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불교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관문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 불기 2557년(2013년) 9월 26일 후기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14)
서울경기강원지역방 2544번 글 http://cafe.daum.net/altlovebuddha/PEK/2544
의 후속타입니다.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를 열네 번째, 마지막으로 읽었습니다. 오늘 불서읽기 모임은, 책쫌읽자 법우, 보리연꽃 법우, 환희장엄 법우, 그리고 저 관문, 이렇게 4명이 참석했습니다. 클나라 법우는 바쁜 일이 있어서 얼굴만 보여주고 조퇴했습니다.
다음 주 10월 3일은 개천절로 휴강하고 그 다음 주 10월 10일에는 <Thich Nhat Hanh,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틱낫한 스님 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읽기 시작하겠습니다. 이 책 소개는 별도의 글을 올리겠습니다.
오늘도 지난번에 모였던 장소 ‘Cafe 57th’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곳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80 미터 가량 직진하신 후 풍문여고를 오른 쪽에 끼고 돌아서 약 60 미터 가면 보이는 곳입니다. 모이는 때는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교재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중 ‘Chapter VIII. What the Buddha Taught and the World Today' 를 읽었습니다. 관문이 가지고 있는 책으로 80페이지 20째 줄부터 89페이지 5째 줄까지입니다. 91페이지부터 138페이지까지 Selected Texts(가려 뽑은 경전) 부분이 있는데 각자 자습하기로 했습니다.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를 읽는 동안의 후기는 저희가 그 날 읽은 부분의 영어 본문과 그 번역서인 <이승훈 옮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 경서원> 의 번역을 올리겠습니다.
Chapter VIII. What the Buddha Taught and the World Today
If one desires to become a Buddhist, there is no initiation ceremony (or baptism) which one has to undergo. (But to become a bhikkhu, a member of the Order of the Sangha, one has to undergo a long process of disciplinary training and education). If one understands the Buddha's teaching, and if one is convinced that his teaching is the right Path and if one tries to follow it, then one is a Buddhist. But according to the unbroken age-old tradition in Buddhist countries, one is considered a Buddhist if one takes the Buddha, the Dhamma (the Teaching) and the Sangha (the Order of Monks)- generally called 'the Triple-Gem'- as one's refuges, and undertakes to observe the Five Precepts (Paňca-sila)-the minimum moral obligations of a lay Buddhist-(I) not to destroy life, (2) not a seal, (3) not to commit adultery, (4) not to tell lies, (5) not to take intoxicating drinks-reciting the formulas given in the ancient texts. On religious occasions Buddhists in congregation usually recite these formulas, following the lead of a Buddhist monk.
여덟째 가름 : 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오늘날의 세계
불제자가 되려고 할 때 반드시 거쳐야 될 입문의식(또는 세례)은 없다. (그러나 승가의 일원인 비구(比丘)가 되려면 장구한 과정의 계율 훈련과 교육을 거쳐야 한다.) 어떤 이가 부처의 가르침을 이해한다면, 그리고 그 가르침이 올바른 "길"이라고 확신을 품게 되어 따르려 애쓴다면 그이는 불제자이다. 그렇지만 불교국가에 이어져 내려오는 오랜 전통에 의한다면 일반적으로 "세 보물"[三寶(삼보)]이라 부르는 부처와 가르침[法(법)]과 동아리[僧(승)]를 자기의 피난처로 삼아야 불제자로 여겨지게 된다. 그리고 속가제자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적 의무인 "다섯 계율"[五戒(오계)]을 지킬 것을 약속한다. 다섯 계율은 ⑴생명을 파괴하지 말 것[不殺生(불살생)], ⑵훔치지 말 것[不偸盜(불투도)], ⑶간통을 범하지 말 것[不邪淫(불사음)], ⑷거짓말을 하지 말 것[不妄語(불망어)], ⑸취하는 음료를 마시지 말 것[不飮酒(불음주)] 등인데, 옛 경전에서 주어진 문구대로 낭송한다. 불교의 종교적 절기의 법회에서 승려의 선창에 따라 이 구절들을 낭송한다.
There are no external rites or ceremonies which a Buddhist has to perform. Buddhism is a way of life, and what is essential is following the Noble Eightfold Path. Of course there are in all Buddhist countries simple and beautiful ceremonies on religious occasions. There are shrines with statues of the Buddha, stūpas or dāgäbas and Bo-trees in monasteries where Buddhist worship, offer flowers, light lamps and burn incense. This should not be likened to prayer in theistic religions; it is only a way of paying homage to the memory of the Master who showed the way. These traditional observances, though inessential, have their value in satisfying the religious emotions and needs of those who are less advanced intellectually and spiritually, and helping them gradually along the Path.
