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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제 1 / 제사장의 속죄제
레 4:1-12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3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4 그 수송아지를 회막 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5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6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7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들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8 또 그 속죄제물이 된 수송아지의 모든 기름을 떼어낼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9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되
10 화목제 제물의 소에게서 떼어냄 같이 할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번제단 위에서 불사를 것이며
11 그 수송아지의 가죽과 그 모든 고기와 그것의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12 똥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서 사르되 곧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사를지니라
레 4:1-12 / [속죄제는 이렇게 드려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하여라. `누구든지 여호와께서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지키지 않고 어겼을 경우에는 이렇게 하여라. 3) 만일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부지중에 죄를 범해 그 벌이 백성에게까지 미치게 되었을 경우 그 제사장이 죄를 씻으려면 몸뚱어리에 아무런 흠이 없는 수소를 여호와께 끌고와 죄를 씻는 속죄제물로 바쳐야 한다. 4) 죄를 범한 제사장은 만남의 장막 문간 여호와 앞으로 그 소를 끌고 와 그 머리 위에 손을 얹은 다음 여호와께서 보고 계시는 앞에서 그 소를 잡아라. 5) 그러면 기름부음을 받은 다른 제사장이 그 피를 받아들고 만남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서 6) 손가락으로 찍어 여호와가 계시는 만남의 장막 안에 쳐놓은 휘장을 향하여 일곱 번 뿌려라. 7) 그리고 그 피를 여호와가 계시는 만남의 장막에서 향을 피워 올리는 분향제단에 붙어 있는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만남의 장막문 앞에 있는 번제단 밑바닥에 모조리 쏟아야 한다. 8) 또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은 죄를 씻어 달라는 뜻으로 바치는 소의 기름 덩어리는 모조리 떼어 내어야 한다. 곧 내장을 덮고 있는 기름 덩어리와 거기에 붙어 있는 기름 덩어리와 9) 허리에 붙어 있는 두 콩팥과 그것을 덮고 있는 기름 덩어리와 간을 감싸고 있는 꺼풀을 떼어 내야 한다. 10) 화목제물을 드릴 때와 똑같이 기름 덩어리를 떼어 내어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모조리 불살라야 한다. 11) 이것 외에 제물로 바친 소의 가죽과 고기 덩어리와 머리와 다리와 내장과 똥은 모두 다 12) 진영 밖 깨끗한 곳에 나무를 쌓아 놓고 불태워야 한다. 이렇게 제물로 바친 그 소의 나머지를 재 버리는 곳에서 모조리 불살라라.
하나님의 자녀는 부지중에 지은 죄라도 용서받아야 합니다. 속죄제는 죄사함을 받기 위한 제사입니다.
그릇 범하였으되(1-2) '그릇'(쉐가가)은 '실수로'라는 뜻이며 이 단어의 어근은 '헤메다, 길을 잃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고의로 길을 잃지는 않습니다. 고의가 아니어도 길을 잃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모르고 지은 죄라도 용서받아야 합니다. 모르고 지은 죄에 비해 고의로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이 훨씬 무겁습니다(민 15:30).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작은 죄라도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범하였으되'(하타)는 표적을 맞추지 못하다(miss)라는 뜻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표적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뜻에 미치지 못할 때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란 구절에서 우리가 온전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엿볼 수 있습니다(마 5:48; 살전 5:22).
수송아지(3-4) 제사장들을 위한 속죄의 제물은 수송아지입니다. 수송아지는 족장(숫염소; 23)이나 평민(암염소나 암양; 28, 32)을 위한 제물에 비해 비싼 제물입니다. 이는 족장이나 평민보다 제사장들의 책임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영향력이 큰 사람이 더 큰 심판을 받습니다(약 3:1). 제사장은 수송아지를 잡기 전에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였습니다. 안수하라는 명령이 본장에서 다섯 번 반복됩니다(4, 15, 24, 29, 33). 안수의 의미는 드리는 자의 죄의 고백, 대속의 계획에 대한 동의, 죄의 전가에 대한 믿음의 표현, 제물에 대한 의지의 표현입니다(시 119:11; 딤전 5:20).
속죄제물이 된 수송아지(5-12) 제사장은 잡은 희생제물의 피를 받아 회막 안 여러 곳에 뿌렸습니다. 먼저 제사장은 손가락에 피를 찍어 성소의 휘장 앞에서 일곱 번 뿌렸습니다. 일곱 번의 피 뿌림은 대속죄일의 의식(레 16:14, 15, 19), 나병 환자의 정결의식(14:7), 제단 봉헌 의식(8:11)에도 있었습니다. 또한 향단 뿔들에 피를 발랐습니다. 향단은 성도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죄는 성도의 기도생활을 방해하기에 모르고 지은 죄라도 해결되어야 합니다. 남은 피는 회막 문 밖 제단 밑에 쏟았습니다. 또한 제물의 기름은 모두 제단 위에서 태워 하나님께 드렸으며, 가죽과 모든 고기와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이 똥과 함께 진영 밖에서 불태워졌습니다. 죄로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참고 약 1:27)
적용: 백성의 중보자요 지도자인 제사장은 범죄하면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민감해야 합니다(신 4:29; 슥 1:3). 기도가 힘들고 막힐 때 나도 모르는 숨은 허물이 있는지 성령의 도움을 구해 보세요.
어느 마을에 언제나 불평하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늘 농부의 눈에는 아름다운 것이 없었고 귀에는 좋은 소식이 없었기에 마을에선 이미 소문난 투덜이였습니다. 비가 조금만 와도 홍수 걱정, 햇빛이 비쳐도 가뭄 걱정, 해충이 조금만 눈에 띄어도 온 곡식에 피해보는 것처럼 걱정했습니다. 어느 해에는 유례없는 풍작을 이뤘고 값까지 껑충 뛰어 마을 사람들이 기뻐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농부를 찾아가 물어봤습니다. "이보게, 올해는 괜찮지?" 그러나 농부는 투덜거리면서 "괜찮긴, 풍년으로 인해서 땅에는 몹시 해로울 거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불평에서 감사로 바꿔보세요.
< 설 교 >
속죄제
레위기 4장 1절 ~ 5장 13절 / 마경훈 목사
오늘은 5대 제사중에 속죄제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뚜렷한 구별이 없습니다. 속죄제는 하나님 앞에 범죄한 1-4계명까지의 문제를 다룬다면 속건제는 1-4계명뿐만 아니라 5-10계명까지의 모든 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속죄제를 다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제물에 관한 것입니다. 속죄제에는 다양한 제물이 나옵니다. 제사장이 범죄 했을 경우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를, 온 회중이 범죄했을 경우에도 수송아지를, 족장이 범죄했을 경우에는 흠 없는 수염소로, 평민이 범죄했을 경우는 흠 없는 암염소나 암양으로 드렸습니다. 그 사람의 힘이 어린양이 미치지 못할 경우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드렸고, 힘이 비둘기에도 미치지 못할 경우에는 고운 가루를 약 2.2L 드리도록 했습니다.
