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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제 / 불살라 드릴 예물
레 1:1-17
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4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5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6 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7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8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9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10 만일 그 예물이 가축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11 그가 제단 북쪽 여호와 앞에서 그것을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것의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12 그는 그것의 각을 뜨고 그것의 머리와 그것의 기름을 베어낼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다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에 벌여 놓을 것이며
13 그 내장과 그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14 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이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예물을 드릴 것이요
15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으로 가져다가 그것의 머리를 비틀어 끊고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피는 제단 곁에 흘릴 것이며
16 그것의 모이주머니와 그 더러운 것은 제거하여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던지고
17 또 그 날개 자리에서 그 몸을 찢되 아주 찢지 말고 제사장이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위기의 핵심은 크게 2가지로 제사장 나라(1-16장) "제사를 어떻게 드릴 것인가?"와 거룩한 백성(17-27장) "제사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다시 말해서 레위기는 예배와 삶을 위한 지침서입니다. 1장은 모든 제사의 핵심인 '번제'에 관한 교훈입니다.
불살라 번제로 드릴지니(1-9)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룩해야 합니다(레 11:44). 사람은 스스로 거룩할 수 없으니 대속물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본문 2절에 소나 양을 예물 곧 대속물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드리는 것이 번제입니다(3). 번제는 '불태우는 제사'라는 뜻으로 헌제자가 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하므로 시작됩니다(4). 이렇게 함으로써 동물이 자신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물의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라고 했는데 이것은 예수 십자가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히 9:12).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 후에 마지막으로 불살라 번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5-9). 이렇게 드린 제사를 화제라 했습니다.
향기로운 예물(10-17) 본문 10절 이하는 번제에 드릴 예물에 관한 말씀입니다. 당시에 최고의 제물은 소입니다. 소는 값이 비쌉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은 쉽게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기에 개인의 능력에 따라 소나 염소나 비둘기로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마저도 드릴 수 없으면 값싼 비둘기를 드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창세기 4장에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유는 믿음으로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맡기다'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 곧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을 의미합니다. 가인은 맡기신 일을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곧 불신앙이고 교만입니다(참고 엡 5:2; 빌 4:18).
적용: 당신은 어떤 예배자인지 살펴보십시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서 받으려고만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예배자를 찾으실까요(요 4:22-24). 오늘은 104주년 삼일절입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자신을 불살라 헌신한 믿음의 선배들처럼 하나님과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며 헌신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전쟁 중 중요한 지역을 지키던 부대가 적진에 완전히 포위되었습니다. 적은 비참한 죽임을 당하지 말고 항복할 것을 권했습니다. 지휘관은 모든 군인을 불러 모은 뒤 땅에 선을 그어놓고 말했습니다. "강요하지는 않겠다. 항복해도 좋다. 다만 나와 끝까지 싸울 사람만 이 선을 건너와서 내 편에 서라." 군인들은 한 명씩 건너오기 시작했고 결국 한 군인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싸우겠다고 건너왔습니다. 그때 유일하게 넘어오지 않은 군인이 대장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다리를 다쳐 걸을 수가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선을 제 뒤쪽으로 그어주십시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사기가 오른 부대는 최선을 다해 요충지를 지켰고 이후 지원 부대의 도움으로 승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설 교 >
레위기에 대한 개론적 고찰
레 1:1-2 / 피영민 목사
서론
출애굽기 40장은 성막이 완공되고 세워지는 내용으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는 이제 모세가 세운 이 성막에서 어떤 일들이 이뤄지는지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성막에서 이루어질 제사의 종류와 방법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레위기 전체 내용을 개론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Ⅰ. 레위기의 제목은 무엇인가?
레위기는 세 가지 종류의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레위기’(Leviticus)입니다. 이 제목은 모세가 명명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레위기의 계시를 쓸 때에 레위기라는 제목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레위기라는 명칭은 B.C. 3세기경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여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붙여진 것입니다. 헬라어로 번역된 성경을 ‘70인역’(Septuagint)라고 합니다.
B.C. 333년 헬라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은 그 당시 유럽과 중동지역을 제패하였고, 헬라어를 공용어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코이네 헬라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장로들은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 70인역에 보면 ‘레위기’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둘째, ‘제사장들의 법’(Law of Priests)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탈무드’라는 책에 보면 레위기의 내용을 두고 ‘제사장들의 법’이라는 명칭을 붙여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제사를 드릴 때에 제사장들이 지켜야 하는 법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두 가지 종류의 율법을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문서로 주신 율법을 히브리어로 ‘토라’라고 하고, ‘모세오경’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기록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구전된 율법’(Oral Tradition)입니다.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율법들을 유대인 랍비들이 정리해서 책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미쉬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미쉬나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해설을 붙였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탈무드’입니다. 그러니까 탈무드는 미쉬나를 포함해서 구전된 율법과 해설을 포함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탈무드를 중요한 경전으로 여기고 공부하여 지혜를 얻곤 합니다. 자녀 교육을 할 때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라는 유명한 내용이 탈무드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 탈무드에 레위기를 ‘제사장들의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유대인 학자들은 레위기에 기록된 첫 번째 히브리어 단어로 책 제목을 삼았습니다. ‘바이크라’라는 단어인데, 접속사 ‘봐브’와 ‘부른다’는 의미의 동사 ‘카라’가 합쳐진 합성어로, ‘그리고 그가 부르셨다’(And he called)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레위기의 계시를 주시기 위해 모세를 성막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히브리어 첫 단어인 ‘바이크라’가 레위기의 책 제목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레위기’(Leviticus)와 ‘제사장들의 법’(Law of Priests), 또는 ‘바이크라’(And he called)라는 표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Ⅱ. 레위기의 위치는 어떠한가?
레위기는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가운데 중간에 위치해 있고, 출애굽기와 민수기 사이에 있습니다. 이것은 레위기가 출애굽기와 민수기를 연결해 주는 책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모세오경은 원래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앞서 말씀드린 히브리어 접속사 ‘봐브’는 ‘봐브 계속법’이라는 히브리어 문법을 사용하여, 앞의 문장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레위기 1장은 출애굽기 40장의 내용과 바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성막을 완성하고 영광의 구름이 임한 후, 하나님이 모세를 성막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계시를 주셨는데, 1장 2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는 모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백성들에게 고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모세라는 중보자를 통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직접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중보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예표고,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보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점쟁이들은 신의 계시를 자기 귀로 직접 듣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보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신약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 사람은 신약성경을 부지런히 읽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막이 지어진 목적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신약시대의 예배와 같습니다. 레위기는 예배의 본질과 방법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결코 제멋대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제멋대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이런 것도 예배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청교도들과 침례교도들은 예배의 요소에 관한 원리 가운데 소위 ‘규제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를 따랐습니다. 규제적인 원리란 오직 성경에 허락된 요소만 예배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시 성경에 허용된 것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개신교라도 루터교는 규제적 원리보다 조금 이완된 원리를 따랐습니다. 성경이 금하지 않은 것은 예배의 요소로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다는 ‘규범적 원리’(Normative Principle)입니다. 성경에 허락된 것만 쓴다는 규제적 원리와 성경이 금하지 않은 것을 쓸 수 있다는 규범적 원리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루터교가 따르는 규범적 원리가 좀 더 이완된 원리이고, 침례교는 다소 엄격한 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침례교는 왜 이런 엄격한 원리를 따르는 것일까요? 이유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예배와 관련된 대부분의 것들이 대단히 엄격한 규제를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제멋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침례교인들은 침례도 물을 뿌리는 세례와 같이 약식으로 하지 않고 완전히 물에 잠기는 침수례로 합니다. 예수님도 요단강에 가서 침례를 받으셨고, 에티오피아 내시도 침례를 받을 때,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라고 하였습니다. 약식 세례라면 그냥 동네에서 해도 될 것을 왜 예수님은 요단강까지 가셨고, 에티오피아 내시도 물이 많은 곳을 갔겠습니까? 세례는 많은 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침례교인들은 침례도 성경에 허락된 ‘침수례’를 받는 것이고, 예배의 모든 요소도 성경이 허락한 것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침례교도들은 예배에 관해서 엄격한 규제적 원리를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떡과 포도주를 대신해서 빈대떡과 막걸리로 하면 안 되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성경에 허락된 것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청교도와 침례교도들이 따랐던 원리입니다.
Ⅲ. 레위기의 계시가 주어진 기간은 언제인가?
모세가 성막을 완공한 이후 하나님은 모세에게 레위기의 계시를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모세가 성막을 완공한 때는 출애굽한 지 둘째 해 1월 1일입니다. 그리고 민수기 1장 1~2절에 의하면 둘째 해 2월 1일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시기를 시작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민수기’(Numbers)는 백성의 숫자를 계수한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숫자를 계수하기 시작한 것이 2월 1일입니다. 20세 이상 장정들의 숫자를 계수해 보니 603,550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한 사람 중 남자 장정들의 인구를 세었다는 것은 여자들과 아이들의 숫자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를 포함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는 약 200만 명이 넘는 엄청난 숫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민수기 10장 11절에 의하면 구름기둥이 떠올라 시내광야를 떠나게 된 때가 2월 20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성막을 세우고 30일 동안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30일이 다 지난 후 인구조사를 한 다음 20일에 시내광야를 떠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에 관한 계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지 1년이 지나고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해서 30일 동안 주어진 것입니다. 민수기 9장 1~2절에 “애굽 땅에서 나온 다음 해 정월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으로 유월절을 그 정기에 지키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월 한 달 동안 레위기의 계시를 주셨는데, 여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기간은 6일이었습니다. 해, 달, 별, 하늘, 땅 등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이 지구가 아주 오랜 세월동안 생성된 것이 아닙니다. 6일이 걸렸을 다름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는 6일이 걸렸는데, 성막에 관한 계시를 주실 때는 40일이 걸렸고, 제사에 관한 계시는 성막이 완성된 후 30일 간 또 따로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막과 제사에 관한 계시를 주신 날수를 합하면 총 70일이 소요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구원에 관한 계시를 주실 때 70일이 걸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창조’(Creation)하실 때는 6일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인류와 세상을 새롭게 ‘새창조’(New creation)하시는 일은 70일이 걸린 것입니다. 이는 인류가 구원받는 일이 더욱 영광스럽고 존귀한 일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레위기의 내용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백성들에게 주신 간접적인 말씀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모세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그대로 전달했을 뿐입니다. 여기에는 모세의 사견이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고로 레위기는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비중 있게 생각하십니다.
Ⅳ. 레위기의 주제는 무엇인가?
레위기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흔히 생각하듯이 구약시대의 유대인 제사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의 주제는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이심을 보여주는 것이 레위기의 핵심주제입니다.
누가복음 24장 27절에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모세가 자기에 관해 쓴 것이라고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또 누가복음 24장 44절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열 한 사도를 만나셔서 말씀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 등 구약성경 전체가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46~47절에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모세오경을 기록했는데, 그 모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매우 단순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레위기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 죄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어 주셨고, 아울러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주시는 대제사장이 되어 주셨다는 것이 레위기의 주제인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레위기 같은 책이 신약성경의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에는 레위기의 핵심적인 개념(제사, 제사장, 피 흘림 등)들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신약성경에 레위기의 개념이 사용되었을까요? 그것은 레위기에 있는 핵심적인 개념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두 실현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 “구약은 무엇이고 신약은 무엇이냐?”고 물으셨는데, “구약은 오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신약은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더니,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으셨고 안수를 잘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신약은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Ⅴ. 레위기는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총 27개장으로 이루어진 레위기는 정확하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16장까지는 “죄인 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가?”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법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죄인 된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모태에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원수 짓만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죽으면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개인의 생각입니다. 자기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죗값은 사망입니다. 인류에게 사망이 온 것은 죄 때문입니다. 만일 인류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죽지 않고 영생하는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죄 때문에 인류에게 사망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죽지 않는다고 아무리 주장한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활해서 영생을 누리게 되는데, 그 전에 죄인 된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과 화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죄인은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을까요? 레위기 1~7장까지는 5대 제사(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는 죄인 된 인간이 희생제물의 피흘림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반드시 희생제물과 그 피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할 희생제물의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 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구원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7장까지는 희생제물이 피를 흘려야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다는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8~10장까지는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려면 제사장이 필요하다는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제사장은 아론과 그의 네 아들들이었습니다. 아들들의 이름은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이었는데, 첫째 나답과 둘째 아비후는 다른 불로 분향했다가 불타 죽고 말았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제사장은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제사장이 있어야 하고, 죄인들은 그 제사장의 수고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인 된 인간에게는 말씀대로 100%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죗값을 갚아주시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하나님과 절대 화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천국 갈 수 있다고 착각하고 살아가다가는 모두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 때 가서 목사가 똑바로 가르쳐줬어야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죄인 된 인간에게는 희생제물과 제사장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희생제물과 제사장이 되어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11~15장까지는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됨으로 오염된 존재로 살게 되었고, 오염된 환경가운데 살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1장은 ‘음식규례’를 다루고 있는데,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음식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왜 갑자기 희생제물, 제사장에 관한 말씀을 하시다가 음식에 관한 내용으로 전개되었는지 의문이 드실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죄로 말미암아 음식조차도 오염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2장은 여자가 ‘자녀 출산 후에 행해야 할 정결예식’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부모로부터 죄성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것과 끊임없이 전수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13~14장은 ‘문둥병에 관한 규례’로, 사람의 손, 이마, 몸, 그리고 살고 있는 집에도 문둥병이 발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기능과 그가 살고 있는 환경이 모두 죄로 오염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심신이 금방 쇠약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죄로 오염되었고, 불합리한 일들과 부조리한 일들이 만연하게 퍼져있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악한 세상 속에서 의롭게 살아가는 것이 매우 힘든 것입니다.