불제자가 거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외형적인 예식이나 의식은 없다. 불교는 살아가는 방법이어서 필수적인 것은 다만 "거룩한 여덟 길"에 따르는 것뿐이다. 물론 모든 불교국가에는 종교의 절기에 소박하고 아름다운 의식이 있다. 절에는 불상과 탑이나 부도 그리고 보리수를 모시는 제단이 있다. 거기에 불제자들이 예배를 드리고 꽃을 공양하며 등불을 켜고 향을 사른다. 이것은 유신론(唯神論)적 종교에서 하는 기도 행위와는 전혀 다르다. 이것은 길을 알려준 스승을 기념하여 경의를 표하는 방법일 따름이다. 이런 전통적 행사는 필수적이진 않지만 지적으로, 정신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에게 종교적 감흥과 요구를 만족시켜주고 그 사람들이 점차 길에 들어서도록 도와주는 데에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Those who think that Buddhism is interested only in lofty ideals, high moral and philosophical thought, and that it ignores the social and economic welfare of people, are wrong. The Buddha was interested in the happiness of men. To him happiness was not possible without leading a pure life based on moral and spiritual principles. But he knew that leading such a life was hard in unfavourable material and social conditions.
불교가 오로지 고상한 이상과 지고한 도덕적, 철학적 사상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민중들의 사회적, 경제적 복지는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잘못 안 것이다. 부처는 인간의 행복에 관심이 있었다. 도덕적이고 정신적 원리에 기초한 순수한 삶을 살아나가지 않고서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물질적, 사회적 조건들에 무관심하고서는 그런 삶을 살아가기가 어려움을 부처는 알고 있었다.
Buddhism does not consider material welfare as an end in itself: it is only a means to an end—a higher and nobler end. But it is a means which is indispensable, in dispensable in achieving a higher purpose for man's happiness. So Buddhism recognizes the need of certain minimum material favourable to spiritual success-even that of a monk engaged in meditation in some solitary place.
불교는 물질적인 부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 즉 더 높고, 더 거룩한 목적을 위한 수단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은 필수불가결한 수단, 즉 인간의 행복을 위해 지고한 목표를 성취키 위한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다. 그래서 불교는 정신적 성공에 도움이 되는 어떤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에 대한 요구를 인정한다. 심지어 어떤 외딴곳에서 명상에 전념하는 승려까지도 그러하다.
The Buddha did not take life out of the context of its social and economic background; he looked at it as a whole, in all its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aspects. His teachings on ethical, spiritual and philosophical problems are fairy well known. But little is known, particularly in the West, about his teaching on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matters. Yet there are numerous discourses dealing with these scattered throughout the ancient Buddhist texts. Let us take only a few examples.
부처는 삶을 사회적, 경제적 배경의 맥락에서 벗어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부처는 삶을 전체적으로, 즉 모든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윤리적, 정신적 그리고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아주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과제들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조금 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서양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이것들을 다룬 수많은 설법이 고대 불경들에 흩어져있다. 그 예를 조금만 들어보기로 하자.
The Cakkavattisihanāda-sutta of the Digha-nikāya (No.26) clearly states that poverty (dāliddiya) is the cause of immorality and crimes such as theft, falsehood, violence, hatred, cruelty, etc. Kings in ancient times, like governments today, tried to suppress crime through punishment. The Kūtadanta-sutta of the same Nikāya explains how futile this is. It says that this method can never be successful. Instead the Buddha suggests that, in order to eradicate crime, the economic condition of the people should be improved: grain and other facilities for agriculture should be provided for farmers and cultivators; capital should be provided for traders and those engaged in business; adequate wages should be paid to those who are employed. When people are thus provided for with opportunities for earning a sufficient income, they will be contented; will have no fear or anxiety, and consequently the country will be peaceful and free from crime.
《디가-니까야》의 《짝까밧띠시하나다경》({轉輪聖王修行經(전륜성왕수행경)}長阿含6)은 가난[貧窮(비궁)이 도둑질, 거짓말, 폭력, 증오, 잔학, 등등의 부도덕과 범죄의 원인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옛날 왕들은 오늘날의 정부들과 같이 범죄를 형벌로 진압하려고 애썼다. 같은 니까야의 《꾸타단따경》({究羅檀頭經(구라단두경)}長阿含23)은 이것이 얼마나 무익한가를 설명한다. 이 방법으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대신에 부처는 범죄를 뿌리뽑기 위해선 민중의 경제적 형편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농업을 위해선 농부와 경작자에게 종자와 다른 시설들이 제공되어야 한다. 무역업자와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자본이 제공되어야 한다. 노동자에겐 충분한 임금이 지급되어야 한다. 이렇게 민중에게 충분한 수입을 벌어들이기 위한 기회가 제공된다면 만족하게 될 것이며, 불안감이나 고민을 갖지 않게 되어서 결과적으로 국가는 평화로워져서 범죄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Because of this, the Buddha told lay people how important it is to improve their economic condition. This does not mean that he approved of hoarding wealth with desire and attachment, which is against his fundamental teaching, nor did he approve of each and every way of earning one's livelihood. There are certain trades like the production and sale of armaments, which he condemns as evil means of livelihood, as we saw earlier.
