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게 살라
법정 스님 법문 때 사회를 보는 소중한 인연을 맺은 관계로
스님 법문을 누구보다고 많이 들었다. 많은 법문 내용 가운데
스님 말씀 정수를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착하게 살라'이다.
전라도 구례에 류씨들 고택인 운조루雲鳥樓가 있다. 이 고택은
6 · 25라는 참혹한 전란에도 불타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 역사에서 가장 처참하고 참혹했던 전쟁을 꼽는다면 임진왜란과
6 · 25를 꼽을 수 있다. 임진왜란은 7년 동안 전 국토가 유린되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짧은 기간에 3백만 명 넘는
삭람 목숨을 앗아간 전쟁은 6 · 25밖에 없다.
6 · 25는 동족끼리 벌인 전쟁이고, 못 가진 한이 폭발한 전쟁이었다.
그러다보니 전쟁 핵심 타깃은 '양반 부자'였다.
이남에서 6 · 25를 전후하여 피해가 특히 심했던 지역은 지리산 문화권이다.
지리산은 한국 빨치산 메카이다.
이 일대 부자와 양반들은 목숨과 재산을 지키기가 많이 힘들었다.
다른 부잣집들은 집이 불타고 그 집안사람들이 총을 맞거나 대창에 찔려 죽었다
하지만 운조루는 이 지리산 문화권을 대표하는 양반 부잣집이었는데도
죽은 사람도 없고, 대저택이 불타지도 않았다. 또 좌익들에게 특별히 고초를
겪은 일도 없었다. 운조루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팻말이 붙은
쌀뒤주와 노비들을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아흔아홉 칸 집이라 불렸던 운조루 안채와 사랑채 중간 지점
헛간 같은 공간에 쌀 두가마 반이 들어가는 쌀뒤주가 놓여 있었다.
그 뒤주 아래 가로세로 10센티미터 정도 조그만 구멍이 나 있고, 구멍을 열고
닫는 마개가 있다. 이 마개에 '타인능해'라는 글이 쓰여 있다. '어느 누구라도
마음대로 열 수 있다'는 뜻으로 아무나 쌀을 가져갈 수 있다는 말이다.
집주인은 보통 열흘에 한 번씩 쌀뒤주를 채워놓았다고 여겨진다.
한달이면 평균 일곱 가마 반이나 되는 쌀이 둘레 어려운 사람과
길손들에게 제공되었다. 한해면 어림잡아 백 가마에 가까운 양이다.
이 쌀뒤주로 인해 운조루 이름은 지리산 일대에 퍼져 나갔다.
지리산 일대가 5백리. 한국 실크로드라고 할 만한 길이 바로 지리산을
둘러싸는 길이다. 영호남 교류했던 길이기도 하다.
이 길을 따라 운조루가 덕망이 퍼지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6 · 25 이전에 발생한 여순반란 사건 때 반란군 주모자인
김지회가 군경 추적을 패해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때 운조루 뒷길로 올라갔는데, 김지회 일당도 둘레 다른 지주
집안사람들은 죽였다. 하지만 운조루를 불태우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운조루가 불타지 않았던 또 한 원인은 노비 해방이다.
운조루 둘레에 스물다섯 가구 노비들이 살았다.
한 가구에 네·다섯 식구라고 치면 백여 명이 넘는 사람이 운조루에 딸려 있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노비제도는 없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노비들은 여전히 주인집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운조루에서는 1944년 노비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6 · 25가 발생하자 이 노비 집안 일부 젊은 사람들도 좌익에
가담했고, 지주와 부자들을 징벌하는 데 앞장을 서기도 했다.
하지만 행여나 운조루에 해를 입히려는 기미가 보이면,
풀려난 노비 집안 후손들이 적극 나서서 운조루를 감쌌다.
"그 집엔 절대로 손대지 마라"
옛날 당나라 장안에서 약국을 하는 송청宋淸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송청은 좋은 약재에 높은 값을 쳐줬다.
그래서 그가 운영하는 약국 문전은 늘 전국 각지에서 약초를 팔려고
몰려드는 사람들로 붐볐다. 또 송청이 약을 잘 짓는다는 소문이 나 늘 많은
환자가 모여들었다. 그런데 송청은 신분 귀하거나 천하거나 또 부자거나
가난한 사람이거나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독같이 정성스레 치료했다.
생전 처음 보거나 신원을 알지 못해도 차용증서를 받고 약을 주었다.
약값을 못 낸 사람들에 받은 차용증서가 산더미처럼 쌓이기도 했다. 연말이
되어도 약값을 갚지 못하면 갚을 능력이 없다고 여겨 차용증서를 불사르곤 했다.
예나 지금이나 병이란 사람 목숨을 다투는 일이기에, 약방이 문을 닫으면
아픈 사람은 공포와 불안에 떤다. 이를 미끼로 약국들은 옛날 장안에서도
세금을 많이 물리거나 벼슬아치들이 부당한 요구를 하면
문을 닫아 저항하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송청은 사람 목숨을 쥐락펴락하는 약으로써
내 잇속만 치릴 수 없다고 하며 약방문을 닫은 일이 없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를 두고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이라고 말을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런 구구한 말들에 대해 송청은 이렇게 말을 잇는다.
"저는 그저 약을 팔아 처자식 먹여 살리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다만 다른 이들과 다르다면, 이익을 남보다 늦게 챙기는 것일 뿐.
제가 약방을 시작하여 40년 동안 태운 차용증이 수백통에 이릅니다.
당장 약값을 못 낸 사람들 가운데 뒷날 벼슬자리에 오른 사람이 적지 않았고,
또 모든 약방이 문을 닫았을 때 내 약으로 목숨을 건진 사람 가운데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이 뒷날 후한 선물로 은혜를 갚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물론 빚지고 죽은 사람도 수백 명에 이르지만, 결국 손익 따져보면
많이 남는 장사였습니다. 또 은혜 갚음이 제 당대에 끝나지 않고,
자식들에게 까지 물려지는 것이어서 복밭福田으로 남는 것이지요."
화엄경에 "초발심시 변성정각初發心時 便成正覺"이란 말이 있다.
초발심이 곧 바른 깨달음이라는 말이다. 처음 깨친 그 마음이 전부라는 말이다.
처음 마음이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 사람다운 마음을 말한다.
착하게 사는 일은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법정스님 숨결 변택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