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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권위와 탐욕을 버린 하나님의 자녀들 원문보기 글쓴이: Daniel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
갈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좌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용과 우상숭배하며,
주변국들을 점령하여 제국주의의 횡포를 일삼던 중국을
유럽과 일본을 통해 벌하신 후에,
1,2차 세계대전과 세계 대공황으로 유럽 제국주의들과 일본을
따로 징계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중국, 유럽과 일본 등 제국주의의 모든 탐욕으로 만들어진 악한 사건들은
하나님께 징벌받기 위해 자신들의 머리 위에 죄를 쌓고 잇었던 것에 불과합니다.
롬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그럼 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청나라에서는 아편 흡입으로 취한 백성들은 풍기가 퇴폐스러워졌고
모든 계층으로 아편이 퍼져나가 농촌의 경제 파탄, 재정 타격, 전투능력 상실,
국가 기강 해이 같은 폐단이 날로 커져갔습니다.
40년이 채 안 되어서 중국에는 아편 중독자들이 200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니다.
또 아편 수입 대금을 은으로 결재하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유출된 은의 양이 대략 6억량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편 수입으로 중국의 무역 수지는 적자가 되었고
청나라의 은 보유고가 격감하면서 은과 동전의 교환 비율이 1:200에 이를 정도로
은 값이 급등하였습니다.
드디어 1839년 도광제는 '아편 언금론'을 주장한 임칙서를 광둥성으로 보냈고
외국인 상점을 봉쇄하는 압박을 가하고는 20,000 상자의 아편을 모두 녹여 버리는 등
철저한 단속을 했고, 마약 상들은 홍콩으로 철수했습니다.
아편은 석회수를 부으면 화학반응으로 녹아내립니다.
그러자 영국 산업자본가들은 청나라가 무역의 자유를 침해하고
아편 상자를 몰수하여 사유재산을 침해했다며 영국 의회에 중국과 전쟁을 하자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이리하여 1840년 6월 영국은 540문 대포가 탑재된 48척 함대를
관동해역으로 보냈습니다.
이렇게 출정한 영국 원정군과 청나라는 무장충돌로 청의 함대가 괴멸되었습니다.
이 '아편전쟁'으로 '난징조약'이 채결되었는데,
중국은 홍콩을 1997년까지 영국에 할양하였며,
관둥, 홍콩,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를 개항하게 되었고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태로 중국 내에서는 혼란과 내분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1851~ 1864년까지 홍수전이라는 이단이 나타나서는 꿈에 자기가
하나님의 둘째 아들이자, 예수님의 동생이라는 계시를 받았다며
만민평등을 내세워 '태평천국'을 세웠습니다.
홍수전의 조직을 '배상제회'라 칭하였는데,
하나님을 숭배하는 사람들 이라는 뜻입니다만, 이단이었습니다.
홍수전, 이 사람도 토지를 지주들에게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주고
재산을 공유해야한다는 사회주의적 성격의 주장으로 농민들을 모았으며,
한편으로는 미국의 대통령 제도를 받아들이자는 민주주의적 성격을 띤 사상과 이념으로
1851년1월 금전촌에서 국호를 태평천국으로 칭하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홍수전은 38세의 나이에 태평천국의 천황이라는 칭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단영'이라는 군사조직까지 결성했는데,
그 규모가 20,00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청나라 정부는 이들을 제압하려고 하였으나
아편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한 뒤라 태평천국에게 격파당하고 말았습니다.
태평천국군은 난징을 함락시킬 때 20만명으로 늘어났는데,
그 이유는 아편전쟁 후에 영국이 청나라에게 전쟁배상금을 많이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청나라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많이 거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청의 백성들이 불만을 품고 태평천국으로 들어가버린 것입니다.
결국 홍수전을 우상화한 태평천국은 서구 열강들과 청나라의 협공으로 1864년 함락되고
이단 홍수전도 자살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 청나라 조정은 백성들을 안도시키기 위하여 농기구와 종자를 보내주면서
부패한 관리들을 내쫓는 등 몇가지 좋은 일들을 하기도 했습니다.
태평천국의 난이 있을 때, 또 다른 한편으로 골치 아픈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1차 아편전쟁이 끝난 후에 영국은 대중 무역에서 많은 효과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주력 상품인 면제품들의 판매는 기대와는 달리 열악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①중국 농촌에서 생산하는 면포가 값이 싸고 품질이 좋다.