이런 이유로 부처는 경제적 형편을 개선시켜주는 것이 평민들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했다. 이것이 욕망과 집착으로 재산을 긁어모으는 것을 용인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부처의 기본적인 가르침에 반대된다. 뿐만 아니라, 생계를 벌어들이는 것은 무엇이라도 허용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무기의 생산과 판매같이 부처가 사악한 생계수단이라고 비난한 돈벌이도 있다.
A man named Dighajānu once visited the Buddha and said: 'Venerable Sir, we are ordinary lay men, leading the family life with wife and children. Would the Blessed One teach us some doctrines which will be conductive to our happiness in this world and hereafter.'
한번은 디가자누라는 사람이 부처를 찾아와서 말했다. '선생님. 저희는 처자식과 더불어 가정생활을 꾸려 가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저희들의 행복에 도움이 될 만한 어떤 교리를 가르쳐 주십시오.'
The Buddha tells him that there are four things which are conductive to a man's happiness in this world: First: he should be skilled, efficient, earnest, and energetic in whatever profession he is engaged, and he should know it well (utthāna-sampadā); second: he should protect his income, which he has thus earned righteously, with the sweat of his brow (ārakkha-sampadā); (This refers to protecting wealth from thieves, etc. All these ideas should be considered against the background of the period.) third: he should have good friends (kalyāna-mitta) who are faithful, learned, virtuous, liberal and intelligent, who will help him along the right path away from evil; fourth: he should spend reasonably, in proportion to his income, neither too much nor too little, i.e., he should not hoard wealth avariciously, nor should he be extravagant- in other words he should live within his means (samajikatā).
부처는 그에게 세속적 삶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것이 네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어떤 직업에 종사하건 간에 기술이 좋아야하고, 유능해야 하며, 열심히 일해야 하고, 활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는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努力具足(노력구족). 둘째, 이마에 땀을 흘리고 정당하게 번 수입을 지켜야 한다[守護具足(수호구족). (이는 재산을 도둑 등으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암시하는 것이다. 이 모든 개념들은 시대적 배경과 대조하여 고려되어야 한다.) 셋째, 믿음직하고, 학식이 있으며, 덕망이 있고, 도량이 넓으며, 지적인 친구, 해악에서 떠난 바른길에 들도록 도와줄 친구, 그런 훌륭한 친구가 있어야 한다[善友(선우). 넷째, 수입을 알맞게 나누어서 너무 많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적지도 않게끔 써야 한다. 즉, 게걸스럽게 재산을 긁어모아도 않되지만 사치스럽게 살아도 안 된다. 다시 말해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等命(등명)].
Then the Buddha expounds the four virtues conducive to a layman's happiness hereafter: (I) Saddhā: he should have faith and confidence in moral, spiritual and intellectual values; (2) Sila: he should abstain from destroying and harming life, from stealing and cheating, from adultery, from falsehood, and from intoxicating drinks; (3) Cāga: he should practice charity, generosity, without attachment and craving for wealth; (4) Paňňā: he should develop wisdom which leads to the complete destruction of suffering, to the realization of Nirvāna.
그리고 나서 부처는 내세(來世)에서 평신도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네 가지 미덕을 설한다. ⑴"믿음": 도덕적, 정신적, 그리고 지적 가치들에 대해 믿음과 확신을 가져야 한다. ⑵"계율": 생명을 파괴하고 해를 입히는 것을 금해야 한다. 훔치고 사기치는 것, 간통하는 것, 거짓말하는 것, 그리고 취하는 음료를 금해야 한다. ⑶"베품": 자기 재산에 대한 집착과 열망을 버리고 자비와 너그러움을 길러야 한다. ⑷"지혜": 괴로움을 완전히 파괴하고 열반을 실현토록 이끌어주는 지혜를 개발하여야 한다.
Sometimes the Buddha even went into details about saving money and spending it, as, for instance, when he told the young man Sigāla that he should spend one fourth of his income on his daily expenses, invest half in his business and put aside one fourth for any emergency.
