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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도모례원(신라불교초전법륜성지) 원문보기 글쓴이: 환희
㉢ 태몽(胎夢)
아버지 남현(南賢)공은 다섯 차례, 어머니 손씨 부인(孫氏夫人)은 두 차례 똑같은 태몽(胎夢)을 꾸어서 용성 진종조사를 잉태(孕胎)하게 되었다. 태몽의 내용은 이러하다.
환성 지안조사(喚醒志安祖師)께서 방안에 들어와서 하시는 말씀이 석가여래부처님께서 석가여래부촉법 제1세(釋迦如來付囑法 第一世) 마하가섭존자(摩訶迦葉尊者)로부터 석가여래부촉법 제67세인 조사 환성 지안(祖師喚醒志安)까지 실상 무상(實相無相) 미묘 법문(微妙法門) 열반 묘심(涅槃妙心) 청정 법안(淸淨法眼)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이었으나 조선왕조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에 의하여 승려(僧侶)가 8천(八賤) 가운데 들었으니 더 무엇을 덧붙여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때가 되어서 황제 헌원 공손 희씨(黃帝軒轅公孫姬氏)의 후예(後裔) 수원 백씨 남현(水原白氏南賢)공을 아버지로 하여 밀양 손씨 부인(密陽孫氏夫人)의 연화보궁(蓮華寶宮)을 빌려 태어나고자 하나이다 하면서 손씨 부인의 우협(右脇)으로 쑥 들어가는 태몽(胎夢)이었던 것이다.
㉣ 백씨 시원(白氏始源)과 임씨 시원(林氏始源)을 위시로 한 중국 성씨 시원(中國姓氏始源)
태초(太初)에 반고씨(盤古氏), 천황씨(天皇氏), 지황씨(地皇氏), 인황씨(人皇氏), 주역(周易)의 원리(原理)를 내신 태호 복희씨(太昊伏羲氏), 농사법(農事法)과 약초(藥草)의 도리(道理)를 일러주신 염제 신롱씨(炎帝神農氏),
정치(政治)하는 법도(法度)를 시행하신 황제 헌원 공손 희씨(黃帝軒轅公孫姬氏), 이 황제 헌원 공손 희씨께서는 유웅국 국군(有熊國國君)으로서 중원(中原)을 통일(統一)하고 중원 신정(中原新鄭)의 희수(姬水)위 시조산(始祖山)에 올라 등극(登極)하시던 해가 갑자년(甲子年)이니 단군기원(檀君紀元)4337년 남방불교 불멸기원(南方佛敎佛滅紀元)2548년 서기(西紀)2004년도를 기ㅅ점으로 하면 83갑자(八十三甲子) 갑신년(甲申年)이니 지금으로부터 5001년 전의 일이다.
5001년 전의 갑자년(甲子年)을 기ㅅ점으로 하여서 그 이전(以前)을 유사이전(有史以前)이라 하고 그 이후(以後)를 유사이후(有史以後)라고 한다. 그러기에 중원천지(中原天地)에 인문초조(人文初祖)는 황제 헌원 공손 희씨(黃帝軒轅公孫姬氏)이다.
오제시대(五帝時代)로부터가 유사이후(有史以後)이다.
제 1제(第一帝)는 황제 헌원 공손 희씨(黃帝軒轅公孫姬氏),
제2제(第二帝)는 전욱 고양씨(顓頊高陽氏),
제3제(第三帝)는 제곡 고신씨(帝高辛氏),
제4제(第四帝)는 제요 도당(帝堯陶唐),
제5제(第五帝)는 제순 유우(帝舜有虞)이신 오제시대(五帝時代)를 시작으로 하였다.
하대(夏代)에 우(禹) 임금으로부터 걸왕(桀王)에 이르렀다.
하대(夏代)를 지나 상대(商代)에 이르러 성탕 천을 천자(成湯天乙天子)님으로부터 상(商)나라 반경천자(盤庚天子)에 이르렀다.
반경천자는 상(商)나라 도읍지 상구(商丘)에서 안양(安養)으로 도읍(都邑)을 천도(遷都)하면서 상(商)나라 국호(國號)를 은(殷)나라로 바꾸어 주왕(紂王)에 이르렀다.
상(商)나라 은(殷)나라를 거쳐서 주(周)나라가 시작이 되면서 서주(西周)의 무왕(武王)으로부터 유왕(幽王)에 이르렀고 동주(東周)의 평왕(平王)으로부터 학왕(郝王)에 이르렀던 것이다.
서주(西周)와 동주(東周)를 거쳐서 진대(秦代)에 이르러 소양왕(昭襄王)과 진시황제(秦始皇帝)를 거쳐 한(漢)나라에 이르른다.
서한(西漢)의 유방한왕(劉邦漢王)으로부터 유굉시제(劉宏始帝)에 이르르고 동한(東漢)의 광무제(光武帝)로부터 헌제(獻帝)에 이르렀다.
한(漢)나라를 거쳐 위대(魏代)에 이르르니 위문제(魏文帝)로부터 위원제(魏元帝)에 이르렀다.
그리고 서진(西晋)으로부터 동진(東晋)에 이르르니 서진(西晋)의 무제(武帝)로부터 민제(愍帝)에 이르르고 동진(東晋)의 원제(元帝)로부터 공제(恭帝)에 이르렀다.
송(宋)나라 무제(武帝)로부터 순제(順帝)에 이르렀다.
제(齊)나라 고제(高帝)로부터 화제(和帝)에 이르른다.
양(梁)나라 무제(武帝)로부터 경제(敬帝)에 이르른다.
진(陳)나라 무제(武帝)로부터 후제(后帝)에 이르른다.
수(隋)나라 문제(文帝)로부터 공제(恭帝)에 이르른다.
