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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정중규
뇌졸중으로 16년간 투병하던 원로 작곡가 박춘석씨가 14일 오전 6시 별세했다. 향년 80세.
유족에 따르면 박씨는 이날 오전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빈소는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에 마련됐다. 1933. 5. 8. ~ 2010. 3. 14. 서울
대중가요 작곡가.
본명은 의병(義秉)이며 춘석은 그의 아명이다.
해방 전 고무공장을 운영하던 유복한 집안의 8남매중 다섯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피아노 전공)에 입학했다가 1학년 중퇴하고,
신흥대학(지금의 경희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연주활동과 함께 그는 중학교 때 이미 〈황혼의 엘레지〉·〈아리랑 목동〉 등의 작곡과 편곡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연주활동의 영향으로샹송이나 팝송 스타일의 노래와 외국가요의 번안편곡이 주류를 이루었다.
트롯 가요의 작곡을 시작한 것은 6·25전쟁 후 은성경음악단을 조직해 KBS라디오의 생방송연주를 전담하면서부터이다.
특히1960년대 이후 가수 이미자를 만나면서 완전히 트롯 가요의 대가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966년 이후에는 연주활동을 중단한 채 작곡에만 전념하고있으며 지금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있다.
40여 년이 넘게 작곡생활을 해온 그의 대표곡으로는
비내리는 호남선〉·〈38선의 봄〉·〈섬마을 선생님〉·〈가슴 아프게〉 등을 들 수 있으며,
그외 200편이 넘는 영화주제가 등을 포함해 총 2,500여 곡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아울러 패티김·이미자·남진·나훈아·문주란 등 350여 명이 넘는가수들을 길러내 '박춘석 사단'이라는 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태양음향사를 창설, 자신이 음반을 직접 제작하고 있으며 한국음악저작권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장을 지냈다.
작곡가 朴椿石 -국내 최다 2천7백여 곡 발표,
노래마다 ‘살아 있는 악상’, ‘내 애인은 오로지 작품’
‘내 애인은 오로지 작품일 뿐’이라며 평소 ‘가요와 결혼했다’고 늘 입버릇처럼 강조하던 작곡가 박춘석 선생. 활동 기간 40여 년 동안 ‘쉼 없는 창작열’로 현재까지도 국내에서 가장 많은 2,700여 곡을 발표했고 아울러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최다 등록 작품, 1152곡이 등록되어 있다.
속칭 ‘박춘석 사단’이라 불리던 톱 가수 군단과 함께 ‘이인삼각(二人三脚)’을 이루며 SP시대를 지나 LP시대, 그리고 CD시대까지 풍미하며 한국가요사의 중심에 서 있었던 선생 음악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글/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신동’.
50년대 천재 재즈 피아니스트로 등장해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뿔테 안경’의 변함없는 캐릭터로 화려한 악상과 연주를 선보였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박춘석 선생. 지난 94년 8월, 밤새 작곡에 몰두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현재까지도 투병 중인 선생의 소식은 많은 가요인들을 매우 안타깝게 하고 있다.
본명은 의병(義秉), 춘석(春石)은 아명.
1930년 5월 8일, 해방 전 조선고무(朝鮮고무工業株式會社)를 운영하던 부친 박영근(朴永根)과 모친 최진주(崔鎭珠)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서울 의주로 1가, 즉 서소문에서 태어났다.
부유하고 다복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음악적으로 매우 특별한 재능을 지닌 ‘신동’으로 불과 4살 때부터 풍금을 자유자재로 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일화.
현재 선생의 둔촌동 집 근처에서 12년 째 돌보고 있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동생 박금석(74)씨는 “어릴 때부터 형은 유성기에서 한번 들은 노래를 곧바로 화음을 붙여 다시 풍금으로 연주해내는 천재였다."고 회상한다.
봉래소학교, 경기중학교를 거치는 동안 누구의 특별한 지도 없이 피아노와 아코디언을 스스로 독파했던 이 ‘범상치 않은 귀재’가 피아니스트로 처음 무대에 선 것은 48년, 경기중 4학년(고교1년) 때다.