어떤 때는 부처가 돈을 저축하고 쓰는데 대해 세부적으로 가르친 일까지 있었다. 예를 들면 시갈라라는 젊은이에게 말할 때 수입의 사분의 일은 일상의 지출로, 반은 사업에 투자하고, 사분의 일은 어떤 위기에 대비하여 남겨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Once the Buddha told Ānāthapindika, the great banker, one of his most devoted lay disciples who founded for him the celebrated Jetavana monastery at Sāvatthi, that a layman, who leads an ordinary family life, has four kinds of happiness. The first happiness is to enjoy economic security or sufficient wealth acquired by just and righteous means (atthi-sukha); the second is spending that wealth liberally on himself, his family, his friends and relatives, and on meritorious deeds (bhoga-sukha); the third to be free from debts (anana-sukha); the fourth happiness is to love a faultless, and a pure life without committing evil in thought, word or deed (anavajja-sukha). It must be noted here that three of these kinds are economic, and that the Buddha finally reminded the banker that economic and material happiness is 'not worth one sixteenth part' of the happiness arising out of a faultless and good life.
한번은 부처가, 대부호이며 가장 헌신적인 평신도 제자의 한 사람이며, 유명한 사밧티[舍衛城(사위성)의 기원정사를 설립해준 아나타삔디까에게 평범하게 가정생활을 하는 재가자에겐 네 가지 행복이 있다고 말했다. 첫 번째 행복은 경제적 안정, 또는 충분한 재산을 정당하고 올바른 수단으로 벌어서 향유하는 것이다. 두 번째 행복은 재산을 너그럽게 자신과 가족과 친구와 친척 그리고 바른 일에 쓰는 일이다. 세 번째 행복은 빚이 없는 것, 네 번째 행복은 생각으로나 말로나 행동으로나 간에 해악을 저지르지 않고 오점없이 순수한 삶을 사는 것이다. 여기서 이들 중에 세 가지가 경제에 대한 것임과 더불어, 궁극적으로 부처는 경제적, 물질적, 행복은 더러움이 없고 훌륭한 생활에서 나오는 정신적 행복의 '16분의 1의 값어치도 없다'라고 그 부호에게 상기시킨 것에 주목해야 한다.
From the few examples given above, one could see that the Buddha considered economic welfare as requisite for human happiness, but that he did not recognize progress as real and true if it was only material, devoid of a spiritual and moral foundation. While encouraging material progress Buddhism always lays great stress on the development of the moral and spiritual character for a happy, peaceful and contented society.
위에 주어진 몇 가지 예에서 부처는 경제적 부를 인간의 행복에 필요한 것이라고 여겼지만, 오로지 물질적이기만 해서 정신적, 도덕적 근본이 결여된 것이라면 진정하고 진실된 발전이라 인정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불교는 물질적 발전을 고취시키면서도 사회가 행복하고 평화스럽고 만족되기 위한 윤리적 정신적 성격의 발전을 언제나 대단히 강조해 왔다.
The Buddha was just as clear on politics, on war and peace. It is too well known to be repeated here that Buddhism advocates and preaches non-violence and peace as its universal message, and does not approve of any kind of violence or destruction of life. According to Buddhism there is nothing that can be called a 'just war'- which is only a false term coiled and put into circulation to justify and excuse hatred, cruelty, violence and massacre. Who decided what is just or unjust? The mighty and the victorious are 'just', and the weak and the defeated are 'unjust'. Our war is always 'just', and your war is always 'unjust'. Buddhism does not accept this position.
부처는 정치에 대해, 전쟁과 평화에 대해 아주 명백하였다. 여기서 다시 반복하지만 불교가 비폭력과 평화를 보편적 메시지로 옹호하고 전파하고 있으며, 어떤 종류의 폭력도, 어떤 종류의 생명의 파괴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아주 잘 알려진 일이다. 불교에 의하면 '정당한 전쟁'이라 부를 만한 것은 없다. 그것은 증오, 잔학성, 폭력과 학살을 정당화시키고 변명하려 돈 찍듯 찍어내어 두루 유통시킨 거짓된 용어일 뿐이다. 누가 정당하고 부당한 것을 결정한단 말인가? 힘세고 승리한 쪽이 '정당'하고 약하고 패한 쪽이 '부당'할 따름이다. 우리의 전쟁은 항상 '정당'하고 너희의 전쟁은 언제나 '부당'하다. 불교는 이런 태도를 허락하지 않는다.
The Buddha not only taught non-violence and peace, but he even went to the field of battle itself and intervened personally, and prevented war, as in the case of the dispute between the Sākyas and the Koliyas, who were prepared to fight over the question of the waters of the Rohini. And his words once prevented King Ajātasattu from attacking the kingdom of the Vajjis.
부처는 비폭력과 평화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장에 가서 개인적으로 중재하여 전쟁을 막기도 하였다. 로히니 강의 용수(用水) 문제로 공격태세를 취했던, 사꺄(釋迦)족과 꼴리야족 간의 분쟁의 경우에 그러하였다. 그리고 한번은 아자따삿뚜왕이 밧지족의 왕국을 침공하는 것을 말로써 막았었다.