②중국의 사회경제 구조가 여전히 자급자족적인 성격이 강해서 수입제품을 꺼려했다.
③늘어난 아편 수입으로 은이 유출되면서 구매력을 잃었다.
④1차 아편 전쟁 이후 광동을 중심으로 대영 항쟁이 전개되었다.
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영국과는 차와 아편의 무역만이 주된 교역이었기 때문에
영국은 계속 청나라에 압력을 넣었습니다.
그럼에도 영국의 수출이 지지부진하게 되자,
영국은 조약 개정을 청나라에 요구하기 위하여
1854년 4월 영국, 프랑스, 미국공사와 함께
광저우로 가서 양광 총독 엽명침에게
모든 내륙과 연해 도시의 개방과 상선과 군함의 양자강 자유왕래,
아편 무역의 합법화, 내륙통관세 폐지, 외국 사절의 북경 상주 등을 내용으로 하는
난징조약의 개정을 요구 했습니다.
이렇게 영국은 중국의 깊숙한 내륙 지방까지 진입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자유로운 중국 내륙 여행과 북쪽 항구 개방 등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개정 교섭에서는 1856년 5월 미국공사가 광저우에서 북경 상주,
중국 전역의 개방, 선교의 자유 등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청나라 조정은 조약 개정에 응하지 않았고,
영국은 무력을 사용하고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광저우 앞 주강에 정박하고 있던 해적선
애로호의 영국 국기가 바다에 버려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것을 '애로호 사건'이라고 하는데,
영국은 너무 어이가 없는 일로 청에게 전쟁의 빌미로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당시 대중국 강경론자로서 영국의 수상이 된 헨리 존 템플은 사건 보고를 듣고
1857년 2월에 영국의회에 군비와 원정군 증강을 위한 경비를 제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영국의회는 이 처럼 사소한 일로 전쟁까지 한다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라며 반대하는 의견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탐욕적인 등살에 못이겨 전쟁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또 프랑스는 중국 내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선교사가 처형 당했다는 구실로
중국과 전쟁을 도발하게 되었습니다.
1857년 영국과 프랑스는 연합군을 구성해서 광저우 시내로 침입하여
이 해 12월 광저우는 점령되었고 시가지 곳곳에 불을 지르고 민간인들을 죽였습니다.
유럽 정부들은 기독교 선교와는 다른 행로를 걸으며
하나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신들을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한 것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은 북상하여 다구포대를 점령, 북경의 텐진까지 점령하자
청나라는 버티지 못하고 '텐진 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위에서 요구하던 그들의 욕구를 다 충족시켜주고 말게 된 것이지요.
게다가 전쟁 배상금까지 뒤집어 씌우고 말입니다.
용의 나라 중국이나 탐욕적인 영국과 프랑스나
모두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들일 뿐이었습니다.
중국도 주변국들을 침략하여 압제했던 죄 만큼, 심은 그대로 유럽 제국주의들에게
거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청나라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다구포대를 잃은 불리함 때문에
어쩔수 없이 텐진 조약을 맺었지만,
청 정부의 강경파들은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청나라 황제는 1858년 후반 다구포대에 포대와 기병을 추가 배치하였고
영국의 소함대와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함대가 피해를 입었는데,
미국의 함대가 도움을 주어서 철퇴하였다가,
이후 1860년에 영국과 프랑스가 연합하여 이전의 8배가 넘는 병력과 군함을 모아서
다구포대의 청을 격멸시켰습니다.
그리고는 베이징으로 들어가서는 원명원에 침입하여 방화와 약탈을 하면서
이것은 서양인을 고문하거나 죽인 댓가라고 하였습니다.
청 황제는 베이징에서 멀리 북족으로 떨어진 별장으로 피신하였고
러시아 제국의 중재하에 베이징 조약으로 '2차 아편전쟁'을 종결 짓게 되었습니다.
이후 중국에서는 1862년~1895년까지 '양무 운동'이 일어나는데요,
양무 운동이라는 것은 서양의 여러 나라와 관계, 교류한다는 근대화 운동입니다.
청나라의 함풍제의 황후 서태후 중심의 양무 운동은 1863년 상하이에 이홍장이
'강남 제조총국'을 세워 총포, 탄약, 기선 등을 만들고,
난징에는 '금릉기기국'을 세워 대포, 화약을 생산하였습니다.