속죄제에 사용된 제물은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면 짐승을 잡아 속죄제를 드림으로 죄사함을 받았던 것처럼 인류의 모든 죄가 완전한 제물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을을 통하여 사함 받는 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부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사람들은 죄를 사함 받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찾지만 하나님께서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것을 보상하기 위하여 성전에서 봉사를 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많은 헌금을 드려도 해결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죄 사함을 위하여 주님이 제시하신 길은 오직 한 길입니다.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리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오직 한 길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인간의 죄를 사하는 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도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 사실에 대하여 강조합니다. 야곱의 꿈에서는 하늘로 연결된 사닥다리가 보였습니다. 주님께서 나다나엘에게 천사가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을 통해서 그 꿈을 풀이해 주셨습니다. 모세 시대에 광야에 들린 놋뱀을 통해서도 자신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심을 말씀하셨고, 요14:6에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밝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성령에 충만한 베드로는 행4:12에서 예수님만이 오직 유일한 구원의 길이요, 죄사함의 방법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오늘 설교는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죄의 결과와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속죄의 제물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금령을 범한 사람에게 속죄가 필요합니다.
2, 13, 22, 27절에서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금령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모든 의무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배우려면 먼저 용어를 이해하십시오. 그러면 쉽게 배울 수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 생소한 용어 때문에 진도가 잘 안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은혜 받기가 어렵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이 어렵습니다. 그 중에 '죄'라는 용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죄는 무엇을 했느냐 안 했느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났느냐 아니냐를 봐야 합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죄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이해가 납득이 안가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면 죄가 아닌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의롭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정말 법이 없어도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그렇게 살았다면 그는 이미 죄인인 것입니다.
체육대회에서 마지막 경기는 주로 마라톤이나 계주를 합니다. 계주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운동장에 백색가루를 뿌려서 큰 원을 그립니다. 계주 선수들이 원 밖에 대기를 하다가 출발신호가 나면 달리게 됩니다. 계주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그려진 원 안으로 뛰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원 밖으로 뛰어야 합니다. 아무리 빨리 잘 달렸어도 원 안으로 들어가면 그 사람은 실격입니다. 죄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을 넘어가는 것, 그가 하는 일이 아무리 올바르고 좋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섰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2. 모든 사람에게 속제가 필요합니다.
본문에서는 속죄제를 드려야할 대상을 여러 종류의 사람들로 말하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모든 회중 그리고 족장과 평민의 하나까지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가 필요한 사람들은 인류 전체 즉 모든 인간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범죄 하여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입니다. 심지어 목사까지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롬3:23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모든 사람에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어 속죄가 필요한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인류의 대표요 조상인 아담이 범죄 하여 죄의 피가 우리 모두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우리 스스로가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양심에 비춰봐도 죄인이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비춰봐도 죄인입니다. 자신은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빛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께서 빛으로 그 사람 속을 비춰주시면 그는 자신의 엄청난 죄를 발견하고 통회자복하게 될 것입니다.
3. 연약함이나 무지함 그리고 실수로 죄를 지은 사람에게도 속죄가 필요합니다.
2절에 '그릇'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는 22절과 27절에 나오는 '부지중에'라는 말과 같은 '비쉬가가'라는 말입니다. '그릇 범죄'라는 뜻은 알지 못하고 지은 죄, 연약하여 지은 죄, 서두르다 실수하여 지은 죄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릇이라는 말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죄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죄인지 아닌지 몰라서 죄를 범한 경우도 죄라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도 속죄가 필요한 것입니다. 몰랐기 때문에 죄가 아니라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정말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힘써 봤는데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도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연약하여 죄를 범했어도 속죄가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죄를 범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까 실수하여 죄를 범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변명해봅니다. "정말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런 경우의 사람에게도 속죄가 필요합니다.
4. 제물에게 안수하여 죄를 전가 시켜서 속죄함을 받았습니다(4절).
제주는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며 자신의 죄를 고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제주의 모든 죄가 제물에게 전가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내 몸에 전기가 있는데 내가 다른 사람을 만지면 내 몸에 흐르는 전기가 그 사람 몸으로 흐르게 되듯이 안수를 통하여 제주의 죄가 제물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 시키셨습니다. 갈2:20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분과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님에게 전가되었으며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의 죄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물에게 안수하여 죄가 없어진다고 확신하는 것은 믿음으로 가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나의 죄가 사함 받는 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믿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믿는 자는 속죄의 은총을 입고 믿는 자는 천국을 볼 수 있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5. 속죄함을 받아야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됩니다.
7절에 보면 제사장은 속죄제물의 피를 향단 뿔에 바릅니다. 이것은 속죄의 피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는 성막입니다. 그 성막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막의 뜰과 성소와 지성소입니다. 성소 안에는 세 가지 기구가 있었습니다. 떡을 놓는 떡상이 있었습니다. 그 떡은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의 영혼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성소 안을 밝히는 등잔이 있습니다. 그 등잔은 세상의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신앙생활에 빛을 비춰주시는 성령님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향단이 있는데 그 향단에서는 24시간 향을 피웠습니다. 그 향은 중보자 에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와 성도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를 보여줍니다.
성도의 기도를 상징하는 향단의 뿔에 속죄의 피를 발랐다는 말은 속죄의 은총을 입어야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다는 해석이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는 자신의 깨끗한 마음이나 깨끗한 행동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속죄 제물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그분의 참회의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할 때도 우리의 기도의 제목으로 간구 하기 전에 먼저 죄 사함을 구하는 자백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배나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입니다. 제사장이 성소의 뿔이 제물의 피를 바르고 하나님과 교제가 회복되게 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과 교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6. 죄는 크기와 상관없이 속죄가 필요합니다.
8-12절에 보면 제물의 기름과 내장 그리고 콩팥과 간 등을 번제단 위에 불사릅니다. 그리고 가죽과 모든 고기 그리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뿐만 아니라 심지어 똥 등 속죄제물의 모든 것을 진 밖에서 불로 사릅니다. 제물의 중요한 부분이든지 하찮은 부분이든지, 큰 것이든지 작은 것이든지 모두 불살라서 태워 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죄는 너무나 작은 죄이니까 그냥 놔둬도 될 꺼야". 아닙니다. 안됩니다. 큰 죄든지 작은 죄든지 하나님 앞에서는 반드시 처리 받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죄의 크기를 따집니다. 살인죄와 욕을 한 죄가 같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죄라고 다 같은 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죄의 크기와 상관없이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광대하신 분인데 이런 작은 죄 하나 때문에 지옥에 가게 하시지는 않을 거야"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서려면 죄의 경중과 상관없이 반드시 처리해야 합니다.
7. 죄를 깨닫는 대로 속죄함을 받아야 합니다.
13, 14절을 보면 죄가 죄인 줄 모르다가 그것이 죄인 줄 깨닫게 되면 속죄제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죄인 줄 모르고 범죄할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죄를 모르는 경우에는 할 수 없지만 어느 날 깨달음을 통하여 그것이 죄인지 알아지기도 합니다. 그 대 그 죄를 덮어놓고 지나쳐서는 안됩니다. 가능하면 즉시로 그 죄를 회개하십시오. 왜냐하면 죄는 우리의 생활에 악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독을 품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인삼을 즐겨 드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몸에 풍이 와서 입이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몸에 좋은 줄 알고 먹던 인삼이 아버님 체질에는 맞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즉시로 인삼을 끊어야 합니다. 죄는 인간에게 큰 해를 기치는 독입니다. 깨닫는 대로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8. 죄는 죄를 범한 사람의 지위에 따라서 책임이 다릅니다.
