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히티의 화가 폴 고갱의 외할머니 플로라 트리스탕은 페루 출생으로 스페인 무적함대의 장교였던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1803년 사생아로 태어났다. 한반도에선 열한 살 먹은 순조의 등극으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그늘이 짙어질 무렵 프랑스에선 생시몽, 푸리에 등 공상적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미래는 여성의 것”이라고 우아하게 떠들었으나, 동시대를 맨몸으로 부딪치며 산 그녀는 “위선 혹은 비굴로 위장하지만 여성은 결국 종으로 태어난다”며 절박한 삶의 현장을 토로했다.
다섯 살 먹은 플로라의 부친이 죽자 상속권이 없는 모녀는 사회적 차별에 더해 경제적 곤란까지 사무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열여덟 먹은 딸을 어머니는, 그 애가 다니던 공장 사장에게 떠밀어 시집보냈다. 그 앤 두 아이 낳고 지긋지긋한 남편과 살기 싫다며 남미로 여행 가는 부잣집 가이드로 따라나섰지만, 여성은 이혼청구권이 없던 시절이었다. 술꾼에 노름꾼에 손찌검을 일삼던 남편은 ‘불손한’ 마누라 잡아온답시고 지 딸을 납치해 성폭행까지 범했어도 곧 석방되고, 놈의 갈겨대는 총질에 플로라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페루에서 손꼽히는 부자 귀족인 삼촌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받길 꿈꾸었으나, 사생아인 조카는 법적 권리가 없었다. 더욱이 “가장에게서 도망친 여자는 부랑자”일 뿐 사회에 발 디딜 곳이 없었다. 분노한 그녀는 후일 고갱의 엄마가 되는 딸에게 “세상과 맞서 싸워 더 이상 부랑자 취급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상속권은 인정받지 못했지만, 1년 남짓 페루에 체류하면서 기행문 연재하는 작가로 이름을 떨친 플로라 트리스탕은 ‘이주 여성’의 삶을 통해 이들이 부당한 대우와 협박을 받지 않도록 제재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역설한, 최초의 외국인 인권운동가이기도 했다. 법적 보호 장치가 없던 나폴레옹 시절, 여성 가장이던 그녀가 작성한 이혼청원서와 남성 중심의 평등권 및 시민법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등의 저술은 프랑스 양성평등 사상과 여성운동의 거름이 된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1840년 펴낸 <런던기행>은 산업혁명의 여명이 깃들던 영국, “부의 불평등한 분배가 빚어낸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과 노동자, 특히 여성과 어린이들이 겪는 착취 상황 및 성적 학대를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1842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노동조합>은 극렬 페미니스트 입장에서(!) 인민의 해방을 선언했던, <공산당 선언>보다 한발 앞선 ‘위험한 문건’이기도 했다.
1844년 총격으로 스러진 그녀의 장례식 이후 뒤를 잇는 후배들이 속출했으나 1848년 노동운동은 파국을 맞고, 역사에서 사라졌던 그녀의 이름은 폴 고갱이 죽은 뒤 그의 외할머니로 간신히 복원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배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다시 조명된 그녀의 발자취는 체 게바라의 빛나는 누님으로 특히 남아메리카 곳곳에서 상당한 숭앙을 받고 있다.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이 되자 사람들은 그것이 모든 인간에게 결코 타당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전혀 언급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자유, 평등, 박애의 이상을 되뇌었다. 하지만 그 이상에 '자매들'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남성 저자들은, 올림프 드 구주가 여성들에게도 똑같은 권리를 달라고 주장했다가 기요틴에서 생을 마쳐야 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다.
인권이란 여성철학자 하넬로레 슈뢰더가 아주 적절하게 말한 바와 같이, 남권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최초의 사회주의 강령 문건 [노동조합(Arbeiterunion, 1843년)]의 원저자 플로라 트리스탕도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의 이 문건은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나오기 5년 전에 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10판 이상이 나왔다.
첫댓글 아! 이분이었군요. 형님 감사합니다^^ 나의 로자...존경하는 로자 룩셈부르크 선생님을 비롯해서, 찾아보면 멋지고 치열한 삶을 사셨던...아름다운 누님들 꽤 계시더군요. 이분도 그런 누님들중 한분이신것 같네요.
로자 누님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누만... 모두들 묘지에 있는 줄 알고 참배를 가는데, 딴 사람의 시체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 많았는데, 이번에 창고에서 발견되었다나봐... 머리는 없고...
예. 알고 있습니다. 그거 지금 올리려구요^^
어느 시대에나...그시대의 사회구조와 이데올로기로 안에서 [진짜로] [가장] 억압받고 고통받으며 소외된 사람들은 가장 비참하고 외롭고 아픈삶을 살다 처참하게 죽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에게도 이해받기는 커녕, 동정 조차도 받지못하고...그런 아픔...저는 잘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