15장은 ‘유출병에 관한 규례’입니다. 유출병은 몸에서 피가 계속 나오는 병입니다. 인간의 자범죄는 인간의 부패한 마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유출병이라는 예표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16장은 ‘대속죄일에 관한 규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1년에 단 하루,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소 위에 뿌려 백성들의 죄를 일년씩 용서받는 규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무리 죄악 된 환경 속에 사는 죄인들도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받으시고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속죄는 일년에 한 번씩 용서받는 것이고, 이것은 예표입니다.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십자가의 희생제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 한 번의 제사를 가지고 영원히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히브리서 9장 11~12절에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인 된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1~16장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17~27장까지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획득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어떻게 동행하며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문제입니다. 18장은 인간의 성생활에 관한 규례입니다. 근친상간, 수간, 동성연애는 하나님이 엄금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를 하면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이 세 가지를 절대로 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모, 형제, 이웃 간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몸에 무늬를 넣는 문신을 금하셨습니다. 요즘은 운동선수들의 몸을 보면 문신이 가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별력이 없는 청소년들은 그런 것들을 보고 멋있다고 따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문신을 금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 절기를 잘 지키고, 안식년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 받는다는 것,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키고, 십일조를 내야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결 론
인간이 겪고 있는 모든 문제는 ‘생로병사’라는 한 단어로 정리됩니다. 그런데 이 생로병사의 문제는 결국 한 가지 문제로 귀결됩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성공하면 뭐 합니까? 이 세상의 성공은 별 볼일 없는 것입니다. 권력이 있고 부유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획득하고 그 교제를 어떻게 하면 잘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지에 대한 것인데, 이것은 레위기를 보면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는 이 주제를 예표로 다루고 있습니다. 짐승제사라는 것을 통해 예표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할 답이 되십니다.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다른 인간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인간이 어떻게 죽음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죽어도 다시 살고, 부활해서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생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과 화목하게 살아가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향기로운 냄새, 번제를 드리라
레 1:1~9 / 김경진 목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예배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성경 레위기입니다. 번제를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말씀, 특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는 이 명령이 유효한지 질문하게 되는 본문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구약의 말씀대로 제사를 드리지는 않습니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초대교회 교인들도 구약의 제사는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다고 전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제사에서 자유롭습니다. 구약의 제사를 넘어섰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단번에 유일하고도 유효한 제사의 희생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께 드릴 제사나 제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제사를 무시하고 지내도 될까요? 사실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 역시 여전히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구약의 제사를 드리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명하신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을까?’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다섯 가지 제사를 명령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중 하나인 ‘번제’에 관한 내용입니다. 번제는 희생제물 전부를 태우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계약을 맺는 제사가 바로 번제입니다. 이처럼 가장 기본이 되는 제사이기 때문에 다양한 구약의 제사들과 함께 드려질 수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제사장들은 번제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번제를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하나님이 어떤 예배자를 찾으시는지, 어떤 예배를 구상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레위기 1장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번제를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는 크게 세 종류의 제물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의 종류는 3절, 10절, 14절에 등장합니다. 먼저 3절입니다.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그리고 10절입니다. “만일 그 예물이 가축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14절입니다. “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이면”
하나님은 번제를 제물로 드릴 때, 소를 바치거나, 양이나 염소를 바치거나, 혹은 새를 바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제물의 크기를 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격도 큰 차이가 났을 것입니다. 소 또는 새입니다. 심지어 새는 산비둘기입니다. 어디서든 잡을 수 있는 짐승입니다. 왜 이렇게 큰 차이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번제를 드리라는 명령에 또 다른 단서를 붙이지도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해 “소를 바치든, 양과 염소를 바치든, 새를 바치든, 모두 번제로 받아주겠다.”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들도 예배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나아가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도 부르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운 초청입니다.
믿음이 약해 하나님께 큰 것을 드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하나님께 너그럽게 드리길 원치 않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은 소를 바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새를 드리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물의 종류를 따지지 않으시고, 새든지 소든지, 그 어떤 것도 제물로 받으시며 용납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자신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마음이 가난하든지, 믿음이 가난하든지, 경제적으로 가난하든지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에 상관없이 당신께 나오는 자들을 받으시겠다고 오늘 본문을 통해 표명해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자 자신이 서야 합니다.
그렇다면, 번제를 드리는 절차는 어떻습니까? 소와 양, 새를 바치는 과정이 조금씩 다르지만, 그 정신만큼은 일치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소를 제물로 바치는 절차를 자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조금 더 주어를 명료하게 밝히고 있는 새번역으로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3절의 말씀입니다.
바치는 제물이 소를 번제물로 바치는 것이면, 흠 없는 수컷을 골라서 회막 어귀에서 바치되, 나 주가 그것을 기꺼이 받게 하여라. (레위기 1:3, 새번역)
이 말씀에서부터 번제 드리는 절차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선 예배자는 하나님께 예배 곧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막 앞으로 나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제사 드리는 장소를 지정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려면 성막 가까이 나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예물을 가진 사람이, 제사를 드리려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려는 그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직접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 제물만 보내서는 안 됩니다. 다른 것만 보낼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 모든 것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주님 전에 가까이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자가 거쳐야 할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4절에 나타납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번제물의 머리 위에 자기의 손을 얹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을 속죄하는 제물로 받으실 것이다. (레위기 1:4, 새번역)
두 번째로 예배자는 자신이 가져온 제물의 머리에 안수해야 합니다. 이것을 통해 제사 드리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제물에게 전가시킵니다. 즉 “내가 죽어야 할 사람인데, 네가 죽는구나. 네가 죽어야겠구나.” 하고 자신의 죄책을 희생제물에게 넘겨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이제 매우 중요한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갑니다.
그런 다음에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거기 주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아야 하고,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은 그 피를 받아다가 회막 어귀에 있는 제단 둘레에 그 피를 뿌려야 한다. (레위기 1:5, 새번역)
요즘 새벽기도회에서 성막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성막의 뜰은 가로와 세로가 약 100규빗, 너비는 50규빗입니다. 오늘날 수치로 환산하면, 약 45미터 길이에 23미터 정도 되는 너비의 뜰입니다. 뜰 안에는 성막, 즉 지성소와 성소가 있는 건축물이 있습니다. 성막의 길이는 13미터 정도며, 성막을 둘러싸고 좌우에 여백이 있어야 하므로, 아마 번제단은 성막 뜰 중앙쯤에 자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주위에서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수송아지를 잡아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소를 직접 살해하라는 뜻입니다. 누가 하라는 말씀입니까?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배자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려는 사람은 예배의 자리에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라는 말씀입니다. 포로기 이후에는 레위인들에 의해 제사가 대신 드려지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예배자들이 적극적으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길 원하신 것입니다.
예배자는 예배의 자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예배자가 해야 하는 일,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을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레위기 1장 6절 이후의 말씀입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저며 놓으면,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이 제단 위에 불을 피우고, 그 불 위에 장작을 지피고,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이, 고기 저민 것과 그 머리와 기름기를 제단에서 불타는 장작 위에 벌여 놓아야 한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내장과 다리를 물에 씻어 주면, 제사장은 그것을 모두 제단 위에다 놓고 불살라야 한다. (레위기 1:6~9 중, 새번역)
이것이 절차입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에는 제사장이 많은 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정작 하나님은 제사 드리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일을 하도록 요청하십니다.
첫째, 제물을 회막 어귀까지 끌고 와야만 합니다. 둘째, 제물의 머리에 손수 안수해야 합니다. 셋째, 제물을 직접 살해, 곧 죽여야 합니다. 넷째,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저며 놓아야 합니다. 다섯째, 내장과 다리를 물에 씻어 제사장에게 건네줘야 합니다. 모든 소를 잡는 제사의 과정에서 제사 드리는 사람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제물의 피를 받아서 제단 사방에 뿌리는 일입니다. 제단에 불을 피워놓고 있다가 제물을 씻어 올려주면 그것을 올려놓는 일을 합니다. 장작 위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모든 제물을 태우는 일을 제사장이 합니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을 제사장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예배자, 제사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제사 드리는 자의 상황을 오늘 우리 예배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가 예배드릴 때 그저 방관적으로 구경하듯이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든 예배 절차는 목사님이나 예배 인도자나 혹은 기도자가 대신해 주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저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배자는 적극적으로 예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찬양과 기도, 말씀과 봉헌, 이 모든 순서에 적극적으로 우리의 육체와 마음과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예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배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희생제물을 탐내는 저급한 신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을 바탕으로 조금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성경은 번제에 대한 절차를 마무리하며,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위기 1:9 중)
이 말씀의 뜻은 ‘번제는 불로 드리는 제사인데, 이렇게 번제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냄새로 받으신다’라는 뜻입니다. ‘향기로운 냄새’라는 말이 흥미롭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의 냄새를 맡으신다는 것입니다. ‘제물이 타는 냄새를 맡으신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제물의 피의 냄새를 맡으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이 과연 무슨 뜻일까요?
고대 설화 중에 노아의 홍수와 유사한 길가메시 서사시(Gilgamesh Epic)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대홍수를 피한 ‘우트나피쉬팀’이라는 분이 제사를 드립니다. 그때 제물이 타는 냄새를 맡고 수많은 신이 파리 떼처럼 몰려왔다는 기사가 이어집니다. 이 내용이 전하는 바는 ‘인간에게는 적대적이면서도 제물이 타는 냄새에는 파리 떼처럼 달려드는 저급한 신들’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라는 이 구절은 자칫, 하나님을 고기 냄새를 탐하는 저급하고 배고파하는 신으로 폄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그러한 하나님이실까? 고대 근동의 그러저러한 신들과 같은 종류의 하나님에 불과하신 분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제사, 곧 이 번제와 같은 제사를 거절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음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 1장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이사야 1:11)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제사는 번제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희생제물이 타는 냄새나 피의 냄새를 원하시는 게 아님을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냄새에 탐닉하여 게걸스럽게 달려드는 저급한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향기로운 냄새는 그와는 전혀 다른 냄새입니다.
희생제물을 향한 비통함과 침통함을 아는 자가 진정한 예배자입니다.
성막에서 제사 드리는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성막의 뜰은 흰색 세마포로 싸여 있습니다. 성막으로 들어오는 문은 약 9미터입니다. 그곳에는 기둥이 넷 있습니다. 휘장은 청색과 자색과 홍색 실로 수놓아진 천으로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 안에 번제단이 놓여 있습니다.
기둥을 통과하고, 휘장을 통과하여, 소를 몰고 성막 뜰 안으로 제사 드리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가로와 세로가 2.3미터, 높이는 1.3미터인 번제단이 보입니다. 번제단의 네 모서리에는 동으로 된 뿔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늘 피가 묻어 있었기에, 여전히 피가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마치 코뿔소의 뿔에 받힌 동물의 내장에서 피가 흘러나오듯이 동으로 된 뿔에서 피가 흐릅니다. 그야말로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제단입니다.
제물을 드리려는 사람이 소의 머리에 안수합니다. 분위기는 도살장과 같습니다. 안수 기도를 하며 소와 눈이 마주칩니다. 소가 자신이 죽어야 하는 운명인 줄 알았는지 눈물을 흘립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네가 대신 죽는구나. 참으로 잔인하지만, 내가 살아야 하겠기에….” 그렇게 되뇌면서 소의 머리에 안수합니다. 소를 단단히 묶습니다. 이후 소의 머리 부분으로 다가갑니다. 소의 목에 칼을 깊숙이 꽂습니다. 피가 살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아래에는 대야가 있습니다. 동으로 만든 대야, 그곳으로 피가 흘러내립니다.
소는 일어서려고 발버둥 치다가, 몇 번을 움직이다가 그만 깊은 잠이 듭니다. 피는 계속 흘러내립니다. 제사장은 대야에서 피를 손에 묻히고는 번제단의 네 뿔에 바릅니다. 또 다른 피입니다. 앞서 죽었던 소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제단에 또 다른 소의 피가 발라집니다. 그리고 피가 뿌려집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미안하구나.” 아마도 제사 드리는 이가 현장에서 이렇게 속삭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너무도 무거운 부담감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번제가 드려지는 장면은 늘 이렇게 참혹합니다.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피가 튀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피가 새하얀 휘장에 묻었을 수도 있습니다. 제물의 가죽이 벗겨지고 내장이 드러납니다. 그것을 드러내는 순간, 제사장들이 가져가 불에 넣고 태워버립니다.
대야에 받아진 피는 제단 위에 부어집니다. 제단은 밑바닥이 없습니다. 그냥 땅입니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피를 아마 제단에 있던 불이 다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피는 땅으로 스며들어 갔겠지요. 또 다른 소의 피가 그렇게 또 땅으로 들어가고, 또 다른 소의 피가 또다시 땅으로 스며들었을 것입니다. 온통 피 냄새가 진동하고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옆에서는 또 다른 소가 죽어갑니다. 그리고 뒤를 이어 또 다른 소가 들어옵니다.
이 자리에서 제사 드리는 예배자는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그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그 마음이 느껴지면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침통함,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희생되는 소에 대한 미안함, 자신이 죽어야 할 그 자리에서 대신 죽어 나가는 소에 대한 비통함….