처음 김영순(베니김), 최치정(길옥윤)씨가 찾아와 명동의 나이트클럽인 ‘황금클럽’ 무대에 함께 설 것을 제의해 와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 계기. ‘빡빡머리’에 ‘털모자’를 쓴 채 클럽 연주 생활이 시작되었다.
1949년 피아노 전공으로 서울대 음대 기악과에 입학, 1년간 다니다 중퇴한 뒤 다시 이듬해인 50년 신흥대학(현 경희대) 영문과로 편입, 졸업했다. 본격적으로 악단을 결성해 활동을 시작한 것은 9.28 수복 직후부터. 당시 12인조 악단을 직접 결성해 충무로 2가 ‘은성살롱’에 전속밴드로 들어간 뒤 이름도 ‘은성(Silver star)경음악단’으로 명명했다.
이후 미군 상대 클럽인 ‘금천대회관’ 등의 무대에도 섰던 그는 대학 졸업 후 악단을 재정비, 중앙방송(현 KBS) 라디오 전속 경음악단으로 들어간다.
아울러 이 시기에 ‘박단마 그랜드쇼’와 콤비를 이뤄 백일희, 곽순옥, 이해연, 후라이보이와 함께 시공관에서 ‘코리아 판타지’라는 공연을 올려 호평을 받기도 했다.
주로 샹송과 팝 등 외국가요 편곡이 레퍼토리의 주류를 이루었던 이 무렵, 주위의 권유로 창작한 첫 작품이 바로 ‘황혼의 엘레지’. 이로부터 10년 후 가수 최양숙의 목소리로 대중들에게 히트하는 이 ‘황혼의 엘레지’는 처음 유니버샬을 통해 백일희의 목소리로 먼저 취입(유니버샬/PL 17) 되었다.
아울러 그는 55년, 본격적으로 오아시스레코드사에 전속되기 전까지 ‘황혼의 엘레지’를 비롯해 ‘서커스 걸(백설희, 유니버샬/PL 28)’ ‘샌프란시스코 블루스(백일희)’ 등을 취입, 음반으로 발표하는데 이 때 작사가 명으로 쓴 예명이 ’백호(白湖)’. 이 필명은 동생 박금석씨가 지어준 이름이기도 하다.
KBS 경음악단장으로 활동한 지 1년 뒤인 55년, 오아시스에 전속되면서 전속 기념으로 내놓은 첫 음반이 박단마의 ‘아리랑 목동’. 이어 56년 발표한 ‘비 내리는 호남선(손로원 작사, 손인호노래)’을 히트를 계기로 스물여섯 살의 이 젊은 신예는 비로소 천재성을 주목받기 시작한다.
이어 ‘다정도 병이런가(반야월, 남인수)’, ‘나폴리 맘보(고명기, 현인)’, ‘아주까리 주막집(백호, 안다성)’, ‘불국사 길손(반야월, 최갑석)’ 등 창작곡을 비롯해 ‘로즈 마리’ ‘인디언 러브 콜’ ‘사브리나’ 같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곡을 백일희, 현인 등과 콤비를 이뤄 발표했다.
‘백일희’라는 이름은 당시 인기 팝가수 ‘페기리’에서 딴 이름으로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부른 이해연의 동생이기도 하다.
백일희의 소개로 알게 된 또 한 명의 가수가 패티김(김혜자). 당시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패티김이라는 이름을 대중들에게까지 알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첫 독집음반을 통해 번안곡 ‘틸(사랑의 맹세)’, ‘파드레’를 발표한 데 이어 이번엔 패티김의 소개로 함께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여성듀엣 김치켓을 소개받아 역시 번안곡인 ‘검은 상처의 블루스’를 발표한다.
이때부터 ‘박춘석 악단’을 이끌고 주로 박단마, 백일희 등 당대의 팝 싱어들과 호흡을 맞추던 그는 창작 스타일을 1백80도 전환, 본격적으로 영화음악으로 까지 창작 범위를 넓힌다.
