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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지중해서 고대 이집트 도시
‘메노우티프’와 ‘헤라클레이온’ 발견
고대 도시 `헤라클레이온`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시에서 6km 떨어진 해저에서 발견됐다. 당시의 저택과 사원, 항만, 조각상 등이 원형대로 본존돼 있었다.
그리스 고전 문헌을 통해서만 알려졌던 고대 도시 메노우티프와 헤라클레이온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시에서 약 6km 떨어진 해저에서 발견했다고 프랑스-이집트 합동 발굴단이 2000년 6월 3일 발표했다. 이번 발견은 역사적 가치와 보존 상태 등에서 이집트 투탕카멘왕릉에 비견되는 고고학적 대발견으로 평가받고 있다.
발굴 책임자 프랑크 고디오는 이날 검은 화강암으로 된, 높이 15m의 이시스 여신상을 공개했다. 그는 2년에 걸친 탐사 끝에 아부퀴르만 해저에서 1500여년 전 발생한 지진 또는 홍수로 수몰된 고대 도시 유적을 발견했으며, 당시의 화려한 생활상을 보여주는 저택, 사원, 항만, 조각상 등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돼 있다고 밝혔다.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 사이인 파라오 시대 말기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고대 도시는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되기 전까지, 고대 그리스와 지중해 여러 도시와의 무역을 통한 번영과 이시스 여신-헤라클레스 등을 모신 화려한 사원으로 유명했던 곳이었다.
기원전 450년 이집트를 방문했던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당시 화려했던 헤라클레이온의 생활상과 헤라클레스에게 봉헌된 사원 등에 대해 기술했으며, 그리스 비극과 각종 여행담에도 이들 도시의 이름이 나오고 있지만 약 1500년 간 그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었다. 유물 중에는 기원전 7세기인 제26대 파라오 시대의 스핑크스 상, 이집트·그리스 시대 조각의 머리 부분도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2015년 애국지사 최도균 선생 별세
▶2010년 유창순 전 국무총리 별세
▶2008년 과테말라시에서 송민순 외교
통상부장관과 게르트 로젠탈 안드라데
파야(Gert ROSENTHAL Andrade
Falla) 과테말라 외무장관 간에 서명된
“대한민국 정부와 과테말라공화국 정부
간의 대외경제협력기금 차관에 관한약정
(교육정보화사업)”이, 양국이 발효에
필요한 국내절차가 완료되었음을 상호
통보한 날인 2008년 6월 3일에 발효
▶2008년 버락 오바마 미국 상원의원.
민주당 대선 후보 확정(사상 첫 흑인
대통령 후보).
▶2009년 원로배우 도금봉씨 별세
1950~60년대 은막을 풍미한 여배우 도금봉(79·본명 정옥순)씨가 2009년 6월 3일 노환으로 서울 광진구 구의동의 한 복지시설에서 타계했다. 1933년 인천에서 태어난 도씨는 악극단 ’창공’에서 ’지일화’라는 예명으로 이름을 떨치다 1957년 ’황진이’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조긍하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에서 고인은 요부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 세간의 화제가 되면서 ’세기의 요우(妖優)’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예명 도금봉은 영화계 데뷔 당시 황진이가 살았던 개성의 옛 이름인 송도의 도(都), 황진이가 즐긴 가야금의 금(琴), 그리고 영화계의 봉우리가 되라는 뜻의 봉(峰)을 한자씩 따 지은 것이다.
또 한국 최초의 공포영화라는 평도 받는 이용민 감독의 1965년작 ’살인마’에서 악녀 역할을 했고 이후 악녀 이미지가 추가됐다. 이듬해 ’목없는 미녀’, ’월하의 공동묘지’(1967), ’백골령의 마검’(1969) 등 공포 영화에 잇따라 출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육체파 배우라는 세간의 이미지와는 달리 ’유관순’(1959) 등의 역할도 소화, 영화배우 활동 초기부터 연기파 배우로서의 면모를 보였고 1960-1970년대에는 정상급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도씨는 ’새댁’으로 제2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1963), ’작은 꿈이 꽃필 때’로 제11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조연상(1972), ’토지’로 제13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조연상(1974) 등을 수상했다. 특히 김지미, 엄앵란, 최은희 씨 등과 함께 활동한 60년대에는 주로 조연을 맡으면서도 넘치는 카리스마로 주연 못지않은 조연이라는 평을 들으며 주목받았다.