(서태후)
또 '텐진기기국'을 세워 화약과 포탄을 생산하였고 이후 각 지방에
총 24개의 군수 공장을 설립했습니다.
또한 공장이 필요로 하는 석탄과 철 등을 공급하기 위하여 각지에 광산이 개발되어
근대적 채광시설이 갖추어진 광업이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양무운동은 중앙 정부에 의해 체계적으로 추진되지 못하여
정치, 경제의 정책적인 면에서 비효율적이었습니다.
이후 1894년~1895년에는 '청일 전쟁'으로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신흥국가가 된 일본은
사할린 섬, 쿠릴열도, 둥베이에 급속히 세력을 확대해 온 러시아를
경계하기 위하여 조선에 야욕을 드러내었습니다.
일본은 한반도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은
일본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로 여기며
먼저 조선을 합병하여 그 이권을 차지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일본은 수 백년간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해제하여
조선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면,
조선의 석탄과 철광이 일본의 산업 기반에 도움이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청나라와 일본이
1882년 조선의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 등의 사태에
양국이 관여하면서 지들 끼리 약속을 하였습니다.
조선에 변란이 일어날 경우, 파병할 땐 쌍방이 미리 통보하기로 1885년에
조약을 맺은 것이었습니다.
지들 맘대로 말입니다.
국가가 군사력이 약하고 힘이 없으면 이렇게 됩니다.
1894년 조선에 시민운동인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어리석은 조선의 조정은 자국의 내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청에게 군대를 요청했고
3000명의 군대가 들어오면서 파병을 일본에게 알렸습니다.
일본은 이에 청나라에게 항의하면서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 명목으로
군대를 조선에 보냄으로 청나라와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는지 간단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 일이니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조선의 정조가 죽고,
1800년 11세의 어린 나이로 순조가 즉위하자,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선섰던
벽파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당색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이는 데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발단되었습니다.
안동 김씨는 순조~헌종~철종까지 60년간 권력을 잡고
견제 세력이 없이 부패할대로 부패한 세력이었습니다.
왕비를 등에 업고 권력을 잡은 안동김씨 일가들은 그야말로 독재를 전횡하며,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일 외에 못하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에 의해 조선에는 뇌물이 난무하였고,
매관매직으로 벼슬을 산 지방관들은 본전을 뽑기 위해서 마른 수건을 짜낼 정도로
농민들을 철저히 쥐어짰다고 합니다.
또한 그 잘난 인망 높은 유학자나 충신의 위패를 모시며 유교 이념을 전파하던 서원은
목적과는 달리 지역 토호들의 기득권 유지 기관으로 전락해서는
세도정치의 외형적 지주로써 당론과 백성을 수탈했으며,
활도 쏴보지 못한 무관의 자녀들은 안동 김씨 가문의 덕으로 벼슬에 올랐지 뭡니까.
이에 삼정이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는데,
이 '삼정'이란 국가의 재정의 기반이 되는 전정, 군정, 환곡입니다.
토지를 소유한 지주가 물어야 할 '전정'의 전세를 소작농들이 물어야 했으며,
매관매직으로 증가된 양반층의 증가로 인해,
병역을 면제하여 주는 대신으로 내던 베의 부담이 농민에게 집중되어
지방관은 군포의 목표량을 채우기 위하여 죽은 사람과 어린아이에게까지
군포를 부담시켰습니다.
'환곡'은 흉년에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이자 없이 빌려주는 곡식인데,
이자를 붙이거나 양을 속여서 돌려받는 등의 관리들의 횡포가 심했습니다.
게다가 이름 모를 무명잡세인 부과세가 43종류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러니 농민들은 말 그대로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탐관오리들에게 시달렸는 지 이루 다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매관매직이 성행한 안동김씨 정권기에는 과거제도의 기강까지 무너져
피해를 본 지식인들과 안동김씨 세력에 밀려 몰락한 양반들이 모여
1811년에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철종 때에 와서는 안동 김씨의 세력이 전국각지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던 시기였는데,
1862년 철종13년, 단성에서 시작하여 전국 71개 군현에서 37차에 걸친
민란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이 민란을 통칭해 ‘임술 민란’이라 합니다.
