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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장 연구(요한1,1-8)/ (1) 머리말(1,1-18)과 증언들(1,19-51)
요한복음은 모두가 인정하듯이, 오랜 과정의 묵상, 해석, 재해석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해석되고 묵상된 층(層)들이 깊고 넓다. 다시 말하면 오랜 묵상과정을 통해 쓰인 것이기 때문에, 그 묵상과 설교 층들을 양파 껍질 벗겨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모두가 인정한다.
특히 나에게 깊은 감명을 준 가톨릭 신학자인 R.E. Brown의 요한복음 주석과, 개신교 신학자인 Smalley의 기록을 참고하였다. 요한복음 1장은 2019년 1월 2일에서 5일까지 매일미사 1월의 복음말씀이다. 지금 진행 중인 다른 글 씀은 일단 제쳐두고, 1월의 주일복음말씀묵상을 몇 회에 걸쳐 이 부분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다음 2020년 계획인 요한복음 주석을 위하여 모아둔 자료들과 그동안 묵상의 편린들을 활용한 것이다.
요한복음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머리말(1,1-18)과 증언들(1,19-51)로 이루어진 서론으로 1장 전체에서 다루고 있다. 둘째는 본론으로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제1권은 표적들의 책(2,1-12,50)이고, 제2권은 영광의 책(13,1-20,31)이며, 마지막은 부록(21장)이다.
1. 머리말(1,1-18)
<로고스 : Logos, 말씀>
요한복음의 머리말은 로고스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그리스(헬라) 지성인 독자들에게, 앞으로 전개될 요한복음에 대하여 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그들의 단어로 선행적 암시, 곧 길잡이를 주기 위한 것이다. 곧 요한복음 2장에서 서술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란, 영원한 신적 로고스가 성육신하여 하느님의 계시와 구원을 이룬 사건이라고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다.
요한1,6-8, 15, 19절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하고 물었을 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로 연결된다.
요한복음은 원래 6절로부터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것은 공관복음과 일치한다. 공관복음도 모두 세례자 요한의 증거로 시작한다. 물론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 기록이 있는데, 각각 마지막 단계에서 덧붙여진 서론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원래 있던 세례자 요한의 증거인 서론 부분 맨 앞 1-5절에 “로고스”에 대한 머리말을 덧붙여 쓴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그리스 지성인 독자들에게 이 복음서를 올바르게 이해시키는 길잡이를 주기 위해서이다. 로고스(Logos)는 플라톤 철학이나 스토아 철학에서 중심 되는 개념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로고스는 ‘합리적 생각과 그 생각의 외적 표현인 말’을 뜻한다. 곧 로고스란 ‘사상과 말을 함께 나타내는 말’이다.
이 로고스는 우주에 편만한 이치이며, 그것의 씨가 인간의 영혼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은 우주의 로고스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이치를 터득하여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로고스는 계시의 수단이다.
곧 로고스가 계시하여 지식을 얻는다. 지식은 그리스 철학에서 구원의 수단이므로, 로고스는 또한 구원의 수단이기도 하다. 요한복음의 머리말은 하느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수단이며 일꾼인 로고스가 성육신하여 하느님을 계시하고 그의 구원을 이루어 우리가 이제 하느님을 알고(지식),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선포하며, 이것이 이 복음서에 서술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의 의미라고 소개한다.
<구약의 말씀과 지혜신학과 그리스의 로고스 사상을 공히 배경으로 놓음>
요한복음의 머리말에 나타난 로고스 사상을 얼핏 보면, 그리스 사람의 관점에서는 자신들에게 익숙한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를 말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 한 꺼풀 벗겨 보면 구약과 유대교적 개념이다. 곧 구약에서 보이는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지혜사상을 나타내는 말이다.
창세1,1절은 “태초에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지으셨다.”고 선포한다. 곧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창조수단이었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계시 수단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세 율법으로 잘 표현되었다. 하느님의 말씀인 율법을 잘 연구하고 그 뜻을 터득해서 그 뜻에 맞게 살아가면 구원을 얻는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은 구원의 수단이기도 하다. 구약적 의미로 하느님의 말씀은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수단이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지음 받았기에 그 말씀을 띠고 있다. 이것을 자연 계시 또는 일반 계시라고 한다.
특별히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이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이요 예언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인데, 이것이 특별 계시인 성경이다. 자연에 나타난 하느님 말씀이든 아니면 성경에 나타난 하느님의 말씀이든 그것을 잘 터득해서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곧 구원이 된다.
또 지혜문학에서는 하느님은 세상을 그의 지혜로 창조하셨다고 한다. 예를 들면 잠언 8장을 보면 하느님이 이 세상을 지혜로 지으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띠고 있다. 온 세상이 하느님의 오묘하고 신비한 지혜를 띤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오묘한 지혜와 조화와 질서가 있다. 이런 지혜로 하느님을 알게 된다.
구약에서는 지혜의 근본은 하느님을 알고 경외하는 것이라고 한다(잠언1,7). 지혜가 하느님을 계시하기 때문에 지혜 있는 자는 하느님을 안다. 반대로 시편 14편을 보면, 그 마음에 하느님이 없다고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말한다. 지혜를 받지 못해서 하느님을 모르는 바보이다. 따라서 지혜가 계시의 수단이 된다.
지혜 있는 자는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경외하고 하느님을 의지한다. 지혜를 받지 못한 자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경외하지도 못한다. 하느님을 알게 하고 경외하게 하는 지혜대로 살면 구원을 받는다. 지혜 문서에서는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켜 하느님의 자녀라고 한다. 곧 하느님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지혜가 하느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수단으로 이해되었다.