In the days of the Buddha, as today, there were rulers who governed their countries unjustly. People were oppressed and exploited, tortured and persecuted, excessive taxes were imposed and cruel punishments were inflicted. The Buddha was deeply moved by these inhumanities. The Dhammapadatthakathā records that he, therefore, directed his attention to the problem of good government. His views should be appreciated against the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background of his time. He had shown how a whole country could become corrupt, degenerate and unhappy when the heads of its government, that is the king, the ministers and administrative officers become corrupt and unjust. For a country to be happy it must have a just government. How this form of just government could be realized is explained by the Buddha in his teaching of the 'Ten Duties of the King' (dasa-rāji-dhamma), as given in the Jātaka text.
부처 당시에도 오늘날과 같이 부당하게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들이 있었다. 민중들은 억눌리고 착취당하고, 고문 받고, 학대당하였다.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고 잔인한 형벌로 괴롭혔다. 부처는 이 비인간적인 것들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부처가 훌륭한 정부라는 문제에 대해 주의를 기울였음을 《법구경》의 주석서에 기록하고 있다. 그의 견해들은 그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배경과 대비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부처는 정부의 우두머리, 즉 왕과 각료들 그리고 관리들이 부패하고 공정치 않으면 온 나라가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하고, 불행해지는가를 보여주었다. 한 나라가 행복하려면 올바른 정부를 가져야 한다. 이런 형태의 올바른 정부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는 부처가 《자따까》(本生經(본생경)의 "왕의 열 가지 의무"[十王法(십왕법)]라는 가르침에서 설명하고 있다.
Of course the term 'king' (Rāja) of old should be replaced today by the term 'Government'. The Ten Duties of the King', therefore, apply today to all those who constitute the government, such as the head of the state, ministers, political leaders, legislative and administrative, etc.
물론 옛날의 '왕(王)‘이란 용어는 오늘날 '정부'라는 용어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므로 "왕의 열 가지 의무"는 오늘날에 국가의 우두머리, 즉 각료들과 정치 지도자들, 입법부와 행정부의 공무원 등등같이 정부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The first of the 'Ten Duties of the King' is liberality, generosity, charity (dāna). The ruler should not craving and attachment to wealth and property, but should give it away for the welfare of the people.
"왕의 열 가지 의무"의 첫째는 후하게 아량을 베푸는 자선[布施(보시)]이다. 통치자는 부와 재산에 열망을 품거나 집착하여서는 안 되며, 민중의 복지를 위해 분배하여야 한다.
Second: A high moral character (sila). He should never destroy life, cheat, steal, and exploit other, commit adultery, utter, falsehood, and take intoxicating drinks. That is, he must at least observe the Five Precepts of the layman.
둘째: 지고한 도덕적 성품[持戒(지계)]. 왕은 생명을 파괴한다든가, 속이거나, 훔치거나, 남을 착취하거나, 간통을 범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취하는 음료를 마신다든가 하는 짓을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왕이 최소한 평신도의 "다섯 계율"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Third: Sacrificing everything for the good of the people (pariccāga), he must be prepared to give up all personal comfort, name and fame, and even his life, in the interest of the people.
셋째: 백성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희생하는 것이다. 왕은 백성이 좋아하는 것에 모든 개인적 안락과 명예와 명성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도 포기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Fourth: Honesty and integrity (ajjava). He must be free from fear or favour in the discharge of his duties, must be sincere in his intentions, and must not deceive the public.
넷째: 정직과 성실. 의무를 이행하는데 있어서 두려움이나 편애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의도가 솔직해야하며 대중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Fifth: Kindness and gentleness (maddava). He must posses a genial temperament.
다섯째: 친절과 온화함. 왕은 다정다감한 성품을 지녀야 한다.
Sixth: Austerity in habits (tapa). He must lead a simple life, and should not indulge in a life of luxury. He must have self-control.
여섯째: 생활습관에 있어서 엄격하기. 소박한 생활을 하여야하며, 사치스런 생활을 탐닉하지 말아야 한다. 왕은 자기 억제를 해야 한다.
Seventh: Freedom from hatred, ill-will, enmity (akkadha). He should bear no grudge against anybody.
일곱째: 증오, 악의, 적의로부터 벗어나기. 왕은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Eighth: Non-violence (avihimsā), which means not only that he should harm nobody, but also that he should try to promote peace by avoiding and preventing war, and everything which involves violence and destruction of life.
여덟째: 비폭력. 이것은 왕이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전쟁, 그리고 폭력과 생명을 파괴하는 것에 해당하는 모든 것을 피하고 막아서 평화를 증진하기에 노력해야함을 의미한다.
Ninth: Patience, forbearance, tolerance, understanding (khanti). He must be able to bear hardships, difficulties and insults without losing his temper.
