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안보] 전적지 답사
<1>프랑스 노르망디(캉지역)
백년전쟁·2차 세계대전 상흔 고스란히 간직
전쟁이란 인류에게 있어 큰 재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크고 작은 전쟁들이 지구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전쟁의 원인과 전쟁이 주는 교훈을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 `세계의 전사적지 답사기'를 수록합니다.
캉(Caen)의 전쟁기념관 입구에 선 평화기원 동상(캉 전쟁기념관 입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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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다. 왜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라는 로마시대 베제티우스의 격언이 오늘날에도 많은 역사학자와 정치가들에게 자주 인용되고 있겠는가. 전쟁을 막고 분쟁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인류는 끊임없이 노력해 왔고 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인류역사에서 전쟁은 근절시킬 수 없을까. 일부 학자들은 전쟁은 인간 심성 중 필연적으로 들어 있는 공격성향으로 근절시킬 수 없는 인간 본성의 일부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사람은 때때로 고치기 불가능할 것 같은 습관도 문명과 과학발전에 따라 잘못된 많은 것을 버리기도 했다. 인간이 소규모 집단생활을 하던 빙하시대 때의 일상적인 근친상간, 일부 아프리카 토인들의 식인풍습 등은 그땐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만 지금은 과학문명 발전으로 사라졌다.
불과 100여 년 전 만해도 수백 만의 미국인은 신이 백인은 자유인으로, 흑인은 노예로 운명 지어놨다고 믿었다. 물론 이런 인식도 끊임없는 교육과 백인들의 반성으로 인류사회에서 없어졌다. 발전은 큰 고통을 겪은 뒤 서서히 이뤄지며 결국 인간의 본성도 바뀌는 것이다(존. 스토신저의 ‘전쟁의 탄생’ 참조). 식인풍습이나 노예제도처럼 전쟁도 끊임없는 전쟁원인연구, 국제적 예방책 강구, 전쟁의 죄악상 등을 모든 인류에게 체계적으로 교육해 나갈 때 전쟁을 인류역사에서 몰아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처럼 인류사회의 가장 큰 명제인 ‘지구상 전쟁의 근절’을 위해 세계의 전쟁사를 연구하고 그 현장에서 당시의 전쟁을 떠올리며 그 처참함과 인간의 어리석음을 되짚어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더구나 우리 한민족 또한 수많은 전쟁으로 승리의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의 역사에선 이 같은 전쟁에 대한 국민적 무관심으로 결국 이민족지배를 오래 받았던 뼈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따라서 ‘세계의 전사적지 답사기’라는 기획연재 내용은 주로 ▲유럽의 프랑스·영국·벨기에·네덜란드·독일 ▲아시아의 중국 ▲남태평양 지역 ▲중동의 이스라엘·이집트·터키의 전사적지를 방문하며 느꼈던 전쟁역사 교훈과 해당 국가 국민들이 가진 전쟁에 대한 인식을 정리해본다.
▶끝없이 펼쳐진 비옥한 들판과 아름다운 숲 속에도 전쟁의 상흔이
파리에서 노르망디 지역의 캉(Caen)으로 달리는 기차의 창밖으론 넓은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간간이 들판을 가로막고 있는 숲과 하천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뤄 비옥한 평야지대에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곳 노르망디 지역은 한때 독자국가를 이뤘으나 13세기 프랑스에 합쳐졌다. 그 뒤 영국과의 백년전쟁,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처절한 전쟁터로 바뀌었다. 지금은 전쟁 상흔이 대부분 아물었다. 그러나 노르망디 해안지역의 수많은 전쟁기념관과 전몰장병묘지들은 그때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노르망디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인 캉, 깨끗하게 정리된 도심지를 거닐다 보면 전쟁과는 전혀 관계없었던 도시처럼 보인다.
그러나 도심지 가운데 우뚝 솟은 노르망디 성과 망루를 보는 순간 “아, 이곳도 옛날부터 군사적 요충지였구나!”라는 느낌이 들게 된다. 또 성곽 안의 역사박물관은 과거 이곳 주민들이 자신들의 생존과 안전을 위해 어떻게 싸워왔는지를 잘 말해준다. 다소 시 외곽에 있는 전쟁기념관(Memorial Museum)에선 제2차 세계대전과 1945년 후의 전쟁과 여러 분쟁에 대해 한눈에 알 수 있게 정리해 방문객들에게 전쟁 참상과 후손들을 위한 교훈을 보여 주고 있다.
