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 7: 18 부르심을 받은 자 - 고전 7: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
고전 7: 18 부르심을 받은 자 -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
성도에게 할례를 받고 안 받고는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세례 의식도 그 형식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1]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1) 할례
구약의 할례는 신약시대의 세례의 모형이다.
* 골 2: 11 -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2) 구약의 할례
할례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언약의 징표였다. 할례에 대한 명령은 창 17장에 나온 다. 이곳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창 17: 10)" 여기에서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라고 선언하셨고, 12절에서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언약의 표시로 이스라엘 백성의 몸에 새겨진 흔적이었다. 따라서 할례는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라!"는 징표이며, 상징이었고, 또한 표시(mark)였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명서, 즉 신분증과 같은 것이다. 할례는 옛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예식의 증거였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확실한 표시다.
(3) 신약의 할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하여 새사람이 된 자들에게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초대 교회에서 이방인의 할례 문제는 교회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불만족스러운 처사였다.
특히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가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주장한 바울의 견해는 대부분의 선교지에서 오해의 원인이었으며 교회 분쟁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헬라의 생활 방식에 적응한 유대인 중에는 할례의 흔적을 감추려 하거나 없애려 하는 자들도 있었다(Lenski, Farrar).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의 주장은 보다 설득력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생활의 이기적 유익을 위하여 할례를 행하기도 하고 없애버리기도 하는 할례의 의미는 더 이상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율법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다. 여기서 '계명'(*, 엔톨라이)은 모세의 율법과 같은 법적 규제가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형편과 처지를 따라 복음에 순종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자신이 처해있는 생활 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유대주의적 관행(慣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 요 15: 12-14 –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2]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 할례자나 무할례자
구약의 의식법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할례를 받고 안 받고가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오늘날 세례 의식도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천주교는 세례가 외형적 행위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한다고 가르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2) 세례
세례는 주 예수에 대한 참된 믿음과 순종의 마음으로 참여할 때만 효력이 있다.
참 종교는 의식이나 형식에 있지 않고 믿음과 순종의 마음에 있다.
* 롬 2: 28-29 –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 갈 5: 6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 갈 6: 15 -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사 그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니라.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는 백성중에서 끊어지리라" (창 17: 9-14)하셨다.
즉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징표로 할례를 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육적 할례는 행하였으나 실상인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아니하여 범죄하므로 하나님께서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렘 4: 4)하셨으나 그들의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여 듣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욕으로 여겼다. (렘 6: 10).
이에 하나님이 노하여 말씀하시기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거하여 그 머리털을 모지게 깎은 자들에게라. 대저 열방은 (육적)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렘 9: 25-26) 하셨다.
결국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70년간 고난을 받고, 할례 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진 후에 이스라엘로 귀환하게 된다. (레 26: 41).
그 후 할례의 실상인 예수님께서 오셔서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 (요 3: 1-13)하면서 육체의 할례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이 물(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감을 알게 하였으나 니고데모는 알아듣지 못하였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귀머거리가 되어 실상인 복음은 붙잡지 않고 그림자요 육체의 법인 율법을 붙잡았다. 바울이 안디옥에 복음을 전파할 때 유대인들이 안디옥에 이르러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여 변론이 일어났고 예루살렘에서도 바리새파 중에 믿는 자들이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므로 베드로가 말하되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를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하였다. (행 15: 1-11).
고전 7: 19 하나님의 계명 -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
참 종교는 형식에 있지 않고 믿음과 순종에 있다.
* 갈 5: 6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1]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그래서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었고 예수님이 성령과 불(십자가의 고난)로 세례를 주었다.
* 마 3: 11 -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이 물은 눈에 보이는 물이 아니요 말씀이다.
* 고전 10: 4 -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또 "물(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벧전 3: 21) 하면서 물세례가 육체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뜻하는 물세례란 말씀으로 거듭나라는 뜻이지 눈에 보이는 물로 세례를 주라는 뜻이 아니다.
마치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행하라 하니 부싯돌로 된 칼(말씀)로 마음의 할례(수 5: 2)는 행치 아니하고 육체의 할례만 행하다가 망한 것처럼 교계가 말씀(물)으로 거듭나지 아니하고 그림자인 물만 몸에 뿌리고 있으니 이스라엘처럼 또 망하고 있다.
2]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하나님의 계명
계명은 권위 있는 자의 말씀 또는 명령으로 종교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을 의미한다.
히브리 원어의 '미츠와-', 헬라어의 '엔톨레-'가 대표적인 용어이다. 이 뜻은 ‘명령을 준다, 지정한다, 위임한다’라는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되었고, 특히 하나님의 명령이나 율법을 의미한다. 구약에서는 모세오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과 십계명을 일반적으로 가리키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요약된 두 가지 계명. 즉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의미한다.
* 마 22: 35-40 –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막 12: 28-34 –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 눅 10: 25-28 –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밖에 신약에서는 인간의 명함이나 교훈에 대해서는 '훈계, 권한' 등의 용어로 사용하였다.
* 행 20: 31 -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 롬 15: 14 -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 고전 4: 14 -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고전 7: 20 부르심대로 -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도가 가진 세상적 신분이나 어떤 육신적 조건이 중요하지 않다.
1]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1) '부르심'(*, 헤 에클레데)은
17절에서 사용된 '소명'이라는 주제와 다른 관점에서 사용되었다.
(2) 신약 성경에서
'클레시스'(*, '부르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실제로 부르신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롬 11: 29 -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 히 3: 1 -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3) 본 절에서는 이 세상에서 처해있는 처지까지도 포함한다. (Boice).
또한 앞 절들(17, 18절)과 비교해보면 앞 구절에서는 소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였으나 본 절에서는 부르심을 받은 '그때의' 상태에 역점을 두고 있다. (Barrett).
고전 7: 21 종으로 있을 때에 -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서 다 동등한 특권을 누린다.
* 골 3: 11 -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고린도 교인들의 신분이 대부분 낮은 사회적 지위에 있었다는 것은 바울의 다른 진술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 26-27).
그들의 사회적 신분은 교회 내에서 서로 시기하고 무시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실제로 이러한 신분의 차이로 말미암아 고린도 교회 내의 분쟁은 더 심화하였다.
그러나 결코 없었다.
2]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요 더 이상 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종이나 자유자의 신분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속했느냐 속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고전 7: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 -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
본 절에 사용된 그의 역설적 표현은 노예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되고 자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중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들 양자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종인 동시에 자유자라는 뜻이다.
1]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그 근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그것을'(*, 말론, 차라리)라는 부사가
단순한 반전이나 양자택일의 유익을 시사하는 뜻으로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현실적인 노예 신분을 버리고 자유인이 되라는 표현은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은 '자랑스럽게', 또는 '자신 있게' 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서 종의 직분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라는 의미이다.
(2) '이용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사이'(*)는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너 자신을 위해 사용하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노예 된 상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에게 유익이 되게 하라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근거들 때문에 주 안에서 자유자가 된다는 것은 현실 신분의 종 된 상태에서 벗어나라고 종용(慫慂)하는 것이 아니고, 비록 신분이 종이긴 하나 주 안에서 자유자이므로 자유자로서 살고, 궁극적으로 주님의 종 된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다.
|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도 알수 없는 내일이 있기에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꿈을 꾸고
희망을 가질수 있는것 같아요. 오늘 하루도 즐거운 행복한 하루 되세요.💖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