아홉째: 인내, 견딤, 포용력, 이해심. 왕은 역경과 어려움 그리고 모욕을, 성품을 상하지 말고 참아낼 수 있어야 한다.
Tenth: Non-opposition, non-obstruction (avirodha), that is to say that he should not oppose the will of the people, should not obstruct any measures that are conductive to the welfare of the people. In other words he should rule in harmony with his people.
열째:〔백성의 뜻에〕반하지 않는 것, 가로막지 않는 것. 그것은 말하자면 백성의 뜻을 거스르지 않아야 되며, 백성의 복지에 도움이 되는 어떤 행위라도 가로막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왕은 백성과 화합하여서 다스려야 한다.
If a country is ruled by men endowed with such qualities, it is needless to say that that country must be happy. But this was not a Utopia, for there were kings in the past like Asoka of India who had established kingdoms based on these ideas.
어떤 나라가 그런 성품을 타고난 사람에 의해 다스려진다면 그 나라가 행복해질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 유토피아만은 아니었다. 과거에 이런 생각을 토대로 왕국을 세운 인도의 아쇼카같은 왕들이 있었다.
The world today lives in constant fear, suspicion, and tension. Science has produced weapons which are capable of unimaginable destruction. Brandishing these new instruments of death, great powers threaten and challenge one another, boasting shamelessly that one could cause more destruction and misery in the world than the other.
세계는 오늘날 지속적인 공포와 의혹 그리고 긴장 속에 살고 있다. 과학은 상상할 수도 없는 파괴력을 지닌 무기들을 양산해 내고 있다. 이 새로운 죽음의 도구를 휘둘러대면서 엄청난 힘으로 다른 여러 나라에게 협박을 가하고 도전하고 있다. 세상의 다른 나라보다 더 큰 파괴와 재앙을 일으킬 수 있다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떠벌리고 있다.
They have gone along this path of madness to such a point that now, if they take one more step forward in that direction, the result will be nothing but mutual annihilation along with the total destruction of humanity.
세계는 인간성을 깡그리 파괴시킨 가운데, 서로 박살내기에 불과한 이 미친 길을 가고 있다. 이제 그 방향으로 한 발짝만 더 나아간다면 인류 전체를 멸망시키는 지점에 서있다.
Human beings in fear of the situation they have themselves created, want to find a way out, and seek some kind of solution. But there is none except that held out by the Buddha – his message of non –violence and peace, of love and compassion, of tolerance and understanding, of truth and wisdom, of respect and regard of all life, of freedom from selfishness, hatred and violence.
인류는 자기네가 지어낸 처지에 두려워하며, 탈출구를 찾으려고 몇 가지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러나 부처가 전해준 것, 그 이외의 방법은 없다. 즉, 비폭력과 평화, 사랑과 자비, 너그러움과 이해, 진실과 지혜,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와 존경, 이기심과 증오와 폭력에서 벗어나라는 그의 메시지이다.
The Buddha says: 'Never by hatred is hatred appeased, but it is appeased by kindness. This is an eternal truth.'
부처는 말했다. '증오에 의해서는 증오가 가라앉지 않는다. 그것은 친절하여서 가라앉는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
'One should win anger through kindness wickedness through goodness, selfishness through charity and falsehood through truthfulness.'
'친절하여서 노여움을 이겨야 한다. 착하여서 못됨을, 자비로써 이기심을, 그리고 진실 되어서 거짓을 이겨야 한다.'
There can be no peace or happiness for man as long as he desires and thirsts after conquering and subjugating his neighbour. As the Buddha says: 'The victor breeds hatred, and the defeated lies down in misery. He who renounces both victory and defeat is happy and peaceful.' The only conquest that brings peace and happiness is self-conquest. 'One may conquer millions in battle, but he who conquers himself, only one, is the greatest of conquerors.'
이웃을 정복하고 짓밟으려 갈망하는 한, 사람에게 평화와 행복은 있을 수 없다. 부처가 말했듯이, '승리자는 미움을 길러내고, 패배자는 비참속에 빠진다. 승리와 패배, 모두를 포기하는 이는 행복하고 평화롭다.' 평화와 행복을 가져오는 유일한 정복은 자기를 정복하는 것이다. '전투에서 백만 명을 정복한 이 보다도, 오직 한 사람 자기를 정복한 이가 가장 위대한 정복자이다.'
