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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 우리는 말이야.
모든걸 잃어버린거야.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잃어버렸으니, 살아갈 희망조차 잃어버린거야.
너와 나. 그래서 우리는 모든걸 잃어버린거야.
.........................
12월 25일. 그 녀석을 보냈던 이래로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벌써, 고등학생 티는 벗어버리고 어엿한 성인이 되었지만 난 아줌마가 된 것만 같다.
칭얼거리는 애까지 달고 있고 시어머니 보다 더 심한 잔소리 쟁이인 우리 엄마까지.
..편의점 아르바이트 하는것도 이제 때려치워야 할 것 같다. 괜한 남자들만 전화번호
가르쳐 달라고 징징대며 달라붙어서 짜증만 난다. 사장님은 손님이 들어서 좋다지만,
여간 피곤한게 아니다. 고삐리 녀석들을 다 받아주고 있자니 속이 터진다. 터져.
“오늘은 더 섹시해 보이는데?”
“..던힐두개 캔맥주 두개. 맞아요?”
“에이-맞긴 맞는데, 여기 이것도 빼먹지 말아야지~”
“학생에게 담배와 맥주는 팔지 않으니까. 다른걸로 골라오세요.”
던힐 두개를 꺼내서 내 앞에 툭 하니 던지고 손에 들고 있던 캔맥주 마저
올려놓더니 하는말이 오늘은 더 섹시해?
게다가 날 가르키며 하는 말또한 가관이다. 빨간 머리에 피어싱을 여러개나 했는데
여간 꼴사납지가 않다. 저러는걸 쟤네 부모님도 아실까 몰라-
“담배랑 맥주는 다른데 가서도 살 수 있으니까 포기하는데,
넌 얼마면 되는데?..”
“용건 없으시면 그만 나가주세요. 뒷사람 기다려요.”
꼴사나운 빨간머리 뒤로는 식은땀 삐질삐질 흘리며 손님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다.
그것도 같은 학교 교복을 입은 남학생들로만..으휴, 또 소동이야. 소동.
내가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녀석은 내 생각을 실천으로 옮길려고 했는지
남학생들 주변으로 슬금슬금 다가간다. 표정을 보진 못했지만 대충 짐작은 간다.
마치 호랑이, 아니 성깔더러운 여우에게 당하는 토끼?..토끼정도로 해둬야 겠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죄송한거 알면 딴데가서 해결해라. 알았냐?”
“네!”
혹시나가 역시나. 당황한채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모두 제자리에 둔채
황급히 자리를 뜨는 남학생들. 남학생들이 가버리자 뒤에 있던 아저씨 마저도
맥주를 다시 제자리에 두고는 가게에서 나가버린다.
이 녀석때문에 오늘 매상 떨어지게 할 순 없지. 암 그렇고 말고.
“이제 됬지?”
“..얼마냐고 했지? 흠. 얼마가 좋을까?”
“큭, 난 걸레랑은 잘 안노는데 예쁘니까 봐줄께. 얼마면 되는데?”
“너 같은 찌질이 양아치 녀석이 평생 벌어도 벌 수 없을만큼의 재산.
난 그게 필요해. 하룻밤 즐기는 걸론 안되나? 그래야 이 편의점 알바 신세도
그만할거 아냐. 왜. 돈 없어?..”
의외라는 듯한 내 행동에 약간은 당황한 녀석. 그리고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하더니
무슨일이라도 저지를 듯한 표정이다. 편의점 안에는 그 녀석과 나 둘 뿐.
뭔가 불안해 지면서도 괜히 당당한 척 하는 내 모습. 푸우 뭐야.
이제 채니 유치원에서 올 시간인데..전화해봐야 할텐데, 어쩌지.
딸랑-
“어이~이게 누구신가. 깜찍한 귀염둥이 채은형 아니야?”
“큭, 이게 누구야. 반태율 꼬봉 유원이 아냐?”
“뭐, 이 새끼야!?”
“내 말이 틀려? 따라다니는 개새끼도 아니고, 뭐냐?”
이번엔 고등학생 두명 더 추가. 게다가 같은 학교 교복.
도대체 이학교는 어쩔려고 이런 애들 뿐인지. 빨리 내보낼 생각에
내가 말을 꺼내려는데 지들끼리 불붙어서 난리다. 특히 저 노란머리 애는
자기가 먼저 시비를 걸어놓고는 지가 더 흥분한다. 그리고 그 뒤에 까만머리는
그저 풍선껌만 푸우푸우 물어대면서 놀고 있다.
“이 새끼가, 난 너 귀엽다고 했는데 이새끼가 누구보고 꼬봉이래?”
“뭐?...또라이새끼.”
“태율아! 이 새끼봐봐. 저번처럼 한대 패줘 버려.”
“.....편의점 이잖아. 그냥 살거만 사고 나가자. 장사하는 사람도 생각해 줘야지.”
그래. 까만머리 말이 전적으로 옳았다. 하지만 그걸 그냥두고 볼리 없는 빨간머리.
휴우. 머리색깔로 부르려니 꼴사납다 정말. 무지개도 아니고 뭐야. 이게.
장사를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난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얼마나 흥미로운 싸움이길래 이러는지..싸움구경은 그냥 두고보는게 재밌는 법이니까.