당(唐)나라 고조(高祖)로부터 제11대 덕종(德宗)에 이르른다.
당(唐) 덕종(德宗) 원년 서기780년에 동토 중국 당 시성 낙천 백거이(東土中國唐詩聖樂天白居易)공의 종형제(從兄弟)인 송계 백 우경(松溪白宇經)공이 해동 신라(海東新羅)로 정치적 망명(政治的亡命)을 하여 해동 신라 백씨(海東新羅白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그후 덕종(德宗) 이후 헌종(憲宗), 목종(穆宗), 경종(敬宗), 문종(文宗), 무종(武宗), 선종(宣宗), 의종(懿宗), 희종(僖宗), 소종(昭宗), 소종 선제(昭宗宣帝)시대에 당(唐)나라가 멸망하였다.
동토 중국 당(唐)대를 거쳐 후양(后梁)과 후당(后唐)과 후진(后晋)과 후한(後漢)과 후주(后周)의 소용돌이를 거쳐
북송(北宋)과 남송(南宋)에 이르른다. 북송(北宋) 송 태조로부터 흠종(欽宗)에 이르고 남송(南宋)의 고종(高宗)으로부터 남송 공제(南宋恭帝)에 이르른다.
원(元)나라 원세조(元世祖)로부터 원순제(元順帝)에 이르른다.
명(明)나라 태조(太祖)로부터 명사종(明思宗)에 이르른다.
청(淸)나라 세조(世祖)로부터 선통(宣統) 황제에 이르른다.
서기1911년 손 문(孫文)선생의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부터 중국의 왕도정치는 막을 짓고 이제에 이르르고 있다.
결론적으로 동토 중국의 인문초조 황제 헌원 공손 희씨(人文初祖黃帝軒轅公孫姬氏)와 해동조선(海東朝鮮)의 단군왕검(檀君王儉) 기자대왕(箕子大王)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후예(後裔)인 중국인(中國人) 한국인(韓國人) 일본인(日本人)인 동양3국인(東洋三國人)은 모두가 다 인문초조 황제 헌원 공손 희씨(人文初祖黃帝軒轅公孫姬氏)의 친손(親孫)이거나 내지 외손(外孫)이요, 단군왕검(檀君王儉) 기자대왕(箕子大王)의 친손(親孫)이거나 외손(外孫)이기 때문에 거시적 안목(巨視的眼目)으로 볼 때에는 동양삼국인(東洋三國人)의 씨족원류(氏族源流)가 동근 동본(同根同本)이요 한 근원조(根源祖)이니 한 겨레 한 민족으로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동족애(同族愛)로써 상교(相交)해야 한다고 백 용성조사께서는 그 일찍이 조선왕조 말기에 사은 임동수(士殷林東壽) 거사와 함께 2년 동안 동토 중국에 가서 사찰순례를 하며 중국 고승들과 법거량을 하고 비간묘, 공자묘 등을 순례하면서 중국 씨족에 밝은 이들과 교류하고 중국 하남성 신정시 희수(姬水)위 시조산(始祖山)에 올라 인문초조 황제 헌원 중천각(人文初祖黃帝軒轅中天閣)에 예배하면서 대발원(大發願)을 하였던 것이다.
수원 백씨(水原白氏)의 근원은 인문초조이신 황제 헌원 공손 희씨의 제 16세손 백 을병(白乙丙)공의 후예인 것이다.
한국 임씨(林氏)의 근원은 인문초조이신 황제 헌원 공손 희씨의 제 33세손인 은(殷)나라 왕자(王子) 자 비간(子比干)공이다. 비간공은 중국 한국 일본인 동양3국 인의 제일 가는 충신(忠臣)이고 천하 임씨(天下林氏)의 태시조(太始祖)이며 은(殷)나라를 위하여 순국(殉國)하였다.
비간공이 순국하자 진씨 부인(陳氏夫人)은 잉태(孕胎)한 몸으로 장림산(長林山)에 은거(隱居)하여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우물처럼 맑고 이어지라는 뜻에서 천(泉)으로 하였던 것이다. 그 뒤 주 무왕(周武王)으로부터 장림산(長林山)에서 태어났으므로 성(姓)을 자씨(子氏)에서 임(林)씨로 사성(賜姓)을 받고 견고하게 일어나라고 이름을 천(泉)에서 견(堅)으로 하사하였던 것이다. 이 임 견(林堅)공이 바로 자 비간(子比干)공의 아드님이요, 천하 임씨(天下林氏)의 시조(始祖)가 된 분이다.
맨 처음 임씨(林氏)는 황제 헌원 공손 희씨(黃帝軒轅公孫姬氏)의 후손(後孫)이기 때문에 인문초조(人文初祖)에 희씨(姬氏)를 따서 성(姓)을 희씨(姬氏)라 하였던 것이다.
요(堯) 임금의 형님이 설(契)공이신데, 희 설(姬契) 공은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의 사도(司徒)가 되었고, 순(舜)임금 시대에는 우(禹)를 도와 치수(治水)에 공(功)이 있었다. 제후국(諸侯國)인 상국(商國)의 제후(諸侯)로 봉하면서 다 같은 하느님의 아들인 천자(天子)이기에 희 설(姬稧)공을 희씨(姬氏) 성(姓)에서 자씨(子氏)로 사성(賜姓)을 받았다. 제후국인 상국(商國)의 수도(首都)는 상구(商丘)이었던 것이다.
자 설(子契)공의 제 12세손이요 황제 헌원 공손 희씨의 제18세손인 자씨 성탕 천을 천자(子氏成湯天乙天子)께서는 중원(中原)을 통일(統一)하였다. 통일 이후에도 제후국 국호(諸侯國國號)인 상국(商國) 그대로 국호(國號)를 상제국(商帝國) 그대로 하였다. 그리고 도읍을 언사(偃師)로 천도(遷都)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희씨(姬氏)에서 자씨(子氏)로 자씨(子氏)에서 임씨(林氏)로 하여 남방불교 불멸기원 2548년 서기2004년 83갑자 갑신년을 기ㅅ점으로 5001년에 이르르게 되었다.