임술민란은 나라의 재정난 타개와 구호 사업 등을 위하여 곡물을 나라에 바치게 하고,
그 대가로 벼슬을 주거나 면역(免役) 또는 면천(免賤)해 주던 납속제 실시에 따른
신분제 붕괴와 더불어 농민층의 분화가 일어났고,
계속되는 재해로 수입은 감소하는 반면에 세수증가로 관리들의 수탈이 크게 늘어
농촌사회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농민들은 집과 농지를 버리고 떠도는 유민이 되거나
유민 직전에 관에 항의 하는 식으로 봉기하였습니다.
이렇게 임술년에 일어난 민란이 삼정의 문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
‘삼정의 난’이라고도 하는데,
그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2월 18일 진주에서 일어난 ‘진주 민란’이었습니다.
진주에서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있던 무관 출신 백낙신은 몇 년 동안
농민들에게 착취한 돈만 5만 냥이었는데, 쌀로 환산하면 1만 5천석이었고,
진주목에서는 지방 관리들이 불법적으로 축낸
공전, 군포, 환곡을 통틀어 도합 5만 5천석이었습니다.
이렇게 축낸 삼정의 세금들을 고스란히 농민에게 부담 시켰기 때문에,
이에 농민 봉기군들은 스스로 '초군'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진주성에 쳐들어갔는데, 그 수가 수 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6일 동안 일어난 진주 민란은 23개 면을 휩쓸었고 12여 호의 집이 파괴되었으며
재물 손실 10만 냥을 넘었습니다.
단성을 시작한 진주 민란은 곧 경상, 충청, 전라, 황해, 함경 5도와 경기도 광주에서
무려 37차 에 걸쳐 일어났고,
많게는 수만에서 적게는 1천여 명에 이르는 농민들이 민란에 참가했습니다.
철종 때는 안팎으로 변화가 휘몰아치는 격변기였습니다.
안으로는 삼정 문란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홍수, 지진, 역질 등이 창궐하여
전국적으로는 농민 반란의 양상이 나타나던 시기였으며,
밖으로는 이양선의 출현과 천주교의 전래로 왕조 질서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에는 불교와 조상숭배, 귀신을 섬기는 풍속이 난무하였었습니다.
하층민들은 아플 때도 약을 쓰는 대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낫는다고 굿을 하고
산당을 짓고 절을 하는 등 그야말로 귀신 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외의 것들에게 절하고 숭배하는 것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고전 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는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 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자냐
우리는 반드시 악한 영의 미혹에 대한 분별을 해야 합니다.
귀신은 인간들의 무지함과 효도, 예법으로 우리를 옭아맵니다.
현대는 사람들이 너무 잘 배워놓으니까, 과학을 비틀고 왜곡시켜서 미혹하고 말입니다.
조선에서 이와 같은 내외적인 위기 시대에 그에 대응할 만한 사상으로 일어난 것이
'동학'이었습니다.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전횡의 시대에 몰락한 양반가의 서자 출신으로
현세에 좌절했던 최제우가 1860년 4월 민간신앙을 바탕으로 유교, 불교, 도교 3대
동양 종교의 핵심 사상을 종합해 만든 '동학'은 당시 글을 모르고,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경 내용도 모르던 민간 농민들 사이에서 조선의 민중종교로 자리 잡아갔습니다.
민생은 뒷전에 있고 몇몇 세도가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조선 왕조에 실망한 백성들에게 최제우는 사천주 사상으로
‘하늘과 사람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내 마음 속에 한울님이 있다.’며
빈부귀천의 차별대우가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며 포교했습니다.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모든 미혹의 구호는 '평등'입니다. '평등!'
평등도 책임질 수 있는 자유 안에서 형식적 평등이 아닌,
실질적 평등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사탄이 말하는 평등은 자유가 없는 거짓 평등입니다.
불평등 신분 사회에서 지배층에게 착취당하고 살았던 당시
조선 말기의 농민들은 동학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고
교세는 무섭게 확장되었습니다.
1861년부터 본격적으로 포교하기 시작해 6개월 만에 선비로부터
농민에 이르기까지 3000여명의 사람들이 최제우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경주, 대구, 단양 등 전국 각지에 교회와 비슷한 ‘접소’를 설치하고,
책임자인‘접주’를 두어 교세를 확장했습니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동학'도 '천주교'와 같이 민심을 현혹시킨다, 하여
나라가 금하는 종교로 규정하고 동학 세력의 위협에 1863년 1월 최제우를 체포했습니다.