▶창과 칼 녹여 낫·쟁기 만들자고 수시로 약속하지만
캉 전쟁기념관 입구엔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으로 참전했던 각 나라 참전용사들이 후손들에게 남기는 어록기념판이 유리로 된 구조물 안에 전시돼 있다. 구구절절 전쟁의 처참함과 자유의 소중함을 절규하고 있다. 또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전쟁을 추방하자’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지는 뜻에서 권총 총열을 엿가락처럼 꼬아 만든 청동동상이 기념관 입구에 서 있다.
대단히 안타깝게도 1945년 세계대전이 끝난 뒤 지구상에선 또 다른 전쟁과 분쟁으로 오늘날까지 약 1억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는 사실은 인류가 왜 전쟁예방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를 사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전쟁기념관 안엔 ▲1920년대 이후의 국제사회 변화과정 ▲1940년대 독일의 프랑스 침공과 대독 레지스탕스 활동상황 ▲1945년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국제분쟁과 주요 국제테러사건 등을 일목요연하게 잘 전시해 놨다.
약 4년간 독일 지배 아래 있었던 프랑스 국민은 전쟁패배에 대한 좌절감과 전시체제 아래서의 생활필수품 부족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한 조각의 치즈를 얻기 위해 프랑스 여성들이 점령군에게 웃음을 파는 모습과 명품 핸드백을 든 파리의 기품 있는 할머니가 쓰레기통을 뒤져 찾은 썩은 사과로 배고픔을 달래는 사진은 그때 패전국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짓밟혔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전투다운 전투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독일에 손을 든 프랑스는 독일군 지배 아래서의 영웅적인 레지스탕스 활동을 꽤 무게 있게 다루고 있다.
노르망디 지역 출신의 여성전화교환수가 첩보수집 및 독일군 통신방해 등의 저항활동을 하다 붙잡혔다. 독일군은 이 여성을 스파이혐의로 총살형을 집행했다. 처형장소의 담벼락(물론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그 무렵 사진과 함께 기념관 안에 온전하게 옮겨 전시해 두기도 했다. 또 독일군 점령 아래 레지스탕스 체포에 협력한 프랑스 국민군들의 활동사진과 검거자들의 교수형 집행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했다.
이 같은 나치 협력자들은 프랑스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고 불과 몇 주일 동안에 1만1000여 명이 시민에 의해 붙잡혀 현장에서 처형됐다. 또 정규 재판소가 세워진 뒤 추가로 재판을 거쳐 사형 767명, 투옥 3만9000명, 시민권 박탈 4만 명 등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적국에 나라가 점령된 가운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조국을 배신한 사람들에 대한 엄정한 역사의 심판을 후손들이 잊지 않도록 분명하게 기념관은 보여주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 때의 한국 보는 시선은
기념관 전시공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루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시아 지역의 태평양전쟁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었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역사적 평가도 언급하면서 일본군 관련 전시물도 많았다.
특히 안타까운 건 그때 아시아지도에서 유독 한국은 일본 본토와 같은 빨간색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대만·중국·필리핀 등 다른 나라들은 일본의 일시 점령지 뜻으로 빗금표기를 하고 있었다. 사실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프랑스인들 입장에선 과거부터 한반도는 일본 영토 일부였던 것으로 잘못 알 수 있는 소지가 많았다.
오직 힘의 강약으로 역사적 의미를 주는 서구인들 입장에선 자기 자신의 나라를 스스로 지킬 의지가 없는 국가는 다른 민족 지배를 받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는 시각을 가진 듯해 씁쓸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TIP]노르망디 지역의 전사적지
노르망디는 파리(Paris)로부터 300여㎞ 북서쪽에 떨어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1944년 6월 6일 연합군에 의해 전쟁역사상 최대 상륙작전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 상륙작전을 배경으로 한 수많은 영화와 책이 만들어졌다. 현지엔 미국·영국·캐나다·프랑스 전쟁기념관 및 전적지와 전몰장병묘지가 관광명소로 잘 가꿔져 있다. 해마다 5월 8일 연합국 전승기념일이나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기념일엔 참전국들의 국가지도자와 참전용사들에 의한 여러 행사가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열린다. 특히 유럽전쟁사 연구가들은 거의 빠지지 않고 이곳을 돌아보며 관련 전쟁박물관에서 각종 자료를 확인하고 있다.
노르망디 지역에서 비교적 큰 도시는 캉(Caen), 바이요(Bayeux), 세르부르(Cherbourg)다. 각 지역 여행안내소를 찾으면 전투지역별 전쟁기념관, 주요 전사적지, 관광객을 위한 숙소 등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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