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국
2022년 10월 29일(토) 외, 세곡천 주변
어느덧 서리 내리고 세곡천변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노란 산국이 오상고절(傲霜孤節)을 자랑한다.
산국의 향기 또한 그윽하다.
몇 송이 꺾어서 화병에 담아 사무실에 두었더니 국향이 실내에 가득하다.
최인호의 수상록인 『문장(文章)』(2006)에서 몇 구절 골랐다.
2. 산국
살아 있음의 의미
살아 있음은 초가을 황혼 무렵 풀을 스치는 바람소리 같은 것.
조용히 귀 기울이면 들을 수 있다. 풀과 풀이 엮는 풍금 소리를.
잠시 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에 우리들이 살아서 속삭이며, 악수를 하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있다. 우리도 언젠가는 떠날 것이다. 바람이 불면 잠시 누웠다가 일어서는 풀처럼.
침묵보다 더 어려운 것
침묵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말을 하되,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
다. 문으로 걸어 잠그고 깊은 산속에 숨어 있는 것보다 사람들 속에서 함께 어울리되 물들지
않음이 더 어려운 일이다.
깊은 산속에 있으면서도 그의 마음이 번잡하다면, 그는 비록 산속에 있으나 실은 장터에
나와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6. 청화국
8. 이질풀
실컷 빠져버려야 한다
오래전 중국의 선사 동산(洞山)에게 한 스님이 찾아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추위와 더위가 찾아오면 이를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이에 동산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않겠느냐.”
그러자 그 스님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가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입니까?”
이에 동산에 대답했다.
“추울 때 그대를 온전히 춥게 하고, 더울 때 그대를 온전히 덥게 하는 곳이다.”
9. 자주달개비
우리는 세상에 초대받은 손님이다
당신도 우리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고 생각하는가. 어쩌면 그럴 것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와서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길, 그 길이 인생이다.
어떤 종교에서는 다음 생을 위한 전생이라 이야기하고 어떤 종교에서는 천국으로 가기 위한
준비 단계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라도 인생의 소중함은 자신만의 것이다.
세계와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서 오직 나만이 세상에 초대받은 유일한 손님이다.
11. 산수유
스님들의 곧은 허리
10여 년 전, 배창호, 이명세 감독과 함께 지방 여행을 다녀왔다. 경허(鏡虛) 선사의 행적을
좇아 그가 주석(主席)으로 머물러 있었던 여러 절들을 내 발로 직접 찾아가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돌아올 무렵 수덕사 머물렀다. 그때 나는 참으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젊은
스님이건 노(老) 스님이건 승복을 입은 스님들은 모두 앉은 자세나 선 자세나 등이 곧고
자세가 단정하다는 사실이었다. 몸을 석탑처럼 바로 세우고 어깨를 펴고 단정히 앉은 자세는
참 보기 좋았다.
자세가 바르면 정신이 바르다. 이것은 틀림없는 진리이다. 자세가 바르면 정서가 불안할 수
가 없다.
몸은 상처에 불과하다
희랍 왕 밀란다는 나가세나 스님과 인생과 불교에 관해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가세나
스님은 멋진 비유로 동양의 깊은 철학을 서양의 제왕에게 들려주었다. 그중 ‘몸’에 관한 다음
과 같은 대화가 있다.
밀란다 왕이 나가세나에게 묻는다.
“스님, 출가한 사람에게도 몸이 소중합니까?”
“아닙니다. 출가한 사람은 몸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스님들은 몸을 아끼고 몸에 집착합니까?”
“대왕은 싸움터에 나가 화살을 맞아본 적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그때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기름약을 칠하고 붕대를 감은 것은 그 상처가 소중해서입니
까?”
“아닙니다. 상처가 소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상처의 살이 부풀어 곪았으므로 치료했을 뿐
입니다.”
“대왕이여, 그와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출가 수행자들이 몸을 돌보는 것은 몸이 소중해서가
아니라 수행을 더욱 잘하기 위해 그러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일찍이 ‘육신은 상처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출가한 수행자들은 몸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상처처럼 보호
하는 것입니다.”
나가세나 스님의 비유처럼 우리 몸은 상처에 불과하다. 우리가 몸을 보호 하는 것은 구멍
뚫린 옷의 상처를 실로 꿰매고 짜깁기하여 고귀하고 존엄한 벌거숭이의 진짜 ‘나’를 감싸고
보호하기 위함이다.
19. 산딸나무
그저 잊혀지기를
신부님은 언제나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셨다. 자신의 소유라고도 아무것도 없었다. 임기를 채
우고 다른 성당으로 떠날 때에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으셨다. 보던 책, 앉던 책상 등도 그대
로 남겨두고 그냥 몸만 훌쩍 떠나셨다.