예배자는 소가 죽어 나가는 모습, 피 흘리며 불태워지는 순간을 함께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기 자신이 죽어 나가고, 자신이 피 흘려지고, 자신이 불태워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마치 전장에서 유일한 생존자로 돌아가듯이, 모든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모두 다 태우고, 자신만이 살아서 회막 문을 나섭니다. 그것이 바로 번제입니다.
하나님께 ‘향기로운 마음의 냄새’를 올려 드리는 예배자가 됩시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진정한 제사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번제의 절차 속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번제는 절차만으로는 그 의미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으로 들어가서 제사를 들여다보고, 내가 그 자리에서 제사 드리는 자가 된다면, 그 의미를 보다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자신을 죽이는 예배입니다. 자신을 불태우는 예배입니다. 자신을 조각내는 예배입니다. 제물과 함께 타들어 가는 예배입니다. 그것을 경험하며 애통해하는 예배입니다. 그런 예배자를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시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6~17)
우리는 한 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단번에 유효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성소로 몸소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 그 뜰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 위에 올라서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채찍을 맞으셨고,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고, 모든 피를 다 흘리시며 물까지 쏟아 운명하셨습니다. 그분의 피는 갈보리 언덕의 땅이 받아 마셨습니다. 하늘과 땅이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 주신 제사, 번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제공하신 제사입니다.
그 자리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주님 곁에 섰습니다. 어떤 이는 창으로 예수님을 찔렀고, 어떤 이는 주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었고, 어떤 이는 주님을 부인했고, 어떤 이는 주님을 팔아넘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가복음 23:3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해 죽임당하신 예수님 곁에서 그분의 고난당하심, 곧 그분의 죽음의 자리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함께 극명하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부활도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소망의 성도 여러분, 예배는 주술적인 놀이가 아닙니다. 예배는 값싼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예배는 관찰할 만한 흥미로운 예식이 아닙니다. ‘마음의 냄새’입니다. 향기로운 냄새,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냄새를 맡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향해 감사함으로 우리의 마음의 냄새를, 향기로운 그 냄새를 올려 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번제와 십자가
레 1:1-17 / 배영진 목사
오늘은 번제와 십자가에 대하여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레위기를 3월 한달간 묵상할텐데, 일반 성도의 입장에서 레위기는 수월하게 읽혀지는 책이 아닙니다. 레위기는 좀 어렵기도 하고 비교적 복잡하게 여겨지는 성경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레위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사실 더 깊은 데 있습니다. 도대체 이제사들이 오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이것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제사도 안드리는데, 이 레위기가 내게 어떤 의미가 있나? 왜 이걸 읽어야 하나? 이런 겁니다. 그냥 옛날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얘기로만 느껴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신앙생활에는 오늘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가 없습니다. 왜 없는가? 그것은 레위기 제사가 우리와 상관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제사들이 모두 완성됐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레위기의 모든 제사를 십자가에서 모두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으로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쁘게 받으신 제사예요. 그런데 레위기는 제사장이 있고 제물이 있는데, 십자가는 제사장이 제물입니다. 예수님이 제물이고, 제사장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레위기 1장에 나온 번제로 십자가를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드리는 예배안에, 이 다섯가지 제사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다섯개의 제사를 알려주십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이 다섯가지 제사의 모든 의미가 십자가에 다 들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시내산에서 2년을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뭘 했을까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중요한 두가지 일, 언약을 맺었고 성막을 지었습니다. 언약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인데, 너희는 나와 언약을 맺은 내 백성이다, 너희는 이집트 바로의 노예가 아니고, 내 거룩한 백성이다. 정체성을 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실 때 이스라엘이 이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으면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했지만 죄의 본성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성막을 지으라 하십니다. 성막에서 하는 중요한 일은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죄를 해결하라는 것, 거룩함을 상실한 백성이 하나님앞에 거룩함을 회복하는 길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의 마지막은 성막을 짓습니다. 성막에서 하는 주된 일은 뭔가? 죄값을 대신 지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시대 출애굽을 한 거룩한 백성들이, 죄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었어요.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 이후 구원받아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레위기 1장 번제로 우리 예배를 살펴봐야 합니다.
첫째, 대속입니다.
2절을 읽어봅니다. 이 제물은 뭔가? 대속물입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짐승을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3절에 이것을 하나님은 바치는 제물, 번제물이라 하시는데 이게 대속물입니다. 영어로는 ransom, 몸값이라고 합니다. 대속이란 뭐예요? 대신 값을 치른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죄지은 사람이 죄값을 대신 지불하려면 자신의 가축 중에, 소나 양이나 염소를 끌고와 하나님앞에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무슨 뜻인가?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 죄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방법은 오직 하나, 대속 이거 하나예요. 대신 값을 지불한다, 이 방법밖에 없어요. 그러므로 죄인인 나는 어때요? 나의 대속물이 필요합니다. 구약시대는 죄를 지으면 죄인이 자기 대속물로 가축 한 마리를 끌고오는 겁니다. 대속이 아니면 뭐예요? 자기 죄를 자기가 지불해야 하는데, 죄값은 사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대속이라는 유일한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죄문제를 다루십니다. 십자가로 설명합니다. 내가 하나님앞에 죄를 지었는데 이 죄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하나님이 독생자를 대속물로 주신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끌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이 대속물의 종류를 다양하고 탄력적으로 말씀하십니다. 3절에는 소 한 마리, 그런데 가난한 사람은 10절 양이나 염소 한 마리, 그런데 더 가난한 사람, 자기가 키우는 가축이 없이 가난한 이들은 소나 양이나 염소를 못바치니 다른 방법을 허락하십니다. 뭐예요? 14절입니다. 아주 값싼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대속물로 바쳐도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비둘기 한 마리마저 바치기 어려운 극빈자에게도 대안을 마련해주십니다. 5장 11절에 보면 극빈자들은 자기 집에서 고운가루를 한웅큼을 갖고와 바쳐라. 그것도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자기 죄를 해결하려면 대속물은 필수입니다. 그러나 각각 형편별로 소, 양, 염소, 비둘기, 고운가루까지 바칠 수 있습니다. 이 대속물은 뭘 가리킨다구요? 대속물인 예수님입니다.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오늘 예배드릴 때, 반드시 십자가의 대속을 근거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날 위해 대신 십자가 보혈을 흘려주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예배드릴 수 없어요. 그 마음중심을 담아 찬양도 드리고, 기도도 드리고, 헌금도 드리는 것입니다.
둘째, 흠없는 제물이어야 합니다.
3절을 읽어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여 받으시는 번제가 되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번제물은 흠없는 수컷이어야 합니다. 흠있는 제물은 하나님께 바쳐도 받으실 수 없습니다. 흠없는 제물을 강조하는 뜻이 뭘까요? 흠없는 대속물 독생자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짐승이 흠이 없다는 것은, 그냥 질병이 없이 튼실해야 한다 이것입니다. 그 짐승이 혹 상처가 나거나, 팔이나 다리에 무슨 장애가 있거나, 눈이 멀었거나, 하면 하나님은 그 제물은 바쳐도 안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라기를 읽어보면, 하나님이 당시 제사장들에 대하여 매우 불편해하시고 진노하시던 정황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 제사를 보시고는 엄청 분노하십니다. 그것은 제사장들이 하나님앞에 제사를 드릴 때, 아무렇게나 제물을 갖고나와요.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 자기들 가축에서 가장 흠이 많은 것을 끌고왔어요. 흠있는 것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장들의 마음가짐이 흠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온전한 제사, 즉 100% 흠이없는 제물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짐승이 100% 온전하여 흠없는 상태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그저 병들지 않은 소나 양이나 염소, 가축중에 가장 최상급 짐승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 흠없는 제물이어야 한다는 것은 왜 십자가를 가리키는가? 히브리서 10장 4절에 보면, 놀라운 말씀이 있어요. 구약시대에 제물로 드렸던 소와 양과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줄 수가 없습니다! 이건 무슨 뜻인가? 레위기에 나오는 소와 양과 염소, 아무리 흠없는 짐승이라도, 그 짐승의 피로는 우리 죄를 대속할 수 없고, 그것은 결국 흠없는 그리스도의 피, 이것만이 효력을 발생한다 이런 뜻입니다. 짐승의 피는 결국 임시적이었고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십자가의 피가 온전한 흠없는 제사였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때 짐승의 피는 임시적인 대속이고 독생자의 피 십자가에서 흘리는 보혈이 완전한 대속이었다, 이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려면, 흠이 없고 죄가 없는 제물이 있어야 필수조건인데 인간이 죄가 있어서 하나님앞에 자격을 상실한 입장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려면 우리 인간은 어떠한 경우도 흠없는 제물이 없습니다. 제물이 흠없고 죄없는 제물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도 우리를 대속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죄를 대속할 수 없어요. 목사가 성도 여러분의 죄를 대속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래서 아무 흠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가 오셔야만 했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레위기에 죄를 속하는 제물은 흠이 없는 대속물이어야만 한다 라고 강조한 것은 결국 독생자라는 대속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셋째, 죄의 전가입니다.
4절을 다같이 읽어봅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번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 이것을 개역성경은 안수라고 번역했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흠없는 소나 양이나 염소를 성막으로 끌고옵니다. 그러면 누가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으라고 했나요? 죄지은 당사자가 짐승의 머리에 얹어 안수합니다. 여기에 무슨 뜻이 있을까요? 이것이 죄의 전가입니다. 저는 여기에 중요한 하나님 약속이 있다고 믿습니다. 죄인이 자기 짐승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하면 죄인의 죄가 짐승에게 전가됩니다. 질문을 하나 합니다. 왜 그렇게 되는 걸까요? 왜 죄인이 짐승의 머리에다 손을 얹으면 죄인의 죄가 그 짐승에게 전가되는가? 왜 죄인이 손을 그 머리에 얹은 짐승이 피를 흘리고 제물로 바쳐지면 죄인의 죄값이 해결되는가? 정답이 있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어요. 그렇게 하면 그렇게 된다! 손을 얹으면 죄가 전가된다. 이렇게 말씀을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대속의 효과입니다. 그래서 안수의 의미는 죄의 전가입니다.
왜 이 번제와 십자가가 연결되는가를 이제 설명합니다. 예수영접모임을 할 때, 우리 VIP들이 질문하는 경우가 이것입니다. 왜 2천년전에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그 사실을 믿는다고 내 죄 문제가 해결되는가? 예수가 죽은 것이 내 죄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것입니다. 좋은 질문입니다. 이게 엄청나게 상관이 있습니다. 오늘 레위기에서 죄인이 하나님앞에 와서 자기 죄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이것입니다. 죄인이 짐승 한 마리를 끌고와서 그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한다 이것은 내가 예수믿을 때, 십자가에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본질적으로 제사가 맞습니다. 어떠한 제사의 의미가 있는가? 대속의 제사입니다. 어떻게 대속이 되는가? 죄의 전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어! 라고 할 때, 왜 십자가 보혈이 내 죄 문제를 해결하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죄의 전가를 약속하셨어요. 네 짐승의 머리에 네 손을 얹으라, 그러면 너의 죄가 대속된다, 이 말씀은 뭐예요? 결국 나의 독생자 예수의 머리에 네 손을 얹으라, 그러면 너의 죄가 영원히 대속된다 이 말씀이 됩니다. 네 손을 들어 그 짐승머리에 안수하면, 그 짐승의 죽음이 너의 죽음을 대신한다. 이것이 바로 대속입니다. 그러면 5절에, 제사장은 그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립니다. 이것이 피뿌림입니다! 히브리서에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 이 원리입니다. 짐승의 피가 제단에 뿌려지는 시간에 죄인의 죄값이 다 지불됩니다. 그리고나서 제사장은 남은 고기와 내장을 제단에서 불사릅니다. 이것이 번제입니다. 온전히 드린 제사입니다.
그 번제가 하나님 앞에 드려졌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9절. 주를 기쁘시게 하는 향기입니다. 9절을 읽어봅니다.
개역성경은 이걸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라고 했어요. 이게 본문에 3번 나오는데 이 향기를 영어로 아로마라고 합니다. 제물로 수소를 바칠 때, 양이나 염소를 바칠 때, 집비둘기 새끼를 바칠 때, 9절, 13절, 17절에 계속 나옵니다. 그 향기가 올라가면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향기를 여러분 묵상해보세요. 무슨 냄새가 날까요? 지금 제단위에 소나 양이나 염소, 고기와 내장이 구워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고기굽는 냄새입니다. 하나님은 이 고기냄새를 향기롭게 맡으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기쁘게 열납하시는 번제는 주님이 그 향기를 맡으신 제사입니다. 이것을 한자어로 흠향이라고 했습니다.