’황진이’이후 50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1980년대까지 TV 드라마에서 활동하다 1997년 전당포 노파로 분한 박찬욱 감독의 ’삼인조’를 끝으로 40년간의 배우 생활을 마감했다.
은퇴 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복집을 운영하며 두 아들과 평탄하게 살았으나 10여년전 사업을 정리한 뒤에는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지난 3일 서울 건국대병원에서 타계했지만 ’세상에 알리지 말라’는 고인의 유언으로 별세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2005년 2006 독일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한국 대 우즈베키스탄 경기
▶2005년 이미나 선수, LPGA투어
HSBC 여자월드 매치플레이챔피언십
에서 준우승
▶2004년 제2차 남북 장성급 군사
회담이 설악산에서 열림ㅡ
▶2001년 영화배우 앤서니 퀸 사망
영화 ‘희랍인 조르바’와 ‘길’의 명배우 앤서니 퀸이 2001년 6월 3일 미국 보스턴의 한 병원에서 호흡 곤란으로 별세했다. 86세였다. 그는 60년이 넘는 기간을 스크린에서 활약하며 ‘노틀담의 곱추’ ‘아라비아의 로렌스’ ‘25시’를 포함해 150여편이나 되는 출연작을 남겼다.
퀸은 1915년 멕시코에서 태어났다. 미국으로 이주해 ‘가출옥’(1936)으로 데뷔한 그는 오랜 무명생활 끝에 ‘혁명아 자파타’(1951)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따내면서 주목받았다. 이어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1954)에서 생존 에너지로만 똘똘 뭉친 듯한 차력사 역을 맡아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늘 거친 남성적 캐릭터들을 연기했지만, 실제 삶에선 화려한 여성편력을 과시했다. 1937년 세실 드밀 감독의 딸 캐서린과 첫 결혼을 했지만 리타 헤이워스를 비롯한 숱한 여배우들과 밀애를 나눴다. 1957년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렸지만 1993년 퀸이 비서와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는 바람에 1997년 파경을 맞았다. 퀸의 자녀들은 81세의 나이에 낳아 화제가 된 마지막 아이를 포함해 13명에 달했다. 퀸은 말년에 오랜 꿈이었던 화가와 조각가로서의 삶에 더 집중했다.
▶2001년 페루 첫 원주민 대통령 출생.
▶2000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밀러교수 사망.
▶2000년 미국-러시아,
플루토늄 34t씩 폐기합의.
▶2000년 지중해서 기원전 7~6C 이집트 도시 `메노우티프`와 `헤라클레이온` 발견
▶1998년 독일 고속열차 탈선으로 100명 사망
독일 뮌헨을 출발, 시속 2백km로 함부르크를 향해 달리던 ICE(도시간 고속철) 열차가 1998년 6월 3일 오전 11시 하노버 북쪽 50km 지점에서 철로에 뛰어든 승용차와 충돌하면서 탈선, 최소한 1백명이 사망하고 2백여명이 부상했다.
사고는 함부르크 남쪽 1백km지점인 에쉐데 역 부근을 지나던 고속열차가 고가도로에서 추락한 것으로 보이는 승용차와 충돌하면서 앞부분 4개 차량이 철로를 벗어나 도로 교각을 들이받아 일어났으며, 열차 객실 13량이 부서졌다.
이 충돌로 철로와 교차하는 도로 교각과 상판이 무너져 객실 2량을 덮쳤다. 사고열차는 최고시속이 2백80km로, 정원 7백59명에 승객과 승무원을 포함, 3백여명이 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 원인은 선로이상과 바퀴파손 등으로 밝혀졌다.
