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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제 4 / 죄의 고백과 사죄의 은총
레 5:1-13
1 만일 누구든지 저주하는 소리를 듣고서도 증인이 되어 그가 본 것이나 알고 있는 것을 알리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의 죄를 져야 할 것이요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며
2 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들 곧 부정한 들짐승의 사체나 부정한 가축의 사체나 부정한 곤충의 사체를 만졌으면 부지중이라고 할지라도 그 몸이 더러워져서 허물이 있을 것이요
3 만일 부지중에 어떤 사람의 부정에 닿았는데 그 사람의 부정이 어떠한 부정이든지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허물이 있을 것이요
4 만일 누구든지 입술로 맹세하여 악한 일이든지 선한 일이든지 하리라고 함부로 말하면 그 사람이 함부로 말하여 맹세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가 깨닫지 못하다가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는 그 중 하나에 그에게 허물이 있을 것이니
5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
6 그 잘못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7 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8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을 먼저 드리되 그 머리를 목에서 비틀어 끊고 몸은 아주 쪼개지 말며
9 그 속죄제물의 피를 제단 곁에 뿌리고 그 남은 피는 제단 밑에 흘릴지니 이는 속죄제요
10 그 다음 것은 규례대로 번제를 드릴지니 제사장이 그의 잘못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11 만일 그의 손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에도 미치지 못하면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예물로 가져다가 속죄제물로 드리되 이는 속죄제인즉 그 위에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고
12 그것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기념물로 한 움큼을 가져다가 제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속죄제라
13 제사장이 그가 이 중에서 하나를 범하여 얻은 허물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그 나머지는 소제물 같이 제사장에게 돌릴지니라
레 5:1-13 / [면죄제는 이렇게 드려라] 다음 네 가지 경우에는 허물을 덮어 달라는 뜻으로 여호와께 면죄제물을 바쳐야 한다. 누구든지 법정에 증인으로 서 달라는 요청을 받고도 자기가 본 것이나 들은 내용을 성실하게 증언하지 않을 경우에는 죄를 짓는 것이므로 그 허물을 벗어야 한다. 2) 누구든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부정한 것을 만졌을 경우 곧 들짐승이나 집짐승이나 길짐승의 시체를 만졌을 경우에는 부정을 탄 것이므로 그 허물을 벗어야 한다. 3) 누구든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람의 부정한 곳에 손이 닿았을 때에는 부정을 탄 것이므로 그 사실을 깨닫는 즉시 그 허물을 벗어야 한다. 4) 누구든지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함부로 입을 놀려 맹세를 하였을 경우에는 자기의 맹세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그가 맹세를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는 당연히 그 허물을 벗어야만 한다. 5) 이 네 가지 경우 중에서 어느 것 하나에라도 해당되었을 때에는 그 사람은 반드시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 6) 그런 다음에 그 허물을 벗기 위하여 여호와께 면죄제물을 바쳐야 한다. 면죄제물로 암양이나 암염소를 드리면 제사장은 그것으로 그 사람의 허물을 씻어 달라고 여호와께 제사를 올려야 한다. 그러면 그의 허물이 벗기어질 것이다. 7) 양이나 염소를 바칠 힘이 없는 사람은 허물을 벗기 위한 제물로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쳐야 한다. 이 가운데에서 한 마리는 속죄제물로, 다른 한 마리는 번제물로 바쳐야 한다. 8) 이 제물을 제사장에게 갖다 바치면 제사장은 먼저 속죄제물을 여호와께 바쳐야 한다. 제사장은 그 새의 목을 부러뜨리되 완전히 끊어 내서는 안 된다. 9) 그런 다음 제사장은 그 새의 피를 번제단의 옆면에 뿌리고 나머지는 번제단 밑바닥에 쏟아야 한다. 이것은 속죄제이다. 10) 두번째 비둘기는 규정에 따라서 번제로 바쳐야 한다. 이렇게 제사장이 제물을 바치면 그 사람의 허물이 가리어질 것이다. 11) 가난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조차도 바칠 힘이 없는 사람은 고운 밀가루 2.2리터를 속죄제물로 갖다 바쳐야 한다. 고운 밀가루를 바칠 때에는 이 제물이 속죄제물이므로 기름을 부어서 바치거나 향을 얹어서 바쳐서는 안 된다. 12) 그가 제사장에게 그 제물은 갖다 바치면 제사장은 제물을 온전히 여호와께 드린다는 표시로 한움큼을 집어내라. 그리고 집어낸 제물을 제단 위에 올려놓고 불살라 여호와께 바쳐라. 이것이 속죄제이다. 13) 앞서 말한 몇 가지 잘못 중에 어느 하나에라도 걸린 사람은 제사장이 이렇게 허물을 씻어 달라고 하면 여호와께서 그 사람의 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불살라 바치고 남은 속죄제물은 곡식제물과 마찬가지로 모두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본문은 부지중에 지은 죄의 구체적인 사례들과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원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들(1-4) 부지중에 지은 죄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진실을 알고도 침묵하는 죄입니다(1). 이는 진실을 알고도 증언하지 않는 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공동체 안에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아야 할 책임이 있으며, 따라서 진실을 증언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Harris) 특히 구속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믿음을 부인하지 않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적극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증언해야 합니다(딤후 4:2). 둘째는 의식적인 부정입니다. 사람이 부지중에 부정한 무언가를 만졌을 때 의식적으로 부정하게 되는데 이 경우 속죄제를 통해 정결해져야 했습니다. 부정한 짐승의 사체를 만지거나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2-3; 11:24-31). 자신이 부정한 것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허물이 있으므로, 믿는 친구나 성령의 도움으로 이를 깨달아야 합니다. 셋째는 약속하고 지키지 않는 경우입니다. 함부로 한 약속도 여전히 약속이며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속죄제로 사함을 받아야 했습니다.