그러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 방면되는데,
이 사건 후에 교세가 더욱 커졌습니다.
신도가 늘자 그해 12월에 각지에 '접주'가 지역 신도를 이끌게 하여 1863년에는
신자가 3천여명에 13개 접소를 확보하였습니다.
8월에는 조정에 위협을 느낀 최제우가 미리 최시형에게 도통을 전수하고
제2대 교주로 삼았고,
그 해 11월 20일 최제우는 경주에서 체포되어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효수에 처해졌습니다.
조선은 군신관계, 상하관계와 가례 같은 예법만을 중요시 하던
유교를 정치 기반으로 삼은 이념으로 성리학의 지배원리가 조선왕조를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선에는 동학이 일어나기 이전에도,
정조 말부터 급격히 불어난 천주교가 조선의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 의례를 거부했었는데,
평등사상과 유일신(하나님)을 주장하다가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섭정하던 정순왕후의 '오가작통법'에 의해 다섯집을 하나로 묶어
그 중 한집이라도 천주교를 믿으면 연대처벌을 받아 화를 당하게 한다는
천주교 금지령으로 전국에서 죽은 사람이 수만이 넘는 ‘신유박해’가 일어났었습니다.
오가작통법 五家作統法
명사 역사 조선 시대에, 범죄자의 색출과 세금 징수ㆍ부역의 동원 따위를 위하여 다섯 민호(民戶)를 한 통씩 묶던 호적 제도. 성종 16년(1485)과 숙종 원년(1675)에 시행하였으며, 헌종 때에는 천주교를 탄압하는 데 이용하였다. (표준 국어 대사전)
다섯 가구를 하나로 묶어서 서로 감시하게 하고 연대 책임을 지우는 '오가작통법'이
천주교인들 박해 때 악용되었다는 점을 볼 때,
마지막 대환란 때도 이웃 끼리 감시하며 기독교인들을 색출해 내는 데에
비슷한 제도를 만들어 짐승에게 절하지 않는 사람들을 잡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은 그래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리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조선의 폐쇄적이고 소수 세력가의 부귀와 안녕을 위해서는
평등사상을 강조하는 천주교나 동학 같은 교리는 뿌리가 뽑혀야만 했던 것입니다.
‘동학’이라는 명칭은 교조 최제우가 천주교에 대항하여 ‘동방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지만 천주교나, 동학은 인간의 평등사상을 주장하는 입장은
같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최제우의 참형과 지속적인 탄압에도
당시 세도가들에게 무참하게 짓눌린 농민들은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에 의해 계속 포교되었습니다.
최시형이 내세운 사상은‘사인여천’사상으로
‘사람이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였습니다.
이렇게 동학은 널리 서민층의 조직의 민심을 기반으로 하여,
나라를 지키겠다는 보국안민과 고통에 헤매는 민중을 구제하겠다는 의지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양반 사회의 신분차별을 반대하던 경주의 몰락가 양반 최제우도
그가 파악한 당시의 사회상은 왕조의 기운이 쇠하여
개벽이 필요한 '말세'라는 것이었습니다.
1864년 최시형은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에 은신하였다가 뒤에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 울진 등지로 돌아다니며
포교하는 한편,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포교가사집인〚용담유사〛 등을 편찬하여,
교의를 체계화하고 교단조직을 강화하는 등, 동학의 완성을 이룩하고
포접제를 활용하여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신도의 교화 및 조직을 위한 기틀이 마련되어
동학의 교세가 비약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1885년 충청도 보은군 장내리로 본거지를 옮겼습니다.
이에 최시형이 이끄는 충청도 지역을 ‘북접’이라고 하며,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 지방을‘남접’이라고 했습니다.
동학교도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그에 따른 관헌의 신도 수색과 탄압이 가중되었습니다.