속죄제는 죄를 범한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제물이 다릅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비싼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죄인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서 책임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속제죄의 규례
레위기 4:1-12, 6:24-30 / 피영민 목사
서 론
레위기의 5대 제사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이 다섯 가지 제사가 주는 공통적인 교훈 한 가지는 “죄인이 희생제사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입니다. 죄인이 희생제사 없이 자기 힘이나 방법으로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희생제물이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죄인들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한 가지 진리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3장까지는 번제, 소제, 화목제에 대해 기록되어 있고, 4~5장까지는 속죄제, 속건제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3장까지와 4~5장까지 사이에는 분위기 상 두 가지 변화가 존재합니다. 전자의 세 종류 제사(번제, 소제, 화목제)가 시내산 율법 이전에도 존재했던 제사지만, 후자의 속죄제와 속건제는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을 받은 이후에 생겨난 제사라는 점입니다. 즉, 속죄제와 속건제는 여호와의 법령이 주어지기 전에는 없었던 제사였습니다.
성경에 처음으로 ‘속죄제’가 언급되는 구절이 출애굽기 29장 14절입니다. “그 수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은 진 밖에서 불사르라 이는 속죄제니라.” 이는 제사장의 위임식과 관련해서 부지중에 지은 죄를 속죄하는 제사로 언급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후자의 제사들은 출애굽기 20장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이후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는 전자의 제사들은 제사 후에 나타난 결과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었지만, 후자의 제사들은 죄책이 제거되었다는 점입니다. 전자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제거되었다는 것에 강조점이 있는 반면, 후자는 죄로 말미암은 오염이 제거되었다는 데 강조점이 있습니다.
죄는 우리 개인과 가정뿐만 아니라, 사회와 교회도 오염시킵니다. 죄는 오염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속죄제와 속건제가 그 오염을 제거하는 제사입니다. 그리고 번제와 소제, 화목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제거되어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다는 데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 ‘속죄제’를 ‘정화제사’(Purification offering)라고도 했습니다.
속죄제의 규례에 관해서는 레위기 4,5,6장에 기록되어 있고, 민수기 15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반복해서 자세하고 복잡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만큼 사람의 죄를 심각하게 여기신다는 것과 우리 역시 스스로의 죄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제를 ‘Sin offering’이라고 하고, 히브리어로 ‘죄’를 뜻하는 ‘하타’(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Ⅰ. 속죄제의 목적
레위기 4장 2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라고 기록되어 있고, 13절에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22절에 “만일 족장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라고 기록되어 있고, 27절에 “만일 평민의 하나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속죄제의 목적은 금령을 부지중에 범한 경우 그 허물을 제거하기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금령’은 하나님이 주신 명령입니다. 율법, 율례, 규례와 같은 하나님의 법 중에 금지 형태로 된 명령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하지 말라고 하는 명령 속에는 해야 한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명령의 의미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 중에는 “네 부모를 학대하지 말라”는 금령이 내포되어 있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면 “이웃을 미워하지 말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금령을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명령으로 볼 수 있지만, 여호와께서 주신 모든 명령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알지 못하고 어기는 것도 죄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죄는 크게 세 가지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반항적으로, ‘짐짓’ 범하는 죄입니다. 민수기 15장 30~31절에 “본토 소생이든지 타국인이든지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 명령을 파괴하였은즉 그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쳐지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짐짓’이라는 것은 ‘반항적으로’(Defiantly)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분명히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반항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범죄하는 것입니다. 흠정역에서는 이를 ‘건방진 죄’(Presumptuous Sin)라고 번역했고, 어떤 학자는 이를 ‘고압적인 죄’(High-handed Sin)라고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반항하는 고자세로 죄를 짓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죄를 범하는 경우 죄를 씻는 제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즉각적인 징벌이 찾아옵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이방신들에게 바친 물건들을 취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아간이라는 자가 그것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성 전투에서 크게 패하게 됩니다. 패전 원인을 알아보니 아간이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물건을 취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아간은 즉시로 아골 골짜기로 끌려가서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또 고라, 다단, 아비람의 죄도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을 지도자로 삼으셨음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반항하기 위해 범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과 온 가족들은 땅이 갈라져 산 채로 몰살당하게 되었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이었던 나답과 아비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분향단에 향을 피울 때 다른 불로 피워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다른 불로 분향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불타 죽었습니다. 이는 반항적인 죄에 해당하는 것이기에 가차 없는 하나님의 심판이 따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을 팔아 헌금한 것까지는 정말 잘 한 일이었지만, 절반만 헌금한 것을 전부 헌금했다고 계속 거짓말하자, 부부가 순서대로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모든 죄는 반항적인 죄에 속합니다.
둘째는 하나님께 반항하려는 의도가 없이 범죄한 경우입니다. 죄를 짓는 것은 의도적이었지만, 반항하려는 태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고의적인 죄’(Intentional Sin)라고 합니다. 이런 죄는 번제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그릇 범죄한 경우입니다. ‘짐짓’과 ‘그릇’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짐짓’은 ‘반항적’이라는 의미이고, ‘그릇’은 죄를 지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는 ‘비고의적’ 내지 ‘우발적’인 경우를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그릇 범죄하는 경우는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 범죄한 경우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는데, 그 순간 잊어버려서 범죄하는 경우입니다. ‘무지’(Ignorance)와 ‘망각’(Oblivion)에서 오는 죄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죄를 ‘그릇 범한 죄’라고도 하고 ‘부지중에 범한 죄’라고도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속죄제를 드려서 죄책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속죄제의 목적은 부지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범한 죄를 사함받기 위한 것입니다. 잘 알지 못해서 범한 죄에 대한 용서를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지로 인한 죄라 할지라도 죄로 인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분명한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숨은 허물이 있는지 깨닫게 해 주시도록 자주 간구하였습니다. 시편 19편 12절에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들도 다윗과 같은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내가 알고 지은 죄가 없다고 해서 의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큰 착각 속에 빠져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지은 죄들이 훨씬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1장 8절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속죄제는 근본적으로 부지중에 여호와의 금령을 어긴 죄에 대해 속죄받기 위한 제사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5장 1~13절에 보면 특별히 속죄제가 요구되는 추가적인 세 경우(Additional Cases)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재판의 증인이 되었는데 본 일이나 아는 일을 진술하지 않은 경우입니다. 거짓말 한 것은 아니지만 아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죄입니다. 이런 경우 속죄제가 필요합니다.
둘째, 병든 짐승이나 사체와 접촉해서 오염된 경우 속죄제가 필요합니다. 병든 짐승과의 접촉으로 전염병에 걸렸으면 이 사실을 신고하고 격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죄제를 드려 오염을 제거해야 합니다.
셋째, 입으로 맹세하고 서원했음에도 그 서원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것을 지키지도 않았을 경우입니다. 거짓 맹세한 것에 대한 허물을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짓 증인, 오염, 거짓 맹세와 같은 경우는 특별히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추가적인 경우입니다. 기본적으로 속죄제는 여호와의 금령을 부지중에 몰라서 범한 죄의 경우, 죄를 속하고 그 죄로부터 오는 오염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Ⅱ. 속죄제의 종류와 절차
다른 제사의 경우 제물의 종류에 따라서 구별되는 반면, 속죄제는 독특한 방법에 의해 종류와 절차가 구별됩니다. 우선 제사를 드리는 당사자에 의해 구별됩니다. 제사장, 이스라엘 온 회중, 족장, 평민이 범한 죄를 위한 제사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범죄나 족장의 범죄가 일반 회중이나 평민의 범죄보다 값비싼 예물과 복잡한 절차를 필요로 합니다. 이들은 아무리 모르고 범죄했다 하더라도 일반 평민들의 죄보다 그 영향력이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모르고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죄는 죄입니다.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첫 번째, 레위기 4장 3~12절에 보면 제사장이 부지중에 여호와의 금령을 범한 경우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이 죄를 범하면, 율법을 알지 못해서 범했다 할지라도 백성들이 죄책을 입게 됩니다. 백성들이 피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속죄제 절차가 대단히 복잡합니다.