자복하고(5-6) 속죄제를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는 '자복'입니다. 자복은 그 죄가 잘못이라는 하나님의 지적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죄의 자복이 없는 희생제사는 효력이 없습니다. 자복(야다)은 '폭로하다, 드러내 보이다'라는 뜻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부흥의 첫걸음은 진실한 자복이었습니다(요일 1:9; 약 5:16; 행 19:17-20). 6절의 '잘못'(아샴)은 죄를 범하다는 뜻입니다. 성도의 잘못은 하나님의 거룩한 경계선을 침범한 것이므로 자신의 잘못을 자복하고 "그 아들 예수의 피"(요일 1:7)로 용서받아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속죄제물(7-13)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양이나 염소를 드렸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로 드렸고, 그마저도 형편이 안 되면 소제물 곧 곡물로 드렸습니다. 새들을 드릴 경우 두 마리가 필요했는데 하나는 속죄제물로 또 하나는 번제물로 드렸습니다(7). 속죄제물은 죄사함을 받는 용도이며 번제물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새롭게 살겠다는 다짐의 의미입니다. 소제물로 드릴 경우 피 흘림이 없지만 소제물을 통해서도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백성에게서 원하시는 것은 제물 그 자체가 아니라 죄를 자복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참고 요일 2:12)
적용: 예배 중에 자복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 보세요.
봄에 피어나는 벚꽃은 수많은 거리를 아름답게 꾸미고 밤이면 흰 눈처럼 환하게 거리를 밝힙니다. 그러나 벚꽃이 피어있는 시간은 길게는 일주일, 이마저도 새벽에 비라도 내리면 금방 땅에 떨어지고 꽃은 져버립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청년의 때는 우리의 삶 속에서 흰 벚꽃처럼 아름답고 순수한 순간입니다. 가장 찬란하고 아름답게 보내야 할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고 속절없이 흘러갑니다.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나면 엄청난 후회가 따릅니다.
< 설 교 >
예배란 2
레 5:1-6 / 박경수 목사
제사는 5가지 종류가 있다. 그 중의 첫 번째는 온전히 자기 몸을 태우듯이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 부인, 자기 포기의 번제이다. 재 하나 남김없이 온전히 자기 몸을 태움으로 하나님의 손에 자기를 철저히 드리는 제사이다. 두 번째는 소제이다. 고운 가루가 될 때까지 빻고 빻는 모습을 통하여 헌신과 충성을 다짐하는 제사이다.
제사의 세 번째는 속죄제이다. 제사의 방법은 번제와 흡사하다. 그러나 이 제사의 특징은 죄를 깨닫는 즉시 제사를 드린다는 점이다. 제사와 삶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분의 연관을 맺고 있다. 마치 다윗처럼 말이다.
다윗은 왕이다. 왕은 왕으로서의 체면과 체통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고, 우리아마저 은밀하게 살해해 버린 다윗 왕의 잘못을 나단 선지자가 책망하였다. 거기는 은밀한 장소가 아니었다. 공개된 장소였다. 만조백관들 앞에서 수모를 당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체면을 짓밟은 나단 선지자를 다윗은 벌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인이 보는 앞에서 자기의 죄를 인정하였다. 회개하였다. 죄를 깨닫는 즉시 그 즉석에서 회개하였다. 그의 삶 자체가 제사였던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을 좋아하셨다.
예배는 삶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삶에 영향을 미치는 예배여야 하고, 예배를 위한 삶이어야 한다.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 밖에서도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지금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그 직업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참다운 속죄제이다. 죄 짓는 직업을 갖고서는 예배의 생활화가 있을 수 없다. 당연히 죄 짓지 않기 위해 직업을 포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것으로 갚아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결단하는 사람을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제사의 네 번째는 속건제(贖愆祭)이다. 물질과 관련된 죄를 속죄하기 위한 제사이다. 속죄를 위한 제사라는 의미에서는 속죄제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은 속죄제는 돌이킬 수 없는 죄에 대한 용서를 위해 드려지는 제사인 반면, 속건제는 돌이킬 수 있는 죄에 대한 보상과 사죄를 위해 드려지는 제사란 것이다.