천하 임씨 태시조 비간공의 형님인 제을천자(帝乙天子)는 첫째 미자왕자(微子王子)와 둘째 중연왕자(仲衍王子)와 막내 수신왕자(受辛王子)인 세 분 왕자를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비간공은 형님인 제을 천자에게 셋째왕자 수신은 영리하고 총명하니 그에게 왕통계승을 간청하였더니 형님인 제을 천자께서 셋째 왕자인 수신(受辛)에게 왕통(王統)을 계승(繼承)하게 하니, 이가 바로 은(殷)나라 마지막 천자(天子)인 주왕(紂王)이었던 것이다. 이 조카인 주왕(紂王)으로부터 비간공은 순교를 당하였던 것이다.
자 비간(子比干)공의 조카인 미자왕자(微子王子)는 공자(孔子)님의 조상(祖上)이기에 천하 공씨(天下孔氏)의 시조(始祖)가 되고, 천하 송씨(天下宋氏)의 시조가 되었다.
천하 임씨 태시조 비간공의 친동생인 기자왕자(箕子王子)는 금씨(琴氏) 강씨(康氏) 등 9대 대신(九代大臣)과 함께 해동 단군조선(海東檀君朝鮮)으로 망명(亡命)하여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건국(建國)하고 그 시조대왕(始祖大王)이 되었다.
기자대왕(箕子大王)의 후손(後孫)의 대표는 한씨(韓氏), 기씨(奇氏), 선우씨(鮮于氏), 서씨(徐氏)등을 위시로 하여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 부족국가(部族國家)로 이어지면서 부족장(部族長)인 왕(王)과 촌장(村長)이 모두가 다 기자대왕(箕子大王)의 후예(後裔)인 것이다.
수원 백씨(水原白氏), 한국 임씨(韓國林氏)를 위시로 한 동토 중국(東土中國)의 성씨(姓氏)의 근원(根源)은 황제 헌원 공손 희씨(黃帝軒轅公孫姬氏)께서 동토 중국 하남성 신정시 희수(東土中國河南省新鄭市姬水)위 시조산(始祖山)에 올라 유웅국 국군(有雄國國君)으로서 등극(登極)하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중국 중원 하남성(中原河南省)은 씨족(氏族)의 원류(源流)라고 볼 수가 있다.
황제 헌원 공손 희씨께서는 중국 섬서성(陝西省)에서 졸(卒)하시니 교산(橋山)에 황릉(黃陵)이 계신다.
은(殷)나라 말기 천하 임씨 태시조 비간(天下林氏太始祖比干)공은 순국(殉國)하고, 그 부인 진씨(陳氏)는 잉태한 몸으로 장림산(長林山)에 은거하여 아들을 낳았다. 주 무왕(周武王)으로부터 장림산에서 태어났으므로 성(姓)을 자씨(子氏)에서 임씨(林氏)로 이름을 천(泉)에서 견(堅)으로 고쳐 주었다. 뒷날 박릉 대부(博陵大夫)가 되시니 동토 중국 하북성(東土中國河北省)이었다. 박릉 대부 임 견(林堅)공은 서하당(西河堂)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서하당 임 견(西河堂林堅)공으로부터 그 후손(後孫)들이 명문대가(名門大家)로 이어졌던 것이다.
천하 임씨(天下林氏)의 시원(始源)은 인문초조(人文初祖)인 황제 헌원 공손 희씨(黃帝軒轅公孫姬氏)의 희씨성(姬氏姓)으로부터 시작하여 희씨(姬氏)에서 상국 제후(商國諸侯)인 희 설(姬契)공이 자씨(子氏)성을 받아 자 설(子契)공이 되었다. 상국제후(商國諸侯) 자 설(子契)공으로부터 은(殷)나라 왕자(王子) 자 비간(子比干)공까지 자씨(子氏)로 이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은(殷)나라 멸망 이후 주 무왕(周武王)시대로부터 임씨(林氏)의 시조 임 견(林堅)공이 자 천(子泉)공에서 임 견(林堅)공으로 사성(賜姓)을 받아 천하 임씨(天下林氏)의 시조(始祖)가 된 것이다.
천하 임씨(天下林氏)의 시조(始祖) 임 견(林堅)공으로부터 제43세이고 황제 헌원 공손 희씨(黃帝軒轅公孫姬氏)로부터 제76대인 임 술(林述)공은 한(漢)나라 경제(景帝)시대에 제남(濟南)의 소부(少府)로 임명되어 진(秦)나라 말년부터 제군(齊郡)을 나누어 제남군(濟南郡)을 두었으니 임씨(林氏)는 드디어 제남인(濟南人)이 되었다. 그리하여 임 술(林述)공은 제남당(齊南堂)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한 문제(漢文帝)와 한 경제(漢景帝)의 시대에는 일찍이 공자(孔子)와 노자(老子)의 철학으로 세상을 다스려 천하가 태평하였으며, 역사에서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말하였는데 바로 한조(漢朝)의 왕성한 시대였다. 한 무제(漢武帝)는 한 문제(漢文帝)와 한 경제(漢景帝)가 남긴 재산의 부유함을 계승하여 그 정치의 천재(天才)를 발휘하였으며 동․서․남․북으로 공격하고 정벌하여 가는 곳마다 전쟁에 승리하여 당시 아시아주에서 국토가 가장 큰 대한제국(大漢帝國)을 조성하였다.