첫째로 제사장이 흠 없는 수송아지에 안수하고 여호와 앞에서 잡습니다. 둘째로 제사장은 성막 내 세 곳에 그 피를 뿌리거나 바르거나 부어야 합니다. 먼저 성소에 들어가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는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립니다. 그리고 휘장 앞에 있는 분향단 뿔에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 바릅니다. 나머지 모든 피는 성막 뜰로 가지고 나와서 번제단 밑에 다 쏟아버립니다. 셋째로 내장 기름을 다 태우고, 마지막으로 태우고 남은 가죽과 고기와 뼈, 배설물 같은 것은 제사장이 진 바깥으로 가지고 나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진을 칠 때 한 가운데 성막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동서남북으로 세 지파씩 흩어져 진을 쳤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이 나머지 것들을 가지고 진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무려 7km나 걸어 나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진 밖 재 버리는 곳에 남은 것들을 모두 불로 태우는 것입니다. 진 밖에서 전체를 화제로 드리는 것은 영문 밖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제사장이 모르고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속죄제는 크게 네 가지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야 오염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레위기 4장 13~21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부지중에 금령을 범했다가 나중에 깨닫게 된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절차가 첫 번째 경우와 똑같은데, 제물에 안수하는 사람만 다릅니다. 제사장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레위기 4장 22~26절에 보면 이스라엘 족장이 부지중에 금령을 범했다가 나중에 깨닫게 된 경우입니다. 여기도 역시 네 가지 절차가 필요한데, 이번에는 제물이 다릅니다. 흠 없는 숫염소를 사용합니다. 피를 뿌리거나 바르는 절차와 내장 기름을 태우는 절차는 다 같은데, 남은 고기를 제사장이 먹을 수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레위기 6장 24~30절에 보면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서 먹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네 번째, 레위기 4장 27~35절에 보면 이스라엘 평민이 부지중에 금령을 범하였다가 나중에 깨닫게 된 경우입니다. 이때는 제물로 암염소나 어린 양을 사용합니다. 평민이 제물을 안수해서 잡아야 합니다. 평민은 수소에 비하면 대단히 저렴한 동물로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제물의 피를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는 쏟아버립니다. 그런 후 나머지 고기는 거룩한 곳에서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요약하면 중요한 자리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설령 모르고 지은 죄라 할지라도 예물을 값비싼 것으로 드려야 하고 절차도 복잡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속죄제는 이런 사람들이 모르고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범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그것이 죄인 줄 알지 못했다고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물도 중하고 절차도 복잡합니다. 또 개인의 죄보다 공동체의 죄가 제물의 가치도 중하고 절차도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Ⅲ. 속죄제의 영적의미
레위기의 5대 제사는 1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2차적으로는 성도들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먼저, 속죄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알고 지은 죄 뿐만 아니라 모르고 지은 죄까지 모두 속죄하셨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에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혹되어 죄를 짓게 됩니다. 또한 무식해서, 잘 알지 못해서 범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은 부지중에 지은 죄까지 모두 용서받을 수 있도록 제사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혹당해서 지은 죄는 번제를 드려 용서를 받고, 무식해서 지은 죄는 속죄제를 드려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미혹과 무식을 능히 용납하시고 친히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모두 다 속죄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제물을 잡을 때 반드시 북편에서 잡아야 했습니다. 이곳을 ‘번제소’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죽으신 골고다 언덕이 예루살렘 북편에 있다는 사실을 예표합니다.
그리고 제물은 반드시 피를 흘리는 방식으로 잡아야 합니다. 목매달아 죽여서는 안 됩니다. 목매달아 죽이면 피를 흘리지 않고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피를 흘려 뿌리거나 바를 수 있도록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제물은 성막 뜰 북편 번제소에서 피를 흘리는 방식으로 죽어야 하고, 나머지 고기나 뼈와 같은 것은 진 밖, 영문 밖에서 불태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영문 밖에서 죽으실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전체를 태운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우리의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를 모두 포함한 완전한 속죄라는 것을 예표합니다.
속죄제는 예수님에 관해 적용될 수 있고, 성도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알고 있는 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많은 죄가 있음을 알고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불신자들은 교회를 향해 욕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훨씬 더 많은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그들이 죄 사함을 받고 의인으로 칭함 받은 우리를 향해 욕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인생 일거수일투족을 영상으로 찍어서 상영한다면 아마 그 자리에 1분도 앉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와 성도를 향해 욕을 합니까?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욕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모두 위선자요, 목사는 가장 나쁜 사람이라고 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그들의 인생을 일일이 살펴본다면 훨씬 더 악할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모르고 짓는 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어려움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3장 13절에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다 때로는 욕을 먹고 오해도 받고 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하면 순교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이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왜 네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야 하느냐? 내가 왜 너를 위해 영문 밖에서 물과 피를 다 쏟는 고난을 받아야 하느냐? 나는 너를 위해 영문 밖에서 모든 것을 다 주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하느냐?”고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마땅한 일로 생각하고 감당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결 론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우리는 몰라서 죄를 지었다는 핑계를 대지 말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공부하고 배워서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죄는 언제나 오염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오염되지 않는 정결한 삶으로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소서
레 4:1-4 / 김경진 목사
< 레위기 제사법을 토대로 예배자로서의 내 모습을 점검해 봅니다. >
오늘 본문인 레위기는 ‘제사’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레위기 앞부분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다섯 가지의 제사가 설명돼 있습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그리고 화목제, 이 다섯 가지 제사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본문인 레위기 4장은 ‘속죄제’에 관한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제사를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가? 예수님이 이미 구약의 제사를 완성하셨는데,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굳이 이런 제사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레위기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귀한 말씀이자 하나님의 음성이 담긴 책입니다. 특별히 제사를 다루고 있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어떤 제사 곧 예배를 받기 원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큰 가치요, 자산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어떤 자세와 마음으로 예배드려야 하는지, 레위기 말씀을 통해 자세히 배우고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온라인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당에서 드리던 예배를 잠시 멈추고, 감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각 처소에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장소가 바뀐 것입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상황 속에서 많은 분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온라인예배가 맞는가? 온라인예배의 장점이 무엇인가? 단점은 무엇인가? 어떤 문제가 있는가?” 물론 가능하고 중요한 질문들입니다. 하지만 온라인예배를 드리면서 매체 자체에 대한 고민보다 더 깊이 생각해야 할 사항들이 있습니다. ‘온라인예배를 드리는 현장에서 우리가 과연 진정한 예배자로 서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가장 먼저 던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중대한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오늘 본문은 속죄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속죄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죄를 지어 하나님과 관계가 깨졌을 때, 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는 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속죄제와 관련된 내용은 레위기 4장을 넘어 5장 앞부분까지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의 상황에 적용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나와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자세를 원하시는가? 즉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가?’라고 말입니다.