죄에는 돌이킬 수 있는 죄와 돌이킬 수 없는 죄가 있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인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죄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아가 다시 살아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때는 속죄제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사하심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에게 100만 원을 사기쳤다면, 그리고 그 돈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이것은 속건제에 해당된다. 돌이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 당사자를 찾아가서 사기쳤던 돈을 배상하고, 그에게 사죄해야만 한다. 이것이 속건제이다.
하나님의 물건에 대한 범죄든 사람의 재산에 대한 범죄든 돌이킬 수 있는 죄의 경우, 그 죄를 깨닫는 그날 즉시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 속건제는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반드시 범죄한 물건에 5분의 1을 더하여 보상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물건일 경우에는 5분의 1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보내야 하고, 사람의 재산일 경우에는 역시 5분의 1을 더하여 그 임자에게 보상해야 한다. 즉, 속건제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동시에 의무를 다함으로써만 마무리되는 것이다. 예배와 삶이 일치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삭개오가 예수님께 고백한다.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눅 19:8). 불의한 재물 모으기를 낙으로 삼던 삭개오가, 그것이 죄인 것을 깨달아 주님께 회개의 기도만 드렸다 해도 그것은 큰 사건이었으리라. 삭개오는 그만큼 큰 죄인이었다. 그런데 삭개오는 그 위에 더하여 범죄한 물질의 보상을 약속하였다. 그것도 4배나 보상하겠다는 결단이었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의무를 동시에 다한 것이다. 완전한 속건제이다. 그리스도 앞에서 그의 예배와 삶이 완전히 일치를 이루었다.
‘셜록 홈스’라는 명탐정을 만들어낸 영국의 추리소설작가 코난 도일은 유명한 장난꾼이었다. 코난 도일의 장난에 일단 말려든 사람은 모두 진땀을 흘렸다. 하루는 코난 도일이 국회의원 사업가 변호사 경찰 등 고위층에 있는 친구들에게 똑같은 내용의 전보를 한 통씩 보냈다.
코난 도일의 아내는 전보를 보낸 후 키득키득 웃는 남편의 태도가 궁금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장난을 시작하셨나요?” “내 친구들이 정말 죄를 짓지 않고 사는지 시험 삼아 전보를 쳐본 거요.” 아내가 다시 물었다. “뭐라고 전보를 쳤나요?” 코난 도일은 깔깔대며 대답했다. “간단한 내용이오. ‘당신의 죄가 탄로 났으니 빨리 몸을 숨겨라’라는 것이었소.”
코난 도일은 전보를 띄운 친구들의 집을 차례차례 방문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집에 없었다. 그는 아내에게 그 사실을 말하며 박장대소했다. “전보를 받은 친구들이 모두 집을 나가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는구려. 내 친구들은 모두 죄인들이야.”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회개한 죄인’과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 있을 뿐이다. 죄가 드러났을 때 고백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그것은 자백이다. 회개와 자백은 다르다. 회개란 자발적이어야만 한다. 아무도 내 죄를 알지 못하고 추궁하지도 않을 때 회개하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란 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행위이다. 평안할 때 회개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다,
속건제의 의미를 깨달은 한 성도가 고민을 토로한다. 사업에 실패하면서 야반도주를 했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갚을 능력도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내용이다. 참 회개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되지 않는다.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갚아야만 한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할까?
속건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의 회복이다. 돈이 없는데, 무슨 수로 빚을 갚을 수 있겠는가? 그건 불가능하다. 일평생이 걸려도 갚을 수 없는 경우라면 그건 또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런 경우는 솔직하게 찾아가서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 관계 회복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 성도는 굉장히 곤란해 한다. 돈을 꿔준 사람들 중에는 난폭한 사람들이 있는데, 찾아가면 살아날 가능성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도 그 사람을 찾아가서 관계의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속건제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속건제를 온전히 이루기 위해, 회개하기 위해 그 사람을 찾아갔는데 설마 책임지시지 않겠는가? 뺨을 때린다면 또 당연히 맞아야 할 것이다. 나는 뺨을 맞았지만, 그 사람은 몇 날 며칠 잠도 자지 못하면서 많은 고생을 했을 터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러나 관계 회복은 반드시 해야만 한다.
빈손인데도 불구하고 꼭 그렇게 찾아가서 피를 말리는 고통을 겪으며 용서를 구해야 할까? 최소한 돈 얼마라도 들고 가서 이야기를 풀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돈 없이 용서를 구해야만 하는 심정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교회 건축을 한다고 성도들이 어렵게 드린 헌금을 일순간에 사기 맞았을 때, 우울증에 걸리고 나중에는 자살까지 고려할 수밖에 없던 그 심정을 아는가? 그 고통을 알기 때문에 두 번 다시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내게 피해를 본 사람은 아직까지도 괴롬을 겪고 있다. 그런데 나는 제사 드렸다는 이유만으로, 회개했다는 이유만으로 두 다리를 뻗고 잠을 잘 수는 없다. 내 양심이 죽었는가? 내 속에 계신 성령님께서 죽기라도 하셨는가?