▶1995년 세계최초 컴퓨터 `에니악`을
개발한 프레스터 에커트 사망
▶1992년 유엔환경개발회의
리우회담 개최
경제개발로 악화되고 있는 지구 생태계
보호를 위해 세계 각국의 민간단체
(NGO)와 정부 관계자들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모여 회의를 가졌다.
▶1991년 정원식 총리 폭행사건
▶1989년 이란 지도자 호메이니 사망
지난 1979년 회교혁명 이후 신정체제를 굳혀온 이란의 최고지도자 아야툴라 루훌라 호메이니옹이 1989년 6월 3일 테헤란병원에서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02년 수도 테헤란 남쪽 오아시스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6세 때 이미 코란을 암송할 정도였고 19세때 시아파 중심지인 콤시에서 성직자가 되었다. 1963년 팔레비 국왕에게 공개적으로 죽음을 경고하는 투쟁을 벌이다 추방되었으나, 1978년 7월 계엄령속에 시민 수천명이 군대에 의해 학살당한 ‘검은 금요일’ 이후 혁명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팔레비 독재왕정을 무너뜨리고 최고권자에 오른 호메이니는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속에 도덕적 회교 원리주의국가를 실현시키고자 노력해왔으나 이란-이라크전 때문에 대부분의 집권기간을 전쟁속에 보내야만 했다. 이러한 그의 삶을 뒤로하고 오늘날 세계는 그를 회교정신을 부흥시킨 탁월한 종교-정치적 지도자로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의 기존질서를 위협한 인물로서 엇갈린 평가를 하고 있다.
▶1978년 방글라데시 대통령 라만 당선
▶1975년 도피성이민 우려있는 명사
84명 출국규제
▶1973년 소련 초음속항공기(TU144) 파리에 추락
지난 1979년 회교혁명 이후 신정체제를 굳혀온 이란의 최고지도자 아야툴라 루훌라 호메이니옹이 1989년 6월 3일 테헤란병원에서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02년 수도 테헤란 남쪽 오아시스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6세 때 이미 코란을 암송할 정도였고 19세때 시아파 중심지인 콤시에서 성직자가 되었다. 1963년 팔레비 국왕에게 공개적으로 죽음을 경고하는 투쟁을 벌이다 추방되었으나, 1978년 7월 계엄령속에 시민 수천명이 군대에 의해 학살당한 ‘검은 금요일’ 이후 혁명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팔레비 독재왕정을 무너뜨리고 최고권자에 오른 호메이니는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속에 도덕적 회교 원리주의국가를 실현시키고자 노력해왔으나 이란-이라크전 때문에 대부분의 집권기간을 전쟁속에 보내야만 했다. 이러한 그의 삶을 뒤로하고 오늘날 세계는 그를 회교정신을 부흥시킨 탁월한 종교-정치적 지도자로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의 기존질서를 위협한 인물로서 엇갈린 평가를 하고 있다.
▶1972년 서독 폴란드 수교
▶1971년 김종필 제11대 국무총리 취임
▶1969년 호남 정유공장 준공
▶1965년 미국 제미니4호 발사. 애드화이트 소령 미국 최초로 21분간 우주유영
미국인 최초로 우주에서 유영하고 있는 화이트 소령.
미국의 2인용 유인위성 `제미니4호`가 1965년 6월 3일 발사돼 우주비행사 에드워드 화이트 소령이 미국 최초로 21분간의 우주유영에 성공했다. 소련의 레오노프 소령보다 3개월 늦은 것이었다.
화이트는 우주선과 함께 시속 2만9천Km로 지구를 선회했다. 당시 우주의 아름다운 광경에 매료된 화이트는 우주선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에 "내 일생에서 가장 슬픈 순간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후 화이트는 1967년 1월 26일 아폴로1호 발사시험에 참가했다 화재사고로 사망했다.