유대신학은 하느님의 말씀과 지혜를 실체화하여 인격화한다. 하느님의 말씀(Logos)은 남성 명사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지혜는 여성 명사(Sophia)이므로 하느님의 딸이라고 한다. 이것을 유대 신학에서는 그림으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 잠언 8장을 보면, 지혜가 하느님의 딸로서 하느님의 어좌(御座)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것으로 그려진다.
초월의 하느님이 이 세상에 보내서 하느님의 일꾼(agent)이 되어, 하느님의 일을 대행하게 한다. 이와 같이 구약과 유대신학에서는 하느님의 말씀과 지혜의 개념을 동원하여 초월자 하느님의 내재함을 표현하려고 했다. 하느님은 초월자이시며 동시에 내재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구약신론의 기본이다.
그러면 초월자가 어떻게 이 피조 세계에 내재하시고 그것과 관계하시느냐? 바로 자신의 아들인 말씀을 통해서, 또는 자신의 딸의 지혜를 통해서 이 세상에 자신을 계시하시고 구원 활동을 하신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초월자의 내재함을 나타내는 신론(神論)을 천명하기 위하여 신약을 전후한 유대교 신학에서는 점진적으로 이위일체론적 신론(Binitarianism)을 발전시켰다.
이 신론은 하느님과 그 아들 말씀, 또는 하느님과 그 딸 지혜를 설정한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과 지혜는 하느님의 일꾼(agent)으로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 이들이 나타내는 뜻은 곧 하느님의 뜻이고, 이들의 일은 곧 하느님의 일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과 지혜는 하느님의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agent)가 된다.
요한복음의 머리말은 바로 이러한 구약과 유대교의 하느님의 말씀과 지혜 사상을 반영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머리말은 그리스의 플라톤 철학이나 스토아 사상으로 읽어도 잘 이해 할 수 있으며, 구약의 말씀과 지혜의 관점에서 읽어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 사상과 유대 사상이 놀랍게 융화(integration)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약과 유대교의 신학적인 배경에서 형성된 복음이 그리스적 개념으로 완벽하게 번역되고, 토착화된 가장 좋은 모델이다. 신약성경을 반복하여 읽으며 직접 세심히 들여다본다면, 복음의 토착화 또는 상황화에 대한 놀라운 모델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요한복음 외에도 사도 바오로의 서신과 히브리서, 요한묵시록 등이 모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상황에 복음을 잘 적용하려면 신약성경의 토착화와 상황화에 대한 다양한 사도적 모델들을 많이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창조, 계시, 구원의 중보자인 로고스(요한1,1-5)>
로고스의 성육신은 하느님의 은총과 계시(영광)의 사건으로서 참 지식과 구원의 가능성을 이 아래 세상에 열어 놓은 사건이다. 신성을 지녔고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인 로고스가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왔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이 아래 세상에서 하느님을 알고 그의 구원을 덕 입게 되었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2장-20장까지 서술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바로 이 복음, 곧 기쁜 소식을 선포한다는 것이다(1,1-18). 요한복음1,1-5절을 보면, 로고스가 하느님과 함께 신적 존재이자 창조의 중보자, 계시의 중보자라고 나와 있다. 로고스는 영원히 하느님과 함께하는 신적 존재이다.
요한1,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느님이시니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태초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느님과 하나이신 말씀이라고 핵심적으로 소개한다. “태초에”는 “영원 과거에”를 의미한다. 영원과거에 신성은 있으셨지만 인성은 없으셨던 하느님으로 시작한다.
말씀은 하느님에 대한 정의이고 설명이며 표현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정의되시고 설명되시고 표현되신 하느님이다. 말씀과 하느님은 분리되지 않는다. 말씀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은 하느님의 위격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곧 그분은 삼위일체(triune) 하느님이시다.
2절은 “그가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라고 말한다. 이 2절은 세상 창조 이전의 하느님의 영원에까지 소급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만물이 창조되었다. 영원 과거부터 영원 미래까지 그분은 하느님과 함께 계시며 또한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마태오복음(1장)이나 루카복음(3장)과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스도의 계보가 없는 이유이다(히브7,3절).
3-5절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한다. “그 안에”처음부터 말씀 안에는 빛과 생명이 있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요한복음에는 “생명”이라는 단어가 36회나 나온다.
요한이 말하는 생명은 이른바 “영생”을 말한다. 이 생명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창조된 것도 아니므로, 말씀 안에 선재(先在)하고 있었다. 이 생명과 빛에 대하여 요한복음서는 증언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시다(8,12; 9,5). 그분은 세상에 빛으로 오신 분이었다(12,46).
그분을 따라 가는 사람은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8,12). 그러나 세상은 처음부터 이 빛과 생명을 거부했다. 옛 창조물을 위한 빛은 물질적인 빛이었다(창세1,3-5, 14-18). 그러나 새 창조물을 위한 빛은 여기에 언급된 생명의 빛이다.
6-8절은 “하느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고 말한다.
“보내다”는 이 동사에는 특별한 위임을 맡겨서 특사로 보낸다는 뜻이 담겨 있다. 요한1,19-23절을 앞당겨 보면서, 저자 요한은 세례자 요한에 대한 그릇된 평가를 거부한다. 요한의 관심사는 그가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의 다른 행적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그릇된 평가는 후일 교회를 괴롭히는 문제였다(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알렐루야! 아멘!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