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연 기자의 인도 불교 성지순례] 12. 스라바스티 기원정사 천불화현으로 외도 항복 받은 교단 성장의 중심지 코살라 부호 수닷타가 보시 부처님 45번 하안거 가운데 24번 머무신 교단의 중심지 현전 경전 80% 설해지기도 바라문교도였던 파세나티왕 불교 귀의 후 아낌없는 지원 사위성 신변에 담긴 참 뜻은 중생 근기 맞춰 제도하려는 한없는 원력·자비심일 수도 ▲옛 코살라국의 수도였던 사왓티는 오늘날의 스라바스티다. 사왓티 성벽 유적 밖에는 코살라 최고의 부호였던 수닷타 장자가 승단에 기증한 기원정사터가 잘 보전돼 있다. 부처님은 이곳에서 24번의 안거를 보내셨고 수많은 경전을 설하셨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습니다.…’ 수많은 경전들이 이렇게 시작된다. 사위성(舍衛城), 산스크리트어로는 스라바스티다. 팔리어로는 사왓티며 부처님 당시의 도시이름이다. 당대의 강국이었던 코살라국의 수도이자 부처님께서 45번의 안거 중 24번을 머무신 곳이기도 하다. 특히 깨달음을 이루신지 21년이 되는 해 이후로 가장 많은 하안거를 사왓티의 제따와나 아난타핀디까라마(기수급고독원. 祇樹給孤獨園), 즉 기원정사에서 보내셨다. 자연스럽게 많은 법문들이 그곳에서 설해졌고 이를 기록한 많은 경전들이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실 때’로 시작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의 하나인 ‘금경경’을 비롯해 현전하는 경전의 80% 가량이 이곳 기원정사에서 설해졌다. 사왓티에는 기원정사 외에도 위사카가 기증한 동원정사 풉바라마, 코살라국의 파세나티왕이 기증한 라자까라마 등 부처님께 귀의한 왕과 장자들, 그리고 여인들의 헌신적인 외호가 수많은 유적으로 남아있다. 또 그들의 일화가 경전의 한 장면으로 전해지고 있다. 스라바스티는 룸비니에서 서쪽으로 약 120km, 현재 인도의 우타르프라데쉬주 마헤트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흙으로 만든 성벽과 네 개의 성문만이 남아 이곳이 강대했던 옛 왕국의 수도임을 말해주고 있다. 기원정사는 성 밖에 자리하고 있다. 인도 불교 성지 순례는 ‘벽돌 순례’라는 말이 있을 만큼 대다수 유적지에 허물어진 벽돌잔해만 남아있다. 기원정사 역시 웅장했던 옛 자태는 사라지고 지금은 벽돌로 쌓아 올린 건물의 기단부만 남아있다. 하지만 말끔히 정리된 유적의 질서정연한 구조와 광대한 넓이는 이 정사를 기증한 코살라왕국 최고의 부호 수닷타장자의 영향력과 신심의 깊이를 후세에까지 전해주고 있는 듯하다. 부처님 재세시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를 방문한 수닷타는 그곳에서 처음 부처님을 친견했다. 장사를 통해 이익을 남기는 일이라면 당대 최고의 반열이었던 수닷타는 부처님으로부터 이전까지의 그 어떤 거래에서도 얻지 못한 큰 이익을 얻었다. 행복으로 가는 길, 마음 가득 기쁨이 차오르는 가르침이었다. 부처님의 제자가 된 수닷타는 코살라국으로 돌아와 사왓티성 가까이에 부처님께서 머무실 정사를 짓기로 했다. 코살라국의 제타왕자가 소유한 동산이 최적지였다. 수닷타는 “동산을 황금으로 덮으면 그 넓이만큼을 황금과 바꾸겠다”는 제타왕자의 말에 지체 없이 황금을 실어 날라 동산을 덮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감동한 제타는 수닷타에게 동산을 팔고 받은 황금으로 정사 입구에 아름다운 문을 세웠다. 기원정사는 그렇게 탄생했다. 기원정사 입구는 각국에서 찾아온 성지순례객들로 제법 북적인다. 제타왕자가 세웠다는 문은 허름한 철제 출입문으로 바뀌었지만 수닷타가 한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웠다는 제타왕자의 동산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듯 한눈에 보아도 아름다운 곳임을 느끼게 한다. 다만 동산이라는 표현보다는 정원에 가깝게 보인다. 