2장 소제도 보면,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인데, 고운가루를 가져옵니다. 고운 가루위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붓고 굽거나 오븐에 찝니다. 그러면 보세요. 철판위에서 고운 가루와 기름이 섞여, 향기름을 뿌리면 어때요? 우리가 설명절에 다같이 모여 전 만들 때, 온 집안에 맛있는 냄새가 퍼집니다. 번제는 고기굽는 냄새, 소제는 전 부치는 냄새가 납니다. 향기로운 냄새가 나요. 그러면 이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셨다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번제를 드릴 때, 하나님이 받으시려면 오늘 말씀드린 세가지 조건이 완전히 갖춰져야 합니다. 첫째, 대속물이 있었다. 둘째, 대속물이 흠이 없었다. 셋째, 죄인이 짐승의 머리에 안수했다. 이 세가지 조건입니다. 그렇게 올려드리는 번제는 향기가 납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그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짐승의 고기와 내장을 제단에서 불에 태웁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그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십니다. 그러면 이제 그 죄인의 죄는 어떻게 되었어요? 다 해결되었습니다. 그의 죄값이 지불됐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골고다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부르짖어 선포한 말씀이 뭐죠? 다 이루었다! 다 지불되었다 이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죄값이 대속이 되었다! 이 선포입니다. 그러면 죄를 지어 거룩함을 상실한 이들이 거룩함을 회복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뭐라고 하나요? 죄인이 죄사하심을 입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러면 죄인은 무엇을 믿나요? 내 죄는 용서받았다! 이것이 번제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번제와 십자가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뭔가? 번제와 함께 레위기에 나온 제사는 매번 죄지을 때마다 하나님앞에 나와 짐승의 피를 흘려야 합니다.
히브리서 9장을 읽어보면, 레위기의 제사는 임시제사입니다. 죄지으면 소와 양과 염소를 끌고와서 드려야 합니다. 반복적인 제사였습니다. 이 레위기의 반복적인 제사는 이제 독생자 예수님이 오심으로 십자가의 제사로 단번에 완성하십니다. 레위기의 번제는 십자가 제사의 그림자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히브리서 9장으로 건너가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레위기의 제사는 땅의 성소에서 드려진 제사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는 하늘 성소에서 드려진 제사였다 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9장 11절 제가 읽어봅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일어난 좋은 일을 주관하시는 대제사장으로 오셨다. 손으로 만들지 않은 장막,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 다음 12절이 엄청난 선언입니다. 단한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셨다! 단번에 영원히, 우리 모두를 위하여! 이 제사는 온전한 제사이며,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 제사이며, 우리 모두의 죄를 대속하는 영원한 제사였어요. 불가역적, 이런 표현이 맞습니다. 이것을 영어로 once for all 이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한 번제, 영원한 속죄제, 영원한 화목제가 되는 것입니다. 다같이 천천히 한목소리로 히브리서 9장 24절부터 26절까지 읽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는 손으로 만든 성소, 출애굽 시대의 성막이 아니라 하늘성소 그 자체로 들어가셨습니다. 레위기 대제사장은 해마다 짐승의 피를 갖고 들어가야 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신의 몸을 여러번 반복하여 바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자기를 희생제물로 우리 모든 죄를 대속하시려고 단한번 나타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번제를 살펴봤습니다. 번제는 우리 독생자의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모든 구약제사를 자신의 몸으로 완전히 성취하신 제사입니다. 이 모든 십자가 제사의 의미를 깨닫고 나면 이제 우리가 십자가 보혈을 근거로 하나님앞에 예배드리는 일이 얼마나 크게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제가 히브리서 10장 19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담대하게 지성소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휘장을 뚫고 우리에게 새로운 살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그것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 온전한 제사가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찬양하고 기도하고 헌금할 때, 값진 보혈의 가치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십자가 보혈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향기로운 예배
레위기 1:1-9 / 계강현 목사
가인과 아벨의 제사 사건에 관해 ‘가수토(Umberto Cassuto)’란 주석가는, ‘아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가인은 다만 의무를 수행했을 뿐이다.’라고 주석했다. 오늘 우리 각자 자기 자신에게 질문해보자. ‘나는 오늘 이 주일아침에 의무적으로 나와서 앉아 있나? 아니면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하러 나왔나?’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 앞절을 보면, 하나님은 오늘도 이렇게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고 계신다. 영어로 예배를 ‘worship’이라고 하는데, 가치(worth)와 신분(ship)이 합성된 단어다. 즉 기독교의 예배는,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이자, ‘그분에게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마음과 행위’를 뜻한다.
1. 예배는 하나님이 먼저 인간에게 요구하신 명령이다.
일반 종교학에서는, 예배의 기원을 고대인들이 천둥과 번개가 칠 때 무서워서 막연한 신에게 경외심을 포현하는 데서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는 인간들이 신의 비위를 맞추려고 짜낸 전략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정해서 알려주신 계획이고, 하나님이 먼저 사람에게 요구하신 명령이다.(vv1-2) 사 43:21, “이 백성은, 나를 위하라고 내가 지은 백성이다. 그들이 나를 찬양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소요리문답 1장 1절에서 밝히듯, 이생의 목적도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집트의 노예로 살던 히브리 민족을 출애굽시키신 이유와 목적이 무엇일까? 그 이유는 자기 백성이 고통당하는 부르짖음을 듣고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출 3:7,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또한 그 목적은 하나님이 시내산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실 때 밝혔듯이, 바로 하나님께 제사, 즉 신약적으로 말하면 예배를 드리는 데 있다. 출 7:18, “‘히브리 사람의 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니, 이제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을 걸어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니 허락하여 주십시오.’하고 요구하여라.” 모세는 바로왕에게 이걸 요청하였다. 바로왕은 그 말을 듣고도 끝내 무시하다가 열 가지 재앙까지 다 당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굴복했다.
결국 출애굽 역사가 이뤄졌고, 마침내 목적을 성취하신 하나님이 “너희는 이렇게 예배를 드려라”하고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 레위기이다. 따라서 레위기는 우리의 성경일독을 포기하게 만드는 수면제가 결코 아니다. 레위기는 제사와 그 세밀한 시행방법을 진술한 교본이다. 유대인들은 다섯살이 되면 자녀들에게 토라교육을 할 때, 모세오경 중에서 레위기를 제일 먼저 가르친다고 한다. 실제로 레위기는 어떻게 예배하고 어떻게 예배자로 살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교육하는 영적 설명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율법의 제사제도는 완성되었기 때문에 레위기의 제사법을 오늘 우리가 계속 그대로 적용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러나 그 정신과 상징적 의미는 신약시대의 예배에 적용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본문 v3b, “나 주가 그것을 기꺼이 받게 하여라.”, v9, “제물을 불에 태워서 그 향기로 나 주를 기쁘게 하는, 살라 바치는 제사이다.”을 주목해야 한다. 사람이 스스로 만족을 얻으려는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꺼이 받는 제사다. 사람 자신에게 기쁜 향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향기의 제사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 하나님이 향기롭다고 여기시는 예배를 뜻한다.
그러나 이런 예배의 기본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는다. 구약시대에 하나님보다 자신을 기쁘게 하는 예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예로, 이스라엘의 자화자찬식 선민의식이나,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면서 출애굽시키신 야훼 하나님이라고 예배하는 모습 등이다. 신약시대도 마찬가지인데, 바리새인들이 자기 의를 자랑하는 기도가 그 좋은 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와 예배가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기독교 2천년이 넘는 역사에서,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는 가장 고질적인 잘못이다. 오늘날 신자들이 벌 안 받거나 축복을 목적으로 예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예배순서를 맡은 자들은 회중에게 자신을 최대한 잘 보이려는 유혹을 받지 않나? 찬양싱어나 악기연주자가 자기를 과시함이 없이 찬송을 부르거나 연주하기가 쉬울까? 대표 기도자가 남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식하며 기도하는가? 설교 중에 설교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말을 빼면 그 분량이 얼마나 줄어들까? 이렇듯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축복을 위한 종교행위나 내 종교심 만족을 위한 것이 되기가 쉽다. 그래서 내가 예배드리기 전에 항상 기도하는 제목이, “주님, 예배인도자가 아니라 예배자가 되게 해주세요.”이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배가 되려면 당연히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족하셔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예배시간을 통해 우리 자신의 만족을 시도한다.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흔히 하는 말들, “오늘 예배는 참 은혜스러웠어!”, “오늘 예배는 별로야!” 이런 말들이 과연 어디서 나오는 걸까? 자신의 만족과 판단에서 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드리는 차원에서 인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예배를 통해 깊은 은혜와 풍성한 축복을 누리길 원하신다. 그러나 그 자체가 우리 예배의 목적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질 때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예배는 빛을 잃는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시고 기뻐하시고, 그때 우리에게도 은혜가 임하고 기쁨과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게 바른 순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찬양을 부르는데, 그 가사에 담긴 뜻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배의 대상 하나님은 없고 찬양 가사와 멜로디에 심취하여 분위기와 악기 연주에 감동받고 울기도 하고 즐거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요즘 TV 프로그램 중에 노래하는 프로가 많은데, 노래를 잘 부르면 관중들이 만족하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싱어게인’이란 프로그램에 무명가수들이 나와서 오디션 경쟁을 통해 유명가수가 될 때, 본인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그걸 보는 심사위원과 관중들도 눈물을 흘린다. 우리가 그걸 보고 “은혜 받았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예배에서도 그런 감정의 울컥함이 은혜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에게 만족과 기쁨이 되는 예배인가? 아니면 하나님에게 만족과 기쁨이 되면서 동시에 나에게 은혜가 임하는 예배인가를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구원자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이 원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 시 51:17,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찢겨진 심령입니다. 오, 하나님, 주님은 찢겨지고 짓밟힌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우리가 웃고 눈물 흘리고 만족하는 예배가 아니라, 비신자가 회개하여 믿기로 결단하고, 기신자가 변화와 헌신을 결단하는 예배다. 그래서 헌신대가 있는 거다. 나와 우리 공동체의 예배는 어떤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스스로 만족하는 예배에 머무는가?
2.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피흘림이 전제되어야 한다.
오늘 본문은 번제에 관한 것인데, 제물 전부를 불살라 드리는 제사다. 그때 잡아서 드리는 제물은 빈부의 차이에 따라 부자는 소를(v3), 중간층은 양이나 염소를(v10), 가난한 자는 집비둘기나 산비둘기를 드릴 수 있었다.(v14) 하나님은 제물에 따라 차별하지 않고, 빈부를 초월해 최선을 다해 드린 제물을 똑같이 기쁘게 받아주신다. 그런데 vv4-5a, “제물을 가져 온 사람은 번제물의 머리 위에 자기의 손을 얹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을 속죄하는 제물로 받으실 것이다. 5 그런 다음에 제물을 가져 온 사람은 거기 주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아야 하고” 그 살아있는 짐승을 잡아야 하는 건 제사장이 아니라, 바로 그 당사자 자신이다. 제사를 드리는 자신이 짐승에게 안수를 한 후 짐승을 칼로 찔러 잡고, 그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저며야 했다.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당사자가 짐승을 죽여 피를 흘려야만 했던 것이다.
1) 대속의 십자가 죽음이 전제되어 있다. 한 번 상상해보라! 우리가 만약 구약시대에 살아서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반드시 손과 옷에 피를 묻혀야만 했다. 왜 이렇게 짐승을 손수 잡고 가죽을 벗기며 고기를 저미는 일을 하도록 하나님은 명령하고 계실까? 그것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손과 옷에 피를 묻히면서 당사자로 하여금 죄의 처절함을 느끼고, 짐승의 희생을 깊이 체득하며, 그 죄에 대한 대가인 죽음과 형벌을 뼈저리게 느끼게 만드는 교육적 의도에서다.
사람이 참 미련하다. 어느 날 갑자기 부모가 돌아가시면 장례하는 동안 실감이 안 나서 멍하거나 헛 울음을 울기 쉽다. 그런데 장례 마치고 지내다 보면 문득문득, ‘아, 부모님이 정말 가셨구나!’하는 느낌이 올 때가 있다. 그때 비로소 마음속에서부터 깊은 슬픔과 상실감이 북받쳐 오르고 눈물이 흐른다. 당분간 그런 느낌이 점점 더 깊어져 간다. 하지만 세월이 약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또 잊고 살게 된다. 이처럼 인간은 깨닫는 게 둔감하고 또 쉽게 잊는다. 그래서 자기가 직접 칼을 쥐고 칼질을 하며 피를 묻히는 작업을 하게 하심으로 죄의 악랄함을 절감하고, 희생 제물의 죽음을 각인시키려는 하나님의 의도다.
여러분, 정말 짐승 하나 죽였다고 내가 지은 죄가 용서될 수 있는 건가? 말이 안 되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신 것은 훗날 십자가에서 대속의 희생제물이 되어주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이다. 롬 3:25,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속죄제물로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께 죄용서를 받을 때 우리는 구원받아 예배자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없이는 예배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죄 사함의 의미를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은혜의 크심을 더 깨달아 바르게 예배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2) 내가 죽을 때 향기 나는 제물이 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향기가 되는 예배가 언제 가능하냐 하면, 우리가 철저히 죽을 때다. 레위기에 나오는 다섯 가지의 제사는 번제, 소제, 화목죄, 속죄제, 속건제이다. 그런데 소제를 제외한 모든 제사에는 피 흘림을 요구하신다. 제물을 잡아 죽이고 고기를 저미고, 비둘기는 목을 비틀고 날갯죽지를 찢어서 피를 흘려야 한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참 무섭다. 어떻게 동물을 잡아 죽이고 피를 뿌리고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저미고 불사르나? 사랑의 하나님인 줄로 알았더니 그게 아니네.’ 할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이 하등종교에서나 있는 제사를 요구하시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무 잔인한 요구를 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여러분, 왜 하나님이 제물을 이렇게 드리라고 하시는 걸까? 왜 이렇게 자꾸만 반복해서 피를 흘려라. 가죽을 벗겨라. 고기를 저며라. 목을 비틀고 날갯죽지를 찢으라고 하시는 걸까?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제물이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이고 피흘리고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저미고 목을 비틀고 날갯죽지를 찢어야 한다. 완벽한 죽음을 의미한다. 제사와 예배는 제물이 완벽하게 죽을 때에 하나님이 받으신다. 이런 예배를 향기로운 냄새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여러분,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찬양을 어떻게 부르고 복장을 어떻게 입고 그것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나를 쳐서 죽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를 통해 죽기를 원하신다. 나 자신을, 내 이기적인 생각과 세속적 가치관과 내 자존심을 다 철저하게 죽여야 한다. 고전 15:31,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향기로운 삶이 된다. 자신을 철저하게 죽일 때 예수가 우리 안에 사신다. 자신을 죽이고 부인하지 않고는 예수가 사는 방법이 없다. 마 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내 안에 내가 너무 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계속 반복해서 죽이고 또 죽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가정에서나 목장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내가 죽지 않을 때 하나가 되고 열매를 맺기 어렵다. 내가 죽고 오직 하나님만을 높일 때 그분이 우리를 온전히 통치하여 다스리시고, 열매맺게 되고, 그런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
3. 전부 불살라질 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향기로운 예배가 된다.