You will say this is all very beautiful, noble and sublime, but impractical. It is practical to hate one another? To kill one another? To live in eternal fear and suspicion like wild animals in a jungle? Is this more practical and comfortable? Was hatred ever appeased by hatred? Was evil ever won over by evil? But there are examples, at least in individual cases, where hatred is appeased by love and kindness and evil won over by goodness. You will say that this may be true; practicable in individual cases, but that is never works in national and international affairs. People are hypnotized, psychologically puzzled, blinded and deceived by the political and propaganda usage of such term as 'national', 'international', or 'state'. What is a nation but a vast conglomeration of individuals? A nation or a state does not act; it is the individual who acts. What the individual thinks and does is what the nation or the state thinks and does. What is applicable to the individual is applicable to the nation or the state. If hatred can be appeased by love and kindness on the individual scale, surely it can be realized on the national and international scale too. Even in the case of a single person, to meet hatred with kindness one must be tremendous courage, boldness, faith and confidence in moral force. May it not be even more so with regard to international affairs? If by the expression 'not practical' you mean 'not easy', you are right. Definitely it is not easy. Yet it should be tried. You may say it is risky trying it. Surely it cannot be more risky than trying a nuclear war.
당신은 이들이 모두 아름답고 고상하고 숭고하지만, 비현실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증오하는 것이 현실적인가? 서로 죽이는 것이 현실적인가? 정글 속에 야수같이 그치지 않는 두려움과 의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현실적인가? 이것이 더 현실적이고 편안한 것인가? 증오가 증오에 의해서 진정되는 일이 있었던가? 해악으로 해악을 이긴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개인적인 경우일지라도 증오가 사랑과 친절로 진정되고, 착하여서 못됨을 이긴 예가 있다. 당신은 이것이 개인적인 경우에는 사실이고 현실인지 몰라도 국가적인 일, 국제적인 일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대중들은 최면술에 결려있다. '국가적'이니 '국제화'니 '국가'니 하는 정치적, 선전적 용어에 심리적으로 혼란되고, 눈멀었으며, 속고 있다. 한 나라가 개인들의 거대한 모임이 아니고 무엇이던가? 나라나 국가가 행위 하는 것은 아니다. 행위 하는 것은 개인이다. 개개인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결국 나라나 국가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된다. 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나라나 국가에도 적용될 수 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증오가 사랑과 친절로 누그러질 수 있다면 한 나라나 국제적인 차원에서도 분명히 실현될 수 있다. 한 개인의 경우에서도 증오를 친절로 대하려면 도덕적 힘에 있어서 엄청난 용기와 대담성 그리고 믿음과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 국제적인 일에 대해서는 그보다 더욱 그러해야 되지 않겠는가? 당신이 '비현실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옳다. 분명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노력해야만 한다. 당신은 그것이 위험한 시도라고 말할지 모르나 분명히 그것이 핵전쟁을 시도하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는 없다.
It is a consolation and inspiration to think today that at least there was one great ruler, well known in history, who had the courage, the confidence and the vision to apply this teaching of non-violence, peace and love to the administration of a vast empire, in both internal and external affairs - Asoka, the great Buddhist emperor of India (3rd century B.C.) -'the Beloved of the gods' as he was called.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그런 위대한 통치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는 것이 위안이 되며, 오늘날에 생각할 때 시사 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는 광대한 제국을 안팎으로 다스리는 데에 이 비폭력과 평화와 사랑의 가르침을 적용하려는 용기와 신념과 선견을 가졌었다. 그가 바로 "신들의 은총이 나린 이"라 불려지는 인도의 위대한 불교황제 아쇼카(기원전 3세기)이다.
At first he followed the example of his father (Bindusāra) and grandfather (Chandragupta), and wished to complete the conquest of the Indian peninsula. He invaded and conquered Kalinga, and annexed it. Many hundreds of thousands were killed, wounded, tortured and taken prisoner in this war. But later, when he became a Buddhist, he was completely changed and transformed by the Buddha's teachings. In one of his famous Edicts, inscribed on rock, (Rock Edict XIII, as it is now called), the original of which one may read even today, referring to the conquest of Kalinga, the Emperor publicly expresses his 'repentance', it was for him to think of that carnage. He publicly declared that he would never draw his sword again for any conquest, but that he 'wishes all living beings non-violence, self control, the practice of serenity and mildness. This, of course, is considered the chief conquest by the Beloved of the gods (i.e., Asoka), namely the conquest by piety (dhamma-vijaya).' Not only did he renounce war himself, he expressed his desire that 'my sons and grandsons will not think of a new conquest as worth achieving. .. let them think of that conquest only which is the conquest by piety. That is good for this world and the world beyond.'