아마도 수닷타장자가 부처님과 승단이 머물기 편리하도록 대규모 불사를 벌였기 때문일 터다. 물론 이곳의 모습에 부처님 재세시 수닷타가 승단에 보시한 기원정사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를 것이다. 당시 수닷타는 동산 한 가운데에 부처님께서 머무실 전각 간다쿠티를 짓고, 그 주변으로 장로들이 기거할 방과 대중이 사용할 거처, 강당 등을 세웠다. 스님들이 목욕할 수 있는 연못에는 연꽃을 심고 포행할 수 있는 길도 만들었다. 시원한 물이 나오도록 샘을 파고 달콤한 열매를 맺을 과일나무들도 심었다. ▲ 기원정사를 순례하는 스리랑카 불자들. 중국 법현 스님과 현장 스님의 기록에 따르면 원래 간다쿠티는 7층에 달하는 목조건물이었으며 화재로 소실된 후 2층 벽돌 건물로 재건됐다고 한다. 그러나 7세기 법현 스님이 이곳을 순례할 당시 기원정사는 이미 폐허로 변해 있었다고 하니 근대에 이르기까지 꽤 오랜 세월 발길이 끊겼던 쓸쓸한 역사가 서려있다. 다행히 1863년 발굴된 이후 지속적인 발굴과 정비작업이 진행된 덕에 기원정사 유적에는 정갈함과 함께 품위가 깃들어 있다. 벽돌 하나, 나무 한그루에까지 기울인 수닷타장자의 정성어린 손길이 오늘날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하다. 특히 부처님께서 머무셨던 간다쿠티는 기원정사를 찾는 불자들이 반드시 예배하는 성지다. 간다쿠티는 수많은 신자들이 부처님을 친견하며 공양올린 전단향으로 언제나 향 내음이 그윽해 향실(香室)이라고도 불렸다. 혹은 부처님께서 마야부인에게 설법하기 위해 도리천에 머무시는 동안 부처님이 너무 그리웠던 코살라국의 파세나티왕이 전단향으로 부처님의 모습을 조성해 향실에 봉안해 놓고 예배했다고 해서 향실이라 불렸다는 설도 있다. 이제 불자들이 다시 향을 사르고 예배함으로써 향실이라는 옛 이름이 다시 법향을 전하고 있다. 성문 밖에 이처럼 넓고 잘 정비된 정사를 건립할 수 있었을 만큼 코살라는 강대국이었고 그 중심에 사왓티가 있었다. 사왓티에는 자연스럽게 여러 종교의 지도자들과 수행자들이 모여들었고 교세를 넓히기 위한 각 종교의 치열한 각축이 벌어졌다. 교세를 확장해가던 불교 역시 이곳에서 이교도들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다. ▲ 기원정사의 중심은 부처님께서 머무셨던 전각 간다쿠티다. 코살라의 파세나티왕이 이곳에 전단향으로 만든 부처님 형상을 봉안하고 예배해 향실로도 불린다. 경전에는 당시 교단의 우세를 판가름하는 기준의 하나가 신통력의 우열이었고 부처님 역시 놀라운 신통력을 보임으로써 외도(外道)들의 항복을 받으셨다고 전해진다. 사왓티에서 다른 교단의 수행자들과 부처님께서 신통력을 겨룬 이야기, 그것이 바로 유명한 ‘사위성의 신변(神變)’이다. 바라문교를 믿던 파세나티왕과 육사외도 앞에서 부처님께서는 몸에서 물과 불을 번갈아 내뿜으셨고 순식간에 수많은 부처님을 출현시키는 이적을 보이셨다. 유명한 쌍신변(雙神變)과 천불화현(千佛化現)의 기적이었다. 이 일화는 후일 수많은 불교미술의 모티브가 되었다. 특히 간다라 지역에서 출토된 조각상과 부조 등에서는 쌍신변과 천불화현의 이적을 보이시는 부처님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과연 이런 기적이 실제로 가능했을까. 그 보다는 이런 기적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경전에 기록된 이유를 생각해본다. 부처님께서 사왓티의 기원정사에 1250대중과 함께 계실 때 상주천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몇 가지의 신변(神變)으로 중생을 항복시킵니까?”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세 가지 신변으로 중생을 조복(調伏)시킨다. 첫째는 법을 설하는 것[說法]이요, 둘째는 가르치고 경계하는 것[敎誡]이며, 셋째는 신통(神通)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신통의 신변(神變)이라 하는가? 