영화음악 첫 작품은 ‘진리의 밤(57년, 김한일 감독)’. 아울러 59년, 김석민 원작의 연극 ‘삼팔선의 봄(노래 황해, 이후 최갑석 취입)’을 비롯해 연극 무대음악으로까지 영역을 확대, 다양한 음악적 실력을 선보인다.
이후 영화 ‘사랑이 가기 전에(59년, 정창화 감독)’, ’비극은 없다(59, 홍성기)‘ ’고바우(59, 조정호)‘, ‘슬픔은 강물처럼(60, 전창화)’, ‘딸(60, 김화랑)’, ‘슬픔은 없다(60, 김묵)’, ‘어딘지 가고 싶어(62, 유두연)’, ‘임자 없는 나룻배(62, 엄심호)’등을 비롯해 뇌졸중으로 쓰러진 94년까지 쉴 새 없이 1백여 편의 영화음악에 몰두해왔다.
아울러 영화 ‘유랑극장(63, 강범구)’주제가인 ‘바닷가에서(안다성)’ ‘사랑이 메아리칠 때(안다성)’를 비롯해 ‘남과 북(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곽순옥), ‘고향하늘은 멀어도(금호동), ‘밀짚모자 목장 아가씨(박재란)’ 등을 발표하며 오아시스 전속 기간동안 히트 작곡가로 부상하며 음악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는다.
1964년, 지구로 전속을 옮기며 스스로 ‘제2의 전환기’를 맞아 작풍도 본격 트로트로 급선회한다. 비로소 이미자씨와의 콤비시대가 개막된 것.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아빠’ ‘흑산도 아가씨’ ‘황혼의 블루스’ ‘그리움은 가슴마다’ ‘한 번 준 마음인데’ ‘아네모네’ ‘떠나도 마음만은’ ‘삼백리 한려수도’ ‘낭주골 처녀’ ‘타국에서’ ‘노래는 나의 인생’까지 이미자씨와 콤비를 이뤄 발표한 곡이 무려 7백 여곡.
말하자면 이미자씨에게 ‘엘레지의 여왕’이라는 왕관을 씌워준 장본인이 선생으로 일생 동안 작곡한 노래의 4분의 1을 이미자씨가 불렀고, 또 그가 부른 노래 3분의 1 역시 박선생이 지은 노래인 셈이다.
당시 빅 히트 3대 공식이었던 이 ‘지구+박춘석+이미자’라는 진용을 이뤘던 시기에 그는 ‘가슴 아프게(남진)’를 비롯해 ‘초우(패티김)’, ‘타인들(문주란)’, ‘호반에서 만난 사람(최양숙)’, ‘방앗간집 둘째딸(쟈니브라더스)‘, ‘마포종점(은방울자매)’, ‘별은 멀어도(정훈희)’, ‘마음이 고와야지(남진)’ 등을 잇달아 발표, 히트 제조기로 명성을 날렸다.
동시에 영화음악작업도 계속 병행했다.
‘마포 사는 황부자(65, 이봉래)’, ‘남과 북(65, 김기덕)’, ‘초연(66, 정진우)’, ‘밤하늘의 부르스(66, 노필)’, ‘초우(66, 정진우)’, ‘가슴 아프게(67, 박상호)’, ‘섬마을 선생(67, 김기덕)’, ‘그리움은 가슴마다(67, 장일호)’, ‘엘레지의 여왕(67, 한형모)’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84, 정진우)’ 등이 그 것으로 그의 히트곡은 곧바로 영화로, 또 주제가는 곧바로 히트곡으로 자리하며 만인의 가슴을 적셨다.
‘어떤 가수도 박춘석씨에게 픽업되면 성공한다.’는 등식까지 화제가 되었던 66년 무렵.
그는 연주활동을 중단한 채 작곡에만 전념하겠다고 선언한 직후 67년 3월, 시민회관 대강당 무대에서 ‘박춘석 가요창작 999곡 째 발표’라는 이색적인 타이틀의 공연을 펼쳐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자신의 노래 모두의 전주와 간주는 물론 치밀한 계산 아래 다양한 편곡을 스스로 했던 인물.
