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으로 돌아와
어느새 한 학기가 지나고 여름방학에 드는 날이다. 낯선 거제를 유배지로 생각 않고 정년 앞둔 휴양 차 잠시 머무는 곳이라 생각하고 지낸다. 그에 걸맞게 틈난 나면 거제 구석구석 내 발자국을 남긴다. 새벽녘 인적 드문 포구를 찾아가고 퇴근 후 산봉우리도 올랐다. 어느 날 가조도 옥녀봉을 다녀온 후 진드기가 종아리에 붙어와 놀란 적 있다. 허물어진 성곽이나 봉수대도 올랐다.
방학식을 하는 날 학생들이 하교하면 친목회에선 점심 자리를 예정했었다. 한 학기 한두 번 전체 교직원이 자리를 같이 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태풍이 다가오는 관계로 직원 회식은 취소되고 각자 흩어져 나에겐 다행이었다. 곧장 고현으로 나가 창원행 버스표를 끊으니 출발 시각이 좀 남았더랬다. 점심때였는지라 어떻게 간단하게 때울 방법이 있을까 싶어 터미널 구내를 살폈다.
닭강정과 어묵과 삶은 계란을 파는 간이식당이 보였다. 그 말고는 다른 식당이 없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실내로 드니 여학생 둘이 테이블에 앉아 닭강정을 먹고 있었다. 주인은 자그마한 체격의 베트남 여성이었다. 어묵과 삶을 계란을 집어 먹으려다가 쌀국수를 판다는 차림이 눈길을 끓었다. 나는 주인에게 그걸 주문했더니 잠시 후 맛깔스런 쌀국수가 나와 점심을 잘 때웠다.
세찬 비가 내리는 속에 버스는 거가대교를 지나 신항으로 건너왔다. 장유를 거쳐 창원에 닿으니 빗줄기는 약해졌다. 주말이면 복귀하는 창원인데 이번엔 짧은 방학에 들어 보름 간 머물게 되니 의미가 깊었다. 집으로 들어 셔츠와 빈 반찬통을 내려놓았다. 날이 저물기 전 치과 진료가 예약되어 먼저 들렸다. 곡차를 즐겨 들어선지 이들이 삭고 잇몸이 녹아내려 감당이 불감당이었다.
치과 진료 후 평소 교류가 잦은 친구와 접선이 예정되어 있었다. 정년을 일 년 앞두고 창원대학에서 영문과 겸임교수를 맡게 되는 친구다. 젊은 날 사학에서 전교조 활동을 하다가 해직된 아픔도 겼었다. 수 년 간 아스팔트로 밀려나 함성을 지르다가 공립학교로 특채되어 진학지도에 청춘을 다 바쳤다. 이제 늘그막에 준비된 학위로 대학에서 겸임교수 직을 제안해 와 응한다고 했다.
친구는 방학식을 끝내고 대학에 들려 학과장과 강의 계획을 협의하는 시간대였다. 나는 치과를 나와 약속 시간이 남아 퇴촌 삼거리로 나가 가는 빗줄기 속에 우산을 펼쳐 산책을 나섰다. 창원천 수변 산책로는 내가 한때 봉림동 주택지 학교로 출퇴근하던 길이기도 했다. 벚나무와 산수유나무가 도열한 산책로를 걸었다. 간간이 섞인 배롱나무는 제철을 맞아 붉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창원천을 따라 걸어 반지동 주택지를 지날 때 친구가 연락이 왔다. 사는 곳이 달라 장소를 정하기 머뭇거려졌다. 일단 차를 집에다 두고 택시를 이용하십사 했다. 둘이서 가끔 들린 반송시장에서 보자고 했다. 시골밥상에 들려 밥상이 아닌 술상을 받았다. 평소 내가 그길 찾으면 곡차를 들었는데 맥주를 시켰다. 친구가 좋아했고 나는 치아 부식이 곡차 때문일 거라는 우려에서였다.
잠시 뒤 친구가 나타났다. 제법 뜸한 간극으로 만나 반가웠다. 친구는 허기가 진다해 두루치기를 안주로 빈 병을 몇 개 더 늘였다. 그간 밀린 안부들을 나누면서 친구에게 나는 이번 마음에도 없는 여권을 냈다고 했다. 큰 녀석 성화를 못 이겨 녀석 휴가에 맞추어 잠시 바깥바람을 쐬고 오게 된다고 했다. 나는 평생 토종을 고집하며 물을 건너지 않으려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차수를 변경하려고 멀지 않은 무학상가로 갔다. 둘이 가끔 들린 그곳 주점은 비가 오고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라 불이 꺼져 있었다. 맞은편 친정이 밀양 고정이라 우리가 고정댁으로 부르는 꼬치구이 전문점으로 들었다. 한동안 발길이 뜸했으니 반갑게 맞아주었다. 은행구이 안주로 갈색 술을 몇 잔 더 보탰다. 늦지 않은 시각 밖으로 나왔더니 비는 여전히 흩뿌렸다. 19.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