만일 교만한 중생을 항복시키기 위해서는 한 개의 몸이 여러 개의 몸이 되기도 하고, 여러 개의 몸이 한 개의 몸이 되기도 한다. 산과 절벽과 담을 마치 허공처럼 지나가기도 하고, 허공을 밟아서 가고 오는 것이 마치 새가 날아가는 것과 같이 하기도 한다. 장소에 따라 알맞게 나타내면서 중생을 항복시키는 것을 신통의 신변이라 한다.” (‘대보적경’ 제86권 대신변회) 중생을 향한 부처님의 가장 큰 자비는 법을 설하는 것이었다. 외도를 향한 가장 큰 무기 또한 법을 설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깨우치지 못한다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기준을 알려주신다. 하지만 말과 가르침이 통하지 않는다면 신통이 필요했다. 아니 신통으로 보였을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어리석은 중생이라도,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일일이 가르쳐 주어야할 정도로 무지한 중생이라도 부처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곳을 찾아 다니셨으리라. 그곳이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절벽 위든, 벼랑 아래든 마다 않고 찾아가셨으리라. 그리고 ‘장소에 따라 알맞게 나타내시며’ 법을 전하고 가르침을 주셨다. 어리석고 무지한 중생들에게 그런 부처님의 모습은 천불화현의 신통과 무엇이 달랐을까. 원력을 갖은 이의 한량없는 자비행이야 말로 ‘신통의 신변’ 그 자체로 보였을 것이다. 쌍신변과 천불화현의 기록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그러니 그것이 기적인지, 전설인지 아니면 후대인들의 찬탄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 기원정사에서 예불을 봉행하는 순례단. 왓티에서 부처님 가르침의 우월함이 입증되고 파세나티왕이 귀의하면서 교단은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에 이어 코살라국의 사왓티를 거점으로 급속히 성장해나갈 수 있었다. 라자그리하가 교화의 터전이었다면 사왓티는 불교가 오늘날까지 2500여 년의 세월 이어질 수 있도록 성장시킨 토양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기원정사가 있었다. 불교사에 영원히 남을 이름, 그 역사의 현장에서 모든 순례객들은 예불을 모신 후 순례단을 이끈 혜인 스님의 법문을 청해들었다. 그 옛날 부처님께서 1250승가에게 법을 전하시던 그날의 모습처럼.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습니다.…’ 수많은 경전들이 이렇게 시작된다. 사위성(舍衛城), 산스크리트어로는 스라바스티다. 팔리어로는 사왓티며 부처님 당시의 도시이름이다. 당대의 강국이었던 코살라국의 수도이자 부처님께서 45번의 안거 중 24번을 머무신 곳이기도 하다. 특히 깨달음을 이루신지 21년이 되는 해 이후로 가장 많은 하안거를 사왓티의 제따와나 아난타핀디까라마(기수급고독원. 祇樹給孤獨園), 즉 기원정사에서 보내셨다. 자연스럽게 많은 법문들이 그곳에서 설해졌고 이를 기록한 많은 경전들이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실 때’로 시작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의 하나인 ‘금경경’을 비롯해 현전하는 경전의 80% 가량이 이곳 기원정사에서 설해졌다. 사왓티에는 기원정사 외에도 위사카가 기증한 동원정사 풉바라마, 코살라국의 파세나티왕이 기증한 라자까라마 등 부처님께 귀의한 왕과 장자들, 그리고 여인들의 헌신적인 외호가 수많은 유적으로 남아있다. 또 그들의 일화가 경전의 한 장면으로 전해지고 있다. 스라바스티는 룸비니에서 서쪽으로 약 120km, 현재 인도의 우타르프라데쉬주 마헤트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흙으로 만든 성벽과 네 개의 성문만이 남아 이곳이 강대했던 옛 왕국의 수도임을 말해주고 있다. 