앞치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쯤이면..채니가 집에 와 있을 텐데-
“..후움..여보세요.”
“채니야?..엄마야. 유치원 갔다 왔어?”
“응..갔다 왔어. 엄마 언제와?”
“흐음..엄마는 늦을꺼 같애. 잘 놀고 있을수 있지? 할머니도 계시니까.”
“응..엄마..채니 잠와.”
“그래. 이불 꼭 덥고 자. 알았지?”
“응. 엄마.”
전화를 끊고 나니 한층 기분도 편해지고 안심이 됬다.
그러더니 아까 그 까만머리가 손에 병같은걸 쥐고 내 앞으로 다가와 턱하고 올려놨다.
..이 녀석도 술이야? 이젠 아주 병채로?
난 병을 살짝 그 녀석 앞으로 밀며 말했다.
“19세 미만 학생에겐 술.담배. 판매하지 않습니다. 제자리로 갖다 놓으세요.”
“....얼만데..”
“못 알아 들으시나 본데, 팔지 않는다구요.”
“..돈 두배로 쳐줘?”
뭐 이딴 녀석이 다있어. 내 말은 송두리 채로 무시한채 무작정 계산을 할려고 한다.
누구 콩밥 먹는 꼴 볼려고 그래? 난 사랑스런 딸을 두고 그럴 순 없다고.
내 인내심에 한계가 언제 올진 모르지만, 다시한번 불쌍한 양 구제하는 샘 치고
잘 타일러 볼려고 했다. 적어도 그때 까지만 해도..
“학생. 19세 미만 청소년 에겐..”
“..까다롭게 굴지 말고 계산해줘.”
“팔지 않는다구요.”
“...씨발. 까다롭게 구네. 유원. 가자.”
맥주 몇병을 내 앞에 그대로 둔채 인상을 팍 쓰고는 나갈려고 하는 까만 머리.
덩달아 싸우고 있던 노란머리도 나갈려고 한다. 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어이가 없어서 정말.
“내 이름은 유원이 아니라. 원이! 자꾸 그렇게 부를래?”
“아무튼, 뜻만 통하면 되지. 가자. 존나 까다로워.”
“채은형! 너 다음에 보면 아주 작살을 내버릴줄 알아.”
“..병신새끼. 말빨좀 키워서 와라. 키를 더 키워서 오던지.”
노란머리와 까만머리는 가게에서 나가더니 가게 앞에서 서성거린다.
그리고 빨간머리는 계산대 앞까지 다가와 내 어깨를 꽈악 움켜쥔다.
뭐 하자는 행동인지 얼굴을 속눈썹이 서로 닿을 만큼 가까이 화악 들이댄다.
..밀어내기에는 그 녀석의 힘이 워낙 강해서 도저히 밀어낼 수가 없다.
“..뭐하자는 건데. 안 치워?”
“난 아무한테나 필 안꽂히는데, 넌 마음에 든다.”
“난 너같은 녀석은 마음에 안드니까, 그만 가 줄래?”
“어쩌지. 난 한번 꽂힌건 절대 안 놓는데..지금 까지 했던 건 다 지우고,
진심이야. 나랑 사귈래?”
요즘 애들은 다 이러나? 불량 청소년이라는 요새 문제에 절실히 동감한다.
이러다 사고 치는 거겠지. 띨빵한 여자애였으면 이 녀석 얼굴보고 넘어갔겠지.
고등학생 치곤 애띤얼굴도 아니고 잘생긴 축에 든다고나 할까?
아무튼, 난 고삐리는 취미 없어. 유부녀가 무슨..
“나도 진심인데, 너 정말 싫어.”
“..몇번을 봤다고 내가 싫데? 이래 뵈도 괜찮은 놈이야.”
“넌 날 몇번 봤다고 좋아한데? 뭘 안다고 사귀제?”
“...내 직감을 믿으니까.”
그런건 여자의 직감이나 하는 말 아닌가?
아무튼, 이 녀석이 잡고 있는 어깨 때문에 팔이 저려온다.
힘은 왜이리도 쎈지. 아마도 멍이 들었나 보다. 욱씬욱씬한게 파스라도 붙여야
할 것 같다. 그제서야 그걸 내가 아파하는 걸 알았는지 놓아주는 녀석.
그리곤, 아까는 볼 수 없었던 녀석의 정말 밝은 웃음을 봤다.
“들었을진 모르겠지만 채은형이다. 내일 또 올께. 생각 해봐.”
“.....뭐?”
그리곤 녀석은 밖으로 나가버렸다. 난 유부녀고 넌 학생이야.
어디서 많이 들어본거 같은데.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푸훗.
살다살다 정말 고삐리한테 고백까지 받아보긴 처음이다.
괜히 어정쩡 거리다가 사라지는 녀석들은 많이 봤어도..
황당한 녀석의 행동에 괜시리 웃음이 났다.
공부 하다 힘들어서 박카스 한병 사러오는 학생이 아닌
던힐에 캔맥주 찾는 녀석은 딱 질색이다. 그리고 게다가..고삐리.
길가다 교복만 봐도 괜시리 옛생각이 나서 머리가 깨질것 같다.
..황당해서 웃음도 나는데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든다.
에이 뭐, 채니한테 전화나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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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밌어요.소재가 특이하네요ㅎㅎ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