황제 헌원 공손 희씨의 제97대이고 임 견 임씨시조(林堅林氏始祖)로부터 제64세손인 임 녹(林祿)공은 서진(西晋) 무제태강(武帝太康) 10년에 탄생하여 영가지화(永嘉之禍)뒤에 그 부친(父親) 임 영(林潁)공과 낭야왕 사마예(郎椰王司馬睿)를 따라 남도(南渡)하였고, 안동(安東) 낭야왕부(郎椰王府)의 참군(叅軍)으로 임명되었다가 낭야왕 사마예가 칭제(稱帝)한 뒤에 곧 황문시랑(黃門侍郞), 초원장군(招遠將軍), 산기상시(散騎常侍), 합포태수(合捕太守)를 역임하고 동진명제(東晋明帝) 태녕(太寧) 3년에 이르러 칙명(勅命)으로 진안군 태수(晋安郡太守)에 임명되고 진안(晋安)에 살면서 드디어 가문(家門)을 이루었다. 이리하여 임 녹(林祿)공이 진안당(晋安堂)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동진목제(東晋穆帝) 영화(永和)12년에 임 녹(林祿)공이 별세하자 진안왕(晋安王)으로 추봉(追封)되고, 임 녹(林祿)공은 민림 시조(閩林始祖)가 되었다. 진안(晋安)은 현재 동토 중국의 남쪽 복건성(福建省)을 말한다.
황제(黃帝) 제112대 임씨 시조로부터 제79세 임 피(林披)공은 보전 출신(莆田出身)으로 당 현종 천보(唐玄宗天寶)11년 임진년(壬辰年 서기752년)에 명경과(明經科)에 등제(登第)하고 장주자사(漳州刺史), 강주자사(康州刺史)를 역임하고 태자첨사(太子詹事)에 제수 되었는데 위(葦)와 조(藻)와 저(著)와 천(薦)과 엽(曄)과 온(蘊)과 몽(蒙)과 매(邁)와 기(蔇) 등 아홉 분의 아들을 두었다.
첫째 아들 임 위(林葦)공은 당 덕종 건중(唐德宗建中) 원년 경신년(庚申年 서기780년)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단주자사(端州刺史)로 마쳤다.
둘째 아들 임 조(林藻)공은 당 덕종 정원(唐德宗貞元) 7년 신미년(辛未年 서기791년)에 윤추방(尹樞榜)의 진사(進士)에 올라 영남부사(嶺南副史)에 임명되었다가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마쳤다.
셋째 아들 임 저(林著)공은 당 덕종 정원(唐德宗貞元) 6년 경오년(庚午年 서기790년) 명경과(明經科)에 급제(及第)하여 횡주자사(橫州刺史)로 마쳤다.
넷째 아들 임 천(林薦)공은 당 덕종 정원(唐德宗貞元) 12년 병자년(丙子年 서기796년)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及第)하여 진사(進士)에 오르고 소주자사(卲州刺史)로 마쳤다.
다섯째 아들 임 엽(林曄)공은 당 덕종 정원(唐德宗貞元) 9년 계유년(癸酉年 서기793년)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及第)하여 통주자사(通州刺史)로 마쳤다.
여섯째 아들 임 온(林蘊)공은 황제 헌원 공손 희씨의 제113대 손이고, 임 견 임씨 시조(林堅林氏始祖)로부터 제80세 손이다. 해동 신라 임씨 도시조 임 팔급 충절공(海東新羅林氏都始祖林八及忠節公)의 고조부(高祖父)이다.
임 온(林蘊)공은 당 덕종 정원(唐德宗貞元) 4년에 무진년(戊辰年 서기788년)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及第)하여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에 제수되고 소주자사(卲州刺史)로 마쳤다. 소주(卲州)는 중국 호남성(中國湖南省)에 있다.
임 온(林蘊)공의 고손자 병부상서 임 팔급 충절공(高孫子兵部尙書林八及忠節公)은 중국 복건성 혜안현 팽성(中國福建省惠安縣彭城) 앞바다에서 해로(海路)로 정치 망명(政治亡命)하여 신라 평택현 용포리(新羅平澤縣龍浦里)에 당도하여 세거(世居)하였다.
일곱째 아들 임 몽(林蒙)공은 당 덕종 정원(唐德宗貞元) 연간에 맹릉주부(孟陵主簿)로 제수되었다가 순주자사(循州刺史)로 마쳤다.
여덟째 아들 임 매(林邁)공은 당 덕종 정원(唐德宗貞元) 연간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뇌주자사(雷州刺史)로 마쳤다.
아홉째 아들 임 기(林蔇)공은 당 덕종 정원(唐德宗貞元) 연간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복당자사(福唐刺史)로 마쳤다.
큰아들 임 위(林葦)공과 둘째 아들 임 조(林藻)공으로부터 여섯째 아들 임 온(林蘊)공 내지 아홉째 아들 임 기(林蔇)공에 이르는 9형제(九兄弟) 모두가 다 고을을 다스리는 자사(刺史)가 되니 세상에서는 보전구목공(莆田九牧公)이라고 칭송하였다. 이 9형제(九兄弟)분이 우리 임씨(林氏)의 구목연파(九牧衍派)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보전구목공(莆田九牧公)은 황제 헌원 공손 희씨의 제113대 손이고 천하 임씨(天下林氏)의 시조 임 견(始祖林堅)공의 직계 팔십세손(八十世孫)이 되니, 곧 천하(天下)의 명망(名望)이 있는 종족(種族)이다. 9목공(九牧公)의 후예(後裔)는 가지가 나누어지고 갈래가 갈라져서 강북에서 강남으로 퍼졌으며, 더욱 번성하여 민오(閩奧)가 가장 많다. 대만 임씨(大灣林氏)는 9목공(九牧公)의 후예가 되는 사람이 많다. 해동 조선 한국 임씨(海東朝鮮韓國林氏) 역시 구목연파중(九牧衍派中) 제 육방 임 온공(第六房林蘊公)의 후예(後裔)이다.
