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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트만 [Bultmann, Rudolf, 1884~1976]
요약)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국적 독일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독일 니더작센주 올덴부르크 근교
주요저서 《예수》(1926) 《신약성서의 신학》(3권, 1948∼1953)
본문)
올덴부르크 근교 출생. 오랫동안 마르부르크대학의 교수직에 있었다. 신약학자(新約學者)로서 신약성서의 양식사적(樣式史的) 연구를 개척하였으며, 변증법적(辨證法的) 신학운동(神學運動)의 추진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그가 제창한 성서의 비신화화론(非神話化論)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이와 표리일체(表裏一體)를 이루는 해석학(解釋學)의 문제는 전후(戰後) 신학의 한 주제가 되어, 그 영향하에서 불트만 학파가 성립하였다. 주요저서에는 《예수》(1926) 《신약성서의 신학》(3권, 1948∼195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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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불트만(1884-1976)의 신학사상
불트만은 1884년 독일의 올덴부르크 지방의 한 루터교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독일의 튜빙겐, 베를린, 말부르크 등의 주요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말부르크에서는 빌헬름 헤르만 교수에게 칼 바르트, 프레드릭 고가르텐과 함께 강의를 들었다. 그후 브레스라우와 기센 등지로 옮겨다니며 가르치다가 1921년에 그의 모교인 말부르크로 돌아와 1951년 퇴임할 때까지 거기서 봉직하다가 1976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공관복음서의 전승사](1921), [예수](1926), [신앙과 이해](1933), [신약성서 신학](1948)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많은 저서와 논문 등이 있다. 1941에는 "비신화화"에 대한 신학의 새로운 주제를 발표하여 신학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불트만은 신약 성경 학자였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성경적, 기독교 신앙을 현대의 지성에게 이해시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신약 성경에 대한 실존주의적 해석을 채택했다. 그것은 고대 문서의 메시지가 개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개인의 신앙적 반응을 촉구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 그는 신약 성경의 주해와 조직신학 사이에 격차가 없는 것으로 보았으며, 오히려 양자의 임무는 신약 성경을 통하여 그 개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함으로써 인간의 실존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앙과 역사적 예수: 19세기말 역사적 예수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역사비평의 방법은 예수의 역사를 단순하게 복음서들에 나타난 그의 초상과 동일시할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 신약의 본문들 속에 선포된 그리스도와 본문들 이면에 놓여 있는 진정한 역사적 예수 중 어느 것을 규범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19세기말 성경학자들은 역사적 예수를 찾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는 [역사적 예수 연구](1906)에서 그러한 예수를 찾는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고 결론을 내렸다. 연구자들이 본문으로부터 재구성한 예수의 모습은 그들 자신의 상상을 반영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마틴 켈러(폴 틸리히의 선생)는 [소위 역사적 예수와 역사, 성경적 그리스도](1896)에서 신약 성경의 의미를 푸는 열쇠는 그것이 묘사하는 역사나 역사적 연구 방법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선포한 메시지를 통하여 주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는 선포된 그 그리스도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마틴 켈러의 역사 성경적 예수는 성경 이면의 역사적 예수라기보다는 교회가 선포한 신앙의 예수, 즉 당시의 제자들이 신앙 가운데 받아들인 예수 그리고 제자들을 통하여 선포된 예수이다. 마틴 켈러는 폴 틸리히의 기독론과 불트만의 신앙적 그리스도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불트만은 역사의 예수는 알 수 없으며, 복음서의 예수는 헬레니즘화된 예수를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틸리히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예수를 알 수 없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에 문제가 된다고 보지 않았다. 신앙의 중심은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교회가 선포한 예수, 초대교회의 케리그마 즉 메시지라고 주장했다. 신앙은 역사적 연구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역사의 예수에 대한 지식의 문제가 아니며 지금 실존적 상황에서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 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예수는 신앙과 별 관련성이 없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객관적 자료와 지식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행하셨다는 선포인 복음의 메시지 속에서 부딪히게 되는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반응이다. 신앙은 케리그마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에 발생한 일들이 신앙과 전혀 상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가 부정하려고 했던 것은 신앙이 역사적 탐구에 의해서 떠받쳐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건들 속에 하나님의 행동이 있었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역사적 연구가 아니고, 신앙의 눈에만 그것이 보일 뿐이다.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 자신을 하나님의 계시의 초점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그는 신정통주의의 특징인 계시의 케리그마적 이해를 충실하게 대변하는 대변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는 한 개인이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와 부딪히게 되는 그 현재적 조우에 놓여 있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사건들이 중요하다면 그것은 다만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구속적인 행위를 하셨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이다.
종말론: 19세기 낙관론에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의 종교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그의 윤리적 가르침, 진리, 그의 인격을 강조하는 반면 그의 종말론적 메시지를 무시하였다. 그러나 성경에서 묵시 문학의 중요성을 요하네스 바이스와 알버트 슈바이쳐에의해 재발견 되었고 불트만은 그들의 연구를 기초로 신약의 종말론을 재해석했다. 불트만은 그 메시지가 처음 주어졌던 당시의 시간에 국한된 의미를 넘어서서 그것을 실존주의적 의미로 바꾸어 놓았다. 영생을 말하며 종말을 논의할 때, 미래적 종말이 아닌 소외된 현실의 실존으로부터 본래적 실존으로의 전이, 즉 신앙으로 얻어지는 현재적이며 실존적 실재로서 종말을 말하고 있었다.
신화론: 자유주의 신학은 신화들 가운데 발견되는 영원한 진리들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신화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불트만은 여기에 반대하였다. 그는 신화를 제거하면 신약 성경의 진정한 메시지인 '케리그마'도 상실되기 때문에 신화 제거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불트만은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신화의 제거가 아닌 신화의 해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그가 말했던 '비신화화'(dymythologizing)라는 용어의 의미이다. 그는 본문에서 신화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려 하기보다는 그 요소들의 의미를 정확히 실존적 의미에 따라 이해하기를 바랬다.
불트만이 가지고 있는 최우선적 관심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마다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실재와 실존적으로 마주하게 하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비신화화 작업은 이러한 만남이 가능하도록 해주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해석학: 자유주의 신학은 고대의 텍스트와 현대적 사고 사이에 벌어져 있는 격차를 좁히기 위한 노력으로 그 문서들 속에서 '영원한' 진리들을 찾아냈다. 그들에게는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수가 가르쳤던 윤리적 원인들이었다. 즉 그들은 본문에 보편적이고 영원한 원리들이 들어 있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객관적인 해석학적 수단들에 의하여 발견될 것이라는 가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불트만은 독자의 본문의 관계는 그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본문에 대하여 어떠한 질문들을 가지고 가느냐에 따라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답이 결정되는 것이며, 본문이 다루는 주제와 우리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가 질문을 결정한다고 말했다(그리스도와 신화, 51).
불트만은 고대의 텍스트와 현대 세계 사이에 놓여 있는 격차는 우리의 주해작업에 적절한 '전이해'를 수용할 때 비로소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고대의 텍스트와 현대의 독자를 연결시켜 주는 질문은 인간 실존에 대한 것이었다(그리스도와 신화, 53). 그들의 신화적 우주관-이것은 신화적 세계관을 통하여 표현되었다-에도 불구하고, 성경 기자들은 어느 시대에든 인간들의 마음속에 놓여 있는 동일한 질문인 인간의 개인적 실존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때문에 불트만은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실존주의는 "인간의 실존을 이해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각과 개념들을" 제시하기 때문에, 성경문서들에 접근하는 데 필요한 적절한 전이해를 제공한다고 말했다(그리스도와 신화, 55). 인간 실존에 관한 결정적인 질문을 그 본문에 가지고 감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성경의 '케리그마'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우리는 초월자와 직면하게 된다.
하나님의 초월: 불트만은 하나님의 초월성이라는 개념을 그의 종교 사상 전반에 급진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적용하고자 했다. 그가 나름대로 재구성한 바에 의하면, 고대인들은 우주를 공간적 의미의 3층 구조, 즉 하나님과 위에 있는 천국 그리고 땅 아래 지옥이 놓여 있다는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불트만은 한마디로 이러한 우주관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과 서로 모순이 된다고 주장했다. 즉 하나님의 초월성은 더 이상 공간적인 개념으로 이해될 수 없다. 대신 불트만은 비공간적 이해를 제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 세계관의 또 다른 차원에 기초한 것이었다.
신적 초월성을 특정 시간에 한정되지 않는 영원한 것이며, 물질과 관능의 세계와 대조되는 정신으로 보았던 희랍적 개념과는 대립적으로 성경적 초월성이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불트만은 하나의 실존적인 이해를 제시했던 것이다. 초월성이란 하나님이 결단이 필요한 실존적 순간에 우리 앞에 나와 서서 우리에게 그의 말씀으로 말씀하시며 믿음의 반응을 보이도록 도전함으로써 본래적 실존을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 안에 드러낸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개인적 신앙의 반응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다. 이 자기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의 전달이나, 지식의 체계가 아니라 그 개인을 불러서 반응하도록 촉구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객관적으로 말할 수 없고 다만 인격적인 하나님을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말하는 자가 하나님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말하는 중립적인 자세는 배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관념의 체계가 아니라 그 개인에게 주어진 (주관적 체험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다.
실존주의와 신학: 슈버트 옥덴은 불트만의 신학적 동기는 일차적 동기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초월성을 지키고자 하는 관심이었다고 한다. 실존주의를 통하면 "그가 일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기본적 개념을 그가 아는 한에서 그 밖의 어떤 개념을 통해서 표현하는 것보다 더 적절히 표현할 수 있다(존재와 신앙, 19)"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불트만의 이러한 움직임이 그가 극복하고자 했던 해석학의 문제, 즉 어떤 텍스트에 접근할 때 그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되 이미 알고 있는 개념들로 그 본문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그 본문을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문제에 기인한다고 본다. 불트만은 다만 인간 실존에 대한 물음이 해석학적 원리로서 유일하고 적절한 것이라고 보았다(Young, 역사와 실존신학, 48).
우리는 불트만의 이러한 동기를 그가 다루고 있는 문제들 가운에 하나에 국한된다고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그는 분명히 실존주의에서, 그가 언급하고 있는 모든 문제 전반을 다룰 수 있는 유용한 열쇠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가 다루었던 문제들에는 신의 초월의 문제, 해석학적 문제, 신화, 종말론, 역사적 예수 등의 문제가 포함된다. 즉 "하나님은 오늘의 인간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라는 질문이다. 불트만의 반응은 신약 성경 자체를 통하여 그리고 실존 철학에서 발견한 인간 실존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전적 타자로서 초월한 모습 속에서 인간 개인에게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급진적으로 삶을 바꾸는 반응을 촉구한다. 그러므로 그 정의로 볼 때 하나님에 대한 담론인 신학이 동시에 인간의 실존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이데거와 신약성경: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이데거는 그에게 소위 인간에 대한 객관화 된 견해만을 제공할 뿐인 전통적인 존재론들과 맞서는 하나의 대안을 제고해 주었다. 전통적인 존재론들은 인간을 볼 때 각각의 인간이 인격적 결단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인간 됨을 결정하는 한 개인으로서 그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는 개념으로, 즉 역사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어 그 인간을 보편적인 측면에서 본다. 그러나 불트만은 자신이 하이데거의 신약 성경 해석을 슬그머니 도용하고 있다고 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실존주의에서 발견되는 기본적인 방향성이 신약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믿음의 구조들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불트만은 실존주의를 신학에 가해지는 외부적인 영향력으로 보지 않고 신약 성경의 메시지 자체의 핵심 정수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실존주의 철학이 복음의 메시지만이 답할 수 있는 질문을 제기하는 기본적인 방법을 제공할 뿐 아니라, 그 답이 주어지는 틀인 기본적 개념의 체계, 즉 인간 실존의 영역을 제시하기 때문에 이 철학을 신학적 작업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 편입시켰다.
실존주의 범주들: 그가 사용한 실존주의 범주 가운데 첫 번째 것은 '실존' 바로 그 자체의 범주였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실존이란 결코 일반적인 것이나 보편적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 그 개인과 그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존재를 과학적인 의미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존재와 인격적 선택을 다룬다는 의미에서 실존적 의미로 보았다. 결과적으로 존재란 매순간 발생하는 하나의 단회적 사건이지 일직선상에서 진행되는 발전이 아니다. 그것은 한 개인이 하나의 주어진 순간 속에서 내리는 결단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상의 존재를 구별하였다. 전자를 실존이라고 칭한 반면, 후자를 '존재'라고 불렀다. 하이데거의 영향에 나타난 것으로써 불트만 신학의 핵심에는 '실존'과 '세계' 사이의 구분이 존재한다.
두 번째로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역사성 이해에 그 기초를 두었다. 그는 각 개인이 역사적 존재라고 언명했다. 이것은 우리가 각 개인을 볼 때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보아야지 자연의 영원한 구조와의 관계 속에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각 사람은 각자의 고유한 역사라는 의미에서 역사적이다. 불트만은 주장하기를 각 개인이 중요한 것은 자신과 인생 과정을 통하여 일어나는 일들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떤 고정된 본질이 아닌 바로 이러한 반응들에 의하여 그 개인이 누구인가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삶은 과거가 아닌 미래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개인의 결정들에 의하여 형성된다.
본래적 실존: 존재와 역사성의 개념들과 관련된 것으로 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 사이에 중요한 변증법이 존재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에는 두 가지 양식이 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던져졌다는 도전을 수용할 때마다 일종의 본래적 실존(authentic existence)을 발현시킨다. 반면, 그들이 이 세상과 자신 사이의 구분을 상실할 때마다 비본래적 실존(inauthentic existence)을 발현시킨다.
불트만은 죄(불신앙)와 신앙이라는 성경의 용어들 사이의 구분을 이해하기 위해 이러한 도식을 사용했다. 비본래적 실존은 '세상' 즉 현실적인 것들의 영역이나 자신이 이룩한 성취들 또는 과거 속에서 안정성과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 안에서만 자기를 이해하려는 것으로서 죄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본래적 실존은 삶의 기초를 '세상'에 두기를 거부하는 대신, 자기 중심적인 안정성을 부인하고 미래에 대하여 자신을 여는 개방성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것들에 삶의 기초를 둔다. 이것은 신앙, 곧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헌탁(commitment)이다. 그리고 하나의 새로운 자기 이해는 신앙을 통하여 나온다. 신앙은 그 개인이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반응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역사: 역사란 단순히 비인격적이며 초연한 태도로 과거의 사실들에 대하여 추구하는 학문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의미있는 역사적 지식이란 항상 실존주의적 지식이다. 그것은 인격적 만남을 이루며 역사와의 교섭을 통하여 오는 것이다. 불트만은 마틴 켈러로부터 '히스토리'(Historie)와 '게쉬히테'(Geschichte) 사이의 구별을 받아들였다. 불트만에 따르면 초연한 중립적 관찰(히스토리)은 과거를 원인과 결과의 연쇄로 보고 거기서 사실적 정보망을 이끌어 낸다. 그러나 사건들을 인간 실존이라는 문제의 시각에서 접근하면 더 이상 단순히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이 아니라 현재적 사건이 되어(게쉬히테) 한 개인의 인격적 실존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므로 단순한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미 있는 역사, 곧 계속해서 영향력을 미치며 의미를 주는 사건들이다.
이러한 역사관에 관련된 것이 불트만의 시간에 대한 이해이다. 그는 하이데거의 '염려'에 대한 삼중 구조로부터 따왔다. 불트만은 시간을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 나누는 일반적 구분이 현재를 비차원적인 수학적 점으로 삼고 과거와 미래를 나누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보았다. 반면, 하이데거의 실존적 시간 이해는 현재를 결단의 시점으로 보고 현재에 초점을 맞추었다. '과거'가 단순히 한 번 일어났던 일을 가리키기보다는 비본래성의 영역과 맺고 있는 관계 때문에 그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되는 것은 과거란 결정의 부재나 가능성이 결핍된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과거는 이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가능성을 가지지 않는다. 한 사람의 과거와 연관되어 있는 비본래성은 과거의 죄를 인정함으로써 개인의 실존에 부가된다.
미래는 '아직 아닌 것' 그 이상이다. 그것은 결단을 요구하는 가능성의 영역이다. 한 사람의 현 존재 속에서 그 개인은 미래, 곧 가능성의 영역에 직면한다. 결과적으로, 각 사람은 미래로부터 살도록 요청받는 것이다. 이제 '현재'는 단순히 '지금'이 아니다. 그것은 책임적 결단의 상황, 즉 과거와 미래를 통합시켜 본래적 실존으로 만들어야 할 결단의 상황이다.
신앙과 복음: 불트만은 여기서 하이데거와 결별하였는데 바로 기독교적 '케리그마'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본래적 실존이 외부의 도움이 없이도 개인이 도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희망을 내비쳤던 하이데거와 달리 불트만은 기독교적 선포에 제시된 하나님의 은혜에 오직 믿음의 반응을 보임으로써만 나타나며, 그 반응 자체는 하나님이 일으키신 하나의 기적이라고 주장했다.
바울의 말에 따라 그는 '케리그마'가 구원 사건으로서의 십자가의 부활에 대한 설교라고 주장했고, 이 두사건은 불가분리의 연합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때 그는 단순히 나사렛 예수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들'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우리가 주목해 본 바대로, 불트만에게 있어서 의미 있는 역사는 해석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야성적 사실들과 동일시될 수 없다. 신학자로서의 생애 초기에 그는 이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속죄와 용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모든 이론들을 배척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 즉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의 개개인들에게 주어질 때 그것들이 지속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케리그마'에 대하여 반응할 때,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의 경험이 된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될 때, 십자가는(불트만은 이것을 예수의 역사의 한 사실로 받아들였다) 하나님이 인류를 해방하기 위한 인류에 대한 심판이다. 부활은(불트만은 이것을 과거 역사의 한 사건으로서 말하기를 거부했다) 죽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거나 예수가 피안의 생명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십자가의 구원의 효력을 믿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불트만은 주장했다.
기독교 메시지의 선포가 믿음을 낳는다고 불트만은 말했는데 믿음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케리그마'는 예수 그리스도와 대면하는 장소이며 그것을 듣는 자에게 그것은 '종말론적 사건'이 된다. '케리그마'를 통하여 살아 계신 주님을 믿는 자를 위하여 이 (낡은) 세상의 종말을 가져온다.
비판: 보수주의자들은 이 독일 학자가 성경의 권위를 위태롭게 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가 신화적 범주를 성경에 적용한 것에 대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영(Young)의 요약은 이러한 상황을 강조하고 있다. "불트만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계시의 역사가 아니다. 예수는 세계 역사 속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적 사건이 아니라 말씀의 선포와 청취 속에서 그렇게 화(化)한다. 하나님의 행위의 초월적 특성은 특별한 의미로만 유지될 수 있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 후에 있었던 역사의 한 사건이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의 차원이라는 등등."
불트만의 프로그램의 중심에는 주요한 신학적 문제가 놓여 있다. 이 문제는 세 가지 주요한 약점들로 확인된다. 첫 번째는 주해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생활에, 세 번째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일방적인 주해: 첫째 불트만은 실존주의라는 여과망을 신약학에 적용함으로써 지나치게 단순화된 주해를 하는 경향을 낳았고, 그것은 또 한쪽 측면만을 말하는 신학을 낳게 되었다. 신약 성경의 '케리그마'는 본질적으로는 실존적 강설이라는 그의 주장이, 한편으로 그 문서가 말하려는 주요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 문서에서 제시하려는 바를 거두절미한 왜곡이다. 많은 본문들이 단순히 불트만이 공식처럼 제시한 인간 실존의 이슈를 다루지 않고, 다른 주제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가 신앙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예수의 생애에 관한 내용을 별 무관한 것으로 여겼는데, 이는 그가 신앙을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했다는 메시지에 대한 반응으로서만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몰트만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그렇게 보면 "구체적인 역사성이라는 것은 항상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를 통하여 드러나고, 가능해지고, 일정한 한계가 정해지는 것이지, 그 역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하지 못한다." 우리 신앙의 표현으로서 예수의 역사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은 그 역사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사유화된 신앙: 둘째로 불트만의 신학적 접근법은 복음 메시지에 대한 너무 좁은 이해와 함께 곧 너무 좁고, 사유화한 신앙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본래적 삶의 문제에서 그것도 매우 개인화된 모습의 인격적 결단이다.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강조는 기독교 신앙의 공동체적이며 사회적인 차원들을 제외시킬 위험이 있다. 그는 믿음이 신자의 삶에 미치는 외적 영향이나 신자들의 공동체적 삶에 대해서는 거의 강조하지 않는다. 신학적으로 볼 때 불트만의 프로그램은 개인의 칭의(그 개인이 비본래성으로부터 본래성으로 변모하고자 하는 결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화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제적인 삶의 역학, 서로가 연합하는 공동체 속에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주님의 제자들로서 영적 성장을 해 가는 것에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왜곡된 하나님: 셋째로 불트만은 그의 실존주의적 여과망의 영향 아래 무한한 질적 차이라는 주제를 급진적으로 적용한 결과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기에 이르렀다. 신학적 강화를 인간 실존의 차원에만 국한시키다보니 하나님의 영원한 실재라든지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행동 등에 대한 주장을 배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불트만은 하나님이 내 안에서 행동하시는 경우에만, 즉 그 분이 본래적 실존을 창조하시는 한에서만 그 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신학을 본래적 실존으로 이끌어 가는 하나님과의 체험적 만남에 대한 성찰로 만들어 버리는 실수를 했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 한에서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고 한 불트만의 주장은,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을 인간의 신학적 주장의 한계 밖에 놓이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원한 신적 실재로는 알 수 없게 된다. "신앙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신비는 하나님이 그 자체로서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는 인간과 더불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주장이 하나의 중요한 진리에 대하여 지적하고는 있지만, 신약 성경과 신학사 등과 비교할 때 한마디로 신학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을 너무 축소시켰음을 알 수 있다.
불트만은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대부분의 진술들을 신화적이라고 분류하는 한편,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을 위하여 단번에' 행하셨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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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트만의 생애와 사상
(RUDOLF K. BULTMANN, 1884-1976)
김희보, 서울장신대 교수
루돌프 불트만은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 중에도 원문으로 불과 50쪽 안팎인 ‘신약성서
와 신화론’은 그야말로 신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속에서 주장된 ‘비신화화론’
을 두고 신학자 G. 보른캄은 “프로테스탄트 신학계와 세계 교회에서 달리 찾아볼 수 없
는 격렬함으로 논란되고 있는 문제”라고 하였다.
불트만은 신약학 부문에서 큰 업적을 남기고 있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신학의 다
른 분야에도 큰 업적을 남기고 있다. 그는 신약학자요 역사학자며 고대 문헌 학자인 동
시에 조직신학자요 실천신학자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그를 가리켜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
서의 신학자라고 일컫고 있다.
(가) 불트만의 생애
불트만은 북부 독일에서 목사의 아들로 출생하여 튀빙겐, 베를린, 마르부르크 등 여러
대학 신학부에서 K.뮐러, H.궁켈, A.하르나크, W.헤르만, A.율리허, J바이스 등 저명한
교수에게 배웠고 1910년에 논문 ‘바울의 설교문체 및 견유파와 스토아파의 디아트리
베’를 바이스 교수의 지도 아래 써서 학위를 받았고 1912년에는 율리허 교수의 지도 아
래 교수 자격논문 ‘모프스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의 석의’를 써서 신약 학자로 나섰
다. 신약교수가 된 불트만은 마르부르크대학을 출발점으로 하여 브레슬라우, 기센을 거
쳐 1921년 하이트뮐러의 후임으로 마르부르크에 돌아와 신약학 교수가 되어 51년에 은퇴
할 때 까지 그곳에서 강의하였다.
