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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일 아침 맥레오드간지에 있는 터미널에서 6시에 출발하는 볼보버스를 탔다. 볼보버스는 차종이름인데 이곳선 일반대중교통수단인 버스보다 고급인 버스로 주로 관광객을 위한 로선에 투입된 약간 비싼 버스를 통칭해서 부른는 말이다. 좌석이 뒤로 제껴지고 쿠션도 좋다. 그리고 중간에 사람많은 마을로 돌아가지 않고 목적지에 바로간다.
이버스로 7시간후에 푼잡주의 암리차르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 푼잡주는 인도 유일의 시크교도가 다수인 주로, 황금사원인 시크교사원이 있다. 여기서 2박을 하고 14일 뉴델리로 다시 돌아가서 하루 잔다음 일정을 끝내고 각자 한국이나 필리핀으로 간다.
우리는 6명 우리부부, 김여사(56생), 하선생(59생), 이렇게 4인은 두달 인도,네팔 여행전체를 동행했다. 여행시작 한달 후 뉴델리에 다시 왔을 때 최(55생) 이(57생) 부부가 추가로 합류해서 한달 인도여행만 같이했다. 원래 출발때 부터 계획했던 일이였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호텔이 몰려있는 동네에 찾아가서 4명은 짐을 지키고 있고 집사람 양여사는 호텔을 찾아 나선다. 호텔방 이라는 상품을 고르는 것은 발품을 팔아야 좋은 상품을 고를 수가 있다. 호텔 방이라는 물건은 밖에 내놓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호텔 주인도 자기 물건이 비싼지, 싼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있어서, 터무니 없이 비싼 경우도 있지만, 좋은 방인데도 의외로 싼경우도 있다.
그래서 많이 보고 골라야 조은 방을 선택 할수있다. 이 일은 전적으로 양여사의 일, 열곤데 이상을 보고도 결정을 못하는 경우도 있어 같이 보러 다니다 보면 다리도 아프고 힘들어서 이제 그만 결정하자고 조르게 된다. 사실 양여사의 왼쪽 무릎은 3년전 수술을 해서 안조은 상태인데도 기를 쓰고 다니면서 방을 선택 한다.
짐을 지키는 사람들이 기다리다 지칠지경이 돼야 방이 결정되서 방으로 가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 그러나 나중에는 역시 공을 들여야 좋은 방을 얻는 다는사실을 깨닫게 되고는 한다.
호텔이 결정되면 지친 몸을 잠시 추스린 다음 식사를 준비하고 밥을 먹는다, 식사준비도 우리 몫, 그리고 최,이 부부는 따로 식사하고 절대 섞일려고 하지 않는 다. 섞였다 하면 자신들이 남의 먹을 것도 해줘야 될 거라는 걸 금방 파악 한것이기 때문이리라. 우리부부포함 4명, 최부부 2명 통상 이렇게 두팀으로 나뉘어 먹고 다녔다.
식후에 우리 부부는 다음 목적지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보러 간다. 다음 목적지로 가는 터미널위치, 교통편,시간을 파악하고 예약까지 해둬야 맘이 놓인다. 우리가 다음 이동을 확보 하려고 다니는 동안 우리 일행들은 호텔방에서 쉬든지 관광을 다닌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우리의 시간을 가질 수가있다. 그래서 피곤하고 지칠 때도 있지만 어차피 짊어져야하는 일이라 생각하며 다녔다.
암리차르는 펀자브 주 최대의 도시로 파키스탄 국경에서 25㎞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서 상업·문화·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1577년 시크교의 제4대 구루(Gurū)였던 람 다스가 암리타사라스(Amrita Saras)라는 신성한 저수지 주변에 건설한 도시로 암리차르라는 지명은 이 저수지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저수지 중앙에 세워졌던 사원은 구리로 된 돔형 지붕에 금박을 입힘에 따라 하리만디르 또는 황금사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시크교의 중심지였던 이 도시는 교세가 점차 확장되면서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1849년에 영국령 인도로 편입되었다. 1919년 4월 13일에는 잘리안왈라바그 공원에서 암리차르 대학살 사건이 일어나 379명이 사망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식민지 정부군이 정치집회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참극으로서 사건 발생지인 잘리안왈라바그 공원은 현재 국가기념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1984년에는 또다른 정치적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인도 군대는 황금사원을 장악하고 사원 안에서 저항하는 수백 명의 시크 분리주의자들을 공격해, 정확한 공식 집계는 아니지만 450~1,200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암리차르의 황금사원은 전 세계에 신도가 퍼져있는 수천만 명이 믿는 메이저 종교의 성지급 시설인 데다 화려하기까지 하니까 구경하는 사람이 많고 입장객 줄이 항상 긴 편이다. 입장비는 없지만 나갈 때 자기가 내고 싶은 만큼 기부금을 각자 자유롭게 낼 수 있고 강제성은 없다.