기원정사는 성 밖에 자리하고 있다. 인도 불교 성지 순례는 ‘벽돌 순례’라는 말이 있을 만큼 대다수 유적지에 허물어진 벽돌잔해만 남아있다. 기원정사 역시 웅장했던 옛 자태는 사라지고 지금은 벽돌로 쌓아 올린 건물의 기단부만 남아있다. 하지만 말끔히 정리된 유적의 질서정연한 구조와 광대한 넓이는 이 정사를 기증한 코살라왕국 최고의 부호 수닷타장자의 영향력과 신심의 깊이를 후세에까지 전해주고 있는 듯하다. 부처님 재세시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를 방문한 수닷타는 그곳에서 처음 부처님을 친견했다. 장사를 통해 이익을 남기는 일이라면 당대 최고의 반열이었던 수닷타는 부처님으로부터 이전까지의 그 어떤 거래에서도 얻지 못한 큰 이익을 얻었다. 행복으로 가는 길, 마음 가득 기쁨이 차오르는 가르침이었다. 부처님의 제자가 된 수닷타는 코살라국으로 돌아와 사왓티성 가까이에 부처님께서 머무실 정사를 짓기로 했다. 코살라국의 제타왕자가 소유한 동산이 최적지였다. 수닷타는 “동산을 황금으로 덮으면 그 넓이만큼을 황금과 바꾸겠다”는 제타왕자의 말에 지체 없이 황금을 실어 날라 동산을 덮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감동한 제타는 수닷타에게 동산을 팔고 받은 황금으로 정사 입구에 아름다운 문을 세웠다. 기원정사는 그렇게 탄생했다. 기원정사 입구는 각국에서 찾아온 성지순례객들로 제법 북적인다. 제타왕자가 세웠다는 문은 허름한 철제 출입문으로 바뀌었지만 수닷타가 한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웠다는 제타왕자의 동산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듯 한눈에 보아도 아름다운 곳임을 느끼게 한다. 다만 동산이라는 표현보다는 정원에 가깝게 보인다. 아마도 수닷타장자가 부처님과 승단이 머물기 편리하도록 대규모 불사를 벌였기 때문일 터다. 물론 이곳의 모습에 부처님 재세시 수닷타가 승단에 보시한 기원정사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를 것이다. 당시 수닷타는 동산 한 가운데에 부처님께서 머무실 전각 간다쿠티를 짓고, 그 주변으로 장로들이 기거할 방과 대중이 사용할 거처, 강당 등을 세웠다. 스님들이 목욕할 수 있는 연못에는 연꽃을 심고 포행할 수 있는 길도 만들었다. 시원한 물이 나오도록 샘을 파고 달콤한 열매를 맺을 과일나무들도 심었다. ▲ 기원정사를 순례하는 스리랑카 불자들. 중국 법현 스님과 현장 스님의 기록에 따르면 원래 간다쿠티는 7층에 달하는 목조건물이었으며 화재로 소실된 후 2층 벽돌 건물로 재건됐다고 한다. 그러나 7세기 법현 스님이 이곳을 순례할 당시 기원정사는 이미 폐허로 변해 있었다고 하니 근대에 이르기까지 꽤 오랜 세월 발길이 끊겼던 쓸쓸한 역사가 서려있다. 다행히 1863년 발굴된 이후 지속적인 발굴과 정비작업이 진행된 덕에 기원정사 유적에는 정갈함과 함께 품위가 깃들어 있다. 벽돌 하나, 나무 한그루에까지 기울인 수닷타장자의 정성어린 손길이 오늘날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하다. 특히 부처님께서 머무셨던 간다쿠티는 기원정사를 찾는 불자들이 반드시 예배하는 성지다. 간다쿠티는 수많은 신자들이 부처님을 친견하며 공양올린 전단향으로 언제나 향 내음이 그윽해 향실(香室)이라고도 불렸다. 혹은 부처님께서 마야부인에게 설법하기 위해 도리천에 머무시는 동안 부처님이 너무 그리웠던 코살라국의 파세나티왕이 전단향으로 부처님의 모습을 조성해 향실에 봉안해 놓고 예배했다고 해서 향실이라 불렸다는 설도 있다. 이제 불자들이 다시 향을 사르고 예배함으로써 향실이라는 옛 이름이 다시 법향을 전하고 있다. 성문 밖에 이처럼 넓고 잘 정비된 정사를 건립할 수 있었을 만큼 코살라는 강대국이었고 그 중심에 사왓티가 있었다. 사왓티에는 자연스럽게 여러 종교의 지도자들과 수행자들이 모여들었고 교세를 넓히기 위한 각 종교의 치열한 각축이 벌어졌다. 