1921년에 ‘공관복음서 전승사’를 저술하여 K.L.슈미트, M.디벨리우스 등과 함께 성서
학의 양식사적 방법을 제창하였으며 1924년부터 변증법 신학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 입
장에서 1926년에 출판한 것이 ‘예수’이다. 그 무렵 ‘존재와 시간’을 발표한 철학자
M.하이데거와 친교를 가졌고 그의 실존 분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찌 정권에 대립한 고백교회에 소속하여 일하였고 1941년 ‘신약성
서와 신화론’으로 비신화론을 제창하여 세계적인 파문을 불러 일으켰으며 같은 해에
‘요한복음’, 1948-53에 ‘신약성서와 신학’등 수준 높은 학적 업적을 발표하여 세계
신학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외에도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 ‘원시 기독교’(1949),
‘역사와 종말론’(1957), ‘그리스도와 신화’(1958), ‘신앙과 이해’ 전 3권(1933-
60) 등이 있다.
(나) 신학사상의 형성과 전개
마르부르크 대학의 신약 강사로 출발한 불트만은 엄밀하게 역사적 및 비평적 방법을 사
용하는 학풍을 강의와 연구의 기초로 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19세기 후반부터 일어
난 종교사학파의 흐름을 이어 신약성서를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여러 종교 등 주변 세계
와의 관련에서 파악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다가 1921년에 출판된 ‘공관복음서 전승
사’에서 양식사 방법을 제창하여 신약학자로서 독자적인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는 바르
트의 ‘로마서’(특히 1922년 간행된 제2판)를 빌미로 하여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추진되
어 온 변증법 신학운동에 논문 ‘자유주의 신학과 최근의 신학운동’(1924)으로써 그 운
동에 참가할 뜻을 나타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히틀러에게 비위맞추는 독일
기독교인에게 반대하여 고백교회에 가담하여 독일 교회 투쟁에 참가해서 바르트와 같은
길을 걸었다. 그러나 불트만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바르트와 다른 독자적인 길을 걸었
다.
첫째는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는 변증법 신학의 운동에 참가한 후에도 이미 연구의 기
초로 삼은 역사적 및 비평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고 그것을 더욱 추진해 나아갔다. 그리
고 둘째로 ‘존재와 시간’(1927)의 하이데거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불트만이 1941년에 ‘신약성서와 신화론’에서 제창한 신약성서 비신화론에서는 위에 말
한 두가지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신약학자로서 출발한 불트만이 가장 포괄적
인 의미에서 신학자로 도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특정한 시대와 환경에 한정
되었던 이를테면 지난날의 문서로서의 신약성서가 이 장소와 이 때에 살고 있는 사람들
에 대하여 현대를 향한 메시지로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밝히려 하였다.
(다) 양식사 방법의 제창
신약학자로서의 불트만이 이름을 확고하게 한 것은 ‘공관복음서 전승사’에서 주장한
양식사적 방법의 제창이었다. 그것은 궁켈이 구약성서의 연구에 적용한 유형사적 연구
를 신약성서 중 특히 공관복음에 적용한 것이었다. 그 방법은 이미 1919년에 슈미트와
디벨리우스 등에 의해 제창한 바 있으나 1921년에 출판된 불트만의 이 저서는 그것들과
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불트만은 그것을 브레슬라우 시대에 정리된 것으로서 연역적
이거나 구성적이기보다는 보다 분석적인 특색이 강하다.
불트만은 문화의 양식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나누었다. 아포르테그마(=짧은 이야기의 틀
에 수록된 예수의 말씀으로서 논쟁적 대화, 교육적 대화, 전기적 아포프테그마로 나누었
다), 독립된 전승으로 되어 있는 주의 말씀(=지혜의 격언, 예언적 및 묵시적 말씀, 율법
의 말씀과 교회 규칙, ‘나’의 말씀, 비유 및 그와 비슷한 표현), 이야기(기적이야기;
치유 기적과 자연기적, 역사이야기와 성자의 전기)등으로 분류하여 공관복음을 고찰하
여 각 양식을 형성한 배후에 원시 기독교단의 삶의 자리를 밝히려 하고 있다.
종교사학파의 흐름을 이은 불트만은 팔레스틴에서 성립된 원시 교단과 헬레니즘 세계에
서 성립된 원시 교단의 차이점을 받아들이고 그에 즈음하여 원시 교단의 창조적인 영향
력이 예수에 관한 전승의 형성 및 확장에 큰 역할을 수행한 사실에 주목하였다. 특히 마
가복음에 의해 창조된 ‘복음서’라는 문화 양식이 헬레니즘 세계에 성립된 원시 교단
의 선교와 예배에 뿌리를 두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불트만의 이와 같은 주장은 공관복
음을 소재로 하여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으로 다시 구성하는 것이 단순하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던 19세기 예수의 전기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동시에 각종 문학적인 양식을 낳
게 된 원시 교단의 생활을 탐색하여 복음서가 예수의 전기가 아니라 원시 교단의 신앙
의 증언 내지 선언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케리그마 신학의 막이 열렸음을 알리는 것이었
다.
(라) 신약성서 비신화론
양식사 방법이라고 하는 불트만의 신약학자로서의 독특한 주장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형성된 것과 같이 비신화론이라고 하는 그의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신학적인 주장
이 발표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 진행되던 때였다.
변증법 신학 운동에의 참가와 또한 하이데거와의 친교 등에 의하여 이미 좁은 뜻의 신약
학자의 틀 안에서 벗어난 불트만의 보다 포괄적인 신학 주장은 1933년 이래로 논문집
‘신앙과 이해’(제1권은 하이데거에게 헌정되었다. 전4권)로서 출판되어 왔었으나 그것
이 가장 단적으로 제시된 것은 그의 ‘신약성서와 신화론’의 출판에 의해서였다.
이것은 원래 1941년 여름에 남부 독일 알피스바하에서 열린 잡지 ‘복음주의 신학’의
세미나에서 그가 행한 강연이었다. 그것이 이윽고 ‘복음주의 신학 논총’ 제7권에 불트
만의 다른 논문들과 같이 출판되자 전쟁 중인데도 대단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비신화론’에 관해서는 이미 본지 ‘성서학 방법론’에서 언급한 바 있으나 다시 정
리하여 언급하기로 한다.)
불트만에 따르면 신약성서의 세계상은 하늘 세계와 땅위세계 및 땅밑세계등 3계층 편성
으로 된 신화적인 것으로서 케리그마의 내용을 이루는 구원 사건은 이 신화적인 세계상
에 대응하여 언급되어 있다. 즉 하늘 세계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선재하시던 하나님의 아
들은 사람이되어 땅위 세계에 오셨고 하나님과 사탄의 여러 힘이 활동하는 지상에서 활
약하셨으며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속죄의 죽으심을 당하고 땅밑 세계에 내
려가셨다가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그것은 죽음과 여러 힘이 그 힘을 잃는 우주적 파국
의 시작이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세계에 올라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 그곳에서 땅위세
계에서 성령을 부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성도들을 인도하시며 이윽고 하늘 세계에
서 다시금 땅위 세계로 내려오사 최후의 심판을 행하시고 구원의 사건은 완결된다는 것
이 바로 3단계 편성의 신화적인 내용이다. 이와 같이 유대교적인 묵시문학과 그노시스적
인 구원자 신화에서 유래한 신화적인 세계상을 현대인에게 승인하게 하는 일은 그와 같
은 3계층 편성과는 전혀 다른 과학적 세계상 가운데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아무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은 신약 성서가 본래 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승인을
요구하는 것은 아무 필요도 없다.
따라서 비신화화의 과제는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제까지의 비신화화가 한결같이 신화
를 비판적으로 삭제한데 대하여 불트만은 그것을 비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제창하였
다. 이와같이 비신화화는 해석학적인 과제이며 우주론적인 신화론을 실존론적으로 해석
한다고 하는 인간학적인 과제라는 것을 명확하게 밝힌 점에 불트만의 독자적인 공헌이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합리화가 아니다. 케리그마는 이 장소와 이 때에 있어서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는 부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트만의 논문집 ‘신앙과 이해’가 말해주고 있는 바와 같이 지성의 희생을 요
구하는 이해없는 신앙이 아니라 이해를 수반하는 신앙이어야 하며 바로 이것이 ‘오직
믿음’이라고 하는 바울과 루터적인 칭의론 인식의 영역에 있어서의 철저함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불트만이 신약학자로서 쌓아올린 업적은 하나의 시기를 금긋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
이 널리 사상계 전체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된 것은 깊이 역사와 인간 문제에 관계되
어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는 성서를 진정한 현대인의 책으로 생각하였고 그 실존론
적 해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건이 이 나의 구원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으면
서 거기서 인간의 불안과 절망과 죽음의 문제와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해방된 새롭고 자
유로운 삶의 문제를 다루었다.
2000년 전의 예수의 십자가가 시대를 초월하여 나의 삶의 방법을 받쳐주고 있다고 하는
실존론적인 이해를 통하여 역사와의 대화에 들어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 역사와의
대화에 들어갈 때에 우리는 그것을 이미 운명으로서가 아니라 참으로 인간의 역사로서
담당하는 존재가 된다고 하는 것을 나타낸 점에 불트만 사상의 현대적인 의의가 있다.
불트만이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에 관하여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불트만에
게 있어서 인간의 기본적인 소재를 명백하게 하는 것이 하이데거의 배려와 불안의 존재
론적 카테고리이다. 때문에 성서의 신화론적 및 우주론적 표상과 언어는 배려와 불안으
로 번역되지 않으면 안된다. 더구나 불트만에게 있어서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역사의
상세한 객관적 서술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존재 가능성과 현존재의 역사성에
대한 통찰을 깊게 하는 것이다. 역사를 배우기 위해서는 역사가 말하는 바 주제적 내용
에 대한 앞선 이해와 인간 존재의 존재 가능성 및 현존재의 역사성에 대한 관심이 필수
조건이다. 또한 그것이 역사와의 만남과 해석을 위한 문제 설정과 거점이다.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한 거점은 실존에 대한 물음으로 일관되어 있다.
“가장 주체적인 해석이 가장 객관적인 해석이며 결국 실존의 물음에 의해 감동을 받은
사람만이 본문의 요구하는 바를 알아 들을 수 있다.”
불트만은 바르트와는 다르게 하나님에 관하여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은 신앙과 새로운 자기 이해를 창조함으로써 나의 자기 이해에 역사하시는 바 나에게 있
어서의 하나님이다. 불트만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과의 만남으로 해서 발생하게 되는 신앙과 이해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실존에 관한 물음에 의해서이며 간접적으로 하나님
이 역사하시는 실존과의 관련에서 말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와 죽음의 한
가운데 자기가 돌아오게 되어야 한다. 이 불트만의 죄와 믿음에 의한 칭의(의인) 더 나
아가 율법과 복음에 관한 이해는 하이데거의 비본래성으로부터 본래성으로의 구조와 밀
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성산지기(holyhill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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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트만의 역사이해(歷史理解)
- 불트만의 終末論 理解와 그 批判 -
Ⅰ. 불트만의 역사이해에 있어서 결정적 원리를 이루는 것은 '종말론'이며, 종말론은 불트만의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개념인 동시에 그의 신학의 방법론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불트만의 역사이해는 철저히 종말론적 역사이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불트만의 역사이해는 "역사는 종말론 안으로 삼킨"바 되었으며 그의 종말론과 역사이해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서 교의학의 전통적 이해를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불트만은 종말(Eschaton)을 단순히 미래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현재적인 것으로, 곧 개인의 실존을 의미하는 구체적 역사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역사의 과정이란 과거로부터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하여 진행되고 있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현재 안으로 들어와서 현실화되어 나가는 종말의 실현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불트만은 "종말론을 역사적으로", "역사를 종말론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물론 불트만에게 있어서 이 역사란 개인의 실존의 역사를 의미한다. 그러나 불트만은 본래적 의미의 역사는 세계사난 민족사가 아니라 개인의 실존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불트만의 종말론 및 오늘날 신학자들의 종말론의 원리를 형성하고 있는 종말과 역사에 대한 이와같은 이해의 성서적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미래적 종말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서 결정적으로 성취되었으며,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현재적 사건으로 언제나 다시금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세계사에 대하여 종말(Ende)을 의미하는 사건이다. 그를 믿는 자들은 시간의 과정으로부터 영원 속으로 옮겨져 있다. 이제 역사는 결정적으로 이미 성취된 종말의 지평 안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으며, 종말은 구체적인 역사와의 관계하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종말론 없는 역사"는 있을 수 없으며, 동시에 "역사 없는 종말론"도 있을 수 없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역사는 철저히 개인의 실존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불트만의 종말론적 역사이해는 "종말론적 실존이해"이며, 그의 역사적 종말론은 "실존적 종말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Ⅱ. 그러면 종말론적 실존이해를 의미하는 종말론적 역사이해가 무엇인가?
불트만에 의하면 신약성서의 종말론적 역사이해는 근본적으로 구약성서로부터 유래하며, 구약성서의 역사이해는 모세오경의 기자들로부터 유래하는 전통적 구약성서의 역사이해와 후기 유대교의 묵시문학적 역사이해로 크게 분류될 수 있는데, 신약성서를 지배하고 있는 역사이해는 묵시문학적 역사이해이다. 따라서 예수의 선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구약성서의 역사이해라기 보다는 묵시문학의 역사이해이다. 그러나 예수가 구원의 미래를 상세히 기술하지 않고 있으며, 구원을 단지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에 묵시문학과 예수의 차이가 있다.
초대 공동체는 예수의 이 종말론적 선포 내용을 받아들였으며, 묵시문학의 전통에 따라 이 선포 내용을 더 발전시켰다. 초대 공동체는 유대교로부터 구약성서를 받아들이고 구약성서의 역사와 자기 자신을 연결시켰다. 그리하여 자신을 참된 이스라엘 혹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 이해함으로써 구약성서의 역사관과 묵시문학적 종말론을 결합시키게 되었다. 초대 공동체는 예수의 오심을 구약성서의 역사와 연결시키고 예수를 구약성서의 역사, 곧 구속사의 목표요 완성이라고 해석하였다.
이와 같은 구약성서의 역사와 예수 및 초대 공동체의 역사의 통일성은 "새 계약"의 개념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초대 공동체가 기대하였던 세계의 종말이나 "사람의 아들"의 재림은 발생하지 아니하였으며, 역사는 예전과 변함없이 진행되었다. 이로 인하여 예수로부터 물려받은 초대 공동체의 종말론은 의심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초대 공동체는 종말론과 지연되고 있는 재림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던가? 이 문제의 해결이 사도 바울과 요한의 새로운 종말론 이해라고 불트만은 생각한다.
사도 바울의 역사이해도 "전적으로 종말론에 지배되어"있으며, 묵시문학의 역사이해를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묵시문학적 역사이해를 변형(modifizieren)시켜서 과거의 역사에 대하여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즉 바울은 묵시문학의 역사관을 그의 인간학으로부터 해석하였으며, 또한 묵시문학의 종말론도 인간학적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본래 종말론적 사건이요, 예수의 부활은 보편적 부활의 시작을 뜻한다. 신앙인의 실존은 이제 종말론적 실존이며, 역사는 "종말론에 의하여 삼키워졌다."
따라서 역사는 이미 성취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역사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본래의 역사는 이제 인간의 역사성이 실현됨으로써 인간의 실존안에서 이루어져 나간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종말론은 역사의 목표로서의 그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근본적으로 개인적 인간 존재의 목표로 이해되었다."
바울은 우주적 드라마로서의 이 세계의 종말, 구름을 타고 올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들의 부활, 최후심판 등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과 함께 결정적 사건은 이미 일어났다고 바울은 본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초대 공동체에서 일어난 종말과 재림의 지연문제에 대하여 답변하고 있으며, 묵시문학적 역사이해를 비신화화하여 개인의 종말론적 실존에서 종말의 사건과, 또 이 사건에서부터만 주어질 수 있는 역사의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
요한은 바울이 종말을 현재적으로 해석했음에도 불구하고 묵시문학적인 미래의 종말론을 포기하였다. 그리하여 바울보다도 더 철저하게 종말을 현재적 사건으로 이해하였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가 이 세상으로 왔고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간 것은 "종말론적 사건"이요, "세계의 심판"을 말한다. 그러나 이 심판은 "극적이며 우주적인 사전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서 발생한다."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를 믿는 자는 이미 심판을 면하였으며,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오히려 요한은 각 개인이 이 세상에서 죽음 후에 이루어질 완성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Ⅲ. 이와같이 신약성서의 역사이해는 본질적으로 후기 유대교의 묵시문학젹 종말론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으나 바울과 요한에 의하여 수정되고 있다. 그리하여 미래의 종말은 개인의 실존 가운데서 일어나는 "현재적 사건"을 의미한다. 불트만은 이 사건을 가리켜 이미 신약성서 자체 안에서 일어난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비신화화"라고 명명한다. 즉 이 세계의 종말이 초자연적인 세력들의 출현과 함께 돌연히 오리라는 묵시문학의 종말론적 역사관과 시간이해는 신화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화적인 표상방법은 과학을 통하여 그의 사고가 결정되어 있는 현대인
에게는 낯선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묵시문학의 종말론적 역사관 및 세계관은 현대인에게 무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묵시문학의 종말론을 완전히 포기하여 버린다든지 혹은 우리의 역사적 실존과는 무관한 것으로 방치하여 두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신화적 형태 속에 숨어 있는 내용을 현대적 방법으로 새롭게 표현해야 한다. 즉 신화화하여야 한다.
불트만이 여기서 말하는 "비신화화"란 신화적 진술들을 제거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해석하는 것이다. 또한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비신화화란 묵시문학이 말하는 세계의 종말이 개인의 "실존적 사건"으로 해석됨으로써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실존적 내용"내지 "실존적 의미"가 드러나게 됨을 의미한다. 불트만이 실존론적 해석을 통하여 드러내고자 하는, 곧 비신화화시키고자하는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실존적 의미"는 개인 실존의 "역사성(Geschichtlichkeit)에 있다."
이 역사성이란 불트만의 신학에 있어서 중심적인 인간학적 개념이다. 곧 "인간의 본질"은 그의 "역사성"에 있다고 불트만은 본다. 인간의 본질이 역사성에 있다는 말은, 인간은 역사 안에서 본래적 자기, 곧 자기의 "본래성"을 실현시켜 나가야 할 존재임을 말한다. 이 본래성을 인간은 획득하여 나갈 수도 있고, 아니면 그르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가능성, 곧 Sein-K nnen을 의미한다. 자기의 본래성을 언제나 미래에 두고 있는 인간의 이 Sein-K nnen을 가리켜 불트만은 역사성이라고 말한다.
불트만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임으로써 과거의 자기로부터 독립적이며 책임적인 결단에로 자유스러워질 수 있다. 그리하여 자기의 본래성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자기의 본래성이 결정되는 이 사건이 묵시문학이 말하는 종말의 사건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래성은 언제나 미결정, 미완성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미래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다. 이것이 또한 역사 속에 처한 인간 현재의 규정(Bestimmung)이기도 하다. 이 규정을 가리켜 불트만은 "역사성"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은 그의 주어진 현재에 머무를 수 없고 언제나 미래를 향한 도상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곧 인간의 본질은 시간적으로 미완성된, 그러므로 그의 완성을 미래에 두고 있는 시간적 존재라는 사실을 가리켜 불트만은 "시간성"(Zeitlichkeit)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은 그 속에서 자기의 참된 본질을 실현시켜야 할 그 자신의 역사를 가지게 된다. 만일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포착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인간이 된다면 역사의 의미는 시간의 마지막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인간의 삶 속에서 성취된다. 이제 인간은 자기의 현재 속에 안주할 수 없으며 "미래로부터 그에게 주어지는" 자기의 본래성을 향하여 언제나 전진하게 된다.
그러므로 "미래성"(Zuk ntigsein)이 인간 실존과 역사적 현재의 구성적 요소를 형성하게 된다. 이 미래성이 곧 "인간 존재의 역사성"이며,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의 역사성이 근거되어 있는 그의 '시간성'을 의미한다. 곧 신앙하는 자는 과거의 자기로부터 해방되어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자기의 본래성을 향하여 끝없이 도약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신앙인의 삶의 근거가 되는 것은 미래이다. 즉 신앙하는 자는 "미래로부터" 살아간다.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와 자기의 본래성을 이 미래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받으며, 자기의 모든 순간을 "종말론적 순간"으로 체험한다.
따라서 신앙인의 실존은 "종말론적 실존"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실존 속에 있는 신앙인은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마치 비세계화된 자로서 미래로부터 실존한다. 미래로부터 실존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실존함을 뜻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살아가는 신앙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며, 따라서 "신앙인에 대하여 옛 세계는 끝났다." 이제 그는 역사의 종말에 존재하는 것과 같으며, 따라서 역사의 의미는 신앙하는 자의 "현재"에 있게 된다.
기독교 신앙이란 이 모든 것이 현재적 사건으로 일어나는 "종말론적 현실"이요, "모든 미래의 先取"(Vorwegnahme)로서 "종말론적 실존에로의 옮김"(Versetzung in die eschatologische Existenz)을 의미한다.
Ⅳ. 지금까지 불트만의 종말론적 역사이해 내지 그의 종말론 이해를 고찰하여 보았는데 이제 그의 종말론에 대하여 몇가지 비판을 시도하여 보고자 한다.
1.인간학적 왜소화(anthropologische Engf hrung): 불트만은 2천 년 전에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현재 인간의 실존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이해함으로써 이 사건을 철저히 현재화시키고 있다. 동시에 그는 이 사건을 아직도 미래에 머물러 있는 종말로 이해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종말화시키고자 한다. 불트만은 역사에 대한 객관적 사변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오직 개인의 실존과 관련시키고 있는 것이다. 곧 불트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의 개방"을 의미한다. 불트만의 이와같은 신학적 입장을 가리켜 "인간학적 왜소화"라고 말할 수 있다.
비단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뿐만 아니라 성서의 모든 진술들이 단지 인간의 실존과 관련되고 있다. 성서의 모든 진술을 인간의 실존과 관련시키고, 그 결과 인간의 실존과 관계되지 않는 것은 그 중요성을 상실하게 될 위험이 있는 불트만의 실존론적 비신화화론의 신학적 방법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즉 불트만의 이러한 견해는 실존적 의니가 없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성서의 신화적, 객관적 진술들을 배제해버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2.무역사성(Geschichtslosigkeit): 불트만의 신학적 사고에 있어서는 역사 대신 개인 실존의 역사성이 지배적인 개념이 되고 있다. 즉 역사의 의미는 개인의 주변을 싸고 있는 세계의 "보편적 역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에 있으며, 실존적 결단이 내려지는 "현재"에 있을 뿐이다. 이 사실을 가리켜 우리는 불트만 신학의 "무역사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성서적인 창조의 역사와 성서적인 종말의 역사는 신화로서 격하되어 버리고 오직 지금의 순간만이 결정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실증주의적 역사주의를 극복하고 실존의 역사성으로부터 역사를 해석하고자 하였던 불트만의 오류인 것이다.
