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정 가는 길>
정용연 지음 | 비아북펴냄 | 2020. 12. 7. | 값 14,500원
| 232쪽 | 145*210 | ISBN 979-11-91019-07-0 (07910)
■ 책 소개
2020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다양성만화제작지원 선정작!
조선의 변방 ‘서북’과 역사의 변방 ‘여성’
긴 소외의 역사가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단단한 감동
조선 시대, 시집간 여성이 시댁의 허락을 받아 시집과 친정 중간 지점에서 어머니와 만나는 것을 ‘반보기’라 부른다. 딸이 반을, 어머니가 반을 걸어 가운데에서 만난다. 허락된 시간은 해가 지기 전까지다.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당연하던 시대, 결혼한 여성이 원 가족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흔치 않은 기회로 친정 방문을 허락받은 주인공 ‘송심’은 모처럼의 여유를 만끽하다가 연신 종종거리며 일하는 올케를 보고 위화감을 느낀다. 이야기는 그 순간 송심의 내면에서 일어난,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자각에서 출발한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감각. 그 후에도 여전히 ‘시집에선 아무 소리 못 하는’ 송심의 앞에 한자를 막힘없이 읽고 쓰는, 선명한 눈매에 총기가 가득한 동서 ‘숙영’이 나타나면서 송심의 인생은 조금씩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각자 흘러가는 듯하던 소외의 역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꺾이게 되는 시점은 1권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다. 두 여성의 우정을 잔잔하게 쌓아나가며 감정이입을 끌어내던 이야기는 어느 순간 방향을 틀어 “홍경래의 난이라는 시대의 격랑” 가운데로 망설임 없이 달려간다. 조선의 변방, 서북에서 차별을 참다못한 홍경래가 난을 일으키고,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나 있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그 틈을 가로지르며 교차점을 만들 때, 결과를 아는 이들은 탄식하는 한편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기대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낡은 역사에 렌즈를 낯선 각도로 놓고 보지 못했던 이야기를 찾아내는 일은 작가가 전작들을 통해 계속 해왔던 시도다. 서사를 따라 겹겹이 놓인 차별의 면면을 살피는 동안 투박한 듯 섬세한 그림체가 어김없이 묵직한 빛을 발한다.
불리지 않았던 이름을
지금 다시 꺼내 닦는 일
조선 시대의 성차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흔히 돌아오는 답이 있다. 지금과 그때는 다르다는 얘기다. 그런데 정말 지금과 그때는 다를까? 작가는 머리말에서 작품의 실마리를 가족을 통해 얻었다고 밝힌다.
“맞벌이를 하면서도 퇴근 후 가사 노동은 온전히 여자의 몫이었다. 단지 남자란 이유로 가사 노동에서 해방된 아버지와 삼촌들을 바라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 (…) 큰형수가 한 살 적고 작은형수가 한 살 많지만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를 존중했다. 기쁘고 슬픈 일을 함께 나누었다. 두 분을 보면서 여자들의 우정에 대해 생각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아끼는 마음.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 믿었다.”
-머리말 중
작중 송심과 숙영이 마주치는 무신경한 말들과 불합리한 요구, 날 선 비난은 지금 읽어도 그리 낯선 내용이 아니다. 송심은 나무랄 데 없이 살림을 이끌어나가는 맏며느리지만 아들을 낳지 못해 눈총을 받는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오빠의 어깨너머로 한자를 깨칠 정도로 총명한 숙영은 무뢰배 같은 남편의 행동에도 말 한마디 얹지 못한 채 속앓이만 한다. 이런 두 사람의 모습은 지금의 우리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끊어지지 않은 차별의 고리 속에서 지금과 그때가 다르다는 항변은 뜬구름처럼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작가가 조선 시대를 살았던 두 여성의 이야기를 지금 다시 꺼내든 이유이기도 하다. ‘그럴 법한’ 시대에서도 《친정 가는 길》의 주인공들은 순응하는 대신 불합리함을 느끼고, 각자의 방법으로 길을 모색한다. 서로의 상처를 돌보며 조금씩 나아가는 두 여성의 이야기는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선명한 의미를 가지고 다가올 것이다.
차별과 시대의 고랑을 넘어
오늘 우리 앞에 도착한 이야기
조선 시대는 분명 여성이 살기에 좋은 시대가 아니었다. 그런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질기게 살아남아 흔적을 남긴 여성들을 안다. 숨겨지지 않는 재능과 기지를 발휘해 이름을 남긴 소수의 여성 외에도, 우리는 ‘작가 미상’의 그늘 아래 숨은 수많은 여성의 목소리와 눈빛과 손끝을 본다. 함께 불렀을 노래들, 홀로 써 내려갔을 글과 그림 들을 통해 이들이 분명 존재했음을 안다. 《친정 가는 길》은 이름 없던 이들을 밖으로 끌어내어 송심과 숙영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만나게 한 다음 가만히 따라간다. ‘그 시대에 그랬을 리 없다’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기꺼이 뒤로 보내고, 작가는 두 여성이 나누는 연대와 애정이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탐구한다. 숙영은 송심이 한자를 읽을 수 있게 도와주고 송심은 숨죽여 우는 숙영의 어깨를 안는다. 서로를 위하고 아끼는 마음, 그 마음으로 두 사람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위태로우면서도 거침없는 행보에 자꾸 시선이 가는 이유는 이들의 이야기가 지금의 우리에게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여성의 희생이 당연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책은 사랑과 연대가 가진 잠재력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비범한 주인공이 아닌, 평범한 인물들이 손을 맞잡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말한다. 작은 돌 몇 개는 정말 운명을 틀 수 있을까. 그 답을 2권에서 이어 확인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 저자 소개
정용연
멀리 모악산이 바라다보이는 김제 들녘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만화가가 되겠다고 딱히 결심한 적은 없다. 가랑비에 옷 젖듯 어느 날 보니 만화가가 되어 있었다. 데뷔작은 스물네 살 되던 해에 발표한 단편 〈하데스의 밤〉이다. 이후 오랜 공백을 거쳐 출간한 첫 책 《정가네 소사》(전 3권)는 집안 이야기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그린 자전적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2013 부천만화대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고려 말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을 소재로 그린 《목호의 난: 1374 제주》는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첫 장편 역사만화였다. 글 작가와 협업으로 완성한 《의병장 희순》에서는 조선 최초의 여성 의병장인 윤희순 의사의 삶을 그렸다. 《친정 가는 길》은 조선 후기, 황해도와 평안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두 여성의 연대기다. 주인공 송심과 숙영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 맞서는 한편 서북에서 일어난 홍경래군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 추천사
“어느 양반가에 시집온 두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시대극이다. 꼼꼼한 고증과 묘사로 조선 후기 여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풍속도인가 보다 하면서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는 홍경래의 난이란 시대의 격랑 한가운데로 거침없이 진입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잔잔하면서 박진감도 넘치는 신선한 만화다.”
-박시백(《35년》의 작가)
■ 차례
머리말
1화 근친 覲親
2화 은송심 殷松心
3화 함숙영 咸淑英
4화 역 疫
5화 신공 身貢
6화 정염 情炎
7화 추노 推奴
8화 서북 西北
9화 봉기 蜂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