교세를 확장해가던 불교 역시 이곳에서 이교도들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다. ▲ 기원정사의 중심은 부처님께서 머무셨던 전각 간다쿠티다. 코살라의 파세나티왕이 이곳에 전단향으로 만든 부처님 형상을 봉안하고 예배해 향실로도 불린다. 경전에는 당시 교단의 우세를 판가름하는 기준의 하나가 신통력의 우열이었고 부처님 역시 놀라운 신통력을 보임으로써 외도(外道)들의 항복을 받으셨다고 전해진다. 사왓티에서 다른 교단의 수행자들과 부처님께서 신통력을 겨룬 이야기, 그것이 바로 유명한 ‘사위성의 신변(神變)’이다. 바라문교를 믿던 파세나티왕과 육사외도 앞에서 부처님께서는 몸에서 물과 불을 번갈아 내뿜으셨고 순식간에 수많은 부처님을 출현시키는 이적을 보이셨다. 유명한 쌍신변(雙神變)과 천불화현(千佛化現)의 기적이었다. 이 일화는 후일 수많은 불교미술의 모티브가 되었다. 특히 간다라 지역에서 출토된 조각상과 부조 등에서는 쌍신변과 천불화현의 이적을 보이시는 부처님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과연 이런 기적이 실제로 가능했을까. 그 보다는 이런 기적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경전에 기록된 이유를 생각해본다. 부처님께서 사왓티의 기원정사에 1250대중과 함께 계실 때 상주천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몇 가지의 신변(神變)으로 중생을 항복시킵니까?”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세 가지 신변으로 중생을 조복(調伏)시킨다. 첫째는 법을 설하는 것[說法]이요, 둘째는 가르치고 경계하는 것[敎誡]이며, 셋째는 신통(神通)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신통의 신변(神變)이라 하는가? 만일 교만한 중생을 항복시키기 위해서는 한 개의 몸이 여러 개의 몸이 되기도 하고, 여러 개의 몸이 한 개의 몸이 되기도 한다. 산과 절벽과 담을 마치 허공처럼 지나가기도 하고, 허공을 밟아서 가고 오는 것이 마치 새가 날아가는 것과 같이 하기도 한다. 장소에 따라 알맞게 나타내면서 중생을 항복시키는 것을 신통의 신변이라 한다.” (‘대보적경’ 제86권 대신변회) 중생을 향한 부처님의 가장 큰 자비는 법을 설하는 것이었다. 외도를 향한 가장 큰 무기 또한 법을 설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깨우치지 못한다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기준을 알려주신다. 하지만 말과 가르침이 통하지 않는다면 신통이 필요했다. 아니 신통으로 보였을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어리석은 중생이라도,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일일이 가르쳐 주어야할 정도로 무지한 중생이라도 부처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곳을 찾아 다니셨으리라. 그곳이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절벽 위든, 벼랑 아래든 마다 않고 찾아가셨으리라. 그리고 ‘장소에 따라 알맞게 나타내시며’ 법을 전하고 가르침을 주셨다. 어리석고 무지한 중생들에게 그런 부처님의 모습은 천불화현의 신통과 무엇이 달랐을까. 원력을 갖은 이의 한량없는 자비행이야 말로 ‘신통의 신변’ 그 자체로 보였을 것이다. 쌍신변과 천불화현의 기록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그러니 그것이 기적인지, 전설인지 아니면 후대인들의 찬탄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 기원정사에서 예불을 봉행하는 순례단. 왓티에서 부처님 가르침의 우월함이 입증되고 파세나티왕이 귀의하면서 교단은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에 이어 코살라국의 사왓티를 거점으로 급속히 성장해나갈 수 있었다. 