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 섬으로
숙명(宿命)은 날 때부터 타고난 정해진 운명, 또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럼 운명(運命)은 무엇인가? 역시 사전의 도움을 받으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이다. 또는 그 힘에 의해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로 나온다. 우리나라 현대사 휴화산인지 활화산인지 모를 사후 자서전 노 대통령 ‘운명이다’다. 명망 있는 역학자들이 한 때 헷갈린 일이지 싶다.
교직 입문 초기였다. 초등에서 중등으로 갓 전직한 이후 국어를 가르치면서 어휘력은 독서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때 얕은 지적 수준에 머문 내가 숙명과 운명을 구분 지은 기억이 새롭다. 자신의 의지로 개척이나 변혁이 가능하면 ‘운명’이고, 그렇지 않고 절대자의 지배력에 복종 순응해야 하면 ‘숙명’이라 했다. 그 예로 베토벤을 들면서 숙명 고향곡이 아닌 ‘운명 고향곡’이라 했다.
내가 정년을 앞두고 창원 지역만기를 맞아 올봄 임지가 거제로 정해졌다. 주변에선 남은 기간 낯선 곳에서 어떻게 보낼까 안쓰러워했다. 나는 거제 원룸을 ‘연사와실(烟沙蝸室)’로 정했다. 내가 주중 일과를 끝내고 머무는 학교 근처 동네가 거제 연초면 연사리다. 유배지라 생각 않고 휴양지라 여기고 한 학기를 보내고 방학을 맞아 창원으로 복귀했다. 보름 뒤 개학이라 짧은 방학이다.
내 밑으로 둔 아들 두 녀석이 서울 산다. 큰 녀석은 통신회사 근무 7년차로 부부 연을 맺어 손자가 있다. 작은 녀석도 나름대로 제 갈 길 가려 한다. 나는 두 아들에게 채권 의식이 없고 채무를 변제하란 언질을 준 바 없다. 부모는 자식에게 거름이 되는 것으로 책무를 다하려 할 뿐이다. 서울이 멀지 않다만 걸음을 자주 못하고 아내만 병원을 오르내리는 길에 가끔 얼굴을 보는 정도다.
서너 달 전 큰 녀석으로부터 부탁이 와 난감했다. 아비 어미보고 여권을 내어두라는 요청이었다. 내가 머뭇거리니 언제까지 조선시대 사람처럼 사실 거냐며 재촉했다. 나와 아내는 여태 이 나이 되도록 그 흔한 해외로 한 번 나간 적이 없다. 남들이 바깥바람을 쐬고 온 경험담을 나눌 때면 나는 화성에서 온 남자였다. 우물 안 토종 개구리를 고수할 수 없어 결국 여권을 내게 되었다.
거제에서 다섯 달 지내다 방학을 맞아 창원으로 복귀했다. 그간 밀려둔 산천을 주유하는 산책 산행을 나서고 싶었다만 그럴 수 없었다. 큰 녀석으로부터 강제 구인을 당해 주말 심야버스 편으로 인천공항에 나갔다. 두 아들 녀석이야 업무차든 휴가차든 더러 들린 곳이겠지만 부모에겐 생소한 공항이었다. 큰 아들네와 정해진 절차를 거쳐 대만 가오슝으로 가는 중화항공 비행기를 탔다.
구름 위를 두어 시간 날아 닿은 곳은 대만 남쪽 가오슝이었다. 부산보다 인구가 많을 대만 제2 도시였다. 대륙과 달리 대만은 번자체를 써서 글은 되나 입을 닫혔다. 큰 녀석 내외는 영어가 되니 현지에서 불편함 없었다. 여행사를 통해 항공권과 호텔만 예약된 4박 5일 자유여행이었다. 대만은 우기에 더운 철이었지만 비도 맞지 않았고 5성급 호텔이라 그런지 그렇게 더운 줄 몰랐다.
첫날 여장을 풀고 세계에서 두 번째 아름답다는 미려도 지하철역으로 나가 그곳 상류층이 붐비는 백화점을 둘러 맛집에서 우육면을 먹고 호숫가를 산책하며 용호탑도 들렸다. 이튿날 아침나절엔 85층 빌딩 전망대에 올라 가오슝 항구를 비롯한 시가지를 조감하고 대만 최남단 컨딩으로 나갔다. 그곳 호텔에서 두 밤을 묶으면서 태평양과 동지나해와 만난 땅끝 등대와 해안을 둘러봤다.
컨딩은 우리식으론 국립공원에 해당하는 국가공원이 있어 이른 아침 서너 시간 숲길 트레킹을 잘 했다. 넷째 날 점심나절 가오슝으로 돌아와 여장을 풀어 놓고 창고를 예술촌으로 바꾸어둔 항구를 둘러봤다. 해산물과 쇠고기를 익혀 대만 맥주를 맛보기도 했다. 관광지라기보다 휴양지가 어울릴 낯선 남쪽 섬에서 나흘 밤을 보내고 닷새째 아침이 밝을 때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19.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