▶1964년 학생시위 격화-계엄령 선포
5·16군사혁명 후 2년7개월 만에 권좌에 오른 박정희 대통령이 첫 대규모 난관에 봉착했다. 한·일 간 국교수립을 서둘렀던 것이 화근이었다. 구악 근절을 내세우면서 신악을 양산한 것도 반발을 부채질했다. 야당을 중심으로 `범국민투쟁위원회`가 결성되고 전국의 대학생들이 매국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면서 정국은 혼미 속으로 빠져들었다.
비상계엄을 부른 6.3 시위장면.
1964년 3월 24일, 서울대 문리대생 500여명이 거리로 진출한 것을 신호탄으로 각 대학 학생들도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때부터 6월 3일까지 대학가와 거리는 최루탄 연기와 곤봉, 널브러진 돌덩이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정부는 유화적인 태도로 사태확산을 막아보려 했지만 학생들이 단식농성 등 강도를 점차 높여나가자 강경책으로 선회했다.
6월 3일 시위가 절정을 이룬 이날, 국회의사당에서 청와대에 이르는 길은 수만명의 학생들과 경찰들로 뒤덮였다. 사태가 4·19를 방불케 하자 정부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후 9시40분, 마침내 오후 8시를 기점으로 한 계엄령이 서울시 전역에 선포됐다. 계엄은 55일 뒤에 해제됐지만 1120명이 검거되고 348명이 구속됐다. 이때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던 세대를 학생운동사에선 `6·3세대`라고 부른다.
▶1963년 로마 교황 요한23세 서거
▶1963년 시인 오상순 사망
▶1962년 프랑스 여객기 파리공항 추락
1백30여명 사망
▶1961년 미국, 소련 비엔나에서 회담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가 1961년 6월 3일 비엔나에서 역사적인 냉전회담을 시작했다. 케네디 대통령과 흐루시초프 수상은 비엔나에 이틀간의 정상회담에서 여러 국제적인 현안에 합의하지 못했으나 양국은 적어도 대화를 재개했다. 대화재개 자체가 지난 1960년 5월 흐루시초프가 U2기 사건으로 결렬시킨 파리 정상회담에 비하면 성공적었다.
케네디와 흐루시초프는 베를린의 미래와 위상에 관해 첨예한 의견 대립을 보였다. 소련은 동베를린의 통제를 동독 당국에 넘겨주겠다고 위협해 왔고, 미국은 서베를린에 대한 소련 간섭의 결과에 대해 경고했다. 양 지도자는 라오스의 주권에 관해 제한된 합의에 도달했다. 라오스 정권은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는 공산 게릴라에 의해 위협받아 왔다.
▶1959년 싱가포르,
영연방자치국 독립선언
1959년 6월 3일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은 싱가포르가 새 헌법의 공포와 함께 영국의 자치령이 됨으로써 140년간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났다.
140년 전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조호르 영주에게 불과 얼마되지 않는 비용 만을 지불하고 싱가포르를 사들였다. 당시에는 무인도로 가치가 없던 때였다. 이후 싱가포르는 영국의 식민지로 자유·중계 무역항이 되었으며, 말레이반도를 비롯하여 인근 여러 나라와 유럽 무역의 중심이 되었다.
1921년에는 영국군의 군사기지가 설치되어 군사·경제적으로 영국 식민지배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잠시 일본군에 점령당하기도 했으나, 종전 후 다시 영국 식민지가 됐다. 그후 反식민지운동이 활발해지기 시작, 결국 이날 영연방 자치국으로 독립했다.