본문 속에 세 번 반복된 구절이 v9, v13, v17에 나오는데, “제사장은 그것을 모두 제단 위에다 놓고 불살라야 한다. 이것이 번제인데, 이는, 제물을 불에 태워서 그 향기로 나 주를 기쁘게 하는, 살라 바치는 제사이다.” 번제는 다른 제사와 달리 제물의 저며진 고기와 머리와 기름과 내장과 정강이 등 전부 다 온전히 불살라 바치는 것이 그 특징이다. 가죽만 벗기고 남은 것은 다 태운다. 가죽은 제사장의 몫으로 주어졌고(레 7:8), 또 가죽의 특성상 잘 타지 않고 악취가 풍기기 때문에 벗겼을 것이다. 가죽을 벗기는 행위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속사람의 온전한 헌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되 이같이 철저히 제공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과 이웃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신다. 막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요 13:34,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은 우리의 적당주의를 거절하고, 한계를 두고 하나님을 섬기려는 태도를 거부한다. 전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우리는 “~까지는 섬기지만 이것만은 안 돼!”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미리 한계를 설정해놓지 않나?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과 뜻과 생명과 전부를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셨다. 이것을 아는 성도는 “~만큼”, “~까지”가 아니라 전 생명과 평생의 삶으로 헌신하기를 소원하게 된다. 바울사도와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처럼 온전히 헌신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모태신앙인들 중에 탕자처럼 죄 좀 짓고 방탕하다가 늙어서 회개하고 찌꺼기를 드려야지 하는 미련을 떤다.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온전히 술담배도 입에 대지 말고, 순전하게 여러분의 생애를 전부 드려라. 그게 진정 축복된 삶이다. 믿는 순간부터 해라.
매일 헌신하는 삶이 영적 예배다. 구약의 제사는 죽여서 피를 흘리는 죄 사함의 제사라면, 신약시대의 예배는 헌신하는 ‘산 제사’다. 롬 12:1,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기 ‘산 제물'은 ‘일상의 삶에서 드리는 예배’다. 구약의 예배가 특정한 날, 특정한 장소에서 드려지는 것이었다면, 오늘 우리가 드리는 산제사는 매일 일상에서 드리는 헌신된 삶의 예배다. 헌금을 드리는 것만이 제물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되어야 한다.
토저(A.W. Tozer) 목사가 그의 책 <이것이 예배이다>에 이렇게 썼다. “하나님을 월요일에 예배할 수 없다면, 하나님을 주일에 예배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토요일에 예배하지 않는다면,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할 준비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생활 전체와 유리된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그리스도께 매혹되어 열광하는 영혼이 되자.”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하는 것만 예배가 아니라, 월요일에 사무실과 공장에서 일하는 것도 예배가 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래서 산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한 롬 12:1에 뒤이어 나오는 v2에서,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우리의 삶에서 세 가지 대표 영역인 가정과 교회와 생업에서 세상적인 가치관을 따라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자꾸 물어보고 하나님께 답을 얻는 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곧 일상의 헌신이다.
그렇게 전부를 불살라 드리는 번제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기’의 예배가 된다. 온 몸과 생애를 헌신하여 드리는 삶은 결코 소멸이 아니다. 여호와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영원히 기억하실 향기가 된다. 우리의 이런 전적 헌신과 희생은 때로 고난이 따를 수도 있지만, 그 고난의 완성을 통해 하나님에게 멋지게 드려지는 진한 향기가 되는 것이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이미 십자가의 피로 사신바 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전부를 드리는 삶의 예배를 드리도록 해야 한다. 우리 각자의 삶과 공동체의 예배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향기가 되길 축원한다. 아멘.
거룩한 산제사 번제
레 1:1-17 / 마경훈 목사
몇 주일 동안 구약의 제사 제도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구약 제사제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제사라는 방법을 통하여 허락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제사 제도는 번거로운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려면 제물이 필요합니다. 제물을 준비하려면 돈이 듭니다. 또 제주가 제물을 잡으려면 잔인하게 칼을 들고 제물을 죽여야합니다. 성전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제물을 가지고 성전까지 찾아가야 합니다. 여러 면에서 제사는 번거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라도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신약시대의 신자가 드리는 예배도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번거롭습니다.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서는 시간은 즉 돈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습니다. 또 우리 나라는 왜 이렇게 예배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드리는 예배만 11번이나 됩니다. 주일 낮, 밤, 수요일, 금요일 예배 그리고 여섯 번의 새벽예배와 구역예배 모두 합쳐서 11번이나 드립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의 눈에는 예배는 번거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이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기 위하여 행하시는 아름다운 손길로 보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줍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시지만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죄의 삯을 치루게 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이미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죄 값을 치룰 수 없습니다. 죄 값을 치룰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구약의 제사의 제물처럼 골고다언덕의 십자가상에서 제물로 드려지게 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신자의 헌신을 보여줍니다. 롬12장에 보면 우리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몸으로 드리는 거룩한 산 제사가 영적인 예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오늘 살펴볼 내용은 신자의 헌신입니다.
1.회막에서 말씀하신 대로 드리십시오(1절).
회막은 광야에 세워졌던 일종의 텐트입니다. 회막은 텐트이기는 하나 보통 텐트는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가지고 나온 금은 패물을 사용하여 만든 아주 값진 텐트입니다.
회막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시내산에서 만나셨습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회막이 만들어진 후에는 회막에서 모세를 만나셨습니다. 본문에도 보면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셨고 회막에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회막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어느 지역에 머물면 회막을 중심으로 사방에 세 지파씩 텐트를 치고 살았습니다. 이동을 할 때는 회막을 중심으로 앞 뒤로 여섯 지파씩 이동을 했습니다
신약시대에 있어서 회막은 하나님의 교회를 보여줍니다. 신자의 신앙은 교회 중심이 돼야 합니다. 어떤 단체나 기관보다 하나님은 교회 중심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를 회막에서 말씀하신 내용대로 해야 되었던 것처럼 이 시대를 사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제주가 제사를 드리면서 엄청나게 많은 짐승을 드려도 회막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는다면 그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의 신앙생활이 아무리 열심이 있고 큰 헌신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대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인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후반부에 보면 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통하여 성막을 만듭니다. 성경의 이 부분을 보면 자주 눈에 띄는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법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예를 들면 법궤를 옮길 때는 옮기는 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삼하 6장에서 법궤를 옮기다가 수레에 실었던 법궤가 넘어지려고 하자 웃사라는 사람이 법궤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웃사가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신약에 보면 마지막 심판대에서 일어날 일을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내용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 앞에 와서 자신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능력도 행하고 놀라운 일을 행했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면서 "내게서 떠나가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주님 앞에서 쫓겨나는 이유는 능력이 부족하거나 일을 못해서가 아니라 불법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능력도 행하고 엄청난 일도 했지만 주님의 법인 말씀을 따라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내 생각대로 하지 마십시오. 내가 가진 사람의 방식대로 내가 가진 고정관념대로 하지 마십시오.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하십시오. 그래야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가 가능한 것입니다.
2. 자원해서 드리십시오(2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드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후 9:7에 보면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상식선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두 자녀가 있는데 자녀들에게 무엇인가 일을 시키면 한 자녀는 즐거이 자원하여 일하는데 다른 자녀는 억지로 불평하며 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실 때 하나님께 그것이 부족하여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주이시고, 하늘도 땅도 그분의 것입니다. 무엇이든 부족함이 없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헌신하여 제물을 드린다고 하지만 그 제물이 하나님의 것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불살라 없어지거나 아니면 남은 것은 제사장과 제주의 것으로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계산적으로는 하나님께 유익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제물을 원하셔서가 아니라 자기 백성의 마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먹을 것이 있을 때 자원해서 부모에게 주는 자녀가 있고 부모가 원해도 주지 않는 자녀가 있습니다. 부모가 그것을 살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자녀의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이의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결국 섬김의 자리까지 가는 것입니다. 신자가 주님을 만나서 변화되면 주님과 교회와 세상과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면 일을 가져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섬기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생활을 하다보면 교회에서 직분을 맡깁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 것은 감투가 아닙니다. 교회의 직분은 섬김을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목회자를 섬기고 지체를 섬기라고 주신 직책입니다. 이 직책을 수행하는데 감투로 여기고 섬김을 받으려해서도 안되며, 억지로 해서도 안됩니다. 기쁘게 자원함으로 하십시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제사는 자원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신자가 자원하지 못하는 이유는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은혜를 받기는 받았는데 은혜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같은 경우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의 체험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의 음성에 대하여 이사야가 대답합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은혜 받은 이사야는 자원해서 주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그는 자원의 제사로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자원함은 사랑의 정도에 비례합니다. 요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비싼 향유가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룟유다가 그 모습을 보고 아까워하는 모습으로 그 향유를 팔면 300데나리온의 돈이 생긴다는 계산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를 위하여 내는 시간도 드리는 돈도 아깝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지극히 작은 것도 아깝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원은 사랑함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최선을 다해 드리십시오(3절).
제주가 제물을 드릴 때에는 흠 없는 것을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제물을 드릴 때에 병든 것이나 상한 것을 드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말라기에 보면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멀고 다리 저는 것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하나님께는 최선을 다하여 좋은 것으로 드리는 훈련을 하십시오.
예배를 드려도 시간이 남기 때문에 드리지 마시고 시간이 부족해도 구별해서 드리십시오. 다른 계획을 세워놓고 남은 시간에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생각지 마시고 하나님의 일을 우선으로 생각하시고 남은 것으로 다른 일을 하십시오,
물질을 드려도 쓰고 남은 것으로 드리지 마시고 먼저 드릴 것을 구별하시고 남은 것으로 다른 것을 하십시오.
요즘 우리가 123새벽기도회를 합니다. 매월 1, 2, 3일을 새벽기도의 날로 정하고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 앞에 최선의 시간을 드려보자는 것입니다.
월삭기도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월삭이라는 말이 달의 첫날을 의미합니다. 요일의 문제 때문에 첫 번째 주일 지난 토요일에 기도회로 모이지만 첫 것을 드린다는 의미로 모여서 기도해야 합니다.
잠3:9-10절에 보면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 물질을 드리는데 첫 것을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첫 것을 드리면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첫 것은 최선의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최선을 다하여 섬기면 거기에 합당한 은혜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참으로 복된 것입니다. 물론 늙고 병들어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을 섬기는 것도 주님은 받으시지만 젊고 힘있을 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큰복입니다.
저는 제 자녀들을 방학 때마다 선교에 헌신시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큰 아이는 4학년이고 작은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입니다. 아직은 어린 나이이지만 지금부터 방학 때마다 첫 것을 최선을 다하여 드린다는 마음 자세로 선교에 헌신시키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일에는 정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여 일하는데 하나님의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하나님의 일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세상일보다 중요한 이유는 첫째, 누구의 일인가 때문입니다. 세상일은 나의 일이지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피조물입니다. 둘째, 시간 개념으로 따져봐도 하나님의 일이 중요합니다. 세상일은 이생에서만 유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이생에서도 유용하지만 내생에까지 연결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세상일 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일은 소홀히 하면서 그보다는 덜 중요한 세상일에는 목숨을 걸어서야 되겠습니까?
갈6:7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나님은 눈가림으로 속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정확한 저울을 가지고 계시며 그 저울로 우리들을 달아보고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세상일보다도 더 힘써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은혜주시고 축복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최선을 심으십시오. 최선의 열매를 따게 될 것입니다.