라자그리하가 교화의 터전이었다면 사왓티는 불교가 오늘날까지 2500여 년의 세월 이어질 수 있도록 성장시킨 토양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기원정사가 있었다. 불교사에 영원히 남을 이름, 그 역사의 현장에서 모든 순례객들은 예불을 모신 후 순례단을 이끈 혜인 스님의 법문을 청해들었다. 그 옛날 부처님께서 1250승가에게 법을 전하시던 그날의 모습처럼.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중국 법현 스님과 현장 스님의 기록에 따르면 원래 간다쿠티는 7층에 달하는 목조건물이었으며 화재로 소실된 후 2층 벽돌 건물로 재건됐다고 한다. 그러나 7세기 법현 스님이 이곳을 순례할 당시 기원정사는 이미 폐허로 변해 있었다고 하니 근대에 이르기까지 꽤 오랜 세월 발길이 끊겼던 쓸쓸한 역사가 서려있다. 다행히 1863년 발굴된 이후 지속적인 발굴과 정비작업이 진행된 덕에 기원정사 유적에는 정갈함과 함께 품위가 깃들어 있다. 벽돌 하나, 나무 한그루에까지 기울인 수닷타장자의 정성어린 손길이 오늘날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하다. 특히 부처님께서 머무셨던 간다쿠티는 기원정사를 찾는 불자들이 반드시 예배하는 성지다. 간다쿠티는 수많은 신자들이 부처님을 친견하며 공양올린 전단향으로 언제나 향 내음이 그윽해 향실(香室)이라고도 불렸다. 혹은 부처님께서 마야부인에게 설법하기 위해 도리천에 머무시는 동안 부처님이 너무 그리웠던 코살라국의 파세나티왕이 전단향으로 부처님의 모습을 조성해 향실에 봉안해 놓고 예배했다고 해서 향실이라 불렸다는 설도 있다. 이제 불자들이 다시 향을 사르고 예배함으로써 향실이라는 옛 이름이 다시 법향을 전하고 있다. 성문 밖에 이처럼 넓고 잘 정비된 정사를 건립할 수 있었을 만큼 코살라는 강대국이었고 그 중심에 사왓티가 있었다. 사왓티에는 자연스럽게 여러 종교의 지도자들과 수행자들이 모여들었고 교세를 넓히기 위한 각 종교의 치열한 각축이 벌어졌다. 교세를 확장해가던 불교 역시 이곳에서 이교도들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다. ▲ 기원정사의 중심은 부처님께서 머무셨던 전각 간다쿠티다. 코살라의 파세나티왕이 이곳에 전단향으로 만든 부처님 형상을 봉안하고 예배해 향실로도 불린다. 경전에는 당시 교단의 우세를 판가름하는 기준의 하나가 신통력의 우열이었고 부처님 역시 놀라운 신통력을 보임으로써 외도(外道)들의 항복을 받으셨다고 전해진다. 사왓티에서 다른 교단의 수행자들과 부처님께서 신통력을 겨룬 이야기, 그것이 바로 유명한 ‘사위성의 신변(神變)’이다. 바라문교를 믿던 파세나티왕과 육사외도 앞에서 부처님께서는 몸에서 물과 불을 번갈아 내뿜으셨고 순식간에 수많은 부처님을 출현시키는 이적을 보이셨다. 유명한 쌍신변(雙神變)과 천불화현(千佛化現)의 기적이었다. 이 일화는 후일 수많은 불교미술의 모티브가 되었다. 특히 간다라 지역에서 출토된 조각상과 부조 등에서는 쌍신변과 천불화현의 이적을 보이시는 부처님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과연 이런 기적이 실제로 가능했을까. 그 보다는 이런 기적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경전에 기록된 이유를 생각해본다. 부처님께서 사왓티의 기원정사에 1250대중과 함께 계실 때 상주천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몇 가지의 신변(神變)으로 중생을 항복시킵니까?”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세 가지 신변으로 중생을 조복(調伏)시킨다. 첫째는 법을 설하는 것[說法]이요, 둘째는 가르치고 경계하는 것[敎誡]이며, 셋째는 신통(神通)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신통의 신변(神變)이라 하는가? 만일 교만한 중생을 항복시키기 위해서는 한 개의 몸이 여러 개의 몸이 되기도 하고, 여러 개의 몸이 한 개의 몸이 되기도 한다. 