▶1957년 미국 중동조약기구
(METO)에 가입
▶1957년 흐루시초프,
신스탈린파 말렌코프, 몰로토프 등 숙청
▶1955년 프랑스 보호령
튀니지에 자치권 부여 협정 조인
▶1955년 미국-이스라엘
원자력쌍무협정에 조인
▶1950년 프랑스 등반대, 안나푸르나
최초등정(리더 모리스 에르조그)
▶1949년 국회,
전국무위원 인책사임안 가결
▶1948년 파라과이 쿠데타 발생
▶1948년 미국, 캘리포니아 팔로마산
천문대 개소식, 200인치 망원경 설치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안 발표
1947년 6월 3일, 영국의 루이스 마운트배튼 인도 총독이 영국령 인도를 힌두교 지역과 무슬림 지역으로 나눠 각각 제헌의회를 세운다는 분리독립안을 발표했다.
힌두교의 국민회의파를 중심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던 독립일정이 차질을 빚은 것은 무슬림연맹이 분리독립을 요구하면서였다. 영국은 내전과 분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국민회의파도 종교갈등과 이로 인한 살육행위를 마냥 모른 체할 수 만은 없었다. 간디는 “인도를 생체해부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8월 15일, 마침내 인도와 파키스탄 2개 국가가 분리독립됐지만 이 과정에서 또 대규모 학살이 자행됐다. 힌두교도와 시크교도가 파키스탄으로부터, 이슬람교도가 인도로부터 쫓겨나면서 140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고 100만명이 살해된 것이다. 분리 후에도 양국은 경계지역인 카슈미르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3차례나 전쟁을 치렀지만 긴장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국민회의파의 네루(왼쪽)와 신임 인도 총독 마운트배튼(가운데) 그리고 무슬림 동맹의 진나가 인도독립에 관해 협의를 하고 있다.
▶1947년 군정청,
산하 기구를 남조선 과도정부로 개칭
▶1946년 이승만,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시사하는 `정읍 발언` 연설
1946년 6월 3일 이승만 박사가 전북 정읍에서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 해방정국에서 국제정세에 가장 밝았던 현실주의 정치가 이승만은 이미 북한의 소비에트 권력체제가 현실적으로 깊숙이 진전되어 있다고 판단. 아무 뚜렷한 전망도 없는 미소공동위나 좌우합작위에 더이상 남한의 정권수립을 무작정 맡겨둘 수 없다고 보고 이같은 연설을 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정읍발언`의 배경이다.
이승만의 연설은 미국정부와 국내 중도적 온건파 등을 당황하게 했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민족단합을 통한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을 원했고, 미국은 소련과 합의한 `모스크바 의정서`에 따라 미소협조에 기초해 한반도에서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성사시켜 남북을 통틀어 조선임시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진행해 왔기 때문이었다. 미소공동위나 좌우합작운동도 이 목적을 위해서였다.
이승만은 미국의 이러한 정책을 맹렬히 공격했다. 소련의 침략적 팽창주의의 본질을 모르는 유화주의자들이 한반도정책을 오도하고 있으며 미국의 구상대로 일을 추진하다가는 결국 남한마저 소련에 의해 공산화될 것이라고 정읍발언에서 경고한 것이다.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불가피론은 도쿄에 자리잡고 있는 태평양지역연합군최고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의 도움으로 1946년 12월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조야를 상대로 설득전을 폈다. 그의 설득전은 시의적절했다. 미국은 마침내 1947년 봄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소련에 대한 종전의 유화정책을 버리고 소련의 팽창주의정책과 세계적화전략에 과감히 맞설 것임을 다짐했다.
▶1946년 이범석 장군 및
광복군 5백여명 귀국
▶1943년 알제리에서 드골지휘하에
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 결성
▶1936년 총독부 발행 조선민력에
음력이 폐지됨. 양력 발행을 결정
▶1936년 이디오피아 황제 영국에 망명
▶1929년 스위스의 세균학자 아르버
출생 - 1978년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
▶1929년 칠레.페루 국경분쟁 해결,
미국중재
▶1924년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 사망
20세기 문학사의 한 축을 이룬 체코 출신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가 1924년 6월 3일 빈 교외의 킬링 요양원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41세였다. 프라하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프라하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나 이즈음 시작된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본격적인 습작에 들어갔다. 1906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08년부터는 노동자재해보험국에서 14년 동안 근무했다.