번제양의 피
레 1:1-9 / 이필재 목사
야곱은 아들이 12명이었는데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영적 의미의 축복을 내려주셔서 이스라엘 민족 12지파의 족장이 되었고 각 지파의 분담 역할이 민족 공동체 형성의 기초가 된 것을 성경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레위’라고 하는 아들의 후손은 하나님의 성전 봉사 전담 사역이 주어졌고, 제사장이라는 제사 업무 사역이 주어졌습니다. 레위기 성경은 레위인 중심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각종 제사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쟁을 할 때도 이 레위 사람은 참가를 못하게 했습니다. “너희들은 전쟁을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너희들은 성전 봉사하고 제사만 지내는 것이 오히려 민족을 위하는 좋은 일이라”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가나안 땅 정복 후 땅 분배를 할 때도 레위 지파는 차별화하여 겨우 기본적인 것만 가지고 살도록 하고 그 이상의 땅은 주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장사하고 농사짓고 돈 벌어서 성취하는 것을 하지 말라.”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 먹고 삽니까?” “다른 지파들이 드리는 십일조를 많든 적든 그것 가지고 하나님의 일, 제사 사역만 하라.”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아마 지금도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구약 시대 제사 같이 지내라고 하면 귀찮아서 하나님 못 믿을 사람 참 많을 것입니다. 또 돈도 아주 많이 들어갑니다. 제사 한번 지내려면 오늘 말씀에서도 “소나 양을 잡으라.”고 했습니다. 번제 한번 드리는데 양 한 마리 잡아야 되고 소 한 마리 잡아야 됩니다. 서민들에게는 꿈도 못 꾸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지낼 때 백성들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제사장들입니다. 제사 지낼 때 양을 잡거나 소를 잡는 일을 제사장이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제사장들에게 하라고 했지 않습니까? 제사장들은 늘 칼을 차고 다닙니다. 아무 때나 성도들이 와서 나를 위해서 번제를 드려달라고 하면 자기가 바로 짐승을 죽여서 번제를 드립니다. 짐승 죽이는 것 쉽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까 “피를 내서 제단에 뿌릴 것이요.”라고 나옵니다. 제사장은 날마다 피투성이가 됩니다. 짐승을 죽여서 피를 내서 제단에 뿌리기 때문입니다. 아마 저 같은 사람에게 제사장 하라고 했으면 파면감입니다. 저는 짐승 죽이는 것을 참 힘들어 합니다. 제가 옛날에 수요 예배 때 한번 이야기한 것 같은데 지금도 저는 ‘삼계탕’ 이렇게 닭요리만 보면 잘 못 먹습니다.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나쁜 추억이 두 가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이 납니다. 이웃집 아줌마가 날보고 “얘! 너 이리 와!” “왜요?” “너 이것 좀 죽여줄래?” 큰 닭이 아니고 중간 닭으로 그때는 약병아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나더러 죽여 달라는 것입니다. 자기 영감을 몸 보신해줄 것을 영감더러 죽이라고 하지 왜 나더러 죽이라는 겁니까? 그래도 내가 남자라고 자기보다 내가 나을 거라고 생각해서 나더러 죽여 달라고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 남자가 이것을 못한다고 하면 깔 볼 거 같기도 해서 ‘에이,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생전 처음으로 닭을 죽여 봤습니다. 목을 졸랐습니다. 그런데 닭이 안 죽습니다. “파다닥파다닥!” 있는 힘을 다했는데 식은땀이 나는 겁니다. 목을 조르는데 나중에는 안 죽으니까 눈물이 나오는 겁니다. 겨우 죽어서 집어 던지고 도망 나왔습니다. 그런 경우가 한번 있었고 세월이 흘러서 제가 전도사가 되었는데 중고등부 데리고 수양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양계장에 닭을 많이 기르는 교회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수양회 가서 잡아먹으라고 살아있는 닭을 몇 마리 주셨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닭을 가져갔는데 이것을 누가 잡아먹습니까? “이거 누가 잡을 줄 아냐?” 그러니까 아무도 안 죽여 봤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한 사람이 닭을 손으로 잡고 도마에 목을 갖다 대고 한 사람이 목을 팍 쳤습니다. 그런데 이때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목이 없는 닭이 도망을 가는 겁니다. 믿지 못하시는 분은 한번 그렇게 해보십시오. 닭이 목도 없이 피를 흘리면서 마당 한 바퀴를 도니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 저에게 삼계탕은 권하지 마십시오.
제사장들은 닭이 아닌 양을 죽입니다. 제사도 얼마나 많습니까?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요제, 화제, 화목제…. 이때마다 양을 죽여야 되니까 제사장은 온통 몸에 피투성이가 나는 겁니다. 여기 2절에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소 한 마리, 양 한 마리는 가나안 집의 재산인데 그런데도 그 다음 3절에 보십시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흠 없는 것으로 하라. 병들어서 상품 가치가 없는 소나 양은 하나님께 절대로 못 드린다. 너희들도 안 먹으면서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지 말라. 최고 상품 가치가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라.” 이렇게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 보니까 “제사장은 짐승 머리에 안수할 것이요.” 끌고 오면 우선 제사장은 짐승의 머리에 안수 기도를 해주어야 합니다. 왜 짐승에다 안수하느냐? 사람의 죄를 거두어서 거기에 뒤집어씌우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가 없어지고 짐승은 죄가 생긴 것입니다. 죄가 있는 것은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죽이는 것입니다. 피를 흘려서 다 뿌리고 장작을 쌓아놓고 그 위에다 고기 내장까지 전부 올려놓고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모두 다 싹 태워버려야 합니다. 그러니 그 작업이 얼마나 힘듭니까? 솔로몬을 보세요. 그런 제사를 일천번제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마음에 꺼림칙하지만 항상 해야 합니다. 한번 하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은 날마다 양을 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짐승을 잡아서 피를 뿌리나? 또, 우리 기독교에서 왜 십자가인가? 예수님의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신 것인가?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속죄 방법의 계약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피 흘림 없이는 죄 사함이 없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제도화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 심장이라는 피를 담아두는 탱크가 하나 있습니다. 저장하고 있는 피를 24시간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피를 필요로 하는 온 몸에 계속 공급합니다. 사람이 어떤 경우는 다리 하나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팔 하나 없어도 생명에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피가 부족하면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습니다. 그렇게 거미줄같이 복잡한 혈관이 어느 한 부분 한 마디만 피가 통하지 않아도 뇌경색이 되어 금방 팔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이게 피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곤하게 잠을 자고 있는 시간일지라도 심장은 일평생 뛰고 있습니다. 이게 잠시라도 멎으면 심장 마비가 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겁니다. “짐승이 대신 흘렸을지라도 생명의 근원인 피를 뿌리면 너희의 죄는 없어진다. 그렇게 하라.” 하나님이 정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다 태워버린 것은 “이제 너희들은 다 없어졌다. 소멸이다.” 이런 뜻으로 했는데 사실 인류 역사에는 짐승뿐이 아니고 인신제사까지 있었습니다. 사람, 특별히 어린 아이를 잡아서 심장을 찔러서 피를 내서 신을 즐겁게 하는 문화가 있었는데 아브라함도 그 문화에 젖어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것을 더 이상 못하게 하나님께서 “네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보아온 제사이기 때문에 이삭을 데리고 가서 하려고 할 때 하나님이 멈추신 것입니다. “하지 말라.” “하나님이 하라고 하셨잖아요?” “이제부터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드려라.” 그래서 하나님이 그 산에 준비해 놓으신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드림으로 말미암아 인신제사 문화를 다 없애버리고 짐승 피로 인한 속죄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성경에 피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나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물었습니다. “네 아우의 피 소리가 땅에서 내게 호소하느니라. 뭐했느냐?” 가룟 유다의 고백에도 예수님 팔아먹고 나서 “내가 무죄한 자의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슬픈 고백을 하면서 나중에 견딜 수 없어서 자살했지 않습니까? 더 깊은 영적 의미는 출애굽 사건 때 하나님의 재앙이 애굽 장자 사망 심판에 내려질 때 이스라엘 백성은 문설주에 피의 상징을 발랐지 않습니까? 그래서 재앙을 면했다고 했습니다. 피는 그런 의미로 하나님과의 계약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인간됨의 축복입니다. 인간 행복을 위해서 수도 없이 많은 짐승이 계속해서 생명이 희생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잡아먹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한번 상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만이 죄를 짓습니다. 동물도 식물도 아무 죄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그 법대로 지금까지 다른 생명체들은 살고 있습니다. 만약 짐승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 향해서 항의할 것입니다. “하나님! 동물들은 죄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도 지금까지 하나님을 거역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 지상의 모든 잘못은 원인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들을 위해서 하나님을 배반한 일이 없는 우리 짐승을 희생시키는 것이 옳은 일이십니까?” 항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는가? 하나님이 정하신 뜻입니다. 모든 동물은 인간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과의 동질성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으면” 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동질성입니다. 이것을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내가 곧 하나님이 되는 동질성의 하나님 형상의 축복을 처음부터 받습니다. 그런데 이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짐승을 희생시켜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가져오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왜 짐승을 안 죽이는가? 피를 왜 안 뿌리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를 위하여 단번에 십자가에 달려서 “이제는 내가 제사를 드릴 터이니” 이렇게 피를 흘려 속죄 제사를 드려주셨기 때문에 지금은 양 잡을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시대적인 축복 속에 살기 때문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 그 은혜 속에 지금 여러분과 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양이나 소를 잡아서 피 흘릴 필요 없이 예수님이 단번에 인류를 위하여 제사 지내신 십자가의 피에 대한 믿음의 고백 하나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영상이 약속되는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양을 안 잡습니다. 기도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속죄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예수님을 가리켜 뭐라고 했습니까? ‘어린양’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예수님이 어린 양인가? 어린 양이 제사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점 없고 힘없는 깨끗한 1년 된 어린 양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아무 흠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사용으로 예수님이 사용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19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세례요한이 민중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왜 어린양입니까? 제사용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온 인류의 죄를 사하여주는 권세가 있는 것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고 영생이 약속되는 그러한 은혜를 우리가 지금 받은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7절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였는지라.” 그래서 기독교는 피의 종교이고 그래서 십자가이고 그래서 지금 양을 안 잡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구속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저는 설교하다가 중간에 찬송을 잘 안 부르는데 오늘은 우리 한번 불러봅시다. “나의 죄를 씻기는” 252장입니다. 자막에 나오니 다 같이 한번 손뼉 치면서 불러 봅시다. 이 찬송이 얼마나 우리에게 구속의 은혜를 주는 찬송인지 모릅니다. “1.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정케 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2. 나를 정케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사죄하는 증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3. 나의 죄 속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는 공로 없으니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4. 평안함과 소망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의는 이것 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5. 영원토록 내 할 말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찬미 제목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할렐루야! 순복음식으로 한번 질문해야겠습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을 믿습니까?” 예수의 피! 이 하나가 인류의 모든 죄를 해결했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 이후 기독교는 가장 훌륭하고 존경받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나도 주님을 위해서 피를 흘리는 사람입니다. 이게 순교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후 그의 제자 열두 명에서 가룟 유다는 죄짓고 자살했고, 요한은 100세까지 목회하다가 자연사해서 무덤이 지금 에베소에 있고, 10명은 순교 당했습니다. 당시 기독교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순교자가 될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다 죽는 거였습니다. 우리나라 순교 역사 6단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단계! 임진왜란 때 13세 조선 고급관리 아들 권빈센트 군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기독교가 먼저 들어왔습니다. 거기서 예수 믿고 일본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성령이 충만해서 일본에서 열심히 전도하다가 잡혀서 나가사키에서 화형당해 순교했습니다. 두 번째! 1791년 정조 임금 때 박해사건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때 윤지충, 권상연, 김풍현, 이도기, 백완경, 이보현…. 수많은 기독교 인사들은 그때 순교를 다 당했습니다. 이 사건을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에 기록하기를 ‘신해교난’이라 했습니다. 세 번째!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는 김대건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1846년 헌종 12년에 박해가 일어나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8명을 그때 사형시켰는데 9월 16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했습니다. 이 사건을 우리나라 역사에서 기록하기를 ‘병오교난’이라 합니다. 그 다음은 대원군 시대입니다. 쇄국정책에 맞물린 정치적 파벌싸움 때문에 교회가 막대한 피해자가 되어서 수없이 많은 순교자를 냈는데 이 사건을 ‘병인교난’이라 합니다. 그 다음에는 1910년 이후 한일 합방으로 일본 사람들에 의해서 순교자가 수없이 생겼습니다. 우리 귀에 많이 익은 소리 ‘신사참배’가 있는데, 이것 때문에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수없이 많은 순교자를 냈고 1950년 이후는 공산당이 내려와 다 죽여 버렸습니다. 이렇게 6단계의 순교의 역사를 지났습니다. 6·25 전쟁이 휴전에 들어간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기독교 국가로 변해 지금 인구 비례 교회 출석률 세계 1위, 선교사 파송 세계 2위 국가가 되어서 영적 선교 한류를 이루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구원의 마지막 작업으로 하나님 자신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이 재물이 되어 자신이 결정한 피 흘림의 사건을 자신이 몸소 십자가 위에서 들여 주심으로 이 세상의 모든 재난 생명체는 다 이것을 통해서 구원 받으라고,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은혜 속에 우리가 지금 있는 것입니다. 이 피 흘림의 역사를 생각해 볼 때 여러분도, 저도 헌혈을 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다른 생명을 위해서 내가 흘린 피에 내가 어떤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네스북에 최고로 헌혈을 많이 한 사람은 미시간에 살고 있는 ‘레오포크’라는 사람인데 20세 때부터 75세까지 55년 동안 40갤런(gallon)의 피를 뽑아서 이웃에게 주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물었을 때 자기는 10대 후반에 교회 다닐 때 처음으로 성령을 체험하고 ‘아! 십자가가 무엇인가? 예수의 피를 내가 왜 믿어야 되는가?’ 그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나도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피를 흘릴 것인가 기도하고 생각하다가 가장 구체적인 방법으로 좋은 방법이 헌혈을 해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때부터 헌혈사역에 자기 몸을 바쳐 일평생 40갤런의 피를 뽑아서 피가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으로 자기 사역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종합검진을 받으면서 피를 뽑아서 검사를 했는데, 조금 전에 뽑아갔는데 다른 검진한다고 또 뽑아가는 겁니다. 피 뽑아주면서 속으로 생각하기를 ‘저 만큼 피를 만들려면 갈비를 얼마나 많이 먹어야 할 텐데 또 뽑아가나?’ 신경조직 검사한다고 하는데 전기를 몸에다 충격을 주는 검사입니다. 뇌신경의 신경조직이 건전하게 다 전달이 되나 안 되나 하는 반응을 보는데 사람을 눕혀놓고 전기를 갖다 대니까 사람이 어떻게 됩니까? 깜짝 놀랍니다. 이쪽에 갖다 대니까 또 깜짝 놀랍니다. 300번도 더 댑니다. 깜짝 놀라는 것은 신경조직이 살아있는 거랍니다. 저는 속으로 ‘이거, 전기 고문은 중범죄들이나 받았다는데 내가 왜 이렇게 전기 고문을 받아야 하나?’ 내가 깜짝 깜짝 놀라는 게 장난감 갖은 겁니다. 300번 이상 대니까 얼마나 많이 대는 겁니까? 그랬더니 이번에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잘 참으시는데 이제 거의 다 댔습니다. 이제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이번에는 한 번씩 하지 않고 일곱 번씩 계속 세 번을 할 겁니다.” “아니, 뭐라고요? 차라리 죽여라, 죽여! 죽는 게 낫겠다!” “잘 참으세요. 일곱 번씩 세 번 합니다.” 몸을 지져 버렸습니다. ‘어휴! 다 댔나?’ “이제 마지막입니다. 50번 계속 들어갈 겁니다.” ‘주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나중에 많이 생각했습니다. 종합검진 받는 것도 죽느니 사느니 이러고 있는데 주님은 33세의 건강한 청년이 건강한 신경조직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신경조직이 살아있는 사람의 손과 발에 못을 때려 박았습니다. 몸에 있는 신장의 피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흘러나왔습니다. ‘아! 주님이시여! 십자가는 십자가다. 그래서 인류의 죄가 사라진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 고통을 받으시면서 피를 흘리셨구나!’