3.종말론의 실존론적 왜소화(existenziale Engf hrung der Eschatologie):따라서 종말론도 무역사적인것으로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종말이란 "종말론적 지금", "종말론적 현재" 속에서 일어나는 개인의 내면적인 실존적 결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종말론적 미래란 아직도 미래적인 것으로 남아있는 것 내지 시간의 길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존재의 가능성에 불과하며, 그 이외에는 하등의 의미도 없는 것으로 되어버릴 위험성에 빠져 있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이 세계의 역사에 대하여 아무런 의미가 없다. 종말은 세계사의 목표가 아니라 "개인의 존재의 목표"에 불과하며, 따라서 기독교 종말론은 역사 전체의 의미와 통일성에 대하여 아무런 얘기도 할 수없다. 그것은 세계사의 "마지막 사물들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종말론적 순간" 속에서 개인을 그의 세계로부터 "비세계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 종말론이 역사적인, 시간적인 차원을 상실하고 오직 개인의 실존과 그의 순간에서부터 이해될 때 종말은 희랍적인 "영원한 것의 현현"으로 되어버릴 위험에 봉착한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종말론이 가진 세계사적 의미가 간과되고 있다. 그 대신 이 세계로부터 살아 가지 않고 미래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살아감으로써 본래적 자기에 이르는 실존적 결단으로 제한되어버린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불트만의 "종말론의 실존론적 왜소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세계사적인 모든 지평과 현실성을 결여한 불트만의 현재적, 실존론적 종말론을 성서적 종말론으로 이의없이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4.불트만의 인간이해는 추상적이며 무역사적이다. 왜냐하면 불트만은 인간을 사회의 여러가지 구체적 관계하에 존재하는 인간으로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개인과 세계, 기독교 신앙과 세계가 분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이 세계의 현실에 대하여 아무런 직접적 관련성과 의미를 갖지 못한 개인의 한 내면적 문제와 현상에 불과하게 된다. 인간이 신앙의 순간적 결단을 통하여 도달하게 되는 "본래성"의 개념도 불트만에게 있어서는 역시 추상적인 것이다. 개인이란 어디까지나 세계 내에 있는 존재로서 자기의 본래성을 이 세계내에서, 이 세계의 제반 관련성을 통하여 실현하여 나간다. 이와 같은 개인과 세계, 개인의 자기 이해와 그 시대의 세계 이해의 상관관계가 불트만에게서는 무시되고, 개인의 본래성 문제는 단지 개인의 내면성의 문제로 취급되고 있다.
5.여기서 또한 추상화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구체적 역사 현실의 하나님이 아니라,오히려 이 현실과 대립되어 있는 존재이다.이리하여 불트만에게 있어 하나님은 "세계없는 하나님","무역사적인 하나님"으로 되어 버리며 그 반면 이 세계는 "하나님없는 세계","세속적인 세계"로서의 그의 상태를 지속하여 나갈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과 행위,이 세계내에서의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하여 논의할 수 있는 여지는 조금도 없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현실을 인간의 실존속으로 왜소화시키는 것을 뜻한다.즉 이 세계전체가 하나님의 활동과 통치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실존만이 하나님의 활동과 통치에 영역으로 되어 버린다.
6.끝으로 불트만의 신학에 있어서 종말론적 현상으로서의 교회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그에게 있어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개인적 실존의 문제였지,신앙의 공동체와 그 운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은 단지 인간실존의 학문이 아니라 "교회의 학문"이요,또 "교회를 위한 학문"이다.(K.Barth)
그러므로 우리는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사고방식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 가를 유의해야 할 것이며,또한 이 사고방식이 가진 긍정적인 점,곧 "기독교 신앙의 실존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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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ltmann, Das Problem einer theoogische Exegese des Neuen Testaments
박영식
R. Bultmann, Das Problem einer theoogische Exegese des Neuen Testaments. in: J. Moltmann(Hg) Anfange der dialektische Theologie II. Chr. Kaiser 1962.
S. 47.
<문서 또는 성서에 대한 이해>
1. lutherische Orthodoxie
-독자와 직접적인 관련성.
-이론적인 지식보다는 자신을 해명해 주고 자신의 삶을 규정.
2. altere Rationalismus
- 일반적인 진리 또는 이성의 진리의 빛에서 이해, 이성이 Instanz가 되고 문서의 유용성을 결정
- 비이성적인 것은 다시 해석하거나 시대사적으로 제약되어진 것(zeitlgeschichtliche Beschranktheit)으로 간주함.
48.
3. 불트만의 비판: 이로인해 moderne zeitgeschichtliche Erklarung이 발생하고, die ewige Vernuftwahrheiten와 zeitlgeschichtliche Beschranktheit의 대립이 사라짐.
=> 개별적인 것을 보편적인 법칙성의 하나( das Individuelle als Fall einer allgemeinen Gesetzlichkeit)로 이해.
<다양한 관점들: 역사와 인간이해에 대해>
1.관념론적 이해
헤겔, 튀빙엔학파: 목적론적 역사이해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이념들이고, 이념들은 절대정신의 자기전개의 계기들이다.(die Momente der Selbstentfaltung des absoluten Geistes)
이념들은 개별적인 현상들을 통해 거쳐가는 구체적인 과정 안에서만 실재 Wirklichkeit를 가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절대정신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다.
2. 자연주의적 이해(인간이해)
역사의 법칙은 인과론이다. 역사는 인과적인 힘들에 의해 움직여 지고, 인간은 그 관계의 산물로 여겨진다. 따라서 시대적인 또는 개인적인 사상, 이념, 제도들은 발전의 결과로서 설명되어진다.
3. 생물학적 인간이해와 역사이해.
인간은 지, 정, 의의 다양한 기질들을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존재로 이해되고, 역사는 바로 이러한 기질들의 전개 안에 놓여있다.
시간사 Zeitlgeschichte 가 자연사 Naturgeschichte로 바뀌고, 역사적 운동의 실현을 위해 경제학적, 사회학적, 정치적인 필연성에 놓여있는 충동이 필요하다.
49.
기독교의 역사는 사회학이 되고, 생물학적 인간이해에서 개인은 종(Gattung)으로서의 인류로 이해되었다.
4. 심리학적 관점.
역사의 운동을 간과해 버리고, 종교사적인 주석에 이용됨.
-성서의 가르침보다는 그 뒤에 있는 체험과 분위기를 강조.
-경건이 역사의 주제가 됨.
-의식, 신비, 그리고 이런 것들의 기원에 관심을 가짐.
역사의 인과율 대신에 현상학으로서의 개선된 심리학을 수용
5. 인과법칙과 심리학적 인간이해와 역사이해에 반대하여, 미학적 관점에서는 인간을 형상(Gestalt)으로 이해, 즉 창조적인 샘, 능력의 중심이 전제되고, 그로부터 원초적인 체험과 계속적인 체험들로 인해 형상이 성장된다.
50.
<불트만의 평가>
위의 경우에는 루터 정통파에서 보여지던 독자에 대한 텍스트의 요구라는 근본적인 태도가 포기되어졌다.
- 텍스트가 독자와 거리를 두고 보여지게 되었다.
- 고유한 입장표명없이도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는 전제에서 출발.
- tua res agitur(사태가 너에게서 일어난다)의 관점이 아니라, 중립적인 태도로 주석이 이루어짐.
- 말해진 것의 의미와 요구에 대해 반성하려고 하지 않음.
- 개별적인 것들을 역사의 인과율아래 두었고, 역사를 거대한 관련성으로 이해함.
- tua res agitur의 관점: 해석하는 주체가 역사에 귀속됨. 즉, 해석하는 주체가 역사적인 운동 안에 영의 객관화인 개별적인 역사현상에 참여함으로써 영의 본질과 자기 자신에 대해 명확성을 확보한다.
- Betrachtungsweise(중립적인 관찰방식):
모든 개별적인 것을 발전의 법칙에 종속되는 특별한 경우로 취급.
이 때는 새로운 것을 보지 못함.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권위있는 것을 만나지 못하고,
다만, 자기 자신만을 역사 속에서 발견하게 됨.
51.
<결정적인 질문>은 우리가 역사와 마주함으로써 우리에 대한 역사의 요구 즉, 역사가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인지 하는 것이다.
52-3.
<시간사적 주석과 내용주석(die zeitgeschichtliche Exegese und die Sachexegese)>
- 시간사적 주석은 역사전체를 동일한 평면에 두고서 전체 역사로부터 개별적인 지점들을 인식하려고 함으로써 말해진 진술들을 시간사적으로, 상대적인으로 파악.
여기서는 텍스트의 단어, 언어를 중시하고, 말해진 것(was ist gesagt)을 개인적인 표현으로 취급.
시간사적 주석이 제기하는 물음은 비록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das Gemeinte)에 대해서라고 하더라도 "전체 역사는 동일하게 하나의 평면, 하나의 종이 위에 그려져 있다"(52)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 내용주석은 시간사 저쪽 편에 서 있는 빛을 포착하고, 무엇이 의미되었는지(was ist gemeint)를 파악하려고 함. 사건들의 관련성 저편에 서 있는 사실적인 내용(Sachverhalt)을 만나려고 함. 여기서는 "텍스트의 말"(das Wort des Textes)을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시간사적 해석이 동일하게 텍스트의 말을 추구할 때, 이 해석은 항상 이 말을 "말하는 개인"에게 귀속시킨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텍스트의 말"을 해석하지 못하고, 다만 관찰방식의 원리에 의해, 말해질 수 있는 것의 모든 가능성을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처분가능한 것으로 취급해 버린다.
- 여기서 텍스트의 말이란, 말하는 자의 밖에 놓여 있는 어떤 사태( Sachverhalte)를 지시하는 것으로, 청자에게 사건이 되어지는 것이다. 이는 단지 화자로서의 개인(das redende Individuum)이란 심리적 또는 시간사적으로 규정된 주체로 이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의 언설을 초주관적 사태(seine Aussagen als Hinweise auf transsubjektive Sachverhalte)에 대한 지시로 이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53).
<관념론적 주석과 내용주석>
1. 관념론적 주석: 진술을 개인적인 것을 넘어서 있는 내용으로 파악하나 청자에게 결코 사건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음. 오히려 내용은 이성의 체계, 이성적 정신의 본질이며, 사전에 해석자는 이성적 주체로 규정됨.
2. 내용주석: 말씀의 근원적이고 참된 의미와 함께 말씀을 진지하게 취하며, 그러한 가운데서 말씀을 사실내용의 지시로서 이해함(53).
1. "내용주석(Sachexegese)은 말의 근원적이며 참된 의미와 함께 <말>을 진지하게 취급함으로써 말을 사실내용에 대한 지시로서 이해하려고 한다."(53)
이러한 내용주석의 성격은 말해진 것과 의도하는 바 사이의 차이를 발견하는 비판, 즉 내용비판(Sachkritik)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통해 더욱 잘 규명될 수 있다.
2. 시간사적 해석은 그것이 내용비판을 행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형식적 논리"나 "내재적 발전의 관점"이 척도로 놓여 있으며, 무엇이 말해졌는가, 즉 내용(Sache)이 척도는 아니다 (54). 그러므로 이러한 주석은 어떤 권위도 없이 다만 상대적인 가치만을 언급할 뿐이다.
3. 내용주석과 함께 요구되진 내용비판은 그의 척도를 텍스트를 통해 이끌어진 주제로부터만 얻을 수 있다 (nur aus der durch den Text erschlossenen Sache)(54).
4. 내용주석은 실제로는 말해진 것을 통해 의도되어진 것을 추구하고, 이제는 말해진 것을 의도되어진 것 안에서 잃어버림으로써, 내용주석은 결코 결과적으로, 일반적으로 가치있는 문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살아있는 운동 안에 놓이게 된다(54).
S. 55.
<주석가의 이해가능성>은 그가 어느 정도 인간을 위한 가능성의 영역을 위해 개방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 즉, 인간가능성으로서의 실존가능성을 위해 주석가가 어떤 개방성(Aufgeschlossenheit)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텍스트의 이해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된다.
<자연과 역사에 대한 불트만의 입장>
-자연은 거리를 두고 사고할 수 있지만, 역사는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역사 안에 서 있고, 역사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해 우리가 하는 말은 반드시 우리 자신에 대한 말이다.
<불트만의 해석학>
- "진실로 중립적인 주석은 없다. '여기에 무엇이 있다'라는 식의 주석은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텍스트의 해석은 항상 주석가의 자기해석(Selbstauslegung des Exegeten)과 함께 손에 손을 잡고 나아갈 뿐이다."
S. 56.
- 관념론적, 심리학적, 낭만주의적이든, 모든 해석은 사실상 진정한 자기해석에 근거하고 있다.
- 종래의 해석: 주석자가 말해진것의 가능성에 대해 또는 의도되어진 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처분가능하다는 출발점에서 시작. 따라서 텍스트의 말씀은 그에게 사건이 되지 않았고, 텍스트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말하는 권위있는 것으로 대면되지 못했다.
이 때, 인간실존은 처분가능한 것으로, 안정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 인간실존은 일반적인 것, 즉 종(種)의 표본으로서 이해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개별적인 생 안에서, 시간성 내에서 유일하고 반복되지 않는 그 자신의 순간들과 함께, 그의 사건들과 결단과 함께 움직여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우리의 실존은 우리에게 처분가능하고 확실한 것이 아니라, 불확실하고 문제가 있는 것이며, 우리가 말씀을 말씀으로 듣는 준비가 되어야 하고 또 질문-우리에게 결단을 의미하는-을 듣고, 텍스트의 요구를 권위있는 것으로 듣는 것을 의미한다.
S. 57.
<시간성의 문제>
- 일반 해석에서는 시간성(Zeitlichkeit)을 오해하여, 발전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개별적인 시간계기의 중요성을 전체 안에 해소시켜 버렸다.
- 그러나 실존의 시간성은 보편적인 것의 하나(Fall)가 아니며, 무시간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미래로 이끌어가는 결단의 순간이다.
<주관성과 객관성의 문제>
-방법론을 통해 주관성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새로운 주관성에 빠진다. 왜냐하면, 방법이라는 것은 다만 인간실존에 근거지워 있는 해석으로부터 뛰따라 나오는 관찰의 방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 주석의 객관성은 역사의 현실성이 말씀으로 올 때에만 즉, 텍스트가 현실성으로서 주석가에게 영향을 미칠 때에만 유일하게 보증된다.
- 해석의 객관성은 방법론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권위에 있다. 즉 텍스트는 죽은 거울이 아니라, 실존적인 생동감을 가지고 있다.
57-8.
<텍스트에 대한 주석가의 태도>
1. 자신의 실존이해를 위한 노력이 요구
2. 텍스트의 말씀을 말씀으로 듣고 결단하며, 이 결단을 통해 말씀은 사건이 된다.
3. 사건은 객관적으로 관찰되어질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실존적으로 살아가는 청자를 위해서만 있다.
<해석과 판단기준>
- 주석할 때 역사의 현실성이 언어화 되리라는 보증은 역사의 현실성을 통해서만 스스로 주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언제 그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조종할 수 있는 어떤 기준도 없다.
S.62
<텍스트 이해>
-역사에 대해 마음대로 제어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그러나 실존의 질문에 의해 움직여지는 우리의 주석은 우리의 상황을 분명하게 만들어 준다.
-이해 그 자체는 활동이다. 자유로운 활동으로서 그것은 항상 나의 처분능력 밖에 서 있고, 결단 안에서 스스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나는 그와 동시에 서 있거나 그것을 조정할 수 없다.
S. 64.
<방법론에 대한 비판>
☞ 방법론의 비판에서 핵심 단어는 역시 역사와의 실존적 만남이다. 우리는 역사를 마음대로 처분하거나 관망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지 못하다. 다만 우리는 역사와의 만남의 가능성을 열어가야 한다. 더 나아가 불트만에게 명시화되진 않았지만, 여기서 방법론이란 소위 객관성 확보를 위해 요청되는 것으로 자연과학의 객관성 확보를 위해 사용될 수 있을지 모르나, 성서를 이해하는, 보다 넓은 차원에서는 역사를 이해하는데에 적용될 수는 없다.
1. 신약성서의 주석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방법론의 선언이 아니다. 방법은 현실적인 역사를 파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근본적으로 처분가능한 대상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해석이란 실제로 텍스트를 제3자에게 중재하는 것이어야 하며, 이 때 텍스트는 내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 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방법론을 통해 규정된 결과를 산출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2. 그렇게 할때, 역사는 죽은 역사가 된다.
3. 시간성의 성격을 잃어버리게 되고, 역사와의 실존적 만남의 길을 제3자에게 차단하게 된다.
4. "텍스트이해의 가능성은 언제나 그렇게 좁게 한계 지워질 수는 없다. 오히려 그 가능성은 마치 나와 너의 만남에서 자라나는 가능성처럼 고갈될 수 없는 것이다."(64)
S.66-7.
<신약성서와 신앙의 요구>
- 신약성서는 주석가 스스로가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으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식은 신앙하는 주석의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석은 질문 자체가 되어야만 한다. 물론 이 때, 질문이 올바른 질문이 되려면, 신앙의 질문이 되어야 한다.
- 신앙의 질문을 위한 준비라는 것이 주석가에게 전제되어야만 하는가?
신약성서의 과제는 교회의 말씀 전통 안에 서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내가 밖에서 보았을 때, 시간사적 개인으로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내 실존과 함께 말씀의 전통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면 신앙의 질문을 위한 준비라는 것은 있기 마련이다.
- 순종의 행위는 주석의 전제이다. 순종의 행위는 내가 취하고자 하는 입장에 놓여지지 않고, 오히려 행위되어진 것 안에서만 실재하는 자유로운 행위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내 실존의 전체를 요약한다.
S. 68.
<신학은 하나님에 의해 규정된 인간실존에 대한 개념적인 진술이다>
Theologie bedeutet die begriffliche Darstellung der Existenz des Menschen als einer durch Gott bestimmten.
왜냐하면 신학은 하나님에 대해서나 실존적 인간에 대해 마음대로 처분하지 않기 때문에, 신학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언설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언설이나 인간에 대한 언설이 될 수 있을 뿐이다.....그러나 신학이 항상 기억하는 것은 그러한 언설은 죄인된 인간의 언설이라 사실이다. 따라서 이 언설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언설이라고 주장할 수 없으며, 제한된 인식 안에서 옳다 인정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
성서신학은 말해진 것에 의해 시간사적 서술이나 신약성서 저자의 의식이나 현상에 대한 복합적 확정이 아니다. 오히려 성서신학은 역사의 현실과 실존적인 만남의 실행이다.
-조직신학은 하나님을 통해 규정된 인간 실존에 대한 개념적 해명 Explikation을 직접적인 주제로 설정하는 반면에, 역사신학은 그것을 간접적으로 실행하게 될 것이다.
☞ 여기서 조직신학은 교의학 뿐이 아니라, 신학에 대한 조직적인 서술을 의미하고, 역사신학은 교회사가 아니라, 역사적 서술방식을 의미한다.
이처럼 신학은 언제든지 학문적인 시도 ein wissenschaftliches Unternehmen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념적 사유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개념화시킨 내용이 합리적인 원천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해야한다는 요구에 대해 고통을 겪을 필요가 없다. 신학의 두가지 애매모호한 상황이 신학에게는 이러한 상황 속에 있는 다른 역사학에 대해서 보다 더욱 분명하다. 왜냐하면 신학은 결코 추상적 인간의 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학과 선포>
한편 신학은 직접적인 말씀 선포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학문적인 작업으로서 신학은 비교적 유용성에 의해 그것을 실행하는 반면, 말씀 선포는 자신의 문장이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확정적 주장이 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진술은 일반적이고, 무시간적 진리가 아니라, 계시가 사건이 되는 그 행위 안에서만 실재적이라는 사실로부터 자라 가는 운동성은 신학과 선포의 공통점이다.
S.71.
<주석 신학의 과제>
1. 주석학은 신약신학이 되어야 한다. 즉, 성서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날 수 있다는 전적인 동의에서 출발해야 한다.
2. 이 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말하여진 감추어진 말씀이다. 즉, 성서 안에 놓여 있는 계시 즉 감추어진 계시이다. 그것은 성서 안에서 언설로 우리와 만난다. 우선 하나님에 대한 언설과 인간에 대한 언설로서 제공되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영역에서 말해졌기 때문이다.
- 나와 너 사이에는 어떤 직접적인 만남도 있지 않으며, 다만 무엇인가에 표현이 그것의 성격과 함께 말 안에 감추어져 있듯이, 어떤 직접적인 계시도 있을 수 없으며, 다만 인간의 말Wort 안에 감추어진 계시만이 있을 뿐이다.
☞ 아직 불트만은 인간의 언어 Sprache와 신학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해서는 주제화하지 못했다. 다만, 불트만 은 성서신학자로서 성서와 성서 안에 놓여 있는, 사건화의 준비과정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언어, 인간의 사유와 하나님의 계시 사이의 관계에 대해 불트만이 산파의 역할을 했지만, 이 관계를 깊게, 넓게, 지속적으로 신학화하지는 못했다고 볼 수 있다.
3. 따라서 내용비판이 요구된다. 즉, 말해진 것 뿐 아니라, 말해진 것을 통해 의미되어진 것을 추적해야 한다.
☞ 불트만이 신약성서의 신화적 표현을 본질적인 의미해석을 위한 껍질로 이해하는 후기의 해석학적 발전형태의 단초가 바로 여기, 표현과 의미 사이의 날카로운 분리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텍스트는 특정한 관점에서 기록되었고, 이를 해석하는 자도 고유한 상황에 서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5. 쓰여진 언어와 문맥파악을 위해 역사적, 문헌학적인 연구가 요구된다. 그러나 역사적 주석 때문에 신학적 주석을 등한시 할 수는 없다. 실제 주석의 과정에서는 역사적 주석과 신학적 주석이 분석될 수 없는 연관 속에 같이 놓여 있다. 왜냐하면, 참된 역사적 주석은 역사와의 실존적인 만남에 의존하고, 또한 신학적 만남이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6. 모든 실존적 만남은 모험으로 감행할 수 있는 것이나 그런 식으로 방법론적 문헌학적 역사적 해명 안에 혹은 그 뒤에 자신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72).
☞ 불트만은 바르트와 이점에서 차이를 확보하려고 한다. 바르트에게 역사적 주석과 신학적 주석은 로마서2판의 서문에서 뚜렷하게 구분되고 분리되었지만, 불트만에게서 이 둘은 성서의 사신과의 실존적 만남의 길 위에서 함께 병행된다.
<나의 문제제기>
** 불트만은 조직신학의 과제가 하나님에 의해 규정된 인간실존에 대한 개념적인 진술이라고 했다. 불트만에게서 신학이 인간학이 되어버렸다는 비판은 이런 의미에서 아주 적당하다. 불트만은 자유주의신학자들이 취했던 역사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방식에 반대하면서, 역사와 실존, 하나님과 인간 양자 사이의 객관적인 거리둠이나 양자를 포괄하는 객관적인 관찰점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진정 역사보다는 역사 안에 놓여 있는 실존을, 하나님 보다는 하나님 앞에 있는 인간을 중심주제로 택하고 있다.
이는 신학의 고유한 대상을 인문학적 과제로 떠넘겨버린 무책임한 처사이다.
** 성서는 인간실존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가?
성서는 인간실존과 관계하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으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물론 인간실존과 무관한 세계와 미래가 아니라, 인간실존과 맞물려 있다. 그러나 인간실존으로 해소되어 버리지는 않는다.
** 불트만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언설방식, 표현방식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신학사의 중요한 과제를 던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신학은 자신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애시당초 하나님에 대한 모든 사유가 언어와 결부되어 있으며, 언어는 이 사유활동과 함께 있다는 근거에서 불트만의 관찰을 중요하다.
