야 합니다. 가족들, 친지들, 친구들, 이웃들 다 초대해서 함께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화목제사는 늘 공동식사로 마무리가 됩니다. 함께 나누어 먹는 것으로 제사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화목제사의 특징은 봉헌자 뿐만 아니라, 봉헌자 주변의 사람들까지도 기쁨과 은혜의 혜택을 누리는 제사라는 데 있습니다.
화목제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예배의 참 모습을 보여줍니다. 신앙은 나만 하나님 잘 믿고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리는 기쁨과 평화가 나에게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이웃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예배의 완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을 누리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어서 받은 복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나 혼자만 잘 사는 것, 나 혼자만 잘 믿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의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함께 기쁨의 교제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되어, 형제와 함께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는 것으로 완성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되도록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 삶의 가장 값진 시간, 가장 귀한 소유물도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의 시간 우리 몸만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중심을 원하십니다 예배의 시작이 하나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것이라면, 예배의 완성은 우리 주변의 형제 자매와 함께 주님 주신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공유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화목제의 영적의미
레 3:1-17 / 조동호 목사
레위기 3장은 화목제에 관한 내용입니다. 화목제의 특징은 ‘예배자가 바친 고기를 먹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위해서 무교병과 함께 드립니다.
화목제는 예배자가 암컷과 수컷 중에서 소나 양이나 염소 가운데서 흠이 없는 것으로 회막문에 가져와서 그 동물의 머리에 안수를 함으로써 동물로 하여금 예배자를 대신하게 하고, 예배자의 죄를 그 동물에 전가시켜 시켜 희생시킵니다.
예배자가 동물을 죽여 피를 받아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립니다.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지만, 번제와는 달리 고기를 태우지 않습니다. 오직 콩팥과 내장의 덮인 모든 기름과 기름진 꼬리를 제사장이 제단의 불에 놓아 태웁니다.
동물의 가슴은 요제로, 오른쪽 뒤 넓적다리는 거제로 흔든 다음 가죽과 함께 제사장에게 주어지고, 나머지는 예배자가 가져다가 가족 친지들과 함께 그날에 다 먹어야 합니다. 제사장도 마찬가집니다. 먹다 남은 것은 불에 태웁니다.
화목제의 종류에는 자원제사와 서원제사와 감사제사가 있습니다. 특히 항해나 광야여행에서 무사히 돌아왔을 때, 병이 나았을 때, 감옥에서 나왔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감사제로써 화목제는 유월절 양, 제사장 위임식, 나실인의 서원 등에 드리며, 반드시 고기는 제사 드린 바로 그 날에 모두 먹어야 합니다.
화목제의 의미에는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평화, 언약체결에 대한 확증, 인간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이 받으시고 그 제물을 다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시는 의미, 곧 하나님의 선물로써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 선물을 제사장과 예배자와 예배자의 가족친지들이 함께 하나님 앞에서 나눔으로써 화목을 공고히 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선물을 하나님 앞에서 나누어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사이에 신비로운 연결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먹는 것이지 하나님과 함께 먹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행하는 성만찬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제사가 바로 이 화목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사람과 사람사이에 갈등과 반목을 샬롬, 곧 평화로 바꾸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선물, 곧 화목제물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삼으시고, 그의 피로 인한 구속을 믿는 인간들의 범한 죄를 용서하심으로서 당신의 공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 또한 예수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며, 죄를 벌하십니다. 한편,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범한 인간들이 모두 멸망 받기를 원치 아니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들의 죄로 인한 진노를 푸시고 원수된 죄인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로 친히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화목제물로 삼으셨습니다. 화목제물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신의 진노를 풀기 위해서 인간이 마련한 희생제물을 뜻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화목제물은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벌하기보다는 오히려 먼저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자기부정과 희생의 정신을 말합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평화, 가정의 평화, 지역사회의 평화, 더 나가서는 국제사회의 평화를 도모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실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고후 5:17-20).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공동식사를 통해서 평화 협정이나 협약 또는 계약체결을 인준하는 규정관습이 있었습니다. 이삭과 아비멜렉(창 26:30), 야곱과 라반이(창 31:54) 그러했고, 다윗과 아브넬이 그러했습니다(삼후 3:20). 쌍방간에 의견이 교환되고, 그것이 수용되고, 계약이 체결되면, 그것이 백성들에게 공포되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습니다(출 24:1-11).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계약의 하나님으로, 그들을 계약의 백성으로 믿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이 있은 후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야훼 한 분만을 그들의 신으로 섬기며, 그들은 야훼의 백성이 되기로 하나님과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하나님께 화목제사를 드렸고, 언약의 피뿌림을 받았으며, 그 제물을 나누어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열국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고, 제사장 나라가 되었으며, 거룩한 백성”(출 19:5-6)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약(舊約)이요 이스라엘의 선민계약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침례식 때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으로 인해서 죄의 종살이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시고, 성령으로 사는 새로운 삶을 주신 하나님 한 분만을 구세주로 모시고 섬기며,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새로운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新約)이요 그리스도인들의 선민계약입니다.
성만찬은 바로 이 새로운 선민계약체결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 2:9-10)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시는 행위입니다. 성만찬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공고히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귀중한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제사상에 올린 음식을 신(神)의 선물(膳物=gift)이라고 여겼습니다. 비록 제사상의 음식이 인간이 차린 음식이고, 다분히 잘 보살펴주시라는 뇌물의 성격을 띤 것이지만, 신(神)은 인간들의 정성을 받으시고, 음식은 예배공동체를 내리시기 때문에 선물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제사 음식은 신이 내린 선물이고, 예배공동체에 대한 신(神)의 뜻이 담긴 음식이기 때문에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반드시 이 제사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사용하던 ‘복덕방’이란 말이 바로 이 선물을 나누던 회관을 뜻했다고 합니다. 이 말이 토지나 가옥 중개업소란 뜻으로 한동안 사용되기는 했지만, 먼 옛날의 복덕방은 각종 부락제 때 제사상에 올린 음식과 살코기를 마을회관으로 옮겨와 나눠 먹던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먹고 마심으로 복을 받고(飮福=음복), 먹고 마심으로 덕담을 나누는(飮德=음덕) 신성한 장소가 복덕방이었던 것입니다. 복덕방에서 선물을 나누는 행위는 신의 뜻(神意=신의)을 나누는 행위였고, 한 공동체의 결속과 연대를 신의 명령(神命=신명)으로 이해하고 받아드렸던 엄숙한 행위였습니다. 제물은 이와 같이 마을 공동체를 강하게 결속시키고 공동 운명체임을 자각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해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성한 뜻을 받들어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곳이 복덕방이요, 성도들이 먹고 마시는 떡과 잔은 모두가 한 운명체임을 주님의 명령으로 받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의 구원과 축복을 위해서 외아들 예수님을 화목제물(和睦祭物)로 삼으시고, 구원을 위한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마련하신 화목제물 곧 선물인 것입니다. 이 선물을 나누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제물 곧 하나님의 선물을 상징하는 성찬의 나눔이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나누는 복덕방인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 모일 때마다 떡을 떼고 잔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