70년대 들어서자마자 ‘박춘석 창작가요 2천곡 기념공연’ 무대를 국도극장에서 막을 올림과 동시에 ‘박춘석 사단’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고 이어 ‘박춘석 작곡사무실’을 열어 이현, 이영일 등 신인을 발굴함과 동시에 ‘물레방아 도는데’의 나훈아, ‘연포아가씨’의 하춘화 등 정상급의 가수들과 손잡고 히트 곡 행진을 계속했다.
국내 히트 작곡가로의 명성은 일본으로까지 이어져 78년 12월, 일본 콜롬비아 측의 의뢰로 일본 최고의 여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에게 ‘風酒場(かぜさかば)’를 취입시켜, 외국인 최초로 그에게 신곡을 써준 인물로 자리매김 된다.
현재 ‘美空 ひばり전집 CD’에 수록되어 있는 이 노래를 기점으로 그의 음악성은 더욱 인정받아 이로부터 11년 뒤인 89년, 미소라 히바리가 세상을 타계했을 때에는 ‘초청하객 인사 1백인 명단’에 그가 포함되었을 정도로 일본 측으로부터도 그의 음악성과 영향력을 인정받았다.
80년대 초반, 작곡가 길옥윤, 송재리씨 등과 함께 ‘(주)태양음향’을 공동으로 설립하기도 했던 그는 88년 거성레코드사로 독립, 본인이 추구하는 음악을 직접 음반으로 제작을 시도했던 적극적인 가요인이었다.
1987년 한국 음악 저작권협회 회장을 거쳐 95년 문화훈장 옥관장을 서훈 받은 그는 지난 94년 8월, 밤새워 곡을 쓰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완벽주의자‘인 그는 이러한 와병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극구 거부해왔었다.
3년 전 폐렴으로 큰 위기를 넘긴 이후 현재는 주기적으로 병원에서 통원 치료를 받고 있지만 이젠 가까운 사람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평생 음악적 동지이자 동생인 박금석 선생이 현재 그의 손발을 대신하고 있다.
직접 만나 뵌 박춘석 선생은 평소 걱정했던 것보다 피부상태도 좋았고 또 건강상태도 좋아진 듯 했다. 본인의 의사 표현은 거의 하지 못하시지만 평소 세심한 성격 그대로 내면의 감정은 여전하신 듯, 자다가도 누가 옆에 있으면 금방 알아챈다고 한다. 악수를 하면서 손에 힘이 너무 세다고 하니 짓궂게 웃으며 손을 더 세게 잡았다.
평소 TV를 즐겨보는 편인데 특히 '동물의 왕국'을 즐겨보고 또한 '열린음악회'나 '가요무대' 등도 빼놓지 않으신다. 혹 패티김이나 이미자씨가 나오면 종종 눈물을 흘리신다는 게 간병인의 말이다.
‘오로지 음악과 결혼했다’며 독신으로 살아온 그는 한국 가요의 지평을 넓힌 작곡자이자 탁월한 재즈 피아노 연주자로 그가 남긴 살아있는 화성들은 여전히 만인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작곡가 박춘석(朴椿石)의 이름 뒤에는 항상 '사단(師團)'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1960~70년대 패티김, 이미자, 남진, 나훈아, 문주란, 정훈희, 하춘화가 박춘석 사단의 멤버였다. 박춘석은 1994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15년째 대중들에게 종적을 감췄다. 그랬던 그가 서울 강동구 둔촌동 아파트를 공개했다. 오랜 투병으로 얼굴이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지만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뿔테 선글라스'는 여전했다. "거동을 못하고 언어장애로 의사 표현을 못한 지 이미 오래되었죠. 이젠 가까운 사람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요. 하지만 평소 예민했던 성격 그대로 자다가도 누가 곁에 오면 금방 깹니다." 40년간 집안일을 돌봐온 이옥분(80)씨에 따르면 박춘석은 TV시청을 즐긴다고 한다. 특히 '열린음악회'나 '가 요무대' 같은 프로그램을 빼놓지 않는데 화면에 패티김·이미자·남진이 나오거나 본인이 작곡한 곡이 나올 때면 종종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내 애인은 오로지 작품일 뿐' '음악과 결혼했다'던 말 그대로다. 박춘석은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대중가요 국내 개인 최다인 2700여곡을 작곡했고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개인 최다인 1152곡이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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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음악과 결혼한 박춘석의 80평생 16세때 미군부대 무대서 데뷔…주옥같은 히트곡 쏟아내