여러분! 주님이 몸으로 드려주신 번제 은혜 때문에 우리는 지금 구원의 백성이 되어 양도 잡지 않고 소도 잡지 않고 손해도 나지 않고 속제의 기쁨과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이렇게 가져온 것입니다. 주 예수의 피의 공로를 믿으시고 구원을 받으셔서 영생하시기 바랍니다.
친밀함 회복
레 1:1-2 / 이익환 목사
레위기는 흔히 성경통독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호기롭게 성경통독을 시작했다가 레위기에 가서 그 의지가 사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상관없는 제사들이 장황하게 소개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 자녀들의 토라 교육은 창세기가 아니라, 레위기부터 시작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데 중요한 원리들이 바로 레위기에 있기 때문이다. 레위기의 원래 제목은 ‘봐이크라(ויקרא)’이다. ‘그리고 그가 불렀다’란 뜻이다. ‘그리고’라는 접속사에서 레위기가 출애굽기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애굽기의 마지막은 성막이 완공되는 장면이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이 부르시기까지는 아무도 성막 안으로 가까이 갈 수 없었다. 그런데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성막에서 모세를 부르셨다. 그 때 모세는 비로소 성막 안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다. 하나님은 모세 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오도록 초대하시는 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레위기서는 우리를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초대하는 책이다. 오늘은 우리가 구약의 제사 제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회복시키시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말씀하셨다. 레 1: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제물을 드려야 했다. 죄 있는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면 죽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분노하시는 분이시다. 그것은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또한 죄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죄에 대해 경계하시고, 그 죄를 심판하셔야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셨다. 불완전함이 우리 인간 조건임을 이해하셨다. 그래서 실수하고 죄를 반복하는 인간이 그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주셨다. 그것은 죄인인 인간을 대신해서 다른 짐승이 피 흘리며 죽게 하신 것이다. 그 속죄의 제사로 인해 사람들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였고, 은혜였다. 2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히브리어로 ‘코르반(קורבן)’이다. 그런데 이것은 ‘카라브(קרב)’라는 동사에서 온 단어다. 카라브는 ‘가까이 가다’는 뜻이다. 따라서 희생 예물인 코르반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수단인 것이다. 왜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우리의 잃어버린 영혼이 회복되기 때문이다. 죄로 인해 손상된 우리의 심령이 치유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또한 죄로 인해 파괴된 관계들이 다시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의 죄를 대신하는 희생 예물을 드리며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었던 것이 ‘구약의 예배’였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올 수 있는 길을 먼저 알려주시는 분이다. 그것이 바로 레위기에서 소개하는 다섯 가지 예물이다. 히브리어로 ‘코르바놋’이라고 하는 이 예물들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번제다. 번제는 히브리어로 ‘올라(עלה)’다. ‘올라간다’는 뜻이다. 불사르는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올라’라고 한다. 번제는 동물을 잡아 남김없이 다 태워드리는 것이기에 온전한 헌신을 상징한다. 레 1:4,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여기서 ‘그’는 죄로 인해 번제를 드리는 사람이다. 번제의 예물을 잡는 사람은 제사장이 아니다. 그것을 가져온 사람이다. 자신이 기른 가축 중에 살아있는 것을 가져와서 자신이 직접 잡는 것이다. 2절에 나오는 ‘가축’은 히브리어로 ‘베헤마(בהמה)’인데, 개역성경은 ‘생축’이라고 번역한다. ‘살아있는 가축’이란 뜻이다. 예배자는 먼저 그 생축의 머리에 안수한다. 히브리어로 ‘세미카’라는 의식인데, 이는 예배자와 번제 예물을 동일시하는 의식이다. 이어서 그는 ‘비두이’라는 고백을 한다. “나는 이 무고한 동물을 대신해 죽어야 마땅하지만, 주님은 나를 대신하여 이 무고한 자의 죽음을 자비롭게 받아들이십니다.” 이 고백 이후 예배자는 그 생축을 잡는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예배자는 소를 24조각으로, 양과 염소의 경우 12조각으로 각을 뜬다. 이 때 예배자는 가축의 머리를 내려치며 고백한다. “하나님 내 교만을 자릅니다” 가슴의 각을 뜨며 고백한다. “죄악을 품은 내 가슴을 도려냅니다” 다리를 자르며 고백한다. “악을 향해 달려갔던 내 다리를 자릅니다” 엉덩이의 각을 뜨며 고백한다. “불의와 교만의 자리에 앉았던 내 엉덩이를 자릅니다.” 내장을 물로 닦으며 고백한다. “내 속의 시기, 질투, 미움을 닦습니다” 이처럼 예배자는 생축을 잡는 과정을 통해 사실은 자신의 피를 흘리고, 자신을 죽이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희생 제물이 흘린 피와 그 제물이 태워져 올라가는 연기를 보시고서, 그 죄인을 용서하신다. 그가 드리는 예물에 그의 믿음과 테슈바, 즉, 회개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말한다.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개역성경은 ‘희생제물’을 ‘생축’으로 번역한다. 히브리어로는 베헤마, ‘산채로 드려진 제물’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를 위해 희생당하신 생축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생축이 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구약 백성들이 희생 예물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체험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체험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두번째로 소개되는 예물은 소제다. 히브리어로는 ‘민하(מנחה)’다. 곡식을 태워 드리는 제사다. 이것은 자신이 직접 땀 흘려 거둔 노동의 열매를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예배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소제는 소산물에 대한 감사이자 자신의 소산에 계속 복 주실 것에 대한 기대가 담겨져 있는 예물이다.
세번째로 소개되는 예물은 화목제이다. ‘제바흐 슐라밈(זבח שלמים)’, 화평의 제사다. 화목제는 감사를 표현하거나 서원을 드릴 때 드렸다. 내장과 기름은 불로 태워 드리고, 고기는 가족과 그가 초대한 사람들, 그리고 제사를 담당한 제사장들과 함께 먹었다.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린 뒤 공동식사를 하며 이웃과의 화목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음은 속죄제이다. 속죄제는 히브리어로 ‘하타트(חטאת)’인데, ‘죄를 씻어 없애는 예물’을 의미한다. 기본 어근인 ‘하타(חטא)’는 ‘빗나가다’란 뜻인데, 모든 빗나간 죄에 대해 속죄하는 것이 바로 속죄 예물인 것이다. 속죄제는 알지 못하거나 실수로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예물이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의 제사가 상당히 치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지은 죄에 대해서도 속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모르고 지은 죄까지도 속죄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랍비 아브라바넬은 속죄제가 행한 일에 대한 형벌이라기보다는 장래의 죄에 대한 엄숙한 경고라고 주장한다. 속죄 예물을 드리려면 상당한 노력과 비용이 따른다. 그것은 한 개인이 모르고 지은 죄에도 책임이 따르며, 앞으로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었다. 랍비 나흐마니데스는 속죄제를 드리는 이유가 그 행위에 뒤따르는 결과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모든 죄가 영혼에 ‘얼룩’을 일으키고 그 안에 흠을 만들기 때문에 속죄 예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될 때 창조주께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속죄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속건제다. 속건제는 여호와의 성물이나 다른 사람의 물건에 피해를 입혔을 때 오분의 일을 더하여 보상하는 예물이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구약의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을 그분께로 더 가까이 오게 하신 장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예물들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바로 잡으며, 하나님의 공의에서 빗나가지 않는 백성으로 살도록 초대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데 실패한다. 그것은 그들이 예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과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배의 본질을 망각하고 형식주의에 빠지게 된다. 점점 예배 따로, 삶 따로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살든 하나님께 예물만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사라지고, 대신 예물을 바치면 용서 받고 복을 받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삶에 대해 선지자들을 통해 꾸짖으셨다. 사 1:11-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하나님께서는 삶과 분리된 예배를 싫어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한다. 암 5:22, 24,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셨다.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기서인애는 헤세드다. 헤세드는 충성된 사랑이다. 상황과 환경, 조건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사랑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해 충성된 사랑을 하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풍요와 행복을 당장이라도 구현해줄 것 같았던 세상 신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들은 이웃에게 겸손히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귀찮아 했다. 희생을 선택하는 삶보다는 성공하는 삶을 원했다. 우리는 선지자들이 선포한 말씀을 통해 예배와 삶은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예배가 단순히 하나님께 희생 예물을 드리는 행위가 아님을 알게 된다. 결국 예배를 예배 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다. 삶의 예배가 없을 때 우리가 모여서 드리는 예배도 소용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의 풍요를 누려서 온전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높은 직위에 올라야 강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도 예배에 성공해야 한다. 우리 중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죄는 우리 영혼에 균열을 일으키고,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파괴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배를 통해 반드시 우리의 죄의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히 10:11-12, 14,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온전한 예물, 코르반이 되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한 희생 예물이 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우리 영혼에 균열을 일으켰던 죄를 씻어내야 한다. 코르반, 즉 희생 예물은 우리 인간의 영혼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우리 안에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창조 때 지으신 당신의 형상을 회복하기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나에게 더 가까이 오라’고 초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한 코르반, 온전한 예물로 준비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음을 기억하며,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 회개의 테슈바를 통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회개는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돌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회개해야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회복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눈먼 제사가 되지 않도록 삶의 예배에서도 승리해야 한다. 예배는 교회 안에서만 드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정의와 자비와 사랑을 이웃에게 행하는 것이 우리가 또한 드려야 하는 예배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성막 안으로 부르신 것처럼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부르신다. 바라기는 우리의 예배를 통해 우리 영혼에 균열을 일으킨 죄를 씻어내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또한 삶의 예배를 통해 우리 이웃과의 친밀함도 회복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렇게 친밀함을 회복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번제의 제물과 제사장의 불
레 1:3-9, 6:8-13 / 피영민 목사
서론
레위기는 제사에 관한 책인데, 다섯 가지 종류의 제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는 제사의 종류입니다. 또 화제, 요제, 거제, 전제와 같은 단어는 제사의 종류가 아니라, 제사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화제는 불로 제물을 태워 드리는 방법이고, 요제는 흔들어 드리는 것, 거제는 들었다 놓는 방법, 또 전제는 포도주와 같은 것을 쏟아 부어서 드리는 방법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방법은 네 가지고, 제사의 종류는 다섯 가지입니다.
레위기 1~7장까지는 5대 제사에 관한 규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레위기 1~5장과 6~7장은 서로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고 느껴지지만, 강조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1~5장까지는 초점이 제사의 제물에 있는 반면, 6~7장까지는 제사장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 1~7장까지는 5대 제사에 관한 내용이며, “죄인 된 인간은 제물이 대신 희생되지 않고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대신 제물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명백한 진리를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5대 제사 가운데 첫 번째 제사는 ‘번제’입니다. 번제에는 중요한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제물’이고, 둘째는 ‘제사장’이고, 셋째는 ‘불’입니다. 그래서 번제는 제사장이 희생제물을 불로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라 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1장에는 ‘제물’, 6장에는 ‘제사장’과 ‘불’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6장 9절에 “아론과 그 자손에게 명하여 이르라 번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번제물은 단 위 석쇠 위에 아침까지 두고 단의 불로 그 위에서 꺼지지 않게 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규례’라는 단어는 유명한 히브리 단어 ‘토라’가 사용되었는데, 성경에서 토라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광의적 의미로, ‘성경 전체’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시편 19편 7절에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율법’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또 시편 1편 2절에도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토라는 성경 전체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는 중간적 의미로, ‘모세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셋째는 협의적 의미로, ‘규율’, ‘규례’, ‘규칙’ 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기 레위기 6장 9절에서 ‘규례’는 번제에 대한 ‘규칙’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좁은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제 번제의 3요소 가운데 첫 번째 ‘제물’에 대한 규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Ⅰ. 번제의 첫 번째 중요한 요소는 ‘제물’이다
‘번제’(Burnt Offering)는 히브리어 ‘올라’로 ‘위로 올라간다’는 의미입니다. 제물을 불로 태워 향기가 위로 올라간다는 뜻에서 히브리어 ‘올라’가 사용되었습니다.