독일어와 체코어가 함께 사용되던 프라하에서 그는 독일어로 작품을 썼다. 그의 문장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간결하지만 독일어 산문 문학 중 가장 명료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간의 부조리와 인간존재의 불안 등을 날카롭게 통찰해 현대 인간의 실존적 체험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표현한 그의 작품들은 사르트르와 카뮈에 의해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았다. 소련 공산당은 ‘절망과 불안을 조장하는 부르조아 퇴폐 반동 작가’ 라는 이유를 들어 그의 작품을 오랫동안 금기시했으나 1964년 해금됐다. 그의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성(城)’ 과 미완성 장편소설 ‘심판(審判)’ 등이 있다.
▶1921년 소설가 유주현 출생
▶1917년 알바니아 독립 선언
▶1916년 미국, 국가방위법 제정
▶1915년 파리서 제1회 연합국전쟁
경제회의개최, 경제적공동체제수립 결정
▶1911년 사찰령 공포
▶1905년 국어학자 일사 방종현 출생
▶1902년 산돌 손양원 목사 출생
▶ 1899년 오스트리아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2세) 사망 -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 1895년 청, 일본에 대만과 팽호도 할양
▶ 1894년 동학난 진압위해 청에 파병 요청. 이홍장 파병
▶ 1875년 가극 작곡가 조르주 비제 사망 - 카르멘
▶ 1786년 추사 김정희 출생
실사구시 정신으로 이룩해 낸 학문과 예술혼, 추사 김정희
한국사에서 19세기 최고의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김정희는 추사체라는 고유명사로 불리는 최고의 글씨는 물론이고 세한도로 대표되는 그림과 시와 산문에 이르기까지 학자로서, 또는 예술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다. 금석학 연구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남겼으며 전각(篆刻) 또한 최고의 기술을 가져 천재 예술가로서 그의 이름을 능가할 인물은 거의 없다고 평가받고 있다.
불우한 어린 시절, 하늘이 내린 자질
김정희는 1786년(정조 10)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어릴 적 이름은 원춘(元春)이다. 김정희만큼 호가 많은 인물이 또 있을까.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추사(秋史)와 완당(阮堂) 외에도 승설도인(勝雪道人), 노과(老果), 천축고(天竺古先生) 등 생전에 100여 가지가 넘는 호를 바꿔가며 사용했다.
천재의 출생이니만큼 탄생 일화가 없을 리 없다. 어머니 뱃속에서 10달이 아닌 24개월 만에 세상에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태어날 무렵 시들어가는 뒷산 나무들이 아기 김정희의 생기를 받아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탄생일화는 천재를 포장해주는 이야기일 뿐이고, 어려서부터 뛰어난 자질을 보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김정희 집안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와 더불어 조선후기 양반가를 대표하는 명문 가문이었다.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진 인물이다. 김한신이 39세에 후사 없이 죽자 월성위의 조카인 김이주가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는데, 이가 김정희의 조부이다. 추사는 병조판서 김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큰아버지 김노영이 아들이 없어 양자로 입양되었다. 큰댁으로의 양자 입양은 조선후기 양반가문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어린 김정희의 천재성은 일찍부터 발견되었다. 그의 나이 일곱 살 때의 일이다. 번암 채제공이 집 앞을 지나가다가 대문에 써 붙인 ‘입춘첩(立春帖)’ 글씨를 보게 되었다. 예사롭지 않은 글씨임을 알아차린 채제공은 문을 두드려 누가 쓴 글씨인지를 물었다. 마침 친아버지인 김노경이 우리 집 아이의 글씨라고 대답했다. 글씨의 주인공을 안 채제공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아이는 반드시 명필로서 이름을 떨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해 질 것이니 절대로 붓을 쥐게 하지 마시오. 대신에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되면 반드시 크고 귀하게 될 것입니다.” ([대동기문(大東奇聞)])