성도들이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왜 같은 죄를 또 짓겠는가? 하나님과만 해결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죄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에게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 이것은 인간을 바로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인의 돈을 훔친 오네시모에게 빈손으로라도 주인을 찾아가서 속건 행위를 하게 했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이다. 역시 같은 감옥에 갇혀 있던 오네시모가 바울을 통해 주님을 영접하였다. 그는 바울에게 회개하는 심정으로 노예의 신분이면서도 불구하고 주인의 돈을 훔친 일을 이야기하였다.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주인인 빌레몬에게 되돌아갈 것을 명령하였다. 이것은 오네시모에게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기분이 상한 주인,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고발하면 즉각 사형에 처해질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렇게 하기를 요구했다.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오네시모는 같은 범죄를 어디에선가 또 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네시모는 죽을 결심을 하고 주인 빌레몬을 찾아가기로 했다. 바울은 그런 오네시모를 도와 빌레몬에게 편지를 썼다. 용서를 구하며, 오네시모의 훔친 돈을 자기라도 변상하겠다는 내용이다. 바울은 정말로 오네시모를 사랑했다. 바울은 하나님처럼 오네시모를 정말로 사랑했고, 사랑했기 때문에 오네시모가 똑바로 세워지기를 원했다.
나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이 이미 죽고 없어진 다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이런 경우도 있다.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고백하고, 피해자에게 본래의 값에다가 오분의 일을 더 얹어서 갚아야 한다. 그 피해자에게 대신 보상을 받을 근친이 없으면, 그 배상액은 죄를 속량하려고 바치는 속죄양과 함께 주님께로 돌아가, 제사장의 몫이 된다.”(민 5:7~8).
먼저는 본인에게 보상해야만 한다. 본인이 없는 경우에는 가까운 친족에게 보상한다. 그러나 친족마저 찾을 수 없다면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마 25:40). 작은 자를 돌보는 것이 곧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일이다.
누군가 나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편한 마음으로 예배드려선 안 된다. 곤란하다. 지금 나는 달려가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또 마음이 무뎌진다. 지금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두드리실 때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의 요구이고, 하나님에 대한 나의 사랑의 고백이다.
제사의 다섯 번째는 화목제(和睦祭)이다. 화목제의 특징은 나눔이다. 번제의 제물은 모두 태워져 하나님께 바쳐졌다. 번제는 태워져 모두 하나님께 드려진다. 소제와 속죄제, 그리고 속건제는 하나님께 바쳐지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사장의 몫이다. 그런데 화목제는 다르다. 하나님 몫이 있고, 제사장의 몫이 있다.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는다. 화목제는 잔치 제사이다. 모두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축제이다.
화목제는 세 가지, 감사제, 서원제, 자원제로 나눈다. 감사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릴 때, 서원제는 서원한 예물을 바칠 때 드린다. 자원제는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자발적으로 드려지는 낙헌제이다. 공통점은 제물을 함께 나눠 먹는다는 것이다.
조건이 있다. “화목제사에서 감사제물로 바친 고기는, 그것을 바친 그 날로 먹어야 하고, 조금이라도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레 7:15). 감사제인 경우, 그 날이 지나기 전에 제물을 다 나눠먹어야 한다. 서원제나 자원제인 경우는 그 다음 날까지 나눠 먹는다. 만약 사흘째 되는 날까지 남아있으면 그것은 불태워 버려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아깝다고 먹는다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된다.
하나님의 저주까지 강조하며 빨리 이웃과 음식을 나눠먹으라는 규칙이 있을까? 간단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화인 맞은 사람의 양심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혼자 먹으려고 쌓아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눠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소 한 마리는 대개 1,300근에서 1,500근이 나간다. 그 중 제사장의 몫인 제물의 가슴과 뒤쪽 다리 하나를 떼어 낸다고 하더라도 나누어야 할 고기는 엄청 많다. 이것을 반드시 하루 이틀 만에 나누기 위해서는 한두 사람과 나누어선 곤란하다. 주위에 있는 사람과 다 나누어야 한다. 바꿔 말하면, 미운 사람과도 나누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법칙을 지킬 수 없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저주이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제사를 알겠는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만 화목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내가 좋은 사람, 내가 미워하는 사람 모두와 화목하기를 원하신다. 모든 제사가 하나님과도 사람들과도 소통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화목제는 모든 제사를 마무리하는 제사이다.
예배는 반드시 사람과의 나눔, 미워하던 사람과의 화목으로 마무리되어야만 한다. 화목을 만들어 내는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이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성전을 찾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리며 그토록 진지하게 말씀을 듣는다. 최선을 다해 예배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예배가 삶 속에서 나눔과 화목을 일구어 내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삶으로 연결되지도 못하는 예배라면,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예배라면, 그것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예배인가? 무엇을 위한 예배인가?