산과 절벽과 담을 마치 허공처럼 지나가기도 하고, 허공을 밟아서 가고 오는 것이 마치 새가 날아가는 것과 같이 하기도 한다. 장소에 따라 알맞게 나타내면서 중생을 항복시키는 것을 신통의 신변이라 한다.” (‘대보적경’ 제86권 대신변회) 중생을 향한 부처님의 가장 큰 자비는 법을 설하는 것이었다. 외도를 향한 가장 큰 무기 또한 법을 설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깨우치지 못한다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기준을 알려주신다. 하지만 말과 가르침이 통하지 않는다면 신통이 필요했다. 아니 신통으로 보였을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어리석은 중생이라도,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일일이 가르쳐 주어야할 정도로 무지한 중생이라도 부처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곳을 찾아 다니셨으리라. 그곳이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절벽 위든, 벼랑 아래든 마다 않고 찾아가셨으리라. 그리고 ‘장소에 따라 알맞게 나타내시며’ 법을 전하고 가르침을 주셨다. 어리석고 무지한 중생들에게 그런 부처님의 모습은 천불화현의 신통과 무엇이 달랐을까. 원력을 갖은 이의 한량없는 자비행이야 말로 ‘신통의 신변’ 그 자체로 보였을 것이다. 쌍신변과 천불화현의 기록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그러니 그것이 기적인지, 전설인지 아니면 후대인들의 찬탄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 기원정사에서 예불을 봉행하는 순례단. 왓티에서 부처님 가르침의 우월함이 입증되고 파세나티왕이 귀의하면서 교단은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에 이어 코살라국의 사왓티를 거점으로 급속히 성장해나갈 수 있었다. 라자그리하가 교화의 터전이었다면 사왓티는 불교가 오늘날까지 2500여 년의 세월 이어질 수 있도록 성장시킨 토양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기원정사가 있었다. 불교사에 영원히 남을 이름, 그 역사의 현장에서 모든 순례객들은 예불을 모신 후 순례단을 이끈 혜인 스님의 법문을 청해들었다. 그 옛날 부처님께서 1250승가에게 법을 전하시던 그날의 모습처럼.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경전에는 당시 교단의 우세를 판가름하는 기준의 하나가 신통력의 우열이었고 부처님 역시 놀라운 신통력을 보임으로써 외도(外道)들의 항복을 받으셨다고 전해진다. 사왓티에서 다른 교단의 수행자들과 부처님께서 신통력을 겨룬 이야기, 그것이 바로 유명한 ‘사위성의 신변(神變)’이다. 바라문교를 믿던 파세나티왕과 육사외도 앞에서 부처님께서는 몸에서 물과 불을 번갈아 내뿜으셨고 순식간에 수많은 부처님을 출현시키는 이적을 보이셨다. 유명한 쌍신변(雙神變)과 천불화현(千佛化現)의 기적이었다. 이 일화는 후일 수많은 불교미술의 모티브가 되었다. 특히 간다라 지역에서 출토된 조각상과 부조 등에서는 쌍신변과 천불화현의 이적을 보이시는 부처님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과연 이런 기적이 실제로 가능했을까. 그 보다는 이런 기적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경전에 기록된 이유를 생각해본다. 부처님께서 사왓티의 기원정사에 1250대중과 함께 계실 때 상주천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몇 가지의 신변(神變)으로 중생을 항복시킵니까?”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세 가지 신변으로 중생을 조복(調伏)시킨다. 