(海東 朝鮮 韓國 吾林亦是 九牧衍派中 第六房 蘊公之 後裔也)
황제 헌원 공손 희씨(黃帝軒轅公孫姬氏) 제113세손(第一一三世孫)이며 득성 임씨(得姓林氏) 제80세손(第八十世孫) 임 온(林蘊)공은 한 때 둘째 형님 임 조(林藻)공과 구 양첩(歐陽惵) 명사(名士)와 함께 천산에서 학문을 익혔다. 당 정원 4년(唐貞元四年) 무진년(戊辰年 서기788년)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及第)하였다. 다시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에 급제(及第)하여 촉(蜀)에 들어가 사천절도사(四川節度使) 유 벽(劉闢)의 추관(推官)으로 되었다. 헌종 원화 원년(憲宗元和元年) 병술년(丙戌年 서기806년)에 유 벽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임 온추관(林蘊推官)이 간절하게 말리니 유 벽은 노하여 임 온공을 죽이려 하였다. 죽음을 앞두고 임 온공은 큰소리로 「나라가 위급할 때 들어가지 않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 살지 말라 했으니 죽음을 당함은 다행이다」라고 외쳤다. 유 벽은 하수인을 시켜 임 온추관의 목에 칼을 비벼대면서 굴복하게 하였다. 이 때에 임 온추관은 「죽이려면 죽여라, 내 목이 어디 숫돌이냐?」라고 외쳤다. 유 벽은 임 온추관의 강인한 태도에 겁이나서 떨었다. 유 벽은 실패하고 임 온추관의 명성은 장안(長安)에 까지 떨치었다. 조서를 받고 상경하여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을 제수 받았다가 다시 소주자사(卲州刺史)로 전임하였다. 부인 하씨(夫人何氏)가 아들 원(愿)을 낳았다.
황제 제114대 임씨(林氏) 제81세 임 원(林愿)공은 당 헌종(唐憲宗)시대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及第)하여 좌효위참군(左驍尉叅軍)에 임명되고 옹(邕)과 동(同)과 어(圉)와 부(賦)를 낳았다.
이상이 중화민국 세차 갑자년 국월(中華民國歲次甲子年菊月) 재단법인 전국 임성종묘(財團法人全國林姓宗廟)에서 발간(發刊)한 임씨 대종보(林氏大宗譜) 임씨족사지략(林氏族史志略)과 용성 진종조사 본(龍城震鍾祖師本)과, 사은 임동수거사 본(士殷林東壽居士本)과 함께 대조(對照)하니 동일(同一)하였다. 이는 중국 임씨(中國林氏)를 대표해서 9목연파 제2방 임 조(九牧衍派第二房林藻)공의 후예(後裔)이신 동토 중국 복건성 천주시 남안 비간문화연구회(東土中國福建省天州市南安比干文化硏究會)의 임수단 주편(林樹丹主編)님이 동토 중국 족보 본(東土中國族譜本)을 가지고 해동 한국 임씨(海東韓國林氏)를 대표해서 9목연파 제육방 임 온(九牧衍派第六房林蘊)공의 후예(後裔)인 해동 한국 백용성조사유훈실현후원회(海東韓國白龍城祖師遺訓實現後援會) 불심 도문 임윤화 지도법사(佛心道文林允華指導法師)가 사은 임동수 본 족보 본(士殷林東壽本族譜本)을 가지고 인문초조 황제 헌원 공손 희씨(人文初祖黃帝軒轅公孫姬氏)로부터 중국 복건성 보전 9목연파 제6방 임 온(莆田九牧衍派第六房林蘊)공에 이르르고 임 온(林蘊)공의 고손자 임팔급(林八及)공이 해동신라 임씨(海東新羅林氏)의 시조(始祖)가 되심을 밝히게 된 것이다.
해동 한국 족보본과 동토 중국 족보본을 낱낱이 대조(對照)해 보니 모두가 일치(一致)되었다.
단군기원 4329년 남방불교 불멸기원2540년 서기1996년 83갑자 병자년을 기ㅅ점으로 4993년간 희씨(姬氏) 자씨(子氏) 임씨(林氏) 근5000년간의 족보를 한국 중국 임씨가 동근 동본이어서 조상의 원류를 밝히게 된 것이다.
황제 제115대 임씨(林氏) 제82세 옹(邕)공은 문범(文範)과 문회(文回)를 낳았다.
황제 제116대 임씨(林氏) 제83세 문범(文範)공은 팔급(八及)공을 낳았다. 당조 말년(唐朝末年) 정치가 부패하여 중앙의 내시 환관(宦官)들과 붕당(朋黨)이 권력을 잡으려고 서로 다투고 지방의 번진(藩鎭)이 할거(割據)하였고 백성들의 반란이 아주 치열하였다. 마지막에는 당나라 황실이 주온(朱溫)에게 망하였다.
황제 제117대 임씨(林氏) 제84세 해동(海東) 통일신라 1조 임 팔급 충절공(林八及忠節公)공은 18세시에 당나라 용도각 한림학사(龍圖閣翰林學士)로 시작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로 계셨는데 당(唐)나라 말엽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참소를 당하여 칠학사(七學士)인 유 전(劉筌), 설 경인(薛敬仁), 허 강(許薑), 주 규(朱奎), 최 호(崔冱), 권 지기(權之奇), 공 덕부(孔德符)학사와 같이 해동 신라(海東新羅)로 망명하여 평택현 용포리(平澤縣龍浦里)에 세거(世居)하였다. 시호(詩號)가 충절공(忠節公)이다.