참다운 예배는, 예배를 마치고 성전 문을 나서는 순간이다. 그 순간부터 참 예배는 시작된다.
우리가 살펴본 제사 5가지는 구약 시대 때 드려졌던 제사들이다. 지금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스스로 제물이 되시며 모든 제사를 완성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
구약 제사가 사라졌으면 그 정신도 같이 사라질까? 아니다. 정신은 여전히 계속되어져야만 한다. 옛날에는 짐승이 제물이었지만,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물이 되신다. 내가 예수님의 피를 뒤집어쓰며, 피비린내 나는 그 자리에 선다. 예배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예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 “예배의 부름”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교독하는 성시”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목사님의 “설교”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목사님의 “축도”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배 시간에 여러 번 말씀하신다.
예배란, 예배 시간 동안에 내려주시는 모든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그 날 주시는 말씀이 어떤 말씀이든지 나를 위한 말씀인 줄 믿고 온전히 받아들인다.
함께 부르는 찬송 속에, 대표 기도자가 드리는 기도 속에, 나의 기도 속에 나를 실어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나님께 나를 온전히 드린다.
스위스가 6백여 년 전에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아, ‘게슬러’라는 폭군에게 시달림을 받을 때였다. 폭군 게슬러는 마을 어귀에 자신의 모자를 씌운 긴 장대를 세우고 그 곳을 지나는 사람들마다 그 모자에 인사하여 자신에 대한 예의를 표하라고 명령했다. 만약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사형에 처할 것이라고 했다.
하루는 ‘텔’이라는 사냥꾼이 일곱 살 난 아들을 데리고 마을 어귀를 지나게 되었다. 텔은 모든 사람들이 게슬러의 모자에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민족을 침입하여 괴롭히는 폭군 게슬러의 모자에 인사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냥 그곳을 지나가버렸다.
결국 텔은 군사들에게 붙들려 게슬러 앞에 끌려왔다. 게슬러는 그 나라 제일의 명사수인 텔에게 화살 솜씨를 보여 달라고 했다. 그리고 텔의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만약 사과를 맞춘다면 너의 죄를 용서해주겠다고 했다. 아무리 제일의 명사수라 해도 자신의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놓고 활시위를 당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텔은 게슬러에게 자신은 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때 그의 아들이 텔에게 “아빠, 어서 쏘세요. 저는 아빠를 믿어요.”라고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보여주며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들의 절대적인 믿음을 간직한 텔은 활시위를 당겼고, 그의 시위를 떠난 활은 정확히 아들 머리 위에 있는 사과를 맞췄다. 바로 이 텔이 스위스의 독립을 위하여 군대를 일으킨 스위스 건국과 관련이 있는 스위스의 영웅 ‘윌리엄 텔’이다.
윌리엄 텔의 아들은 아버지가 30m 전방에서 자신의 머리위에 있는 사과를 정확히 맞출 것이라는 절대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다.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간직한 아버지의 믿음은 아들 머리에 있는 사과를 정확히 맞출 수 있었다. 만약 아들이 아버지를 믿지 못하고 불안에 떨었다면 그래서 아들도 아버지도 서로를 믿지 못했다면 그들은 많은 국민들이 우러러보는 스위스의 영웅이 아니라 한낱 지나치다 개죽음을 당하고 만 한 부자의 이야기밖에 되지를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하나님께서는 밑도 끝도 없이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후 25년 만에 주신 그것도 100세나 되는 노년의 나이에 주신 귀한 아들을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은 일절 불평 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아들을 데리고 삼일 길의 여정을 떠난다. 아무것도 모르고 길을 나선 이삭은 너무나 궁금하여 아버지에게 물어본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에 바칠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말한다.
번제를 드릴 곳에 당도하여 아브라함은 아들을 결박하여 제단 위에 올려놓는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번제물을 준비하여 주실 것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다. 그랬기에 아무 저항 없이 번제 단 위에 올라갈 수 있었다. 아브라함도 또한 하나님께서 분명 준비하여 주실 것이라는 절대적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아들을 향하여 칼을 들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께서는 이들 부자를 위하여 수양을 준비해 놓으셨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만났다.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 위에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서 이제 나를 세상으로 보내신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나아가라고 말씀하신다. 윌리엄 텔의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졌던 것처럼, 아브라함과 이삭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졌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간직하며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준비해 놓으실 것이고, 뿐만 아니라 해결도 해 주실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살아만 간다면 우리는 이 험한 세상에서 분명코 승리할 것이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창 22:8). 하나님과 화목한 사이가 되었으니, 온전한 예배를 드렸으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실 일들만 믿고 나아가면 된다. 신용카드가 다 알아서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신다.