불트만은 인간의 말들로 기록된 성서 안에 하나님의 계시가 놓여 있다는 역설을 신약성서신학을 가능케 하는 신학적 근거로 설정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언어활동전체를 깊이있게 문제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인간의 사유와 언어활동과 계시와의 관계가 스쳐 지나가는 듯하게 스케치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정 인간의 언어 안에서 말해지며, 인간의 사유 속에서 형상화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 바깥에서가 아니라, 인간 안에, 인간과 함께 활동한다는 사실은 성육신의 원리에서 기독교 신학의 근거로 설정될 수 있다. 신학은 이 엄청난 죄인된 모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신학의 모험 속에서, 신학은 인간의 언어와 사유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말해야 하며, 동시에 인간의 언어와 사유자체를 하나님 언설의 부정적 요소로서 끊임없이 지적하면서, 자기비판과 순화의 과정을 스스로 감당해 내야 한다.
인간의 언어와 사유 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와 사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방해물이다. 이 두 표현은 신학작업의 기초이다.
따라서 신학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시적 표현이며, 상징적 언표이다. 신학은 언제나 새로워지기를 기다리며, 자신의 회개를 준비하고 있다. 동시에 신학은 이 그리움 안에 자신을 만나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표현이다.
신학은 소풍을 즐거워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소풍에 대한 기대감이 뿜어내는 자랑과도 같이 미래를 현실화하며, 진리의 기다림을 시간적으로 앞당겨 그려준다. 그러나 언제나 진리의 도래에 대한 설레임을 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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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wald Bayer: Entmythologisierung? (불트만의 비신화화에 대해)
박영식
Oswald Bayer: Entmythologisierung? - Chritstliche Theologie zwischen Metaphysik und Mythologie im Blick auf Rudolf Bultmann: NZSTh Bd. 34, 1992.
*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표시이며, 앞의 괄호 뒤에 적힌 글 모두를 포괄한다.
* 각주는 본인의 견해와 보충설명이다. 두꺼운 글자체는 본인의 강조이다.
* 본문은 직역이 아니라, 요약 번역이 대부분이다.
* 이 글은 1991년 9월 7일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 50주년 계시와 신화"라는 주제의 모임에서 발표한 강연이다.
(출발)
바이어는 불트만의 신학적 사유와 기술이 명쾌하다고 평가하고, 그의 비판적 질문과 주관적 진리관은 이미 오늘날 높이 평가되고 있다고 본다.
불트만에게서 비신화화 작업은 다름 아니라, 바울과 루터의 칭의론을 따라 가는 것으로써, 이를 인식의 영역에 철저히 실행시킨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니라, 바울과 루터의 칭의론-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있는 신의 구원행위를 오늘날의 인간에게 이해되도록 하며, 불가피한 당혹감(Argernis, Skandal), 즉 십자가의 스캔달을 잘못된 위치에서 빼내어 올바르게 다시 놓고자 함에 있다 (109).
바이어 교수의 질문은 기독교 선포의 비신화화가 필수적인지, 아니며 불가능한 것인지를 살펴보는데 있다. 이를 위해 그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그리고 고대 교회의 근본결정으로 소급하여, 여기서 발견되어진 것을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에 대해 검토하면서 결실있게 만들고자 한다.(109-110)
I. Christliche Theologie zwischen Metaphysik und Mythologie
기독교 신앙이 그의 사유하는 책임을 위해 신학이라는 단어 사용에 관여하게 될 때, 기독교 신앙은 신화론과 형이상학 사이에 설정되어 있으면서 양자 모두에게 비판적으로 묶여 있는 질문 설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신학 Theologie<<이란 단어는 성서 언어가 아니며, 오히려 고대 그리스어이다. 이것의 직접적인 의미는 >>Rede von Gott << 이다. 즉, 신들의 역사에 대한 노래와 이야기(Singen und Sagen)이다. 신학은 처음에는 입으로 구술되었고(mundlich) 그 후에 일정한 문서 약식으로 전달된 신들에 대한 이야기이다(Gottergeschichten). 신학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신들의 행위와 신들의 변형(Metamorphosen)에 대해, 그리고 한편으로는 다양한 형상으로 인간을 만나고 있는 그 당시의 신에 대해 이야기 한다(erzahlen).
이러한 방식으로 다양한, 물론 모순적인 인간의 현존재의 경험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학", 신들의 이야기에 대한 노래와 전설은 본질적으로 다신적이며, 결코 일신적이지 않다.
신학이라는 용어는 플라톤의 [국가](379a)에서 말해 지듯이, 신화론으로 이해되며, 날카로운 비판을 경험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신화에 대해 비판적인 형이상학(mythenkritische Metaphysik)의 첫 번째 시기와 마주하게 된다(110).
A. Mythenkritische Metaphysik
1. Platon
플라톤은 시인들의 신들의 이야기도 진실한 것을 포함하고 있지만, 전체로서는 거짓이라고 생각한다(377a). 이 때 플라톤은 국가통치자들의 이 시들을 통해 성장해 간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신들의 이야기가 덕(Tugend)의 관점에서 구술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는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해 반드시 근본적 특색, 즉 Typoi(Grundzuge)에 따라서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것은 엄격한 언어규율(Sprachregelung)이다(111).
어떤 날카로운 근본규정들(Grundbestimmungen)과 처방들(Vorstriften)아래에 신학이 놓이게 되었는가?
플라톤에 의하면, 신은 선하고(a), 불변해야 한다(b) (gut und unveranderlich).
a) 신은 모든 선의 근거(Grund)이기 때문에, 모든 사건의 원인(Ursache)라고 말해져서는 안된다(379b; vgl. 617e und Theaitet 176 b/c). 신은 불행에 대해, 악에 대해 무죄하다. 이런 면에서 호모가 일리아스에서 제우스를 선과 악의 후원자(Spender des Guten wie des Bosen)라고 말한 것은 비판된다.
이 때 플라톤은 고난의 문제, 신정론(Theodizee)의 문제를 선한 근거와 목표의 통일성에 대해서만 말함으로써 넘어가 버린다. Das Leiden und das Bose ist letztlich nur Schein. Gott ist schuldlos(617 e)(111).
b) 신학을 검열하는 두 번째 특색은 신의 Unverwandelbarkeit이다.
Als vollkommender ist Gott ganz einfach und wird nicht von einem andern verandert und bewegt 완전한 자로서 신은 전적으로 단순하며, 다른 것에 의해 변형되거나 움직이지 않는다(380 d/e). 이런 면에서 제우스와 다르다. 신은 무시간적이며, 왜냐하면, 시간은 역사(이야기), 변형가능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색의 날카로움은 그리스의 신화론뿐 아니라, 신약성서의 빌립보서 2장에 있는 그리스도 찬가까지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112).
플라톤의 진리에 대한 질문 -그는 진리를 하나인 것, 선과 불변하는 것으로 인식했다-은 신학을 다음과 같이 엄격하게 규정했다: 신학은 움직이는 신들의 신화(Gottermythen)는 비신화화된 개념의 규정으로 만들어야 한다.
신적인 것에 대한 철학적 로고스와 신들의 신화의 관계에서는 연속성 보다는 단절이 더욱 크다(112).
2. Aristoteles
플라톤이 규정해 놓았던 신적인 것 -자기 동일성 das Gottlich als mit sich zusammenstimmend, ja als mit sich identisch-, 이러한 경향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완성된다(112).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화론에서 신학이란 단어를 빼어내고, Theologik이란 단어로, 직관하는 betrachtende, 이론적인 학문, 즉 철학의 최고봉을 표시하였다.
시적 학문(Die poietische Wissenschaft)는 인간의 poiesis를 통해 발생하는 것들의 근거와 원인들을 안다(vgl. Metaphysik 981 a 24 -b 2)
실천적 학문은 인간생활의 현장(menschliche Lebenspraxis)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선을 대상으로 하며, 그것의 원동자(Urheber)로서의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다(113).
praxis 와poeisis가 우연적인 것-이렇게 또는 다르게 될 수 있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반면, 이론적 학문, 철학은 필수적인 것(was notwendig ist)과 관련된다. 철학은 무엇이 그렇게 있는대로 있어야만 하는지를 사유한다. 이것이 학문과 지혜의 최고의 영역이다(Metaphysik 1025 b, 1064 a; Nikomachische Ethik 1139 b-1140 a).
이론적 학문, 철학은 세 부분으로 분류된다. 자연과학, 수학, 신학(Theologik) (Metaphysik 1026 a, 1064 a/b).
자연과학이 현실적인 것(das Wirkliche)을 다루지만, 그러나 움직이는 것(das Bewegliche)을 다루는 반면, 수학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다루지만, 비현실적을 다룬다. 현실적인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을 다루는 것이 신학(Theologik)이다(113). 이것은 우선적이며 원래적인 원칙 (als das erste und eigentliche)으로서 신적인 것 (das Gottliche)을 향해 있다. 즉, 현실적인 것과 항존적인 것, 불변하는 것, 신뢰할 만한 것, 동일한 것의 정수와 보증을 향해 있다. 그것은 그 자신의 순수한 현실과 활동 안에서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지만,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 자신은 움직여지거나 자극받지(affiziert) 않는다. 그것은 부동의 원동자이다(der unbewegte Beweger)(Meta. XII; vgl. 1026 a). 또한 그의 부동성과 독립성 안에서 그는 전적으로 원칙(das Prinzip)이며, 통치자(Herrscher)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리아스의 말을 인용하여, 단일군주적 원칙을 신의 질서인 세계질서에 적용하였다. (Er ubertragt damit das monarchische Prinzip auf die Weltornung als Gottesordnung).
아리스토텔레스가 신적 세계원리를 불변하는 일자(als unwandelbar eines)로 생각함으로써, 그는 실제상 플라톤의 두가지 특색(신은 선하다. 신은 불변한다)을 의심없이 유효하게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학문의 이름을 이전 전통이 써 오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동일하게 부르고 있으면서도, 신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역사(이야기, Geschichte)로부터 떼어내어서, 이를 철학적인 개념에다 붙여 놓았던 것이다(113).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Theologie)는 결코 신화나 이야기를 구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영원하고, 움직이지 않는 그리고 감각적인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동떨어진 존재로 말해진다(sie sagt vielmehr ein ewiges, unbewegliches und vom sinnlich Wahrnehmbaren abgelostes Sein aus) (Meta 1073 a) (113-114).
신학은 더 이상은 결코 신화론이 아니다. 신학(Theologie)은 신논리학(Theologik)으로서 이제는 완전히 형이상학이다: 철학의 시작과 끝이다(114).
3. Stoa
스토아 학파의 사람들(Stoiker)의 노력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급진적으로 실행한 비신화화의 노선에 서 있다. 이들은 신학을 신화적 신학, 정치적 신학, 자연신학으로 나누어 놓고, 신의 참된 본질을 다루는 신학을 theologia physike(theologia naturalis)라고 불렀다(114).
4. Augustin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에서(Gottesstaat), 신학의 이러한 구분과 자연신학의 개념을 바로(Varro)로부터 받아들여서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 하나님께 봉사하는 종교, 그러므로 참된 자연신학을 대표하는 종교로서의 기독교 변증론 안에서, 바로가 신화적 신학에 반대하여 내세운 철학적 사유(die philosophischen Bedenken)는 또한 동일한 예리함 안에서 모든 정치신학에 대항하여 설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도시국가에서는 잘못된 견해들이 등장하고, 실제로는 세상에 있지도 않으며 세상 밖에 존재하지도 않는(existieren) 신들이 숭배되거나 믿어지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비그리스도인들과 대화를 위해 마련한 발판은 자연신학이다. 물론 이때, 신과 세상이 서로 바뀌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어거스틴이 신화적 신학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신약성서에는 이미 신화에는 진리가 없다고 말해지고 있다(디모데전서 1,4; 4,7; 디모데후서 4,4; 디도서1,14; 베드로후서 1,16).
Die christliche Theologie eines Augustin stellt sich, mit der Philosophie, gegen die unwahren Mythen und fragt nach Gottes wahrem Sein. Ist sie damit Metaphysik?
어거스틴의 기독교 신학은 철학과 함께, 그러나 참되지 않은 신화에는 반대하여 설정하고, 하나님의 참된 존재에 대해 질문한다. 이것은 그러므로 형이상학인가?(114)
바이어 교수는 형이상학과 신화론 사이에 머물러 있으면서 동시에 상호 비판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기독교 신학의 위치를 불트만의 신학에서 증명해 보이려고 한다. 그러나 먼저 이러한 주장을 종결짓고자 한다(115).
B. Das Christusdogma zwischen Metaphysik und Mythologie; Gottes Sein und Kommen.
칼케톤 공의회는, 신의 영원한 존재(Gottes ewiges Sein)와 그의 시간 안으로 오심(sein zeitliches Kommen)을 서로 "섞이지 않으며, 혼합되지 않으며, 나누어지지 않으며, 분리되지 않는다"(unvermischt und unverwandelt, ungetrennt und ungesondert)라고 표현함으로써, 신의 영원한 존재 자체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의해서 접촉되지 않은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Gottes ewiges Sein selbst ist von Jesu Tod am Kreuz nicht unberuhrt.)
1. 이로써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 형이상학의 무감정의 공리(Apathieaxiom)- 이에 의하면 신은 부동의 원동자이며, 그의 불변화성 안에서 고난받을 수 없다-를 부셔뜨린다.
2. 또 한편에서, 신화 비판적으로 볼 때, 마치 신성이 인간성으로 변화했다든가 또는 신이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 안에서 신이 되기를 포기했다든가 하는 변형(Metamorphose)의 사유를 거부했다(115).
십자가에 못 박힌 신의 이야기(역사)는 결코 신화에서나 익숙한 상상력의 자유를 허락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그의 시간적, 공간적 규정안에서 일어난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형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중요시된다. 그것은 본래적으로 그 안에 작성된 채 머물러 있다(115). 그것은 유일회적(唯一回的)으로 일어난 것이지, 계속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의 종말론적인 성격은 잃어버리게 된다(115-116).
II. Bultmanns Theologie zwischen Metaphysik und Mythologie
바이어는 불트만의 철저한 비신화화에도 불구하고, 신화적인 언설이 부활하신 십자가에 못박힌 자에 대한 해석에서 "하나님의 행위 Gottes Tun"라는 형태로 남아있다고 지적한다.
다른 한편, 불트만과 형이상학의 관계의 측면에서 볼 때, 불트만은 현대적인 형이상학, 즉 신의 본질에 대한 고대적 형이상학적 질문설정을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설정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실존형이상학Existenzmetaphysik (117).을 전개했다(116-117).
이러한 그의 질문설정은 칸트의 인간론에 대한 이원론적 질문형식에서 넘겨받은 것이다. 인과율의 카테고리 안에 있는 인간에게서 '인간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구출해 내는 칸트의 도식을 불트만은 앞에 놓여 있는 객관화시키는 표상들(objektivierende Vorstellungen als Vorhandene)과 자유로운, 참된 역사적 실존 (die freie, wahrhaft geschichtliche Existenz)의 도식으로 옮겨놓았다(117-118).
"Im Ansatz und Einsatz seines Denkens trennt Bultmann Naturhaftes und Geschichtliches....und kommt deshalb zu der These, mit der er sowohl die Notwendigkeit wie die Legitimitat seiner Entmythologisierung des Neuen Testaments begrundet" (118).
"Das Wort vom Kreuz ist fur ihn im entscheidenden nichts anderes als die Aufforderung,....das alte Selbstverstandnis.....preiszugeben und allein aus der vom Kerygma gebotenen Moglichkeit, d.h. aus der Zukunft zu leben" (119-120).
불트만이 현대인을 위해 신약성서의 케리그마를 이해시키려고 할 때, 현대인이란 칸트의 이원론으로 규정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불트만이 hullenlose Wahrheit (덮개없는 진리)를 추구함으로써, 사태 자체로부터 어느 특정한 시간동안 유효했던 언어적, 감각적 Hulle(덮개)를 제거하려고 했던 칸트의 도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또한 하이데거를 따라 불트만은 로마서1장 16절의 하나님의 능력 (dynamis theou)으로서의 말씀을 여전히 현실화되어야하는 가능성으로 이해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가능성의 형태 (die Modalitat der Moglichkeit)를 현실성의 형태 (der Wirklichkeit)보다 존재론적으로 앞세웠다 (ontologisch vorordnet) (121).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실존분석이 중립적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자기이해라는 존재적 시행을 신학의 선험적 조건 (das formale Apriori aller moglichen ont ischen Vollzuge menschlichen Selbstverstandnisses)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불트만과 슐라이에르마허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121-122), 불트만이, 순수한 형식적 존재론적 실존분석 (reine formal-ontologische Daseinanalyse)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전혀 주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슐라이에르마허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러한 자의식의 출처(Woher)로서 직접적인 자의식(unmittelbare Selbstbewußtsein) 안에 이미 항상 함께 개입되어 있으며,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이것을 알아야 한다(122).
기독교 신학이 형이상학과 신화론 사이에서 행해질 수 밖에 없다고 할 때, 기독교 신학은 더욱 형이상학에 대해 비판적으로 (metaphysikkritischer), 동시에 더욱 신화에 대해 의식적(mythologiebewußter)으로 되어야 한다(122-123). 이런 면에서 불트만의 신학은 형이상학에 너무 많은 공간을 할애한 셈이며, 신화에는 덜 할애한 셈이다(123).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1. 어떤 형이상학비판적 자세도 형이상학적 요구를 부인할 수는 없다. 이성을 가진 인간에겐 이 요구가 근절될 수 없도록 스며들어 있다. - 칸트는 형이상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Metaphysik, wie sie wirklich in der Naturanlage der menschlichen Vernunft gegeben ist (Prolegomena zu einer jeden kunftigen Metaphysik, die als Wissenschaft wird auftreten konnen, 1783, $ 60, erster Satz; PhB 40, 1957, 130).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지에 의해 우리 안에 살아있다. 그것이 우주에 대한 관심이든 또는 자기자신의 실존에 대한 관심에서든.
우주Kosmos와 실존Existenz을 분리하려고 하는 형이상학적 요구는 불트만에게서는 Entweltlichung으로 등장하는데, 이것은 극단적인 추상일 뿐이다. 따라서 불트만에게는 "순간"의 종말론을 제외하고는 창조론과 종말론이 없다.
2. 불트만이 기초하고 있는 칸트의 기초미학(elementare Asthetik)에 의하면,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행위의 자기화 (die Zueignung des stellvertretenden Handelns Jesu Christi fur uns in sinnlicher Zusage geschieht)가 감각적 동의로써 일어날 수 없으며, 신앙의 본질적인 향유로써 경험되지도 못하기 때문에, 신화를 의식한 신학자로서의 불트만은 하나님의 행위, 그 분의 구원행위와 이를 전하는 말씀인 케리그마를 유효화하고자 했으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III. Zusammenfassung
Der christliche Glaube hat sich zu seiner denkenden Verantwortung auf den Gebrauch des Wortes Theologie eingelassen und damit seine Theologie zwischen Metaphysik und Mythologie gestellt - so, daß sie mit beidem bleibend kritisch verbunden ist (123-124).
이를 불트만은 실존론적 해석을 통해 수행했으나 칸트의 이원론에 의지하였기에, 신화를 의식하는 점에도, 형이상학에 대해 비판적인 점에도 충분하지 못했다. 불트만은 칸트의 이원론을 실존적 결단의 순간 안에서(im Augenblick der existentiellen Entscheidung) 포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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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트만과 실존주의
20세기 기독교 실존주의는 신정통주의를 다루면서 거론되었던 많은 운동들 속에 그 출발점을 두고 있었다. 실존주의는 보편적 실존과 개인적 실존이 논리적으로 필요한 개념적 도구의 번주 안에서 합리적ㅇ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합리주의 개념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이다. 따라서 실존은 인간의 본성이나 인간적 가능성을 규정하는 고정된 인간 본질에 대한 어떤 관념도 배제하는 근본적 우연성과 자유로 표상된다.
Rudolf Bultmann(1884-1976) : 바르트의 관심이 하느님의 전적인 타자성과 하느님이 자신을 계시하시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인간이 하느님에 대하여 어떤 것도 인식하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데 집중하였고, 본회퍼는 오늘날의 인간에게 갖는 이 계시의 구체적인 함축적 의미들을 탐구하는 데 전념하였다. 불트만의 관심은 계시 그 자체에, 이 계시의 운반체인 성서에 집중되었다. 즉 성서의 메시지가 현대 세계에 이해되고 의미를 가지도록 성서를 해석하는 방식을 발전시키는 데 관심을 갖는다. 하느님의 계시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사용된 'thought patterns'은 시대의 상황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⑴ 역사비판적 자유주의 신학의 전통 :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비판적 정신 = 성서에 대한 학문적 비판적 작업과 그 지성적 솔직성, 지나간 신화적 초자연적 세계상과 대립하는 현대적, 자연과학적 세계상에 대한 문화 기독교주의적 긍정의 태도 ==> 자유주의 신학과의 결별 = "신학의 대상은 신이다.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난은 신에 관해서가 아니라 인간에 관해서 취급했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신인 신학은 그러므로 십자가의 말씀만을 그 내용으로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에 대해 거리끼는 것이다."(G.& V.I, p.2)
⑵ 바르트의 변증법적 계시신학의 영향 : 케리그마의 신학. 변증법적 계시신학 = "신은 인간의 전적인 지양이며 인간의 부정, 인간에 대한 문제 설정, 인간에 대한 심판이다."(GV I, p.118) "직접적으로 신과 그의 나라에 관계될 수 있는 어떤 행위도 없다. 인간적 공동체 삶의 모든 양식은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든, 가장 나쁜 것이든지 간에 신의 심판 아래 동일한 방식으로 서 있다."(VG I, p.15)
계시는 모든 인간적인 것, 문화, 종교, 사상의 심판이고, 따라서 계시는 모든 인간적인 안일과 안주함에 대한 위기이다. 계시에 근거한 변증버벅 사고는 신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요, 모든 인간적인 신 이해에 강한 부정을 가하고, 오직 신의 계시가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신은 항상 그의 계시를 통해 그의 계시자들(Offenbarer)에게 접근한다. ... 계시 밖에서는 신은 결코 있지 아니하다."(VG I, p.142ff)
⑶ 루터의 개혁주의적 의인론 영향 : 계시사고는 모든 인간적 신인식을 무로 돌리고 싱의 계시 말씀에 대한 신앙행위와 이 신앙에 의한 인간의 칭의를 강조한다. / 실존적 신인식 = "우리는 신에 관해서 모르며, 우리 고유한 자신에 관해서도 모른다. 우리는 신과 우리 자신에 관한 인식을 오직 신의 은총에 대한 신앙 안에서 가진다."(VG I, p.37)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에 관해서 말하기 위해서는 실존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VG I, p.36)
신앙은 "우리가 정립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행위이며 새로운 순종이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시는 신의 은혜, 즉 오직 신에 관해서만 말하고자 하는 나를 의롭다고 하시는 신의 은혜에 대한 신앙으로만" 신앙은 확실하다. 이 신앙은 우리에 대한 "신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고 "결단"이다.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믿는다." 그러나 "신앙은 이해되어야 한다." / 비신화론화(Entmythologisierung) = 신앙의 이해를 강조함으로써 현존재에 대한 철학적 분석사고를 요구하고, 계시 말씀의 이해를 강조함으로써 자연과학적 세계상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의 성서 이해를 위해서 신약의 계시 말씀을 비신화화한다.