한편, 1863년 어린 고종의 즉위로 흥선대원군이 10년간 조선을 섭정하면서
60년간이나 이어져 오던 안동김씨의 전횡의 종적이 막을 내리는 듯했고,
민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무명잡세를 혁파했으며,
궁중에 특산물을 받치는 진상제도를 폐지했으며,
당쟁의 근거지인 서원을 철폐하고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고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기위해 호포제 실시로 양반에게도 군포를 내게 했으며,
양반과 토호(호족)의 면세를 철저히 조사하여 국가 재정을 충당했으며,
또 환곡제의 시행을 합리적으로 하기 위하여 '사창제'를 실시했으며,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 등의 좋은 정책도 펼쳤으나,
흥선대원군의 실책인,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들에게 부역을 가중시켰고,
기부금인 '원납전 징수'로 백성들의 원성을 높였으며,
'당백전' 발행으로 물가까지 상승시켰습니다.
또한 외부적 침략으로는
1866년부터 1871년까지는 병인박해를 빌미로 '병인양요'가 일어났으며,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군민 화공으로 불타버린 사건으로
1871년에는 '신미양요'가 일어났습니다.
두 양요는 모두 승리로 끝났지만,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봉건조선을 유지하려던 안목은
세계정세를 읽어 내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보다 훨씬 앞서서 서양에 개항한 일본은 서양 문물에 힘입어
근대 시대의 성취를 빨리 일궈내었고, 무기도 신식화하여
서양의 제국주의 흉내 내서 조선을 침략했던 것이었습니다.
조선에서는 흥선대원군이 민비 일파에 밀려서 실각되었으며,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을 때,
이를 틈탄 일본은 1875년 8월 19일 강화도 앞바다에 '운요호'를 이끌고 예고 없이
영해를 침범했는데,
조선측의 합법적 대응에 일본은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고
영종도에 상륙해서 민가와 관아에 불을 지르고 조선인 30여명을 살상했습니다.
이후 조선은 강제적으로 1876년 2월 3일에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되어
일본에게 점점 국권을 빼앗겨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조선의 양반들은 신분적 특권만을 지키기 위해 애쓸 뿐이었습니다.
이런 조선의 상황에서 1894년에는 동학도들에게 농민들이 가세하여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전국적으로 '동학농민 봉기'가 거세게 불 일듯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노동력까지 부역에 갈취당한 조선의 농민들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의 평등사상에 매료되어 착취당하지 않기 위해서 동학을 중심으로
궐기하려고 전국에서 몰려들었습니다.
특히 충청남도 지역에서 가장 큰 궐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1894년 동학군은 반봉건, 반외세를 내세우며 들고 일어났지만,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패퇴하였고 무자비한 학살이 이루어졌습니다.
동학군의 시체가 동문 밖과 숲 속에 쌓였으며, 생포된 동학군들은 처형되었습니다.
왜세에 의해 동학농민 운동의 기세가 약화되자,
어리석은 조선의 조정은 일본의 철병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에 야욕을 품은 일본은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아~답답한~~한숨이 나옵니다.
이런 기세로 일본은 1894년 7월 25일 아산, 풍토 앞바다에서 청나라 해군을 공격하였고
'청일 전쟁'이 발발하였던 것이었습니다.
11월에 일본은 여순에서 4일 동안 18,000여 명의 대학살을 감행하였고,
전쟁의 결과, 1895년 1월 청나라가 일본에 화친을 청하면서 패배를 인정하였고,
일본은 전쟁 승리로 '시모노세키 조약'을 성립시켰습니다.
이로 인하여 청나라는 조선이 완전한 자주 독립국임을 인정하여
지위권을 일본에게 넘기고 전쟁 배상금 2억냥을 지불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중국의 요동반도(랴오둥 반도)와 대만 등을 일본에게 떼어주었습니다.
일본은 청일 전쟁 후에 동아시아의 새로운 제국주의로 등장하여
조선 침략을 본격화 하였고,
남하 정책을 펴던 러시아와 충돌하여 '러일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1904~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중국에서 남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또 1905년에 ‘을사늑약’ 으로 일본에게 조선의 국권을 완전 침탈당했고,
조선의 상류층 탐관오리들은 부귀영화를 위해 일본에게 친일파적 행보로
농민들을 학살시켰습니다.
한편, 청일 전쟁이 청나라의 패배로 돌아가고나서
청나라에는 계속되는 내란이 발생합니다.
1899년, 손오공과 저팔계까지 숭배하는 '의화단' 이 출현을 하는데 대대적이고도
잔인한 기독교인 대학살이 중국 땅에서...
이어서 계속.....
첫댓글 https://youtu.be/oiuUoZkbabw
탄압 받는 증국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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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Io_-T1TL2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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