첫사랑 떠나자 평생 독신으로 살다 지금은 15년째 투병중 나조차 못알아봐 눈물이 왈칵 …"다시 피아노 앞에 앉기를" 상명대 석좌교수 사진=배정환 한국보도사진가협회 회원 지난 2월 10일 길동의 한 아파트에서 요양 중인 박춘석씨를 만났다. 그는 15년간 병석에서 외로이 투병을 하고 있다. 내 손을 꽉 쥐고 초점 흐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를 보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스타 작곡가의 삶이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오른쪽 자료 사진은 32년 콤비 패티김과 어느 무대에 선 전성기의 박춘석. 1946년 해방된 다음해 어느 날 저녁, 명동에 있는 미군 전용 업소인 '황금 댄스홀' 무대 위에 16살짜리 경기중학교 4학년(지금의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박박 깍은 머리를 감추기 위해 털모자를 눌러 썼기 때문에 아무도 그가 고등학생인줄 몰랐다. 미군들은 엄토미의 클라리넷, 최상용의 트럼펫, 이진용의 드럼과 소년의 피아노 음악에 맞춰 춤을 즐기고 있었다.
피아니스트 박춘석이 프로 음악계에 정식으로 데뷔하는 순간이다. 그 당시에는 피아노가 별로 많지 않아서 연주할 때마다 트럭에 싣고 다녀야 했는데 박춘석도 자기 집에 있는 피아노를 가져와서 연주를 했다. 따라서 무겁고 큰 피아노를 트럭에 싣고 내리는 작업이 큰 일 중의 하나였다. 나이 어린 박춘석이 음악계에 나서게 된 것은 우리나라 재즈 피아니스트 1호인 임근식 선생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제자로 삼은 것이 계기가 된다. 그는 그 후 은성 살롱과 미군부대에서 연주를 했고, 박춘석 악단을 이끌면서 미국 팝송을 편곡하여 번안 가요를 많이 만들었다. 미군부대에서 연주할 때 백일희라는 여가수를 만나게 되는데 그 여인이 박춘석에게 첫 사랑이다. 미국가수 '페기 리'를 좋아해서 백일희라는 예명을 갖게된 그녀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부른 가수 이해연의 동생이다. 박춘석은 백일희에게 여러 곡의 번안가요를 만들어주었다. '사랑은 아름다워라(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라든가, 훗날 패티김이 부른 'Till'도 그녀가 불렀다. 박춘석은 그녀를 무척 사랑 했다. 그러나 백일희는 그 무렵 미군장교와 사랑에 빠져 결혼 한 후 미국으로 가고 만다. 박춘석에게는 크나큰 상처였다. 고집이 세고 외골수적인 박춘석으로서는 더 이상 사랑을 할 수가 없었다고 동생이며 역시 작곡가인 박금석이 증언 했다. "형은 내가 잘 압니다. 다시는 여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을 볼 때 가슴이 아플 정도였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는 그를 놓고 많은 루머가 돌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박춘석은 서울 중구 충무로 3가에 있는 아담한 2층집에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정말로 많은 노래를 생산했다. 가수생활 50년을 맞은 이미자가 가장 아끼는 노래로서 동백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등 3곡을 꼽았는데 섬마을 선생님과 기러기 아빠가 이 충무로 집에서 박춘석이 작곡한 것이다. 그가 전세로 살던 이 집은 우리나라 근대 대중가요의 산실이었다. 항상 가수들, 작사 작곡가들, 방송 PD들, 신문 잡지 기자들이 살다시피 했다. 박춘석은 2층에 있는 작은 방에서 작곡을 했고, 아래층은 항상 손님들 차지였다. 술은 많이 마시지 않았으나 위스키 종류를 좋아 했는데, 문제는 담배를 지나치게 피우는 것이다. 피아노 건반은 담배 불로 타 있고, 악보를 태우기 일수였다.