김정희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서울 통의동에 있던 월성위궁에서 보냈다. 월성위궁은 영조가 사위인 월성위 김한신을 위해 지어준 집이다. 김정희가 서울집이 아닌 예산에서 출생한 것은 그때 당시 천연두가 창궐하여 잠시 이주한 것이라 한다. 월성위궁에는 매죽헌이라하여 김한신이 평생 모은 서고(書庫)가 있었다. 수많은 장서는 김정희의 학문세계를 바다처럼 넓게 만들어 주었다. 아버지 노경은 아들의 자질을 알아보고 당시 북학파의 거두였던 박제가 밑에서 수학하게 하였다. 스승이었던 박제가 역시 어릴 적 김정희의 ‘입춘첩’ 글씨를 보고 “이 아이가 크면 내가 직접 가르쳐 보고 싶다.”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1800년 열다섯의 나이에 한산 이씨와 결혼한 김정희는 이 시기를 전후로 견디기 어려운 시련에 부닥쳤다. 이미 십 대 초반에 할아버지와 양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했고 결혼 이듬해인 1801년에는 친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1805년에는 부인인 한산 이씨와 사별했고, 뒤이어 스승인 박제가마저도 세상을 떠났다. 10대 시절은 끊이지 않는 집안 흉사로 고통과 외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한중문화 교류사에 족적을 남기다
한산 이씨와의 짧은 인연을 뒤로하고 김정희는 23세인 1808년에 예안 이씨와 재혼하였다. 그 뒤로는 흉사도 그쳤고 평안함을 되찾았다. 생부 노경이 호조참판으로 승진했고 또 동지부사가 되어 청나라 연경(지금의 북경)에 가게 되었다. 당시 사마시험(생원·진사 자격을 주는 과거시험)에 합격했던 김정희는 외교관의 자제(혹은 친인척)에게 부여되는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사행길에 동행하였다. 사행단의 한 사람으로 연경에 가서 외국 견문을 넓히고 온 경험은 인생의 전환기라 할 만큼 큰 영향을 미쳤다. 아마도 연경을 세 번이나 다녀온 스승 박제가의 영향도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을 낱낱이 밝혀낸 동양철학자 후지츠카는 20세기 초에 한국 인사동 서점가를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며, 나빙이 그린 박제가 초상화, 청나라 화가 주학년이 김정희에게 보내준 그림, 그 유명한 세한도 등을 발견하여 구입하였다. 후지츠카의 연구로 조선의 북학파들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김정희 등이 북경과 서울을 오가며 조선후기 지성사를 찬란하게 비추었음이 밝혀졌다. 부친을 따라 김정희가 북경으로 출발한 것은 1809년 10월 28일이다. 북경 체류 기간은 2달 남짓이었는데 이 사행길에서 2명의 중국인 거유(巨儒)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중국 제일의 금석학자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완원(阮元, 1765~1848)이었다. 김정희는 옹방강, 완원과 같은 당대 최고의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당시 최고조에 이른 고증학의 진수를 공부하였다. 연경학계의 원로이자 중국 제일의 금석학자였던 옹방강은 추사의 비범함에 놀라 “경술문장 해동제일”이라 찬탄했고, 완원으로부터는 완당(阮堂)이라는 애정어린 아호를 받았다. 후지츠카는 이들의 만남을 한중문화 교류사의 역사적 사건이라 평가했다.
스승인 박제가가 만났던 나빙이나 기균과 노대가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김정희는 북경에서 옹방강, 완원과 같은 스승 외에도 이정원, 서송, 조강, 주학년 등 많은 학자들을 만났다. 이들은 1810년 2월 1일 조선으로 돌아가는 김정희를 위해 북경 법원사에서 송별연을 열었다. 주학년은 송별연 장면을 즉석에서 그림으로 그리고 참석자 이름을 모두 기록했다. 그 당시 주학년이 그린 전별도 실물은 사라지고 없지만, 1940년 이학년이 모사한 그림이 과천시 문화원에 소장되어 있다. 연경학계와의 교류는 귀국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져 만년까지 계속되었고 김정희의 학문 세계를 풍성하게 해 주었다.