첫째는 법을 설하는 것[說法]이요, 둘째는 가르치고 경계하는 것[敎誡]이며, 셋째는 신통(神通)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신통의 신변(神變)이라 하는가? 만일 교만한 중생을 항복시키기 위해서는 한 개의 몸이 여러 개의 몸이 되기도 하고, 여러 개의 몸이 한 개의 몸이 되기도 한다. 산과 절벽과 담을 마치 허공처럼 지나가기도 하고, 허공을 밟아서 가고 오는 것이 마치 새가 날아가는 것과 같이 하기도 한다. 장소에 따라 알맞게 나타내면서 중생을 항복시키는 것을 신통의 신변이라 한다.” (‘대보적경’ 제86권 대신변회) 중생을 향한 부처님의 가장 큰 자비는 법을 설하는 것이었다. 외도를 향한 가장 큰 무기 또한 법을 설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깨우치지 못한다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기준을 알려주신다. 하지만 말과 가르침이 통하지 않는다면 신통이 필요했다. 아니 신통으로 보였을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어리석은 중생이라도,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일일이 가르쳐 주어야할 정도로 무지한 중생이라도 부처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곳을 찾아 다니셨으리라. 그곳이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절벽 위든, 벼랑 아래든 마다 않고 찾아가셨으리라. 그리고 ‘장소에 따라 알맞게 나타내시며’ 법을 전하고 가르침을 주셨다. 어리석고 무지한 중생들에게 그런 부처님의 모습은 천불화현의 신통과 무엇이 달랐을까. 원력을 갖은 이의 한량없는 자비행이야 말로 ‘신통의 신변’ 그 자체로 보였을 것이다. 쌍신변과 천불화현의 기록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그러니 그것이 기적인지, 전설인지 아니면 후대인들의 찬탄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 기원정사에서 예불을 봉행하는 순례단. 왓티에서 부처님 가르침의 우월함이 입증되고 파세나티왕이 귀의하면서 교단은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에 이어 코살라국의 사왓티를 거점으로 급속히 성장해나갈 수 있었다. 라자그리하가 교화의 터전이었다면 사왓티는 불교가 오늘날까지 2500여 년의 세월 이어질 수 있도록 성장시킨 토양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기원정사가 있었다. 불교사에 영원히 남을 이름, 그 역사의 현장에서 모든 순례객들은 예불을 모신 후 순례단을 이끈 혜인 스님의 법문을 청해들었다. 그 옛날 부처님께서 1250승가에게 법을 전하시던 그날의 모습처럼.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왓티에서 부처님 가르침의 우월함이 입증되고 파세나티왕이 귀의하면서 교단은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에 이어 코살라국의 사왓티를 거점으로 급속히 성장해나갈 수 있었다. 라자그리하가 교화의 터전이었다면 사왓티는 불교가 오늘날까지 2500여 년의 세월 이어질 수 있도록 성장시킨 토양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기원정사가 있었다. 불교사에 영원히 남을 이름, 그 역사의 현장에서 모든 순례객들은 예불을 모신 후 순례단을 이끈 혜인 스님의 법문을 청해들었다. 그 옛날 부처님께서 1250승가에게 법을 전하시던 그날의 모습처럼.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출처: 옥련암 원문보기 글쓴이: 갠지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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