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順子烈女碑
위치 ; 한림읍 명월리 2042-2번지
유형 ; 비석(열녀비)
시대 ; 대한민국
비석 앞면에는 〔烈女梁順子追頌碑〕라 새겨져 있고, 해설문에는 〔烈婦人 順子는 濟州梁氏 學士公龍玉의 女이다. 稟質이 生特하며 얼굴이 玉 같고 志操가 어름(얼음) 같도다. 十八歲에 머리얹어 晋州秦氏處士公諱元熙의 아들 諱淳宗에게 시집왔다. 系子性宅은 從媤叔靜菴居士諱崙宗의 季子로 聚于密陽朴氏學士公性拜의 딸 福童하니 生二男一女라. 男에 榮敏 榮鐸이요, 女는 銀兒이다. 嗚呼痛哉라! 北傀의 南侵으로 六․二五動亂이 勃發하자 濟州農校에 在學中이던 夫君이 學徒兵으로 海兵隊에 志願入隊하여 仁川上陸作戰과 首都奪還 中央廳에 太極旗를 揭揚하는 데 참가했고 이어 一九五一년 六月十一日 六․二五 戰史上 가장 熾烈했던 揚口戰鬪에서 若冠二十三歲로 戰死했다. 이 悲報를 接한 烈婦人은 陰으로 呼天痛哭하였으나 媤父母에게는 더욱 精誠을 쏟아 조금도 슬픈 氣色을 보이지 않고 지내다가 夫君의 遺骨이 돌아와 安葬을 지내고 一九五二年正月三日에 夫君의 位牌를 가슴에 품고 飮毒呻吟中同年五月三日에 殉節했다. 이 갸륵한 忠烈을 길이 後世에 傳하기 위해 當時 濟州道警察局長 摹瑟浦警察署長 翰林邑長이 이 碑를 一周道路邊 고도물 入口에 세웠는데 該路擴張으로 明月臺 쪽으로 移轉하였던 바 一九八四년 颱風 「리호」來襲으로 流失되었기로 이제 明月橋 南쪽에 再建하여 오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崇高한 烈節을 우르러(우러러)보게 하노라. 西紀一九八七年 丁卯 淸明節 翰林邑長 玄昌旻 再建〕이라 새겨져 있다.
양순자는 명월리에서 태어나 낮에는 농사일을 열심히 하고 밤에는 야학에 다녔다. 4・3사건 때에는 17세의 나이로 마을 파수병 역할을 하기도 했다. 18세에 진순종씨에게 시집갔다. 남편은 1950년 제주농업학교 4학년 재학중이었는데 6・25전쟁이 일어나자 해병대로 지원입대하였다.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수도탈환작전에 참가한 그는 1951년 11월 강원도 양구 도솔산(13목표)전투에서 21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
남편이 전사하였다는 비보에 접한 부인은 부군의 유골안장을 마친 뒤 겉으로는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은 채 시부모를 더욱 정성껏 모시며 착실하게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부인은 1952년 12월3일 부군의 전사통지서를 가슴에 품은 채 양잿물을 마시고 순절하였다.
부인의 갸륵한 순절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당시 제주도경찰국장, 모슬포경찰서장, 한림읍장 공동명의로 한림1리 속칭 고도물(고두물) 앞에 열녀비를 세웠는데 그 후 도로확장으로 명월리 속칭 넙게로 이전하였는데 1984년 태풍 리호의 내습으로 유실되었다. 1987년 한림읍장이 다시 세웠다.
《작성 13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