북경 법원사. 김정희와 중국 문인들이 만났던 곳이다.
실사구시 정신을 실현한 학문세계
김정희의 학문세계는 한마디로 ‘실사구시’로 요약할 수 있다. 실사구시(實事求是)는 청나라 고증학자 고염무가 주창한 것으로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뜻이다. 김정희는 실사구시 정신에 입각하여 학문 세계를 완성해 나갔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천문학에 대한 식견도 괄목할 만한 정도였다. 일식과 월식 현상 등 관측에 근거하여 서양천문학의 지식을 받아들였다.
1821년 34세의 김정희는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출셋길에 접어들었다. 이후 10여 년간 김정희와 부친 김노경은 각각 요직을 섭렵하여 인생의 황금기를 맞았다. 그러다가 어지러운 정국과 정쟁의 파고 속에서 1830년 부친 김노경이 탄핵받는 일이 발생했다. 아들로서 김정희는 꽹과리를 치며 부친의 무죄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노경은 강진현 고금도에 절도안치(絶島安置,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유배하는 형벌)되었다가 1년 뒤에야 겨우 귀양에서 풀려났다.
이들 부자는 한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다가 1838년 김노경이 세상을 떴고 김정희는 그 이듬해 병조참판에 올랐다. 훈풍도 잠깐, 김노경을 탄핵했던 안동 김씨 세력들이 이번에는 김정희를 공격하여 그를 관직에서 끌어내렸다.
추사체와 세한도를 완성한 예술혼
김정희는 혹독한 고문 끝에 제주도에서 서남쪽으로 80리나 떨어진 대정현에 위리안치되었다. 위리안치(圍離安置)는 유배형 가운데 가장 혹독한 것으로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형벌이다. 현재 남제주군 대정읍 안성리 옛 대정현 현청에 이웃한 김정희의 적거지는 복원된 것으로 유허비와 함께 조그만 유물전시관이 세워져 있다.
봉은사에 있는 추사 친필의 현판.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9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이 시기 동안 많은 편지를 통해 육지에 있는 지인과 후학들에게 자신의 학문세계를 전했다. 특히 유배 기간 중 부인과 며느리 등과 주고받은 40통에 달하는 한글 편지는 그의 인간적 면모 드러내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유배 기간 동안 화가이자 제자인 소치 허유(1809~1893)가 세 차례나 제주도로 건너가 수발을 들어준 일은 유명하다. 소치는 충심으로 스승인 추사의 글씨와 그림을 배웠다.
제주도 유배기간을 통해서도 그는 쉬지 않고 붓을 잡아 그리고 쓰는 일에 매진하였다. 최고의 걸작품인 ‘세한도’도 이 시기에 그려졌고, 흔히 추사체라 불리는 그의 독창적인 서체도 이때 완성되었다. 유배 중에 그린 세한도는 김정희의 최고 걸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이라 평가받는 그림이다. 1844년 그의 나이 59세에 수제자인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 주면서 “날이 차가워진 연휴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는 공자의 글을 발문에 적은 것은 유명하다.
유배 기간 중인 1842년 11월 13일, 유배생활 내내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존재였던 아내 예안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1849년 9년간의 유배를 끝으로 마침내 귀양에서 풀려났다. 그 후 서울 용산 한강 변에 집을 마련하고 살았는데, 다시 모함을 받아 1851년 북청으로 유배 길에 올랐다. 다행히 귀양은 1년으로 끝났지만, 그는 이제 세상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칠십 평생 열 개의 벼루 밑을 뚫고, 1천 자루의 붓을 망가뜨릴 정도의 예술혼을 지녔던 김정희는 말년을 경기도 과천에서 지내며 일흔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1657년 영국의 생리학자 하비 사망
▶ 1338년 고려, 지진 피해
▶ 1116년 송나라의 대성악 고려에 전래
https://youtu.be/VYQrETP6D8k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