㉤ 환성 지안조사(喚醒志安祖師)
환성 지안조사(喚醒志安祖師)의 생몰연대(生沒年代)는 조선왕조 제18대 현종대왕(顯宗大王) 5년 갑진년(甲辰年 서기1664년)에 탄생하여 제21대 영조대왕(英祖大王) 5년 기유년(己酉年 서기1729년) 음력 7월 칠석에 제주도에서 순교(殉敎)하였다. 환성(喚醒)은 법호(法號)이고 지안(志安)은 법명(法名)이다. 속성(俗姓)은 정씨(鄭氏)이고 강원도 춘주(春川) 출신이다. 15세시에 양평 미지산 용문사에 출가하여 상봉 정원(霜峰淨源)대사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17세시에 석가여래부촉법 제66세 월담 설제조사(釋迦如來付囑法第六六世月潭雪霽祖師)의 실상 무상(實相無相) 미묘 법문(微妙法門) 청정 법안(淸淨法眼) 열반 묘심(涅槃妙心)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이어 받아 석가여래부촉법 제67세 조사(釋迦如來付囑法第六七世祖師)로 등단하였다. 그 후 불경(佛經)과 조사어록(祖師語錄) 간경수행(看經修行)도 철저(徹底)히 하였다. 27세시에는 김천 황악산 직지사 강원에서 모운 강백(慕雲講伯)이 간경대법회(看經大法會)를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니 모운 강백이 수백명 학인을 환성 지안조사에게 맡기고 다른 곳으로 떠나 버렸다. 환성 지안조사는 대중을 거느리고 종풍(宗風)을 떨치니 수많은 학인들이 운집하였던 것이다. 환성 지안조사의 강의하는 뜻이 깊고 묘하여 일찍이 듣지 못하던 것이므로 의심을 품는 학인들이 없지 않았으나 그 뒤에 경(經), 론(論)을 많이 실은 배가 우리나라에 당도하여서 그 경장(經藏)과 논장(論藏)이 전라도 낙안 징광사(樂安澄光寺)에 이운 되었는데 동토 중국 육조 혜능(六祖慧能)조사 이후 여러 가지 주해가 있어 그것이 환성 지안조사의 가르치심과 틀리지 아니하므로 모두가 탄복하였던 것이다. 환성 지안조사는 명산 대찰로 순방하다가 지리산에 주석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떠한 도인이 와서 말하기를 스님은 빨리 다른 데로 가시오 얼마 뒤에 재난이 있을 것이오 하더니 수일 후에 그 절이 불이 났다고 소문을 들은 것이다. 또 금강산 정양사에 주석할 때 큰비가 한참 쏟아지는데 행장을 꾸려 가지고 행걸하러 가다가 어떠한 부자ㅅ집에서 자고 가라고 하는 말을 듣지 않고 어느 오막살이집에서 주무셨는데 그날 밤 정양사와 그 부자ㅅ집이 물에 잠겼다고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조선왕조 제21대 영조(英祖)대왕 원년 을사년(乙巳年 서기1725년)에 전라도 금구 모악산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華嚴大法會)를 열어 대방광불화엄경 제38 이세간품 보혜병사 2백문 보현운흥 2천답(大方廣佛華嚴經第三十八離世間品普慧甁斜二百問普賢雲興二千答)을 설법(說法)하였는데 전국에서 모인 학인이 1천4백여인이라 철발우(鐵鉢盂)로 대중(大衆)이 함께 발우공양(鉢盂恭養)을 하였던 것이다. 영조(英祖)대왕 5년 기유년(己酉年 서기1729년)에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에 의하여 역적음모(逆賊陰謀)를 꾸몄다고 모함(謀陷)을 받아 지리산(智異山)에서 체포(逮捕)가 되었던 것이다. 호남(湖南)의 감옥(監獄)에 갇혀 있다가 마침내 제주도(濟州島)로 귀양을 가게 되었던 것이다. 환성 지안조사께서는 기유년(己酉年) 음력 7월 7일 순교 직전(殉敎直前) 허공(虛空)에 전법게(傳法偈)를 읊었으니 그 전법게(傳法偈)는 이러하다.
연류일단사
沿流一段事 물 따라 내려 흘러가는 한 조각 일이니
경무두여미
竟無頭與尾 필경 머리와 더불어 꼬리가 없도다
부여사자아
付余獅子兒 사자새끼에게 더불어 부촉하노니
초후만천지
哨吼滿天地 사자 울부짖는 소리 천지에 가득하도다
석가여래부촉법 제67세 환성 지안조사께서는 순교입적(殉敎入寂)하시니 세수(世壽) 67세(歲) 법랍(法臘) 50하(夏)이었다. 저서(著書)는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와 환성시집(喚醒詩集)이 있다.
㉥ 전라감사 이 서구(全羅監司李書九)
용성 진종조사께서 탄생하신 곳은 백두대간 중심지(白頭大幹中心地) 장안산하(長安山下) 죽림촌(竹林村)이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은 한반도의 자연적 상징이며 동시에 한민족의 인문적 기반이 되는 산줄기라 할 수 있다. 함경도 혜산 백두산(咸鏡道惠山白頭山)에서 시작하여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南)으로 맥(脈)을 뻗어 내리다가 태백산(太白山)을 거쳐 남서(南西)쪽의 전라도 구례 지리산(全羅道求禮智異山)으로 뻗어 내려가는 산맥(山脈)을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고 한다.
이 산줄기를 이루는 주요산은 백두산(2,744m)을 기ㅅ점으로 포태산(2,289m) 두류산(2,309m) 등 해발고도 2,000m 내외의 고봉(高峰)으로 이어져 압록강 두만강 유역을 양분한다.
산줄기는 다시 남쪽으로 차일봉(1,743m) 두류산(1,324m) 추가령(725m)으로 이어진다.