레위기 5:1-13
찬송가 254장 ‘내 주의 보혈은’
레위기 5장 1-13절은 속죄제에 대한 세부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1-6절은 부지 중에 범죄하였을 때 죄를 처리하는 것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7-13절은 속죄 제물을 드리기에 경제적 여건이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방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레위기 4장이 신분에 따른 속죄제를 안내하고 있다면 레위기 5장은 사람들이 부지중에 짓는 죄의 사례를 정리함으로써 이스라엘 자손이 어떠한 모양으로든 죄를 허용하거나 죄와 타협하지 않도록 교훈하고 있으며 개인이 처한 상황에 관계없이 이스라엘 자손이라면 누구든지 거룩한 삶을 살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속죄제의 세부 내용을 통하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를 깨닫고 죄에서 돌이켜 거룩한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것임을 발견합니다.
만일 누구든지(1-6)
(1) 만일 누구든지 저주하는 소리를 듣고서도 증인이 되어 그가 본 것이나 알고 있는 것을 알리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의 죄를 져야 할 것이요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며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는 마땅히 해야 할 증언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그것이 죄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채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5장 1-6절이 다루고 있는 ‘부지 중에 지은 죄’는 이처럼 자신의 행동이 ‘죄’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죄를 지은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저주하는 소리를 듣게 되어 그것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마땅히 증언을 해야하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죄가 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증언을 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부지 중에 죄를 범할 수 있음을 알고 범사에 죄에 대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소한 말과 행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방심하는 순간 죄는 아주 작은 균열로 시작해서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파괴하고 사회를 병들게 할 것입니다.
(2-3) 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들 곧 부정한 들짐승의 사체나 부정한 가축의 사체나 부정한 곤충의 사체를 만졌으면 부지중이라고 할지라도 그 몸이 더러워져서 허물이 있을 것이요 만일 부지중에 어떤 사람의 부정에 닿았는데 그 사람의 부정이 어떠한 부정이든지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허물이 있을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부정한 짐승으로 구별된 동물이 특별히 사람들의 안전을 위협하거나 건강을 해치는 성격의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은 부정한 짐승을 구별하였습니다. 부정한 동물로 구별된 것들의 사체를 부지중에 접촉하게 되면 부지중이라고 해도 그 사람은 부정하게 되고 자신의 죄를 제거해야만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이나 하나님께서 부정한 상태로 규정하신 몇 가지 상황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시체(레11:24)와 출산(레12:2-5) 직후 얼마간 그리고 한센병과 피부병(레13,14)에 걸린 사람은 부정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부정하게 되는 각각의 상황에 대해서는 레위기가 진행되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부지중에 사람의 시체와 접촉하거나 피부병에 걸린 사람과 접촉하게 되면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허물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표현은 사람의 부정에 접촉하였음을 인지하기 전까지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허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죄악‘(사30:13)으로 번역 되기도 하고 ’형벌‘(욥19:30)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허물‘은 ’죄와 죄의 대가‘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죄를 지은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처리해야 하는 책임이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허물’이 죄와 책임을 동시에 의미하기에 부지중이라도 사람의 부정에 접촉하게 되면 이미 그 사람에게는 죄가 있으며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을 때에는 분명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이 범죄하였더라도 그것이 발각되거나 죄를 지은 사람이 자수를 하기 전까지는 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죄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발각되지 않는 죄, 은밀히 숨길 수 있는 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죄는 없기 때문입니다.
(4) 만일 누구든지 입술로 맹세하여 악한 일이든지 선한 일이든지 하리라고 함부로 말하면 그 사람이 함부로 말하여 맹세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가 깨닫지 못하다가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는 그 중 하나에 그에게 허물이 있을 것이니
우리가 대화 중에 함부로 말하게 되는 경우는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감정에 치우쳐 말하는 경우입니다. 경솔한 말은 그 자체로 죄를 범할 위험이 있으며 자신의 경솔한 말로 맹세를하게 되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분명한 허물이 되었습니다. 맹세는 주로 더 높은 권위에 기대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레19:12). 따라서 맹세를 하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의 연약함을 간과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기 위해서나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기 위해서 경솔한 언행을 하게 될 위험이 있음을 인지하고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한 태도로 입술을 지켜야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말로 범죄하지 않고 일상에서 거룩한 삶을 이루는 방법입니다.