처음에는 자기 할아버지(챤드라굽따)와 아버지(빈두사라)를 본받아 인도반도를 완전히 정복하려고 하였다. 그는 깔링가에 쳐들어가서 정복하고 깔링가를 복속시켰다. 이 전쟁에서 수십만이 죽고 다치고 불구가 되고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불제자가 되었을 때, 부처의 가르침으로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 바위에 새겨둔 그의 유명한 칙령중의 하나(현재 '비문칙령 13장'(Rock Edict XIII)이라고 부른다)를 오늘날에도 읽어볼 수 있는데, 거기에서 황제는 깔링가의 정복을 언급하며 자기의 '뉘우침'을 공표하고, 그 학살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통스럽기 그지없는지'를 말하였다. 그는 다시는 절대로 어떤 정복을 위해서도 칼을 뽑지 않겠으며,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폭력을 버리고, 자기를 제어하며, 청정함을 닦고, 온화하기를' 바랐다. 이는 물론 "신들의 은총이 나린 이"(즉, 아쇼카)가 이룩한 가장 중요한 정복이라고 여겨진다. 즉, 경건을 통해 정복한 것이다. 그는 전쟁을 자기 스스로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내 자손들이 새로운 정복을 성취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경건을 통해 정복하는 그런 정복만을 생각해야 될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유익한 것이다'라고 자기 희망을 표현하였다.
This is the only example in the history of mankind of a victorious conquerer at the zenith of his power, still possessing the strength to continue his territorial conquests, yet renouncing war and violence and turning to peace and non-violence.
이는 인류역사상 권력의 최 전성기에 있는 승리한 정복자가 여전히 영토의 정복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였으면서도 전쟁과 폭력을 포기하고 평화와 비폭력으로 돌아선 유일한 예이다.
Here is a lesson for the world today. The ruler of an empire publicly turned his back on wa
r and violence and embraced the message of peace and non-violence. There is no historical evidence to show that any neighbouring king took advantage of Asoka's piety to attack him militarily, or that there was any revolt or rebellion within his empire during his lifetime. On the contrary there was peace throughout the land, and even countries outside his empire seem to have accepted his benign leadership.
여기에 오늘날의 세계를 위한 교훈이 있다. 한 제국의 통치자가 전쟁과 폭력을 공식적으로 등지고 평화와 비폭력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어떤 이웃의 왕이 아쇼카의 경건함을 군사 공격을 하는데 유리점으로 삼았다던가, 그의 일생 동안 제국 안에서 어떤 반란이나 모반 사건이 있었다는 역사적 증거는 그 어느 것도 없다. 오히려 온 나라가 평화로웠고, 제국 밖의 다른 나라들도 그의 온화한 지도력을 받아들인 것 같다.
To talk of maintaining peace through the balance of power, or through the threat of nuclear deterrents, is foolish. The might of armaments can be produce fear, and not peace. It is impossible that there can be genuine and lasting peace through fear. Through fear can come only hatred, ill-will and hostility, suppressed perhaps, for the time being only, but ready to erupt and become violent at any moment. True and genuine peace can prevail only in an atmosphere of mettā, amity, free from fear, suspicion and danger.
힘의 균형이나 핵 억제력의 협박을 통해서 평화를 유지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무기의 힘은 공포를 낳을 수 있을 뿐이고 평화를 낳지 못한다. 공포를 통해서는 진정한 평화, 계속되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공포를 통해서는 오직 증오와 악의와 적개심만이 올 수 밖에 없다. 그 당시만은 억누를 수 있지만 폭발할 준비를 하는 것이고, 어느 순간에는 사나와지게 된다. 진실 되고 진정한 평화는 자비롭고, 우호적이며, 공포와 위험에서 벗어난 분위기에서만이 득세할 뿐이다.
Buddhism aims at creating a society where the ruinous struggle for power is renounced; where calm and peace prevail away from conquest and defeat; where the persecution of the innocent is vehemently denounced; where one who conquers oneself is more respected than those who conquer millions by military and economic welfare; where hatred is conquered by kindness, and evil by goodness, where enmity, jealousy, ill-will and greed do not infect men's minds; where compassion is the driving force of actions; where all, including and love; where life peace and harmony, in a world of material contentment, is directed towards the highest and noblest aim, the realization of the Ultimate Truth, Nirvāna.
불교는 파괴적인 권력 투쟁이 포기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정복과 패배를 떠나 고요함과 평화가 득세하는 사회, 죄 없는 사람이 박해받는 것을 맹렬히 비난하는 사회, 군사전쟁이나 경제전쟁으로 백만 인을 정복한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정복한 이를 더 존경하는 사회, 친절하여서 증오가 정복되며, 유익한 것으로 해로운 것을 정복하는 사회, 적의, 시기심, 악의, 그리고 탐욕이 사람의 마음을 오염시키지 않는 사회, 자비가 행위의 추진력인 사회, 미물까지 포함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공정하게, 사려 깊게 그리고 사랑으로 다루어지는 사회, 물질적으로 만족을 누리는 가운데 평화롭고 조화를 이룬 삶이 세상에서 가장 지고하고 거룩하기 그지없는 목표인 '궁극적 진리', 즉 열반의 깨달음을 지향하는 사회가 불교의 목표인 것이다.
첫댓글 _()()()_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