< 속죄제는 죄로 인해 멀어진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회복하는 제사입니다. >
우리 소망교회 예배의 특징이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특징은 ‘참회의 기도’가 있다는 점입니다. ‘참회의 기도’는 장로교 예배에서도 매우 중요하고, 장로교 예배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소망교회는 아주 오래전부터 참회의 기도를 드려온 것으로 유명합니다. 여러분 모두 예배당에서 참회의 기도를 드리실 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익히 아실 것입니다. 아주 감격적이고 놀라운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장로회신학대학교에 재직할 때도 채플 시간에 참회의 기도를 여러 번 시도하기도 하고 훈련한 적도 있는데, 우리 교회에서처럼 제대로 경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만큼 소망교회의 ‘참회의 기도’는 참 은혜롭고 경건한 참회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참회의 기도를 계속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맨날 똑같은 기도인데요…. 참회할 게 뭐 그리 많다고 매번 그렇게 기도를 해야 합니까?” 어떤 분들은 참회의 기도 시간에 죄를 다 고백해서 용서받았으니 다시 밖으로 나가 죄를 지어도 된다고 오해하기도 하는데, 결코 그런 용도로 참회의 기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매 주일 주님 앞에서 나와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가 늘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우리는, ‘앞으로 매 주일 참회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 참회의 기도를 드려야 하는’에 대한 중요한 관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레위기 4장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체적인 구조를 살펴보며 본문을 보겠습니다. 이 레위기 4장을 구조적으로 분석해 보면, 대략 다섯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은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후 네 단락은 하나씩 가지를 치면서 네 가지 형태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중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은 레위기 4장 1~2절의 말씀입니다. 제가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어떤 사람이 실수로 잘못을 저질러, 나 주가 하지 말라고 명한 것을 하나라도 어겼으면, 다음과 같이 하여야 한다. (레위기 4:1~2, 새번역)
이 두 절이 속죄제를 드리는 이유, 그리고 그 근원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먼저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라는 구절로 본문이 시작됩니다. 즉 속죄제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제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속죄제의 효과 내지는 이유를 전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실수로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명한 것을 하나라도 어긴 경우,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즉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하나라도 어겼을 경우,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을 때, 그 관계를 회복하는 제사가 속죄제라는 것입니다.
< 속죄제는 크게 네 차원으로 나뉘어 설명됩니다. >
그렇다면 어떻게 제사를 드려야 하는가, 제사에서 주안점은 무엇인가를 성경은 네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이 내용을 보다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3절이 첫 번째 단락 앞부분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레위기 4:3 중)
제사장이 범죄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단락은 13절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레위기 4:13 중)
이스라엘 온 회중이 잘못했을 때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앞에 있는 내용은 제사장이 무엇인가를 잘못했을 때, 두 번째는 이스라엘 온 회중이 잘못했을 때를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잘못했을 때는 어떤 경우를 가리킬까요? 예를 들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던 사건과 같은 경우를 말합니다. 온 회중이 잘못 결정하여 다른 길로 갔을 때를 상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단락은 22절부터 시작됩니다.
만일 족장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레위기 4:22 중)
여기서는 족장이 잘못했을 때를 상정합니다. 네 번째 단락은 27절부터 시작됩니다.
만일 평민의 한 사람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레위기 4:27 중)
속죄제를 드리는 네 가지 범주가 있는데, 첫 번째는 제사장이 잘못했을 때, 두 번째는 온 회중이 잘못했을 때, 세 번째는 족장이나 지도자가 잘못했을 때, 네 번째는 평민 중 한 사람이 잘못했을 때입니다. 이렇게 넷으로 나누어 속죄제를 드리는 방법을 예시로 보여줍니다. 이 네 경우에 어떤 제물을 드려야 하는지, 성경은 조금씩 다른 제물에 대한 이야기도 전합니다. 제사장이 잘못했을 때, 그리고 온 회중이 잘못했을 때는 수송아지를 제물로 드리라고 명합니다. 족장이 잘못했을 때는 숫염소를 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평민 한 사람이 잘못했을 때는 암염소를 드리라고 합니다. 구체적인 제사 방법도 네 범주에 따라 설명이 이어집니다. 제물을 잡고, 피를 받고, 그 피를 휘장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에 바르고, 번제단 밑에 모든 피를 뿌리고, 모든 기름을 떼어내 고기를 번제단에서 사르고, 나머지 고기는 진영 밖으로 가지고 나가 재 버리는 곳, 정결한 곳에서 태우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 하나님은 ‘누가’ 죄를 지었는가에 관심을 두십니다. >
이 네 단락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유사한 방식으로 제사 드릴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하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피를 뿌리는 모든 제사 방법은 결국 나중에 올 온전한 제사,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예표합니다. 예루살렘 성에서 피를 흘리시고, 마을 밖으로 나오셔서 마지막 숨을 거두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예표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그 내용을 다루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외에 나오는 매우 중요한 한두 가지 내용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내용은 ‘왜 이렇게 네 단락으로 나누어졌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제사장, 온 회중, 족장, 평민으로 이어지는 이 단락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한 질문입니다. 즉 제사장에서 시작되어 평민으로 이어지는 순서는 어떤 의미일까요? 아마 죄를 지은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죄의 무게가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제사장의 죄가 제일 큰 죄로 명명되고 있고, 회중 전체가 잘못 결정하는 죄를 두 번째 무게로 다루고 있으며, 족장들의 죄를 세 번째 무게로 다루고 있고, 이어 평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죄를 작은 무게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장’의 죄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큰 죄라는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살펴봐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관련해 속죄제를 드리라고 명하셨을 때, 죄의 내용을 따지기보다는 ‘누가’ 죄를 지었는가에 관심을 두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군가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죗값을 치르게 합니까? 법조계에 계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판결에 있어 근간이 되는 내용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요즘에는 여러 정황도 함께 고려해 판결하는 것 같지만, 무엇보다 ‘어떤 죄’를 지었는가에 방점을 둘 것입니다. 죄목이 무엇인지에 따라 형벌의 정도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상에서 흔히 경험하는 죄와 형벌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관점은 세상의 방식과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하게 한마디로 정리하십니다.
나 주가 하지 말라고 명한 것을 하나라도 어겼으면 (레위기 4:2 중, 새번역)
이것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죄목을 따져 가며 죗값을 치르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명령 가운데 하나라도 어기면 죄가 되니 속제죄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거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는 그 내용을 하나도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그중 어떤 하나라도 잘못하면 죄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일만 달란트를 훔쳤든지, 한 데나리온을 훔쳤든지, 하나님께서는 그 내용도 거론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하나라도 어겼으면’이라고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다른 데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죄의 내용보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는가에 관심을 두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오늘 본문인 레위기 4장에서 하나님은 ‘제사장의 죄야말로 가장 큰 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전해 주고 계십니다.
< 하나님의 제사장인 그리스도인의 죄를 하나님께서 가장 엄중히 여기십니다. >
그렇다면 제사장의 죄가 가장 큰 죄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말씀이 되겠습니까? 제사장과 오늘 우리는 어떤 관계 혹은 관련성이 있습니까? 베드로전서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베드로전서 2:5)
우리에게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너희는 거룩한 제사장이라.”라고 선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9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베드로전서 2:9 중)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 너희들은 제사장이다.”라고 칭해 주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로 다가옵니다. 먼저 우리를 제사장으로 불러 주신 은혜가 큰 영광이요,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이 부족한 사람을 제사장으로 삼아주시는구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 되셨는데, 이제 주님을 따르는 내게도 제사장의 직분을 맡기시는구나.’라는 생각에 감격스럽습니다. 그러나 한편 레위기 4장의 말씀을 대입해 보면, 이 선언은 우리에게 부담스러운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제사장의 죄가 가장 큰 죄로 여겨졌듯이, 우리가 짓는 죄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죄가 되는 까닭입니다.