(5-6)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 그 잘못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경솔한 언행으로 죄를 지은 사람은 자신의 죄를 처리하기 위해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 먼저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해야 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은 속죄제를 드리기 위한 필수적인 절차입니다.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은 죄를 용서하실 수도 있고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수도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겸손한 태도를 나타냅니다. 우리가 부지중에 지은 죄와 관련해서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하나님 제가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모두 용서해주세요.’라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면, 앞으로는 모르고 지은 죄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드리고 부지중에 지은 죄를 깨달았거나 알고 지은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할 때에는 구체적으로 자신의 죄를 겸손히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자신의 범죄에 대하여 참회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속죄제를 위한 필수 절차인 죄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해를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요일1:9-10)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속죄제를 드리기 전 죄를 고백하는 절차를 통해 배우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비결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감추거나 사소해 보이는 죄는 슬그머니 넘어가는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겸손히 고백하며 날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안에 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속죄제의 제물은 어린 암양 또는 암염소였으나 그것들을 제물로 드릴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속죄제의 제물을 경제적 형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7-13)
(7-10) 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을 먼저 드리되 그 머리를 목에서 비틀어 끊고 몸은 아주 쪼개지 말며 그 속죄제물의 피를 제단 곁에 뿌리고 그 남은 피는 제단 밑에 흘릴지니 이는 속죄제요 그 다음 것은 규례대로 번제를 드릴지니 제사장이 그의 잘못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레위기 4장이 신분에 따른 속죄제의 제물을 구별하고 있다면 레위기 5장 7절 이하는 경제적 형편에 따른 제물의 구별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부자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물 보다 더 비싼 제물을 드리거나 더 많은 제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며 가난하다고 해서 제물을 생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기준을 따라 자신의 형편에 맞게 속죄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암양과 암염소를 대신해 산 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를 바치게 하셨습니다. 두 마리의 새 중에 하나는 속죄제로 바치고 다른 하나는 번제로 바쳐야했습니다. 비둘기 한 마리에서 나온 피는 제단 곁에 뿌리고 남은 피는 제단 밑에 흘려야 했습니다. 속죄제의 제물이 되는 동물의 죽음은 죄의 대가가 ‘죽음’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즉, 속죄제는 하나님께 얼마의 제물을 드리면 죄에 대한 면책권을 얻는 개념이 아니라 죄가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부자라고 해서 자신의 죄를 얼마의 물질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가난한 자라고 해서 부족한 경제력 때문에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속죄 제물의 희생을 통해 죄에 대한 경각심을 마음에 새겨야했으며 하나님 앞에서 사소한 죄와 심각한 죄의 구별이 무의함을 기억해야했습니다.
중세시대에 교회에서 판매 되었던 면죄부는 하나님께서 속죄제를 통해 주신 교훈을 망각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라는 속죄제의 교훈을 놓친 채 하나님께 적당한 제물을 드림으로 죄의 형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중세시대의 착각을 오늘날 우리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우리가 신을 만드는 과정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믿고 싶은 하나님의 모습과 성품을 우리 마음대로 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대가가 죽음이라고 분명히 선포하셨지만, 헌금을 통해 죄사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신앙생활했던 중세시대의 성도들처럼 우리가 믿고 싶은대로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속죄 제물이 되셔서 우리가 받은 죄의 형벌을 대신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의 눈에 우리가 죄를 해결하는 방식이 너무나 쉬워 보일 수 있지만, 우리의 회개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가능한 것이기에 결코 가볍거나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회개 기도를 드릴 때마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마음에 새겨야합니다.
(11-13) 만일 그의 손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에도 미치지 못하면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예물로 가져다가 속죄제물로 드리되 이는 속죄제인즉 그 위에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고 그것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기념물로 한 움큼을 가져다가 제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속죄제라 제사장이 그가 이 중에서 하나를 범하여 얻은 허물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그 나머지는 소제물 같이 제사장에게 돌릴지니라
앞서 속죄제의 제물과 속죄제를 드리는 방식을 소개하며 죄의 대가가 생명인 것을 강조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비둘기도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속죄제의 방편으로 고운 가루를 요청하셨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속죄제 제물로 요청하신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는 약 2.1리터의 양입니다. 고운 가루에 기름이나 유향을 섞지 말고 제사장에게 드리면 제사장은 한 손 가득 그것을 취하여 제단 위에서 태우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드렸고 나머지는 제사장에게 주어졌습니다. 고운 가루로 드리는 속죄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심판하시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살리시기 위해 율법을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비둘기도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형편이라도 반드시 죄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비둘기도 마련할 수 없는 그 사람에게는 당장 오늘 끼니를 해결할 고운 가루가 목숨 같은 음식이었을 것입니다.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상17:12)고 고백했던 사르밧 과부처럼 누군가에게는 고운 가루가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고운 가루의 속죄제가 결코 암양의 속죄제 보다 못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소해 보이는 죄라도 간과할 수 없으며 자신이 처한 상황과 형편으로 죄를 정당화하거나 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나 자연스레 죄를 짓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목적삼고 살기 보다 세상의 가치와 욕망을 목적삼고 살았으며 자신의 도덕 기준으로 타인을 정죄하거나 자기의에 빠져 살았고 이웃의 눈을 피해 적당히 죄를 짓거나 죄와 타협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속죄의 기회가 있고 가능성이 있지만, 속죄를 이루기 위해 도덕적인 삶을 살거나 나름의 종교적 열심과 결단만으로는 죄사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많은 헌금과 사회 구제 및 이웃을 위한 봉사 활동을 통해서도 죄사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죄제의 제물과 방법을 교훈하셨고 그것을 따라 속죄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회개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거룩한 삶을 이루어 나갑니다. 하나님의 대용품이나 우리가 만든 하나님을 믿는 종교생활에서 돌이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목적삼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거룩한 삶을 이루어가길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적당히 죄와 타협하고 상황에 따라 죄를 정당화하며 죄의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모습을 깨닫게하시니 감사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를 겸손히 고백하고 범사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실 때 우리의 노력과 결단만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여 거룩한 삶을 이루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당신이 부지중에 짓는 죄는 무엇이 있습니까? 왜 그 죄를 사소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까?