참고로 이곳에 입장하려면 몇 가지 규칙을 지켜야 한다.
암리차르에는 오늘날 견직을 비롯한 섬유직조·제분·정미·곡물가공·제혁·통조림제조와 각종 제조업 등 다양한 산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델리와 파키스탄의 라호르를 잇는 주요 간선도로변에 위치한 철도의 주요연결점으로 근처에 공항이 한 군데 있다.
황금사원의 정식명칭은 하리 만디르(Hari Mandir). 영어로 황금사원(Golden Temple)이라고 해도 통용된다. 하리만다르는 제4대 구루 람 다스(1534-81) 때 짓기 시작해서 제5대 구루(Guru, 시크교의 영적 지도자) 아르준(Arjun) 때 완공되었는데, 공사 전에 상징적인 의미에서 이슬람교 성직자인 미안 미르(Mian Mir)를 초청해서 하리 만다르의 기초 돌을 놓게 했다고 한다.
암리차르에는시내에 의과대학·치과대학·예술대학·기술대학이 있으며, 1899년에 설립된 칼사대학이 외곽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암리차르 행정구는 라비 강과 베아스 강이 흐르는 대체로 평탄한 평야지대에 위치한다. 기후가 꽤 건조하여 농업은 주로 상(上)바리도아브 운하체계 등 관개시설에 의존하고 있다. 밀·콩·옥수수가 주요작물이다.
암리차르의 고빈드가르 포트, 마하라자 란지트 싱이 지었다.
암리차르의 고빈드가르 포트 비교적 최근인 18세기에 세워졌다.
히다스페스 전투 또는 히다스페스 강 전투(Battle of the Hydaspes River)는 기원전 326년에 행해진 알렉산더 3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왕국군과 푼잡지방 일대의 영주로 파우라바 왕국 포로스가 이끄는 반 알렉산드로스 인도 제후군과의 전투였다.
분단의 아픔은 비단 한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인도,파키스탄 한민족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이 이념과 종교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이유로 갈라섰다. 하나라는 테두리로 묶여있던 민족은 그렇게 갈라섰고, 발조차 쉽게 디디지 못하는 먼 나라가 되었다.
와가보더는 파키스탄 펀잡주 라호르에서 24km, 인도 펀잡주 암리차르에서 32km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와가보더에서는 매일 해가 지기 두 시간 전, 대략 5-6시경에 국기하강식을 진행한다.
양국의 국경일 등의 중요한 날짜에는 그 인파가 더욱 늘어나 더욱더 뜨거운 열기의 행사를 즐길 수 있다.
판문점에서는 한민족으로 살아왔던 남과 북 사람들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 듯, 파키스탄에 위치한 라호르, 인도 푼잡의 와가보더에는 인도 파키스탄인들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위와 같은 행사는 1959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양국의 군인들의 힘찬 세리머니로 구성되어 있다. 팽팽한 긴장감, 자존심 싸움 등을 엿볼 수 있으며 분단국 간에 진행되는 행사라는 점에서 그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매일 수백 명의 관중들이 국기하강식에 참석한다.
여기 까지는 인도 쪽에서 바라본 국기하강식, 회색군복이 인도군
와가보더는 행사 시작 약 1시간 전에는 도착해서 착석해야 한다. 현장의 군인들이 자리를 배정하기 때문에, 좋은 자리에 앉고 싶다면 행사 진행 2시간 전에 가는 것이 좋다.
행진이 끝난 후에는 식의 마지막인 국기하강식이 이루어진다. 양국의 국기를 겹쳐 천천히 내리며 국기하강식을 끝낸다.
파키스탄 쪽은 빈자리가 많이 보이는 반면 인도 쪽은 자리가 모자랄 지경이다. 인구 12억8천의 인도와 2억의 파키스탄의 국력의 차이가 들어나는 현장이다.
첫댓글 국기하강식은 다큐에서 본 적이 있는데 직접 보았으니 실감이 많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