신부님은 아무것도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몸마저도 잠시 지상에 파견
되어 머물다 사라지는 형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셨다.
신부님은 심지어 자기가 다른 곳으로 떠난 후에도 그냥 그곳에 남아 있는 신도들에게 ‘아무
개 신부님은 참 멋진 분이셨다’라는 평판이나 소문이 남아 있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떠나버
린 순간, 그 순간 그저 잊혀지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신부님이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은, 남은 사람들 입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런 의식적인 소망이, 자신의 말과 마음과 행동에 아주 조그
마한 위선을 심게 할지도 모른다는 노파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20. 때죽나무
천국의 눈물
에릭 크랩튼은 영국 태생으로 이미 1960년대에 지미 핸드릭스와 더불어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기타 연주자로 손꼽히던 사람이었다. 젊은 나이에 얻은 인기와 명성은 그를 마약과
방종으로 타락하게 했다.
그의 유일한 기쁨은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의 재롱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기쁨이었던
아들은 다섯 살 되던 해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이 뜻밖의 죽음으로 그는
자살 충동을 끊임없이 느끼면서도 슬픔 속에서 자식에 대한 애정이 절절이 배어 있는 곡을
작곡하게 된다.
그 곡이 바로 <천국의 눈물(Tears in Heaven)>이라는 감미롭고도 슬픈 노래이다. 또 그는
마약과 타락으로 물든 자신의 어두운 과거로 벗어나기 위해 <나에게 힘을 주십시오(Give
me Strength)>라는 곡을 작곡했다.
23. 새박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엄격한 수도생활과 평생의 침묵생활로 유명한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메멘토 모리
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이 말은 뜻은 이렇다.
“죽음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 그렇다, 죽음을 기억하자. 죽음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앞서 가고 뒤에 가는
순서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의 생은 서서히 죽어 가고 있는 하나의 길(道)일 뿐.
암호문 ‘로즈버드’
미국의 유명한 언론 재벌 허스트를 모델로 한 영화가 있다. 천재 오슨 웰스가 주연, 감독했던
<시민 케인>이라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신문 재벌 허스트가 죽을 때 중얼거렸던 ‘로즈버
드’라는 수수께끼의 말을 추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고독한 소년기를 보낸 허스트는 훗날 미국 역사상 가장 유력한 신문들을 창간함으로써 언론
왕국을 이뤄 명성과 부를 한꺼번에 거머쥐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로부터 버림받고
고아로 자란 어린 시절처럼 여전히 고독할 수 없었던 이 언론 황제의 입에서 죽음을 앞두고
흘러나온 ‘로즈버드’라는 한마디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화의 마지막 클라이맥스는 이 수수께끼의 단어가 그가 어린 시절 타고 놀던 썰매에 새겨진
글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온갖 명예와 부를 쟁취한 사람이라도 그가 진정으로 갖고 싶었
던 것은 썰매로 상징되는 가장 순수했던 소년기의 동심이었던 것이다.
로즈버드, 장미꽃 봉오리. 시민 케인이 평생을 통해 추구했던 동심의 장미꽃처럼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만의 숨겨진 장미꽃 봉오리가 있다.
27. 낙상홍
28. 좀작살나무
최고의 은총
태어날 때부터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는 감동적인 수필을 쓴 적이 있다. 대학생 때
읽었던 그 수필의 내용은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봄이 오면 나는 벚나무의 가지를 손으로 더듬어봅니다. 벚나무 등걸 속으로 흐르는 물을
나는 손끝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놀라는 기적을 그냥 지나쳐버리고 맙니다.
여러분들이 하루에 한 시간씩만이라도 장님이 되거나 귀머거리가 된다면, 저 벚나무의 꽃과
저 나뭇가지를 날아다니는 새의 울음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는 사소한 기쁨이야말로 최고의
은총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29. 배풍등
첫댓글 만추
♥노천명
가을은 마차를 타고 달아나는 신부
그는 온갖 화려한 것을 다 거두어 가지고 갑니다.
그래서 하늘은 더 아름다워 보이고
대기는 한층 밝아 보입니다.
한금 한금 넘어가는 황혼의 햇살은
어쩌면 저렇게 진줏빛을 했습니까
가을 하늘은 밝은 호수
여기다 낯을 씻고 이제사 정신이 났습니다.
은하와 북두칠성이 맑게 보입니다.
비인 들을 달리는 바람소리가
왜 저처럼 요란합니까
우리에게서 무엇을 앗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