성서에 나타나는 신의 행위으 역사적 현상을 신화론적 세계상에 의해 각색된 것으로 간주하고 捨象해 버린다. "행위하는 신의 피안성과 은폐성"과 "신의 비가시성"은 신의 행위를 가시적으로 대상화하려는 모든 유혹을 거부한다. 신앙은 객관화하는 지식에 근거하는 어떠한 안주성도 가지지 않고, 오직 허공을 향해서 그의 실존의 "그럼에도 불구하고"(dendoch ; trotzdem)라는 결단을 통해서 돌입해야 한다. "비신화화론은 신앙의 의인론을 지식과 사고의 영역에서 극단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 실존론적 의인론(existentiale Rechtfertigungslehre) = 이는 신에 관해서 어떠한 가시적 지식이나 객관화하는 역사적 근거나, 관찰 내지 탐구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실존적 결단이다. "오직 선포된 말씀의 빛 속에서만"신앙자에게 신은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는 케리그마 신학과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 케리그마 신학(Kerygmatische Theologie) = 케리그마는 신의 구속사건에 대해서 "선포하는 부름"이며, 이 부름 속에서 계시는 인간에게 부딪친다. 이 부름을 받아들일 때 구속사건은 일어난다. 모든 신앙의 전제인 케리그마는 인간의 가능성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에서 유래한다. / 실존론적 해석학 = 케리그마의 인간학적 접촉점은 배제되지만 그 해석과 이해는 인간적 실존을 전제한다. 철학적 해석학에서 변증법적 계시 사고에 자유주의적 비판적 유산이 수용된다.
⑷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학의 영향 = "현상학적-실존론적 분석의 형식적 방법"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학(Sein und Zeit)은 불트만에게 케리그마를 이해하는 해석학적 착상을 주었다. 하이데거의 무신론적 입장은 불트만의 변증법적 신학의 신이해에 적합했다. 변증법적 착상에 의하면 인간에 의해서는 신은 결단코 인식될 수 없고 오직 신의 계시에 의해서만 인식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계시는 인간이 경험하고 이해하는 한에 있어서 계시로 성립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계시 이해에는 학문적으로 가능한 해석학적 작업이 수행되어야 한다. / 현존재는 "시간성"을 가진고 "근심"에 의해 규정받는 "죽음에의 존재"로서 이는 "비본래적"이다. 그러나 다가오는 죽음에 대하여 선구적인 결단을 초래하는 "양심의 부름"에 의해서 "본래적 존재"로 나아간다. / "내가 나의 실존을 어떻게 이해하며, 비본래성에서 본래성으로 어떻게 결단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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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트만의 실존주의적 종말이해
― W. Schmithals의 『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13장을 중심으로
오 영 택
1. 발제를 시작하며 침묵을 모르는 자들에 대한 충고
형식과 내용을 구분하지 못하고 양자를 무매개적으로 동일시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종교가 그 내용을 본질적으로 표상의 형태에 부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의 내용이 부여된 종교적 가르침(경전을 포함한)이나 교의를 진리와 동일시한다. 따라서 그들은 가르침이 곧 진리인지 아닌지 반성할 필요도 없으며, 그러한 회의에 빠지지도 않는다. 늘 열정적이며 행복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불트만이나 우리들처럼 경전이나 교의의 뒤를 후벼팔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도 때때로 편치 않을 때가 있는데, 후벼파기를 좋아하는 불경스런 족속들이 그들의 표상을 문제 삼을 때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이럴 경우에는 정말 골치가 아프지 않을 수 없다. 까닭인 즉, 그들은 진리와 그것의 표상을 무매개적으로 동일시했기에 필연성을 결여한 반면, 저 불경스런 족속들은 표상에 사유를 더하고 그것과 진리 사이를 개념 따위의 매개를 거쳐 동일시한지라 필연성을 지닌다고 떠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불경스런 족속들이 비록 필연성 운운한다고 해서 절망할 그들이 아니다.
이를 극복해나갈 그들만의 특유하고도 탁월한(?) 논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논리인즉, '필연성'이라 함은 보편성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지 결코 특수성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그들의 기본적 이해는 나와바리의 보유 현황에 근거한다. 이 참 기막힌 논리가 아닐 수 없는 바, 쪽수로 90퍼센트 이상을 점하는 그들은 자신들이 곧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필연성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나서, 신화 운운하는 마귀 새끼 같은 저 불경스런 족속들을 그 싹이 자라기 전에 밟아버려야 한다고 숙연하게 말한다.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내려올 때, 그들은 영원한 기쁨에 들어갈 것이고, 이것이 신화적 표현이라고 떠드는 저 불경스런 족속들은 영원한 고통에 넘겨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저 불경스런 족속들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잠시 엿보도록 하자.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이다 (……) 이런 가르침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영지주의의 현대 형태, 즉 실존주의와 구분된다. 실존주의자들 곧 소위 실존주의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고려는 믿음과 아무 관련이 없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실제로 세상을 창조하셨는지 그렇지 않은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또 예수께서 실제로 죄를 위하여 죽으셨는지 그렇지 않은지, 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아무런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다.
또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반박이나 심지어는 그의 존재 자체까지도 이들 신학자들에게는 아무 의미를 주지 못한다. 실존주의 신학은 진리에 대하여 두 가지 영역으로 분열되어 있는데, 그 하나는 역사적이고 증명할 수 있는 영역이며 다른 하나는 역사를 초월하고 증명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참 기독교는 이와 같이 분열되어 있지 않다. 이 역사상에 나타난 기독교의 사건들은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실제적인 것이며 역사적으로도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건들이 다른 사건들과 다른 점은 하나님께서 그 사건들을 통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행동하셨다는 것이며, 이런 까닭으로 그 사건들이 의미 있게 되었다는 점뿐이다."
불트만은 이들에게 있어서 그저 언제나 밥일 따름이다. 그러나 발제자는 본 발제를 통해 이러한 신학적 역학 구조가 뒤집어져야 할 것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장차 올 것에 대한 어떤 것을 일관성 있게 말하는 이들은, 인간에게 있어 처분 가능한 것이 되어버린 하나님의 미래를 말하는 것이기에, 이미 신앙을 상실해 버린 자들이다. 이들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하나님에 관해서 말한다는 것의 난점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며, 그들의 무지로 인해 죄를 범하는 이들이다. 침묵만이 살길임을 망각한 이들을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슈만의 말을 인용해서 슈미탈스가 보여주는, 不敬을 운운하며 형제를 정죄하는 자들에게 가장 적절한 頂門一鍼이 여기에 있다. "적절한 때에 찬양하고, 필요한 때에 침묵하라."(슈미탈스, p.326)
비록 많은 수의 무지한 무리들로부터 오해와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불트만의 종말론이지만, 기실 이것은 그의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이며 많이 사용되는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그에게 있어서 종말론은 시간적으로 아직 도래하지 않은 최후의 것들에 대한 서술도 아니며, 최후의 것들에 관한 교리의 서술도 아니다. 그의 종말론은 시간적으로 아직 발생하지 않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최종 목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러한 구원 행위가 매순간 결정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묘사할 따름이다. 이러한 진술은 불트만 신학의 모든 부분을 개관한 다음에야 비로소 이해하기가 수월할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완성된 것으로서의 그리스도 사건과 그리스도 사건을 현재에 그러한 것으로서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기독교적 실존, 이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 그의 종말론적 현상인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종말론의 개념은 마치 하나의 초점처럼 불트만 신학의 전체 구조를 집중시킨다.
발제자는 그의 종말론을 다루기에 앞서 현대 기독교 종말론 이해의 제 유형들을 살펴보고, 그 가운데 불트만의 종말론이 차지하는 위치를 파악한 후에, 그의 종말론을 슈미탈스의 안내에 따라 고찰하고자 한다.
2. 현대 기독교 종말론 이해의 제 유형들
현대 기독교의 종말론은 하나님 나라의 내용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신비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언급하는 화자의 신앙과 괴리된 채로 그것에 대한 객관적인 사전적 정의를 내리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우리는 성서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그 어떤 자료 또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지금까지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연구는 그것이 이미 실현된 것인지, 미래에 실현될 것인지, 미래에 실현될 것이지만 예수에게서 부분적으로 선취된 것인지 등등을 논해온 것으로 일별 된다. 각각의 유형들을 개괄하기 전에,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 나라 이해의 중심점이 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를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혹은 가져온, 이루는, 이룬 등등의 그 시간과 장소를 달리할 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자로 고백하는 신앙이 하나님 나라의 이해를, 종말론의 제 유형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종말론의 유형은 크게 현재적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으로 구분된다. 다시 현재적 종말론은 변증법적 종말론과 실현된 종말론, 실존론적 종말론 등으로 구분되며, 미래적 종말론은 철저적 종말론과 구속사적 종말론, 희망의 종말론, 묵시적 종말론 등으로 구분된다.
2.1. 먼저 미래적 종말론부터 개괄해보도록 하자. 슈바이쳐, 바이스(Weiss), 베르너(Werner), 부리(Buri) 등이 주장한 "철저, 필연, 미래적 종말론"(Consistent, consequent, futurist or thorough-going eschatology)이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있고, 예기할 수 없는, 묵시적 행위로서 인간 상황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어떤 것이다. 여기서 그 나라는 철저히 미래에 있다. 우리는 그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해야 할 아무 것도 없으며, 그 나라의 도래를 촉진시킬 수도, 지체시킬 수도 없다.
2.2. 둘째로, "구속사적 종말론"(Salvation history eschatology)이 있는데, 이 사상학파는 현재와 미래를 구속사의 연속적 사건으로 본다. 여기서는 영원과 시간과의 관계가 동일선상에서 직선적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영원이라는 것이 창조, 화해, 완성의 순서를 따라 현역사 안에서 진행되는 구속사적 직선적 종말론인 것이다. 여기서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속에서 명백하고도 효율적으로 역사 속으로 이미 침투해 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전투는 승리하였으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그 나라의 완성은 미래에 있다. 중간기에 있는 우리의 현재는 다만 기다리는 것으로 소모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성서 후 시대는 이 나라의 성장, 확장, 축하를 위해 기여해야 할 본질적인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
2.3. 셋째로, 몰트만에 의한 "희망의 종말론"이 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약속한 바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때문에 미래를 바라보면서 산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통해 그 진실성이 확증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증을 쿨만처럼 단지 과거에 연속된 구속사에서만 찾자는 것도 아니고, 불트만처럼 실존에서 찾자는 것도 아니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서 찾자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로서, 이 소망은 예수의 재림과 모든 사람의 부활과 완전히 질적으로 새로운 세계,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앙에서 온다고 본다.
2.4. 넷째로, "묵시적 종말론"(Proleptic eschatology)이 있다. 이 사상학파는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에서 싹텄다고 할 수 있겠는데 대표적인 학자로 판넨베르크를 들 수 있다. 구원사적 종말론과 매우 유사하지만, 미래의 그 나라의 새로움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구원사적 종말론과 다르다. 전 우주적인 변화를 동반하며, 수평선 저 너머의 역사에서 이루어지는 그런 우주적, 세계적 종말론을 지향한다. 세계사 전체를 한 시야로 보려고 하며, 역사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볼 때, 현재의 역사는 종국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 역시 과거, 현재, 미래를 강조한다. 과거에 뿌리를 박고 있고 또 현재에 대망 중이고 그럼에도 미래에 있어서 진실로 새로운 어떤 것으로 창조될 하나님 나라는 그 성격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또한 철저하게 역사적이다.
2.5. 계속해서 현재적 종말론을 살펴보자면, "변증법적 종말론"이 있다. 바르트와 브룬너가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이 학파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서 인류의 모든 문화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심판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 영원이 시간 안에 돌입하여 현재의 매 순간을 심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각 개인, 각 시대가 영원과 같은 거리에 있다고 보았으며, 종말은 이미 현재에 돌입했다는 긴박한 종말론을 주장했다. 영원과 시간이 언제나 상접할 수 있다는 영원한 현재의 변증법적 종말론을 말했던 것이다.
2.6. 도드(C. H. Dodd)에 의해 전개된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 있다. 이 입장에 의하면 그 나라는 이미 실현되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속에 충분히 도달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여기서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거절하느냐의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나라에 대해 과거 지향적 성격을 부여한다. 우리는 다만 그 나라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보존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미래는 우리에게 말해 줄 어떤 본질적인 것도 갖고 있지 못하다.
2.7. 마지막으로,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루돌프 불트만의 "실존론적 종말론"(Existentialist eschatology)이 있다. 이것은 위대한 성서학자요 신학자인 루돌프 불트만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실존론적 조망으로부터 볼 때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현재에서 거듭해서 실현되며, 하나님 나라는 현재에 있어서 진정한 인간실존의 가능성을 지시해준다.
"종말론의 유형이 이같이 각양각색일지라도, 이들 종말론이 오늘날에 있어서 대략적인 일치를 보이는 견해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속에 명백히 임하였다는 것과 그것은 시간의 끝에 완전하고도 새로움으로 임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의 작용은 내적 역사(intrahistorical)의 실재이며 우리의 현재의 시간은 그 최종적인 완성을 위해 기여할 결정적인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각각 종말론의 대략적으로 일치된 현재의 견해 속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노력에 의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한다는 주장은 결코 하지 않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엄성, 정의, 자유 등을 위한 바로 그러한 노력들이 결국에 가서는 열매맺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오는 선물이다. 그러나 그 은총은 우리의 현재 속에서 우리에게 와서, 우리로 하여금 그 나라를, 바로 지금에서조차도 있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그 나라를 구체적으로 세우신다. 그러나 이 역사를 구성하고 있는 인간 활동 없이 그같이 하시지는 않는다."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앙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명백하고도 효율적인 작인이다. 그 나라는 우리의 현재 속에서 하나의 책임이요 약속으로 우리에게 임한다. 약속되었기 때문에 선한 의지가 악에 대해, 생명이 죽음에 대해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소망한다. 이 소망 속에서 그 나라는 위안과 위로가 된다. 그러나 그 나라는 또한 본질적인 책임성으로서 오며 개인, 교회, 인간 공동체로서의 우리의 현재의 응답에 대한 비평으로서 온다.
이제 불트만의 인간실존 구조 속에서 이해되고 있는 종말론을 살펴보도록 하자.
3. 최후의 것들에 대한 신화론적인 표상의 비신화화
신약성서에 담긴 최후의 것들에 관한 표상은, 옛 세계에 종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새로운 세계를 불러들이는 우주적인 대 파국의 상황에서 나타나는 사건들의 구체적 묘사로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불트만은 이러한 미래상이 기독교에만 속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을 한다. 신약성서의 미래상은 후기 유대교의 묵시문학적 경향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나님 그 자신 혹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그의 인자가 다가올 세계의 심판자로서 그리스도의 위치를 차지했다는 한가지 사실만을 제외하면, 본질적으로 묵시문학적인 것과 동일하다. 불트만은 묵시문학적 희망상(Hoffnungsbild)이 수많은 자료들로부터 取擇되었으며, 그 자료들 가운데 하나가 구약성서라고 본다. 구약성서에 있어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사건들의 한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는 역사상이 어떤 非이스라엘적인 것의 영향을 받아 묵시문학적인 역사상으로 변형된 것이다.
불트만은 종말 사건에 대한 묵시문학적 묘사가 신화론적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저 세상적인 것을 이 세상적인 것으로, 피안적인 것을 차안적인 것으로 만나고 표상하는 표현 방식을 "신화론적"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미래적 통치에 대한 묵시문학적 묘사도 신화론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화론적 표현 방법은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낯선 것이다. 현대인은 더 이상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는 분으로 사유하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신약성서의 개념을 비신화화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그 개념들의 "실존론적 해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신화적 표상들의 종식과 함께 모든 말이 끝나는지, 아니면 그것들 중에는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는 의미가 표현되어 있는지, 그것들 근저에 인간 실존에 대한 앎이 들어 있는지'를 묻는 비신화화의 문제가 제기된다. 불트만은 신화론적인 형식으로 말해진 것을 그 내용이 손상되지 않게 현대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확언한다. 그리고 만약 묵시문학적 종말론이 이런 방식으로 실존 안에서의 한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참된 신학적 이해를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신학은 인간과 관계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4. 묵시문학적 역사이해는 역사의 의미를 묻는다.
불트만은 신약성서의 묵시문학적 희망상을 역사 과정에 관한 다른 표상들과 비교함으로써 그 "실존론적 내용과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비교될 만한 적절한 소재로서 그리스의 역사이해를 거론한다. 그리스에서 역사의 영역은 자연의 영역을 유추하여 이해되어졌을 뿐, 자연의 세계와 동등하게 독립적인 세계로 취급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리스의 역사 기술은 단편적인 역사적 사건들의 인과관계를 실제로 연관시키는 데 관심하는 정도였고, 미래적인 가능성들에 대해 숙고한다거나, 또는 현재를, 인간이 미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결단의 시간으로 이해하지도 않았고, 역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지도 않았다.
역사의 과정은 민족이나 국가들뿐 아니라 각 개인들이 자신의 행위와 경험에 의해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를 획득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이 그의 본질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시간과 관계하지 않는 한, 원칙적으로 미래라는 것은 인간에게 어떤 새로운 것을 가져다 줄 수 없다. 그리스에서 개인은 인격으로서 행동하면서 역사를 이루어 간다. 그러나 그 자신은 역사적인 본질이 아니다. 그는 되어가는 것(werden)이 아니라, 항상 이미 존재하는 것(sein)이다. 그는 역사에 대해 무시간적이고 변하지 않는 인격으로 대면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에서 역사의 본질은 철학자들의 독립된 주제로 생각되지 않고, 과학적인 역사기술의 주제로만 이해되어졌다.
반면에, 묵시문학의 역사 이해는 역사와 인간에 대해 그리스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像을 전제한다. 묵시문학은 역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기초로 하며, 역사의 종말의 빛에서 그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이것은 역사의 종말이, 역사를 자신의 목표로 이끄시며, 요구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역사 저편의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역사 안에서 이 은혜를 기대해야만 하며, 그가 좋은 목표에 도달하려고 하는 한, 이 요구에 순응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그 자신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그는 그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그 자신의 피안, 즉 하나님과 관계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의 본래적인 본질이 그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를 초월한다는 지식, 그리고 이 세계만이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지식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묵시문학의 역사이해 속에는 인간 자신의 "역사성"에 대한 지식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며, 그 전체 흐름 속에 있는 역사의 의미에 대한 신화론적 물음은 인간이 역사적으로 실존하는 매순간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라는 것이다.
5. 역사성 시간성 미래성
여기에서 불트만의 "역사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인간학적 개념으로, 인간의 본질이 그의 역사성에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인간은, 그 자신의 가능성일 뿐 아니라 그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구체적인 역사적 만남 속에서 그때 그때마다 실현되는 가능성으로서 자신의 본래적인 본질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성은 인간이 역사를 만든다든지, 혹은 인간이 연속되는 역사적 사건 속에 개입되어 있다든지, 더욱이 인간이 역사에 참여한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인간의 역사성은 인간이 역사 안에서만 그 자신이라는 것, 다시 말해 역사적 만남 속에서만 그 자신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그 자신의 역사를 추구하며 또한 그것을 획득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본래적인 인간 존재는 자연적인 것으로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으로 위임되어 인간의 결단에 맡겨진 것이다. "이러한 결단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이란 항상 자기 앞에 서 있는 삶이며, 자신의 결단에 의해 그의 특징을 상실하게도 되고 획득하게도 되는 것이다. 그의 결단에서 인간이 선택해야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런 저런 대상이 아니라, 그가 본래적으로 되어야 하고(sollen), 되려고 하는(wollen)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선택하느냐 혹은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참 삶을 상실한 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다."(역사와 종말론, pp. 56~57)
인간의 "시간성"은 이렇게 이해된 "역사성"에 속한다. 여기에서 시간성이란 시간 경과의 연장으로서의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성은 인간이 그의 역사적 실존의 매 현재(jetzt)에서 그의 본래적 시간, 즉 이미 존재하는 과거와 미래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완성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간에 사는 실존은 본래적인 인간 실존으로 시간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이루어 놓은 과거와 인간을 결단에로 부르는 미래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인간이 시간적인 존재라는 것은 오직 그때마다의 현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그의 현재는 항상 미래에 직면해 있다.
이 때문에 "미래성"은 인간 현존재의 구조적 계기로서 "역사성"과 "시간성"에 속한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인간의 "미래성" 역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어떤 것을 기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그의 현실존에서 미래에 의해, 즉 그에게 다가오고, 그에게 부딪쳐 오는 것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본래적인 존재는 이런 의미에서 미래적인 존재이다.
이 역사성과 시간성, 미래성의 개념들은 최후의 것들에 대한 신화론적 개념으로서의 묵시문학적 표상들을 실존론적 해석으로 비신화화해서 얻어낸 불트만의 결과물들인 것이다. 불트만은 그의 이 개념들이 바로 신화론적 개념들이 본래적으로 의도하고 있던 것이라고 말한다.
슈미탈스는 {예수}를 인용함으로써 불트만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화론적 개념의 본래적 의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보여준다. "하나님 나라는 전적인 미래이면서도 현재를 전적으로 규정하는 힘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을 결단에 몰아 넣음으로써 현재를 규정한다 (……) 하나님 나라는 순수한 미래이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형이상학적인 실체나 어떤 상태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도 현재 주어져 있는 것일 수 없는 하나님의 미래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미래는 인간을 그의 현재에서 규정짓고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순수한 미래이다. 언제쯤 어느 곳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결단에 몰아 넣으면서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 사건은 본래 언젠가는 올, 시간의 흐름 안의 사건, 혹은 인간이 이에 대해 필요하면 태도를 취할 수 있고, 중립적으로 처신할 수 있는 그런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어떠한 태도를 취하기 전에 이미 인간에게 엄습하고 있는 사건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단지 인간이 결단의 상황에 서 있다는 것을 자기의 본래적인 본질로 파악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 인간이 결단에 직면해 있고, 또 바로 이것이 인간을 인간으로 성격 짓는다면 실로 마지막 때는 매순간 존재한다 (……) 그렇다면 예수의 선포가 본래 뜻한 것에 그 외적인 표현을 제공한 당시의 신화론(contemporary mythology)에 시선을 돌리면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 신화론은 결국 그것이 은폐하고 있는 중요한 기본 사상, 즉 인간을 하나님의 미래적 행위에 의해 결단 앞에 세워진 자로 파악한 예수의 인간 이해에서는 벗어난 것이다."(예수, pp. 44~49)
6. 구원사건의 현재화
신약성서가 후기 유대교의 희망상을 구원 사건의 영향 아래에서 결정적으로 수정했다고 확신하는 불트만을 이해하기 위해 슈미탈스는 역사성의 개념에서 종말론의 개념으로 이해의 운신이 필요하다고 본다. 불트만이 지칭하는 수정은 다름 아닌 "비신화화의 방법"이다. 신약성서 자체 내에서의 비신화화 과정의 시작은 종말론의 문제가 발생한 것에서 기인한다. 기다리던 세계의 종말이 이르지 않고, '人子'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부터 나타나지도 않고, 역사는 계속된다.
종말론적인 공동체는 자신들이 바라던 바가 하나의 역사적인 현상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나의 세계사적 현상이 되어가는 교회가, 발생했어야 할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에 대한 실망에서 종말론에 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할 수 있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불트만은 바울과 요한을 거론한다. 바울에게서 처음으로 나타났고, 요한에 의해서 철저하게 전개된 종말론에 관한 새로운 이해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그의 단초가 된다.
