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정호를 품다 / 이승숙
새벽녘 물안개는 거대한 꽃이 되어 190만 평을 덮었다. 장엄한 물안개의 향연은 발레리나가 미의 정점을 찍는 듯하다. 푸른 안개 속으로 햇살이 시나브로 밀쳤다. 햇살과 물안개는 이글거리는 정욕의 화신처럼 보인다.
탑정호는 논산 8경의 하나다. 바다 못지않은 광활함과 풍광이 멋스러운 인공호수다. 사계절 내내 강태공들의 발길이 이어지며 가족과 연인들의 쉼터가 되기도 한다. 물안개와 저녁놀이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세를 타더니 모텔과 카페가 줄지어 들어섰다.
넉넉함과 풍요로움의 상징이 물이다. 열 달 새 생명을 품어 준 곳도 어머니의 양수였다. 역리학을 공부하는 어느 분이 말했다. 사주에 물이 많은 여인은 유혹에 약하다고. 넉넉하게 나누려는 물의 심리 때문일까.
어릴 적 둠벙이 많았었다. 둠벙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파놓은 작은 물웅덩이다. 저수지가 너무 멀어 물을 받을 수 없는 논에 필요했다. 가끔 어린아이의 목숨을 앗아갔던 날 둠벙의 생명도 끝이었다. 인삼밭집의 외동아들도 그렇게 갔다. 그 아이가 앉던 자리엔 하얀 국화꽃이 대신했다. 얼마 후 아이의 가족들은 마을을 떠났다. 논둑길에서 만나는 둠벙은 왜 그리 무서웠던지……. 금방이라도 물귀신이 나를 당기는 것 같아 발걸음이 빨라졌다. 나에게 있어 물은 늘 두려움의 대상이다.
점차 사라졌던 둠벙이 농민들의 웃음꽃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정부의 지원으로 만든 둠벙에 각종 식물과 생물들이 서식했다. 멸종위기인 긴꼬리투구새우가 등장하며 생물학자와 탐방객의 학습장이 되었다. 이곳에서 재배된 농작물은 유기농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는다 한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낚시를 좋아하셨다. 어망에서 팔딱이던 붕어요리는 할아버지 몫이었다. 민물고기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할머니는 잡아 온 고기를 마땅치 않아 하셨고 늘 불만이셨다. 아마도 밖으로 도는 할아버지에 대한 애증이지 않았을까. 뒤란에서 고추장 조림의 붕어와 여름 햇살이 익었다. 우리들 얼굴도 붉게 익은 채 침을 꼴깍이며 숨을 죽였다. 허연 쌀밥을 찬물에 말아 뜨거운 붕어찜 한 점을 얹었다.
붕어마을에서 붕어찜을 먹었다. 붕어는 산성 식품이지만 칼슘 철분 단백질이 풍부하다. 무와 시래기를 바닥에 깔고 붕어에 양념장을 얹어 알맞게 조려지면 콩가루와 야채를 넣어 더 끓인다. 어릴 적 먹던 맛이 아니다. 아니 붕어의 크기도 다르다. 둠벙에서 살던 붕어는 아기 손처럼 작고 귀여웠다. 탑정호 붕어는 어른 손바닥만 하다. 환경과 시대 탓일까. 요즘 아이들을 보는 것 같다. 미끈하게 잘 빠진 게 미스 탑정이었는지 모르지. 기대했던 깊은 맛은 저만큼 기울어졌다. 세월은 그냥 가지 않고 입맛조차 앗아갔다.
호숫가의 전원카페로 발을 옮겼다. 바위 사이를 뚫고 서 있는 소나무의 위용과 기개는 독립투사를 닮았다. 반듯한 암반의 수직선 사이에 뿌리를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 소나무와 바위는 연리지마냥 한몸이 되었다. 뿌리와 기둥을 감싸주는 바위에게 소나무는 비바람을 막아주고 여름날 그늘을 만든다. 태풍이 불어도 쓰러지거나 부러질 염려는 없을 것이다.
몇 발짝을 걷다 거대한 남근석을 만났다. 2미터 둘레에 3미터 길이의 자연석이 동쪽 45도 각도로 서 있다. 남자의 힘 가장 좋을 때가 동트기 전 새벽이라더니 해가 솟는 방향의 남근석은 영락없는 변강쇠다. 저 큰 힘으로 얼마나 많은 여인들을 희롱하였을까. 어쩌면 뭇 여인들의 거침없는 손길과 질펀한 농이 더 부끄러웠을 게다. 인공으로 다듬어도 이렇게 완벽하지 못할 것을 정면과 측면에서 보아도 살아 움직이는 게 금방이라도 살을 뚫을 기세다. 변강쇠의 짝을 맞춘 듯 음부석이 비켜서 있다. 우주와 자연의 신비로움이 존재하는 듯 묘한 형상이다.
태평양 전쟁 때 만들어진 탑정호의 노역에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그랬다. 좋아하던 낚시를 이곳에선 하지 않았다. 가까이 좋은 자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었다. 아름다움 속에서 처연한 아픔과 슬픔의 넋이 보인다. 아름다움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희생 위에서 빛날 뿐이다.
천연기념물 201호 고니가족이 보였다. 소풍을 나왔는지 다정한 모습이다. 탑정호를 유유히 걷는 자태와 흰 깃털이 우아함을 한껏 뽐낸다. 긴 다리로 느릿느릿 걷는 모습이 조선시대 양반과 다르지 않다. 고니로 환생한 양반이었을까.
청정호수 탑정호에 주홍빛 노을이 일렁인다. 초겨울의 저녁은 짧기만 하다. 사위가 어둠에 깔리며 별빛이 내린다. 카페촌의 불빛을 살라먹는 연인들이 사라진다. 코끝에서 맞는 알싸한 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