또한 동해안(東海岸)을 끼고 금강산(1,638m) 진부령(592m) 설악산(1,708m) 오대산(1,563m) 대관령(832m) 두타산(1,353m)을 거쳐 태백산(1,567m)에 닿는다.
여기에서 방향을 남서(南西)쪽으로 돌려 소백산(1,440m) 죽령(689m) 이화령(548m) 속리산(1,058m)으로 뻗어 내린다.
이로부터 추풍령(221m) 황악산(1,111m) 산도봉(1,177m) 덕유산(1,614m) 백두대간 중심지 진산 장수 장안산(白頭大幹中心地鎭山長水長安山)옆으로 백운산(1,279m) 지리산(1,915m)으로 이어지면서 산줄기는 끝이 난다.
장수 장안산(長水長安山)에서 물줄기가 서북류(西北流)하면 금강으로 흐르고 서남류(西南流)하면 섬진강으로 흐르고 동남류(東南流)하면 낙동강으로 흐른다.
1정간 1대간 13정맥의 15개의 산줄기들은 10대 대강(十代大江)에 물을 대는 젖줄이자 국토를 구획하는 울타리라 하겠다.
1정간은 장백정간이다.
1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이다.
13정맥은 ①낙남정맥 ②청북정맥 ③청남정맥 ④해서정맥 ⑤임진북예 ⑥한북정맥 ⑦낙동정맥 ⑧한남금북정맥 ⑨한남정맥 ⑩금북정맥 ⑪금남호남정맥 ⑫금남정맥 ⑬호남정맥이다.
10대 대강(十代大江)은 ①두만강 ②압록강 ③청천강 ④대동강 ⑤예성강 ⑥임진강 ⑦한강 ⑧금강 ⑨낙동강 ⑩섬진강이다.
백두산(白頭山)에서 지리산(智異山)으로 향(向)하는 중 소백산맥(小白山脈)이 덕유산(德裕山)을 거쳐 남(南)으로 내려오면서 무룡궁(舞龍宮)에서 일맥(一脈)이 지리산(智異山)으로 향해 가다가 백운산(白雲山 높이1,287m) 고봉(高峰)을 이루고 서쪽으로 일맥(一脈)이 전국8대 종산중(全國八大宗山中) 진산(鎭山)인 장안산(長安山 높이1,236m)이 우뚝 솟아 서남쪽으로 달리다가 갑자기 멈추면서 자그마한 봉우리를 이루고 섬진강 상류(蟾津江上流)인 죽림촌(竹林村)을 중심으로 좌류 백운천(左流白雲川)과 우류 용림천(右流龍林川)이 좌우(左右)에서 흘러오다가 산 앞에서 서로 만나는 양수합곡요천상류(兩水合谷蓼川上流)하는 언덕에 산(山)을 등지고 물을 안대로 하는 아담하고 양지바른 이 죽림촌(竹林村)이 대붕포태지지(大鵬胞胎之地)라 하여 큰 인물이 날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간직한 마을이라 하겠다.
죽림(竹林)마을을 또 와우형국(臥牛形局)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대 명당(大明堂)의 죽림촌(竹林村) 이기에 조선왕조 제22대 정조(正祖)대왕 17년 계축년(癸丑年 서기1793년)에 이 서구(李書九)공이 40세시에 전라감사(全羅監司)로 부임하여 바로 전라도 초도 순시에 나섰던 것이다. 그리하여 구례 지리산(求禮智異山)으로부터 시작하여 장수 장안산(長水長安山)에 이르러 한 산맥(山脈)을 따라 50여리 까지오니 죽림촌(竹林村)에 당도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장수(長水)에서 남원(南原)으로 행차(行次)하던 중 죽림촌(竹林村) 앞의 도주막(都酒幕)에서 백두대간 중심지 장안산(白頭大幹中心地長安山)으로부터 한 산맥이 뻗어 내려 멈춘 죽림촌(竹林村) 뒷산을 향해 예배(禮拜)하고 말씀하기를「1백년 이내에 대도인(大道人)이 이 죽림촌(竹林村)에서 태어나 조선왕조(朝鮮王朝)가 멸망(滅亡)한 뒤 나라를 구제(救濟)할 것이다」라고 예언(豫言) 하였던 것이다.
이러기에 죽림촌(竹林村)은 가활 만인지지(可活萬人之地)라고 하게 된 것이다. 이 서구 전라감사(全羅監司)께서는 당대에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권위자(權威者)였던 것이다. 이 서구 전라감사는 조선왕조 제21대 영조대왕 30년 갑술년(甲戌年 서기1754년)에 출생하시어 제23대 순조대왕 25년 을유년(乙酉年 서기1825년)에 졸(卒)하신 분으로서 자가 낙서(洛瑞)이고 호가 강산(薑山)이며 전주이씨(全州李氏)의 후예(後裔)이다.
증 영의정(贈領議政) 이 원(李遠)공의 아들이며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5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외조모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외숙으로부터 사기(史記), 통감(通鑑), 당시(唐詩) 등을 배웠다. 12세시에 본가에 돌아와 경전(經典)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16세시로부터 박지원(朴趾源) 선생을 만나 문장을 배웠다.
그리고 명문장가(名文章家)로서 특히 시명(詩名)이 높아 박 제가(朴齊家)공, 이 덕무(李德懋)공, 유 득공(柳得恭)공과 함께 한시(漢詩)의 4대가(四大家)로 알려졌으며 5언고시(五言古詩)에 능하여 문자학(文字學)과 전고(典故)에 조예가 깊고 글씨에 뛰어났던 분이었다. 문집으로 《강산초집(薑山初集)》이 있다.