성경의 원리 곧 하나님의 방법은 세상의 방식과 전혀 다릅니다. 바로 이 놀라운 원리를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묻기 전에 ‘누가’ 잘못했는가를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엄청난 비밀을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인이 잘못하거나 목회자가 잘못하면 크게 비난을 하곤 합니다. 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기독교인이 잘못했다고 하면, 교회가 실수했다고 하면, 더 엄격한 잣대로 심판의 목소리를 내곤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심판의 잣대를 심어 놓으신 것이 아닐까?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의 방식과는 다르게 사는 모습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서 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참 신자의 모습이라고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 주님의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
요즘 우리 성도님들께서 저를 만날 때 이런 이야기를 종종 하십니다. “교회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럴까요? 왜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만 합니까?” 아마 제 마음이 많이 상했다고 생각되어 위로하시는 마음도 있으실 것이고, 억울한 마음이 들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욕을 먹어야 하는가? 세상 사람들은 더 큰 잘못을 하면서 왜 교회만을 향해 비난을 쏟아내는가?’ 하는 억울한 심정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식당에 가보십시오. 삼삼오오 모여서 얼마든지 마음껏 식사하는데, 교회에서만 식사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렇게 고자질하듯 말씀하시는 분도 계시고, “한강 둔치에 가보십시오. 거리 두기 절대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다들 모여 앉아 마음껏 놀고 있습니다. 거리 두기 하는 곳은 교회와 학교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가 잘못하면, 예를 들어 성 윤리를 위반하거나, 재정적인 문제가 생기거나, 잘못된 관례가 드러나면, 세상 사람들은 아주 강하게 교회를 비난합니다. 아마 통계로 따진다면 교회 구성원의 잘못보다 세상 사람들의 잘못이 훨씬 위중하고 빈도도 높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독교인이 잘못하면 세상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며 분개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며 오늘 본문인 레위기 4장의 말씀을 대입해 봅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어떠실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곧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불리는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크게 책망하실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같은 죄를 지어도 ‘제사장’으로 불리는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이 하나님께 가장 크고 엄중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중)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사장으로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선택된 민족으로 부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고 우리를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고 잘못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죄목보다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두십니다. “누가 죄를 지었느냐? 내 자녀들이 잘못했느냐? 나의 제사장들이 죄를 범했느냐?”라고 물으시며 책임을 물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지었다면 더욱 엎드려 “하나님,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우리가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옵소서.”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 여러분, 코로나19 감염병 상황 속에서 교회가 마치 박해가 받는 것 같고, 견디기 힘든 비난을 받는 것 같아서 힘들지만,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하나님의 앞으로 조율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할 수 있는 이야기는 “하나님, 우리가 죄인입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소서.”라는 것을 말입니다. 겸손한 자세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중)
속죄제의 의미
레 4:1-12 / 박봉수 목사
구약성경 레위기에는 제사제도가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레위기의 제사제도와 다른 모든 종교의 제사제도와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제사제도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인데 비해서 구약의 제사제도는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셔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제사제도를 이렇게 자세하게 만들어주셨을까요? 이 점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를 이해하는 열쇠라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초대교회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기독교가 드려온 예배를 이해하는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 2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특별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 20장 이하의 십계명을 중심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 24:7을 보면 하나님의 이 제의에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을 때 특별한 의식을 치르도록 명하셨습니다. 출 24:6-8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한 마디로 피로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제물을 잡고 그 피를 받으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둘로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그 피의 반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제단에 뿌리고, 나머지 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뿌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언약의 피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바른 셈입니다.
이렇게 피로 언약 의식을 체결한 것은 이런 뜻입니다. “이 피는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다. 만일 언약의 한 쪽 당사자가 언약을 파기하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을 체결한 뒤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언약을 철저하게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언약 뒤에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제도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먼저 성막을 짓게 하셨고, 제사장을 세우게 하셨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왜 언약을 체결하시자마자 바로 제사제도를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에 이 제사제도의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무 잘 아셨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체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고 약속하고 다짐했지만,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미리 어길 것을 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언약을 깨뜨릴 것을 아셨습니다. 결국 저들이 언약을 파기한 대가로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미리 피할 길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언약이 파기된 것을 회복할 길을 마련해 놓으신 것입니다. 바로 제사제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서 제물들이 피 흘리게 하셔서 언약 파기의 대가를 치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제도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의 회복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을 때 이것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은혜의 자리인 것입니다. 결국 제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우신 무거운 의무가 아니라 더 할 수 없는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구체적인 통로입니다. 하나님과의 구체적인 만남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회복할 수 있는 축복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예배드릴 수 있음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정말 예배드릴 수 있음이 은혜요 축복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예배를 소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제사제도 중에 특별히 속죄제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속죄제사는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사함 받고, 그 죄 때문에 생긴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를 회복하는 제사를 말합니다.
그러면 이 속죄제사의 의미를 보다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제정해 주셨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다른 제사도 다 그렇지만 속죄제 역시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래서 죄 사함을 받고 다시 이 언약을 회복할 길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범죄하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히브리어 원어로 하타아(af;j;)라는 동사를 썼습니다. 이 말의 본래 뜻은 “과녁을 빗나갔다”는 것입니다. 궁사가 활을 당겨서 과녁을 향해 쏘았습니다. 그러나 과녁에 맞추지 못하고 빗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범죄하여”라는 말은 나름대로 한다고 하다가 실수한 것을 말합니다. 자기 딴에는 한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본문 2절을 보면 “그릇 범하였으되”라고 했고, 13절을 보면 “그릇 범하여”라고 했고, 22절을 보면 “부지중에 범하여”라고 했고, 그리고 27절을 보면 “부지중에 범하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영어 성경 KJV에서는 이렇게 같은 말로 번역했습니다. “sins through ignorance”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는 중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을 영어 성경 NIV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sins unintentionally...” 그러니까 무심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속죄제는 우리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심코 죄를 범했을 때 사함을 받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잘 믿으려는 마음은 있지만 실수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죄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채 죄를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조심하지 않다가 부주의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게을러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고는 싶었는데 능력이 부족해서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성경이 말씀하는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속죄제는 이런 연약함 때문에 범한 죄를 사함받는 제사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마 26장을 보면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별히 38절을 보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에게 기도하실 동안 깨어서 기다리라 부탁하셨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동안 나를 위해서 기도하라” 기도부탁을 하실 만 한데 깨어 있으라고만 하셨습니다.
기도하고 와 보시니 저들이 깨어있지 못하고 자고 있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실 때 제자들이 시험에 빠져서 기도할 때 기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그래서 다음번에 와 보실 때 저들이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또 자는 모습을 보시고는 가만히 내버려두시고 혼자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연약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제자들 뿐 아니라 우리들도 연약합니다.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할 힘이 부족합니다. 시험과 싸워 이겨야 할 때 싸우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해야 한다는 것 알면서도 하지 못합니다.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이런 연약함을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롬 8:2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께서도 우리의 이런 연약함을 아시고 돕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연약함 때문에 탄식하면서 기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바로 속죄제의 우선적인 의미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연약해서 때로 쓰러지고 넘어져 죄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속죄제라는 특별한 제도를 만드셔서 사함받게 하시고 용서하기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어서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속죄제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이런 찬양을 부르게 됩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철저히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속죄제를 제정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속죄제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철저하게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20절을 보면 “속죄한즉 사함을 얻으리라” 했고, 26절을 보면 “속죄한즉 사함을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했고, 그리고 35절에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속죄한다는 것은 우리 사람이 할 일이고, 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러니까 속죄제를 통해서 우리가 철저하게 해야 할 일은 속죄하는 일입니다. 속죄한다는 말을 본문에서 히브리어 카파르(rp'K;)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말은 “씻어내다”, “문질러 없애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우리 죄를 씻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속죄제를 통해서 우리가 죄를 씻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14절을 보면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이라고 했고, 23절을 보면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이라고 했고, 또 28절을 보면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이라고 했습니다. 속죄제는 지은 죄의 깨달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사실 속죄제는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죄에 대한 속죄이기 때문에 자기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죄다’ 하고 알고 저지른 죄라면 죄의식이 깊이 작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죄 지으려다 지은 것이 아니고, 남에게 큰 피해 준 것도 아니고, 대부분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나만 알거나 또 어떤 경우는 나도 모르고 하나님만 아시는 죄일 경우 그것을 죄로 인정하는 것 자체가 힘들 때가 있습니다. 게다가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다 그렇고 그런데... 라는 마음이 들면 자기가 지은 죄를 죄라고 깨닫기가 쉽지 않습니다.