1966년 어느 날 지구레코드사의 임정수 사장이 박춘석씨 집에서 나를 만나자고 했다. 남진이 지구레코드사에 전속이 된 기념으로 새 노래를 작곡하는데 와서 들어 보고 평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2층 작곡실에는 임사장, 박춘석, 작사가 정두수, 그리고 가수 남진 등이 와 있었다. 나는 박춘석의 피아노 반주에 남진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아주 좋은 평을 해 주었다. 노래가 쉽고 감상적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제목이 너무 옛날식이어서 고치자는 제안을 했다. 작사자 정두수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낙도가는 연락선'이라는 제목은 시대에 맞지 않으니 바꾸자고 했더니 정두수도 나한테 좋은 제목을 달아 달라고 해서 내가 즉석에서 만들어 준 것이 '가슴 아프게'였다. 이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했고 우리나라 가요계에 신바람을 넣어 준 견인차 역할을 했다. 나는 박춘석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개인적으로 속이 상한일이 있으면 그는 나한테 전화를 해서 상의를 했고, 음악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누곤 했다. 우리나라 가수들 가운데 그의 노래를 한곡이라도 취입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로 그는 많은 노래를 만들었다. 김치캐츠, 패티김, 안다성, 이미자, 남진, 박재란, 문주란, 은방울자매 등등 많은 가수들이 그의 노래를 불렀다. 손인호가 부른 '비내리는 호남선', 최갑석이 부른 '삼팔선의 봄', 안다성의 '바닷가에서', 패티김의 '초우', 곽순옥의 '누가 이사람을 모르시나요' 등 주옥같은 노래를 그는 작곡해냈다. 그러던 그가 1994년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회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실패를 한다. 어쩌면 첫사랑 백일희와의 헤어짐보다 더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쇼크를 받아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게 된다. 며칠 후에 건강이 회복되었지만, 젊었을 때 그토록 좋아 했던 담배를 멀리하지 못한 탓으로 다시 병세가 악화되어 투병중이다. 나는 지난 2월 10일, 그가 요양 중인 길동의 한 아파트에 가서 그를 만났다. 그러나 그가 나를 알아보는지 못 알아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 손을 꽉 쥐고 초점 흐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를 보고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가요를 작곡하고 가장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 낸 스타 작곡가의 삶이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라는 생각으로 가슴이 매우 아팠다. 그가 키워낸 많은 가수들은 지금도 활동을 하며 부를 누리고 있는데 정작 그들의 멘토인 박춘석은 15년간 병석에서 외로이 투병을 하고 있다는 것이 씁쓸하다. 박춘석은 1930년생이고 서울 토박이다. 본명은 박의병인데 부친이 춘석이라는 아명을 지었으며 그 이름이 오늘 날까지 예명으로 쓰이고 있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과 함께 했기에 그에게 노래는 생명이다. 지금은 휠체어에 앉아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이 목숨처럼 사랑하는 음악을 위해 벌떡 일어나서 피아노 앞에 앉기를 기대해 본다.
초우(草雨) 작사.작곡: 박춘석 (1966년 作)
가슴속에 스며드는 고독이 몸부림 칠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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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 방송으로 봤는데... 정말 음악에 천재적인 재주를 가지신 분이더라.. 이 노래도 그렇고,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등은 크래식에 가깝잖아.. 가요를 이렇게 수준 높은 음악으로 만든 분도 흔하지는 않은 것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외로이 휠체어를 타고 계신 모습이 참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노래를 우리에게 선물로 남기고간 님을 위해 기도 합니다.
세월은 가고, 사람도가고, 이젠 노래만 남았군요. 그러나 그 노래들도 가는 세월속에 점점 묻혀 갑니다. 한시대의 우리의 애환을 노래했던 노래들이, 원로 작곡가, 작사가, 가수들로인해 우리의 삶속에 파고 들었던 정다운 노래말과 노래들... 그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