비록 바울이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에 관해서,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해서, 믿고 의롭게 된 자의 영화에 관해서 묵시문학적 상상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롬14:7)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축복의 관념이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며, 축복의 상태가 이미 현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를 받은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요, 옛 것은 지나갔고,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는 표현은 사실이다.
그에게 있어 새 에온은 이미 현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다"(갈4:4)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사야로 인해서 약속된 축복의 때도 현재화된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유대인들이 마지막 때에 오리라고 기대했던 성령의 은사는 지금 신자들에게 주어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요, 노예가 아니라 자유한 자다(갈4:6이하).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행위는 본래적인 종말론적 사건이다. 즉 예수의 부활은 전체 부활의 시작(고전15:20)이며, 신앙인의 실존은 종말론적 실존이 되는 것이다. 역사는 종말론 안에 삼키어졌으며, 그리스도가 역사의 마지막이기 때문에 때는 이미 찬 것이고, 본래적인 역사는 인간 역사성의 실현 속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종말론적 구원사건의 현재화는 요한에게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에게 있어서 죽은 자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은 예수의 오심에서 이미 현재한다. 그는 전통적인 묵시문학적 종말론에 반대해서,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 받았다는 것을 말해준다"(요3:19)고 말한다. 요한은 "심판"을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중에 일어나는 분리, 그리고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은 곧 심판인 분리로 해석한다.
이러한 요한의 사상을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은 나사로의 부활 직전에 있었던 예수와 마르다 사이의 대화인 바, 전통적인 부활 표상이 분명히 수정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수는 오라비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다에게 확언하기를 "너희 오라비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한다. 마르다는 이 말을 전통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여자의 말을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11:23~26)
이러한 요한의 사상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시간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으로 기대된 재림이 그에게서 거부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요한은 독자의 눈을 열고,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본래의 도래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의 실제적 오심을 오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이 도래가 세대의 전환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에만 이해된다. 우주적인 대 파국이 앞으로 올 것이라고 해도 그것 역시 매일 매일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무덤으로부터의 부활같은 것이 앞으로 올 것이라고 해도, 그것 역시 사람들이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다른 것일 수 없다. 결정적인 사건은 이미 일어났다.
신약 성서 안에서의 묵시문학적인 대망이 본질적으로 수정되었으며, 기대된 구원 사건은 예수의 오심에서 이미 성취되었고, 그래서 구원은 이미 현재한다는 것이 불트만의 주장인 바, 이는 앞선 발제문이 다루었던 구속 사건에서 상세하게 언급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종말론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 즉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구원을 약속하지 않고 지금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스도 탄생 이후의 때는 구원의 때이며, 믿는 자의 삶은 구원 안에 있는 삶이다. 예수의 오심은 세계사에 있어 종말을 의미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를 믿는 사람들은 이미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영원에로 옮겨졌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시간을 앞질러 달려서 이 세상의 종말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우리가 역사성을 다룰 때, 본래적인 인간 존재는 자연적인 것으로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으로 위임되어 인간의 결단에 맡겨진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거기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의 새로운 결단이 그의 이전 결단에 의해서 결정되느냐의 여부가 그것이다. 만일 그가 자기의 결단에 있어서 참으로 자유로우면, 그는 또한 자기의 이전 결단으로부터 자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울은 인간이 그러한 결단의 자유를 지니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그의 과거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가 없으며, 오히려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남아 있으려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는, 그것이 죄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 행위를 통해서만 그의 실존의 본래성에로 옮겨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 행위는 종말론적 성격을 갖고 있기에, 인간의 본래적 실존은 자연적으로 종말론적 실존이 된다.
종말론적 실존은, 하나님이 행위하셨고 그가 인간 자신을 새롭게 함으로써 과거와 같은 '이 세계' 그대로서의 세계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사실을 통해 인간에게 가능성이 되었다. 신앙인은 종말론적으로 실존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죄, 자신의 과거, 자신에게 처분 가능한 것으로부터 살기를 원하였던 옛 사람으로서의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 속에서 아무런 보증없이 철저히 미래에로 자신을 개방할 때에, 그는 하나님과 끊임없는 만남 속에서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게 된다. 불트만의 비신화화 가운데 빈번히 사용되는 "종말론적"이란 개념은 최후의 것이며 결정적인, 그리고 유일회적으로 발생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전통적 표현이다. 바울, 요한과 관련하여 불트만은 이 종말론적 구원행위는 그리스도 사건 안에서 수행되었고,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선포 속에서 계속적으로 수행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 사건을 현재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종말론적 말씀이며, 그리스도 사건의 유일회성은 지금 여기에서 말씀 가운데서 일어나는 이러한 종말론적 사건의 유일회성이다. 이 말씀이 울려 퍼지는 곳에서 세계의 종말은 그 말씀을 듣는 자에게 현재하여, 그럼으로써 그 말씀은 듣는 자를 결단 앞에, 즉 옛 세계에 속하려는가 아니면 새로운 세계에 속하려는가 하는 결단 앞에 세운다. 케리그마는 모든 현재를 종말론적인 시간으로 성격짓는다. 신앙은 그때마다 하나의 종말론적 현상이며 기독교적 실존은 종말론적 실존인 것이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최후의 것들에 관한 교리로서의 종말론은 아직 오지 않은 것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7. 중간기 - 이미와 아직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은 결정적인 구속 사건이 이미 일어났으며 세대의 전환이 이미 예수의 출현에서 발생했다는 확신에도 불구하고, 우주적인 종말 사건에 대한 기대를 고수하고 있다. 반면 요한은 종말에 대한 이런 형식의 신화론적인 기대를 포기한다. 그러나 그도 역시 신앙인의 현재적인 삶은 미래에 완성되리라고 내다보았다. 물론 그것은 우주적인 대 파국이 아니라, 죽음 후에 있을 각 신앙인의 완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과 요한에게 있어서 현재의 삶의 시간, 즉 그리스도 탄생 이후(post christum natum) 이 세상의 시간은, 비록 그것이 종말론적으로 규정되었다고 할지라도, 중간기(Zwischenzeit)인 것이다.
그러나 불트만은 중간기로서의 이 시간을 연대기적으로 "이전에"(Einst)와 "앞으로"(Dereinst) 사이의 시간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중간기는 신앙인의 존재를 "더 이상 아니다"(nicht mehr)와 "아직 아니다"(noch nicht) 사이의 변증법적인 존재로서 특징짓는다. 이것은 "본래성과 신앙"에 관한 앞선 발제에서 고찰했던 "이미"(schon jetzt)와 "아직"(noch nicht)의 변증법적 관계와 다르지 않다(슈미탈스 pp. 119~122). 이미와 아직의 변증법은 신앙인의 종말론적 상황과 모순되지 않으며, 특별한 방식으로 그것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신앙인의 현실존이 종말론적으로 규정된다는 것은 신앙인은 더 이상 기대할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반대로 그가 참된 미래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참된 미래는 그때마다 새로운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으로부터 오는 미래이며, 이러한 미래에 대한 지식과 그것이 우리에게 다가오리라는 끊임없는 기대는 종말론적 실존의 "아직 아니다"에서 표현되고 있다. 만일 신앙인의 미래가 참된 미래로 존속해야 한다면, 그것은 극복될 수도 없거니와 극복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인간 실존의 종말론적인 완성은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개방성이다. 그러므로 "아직 아니다"는 "이미 지금" 완성된 존재의 양도할 수 없는 하나의 특징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지금 여기에서는 결코 우리가 아닌 것이 바로 우리의 본래적인 존재인 것이다.
"아직 아니다"를 고수함으로써 인간은 그의 본래적인 삶의 은혜의 선물이 다시 하나의 세계 현상으로 환원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는 세상적인 존재의 의미로서는 그가 아닌 것에서, 그가 오로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에서 자신의 본래성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실존은 종말론적이며 피안적인 실존이다. 이런 이유에서 불트만은 바울이 생각한 대망의 "환상"이 종말론적 실존의 "아직 아니다"를 제거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바울에게서 비세계적인 것이 단순히 소유물이 되는 어떤 상태의 완전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데, 이는 기독교적 실존의 개방성이 끝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8. 하나님으로부터의 참된 미래
불트만은 올 것에 대한 어떤 것을 일관성 있게 말하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미래는 인간에게 있어 처분 가능한 것이 되어 하나님의 미래이기를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끊임없는 앞섬(Voraussein)으로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이 어디를 향해 가든지 설사 죽음의 어두운 곳일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이미 앞서 와 있다. 그리고 앞서 와 있을 뿐 아니라, 매순간 만남의 "가능성 여부"(Ob)와 "방법"(Wie)도 오직 하나님에게 있어서만 처분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이며, 이것은 죽음에 직면해서도 마찬가지이며, 혹은 사람들이 종말론적 사건, 죽은 자들의 부활,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이를 위해 어떤 신화적인 표상들을 만들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인은 하나님이 어떤 경우에서도 그의 미래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과의 어떠한 만남에 대해서도 자신을 개방해야 한다. 신앙은 죽음과 어둠에 직면해서 하나님의 미래를 위해 열어 놓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無만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를 만난다는 사실을 신앙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미래에 대한 유일한 확실성은 모든 인간은 누구나 죽음에 직면해 있다는 것인데, 오고 있는 하나님의 미래로서의 모든 미래에 대해 개방된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놀라지 않는다. 이것은 신앙인의 지상적 삶이 그 자체로서 완전하거나 의미 있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삶이 시간적이며 역사적인 실존의 한계 내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신앙인은 하나님이 죽음 가운데서 수여하는 미래를 묘사하려고도 하지 않는데, 죽음 이후의 영광에 관한 상들은 모두 욕망의 환상적 투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환상에 대한 체념은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신앙의 철저한 개방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미래를 그려보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소원과 꿈이 암시해 주는 像으로 그것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상을 우리는 포기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미래를 위해 준비한다는 것은 진실하게 각오를 가지고 어둠 속을 걷는 것, 하나님이 장차 우리와 함께 하려고 하는 것을 위해 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트만은 루터의 『로마서 강해』8장에 대한 다음의 주석 내용을 자주 인용한다. "희망하는 사람은 그가 희망하고 있는 것의 내용은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희망하고 있지 않는 것의 내용을 알고 있다 …… 기독교적 희망은 그가 바라고 있다는 사실(da )을 알고 있으나, 그가 바라고 있는 것의 내용(was)은 알지 못한다."
9. 발제를 마치며
본의 아니게 발제문이 길어진 감이 없지 않다. 불트만의 종말론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른 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그의 기포드 강좌, 『역사와 종말론』은 뢰비트 등의 역사 이해를 전개해 나가며 자신의 견해를 펼치는 데, 구속사에 대한 각 시대의 이해를 전개하는 것이 종말론을 언급하는데 필요한 필연적 요소들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불트만은 예수의 來臨의 지연으로 야기된 종말론적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종말론적 표상들에 대한 비신화화 과정을 서술하는 가운데 바울과 요한에 그치지 않고 '세기의 과정에서 일어난 종말론의 세속화'를 이어서 다룬다. 발제자는 그 부분에 대한 이해가 미흡했기에 본 발제문에서 다루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끝으로 불트만의 종말론을 간단히 정리함으로 본 발제문을 마치고자 한다.
성서의 묵시문학적 역사이해는, 표상이 담고 있는 것의 본래 의미로서의 인간 자신의 역사성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 이 역사성의 개념에서 구원 사건의 현재화인 종말론의 개념을 일구어 낸다. 이 현재화된 종말론은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 행위로 말미암아 인간이 그의 실존의 본래성에로 옮겨짐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 실존의 종말론적인 완성으로도 표현될 수 있는 바, 그것은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개방성인 것이다.
이 개방성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 적절할 때 찬양하고 필요할 때 침묵할 것을 요청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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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
조성노 박사 (현대신학연구소장)
서 론
불트만은 마부르그의 자유주의 신학자 헤르만(리츨학파의 대표적인
신학자)의 제자이다. 불트만은 바르트에 이어서, 그리고 본 훼퍼의
영향력이 나타나기 전까지 유럽 신학계의 판도를 지배한 사람이었
다. 바르트의 관심이 하나님의 전적인 타자성에 집중된 데 반해 불
트만의 관심은 계시의 운반체인 성서에 집중된다. 그래서 그는 성
서의 메시지를 어떻게 현대인들에게 전달하고 또 의미를 갖게 할
것인가? 하는 성서해석의 방법을 연구하는데 온 정열을 다 바쳤다.
불트만은 성서 기자들이 당대사람들에게 계시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했던 사고 패턴은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성서가 현대인들에게도 여
전히 이해 가능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계시의 핵심적 메
시지와 그 메시지를 처음 수용했던 고대인들의 사고 패턴을 분리하
는 작업을 해야 하고 다음은 고대인들의 사고 구조에서 놓여난 그
계시의 메시지에다 다시 현대인들의 사고 패턴을 옷 입힌 다음 이
시대 인간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앙이 발생될 수 있는 만남이란 언제나 말
씀하시는 하나님과 그 말씀을 듣고 예! 하고 응답하는 인간 사이의
만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들음이라는 것은 신앙
이전에 우선 의미 있는 접촉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불트만은 신과 인간의 진실된 만남을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현존재 분석을 시도한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인간은 무엇이며 자신
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현대인은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떤
상황 속에 처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불트만은 이런 물음들에 답하
기 위한 수단으로 실존철학, 특히 마르틴 하이덱거를 택한다. 불트
만이 굳이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인 하이덱거를 선택한 이유는 그의
실존철학이 인간의 현 존재성을 가장 정직하고 명확하게 분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향해 던지는 물음에 대해서도 가장
타당한 답변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이덱거의 무신론적 입장이 자기가 참여하고 있는 변증법적 신학
의 신이해에도 오히려 부합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신
학에 의하면 신이란 인간에 의해서는 결단코 인식될 수 없고 오직
신의 자기 계시에 의해서만 인식이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불트만에게는 철학적 견지에서는 결코 신에 관해 말 할 수
없고 신을 발견할 수도 없다는 하이덱거의 무신론이 오히려 진실
한 인간 고백으로 들렸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불트만은 하이덱거
의 현존재 해석학을 인간에 관한 가장 적절한 인식 수단으로 평가
하여 그의 신학적 인간 이해의 틀속에 적극 수용한다. 일단 하이덱
거의 도움으로 현존재 분석의 과제를 달성하고 난 불트만은 또 하
나 중요한 문제인 하나님 말씀에로 주의를 옮긴다.
성서의 하나님은 제1세기 인간들이 살고 있던 문화적 틀 내에서 그
리고 그들이 처해 있던 고유한 상황 내에서 말씀하셨다. 따라서 오
늘 우리는 제 1세기의 상황과 제 1세기의 세계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달 수단인 성서와 하나님의 본래적 메시
지를 분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불트만은 바로 이 하나님 말씀의
내용과 그 말씀의 표현 수단의 분리 과정 을 비신화화
(Entmythologisierung)라고 부른다. 이렇게 현존재 분석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비신화화 작업이 이룩된 후 비로소 불트만은 하나님의
말씀의 재해석이다. 따라서 불트만신학의 구도는 세가지 측면, 즉
현존재 분석과 비신화화, 그리고 말씀의 재해석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1. 현존재 분석
불트만이 절대 의존하고 있는 하이덱거(1927년 "존재와 시간"에 나
타난 현존재 분석을 의미함)에 의하면 현대인이 직면한 삶의 가장
기본적인 가능성은 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이다. 본래적 실존
이란 인간이 자신과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주체적으로 발전시키는
길을 선택하는 삶을 말한다. 그리고 비본래적 실존이란 인간이 자
신을 이 세계(사물)와 집합적인 대중에게 내 맡겨 그것들에 의해
자신이 형성되고 영향받게 하려는 삶을 가리킨다. 하이덱거는 현대
인의 대부분이 후자의 길, 곧 자신의 개별적 인격성의 책임을 포기
하는 비본래적 삶을 사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이유는 그것이 훨씬
살기가 쉽기 때문이다. 비인격화된 대중의 일원이 되어 그런 삶의
방식에 만족하고 그런 가치관에 안주하여 사는 일이란 결코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삶에 비해 자결의 길, 본래적 실존의 길을 선택
하기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본래적 실존이란 인간이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가능성들을 선택하는데 대한
완전한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인간은 누구도 이 두 유
형의 실존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
다. 선택하지 않으려는 결정도 역시 비본래적인 실존에 자신을 내
맡기는 것이 된다. 이리하여 결국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주체
적으로 형성해 나갈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에 의해
형성되어 가도록 내 던져 버릴 것인지에 대해 선택해야 하는 존재
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번에 결판나는 선택은 아니다. 오히려
삶은 두가지 실존 가운데서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는 과정이다. 따
라서 모든 현재는 자유로운 결단의 순간이다. 그리고 이같은 지속
적인 선택의 필요성이 삶의 주요한 성격인 불안을 조장한다.
불트만은 역사내의 존재로서의 인간의 주요 특징을 불안이라 생각
하였다. 인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영원한 긴장 가운데서 실존한
다. 매순간마다 인간은 세계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개별적
인 인격을 상실하거나 아니면 모든 안전을 버리고 미래의 자신을
던져 본래적 존재를 성취하거나 해야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자신의 실존에 대해 느끼는 불안을 달래기 위해 비본래적인 실존을
선택하게 되면 그것은 결국 자신을 세계에 내어 줌으로써 보다 확
실하게 사물의 지배 아래로 떨어질 뿐 이다. 그리고 주체성을 상실
해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사물이 그의 주인이 된다. 따라서 인간은
참다운 자아로 부터 철저하게 소외되게 된다. 다른 한편 자신에게
열려져 있는 두가지 선택의 길 가운데서 본래적 실존의 길을 선택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며 그는 어떻게
자신의 삶의 길을 실현해 가는가.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
은 마르틴 하이덱거의 경우는 일단 인간이 본래적 실존의 길을 선
택하고 나면 스스로 본래적 삶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고 보는 반면에 볼트만은 변증법적 신학자 답게 인간이란 근본적으
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는 본래적인 실존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본다. 어째든 볼트만은 본래적 실존의 성취는
오로지 하나님의 도움만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면 본래적 실존을 위한 선택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것은 곧 자유를 위한 결단을 의미한다. 이는 두가지 측면에서 그러
한데 첫째는, 이 세상으로 부터 즉 사물에 대한 예속상태로 부터
그리고 집합체의 비인격적 구조로 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이제부터는 자신의 삶에 대한 완전한 책임을 스스로 지겠다
는 결단이다. 둘째, 본래적 실존을 위한 선택은 결국 미래를 위한
결단이기 때문에 과거가 인간에게 가져다준 온갖 예속으로 부터 자
유롭게 되는 결단을 의미한다. 그것은 과거의 실패와 죄책,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종속되어 참다운 자아로 부터 소외된 상태를 모두
내어버리는 선택이다. 그것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책임에 전념하겠
다는 결단이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회개를 촉
구한 것도 바로 인간에게 열려있는 새 가능성에 대한 선언이후 동
시에 그 가능성에 대한 자신을 개방할 때에만 비로소 참 인간으로
서의 구원이 있음을 계시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인간에
게 열린 새로운 가능성이다. 인간은 도래하는 것에 비해서만 참
자기로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볼트만이 이해한 성서 특유의 인간
관이다. 그래서 나를 얽어매고 있는 낡은 사슬을 끊고 새 세계로의
탈출을 종용하는 말이 바로 예수의 회개하라는 외침이고 그것이 곧
본래적 실존을 위한 결단의 촉구라는 것이다.
2. 성서의 비신화화
현대인들의 성서이해에 대한 불트만이 가지는 주요 관심은 신약의
표상 세계와 현대인의 표상세계의 깊은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된다. 불트만에 의하면 현대인들의 세계
상은 자연과학과 기술에 의해 이해되는 합리적이고도 차안적인데
비해 성서는 모두가 신화적 세계상에 기초하고 있다. 성서는 이 세
계를 삼중구조로 이해한다. 위는 하늘, 아래는 지옥, 중간은 신과
사탄의 싸움터로서의 이 세상이다. 불트만은 이렇게 말한다 "신약
성서의 세계상은 신화적인 세계상이다. 심지어는 신약성서 선포의
본래적 내용을 이루는 구속 사건의 설명도 바로 이 신화적 세계상
에 일치한다". 그러니까 신약성서는 그 내용의 핵심적인 구속사건
조차도 신화론적 표상으로 진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에 나타나
는 그리스도상을 보자. 우선 그는 선재 했던 신적인 존재이다. 그
러다가 땅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십
자가에서 모든 죄의 대가를 위해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된지 사흘만
에 다시 살아나시고 본래의 하늘로 되돌아 가셨다가 이제, 죽은 자
의 부활과 심판을 통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기 위해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게 된다. 불트만에 의하면 이러한 그리스도상은 신
화론적 진술로서 영지주의적 구속신화와 유대교적 묵시문학의 영향
을 받아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론 뿐만 아니라 종말론도
마찬가지이다. 즉, 종말이 시간적인 우주적인 대 몰락의 드라마로
표상 된다. 이를테면 천상의 세력과 악마세력간의 최후의 투쟁이
일어나고 그후에 우주적 종말의 심판자가 천사를 거느리고 나타나
서 죽은 자들을 다살려 내어 어떤 이들은 구원하고 어떤 이들은 저
주로 심판한다는 것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미래의 이런 사건이 실재로 일어날 것이라고 소박
하게 기대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것이다. 그는 성서의 신화론적
종말은 예수의 재림이 신약의 기대처럼 곧 도래하지 않았고 세계
역사는 계속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되어 갈 것이라는 단순한 사
실을 통해 이미 근본적으로 낡은 것이 되고 말았다. 불트만은 예수
의 부활도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신화적 사건이라고 한다. 오늘 우
리로서는 신화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세계에 살았고 신화적 경험에
일치되게 예수를 해석했던 제자들의 부활절 신앙에 대해서만 알 뿐
이 라고 한다. 이러한 신화적 세계상은 역사적이며, 자연과학적인
세계상 속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황당한 얘
기다.
불트만은 전기와 라디오를 이용하고 아플 때 현대의학에 의존하면
서 동시에 신약에 나타난 악마와 영들의 세계를 믿는다는 것은 불
가능하다 하며 그리스도교의 선포가 현대인들에게 신화적 세계상
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뿐만아니라 의미도 없다고 했다.
성서의 신학적 세계상은 그 자체가 특별히 기독교적인 것일 수 없
는 단순히 지나간 시대의 세계상일 뿐이다. 이렇게 현대인의 세계
상과 자기 이해가 신약의 신화론적 표상세계와 마찰을 일으킨다면
신약의 증언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불트만에 의하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신약성서의 복음을 이상주의적 윤리(리츨, 하르
낙)나 신비적으로 채색된 종교적 정서, 혹은 감정(쉴라이마허)으로
환원시켰다. 그러나 신약은 인간의 종교성이나 윤리성에 대해 말하
는 책이 아니라 신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세상을 구원하셨다는 구
속 사건에 관해 말한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은 결정적 구속사건인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하나의 종교적이고도 윤리적인 모범이나 선
생으로만 이해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켰다고 불트만은 비난
한다.