톨스토이의 글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부인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죄 지은 것이 별로 없고 잘못한 일이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누구나 범하는 것이고 또 심각하지 않은데 그래도 회개해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이 그 부인에게 밖으로 나가서 작은 돌멩이를 치마폭에 가득 주어오라고 했습니다. 이 부인이 치마폭 가득 작은 돌들을 잔뜩 주워왔습니다. 바닥에 늘어놓고 세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됐으니 도로 있던 자리에 갔다가 놓으라고 했습니다.
부인이 난처해 했습니다. 다시 주워 담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있던 자리에 도로 가져다 놓은 일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것이 어디에 있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이 말씀했답니다. “이 작은 돌들이 바로 당신이 지은 죄들이요. 당신은 이렇게 많은 죄를 지었으면서도 하찮게 여겼기 때문에 제대로 회개하지 못했고, 그래서 죄가 이렇게 늘어만 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회개하려니 그 돌멩이가 어디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언제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해서 회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너무 무감각해 졌기 때문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릅니다. 내가 죄를 저질러 놓고도 그것이 죄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동상 걸린 발가락처럼 아무런 감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참회하자고 하면 막연히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의례적으로 참회합니다. 주님께서 그래 무슨 죄를 용서해 줄까? 물으시면 답변하기가 곤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죄에 민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죄를 범하고 있는지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죄를 아시는데 나는 모르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레위기 4장 속죄제 전체를 살펴보면 그 대상이 네 종류로 구분되어있습니다. 제사장, 온 회중, 족장들, 그리고 평민들입니다. 저들 모두가 자기 직분에 따라 자기 상황에 따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죄를 범한다는 것이 전제한 것입니다. 그리고 네 종류의 대상에 따라 속죄제사법이 다릅니다. 이것은 죄에 따라 죄를 지은 사람들에 따라 속죄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은 죄에 따라 철저하게 하나님께 그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애매하게 나는 죄인입니다. 내 모든 죄를 사해주시옵소서.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번에 과거에 지은 죄 지금 지은 죄 또 앞으로 지을 죄 모두를 속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그 구체적인 죄를 속죄하기 위해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속죄는 마치 판자에 여러 못이 박혀있으면 하나씩 뽑아내야 하는 것처럼 내 심령 속에 박혀있는 죄들은 주님의 보혈로 하나씩 씻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내가 저지른 죄를 하나님께 고하며 속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1서 1:8-9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철저하게 남김없이 고백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낱낱이 빠짐없이 사함 받기를 바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말하면 싫어합니다. 죄인이라는 말 듣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지금도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제사장도, 족장도, 평민도, 온 회중도 지속적으로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른 제사는 자원해서 드리는 제사이지만 이 속죄제만큼은 반드시 드려야 하는 의무제로 세우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죄사함 받는 일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속죄제는 은혜임과 동시에 의무입니다. 보다 철저한 속죄의 역사가 우리 안에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 기도 / 우리의 죄가 생각날 때 마다 속죄하게 하옵소서 온전한 언약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옵소서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마지막 한 계명이라도
레 4:1 ~ 4, 마 5:17 ~ 20
지난 주간 우리나라는 수출 3,000억 달러를 돌파하였습니다. 수출 3,000억 달러를 돌파한 세계 11번째 나라가 된 것입니다. 중계무역을 주로 하는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제외하면 세계 9위라고 합니다. 연말에는 3,200억 달러가 된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3,000억 달러는 미화 1달러짜리로 쌓아놓으면 에베레스트 산 46개 높이가 된다고 합니다. 미화 100불짜리를 길게 연결하면 달까지 6번을 왕복하는 길이입니다. 이 액수는 아프리카 국가 전체 수출량의 4배라고 합니다. 국민들 모두가 좋아할 입니다.
우리나라의 한류를 주도하는 것은 역시 한국의 문화입니다. 영화나 연극 혹은 음악 등이 엄청난 국익을 창출하며 팔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제주도에서 ‘한류엑스포 인 아시아’ 행사가 있었는데 일본에서 3,000명의 배용준 팬들이 전세기를 타고 왔답니다. 그 아줌마들 대단하지요? 한류는 한국의 문화가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외국에서도 한국에 신상품을 시판해보면 성공 여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미션 임파시블 3’는 4주 만에 40만 관객을 동원하여 미국이 세계 시장에서 성공을 예상했답니다. 반면에 ‘다빈치 코드’는 한국에서 완전히 망해서 1주일 만에 닫았습니다. ‘다빈치 코드’가 망한 것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 한국은 아시아의 흥행 척도라고 합니다.
화장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유수의 화장품 회사들이 신상품을 개발하면 우선 한국에서 신상품을 판매한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시판에 성공하면 그 상품은 성공하고, 실패하면 실패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의 성경 출판과 판매가 세계에서 으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성서 수출국인 것을 아십니까? 올해 우리나라는 368만부의 성경을 105개국에 수출하여 세계 성경수출 최강국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제작하여 수출하는 최강국이 아니라 성경을 읽고, 성경을 알고, 성경을 묵상하는 최강국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가 성경강국으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강한 힘이 우리 사회를 이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 세계에는 2,377개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습니다. 전 세계에 통용되는 6,500개의 언어 중에 성경전서로 번역된 수는 422개 언어입니다. 신약전서로 번역된 언어는 1,079개입니다. 그리고 단편만 번역된 수는 876개 언어에 이릅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성경이 있다는 것은 인류 최대의 축복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인물들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셨다가 떠나셨습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다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남아 있어서 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성경을 읽는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 민족이 성경을 읽고 성경대로 살아서 말씀 때문에 망하지 않는 민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대한 무식은 그리스도께 대한 무식입니다. 성경을 모르고 예수님을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날마다 더하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것은 지혜로운 삶입니다. 성경 말씀이 한자도 틀림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평안한 삶입니다. 성경을 내 삶의 지침으로 인정하는 삶은 행복한 삶입니다. 웨슬리는 ‘한 권 책으로 족한 사람’(homo unius libri)이라고 하였습니다. 수많은 다른 책을 통하여 얻은 통찰력은 성경의 진리를 증명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지혜가 되는 삶입니다.
성경에는 온갖 인간의 진리와 사상과 지식과 예언이 나타납니다. 성경에는 미래학자들이 말하는 미래에 관한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사는 지혜가 어디 있습니까? 성경에 이미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야 우리 속의 생명이 살아납니다. 신문을 꼭 보십시오. 그러나 신문 보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지 마세요? 잡지는 될 수 있으면 보지 마세요. 거기에 무슨 지식이나 지혜가 있습니까? 전문지식을 전해주는 서적들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성경을 읽지 않으면 온전한 지식이 되지 못합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는 시간 만큼만이라도 성경을 읽으면 유식해 질 것입니다.
