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농촌에는 협업을 위한 공동체인 두레가 어촌계 役割을 대신 했지만, 지금은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 조차 드믈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에서 農村 共同體가 완전히 파괴 되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파괴는 경제적 이유다. 그런데, 그 실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꼭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농촌은 박정희 산업화 시대부터 빈농의 아들 딸들이 마치 잡초 뽑히듯 뽑혀서 도시로 올라와 공순이 공돌이가 되면서부터 망가지기 시작했다.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은 오늘날 농촌의 산업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마을 길도 넓혀 시멘트 포장을 했고 지붕개량을 하면서 초가집을 發癌 물질이 펄펄 날라다니는 스레트로 바꾸었다. 게다가 시골 사람들이 정신적 위안으로 삼았던 우랄 알타이 족의 제사장의 후예였던 무당들을 미신으로 몰았다.
그 배경에는 현재 우리나라를 장악하고 있는 개신교도들의 정치적 힘이 있었다. 또한, 농민들이 일 할 때나, 애경사가 있을 때 즐겨 마셨던 건강에 좋은 발효주 농주인 막걸리를 금지 시켜 밀주로 단속하였다. 과거, 막걸리는 여유있는 집안에서는 마치 김장을 하듯 담가 먹는 집안의 必需品目이었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시골 동네 마다 꼭 존재했던 양조장에서 항상 사 먹을 수 있었다.
지금 전국적으로 유통되는 막걸리는 발효주가 아니라 화학주나 마찬가지다.
유통기한을 늘이기 위해 방부제를 집어넣고 얄팍한 맛을 살리기 위해 탄산을 비롯한 온갖 식품첨가제를 투여한 알콜성 飮料에 불과하다.
동네 서낭당 부근에 존재했던 공동경작지나 하천부지나 산을 개간하여 일군 화전 등을 국유화시켜 세금을 거두어 들이기도 했다.
서낭당 부근의 마을 공유지는 마을 사람들이 경작을 해서 마을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도 했고, 하천 부지나 산을 개간하여 화전을 하여 생겨난 땅은 땅이 없는 빈농들의 돌파구가 되기도 했다.
막걸리는 농촌 공동체에서 남성들의 위안이었으며, 무당은 여성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다.
그리고 마을 공유지는 국가의 세금이 바탕이 된 복지 정책이 없었던 시절, 마을 공동체에 스며있던 自發的인 공공 복지의 경제적 토대였다. 공유지가 존재했던 서낭당에는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했던 상여가 있었고 매년 무당을 불러 동네사람들은 마을 신에게 제를 올리기도 했다.
세계 10대 경제강국에다가 복지 정책도 자리를 잡아가는 대한민국에 굶어죽기도 하고 도시나 농촌에서 고독사하는 노인네가 수도 없이 발견되고 서울역 앞의 노숙자는 농촌 공동체가 존재하던 그 시절에는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었다.
그 가난한 시절 거지도 참으로 많았지만 거지가 굶어죽는 경우는 없었다.
심지어 거지들 조차도 공동체를 만들어 공동 생활을 하기 했다.
그러나, 박정희 시절에는 그나마 농촌 공동체가 겨우 유지 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협업 때문이었다. 농촌 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는 보조 수단인 무당이나 막걸리나 공유지는 사라졌지만,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도 근본적인 협업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협업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벼농사였다. 기계화가 되기 전의 농촌은 쌀 농사가 일년 농사의 전부나 마찬가지로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다.
마을 공동으로 벼 모종을 찌고 공동으로 줄을 잡으며 모내기를 하고 공동으로 수확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벼농사였던 것이다.
쌀은 그 당시 온 국민의 주식이었다. 돈으로 대신할 수 없었던 온 국민의 주식이자 간식의 재료였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쌀을 탈곡하고 난 볏짚은 집을 짓기 위한 재료였고 난방 재료였다.
겨울이면 논에 조금 남아있던 웅덩이를 삽으로 파서 미꾸라지를 잡아 추어탕을 끓여 마을 잔치를 하기도 했다.
벼농사는 그토록 우리 국민들의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그런 쌀에다가 경제적인 가치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통일벼를 만들어 수확량은 늘였지만 과거로부터 내려오던 기름이 잘잘 흘렀던 맛있는 쌀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통일벼의 수확은 농약과 비료가 필연적이었기에 전국의 농토를 황폐화 시켰다.
긴요하게 쓰이던 볏짚을 지붕개량이나 화석연료를 권장하기 시작하면서 천덕꾸러기로 만들어 버렸다.
농촌에서 시멘트길 조성과 화석연료 사용 및 농기계는 建設 財閥과 석유 재벌을 탄성 시키게 된 원인이 되었고, 재벌들은 건설사와 석유사를 가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인력으로 대신하던 농사일이 기계가 대신하면서부터 농촌의 협업체계인 두레가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돈을 꿔주면서까지 농기계를 권장했다. 농민들은 결국은 농협의 채무자가 되어 시달리게 되었다.
농촌 공동체가 완전히 망가진 것은 농민들이 벼농사를 돈이 안되는 것이라 여기고 거추장스런 것으로 생각하면서부터이다.
그 시점이 바로 중국과의 농산물 수입 개방이다. 농산물 수입 개방은 지푸라기처럼 잡고 있었던 농촌의 공동체를 완벽하게 파괴하였다.
농산물 수입 개방은 공동체의 파괴뿐만 아니라 수십가지에 달했던 농작물의 숫자를 오로지 돈이 되는 환금 작물로 대신하여 지금의 농촌에서는 불과 10개 내외의 작물만 기르는 실정이다.
게다가 정부는, 농산물 수입 개방으로 벼농사가 천대 받자, 농민들이 벼농사를 포기 할까봐 절대 농지로 묶어 규제하다가, 그나마 한미 FTA와 2015년 쌀 수입 완전 개방에 발 맞추어 돈 까지 줘가며 벼농사를 포기 하게 만들어서 그나마 겨우 유지할 수 있었던 쌀에 대한 보조금 조차도 아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전국의 농촌에서는 벼농사를 포기하는 농민이 속출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돈이 되는 작물을 석유로 재배하는 비닐하우스가 대신할 것이다.
요즘 강릉시 옥계면 금진리에는 포스코 마그네슘 공장이 들어섰는데, 그 옆에 논에는 비닐하우스가 한창 들어서고 있다. 그 이유는 농민들이 포스코로부터 보상금을 타내기 위한 것임에 실소를 금할수 없었다.
그 보상금을 노리고 토지 소유주의 자식들은 수시로 부모를 감시하고 형제들끼리 싸움박질이다.
농촌을 파괴한 것은 독재정권이었던 박정희 뿐만아니라, 우파들이 좌파 정권이라 믿었던 노무현 정부 시절에 농촌인구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농촌 공동체 破壞의 범인은 軍事政府나 우파 정부나 좌파 정부나 共同正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