여기서 불트만은 복음이 현대인들에게 이해되게 하기 위해서는 현
대적 사고 방식으로 신약의 신화론적 표상을 비판하고 비신화화하
는 방법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한다. 불트만에 의하면 신화의 본
래적 의도는 객관적인 세계상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그의 세계속에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표현하
고자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성서의 신화는 우주론적이 아닌 인간
학적으로 실존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트만
의 입장에 반하여, 칼 야스퍼스나 폴 틸리히 등은 초월에 관한 한
실제로 암호나 상징으로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고 보아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을 반대한다. 신화의 의미를 밝히는 실존론적 해석이
결국은 신화가 지니는 비이성적 깊이를 대상화 함으로써 마침내 신
화가 지니는 깊이의 차원을 파괴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도 성서의 신화적 표상을 직접적이고도 문자적으로 받아
들이는 것은 거부했다는 점에서 불트만과 일치한다. 불트만에 있어
서의 신약성서의 사신은 비신화화되어야 한다. 현대인의 사유는 이
미 신약성서를 지배하고 있는 신화적 사유란 의식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었고 더우기 믿을 필요도 없었다. 그것이 곧 그들의 이성
적 사유, 과학적 사유를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로서는 이
세계와 삶의 온갖 수수께끼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신화론적인 방법
이 최선의 해석학적 도구였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코페르니쿠스적
세계관으로부터 비롯된 자연과학적인 사유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성서의 신화적 표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
하며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의 결과는 정신 분열증일 뿐이다. 그렇
다면 비신화화의 가정은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가? 불트만에 따르
면 신화의 제거를 통해서는 비신화화가 불가능하다.
만약 비신화화가 성서의 신화적 표상 일체를 거부하는 것이라면 결
코 새로운 것일 수 없다. 신화 제거의 작업은 이미 19세기의 급진
적인 성서학자들에 의해서도 상당한 수준까지 시도되었기 때문이
다. 그럼에도 그들이 실패한 것은 신화를 해석하려 하지 않고 제거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불트만은 자신이 쓰고 있는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란 용어 자체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칫 이 개념이 신화를 제거한다는 뜻으
로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불트만이 말하는 비신화화론
의 과제는 신화의 제거가 아니라 신화의 실존론적 의미를 밝혀내는
해석학적 작업이다. 따라서 불트만의 비신화화론은 신약의 신화론
적 진술을 비판한다는 부정적인 의도보다는 오히려 그 진술들 속에
있는 실존이해를 해명한다는 긍정적인 외도를 가지고 있다. 신화는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해석되고 설명되고 이해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불트만은 자신의 비신화화론을 성서에 대한 실존적 해석이
라고 한다. 그러면 성서의 신화적 진술은 어떻게 재해석되어야 하
는가?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신화속의 하나님의 메시지인
케리그마는 무엇인가?
3. 말씀의 재해석
성서는 묻지 않으면 침묵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성서를 향해 올
바로 질문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약성서가 대답
하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불트만이 이
해한 신약성서의 관심은 전적으로 인간 실존에 대한 문제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트만의 신학을 신존론적 신학이라고 규정한다.
1) 구속 사건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
불트만에 있어서 구속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집
중된다. 성서의 십자가와 부활기사에는 역사적인 것과 신화론적인
것이 뒤 엉켜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를 역사로 보고 어디까지를
역사적인 것으로 수용할 것인가? 우선 불트만에 의하면 십자가는
분명 역사적 사건으로 용납되어야 한다. 비록 신화적으로 채색되기
는 했어도 심지어는 십자가 사건의 날짜까지도 확정할 수 있는 객
관적인 자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
미는 그것이 내포한 실존적 의미성을 밝히는데 있다. 즉 그것을 자
신의 실존문제와 관계 지을 때만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지나간 역사적 사건의 신화론적 표상을 믿는 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세계에 대해서는 등을 돌리고 이 세계와 자신에
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에게 의존하기 위해 비본래적 실존에로 이끌 뿐인 자신에 대한 의
존성을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것은 이 세계에 대해 그
리고 자신에 대해 죽는 것,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
럼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실존론적으로 체험한 사람은 이제 새로운
삶에로 들어선다.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비본래적인 실존에
대해서는 죽고 본래적 실존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부활
의 실존적 의미이다. 따라서 불트만에게 일어서의 부활은 십자가와
실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은 한갓 신화인가? 일단은 그렇
다. 예수의 부활은 신화적 사건이다. 그러나 더 정확한 표현은 역
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은 전혀 그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부활을 취급하는 신약성서 역시도 부활의 역
사적 성격보다는 오히려 실존적 종말 사건으로서의 의의에 관심을
집중한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성서를 통해 알고 있는 것도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성을 신화적으로 해석하
는 제자들의 부활 신앙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독자적인 사
건이 아니라 십자가의 구속의미의 표현이다. 부활은 십자가가 구속
사건으로 선포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역사속에서
가 아니라 말씀(제자들의 케리그마)속에서 부활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부활의 신앙이란 부활 케리그마에 대한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결코 형이상학적으로 사변할 수 있는 기적이 아니라 선포되
는 말씀에 대한 이해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선포속에서
부활했으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속에서 지금도 부활한다. 따라서 부
활은 지나간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 일어나는 실존론적 이해
의 사건이다. 일찍이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는 오늘도 말씀의 선포
속에서 여전히 우리를 만나고 있다. 바로 이 케리그마에 현재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부활신앙의 의의이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이 주는 범인류적인 의미는 역사적인 한 인물이었던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서 입체적이고도 구체적인 구속의 메시지를
선포하셨다는데 있다. 그 하나님의 케리그마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
도에 대한 믿음의 결단을 통해 비본래적 실존을 십자가에 못 박고
다시 본래적 실존으로 부활하라는 것이다.
2) 종말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
불트만에 의하면 비본래적 삶을 영위하던 사람이 본래적 삶으로 전
향하려면 구속함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지점에서 신약성서는 전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때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고 한다. 그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 즉 십자가 사건인데 어
쨌든 인간은 반드시 구속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을 믿을 때 비로
소 본래적 실존의 성취가 가능해 진다. 그런데 그 본래적 실존의
선택이란 곧 이 세계가 그에게 부과한 비본래성으로 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에 실존적 종말을 뜻한다. 그는 이제 세상과 세상적
인 삶으로 부터의 결별을 통해 종말론적 실존이 된다. 그러므로 본
래적 실존이란 곧 종말론적 실존을 말하며 종말론적 실존이란 비본
래적 실존의 종국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개인의 신앙안에
서 이미 사건이 되는 실존적인 세상종말을 의미한다. 이렇게 함으
로서 그는 종말론을 부정하는 즉 시간적이고도 역사적인 종말을 거
부하는 현대신학사 가운데 대표적인 한 사람이 된다. 이상에서 살
펴 본 것처럼 불트만은 그의 독특한 실존론적 해석학을 통해 신약
성서를 모조리 비신화함으로써 성서 본래의 케리그마를 이 시대에
도 여전히 타당한 보편적 진리로 회복시켰다고 확신한다.
결 론
그럼 결론적으로 흔히 지적되는 불트만 신학의 문제점을 살펴보자.
첫째는 불트만의 역사 감각에 대한 문제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는 역사적 종교,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기초한 일면
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믿음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불트만
은 예수에 대해 알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매우 비관적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도 역사와 케리그마 사이 그리고 예수의 삶과 삶
의 의미에 대한 교회의 설교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그이상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트만에게 있어서의 역사는 언제나 신화속에 숨겨져서 회
복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불트만의 관심은 대부분 그리스도
사건이 지금 여기에서 개인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매어 있
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말하면 역사적 예수 탐구의 노력은 부질없는
것이고 무익한 것이다. 이러한 불트만의 역사적 회의주의가 그 동
안 가장 심각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2000년 교회사는 교회가
복음서의 내용을 엄연한 역사적 사건들로 받아들여 왔음을 증언하
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로서의 예수의 삶은 그리스도교의 중
심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교회가 장구한 세월을 통해 믿어온 것을
그렇게 가볍게 제쳐놓을 수는 없다는게 불트만에 반대하는 교회의
입장이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첫째로 만약 그리스도교
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지 못할 경우 결국 붕괴되고 말 것이라고
한다. 아무런 역사적 연관도 없는 신화론적 표상이 우리 그리스도
인으로 하여금 전 실존을 바쳐서 자기 삶을 결단할 수 있게 하는
생의 기반이 될 수 있는가?
둘째는 불트만은 성서를 오로지 실존적으로만 의미 있게 해석하려
고 한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내용이 인간의 실존적 물음에 대해서
만 의도된 것인가 하는데는 의문의 여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예
를 들면 신약성서는 미래에 있을 우주적 종말에 대해 다양하게 언
급을 하고 있다. 사도바울도 세계의 종말과 그 종말에 수반될 여러
징조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복음서에도 최후적 심판의 표상이 많
이 나온다. 따라서 성서적 종말론은 오히려 역사적이고도 우주적인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트만의 종말 이해는 지나치게 개인적이며 실
존적이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종말이란 한 개
인의 비본래적 실존으로 부터의 전향, 즉 세계의존적인 삶의 종국
을 의미한다. 따라서 불트만 신학의 비역사적 측면에 대한 비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집요하게 시도되어 왔다.
주목할만한 몇차례의 시도를 살펴보면 우선 오스카 쿨만의 도전인
데 그는 1946년에 출판된 "그리스도와 시간"이라는 저작에서 예수
의 역사는 비신화화론을 위해 제거되어야 할 요소가 아니라, 초대
교회 선포의 중심을 결정하는 객관적 기초라고 밝히면서 불트만에
대해 강력한 반발을 보였다. 다음은 불트만학파의 저명한 학자인
에른스트 케제만이 1952년 게팅겐 대학에서 행한 "독일 신약학의
문제들"이라는 강연을 꼽을 수 있다. 케제만은 이 강연에서 부활절
이후에 신앙되고 전파된 그리스도는 이른바 역사적 예수와의 연속
성속에 있다. 그리고 이 원칙이 없이는 신앙과 선포도 아무런 의미
를 갖지 못한다며 불트만의 케리그마 신학에 반기를 들었다. 바로
케제만의 이 강연을 계기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재발견하고자 하
는 후기 불트만학파의 시대가 시작된다.(케제만, 보른캄, 에른스트
폭스, 에빌링, 콘첼만, 막센, 로빈슨, 브라운 등). 그러나 이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한다.
그 다음이 소위 판넨베르그의 도전이다. 판넨베르그는 1959년에 "
구속사건과 역사"라는 강연을 통해 역사를 신학의 중심 개념으로
부각시켰다. "역사는 그리스도 신학의 포괄적인 지평이다. 모든 신
학적 질문들과 대답들은 역사의 테두리 내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라
고 선언함으로써 불트만의 비역사적 신학을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판넨베르그도 불트만을 극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끝으로 1965년 "희망의 신학"으로 등단한 몰트만을 들 수 있다. 그
는 희망의 신학을 통해 불트만의 비역사적인 실존론적 종말론을 구
체적인 역사적 종말론, 미래적 종말론, 희망의 종말론을 활성화시
킨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의 현대 신학의 흐름은 역사와 희망의
종말론으로 활성화시킨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의 현대 신학의 흐
름은 역사와 희망의 신학으로 전환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데, 그
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트만의 영향력도 만만치 않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불트만의 이론체계를 극복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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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불트만의 인간 안에 있는 말씀된 하나님
예수그리스도와 신화, 한국로고스연구원 / 역사와 종말론, 대한기독교서회
<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 >
1. 신화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마9:1)" 예수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이러한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동일한 세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역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역사의 계속되는 진행은 '신화'를 부정해 버렸다. 종말론적 드라마의 개념이 신화적인 것 만큼 하나님 나라 사상도 신화적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기대의 전제들, 즉, 이 세계가 비록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할지라도 사탄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으며 사탄의 군대와 귀신들이 모든 악의 근원이며 죄와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이론은 신화론적인 것이다.
... 일반적으로 신약성서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예수의 설교에서 전제되고 있는 전체 세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예수의 설교에서 전제되고 있는 전체 세계에 대한 이해는 신화론적인 것이다... 땅도 말하자면 자연적인 평범한 생활이 이루어지는 그러한 장소라기 보다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이 활동하는 곳이며 동시에 사탄과 그의 마귀들이 초자연적인 세력들이 사물의 생성 과정에 작용한다는 관념; 그리고 특히 초자연적 세력이 영혼의 내면적 생명 속으로 침투해 들어온다는 기적 사상; 사람들이 악마에 의해서 유혹받고 타락될 수 있으며 악령들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고 하는 관념 등, 이런 것들은 신화론적인 세계관인 것이다.(p.17-18)
2. 비신화화
그렇다면 불가피한 의문이 제기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설교는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가 예수의 윤리적인 가르침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그의 종말론적인 가르침을 포기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설교를 소위 말하는 사회복음이라는 것으로 축소해야만 할까?
그렇지 않다면 제3의 가능성이 있는가?... 우리는 종말론적인 설교와 신화적인 껍질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보다 깊은 의미가 있는지의 여부를 물어야만 한다... 신화적인 개념들 배후에 있는 보다 깊은 의미를 나는 비신화화라고 부른다. 비신화화의 목적은 신화론적인 진술들을 제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데 있다.(p.21)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자유란 진리의 인식으로만 만족하는 하나의 정신적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자유다. 성서가 증언하는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이며, 악으로부터의 자유 이다.(p.36)
비신화화가 성서의 해석학적 기준으로서 현대적인 세계관을 채용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비신화한다는 것은 성서나 그리스도교 메시지 전체를 버리는 것이 아니고 가끔 그리스도교 교의학이나 교회의 설교에서 보존되는 지나가버린 시대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는 성서의 세계관을 제거해 버리자는 것이다.(p.45)
성서의 세계관이 신화적이기 때문이 그 의식이 자연과학에 의하여 형성되어져 있는, 더 이상 신화적이지 않은 현대인들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3. 신앙적 실존주의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개인적 실존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위의 반론과는 전적으로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위에서 내가 간략하게 말한 그와 같은 반대는 영적 생활에 대한 하나의 심리학적 오해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하나님에 관하여 말한다는 것은 나 자신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진술이,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신앙이 단지 하나의 순수한 신앙적 사건으로만 해석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가 그와 같은 인생의 만남들 속에서 구체적 상황들과 결단들을 통하여 그 실제성을 소유하는 하나의 역사적 존재로서 인간의 의미를 진실되게 이해한다면 한편으로 하나님을 행동하는 분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실제가 아니라 하나의 환영에 불과하다고 결코 주장할 수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 신앙이 하나의 심리학적 주관적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다.(p.90)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확신이 객관적으로 입증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p.91)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마주쳤을 때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을 통한 자기이해에 적용될 수 있다. 신앙 안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이해한다... 신앙 안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새롭게 이해한다. 이러한 새로운 자기이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행위를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계속적인 응답에 의해서만 보존될 수 있다. 인간의 일상적인 삶에 있어서도 그것은 동일한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으로부터 발생하는 새로운 자기 이해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실제적인 관계가 계속적으로 유지될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날마다 새롭다"라는 이 말은 내가 그 사실을 매일 새롭게 인식할 경우에만 타당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사실이 하나의 수학공식처럼 무시간적 진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날마다 새롭게 될 때에만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p.96)
미래를 향한 자유로운 개방성은 우리가 미래에 대한 어떤 결단으로 말미암아 고통받게 된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하여 스스로를 책임지는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미래를 향한 자유로운 개방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신앙은 무와 관련된 불안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하여 스스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오직 신앙을 통해서면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미래를 향한 개방성으로서의 신앙은 과거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신앙은 죄용서에 대한 믿음이며 과거의 죄의 사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승리에 삼키운 바 되었다(고전 15:54)"는 표현을 통하여 바울이 의연히 외쳤던 '미래를 향한 자유로운 개방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말해지는 순간에만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무시간적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인간을 향하여 선포되는 하나의 구체적인 말씀인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그러나 이 영원성은 무시간성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지금 여기에서 현실이 되는 하나님의 현존성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p.9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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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
조성노 박사 (현대신학연구소장)
서 론
불트만은 마부르그의 자유주의 신학자 헤르만(리츨학파의 대표적인
신학자)의 제자이다. 불트만은 바르트에 이어서, 그리고 본 훼퍼의
영향력이 나타나기 전까지 유럽 신학계의 판도를 지배한 사람이었
다. 바르트의 관심이 하나님의 전적인 타자성에 집중된 데 반해 불
트만의 관심은 계시의 운반체인 성서에 집중된다. 그래서 그는 성
서의 메시지를 어떻게 현대인들에게 전달하고 또 의미를 갖게 할
것인가? 하는 성서해석의 방법을 연구하는데 온 정열을 다 바쳤다.
불트만은 성서 기자들이 당대사람들에게 계시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했던 사고 패턴은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성서가 현대인들에게도 여
전히 이해 가능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계시의 핵심적 메
시지와 그 메시지를 처음 수용했던 고대인들의 사고 패턴을 분리하
는 작업을 해야 하고 다음은 고대인들의 사고 구조에서 놓여난 그
계시의 메시지에다 다시 현대인들의 사고 패턴을 옷 입힌 다음 이
시대 인간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앙이 발생될 수 있는 만남이란 언제나 말
씀하시는 하나님과 그 말씀을 듣고 예! 하고 응답하는 인간 사이의
만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들음이라는 것은 신앙
이전에 우선 의미 있는 접촉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불트만은 신과 인간의 진실된 만남을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현존재 분석을 시도한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인간은 무엇이며 자신
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현대인은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떤
상황 속에 처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불트만은 이런 물음들에 답하
기 위한 수단으로 실존철학, 특히 마르틴 하이덱거를 택한다. 불트
만이 굳이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인 하이덱거를 선택한 이유는 그의
실존철학이 인간의 현 존재성을 가장 정직하고 명확하게 분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향해 던지는 물음에 대해서도 가장
타당한 답변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이덱거의 무신론적 입장이 자기가 참여하고 있는 변증법적 신학
의 신이해에도 오히려 부합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신
학에 의하면 신이란 인간에 의해서는 결단코 인식될 수 없고 오직
신의 자기 계시에 의해서만 인식이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불트만에게는 철학적 견지에서는 결코 신에 관해 말 할 수
없고 신을 발견할 수도 없다는 하이덱거의 무신론이 오히려 진실
한 인간 고백으로 들렸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불트만은 하이덱거
의 현존재 해석학을 인간에 관한 가장 적절한 인식 수단으로 평가
하여 그의 신학적 인간 이해의 틀속에 적극 수용한다. 일단 하이덱
거의 도움으로 현존재 분석의 과제를 달성하고 난 불트만은 또 하
나 중요한 문제인 하나님 말씀에로 주의를 옮긴다.
성서의 하나님은 제1세기 인간들이 살고 있던 문화적 틀 내에서 그
리고 그들이 처해 있던 고유한 상황 내에서 말씀하셨다. 따라서 오
늘 우리는 제 1세기의 상황과 제 1세기의 세계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달 수단인 성서와 하나님의 본래적 메시
지를 분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불트만은 바로 이 하나님 말씀의
내용과 그 말씀의 표현 수단의 분리 과정 을 비신화화
(Entmythologisierung)라고 부른다. 이렇게 현존재 분석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비신화화 작업이 이룩된 후 비로소 불트만은 하나님의
말씀의 재해석이다. 따라서 불트만신학의 구도는 세가지 측면, 즉
현존재 분석과 비신화화, 그리고 말씀의 재해석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1. 현존재 분석
불트만이 절대 의존하고 있는 하이덱거(1927년 "존재와 시간"에 나
타난 현존재 분석을 의미함)에 의하면 현대인이 직면한 삶의 가장
기본적인 가능성은 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이다. 본래적 실존
이란 인간이 자신과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주체적으로 발전시키는
길을 선택하는 삶을 말한다. 그리고 비본래적 실존이란 인간이 자
신을 이 세계(사물)와 집합적인 대중에게 내 맡겨 그것들에 의해
자신이 형성되고 영향받게 하려는 삶을 가리킨다. 하이덱거는 현대
인의 대부분이 후자의 길, 곧 자신의 개별적 인격성의 책임을 포기
하는 비본래적 삶을 사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이유는 그것이 훨씬
살기가 쉽기 때문이다. 비인격화된 대중의 일원이 되어 그런 삶의
방식에 만족하고 그런 가치관에 안주하여 사는 일이란 결코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삶에 비해 자결의 길, 본래적 실존의 길을 선택
하기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본래적 실존이란 인간이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가능성들을 선택하는데 대한
완전한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인간은 누구도 이 두 유
형의 실존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
다. 선택하지 않으려는 결정도 역시 비본래적인 실존에 자신을 내
맡기는 것이 된다. 이리하여 결국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주체
적으로 형성해 나갈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에 의해
형성되어 가도록 내 던져 버릴 것인지에 대해 선택해야 하는 존재
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번에 결판나는 선택은 아니다. 오히려
삶은 두가지 실존 가운데서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는 과정이다. 따
라서 모든 현재는 자유로운 결단의 순간이다. 그리고 이같은 지속
적인 선택의 필요성이 삶의 주요한 성격인 불안을 조장한다.
불트만은 역사내의 존재로서의 인간의 주요 특징을 불안이라 생각
하였다. 인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영원한 긴장 가운데서 실존한
다. 매순간마다 인간은 세계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개별적
인 인격을 상실하거나 아니면 모든 안전을 버리고 미래의 자신을
던져 본래적 존재를 성취하거나 해야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자신의 실존에 대해 느끼는 불안을 달래기 위해 비본래적인 실존을
선택하게 되면 그것은 결국 자신을 세계에 내어 줌으로써 보다 확
실하게 사물의 지배 아래로 떨어질 뿐 이다. 그리고 주체성을 상실
해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사물이 그의 주인이 된다. 따라서 인간은
참다운 자아로 부터 철저하게 소외되게 된다. 다른 한편 자신에게
열려져 있는 두가지 선택의 길 가운데서 본래적 실존의 길을 선택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며 그는 어떻게
자신의 삶의 길을 실현해 가는가.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
은 마르틴 하이덱거의 경우는 일단 인간이 본래적 실존의 길을 선
택하고 나면 스스로 본래적 삶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고 보는 반면에 볼트만은 변증법적 신학자 답게 인간이란 근본적으
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는 본래적인 실존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본다. 어째든 볼트만은 본래적 실존의 성취는
오로지 하나님의 도움만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면 본래적 실존을 위한 선택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것은 곧 자유를 위한 결단을 의미한다. 이는 두가지 측면에서 그러
한데 첫째는, 이 세상으로 부터 즉 사물에 대한 예속상태로 부터
그리고 집합체의 비인격적 구조로 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이제부터는 자신의 삶에 대한 완전한 책임을 스스로 지겠다
는 결단이다. 둘째, 본래적 실존을 위한 선택은 결국 미래를 위한
결단이기 때문에 과거가 인간에게 가져다준 온갖 예속으로 부터 자
유롭게 되는 결단을 의미한다. 그것은 과거의 실패와 죄책,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종속되어 참다운 자아로 부터 소외된 상태를 모두
내어버리는 선택이다. 그것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책임에 전념하겠
다는 결단이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회개를 촉
구한 것도 바로 인간에게 열려있는 새 가능성에 대한 선언이후 동
시에 그 가능성에 대한 자신을 개방할 때에만 비로소 참 인간으로
서의 구원이 있음을 계시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인간에
게 열린 새로운 가능성이다. 인간은 도래하는 것에 비해서만 참
자기로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볼트만이 이해한 성서 특유의 인간
관이다. 그래서 나를 얽어매고 있는 낡은 사슬을 끊고 새 세계로의
탈출을 종용하는 말이 바로 예수의 회개하라는 외침이고 그것이 곧
본래적 실존을 위한 결단의 촉구라는 것이다.