2. 경제적 형편에 따른 속죄제의 제물은 어떻게 구별 됩니까? 죄의 대가가 죽음이라는 속죄제의 교훈을 통해 예수님께서 속죄 제물이 되신 것을 기억할 때 당신의 회개 기도는 앞으로 어떻게 달라지겠습니까?
3. 고운 가루로 드리는 속죄제를 통해 당신의 상황과 형편으로 죄를 타협하거나 죄의 책임을 피하려 했던 모습에서 어떻게 돌이킬 수 있겠습니까?
4. 하나님의 대용품이나 당신이 믿고싶은 하나님의 모습을 믿는 것이 아니라 눈을들어 하나님을 목적삼고 거룩한 삶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속죄제에 대한 규례 3
레 5:1-13 / 노승수 목사
1. 속죄제를 드려야 할 경우들(5:1-6)
간단히 그간의 것을 복습하겠습니다. 먼제 번제는<올라>로 위로 올라간다는 뜻의 제사이고<온전한 헌신>의 의미가 담겨 있으며, 전체를 살라서 화제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제물의 경중에 따라 즉, 소득 형편이 어떠하든지, 하나님 앞에 온전한 헌신을 강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2장의<소제>는<민하>로 비제의적으로는 선물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곡식제사입니다. 이는 삶의 여러 정황들, 즉, 추수, 곡식을 빻는 일, 떡을 굽는 일, 삶아서 밥을 하는 일들 각야의 삶의 장면마다 드려야 할 제사로서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린다는 의미를 적용적 유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번제와 달리 기념물 일부만을 취하여서 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에게 돌림으로 너희를 가르치는 자들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갈라디아서의 가르침과의 적용적 유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3장의 화목제는 말 그대로 화목을 위한 제사로 앞의 두 제사와 다른 점은 제사장, 제사자 그리고 제사자의 가족이나 친구들고 일정기간 그 제물을 함께 먹는 친교의 제사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 이웃 및 가족간의 화목을 의미하는 제사이고 4장부터 오늘 본문 까지의 속죄제는 가장 많은 분량으로 그리고 이 구약 제사의 본령이기도 합니다. 앞의 제물의 성격에 따라 설명한 것과 달리 속죄제는 죄의 경중에 따라 제사장의 죄, 온 이스라엘의 죄, 족장의 죄, 평민의 죄, 그리고 오늘 본문의 속죄제물을 바치는 경우와 가난한 자들의 속죄제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본문의 가장 중심 단어는 죄를 깨우친다는 것입니다. 제사로 나아온 목적이 죄를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깨달을 때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원리를 적용하여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차례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크게 4가지의 경우를 언급합니다. 첫째 거짓 진술이나 증언의 경우 둘째 부정한 동물이나 사체에 접촉한 경우, 셋째, 사람의 부정에 닥친 경우 넷째, 잘못된 맹세의 경우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그 범과를 인하여 속건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이는 이 다음 본문에 나오는 보상제 성격의 제사를 이야기하는데 여기 나왔습니다. 아마도 이 경우들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어떤 손해를 끼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첫째와 넷째는 사람과 관련이 있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 보입니다. 이는 다음 본문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둘째와 셋째는 약간 불분명한데요. 아마도 성전 제사를 드릴 경우 부정한 채로 정결례를 행하지 않고 제사를 드렸다가 그 부정함을 깨닫는 경우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 속건제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하겠지요. 이는 내일 다시 다루겠습니다.
2. 가난한 이들을 위한 속죄제물(5:7-13)
번제나 소제나 화목제도 그렇지만 속죄제는 더더욱 반드시 드려야 하는 제사입니다. 그런 점에서 역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가 빠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다보면 흔히 듣는 말이 있습니다. '돈 많이 벌면 교회 나가겠습니다'라는 대답을 하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이것은 교회의 경험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죠. 도대체 어떤 경험이었을까요? 자격지심일수도 있지만 교회에서 헌금이나 이런 문제로 차별을 경험하는 것이겠지요. 제물이 많고 적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 7절과 11절의 '만일 힘이 ~~에 미치지 못하거든'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한국인들은 체면문화가 강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보다 주변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본질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어야 겠기에<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자원함으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헌금에서만 적용되는 원리가 아니라 예배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라 하겠습니다. 다만 제물에 차이가 있을 뿐 제사의 절차나 원리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큰 제물을 크게 받고 작은 제물을 작게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중심을 다해서 드리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