번제에 대한 기록은 창세기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8장과 22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8장 20절에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의 번제는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사가 되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만족을 드렸고, 하나님은 노아에게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이제 더 이상 물로 멸망하지 않습니다. 홍수로 망하지 않습니다. 노아가 번제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로 망하지 않는 대신, 불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세상이 불로 망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그 때에 이 세상은 불로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인류가 만든 원자폭탄을 보십시오. 그런 것들이 터지면 불로 다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로 다 망하게 되면 그 때는 방주도 소용없습니다. 불을 피할 배가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에 ‘번제’라는 단어가 6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아들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태워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이었지만,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 얼마든지 내게 또 아들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이끌고 모리아산으로 가 그를 칼로 찌르려 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수풀에 걸려 있는 어린 양을 데려다 번제를 드리도록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번제할 어린양을 준비해 주셔서 이삭의 생명을 살려주셨다는 내용이 창세기 22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위한 희생제사로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셔서 구원받게 되는 복음을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 1장은 번제의 제물에 관해 기록되어 있는데, 그러면 제물은 어떤 것을 드려야 할까요? 번제의 제물은 사람의 경제적 수준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가난한 사람은 집비둘기나 산비둘기처럼 돈이 들지 않는 동물을 잡아 오면 됩니다. 그리고 중산층은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드립니다. 그리고 먹고 살만한 부유한 사람들은 수송아지를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24절에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후 결례의 날이 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로 제사를 드리려 하였습니다. 이는 요셉과 마리아가 갈릴리 지역의 아주 극빈한 사람들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아주 가난한 목수의 집에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번제의 제물은 수송아지, 양이나 염소, 비둘기가 쓰였습니다. 그러면 번제의 제물이 사람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제사가 사람의 경제적 상태나 지위,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예외 없이 모두 구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도 그래왔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차별을 두지는 않으십니다.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국적을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 보면 수도 없이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온통 섞여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는데 차별을 두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경제적 형편에 따라 자기에게 맞는 제물을 드릴 때, 송아지나 양 또는 염소의 경우에는 반드시 ‘흠 없는 수컷’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둘기의 경우, 수컷이나 암컷에 구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송아지나 양, 염소의 경우에는 흠이 없는 수컷으로 하라신 것입니다. 이것은 수컷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흠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염되지 않은 거룩한 인성을 가진 분이심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물에 흠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흠이 있는 사람은 남의 죄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죄가 있는 사람은 남의 죗값을 대신 갚아줄 수 없는 것입니다. 남의 죗값을 갚아주려면 본인에게 죄가 없어야 합니다. 무흠한 제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왔다”는 말을 하고 다닙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잘 통하니, 당신의 사정을 하나님께 잘 말해 주겠다”고 합니다. 약을 많이 먹어야 할 사람입니다.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영혼의 문제도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 도대체 누구의 말을 하나님께 전달하겠다는 것입니까? 제물은 반드시 무흠해야 합니다. 수송아지를 번제로 드리는 경우에는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수송아지 머리 위에 안수를 해야 합니다. 당사자가 안수를 해야 하는데, 이 안수는 살짝 손을 얹는다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누르는 것입니다.
시편 88편 7절에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로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어 ‘싸마크’는 ‘꽉 누른다’는 의미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당사자는 송아지 머리 위에 손을 얹어 꽉 눌러서 자신의 죄를 모두 전가하는 것입니다. 양이나 염소, 비둘기의 경우에는 안수에 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송아지의 경우에만 안수를 하는 것입니다.
번제를 드리는 당사자는 자기 손으로 제물을 잡아야 하는데, 성막 뜰 북편에서 잡아야 합니다. 성막 뜰 서편으로는 ‘성막 본체’가 있고, 남쪽에는 화목제물을 함께 나눠 먹는 교제의 장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북편으로 가서 제물을 잡는 것입니다.
제물을 잡아 피를 받은 후, 그 피를 제사장에게 전해 주면 제사장은 번제단 사면에 그 피를 뿌립니다. 번제단은 가로 5규빗, 세로 5규빗, 높이 3규빗의 정사각형으로 된 기구였는데, 1규빗은 약 45cm입니다.
당사자는 피를 뺀 나머지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 후에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어 제사장에게 전달해 줍니다. 그러면 번제단 안쪽에 있는 놋망 위에 고기를 올리고 벌여놓은 나무에 불을 붙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재는 놋망 밑으로 떨어져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번제의 제물은 가죽이 다 벗겨지고, 피가 다 쏟아지고, 각을 뜨게 됩니다. 죄는 이렇게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죗값을 스스로 치르려 합니까? “내 죗값을 왜 예수님이 대신 치러야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은 직접 피를 흘리고, 자기 껍질을 벗겨내고 온 몸을 조각내야 합니다. 그리고 비둘기의 경우는 가죽을 벗기지 않고 제사장이 가져다가 목을 비틀어 몸에서 머리를 떼어냈습니다. 죗값을 지불하는 것은 이런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멱통(모이주머니)과 같이 더러운 것은 제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번제의 제물은 수송아지든, 양이나 염소든, 비둘기든 그 의미가 동일합니다. 죄인들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죽으신다는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죗값이 얼마나 심각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죗값은 목이 끊어지는 것이고, 가죽이 벗겨지고, 각을 떠야 하는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번제의 제물이 갖는 의미입니다.
Ⅱ. 번제의 두 번째 중요한 요소는 ‘제사장’이다
레위기 6장 10~11절에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고의로 하체를 가리우고 단 위에서 탄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단 곁에 두고 그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고 그 재를 진 바깥 정결한 곳으로 가져 갈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의 임무에 관해 규정입니다. 특별히 제사장이 입는 옷에 관한 규정이 매우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물도 예수님을 예표하지만, 제사장도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제사장에 관해서는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제사장의 의복은 세마포 옷입니다. 세마포는 마 재질로 된 하얀색 천입니다. 제사장은 세마포 고의를 입습니다. 고의는 속바지입니다. 그리고 세마포 겉옷을 입고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대제사장 아론과 그의 네 아들이 있습니다. 아론까지 포함하면 총 다섯 명이 제사장입니다.
원래 대제사장의 의복은 매우 화려합니다. 출애굽기 28장 2절에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흰 세마포 고의를 입고 그 위에 세마포 옷을 입고 거기에 겉옷을 입습니다. 겉옷은 청색으로 된 옷입니다. 그리고 에봇이란 조끼를 입고, 판결흉패를 걸칩니다. 판결흉패는 열 두 개의 보석이 달린 매우 화려한 대제사장 의복입니다. 또 머리에는 관을 쓰는데, 관 앞에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패가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번제를 드릴 때만큼은 일반 제사장과 같이 세마포 옷까지만 입고 임무를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수수한 옷을 입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화려한 겉옷과 에봇, 판결흉패를 벗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속죄를 위해 낮아지신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셨지만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그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목수의 집으로 오셨습니다.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겸비’(Humiliation)라고 합니다. 대제사장이 세마포 옷을 입고 번제를 드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겸비를 예표합니다.
그런데 일 년 중 단 하루 대제사장의 의복을 그대로 갖춰 입고 임무를 수행할 때가 있습니다. 유대력으로 7월 10일 대속죄일입니다. 대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 위에 피를 뿌리고 난후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피 뿌림이 끝나고 나면 다시 영광을 차지하게 되실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속죄사역을 감당 하실 때는 낮고 비천한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모든 속죄 제사를 다 마치시고, 피 뿌림을 주신 이후에는 다시 영광스러운 우리의 구주가 되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이 복을 받으려면 예수님께 잘 보여야 합니다. 최고 권세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인간 대통령에게만 잘 보여도 출세를 한다고 하는데, 최고 권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현재 겸비의 상태가 아니라 ‘승귀’(Exaltation)의 상태에 계십니다. 모든 영광을 가지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분이십니다.
둘째, 제사장은 세마포 고의로 하체를 가려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28장 42절에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고의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체’는 허리부터 넓적다리까지를 가리킵니다. 하체는 ‘인간의 원죄’를 상징합니다. 인간의 원죄는 하체의 활동, 즉 생식의 과정을 통해서 후손들에게 계속 전수되기 때문입니다.
하체를 가렸다는 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원죄가 없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실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공자, 맹자, 석가모니가 아무리 훌륭하고 탁월한 사람들이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원죄가 있기 때문에 남을 구원할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타인을 구원할 대속자가 되려면 원죄가 없는 존재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은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한 분밖에 없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제사장은 세마포 옷을 벗고 평상복을 입은 후 재를 가져다가 진 바깥 정결한 곳에 둬야 했습니다. 그러면 왜 세마포 옷을 벗고 진 밖으로 나가야 할까요? 세마포 옷은 세속에 더러워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환복한 후 재를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재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제물이 되시고, 제사장이 되실 뿐만 아니라 그 육신이 죽으실 것이 예표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는 진 바깥 정결한 곳에 놓이게 될 것임이 예언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언덕은 ‘골고다’라고 하고, ‘갈보리’라고도 합니다. 당시 십자가 처형을 받은 사람의 시신은 갈보리 언덕 아래로 던져버렸습니다. 그러면 동물들이 와서 시체를 먹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 총독을 찾아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시체를 요셉에게 넘겼습니다. 마태복음 27장 60절에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사용하려고 바위를 파서 만들어 놓은 새 무덤에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놓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큰 돌을 굴려 입구를 막았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시신이 진 밖 정결한 곳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Ⅲ. 번제의 세 번째 중요한 요소는 ‘불’이다
레위기 6장 9절과 13절에 반복되고 있는 내용은 “불이 꺼지지 말아야 하고, 끊이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에 관한 한 중요한 핵심 메시지는 꺼지지도 말아야 하고, 끊이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불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 자신도 ‘소멸하는 불’이라고 말씀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도 ‘불 침례’라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가리켜 불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단에 불이 꺼지지 말아야 하는 것을 하나님의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나야 한다고 해석하여 부흥회의 본문 말씀으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꺼지지 않는 불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크게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셔도 절대 아무 대가없이 용서하지 않으시고, 죄인의 죄를 대신해서 제물을 바치고, 제물을 불에 태워 향기로 하나님께 올려 하나님이 만족하셨을 때에만 죄인의 죄가 용서받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가 완전히 만족되어야 함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사람들이 가지고 오는 제물로 번제를 드리고, 특별한 절기에도 번제를 드리지만 매일 아침저녁으로 소위 ‘상번제’(Continual burnt offering)를 드려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29장 38~39절에 “네가 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매일 일 년 된 어린 양 두 마리니 한 어린 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 양은 저녁때에 드릴지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끊이지 않고 번제를 드려 그 불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1장 9절에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번제를 통해 연기가 위로 올라가면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Sweet aroma)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흠향하시면 그 제물을 드리는 죄인에 대한 공의가 만족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죄인을 반드시 죽여야 마땅하지만, 이 제물이 죄인을 대신해서 죽은 증거로 연기가 올라와 내게 향기가 되었으니 나의 공의는 만족되었고, 죄인들의 죄는 용서함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지 않고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창세기 8장 21절에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족하신 것입니다.
또 에베소서 5장 2절에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속죄는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이외의 다른 제물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받으시고 만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불, 다른 종교로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종교다원주의는 마귀의 장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모든 것들은 비진리입니다. 마귀의 소리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향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드린 희생제사 뿐입니다.
둘째, 번제의 꺼지지 않는 불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지옥에서 영영히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서 꺼지지 않는 불은 언제나 지옥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과 누가복음 3장 17절에 보면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죗값은 영영히 타는 불에 들어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영영한 지옥 불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이 꺼지지 않는 불이 갖고 있는 의미입니다.
결론
제사장, 제물, 번제의 불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러므로 번제는 복음을 그림처럼 보여줍니다. 어떤 분은 신약의 내용이 쉽고, 구약의 내용은 어렵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은 그림책입니다. 그림책이 어렵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실체인 신약이 훨씬 어려운 것입니다.
제사장이 제물을 불로 태워 드릴 때, 하나님이 흠향하고 만족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받으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에게 영생의 복을 주신다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 죗값을 자기가 스스로 갚겠다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가죽을 벗겨야 하고, 피를 흘려야 하며, 몸을 조각내야 합니다. 목이 비틀어져야 하고, 머리가 떨어지는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지옥의 영영한 불에서 죗값을 직접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불로 드린, 흠 있는 제물로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외에 인간의 영혼이 죄 사함 받고 용서받고 천국가고 육신도 부활해서 영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자기 죄를 지고 영영한 불에 들어가려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또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왜 자기 죄를 지고 지옥 불에 들어가 영영한 고통을 자초하려 하십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 믿기를 주저하십니까?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지옥 불에 들어가는 일이 없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