성경을 완독하는 데는 약 56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매일 40장을 읽는다면 30일안에 성경을 다 읽을 수 있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하루에 4장씩을 읽으면 일년에 신구약 성경을 한번은 읽을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 보는 시간만큼만 투자하면 성경을 다 읽을 수 있습니다. 차 안에서 흔들리면서 성경을 보아도 일년이면 한 권을 거의 다 볼 수 있겠습니다. 성경 읽기에 더 열심을 내야 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으로 보아야 할 성경을 신학 논문으로 공부합니다. 낭만으로 보아야 할 성경을 우리는 역사 기록으로 공부합니다. 사랑으로 보아야 할 성경을 우리는 행동 규범으로 공부합니다. 성경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공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성서주일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변치 않는 말씀으로 다시 볼 수 있는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구약과 신약은 한 계명이라도 버릴 수 없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18에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합니다. 구약과 신약은 어느 하나라도 온전하지 않는 것이 없고 한 계명도 버릴 수 없습니다. 구약은 구약 시대에는 온전한 법입니다. 법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 법으로만 지키니까 나쁜 것입니다.
이사야 34:16에는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고 합니다. 설교 마치고 나서 보면 빼 먹은 것도 많고, 이 말은 꼭 할 걸 하는 말씀도 많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준비해도 부족합니다. 설교 준비는 설교가 끝나야 끝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런 일이 없습니다. 빼먹는 것도 없고 빠진 것도 없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일점일획이란 말은 이런 뜻입니다. 일점이란 히브리어 글자 가운데 가장 작은 한 점을 뜻합니다. 일획은 뿔이란 뜻으로 글자의 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점 하나, 끝 하나도 틀리지 않다는 말입니다. ‘님’이란 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되는데 뜻이 완전히 반대가 되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이런 오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오래 전에 유행하던 말 가운데 “밀가루와 밀가리의 차이가 무언지 아나?”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학교하고 핵교의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학교는 다니는 곳이고, 핵교는 댕기는 곳이랍니다. 성경은 이런 점 하나의 차이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한 마디도 허튼 말이 없고, 한 말도 잘못된 말이 없습니다. 성경의 정확성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권은 정경성을 의심 받았습니다. 아가서는 너무 관능적이어서, 전도서는 너무 회의적이어서, 에스더서는 하나님이란 단어가 한번도 없어서, 잠언서는 교훈들이 서로 모순 되므로, 에스겔서는 환상들이 영지주의적 경향을 보이므로 각각 의심받았습니다. 일부 유대학자들은 에스겔서는 반 모세적 성격을 지녔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은 다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고, 한 자도 잘못된 것이 없는 것을 믿습니다.
디모데후서 3:15에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이란 ‘theopneumatos’란 말로 하나님의 숨결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살아 있는 말씀이므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입니다. 가정에서도 성경을 가지고 교훈하세요. 성경을 가지고 책망하세요. 성경을 가지고 바르게 고쳐주십시오. 성경을 가지고 하면 자녀들이 달라집니다. 자녀들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이나 판단으로 자녀들을 교훈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감정으로 자녀를 책망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특히 “내가 너 만할 때는”이란 말은 하지 마십시오. 이런 말은 필요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그 때 핸드폰이 있었습니까? 그 때 디지털이 있었습니까? 그 때 인터넷이 있었습니까? 그 때와는 시대적인 상황이 너무 다릅니다.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성경은 있습니다. 지금도 성경은 있습니다. 앞으로도 성경은 있을 것입니다.
복음주의 모임으로 알려진 로잔 언약은 1974년에 성경은 그 것이 긍정하는 모든 것에서 오류가 없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22:18에는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합니다. 왜 더하지도 빼지도 말라고 하십니까? 한 자도 더할 것도 버릴 것도 없이 성경은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작은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가르치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입니다.
다시 19절에는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자신의 지식과 궤변으로 율법을 고쳤습니다. 자신 마음대로 다르게 가르쳐 범법하게 만들었습니다.
히브리어는 점 하나를 붙이고 떼면 전혀 다른 뜻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래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띄어쓰기가 없었습니다. 점을 찍고, 띄어쓰기를 함에 따라 뜻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영어에도 “God is no where”란 말을 띄어쓰기를 달리 하면 “God is now here”가 됩니다. “하나님은 아무데도 없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지금 여기 계시다”로 되는 것입니다. 어디를 띄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민수기 23:12에는 발람이 발락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으리이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하나도 내 마음대로 고칠 수 없는 말씀입니다. 내 뜻대로 해석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작은 점 하나라도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작은 것을 소홀히 하면 큰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명기 4:2에서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고 엄히 말씀하십니다.
교회사의 중요한 시기 때마다 객관적인 균형은 두 가지 것으로 정의 되었습니다. 성경과 교회입니다. 칼뱅이 신령주의자들을 비난한 것은 성경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령주의자들은 내적 조명을 추구했지만 성경을 무시하였습니다. 자기 인식이나, 자기 판단이나, 내적 조명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람의 판단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상황에 따라 다르고, 점 하나 떼고 붙이는데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얼마든지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결코 성경을 거스르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항존직 직원이 임직 서약을 할 때는 반드시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습니까?”라는 서약을 합니다. 그 때마다 저는 한번도 “아니오”라고 하는 분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성경을 유일의 법칙으로 믿고 그렇게 따르고 살고 있습니까? 왜 성경에 관한 것을 제일 먼저 서약합니까?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우리 삶의 변치 않는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규범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기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4장에는 대단히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4:13에는 “이스라엘 회중이 계명 중 하나라도 범하면” 수송아지를 잡아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4:22에는 “족장이 계명 중 하나라도 범하면” 숫염소를 잡아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4:27에는 “평민의 한 사람이 계명 중 하나라도 범하면” 암염소를 잡아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수송아지, 수염소, 암염소를 죽여 제사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사람이 죽을죄를 지었으면 대신 짐승을 죽여 죄 사하는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작은 계명 하나라도 범하면 죽을죄라는 말입니다. 작은 계명을 범하는 것이 작은 죄가 아닙니다. 죽을죄입니다. 성경에는 작은 계명이 없습니다. 모두가 큰 계명입니다. 작은 계명도 어기지 못하게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릭 워렌은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성경에서 진리를 발견하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받아들이고(receive), 읽고(read), 연구하고(research), 기억하고(remember), 반영하는(reflect)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 말씀 조목조목을 작은 것 하나라도 변하게 하지 말고, 다 삶에 반영하는 말씀이 되게 하기를 바랍니다.
찰스 스펄전은 매년 천로역정을 읽었습니다. 천로역정을 읽다보면 “야, 이 사람은 걸어 다니는 성경이구나”라고 하였답니다. 천로역정이 아니라 성경 때문에 칭찬을 얻었습니다. 성경이 그 삶을 이끌어주었습니다. 헬렌 켈러는 삼중고의 고난을 이기게 한 책이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성경 한자 한자가 그녀에게 힘이 되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제공하였습니다. 작은 한 마디도 그냥 지나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결 론
존 엘드리지와 브랜트 커티스가 쓴 “예기치 못한 사랑”(The Sacred Romance)에서 “우리가 귀를 기울이면 거룩한 로맨스는 우리의 삶에 매순간마다 마음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기쁠 때뿐만 아니라 고통의 때에도 거룩한 로맨스는 존재합니다. 말씀이 귀에 들리는 순간, 하나님과 우리의 거룩한 로맨스가 시작되고 이어집니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성경은 마지막 작은 한 계명, 한 점, 한 획이라도 변하지 않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삶의 근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인생 노정의 길잡이가 되어 말씀으로 승리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