67세시에 전라감사로 재부임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마찰이 일어나자 두 번째 부임한 전라감사를 하직하고 낙향하여 임종 때에 유소(遺疏)를 남겨 말씀하시기를 첫째로 임금님이 나라를 다스리고자 분발할 것, 둘째로 널리 어진 인재를 선발할 것, 셋째로 재정을 절약하여 백성의 힘을 기를 것, 넷째로 멀고 가까이 차별을 두지 말아 민심을 결속할 것을 간언하여 당파적 편협성과 해이된 국가의 기강을 절실하게 염려하셨던 것이다. 이 서구공은 낙향하여 자탄하기를 아들이 없고, 늙어 가고, 벼슬을 한 일, 이 세 가지를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고 한 분이다.
이 서구공은 유학자(儒學者)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불법(佛法)을 신봉(信奉)한 분으로서 조선왕조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에 의하여 조선왕조 제21대 영조대왕 5년에 제주도에서 순교하신 석가여래부촉법 제67세 환성 지안조사께서 정법안장을 부촉하지 못하고 허공에 전법게(傳法偈)를 읊어 놓으심을 한스럽게 생각하면서 반드시 이 국토에 환생(還生)하여서 석가모니여래 불 세존의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미륵존여래불의 용화회상(龍華會上)으로 불타조사(佛陀祖師)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이어지게 될 것임을 확실히 믿은 분이었다. 조선왕조 이성계 태조대왕의 왕사(王師)인 자초 무학대사(自超無學大師)께서 조선왕조 국운(國運)이 5백년 운(五百年運)이라 예언(豫言)하였으니 조선왕조가 멸망(滅亡)한 뒤 석가여래부촉법 제67세 환성 지안조사(釋迦如來付囑法第六七世喚醒志安祖師)께서 반드시 백두대간 중심지 장안산하 죽림촌(白頭大幹中心地長安山下竹林村)에 후신(後身)을 나투시어 멸망(滅亡)한 나라를 구제(救濟)하는 도승(道僧)으로 출현(出現)하실 것을 미리 알으시고 예언하심이 임종(臨終)하실 때에 유소(遺疏)의 내용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환성 지안조사(喚醒志安祖師)는 이러한 조선왕조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으로 금구 모악산 금산사 화엄대법회에서 음모를 꾸몄다는 모함을 받아 불타조사(佛陀祖師)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수법제자(受法弟子)에게 직접 전법(傳法) 하지를 못하고 허공(虛空)에 전법게(傳法偈)을 읊고 순교(殉敎) 하심을 잘 알고 있는 이 서구 전라감사는 환성 지안조사의 후신으로 용성 진종조사가 환성 지안조사의 순교로부터 135년 후에 백두대간 중심지 장수 장안산하 죽림촌에 탄생할 것을 예언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각응세 갑자년(甲子年) 조선왕조 제26대 고종대왕 원년 단군기원 4197년 서기1864년 음력 5월 8일에 전라도 남원군 하번암면 죽림촌(全羅道南原郡下蟠岩面竹林村)에서 용성 진종(白龍城)조사께서 탄생하실 것을 예언한 시(詩)는 이제에도 적중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이 서구 전라감사 예언시(豫言詩)는 아래와 같다.
장안래룡지두처 장안산에서 내려온 용의 머리가
長安來龍至頭處 이르는 곳은
혈재고봉상상정 높은 봉우리 위의 정상의 산혈에
穴在高峰上上頂 있음이로다
적덕하인래점처 지혜와 복덕이 구족한 도인이
積德何人來占處 머물러 지키면
금팔은삼부여해 3․8 동방목 우리나라에 금 은이
金八銀三富如海 가득한 부유국이 되리로다
이 서구 전라감사는 조선왕조 제21대 영조(英祖)대왕 50년 갑오년(甲午年 서기1774년) 21세시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서 사관(史官)과 지평을 거쳐서 승지와 대사간과 이조판서와 대사헌과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왕명으로『장릉지(莊陵誌)』,『춘추(春秋)』,『정조실록(正祖實錄)』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영조(英祖)대왕 51년 을미년(乙未年 서기1775년) 22세시에 사가(四家)시집인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 참가함으로써 문장의 명망이 청(淸) 나라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사가(四家)시인에 들었던 박 제가(朴齊家), 이 덕무(李德懋), 유 득공(柳得恭)은 모두 서자출신이지만 이 서구공은 양반가의 자손이었다. 벼슬도 순탄하여 조선왕조 22대 정조대왕 10년 병오년(丙午年 서기1786년) 33세시에 홍문관 교리를 거쳐, 한성부판윤, 평안도 관찰사, 형조판서, 판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두루 지냈다. 이 서구공은 제22대 정조대왕 17년 계축년(癸丑年 서기1793년) 40세시에 전라감사로 처음 부임하였고 또 제23대 순조대왕 20년 경진년(庚辰年 서기1820년) 67세시에 전라감사로 재부임하였던 것이다. 전라감사시절 이 서구공은 백성들의 곤고한 삶을 구제하기 위해 경세치민에 힘을 쏟았고 앞날을 예견하여 미리 조처하는 선견지명을 발휘하였으며 인품이 청렴결백하여 명관으로서의 면모를 다양하게 갖춘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 서구감사는 과거(過去)의 일을 풀어내는 능력(能力)과 미래(未來)를 예견(豫見)하는 능력(能力)이 중심이 되는데 이 서구감사는 관리의 면모보다 도인(道人), 이인(異人)으로서 면모가 부각되었으며 그 신비화(神秘化)된 능력(能力)이 민중의 현실적 삶과 함께 호흡을 같이 하였기 때문에 이 서구감사는 영웅적 존재로 확대가 된 것이다. 이 서구감사는 어떤 일을 예견(豫見)할 수 있는 능력(能力)이 거의 도인(道人)의 경지(境地)에 이르렀고 이러한 능력(能力)은 전라도 백성(全羅道百姓)의 삶의 터전에 얽힌 풍수설화(風水說話)와 결합(結合)하여 더욱 강화(强化)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