2. 성서의 비신화화
현대인들의 성서이해에 대한 불트만이 가지는 주요 관심은 신약의
표상 세계와 현대인의 표상세계의 깊은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된다. 불트만에 의하면 현대인들의 세계
상은 자연과학과 기술에 의해 이해되는 합리적이고도 차안적인데
비해 성서는 모두가 신화적 세계상에 기초하고 있다. 성서는 이 세
계를 삼중구조로 이해한다. 위는 하늘, 아래는 지옥, 중간은 신과
사탄의 싸움터로서의 이 세상이다. 불트만은 이렇게 말한다 "신약
성서의 세계상은 신화적인 세계상이다. 심지어는 신약성서 선포의
본래적 내용을 이루는 구속 사건의 설명도 바로 이 신화적 세계상
에 일치한다". 그러니까 신약성서는 그 내용의 핵심적인 구속사건
조차도 신화론적 표상으로 진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에 나타나
는 그리스도상을 보자. 우선 그는 선재 했던 신적인 존재이다. 그
러다가 땅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십
자가에서 모든 죄의 대가를 위해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된지 사흘만
에 다시 살아나시고 본래의 하늘로 되돌아 가셨다가 이제, 죽은 자
의 부활과 심판을 통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기 위해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게 된다. 불트만에 의하면 이러한 그리스도상은 신
화론적 진술로서 영지주의적 구속신화와 유대교적 묵시문학의 영향
을 받아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론 뿐만 아니라 종말론도
마찬가지이다. 즉, 종말이 시간적인 우주적인 대 몰락의 드라마로
표상 된다. 이를테면 천상의 세력과 악마세력간의 최후의 투쟁이
일어나고 그후에 우주적 종말의 심판자가 천사를 거느리고 나타나
서 죽은 자들을 다살려 내어 어떤 이들은 구원하고 어떤 이들은 저
주로 심판한다는 것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미래의 이런 사건이 실재로 일어날 것이라고 소박
하게 기대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것이다. 그는 성서의 신화론적
종말은 예수의 재림이 신약의 기대처럼 곧 도래하지 않았고 세계
역사는 계속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되어 갈 것이라는 단순한 사
실을 통해 이미 근본적으로 낡은 것이 되고 말았다. 불트만은 예수
의 부활도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신화적 사건이라고 한다. 오늘 우
리로서는 신화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세계에 살았고 신화적 경험에
일치되게 예수를 해석했던 제자들의 부활절 신앙에 대해서만 알 뿐
이 라고 한다. 이러한 신화적 세계상은 역사적이며, 자연과학적인
세계상 속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황당한 얘
기다.
불트만은 전기와 라디오를 이용하고 아플 때 현대의학에 의존하면
서 동시에 신약에 나타난 악마와 영들의 세계를 믿는다는 것은 불
가능하다 하며 그리스도교의 선포가 현대인들에게 신화적 세계상
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뿐만아니라 의미도 없다고 했다.
성서의 신학적 세계상은 그 자체가 특별히 기독교적인 것일 수 없
는 단순히 지나간 시대의 세계상일 뿐이다. 이렇게 현대인의 세계
상과 자기 이해가 신약의 신화론적 표상세계와 마찰을 일으킨다면
신약의 증언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불트만에 의하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신약성서의 복음을 이상주의적 윤리(리츨, 하르
낙)나 신비적으로 채색된 종교적 정서, 혹은 감정(쉴라이마허)으로
환원시켰다. 그러나 신약은 인간의 종교성이나 윤리성에 대해 말하
는 책이 아니라 신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세상을 구원하셨다는 구
속 사건에 관해 말한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은 결정적 구속사건인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하나의 종교적이고도 윤리적인 모범이나 선
생으로만 이해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켰다고 불트만은 비난
한다.
여기서 불트만은 복음이 현대인들에게 이해되게 하기 위해서는 현
대적 사고 방식으로 신약의 신화론적 표상을 비판하고 비신화화하
는 방법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한다. 불트만에 의하면 신화의 본
래적 의도는 객관적인 세계상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그의 세계속에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표현하
고자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성서의 신화는 우주론적이 아닌 인간
학적으로 실존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트만
의 입장에 반하여, 칼 야스퍼스나 폴 틸리히 등은 초월에 관한 한
실제로 암호나 상징으로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고 보아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을 반대한다. 신화의 의미를 밝히는 실존론적 해석이
결국은 신화가 지니는 비이성적 깊이를 대상화 함으로써 마침내 신
화가 지니는 깊이의 차원을 파괴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도 성서의 신화적 표상을 직접적이고도 문자적으로 받아
들이는 것은 거부했다는 점에서 불트만과 일치한다. 불트만에 있어
서의 신약성서의 사신은 비신화화되어야 한다. 현대인의 사유는 이
미 신약성서를 지배하고 있는 신화적 사유란 의식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었고 더우기 믿을 필요도 없었다. 그것이 곧 그들의 이성
적 사유, 과학적 사유를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로서는 이
세계와 삶의 온갖 수수께끼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신화론적인 방법
이 최선의 해석학적 도구였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코페르니쿠스적
세계관으로부터 비롯된 자연과학적인 사유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성서의 신화적 표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
하며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의 결과는 정신 분열증일 뿐이다. 그렇
다면 비신화화의 가정은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가? 불트만에 따르
면 신화의 제거를 통해서는 비신화화가 불가능하다.
만약 비신화화가 성서의 신화적 표상 일체를 거부하는 것이라면 결
코 새로운 것일 수 없다. 신화 제거의 작업은 이미 19세기의 급진
적인 성서학자들에 의해서도 상당한 수준까지 시도되었기 때문이
다. 그럼에도 그들이 실패한 것은 신화를 해석하려 하지 않고 제거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불트만은 자신이 쓰고 있는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란 용어 자체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칫 이 개념이 신화를 제거한다는 뜻으
로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불트만이 말하는 비신화화론
의 과제는 신화의 제거가 아니라 신화의 실존론적 의미를 밝혀내는
해석학적 작업이다. 따라서 불트만의 비신화화론은 신약의 신화론
적 진술을 비판한다는 부정적인 의도보다는 오히려 그 진술들 속에
있는 실존이해를 해명한다는 긍정적인 외도를 가지고 있다. 신화는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해석되고 설명되고 이해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불트만은 자신의 비신화화론을 성서에 대한 실존적 해석이
라고 한다. 그러면 성서의 신화적 진술은 어떻게 재해석되어야 하
는가?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신화속의 하나님의 메시지인
케리그마는 무엇인가?
3. 말씀의 재해석
성서는 묻지 않으면 침묵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성서를 향해 올
바로 질문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약성서가 대답
하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불트만이 이
해한 신약성서의 관심은 전적으로 인간 실존에 대한 문제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트만의 신학을 신존론적 신학이라고 규정한다.
1) 구속 사건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
불트만에 있어서 구속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집
중된다. 성서의 십자가와 부활기사에는 역사적인 것과 신화론적인
것이 뒤 엉켜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를 역사로 보고 어디까지를
역사적인 것으로 수용할 것인가? 우선 불트만에 의하면 십자가는
분명 역사적 사건으로 용납되어야 한다. 비록 신화적으로 채색되기
는 했어도 심지어는 십자가 사건의 날짜까지도 확정할 수 있는 객
관적인 자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
미는 그것이 내포한 실존적 의미성을 밝히는데 있다. 즉 그것을 자
신의 실존문제와 관계 지을 때만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지나간 역사적 사건의 신화론적 표상을 믿는 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세계에 대해서는 등을 돌리고 이 세계와 자신에
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에게 의존하기 위해 비본래적 실존에로 이끌 뿐인 자신에 대한 의
존성을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것은 이 세계에 대해 그
리고 자신에 대해 죽는 것,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
럼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실존론적으로 체험한 사람은 이제 새로운
삶에로 들어선다.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비본래적인 실존에
대해서는 죽고 본래적 실존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부활
의 실존적 의미이다. 따라서 불트만에게 일어서의 부활은 십자가와
실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은 한갓 신화인가? 일단은 그렇
다. 예수의 부활은 신화적 사건이다. 그러나 더 정확한 표현은 역
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은 전혀 그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부활을 취급하는 신약성서 역시도 부활의 역
사적 성격보다는 오히려 실존적 종말 사건으로서의 의의에 관심을
집중한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성서를 통해 알고 있는 것도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성을 신화적으로 해석하
는 제자들의 부활 신앙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독자적인 사
건이 아니라 십자가의 구속의미의 표현이다. 부활은 십자가가 구속
사건으로 선포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역사속에서
가 아니라 말씀(제자들의 케리그마)속에서 부활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부활의 신앙이란 부활 케리그마에 대한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결코 형이상학적으로 사변할 수 있는 기적이 아니라 선포되
는 말씀에 대한 이해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선포속에서
부활했으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속에서 지금도 부활한다. 따라서 부
활은 지나간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 일어나는 실존론적 이해
의 사건이다. 일찍이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는 오늘도 말씀의 선포
속에서 여전히 우리를 만나고 있다. 바로 이 케리그마에 현재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부활신앙의 의의이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이 주는 범인류적인 의미는 역사적인 한 인물이었던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서 입체적이고도 구체적인 구속의 메시지를
선포하셨다는데 있다. 그 하나님의 케리그마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
도에 대한 믿음의 결단을 통해 비본래적 실존을 십자가에 못 박고
다시 본래적 실존으로 부활하라는 것이다.
2) 종말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
불트만에 의하면 비본래적 삶을 영위하던 사람이 본래적 삶으로 전
향하려면 구속함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지점에서 신약성서는 전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때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고 한다. 그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 즉 십자가 사건인데 어
쨌든 인간은 반드시 구속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을 믿을 때 비로
소 본래적 실존의 성취가 가능해 진다. 그런데 그 본래적 실존의
선택이란 곧 이 세계가 그에게 부과한 비본래성으로 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에 실존적 종말을 뜻한다. 그는 이제 세상과 세상적
인 삶으로 부터의 결별을 통해 종말론적 실존이 된다. 그러므로 본
래적 실존이란 곧 종말론적 실존을 말하며 종말론적 실존이란 비본
래적 실존의 종국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개인의 신앙안에
서 이미 사건이 되는 실존적인 세상종말을 의미한다. 이렇게 함으
로서 그는 종말론을 부정하는 즉 시간적이고도 역사적인 종말을 거
부하는 현대신학사 가운데 대표적인 한 사람이 된다. 이상에서 살
펴 본 것처럼 불트만은 그의 독특한 실존론적 해석학을 통해 신약
성서를 모조리 비신화함으로써 성서 본래의 케리그마를 이 시대에
도 여전히 타당한 보편적 진리로 회복시켰다고 확신한다.
결 론
그럼 결론적으로 흔히 지적되는 불트만 신학의 문제점을 살펴보자.
첫째는 불트만의 역사 감각에 대한 문제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는 역사적 종교,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기초한 일면
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믿음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불트만
은 예수에 대해 알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매우 비관적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도 역사와 케리그마 사이 그리고 예수의 삶과 삶
의 의미에 대한 교회의 설교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그이상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트만에게 있어서의 역사는 언제나 신화속에 숨겨져서 회
복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불트만의 관심은 대부분 그리스도
사건이 지금 여기에서 개인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매어 있
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말하면 역사적 예수 탐구의 노력은 부질없는
것이고 무익한 것이다. 이러한 불트만의 역사적 회의주의가 그 동
안 가장 심각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2000년 교회사는 교회가
복음서의 내용을 엄연한 역사적 사건들로 받아들여 왔음을 증언하
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로서의 예수의 삶은 그리스도교의 중
심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교회가 장구한 세월을 통해 믿어온 것을
그렇게 가볍게 제쳐놓을 수는 없다는게 불트만에 반대하는 교회의
입장이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첫째로 만약 그리스도교
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지 못할 경우 결국 붕괴되고 말 것이라고
한다. 아무런 역사적 연관도 없는 신화론적 표상이 우리 그리스도
인으로 하여금 전 실존을 바쳐서 자기 삶을 결단할 수 있게 하는
생의 기반이 될 수 있는가?
둘째는 불트만은 성서를 오로지 실존적으로만 의미 있게 해석하려
고 한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내용이 인간의 실존적 물음에 대해서
만 의도된 것인가 하는데는 의문의 여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예
를 들면 신약성서는 미래에 있을 우주적 종말에 대해 다양하게 언
급을 하고 있다. 사도바울도 세계의 종말과 그 종말에 수반될 여러
징조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복음서에도 최후적 심판의 표상이 많
이 나온다. 따라서 성서적 종말론은 오히려 역사적이고도 우주적인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트만의 종말 이해는 지나치게 개인적이며 실
존적이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종말이란 한 개
인의 비본래적 실존으로 부터의 전향, 즉 세계의존적인 삶의 종국
을 의미한다. 따라서 불트만 신학의 비역사적 측면에 대한 비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집요하게 시도되어 왔다.
주목할만한 몇차례의 시도를 살펴보면 우선 오스카 쿨만의 도전인
데 그는 1946년에 출판된 "그리스도와 시간"이라는 저작에서 예수
의 역사는 비신화화론을 위해 제거되어야 할 요소가 아니라, 초대
교회 선포의 중심을 결정하는 객관적 기초라고 밝히면서 불트만에
대해 강력한 반발을 보였다. 다음은 불트만학파의 저명한 학자인
에른스트 케제만이 1952년 게팅겐 대학에서 행한 "독일 신약학의
문제들"이라는 강연을 꼽을 수 있다. 케제만은 이 강연에서 부활절
이후에 신앙되고 전파된 그리스도는 이른바 역사적 예수와의 연속
성속에 있다. 그리고 이 원칙이 없이는 신앙과 선포도 아무런 의미
를 갖지 못한다며 불트만의 케리그마 신학에 반기를 들었다. 바로
케제만의 이 강연을 계기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재발견하고자 하
는 후기 불트만학파의 시대가 시작된다.(케제만, 보른캄, 에른스트
폭스, 에빌링, 콘첼만, 막센, 로빈슨, 브라운 등). 그러나 이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한다.
그 다음이 소위 판넨베르그의 도전이다. 판넨베르그는 1959년에 "
구속사건과 역사"라는 강연을 통해 역사를 신학의 중심 개념으로
부각시켰다. "역사는 그리스도 신학의 포괄적인 지평이다. 모든 신
학적 질문들과 대답들은 역사의 테두리 내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라
고 선언함으로써 불트만의 비역사적 신학을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판넨베르그도 불트만을 극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끝으로 1965년 "희망의 신학"으로 등단한 몰트만을 들 수 있다. 그
는 희망의 신학을 통해 불트만의 비역사적인 실존론적 종말론을 구
체적인 역사적 종말론, 미래적 종말론, 희망의 종말론을 활성화시
킨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의 현대 신학의 흐름은 역사와 희망의
종말론으로 활성화시킨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의 현대 신학의 흐
름은 역사와 희망의 신학으로 전환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데, 그
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트만의 영향력도 만만치 않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불트만의 이론체계를 극복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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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트만의 논문 <Das Problem der Hermeneutik>에 대한 고찰
전 철
Rudolf Bultmann, Das Problem der Hermeneutik,
Zeitschrift fur Theologie und Kirche 47(1950) S.47-69.
1. 들어가며
불트만이 1950년에 발표한 "해석학의 문제"(Das Problem der Hermeneutik)"는 '역사'와 '성서'에 대한 이해 가능성의 문제를 고찰한, 무게 있는 논문이다. 불트만은 여기에서 현대 해석학의 공로자인 슐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에 의하여 새롭게 해명된 해석학의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그들에 대한 성찰과 하이데거 사상에 대한 조우를 바탕으로 하여 불트만은 '전이해'의 문제, '본문'과 '물음'의 문제, '주관'과 '객관'의 문제, '신앙'과 '이해'의 문제를 주도면밀하게 고찰해 나아간다. 마지막으로, 성서의 실존적 해석에 대한 바르트와의 이견에 대하여 정면으로 응수하며 자신의 논지를 선명하게 제시한다. 이에 우리는 이 논문을 통하여 불트만의 해석학적 관점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려 하며, 특히 성서 해석학을 둘러싼 바르트와의 대립 국면을 조명하려 한다.
2. 본문
1.1. 딜타이(W. Dilthey)에 의하면 해석학(Hermeneutik) 즉 그의 말대로 '글에 고착된 생활 표현의 이해술'은 언제나 역사가 크게 움직일 때 크게 주목을 끈다.
1.2. 딜타이는 해석학이 주력하는 과제를 "그러한 인식(즉 개인의 위대한 모습들의 인식)이 가능하가? 그 인식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방법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서 보았다. 자세히 말해서 "역사적 개인에 대한 이해가 보편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의미상 이미 주어진 남의 개성적 생활 표현을 보편 타당성 있는 객관적 이해에 도달시킬 수 있을까?" 즉 역사적인 한 인물 혹은 과거를 이해하는 데 객관성이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이다. 그러므로 이 물음은 근본에 있어서 역사적 현상, 즉 이 현상이 어떤 개인에 관한 증언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현상 일반을 이해하는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다. 이런 의미에서 해석학은 역사 일반에 관한 이해의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2.1. 문헌 해석을 위한 해석률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발전되었고 그것은 이미 전통이 되었으며 대체로 그것에 이의 없이 따르고 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본 대로 첫째 요구는 구조와 문체에 따른 문헌의 외형적 분석이다. 해석은 우선 작품의 구성성분을 분석하고 개체를 전체에서, 전체를 개체에서 이해해야 한다. 어떤 해석이나 하나의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schen Zirkel)을 돌고 있다는 견해는 이미 여기에서 유래한다.
2.2. 계몽주의 시대에 와서 역사 연구의 발전과 함께 작자 개인의 언어 용법의 문제는 '문헌의 상이'한 시대적 언어 용법의 문제로 발전했다. 그러나 언어의 역사적 발전에 대한 인식에서 차례로 역사적 발전 일반에 대한 인식, 즉 문헌은 모두 시대와 장소, 사정에 의하여 역사적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인식이 얻어졌으며 이 지식은 이미 모든 사리에 맞는 해석에 없을 수 없는 전제가 되고 말았다.
2.3. 쉴라이에르마헤르는 이미, 참 이해가 단순한 기성 해석률을 추종하는데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았었다. 기성 해석률에 의하여 수행된 해석 ― 그의 학술어에 의하면 '문법적 해석' ― 에 '심리적'(psychologische) 해석이 추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본 것은 한 작품의 구성과 통일성이 형식 논리적 문제 분석의 규범만으로는 파악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작품은 오히려 일정한 한 사람의 생활 사정에서 이해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외형' 파악에 반드시 '내적' 파악이 와야 하는데 파악되어야 할 내용은 객관적 해석이 아니라, 주관적, '예지적' 해석이라는 것이다.
2.4. 그러므로 해석은 문헌 현상에 대한 산 관계에서 '재형성', '재구성'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해는 '사상의 산 연결을 자기의 것으로 재생산' 시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재생산'은 해석자와 저자의 개성이 비교가 안 되는 두 사실로 서로 대립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둘은 "일반 인간성을 바탕으로 하여 형성되었으므로 인간의 공동성이 상호간의 이야기와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2.5. 딜타이는 이 사상을 받아들여 더욱 분명하게 밝히려고 힘썼다. 모든 개성의 차이는 결국 개인의 질적 차이에서 오지 않고 오직 심리 현상의 정도 차이에 의한 제약일 따름이다. 그리하여 해석자는 동시에 검토하면서 자기 자신의 생을 역사적 차원에 옮겨 놓으면서 자유로이 한 심리현상을 강조하고 역설하면서 다른 것은 버릴 수 있게 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 안에 남의 생활상을 재구성할 수 있다. 그리고 이해의 조건은 "남의 어떤 개성 표현에도, 이해하는 자의 생활체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해설은 개인적 예술 작품이고 그의 완전성 여부는 해설자의 독창성에 제한되어 그 독창성은 친화성에 있어서 작가와 친해지는 생활과 끊임없는 연구에 의하여 승화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2.6. [이해에 대한 쉴라이에르마헤르의 견해는] 다른 문헌에도 적용될까? 가령 수학 의학 문헌에서도 저자의 심리 현상의 재현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외견상으로도 그렇지 않거니와 사실 해석이 문헌에 의하여 직접 보도된 사태의 이해를 목표로 하고 있는 한 ― 예를 들면 수학적 혹은 의학적 인식 혹은 세계사적 사실과 현상의 보도 같은 것은 그럴 수 없다. 이 문헌을 읽는 독자들의 관심도 바로 이 외적 사실에만 있기 때문이다.
2.7. 하나의 이해와 해석 ― 결과적으로 분명하다 ― 은 항상 일정한 문제설정과 일정한 방향에 따른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이해와 해석의 무전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자세히 말하면 해석과 이해는 언제나 문헌에서 찾는 내용에 대한 '전이해'(Vorverstaendnis)에 의하여 유도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문제 설정과 해석 자체가 가능한 것은 이와 같은 전이해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
2.8. 딜타이가 문헌에서 찾는 내용은 '삶'(Leben) 즉 문헌에서 '영구히 고정된 생활 표현'으로서의 문헌에서 형태를 갖춘, 개인의 역사적 생활이었다. 또 이것을 '의미가 부여된 그리고 의미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표현'에서 해석을 통하여 객관적인 인식에까지 가져와야 할 심리적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은 해석이 바랄 수 있는 유일한 것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 관점에 의하여 성격지어진 이해 현상도 해석에서 수행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일 수 없다. 해석 방향의 결정 여하에 따라 이해 현상은 오히려 상이할 것이다.
3.1. 그러나 문제 설정은 묻는 자의 생활에 근거를 둔 어떤 관심에서 나오고 또 이 관심이 어떤 형태로든 해석하려는 문헌에 생생하게 문헌과 해석자 사이에 연결을 세워 준다는 것은 이해를 위한 모든 해석의 전제가 된다. 딜타이가 작가와 해석하는 사람 사이의 친화성을 이해 가능성의 조건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실 이해를 위한 모든 해석의 전제를 발견한 것이다. 이 조건은 특별히 쉴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의 문제설정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전통적 해석규칙을 따르는 것만으로는 결코 수행될 수 없는 모든 해석을 위해서도 해당한다.
3.2. 해석의 가능성은 '해석하는 자와 저자의 개성이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두 사실로 대립하는 데' 있지 않고 둘이 논의 혹은 문제 되는 내용과 같은 생활 관계를 가진(혹은 가진 만큼) 데 있는 바 그들은 같은 생활 연관에서 살기(혹은 그들이 사는 만큼) 때문이다. 문헌에서 문제되고 혹은 물음의 목적이 되는 내용과의 이 관계가 곧 이해의 전제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모든 해석은 일정한 목적에 의하여 수행된다는 것도 이해가 가는 것이다. 어떤 생활 연관성을 조건으로 방향이 어떻게든 결정된 물음이 가능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해석은 모두 일정한 '전이해' 즉 문제의 내용이 소속한 생활 연관에서 자라나는 이해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도 이해된다.
3.3. 해석은 항상 문헌에서 ― 직접 간접 ― 문제되는 내용과의 생활관계를 전제한다. 내가 음악을 취급한 문헌을 이용하려면 오직 내가 음악에 관계를 가지고 있는 그 정도만큼 가능하고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 중 많은 부분이 많은 독자에게 이해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하간 해당 내용과의 생활 관계는 전제임에 틀림 없고 그리고 이 인식은 '관련 없는 영적인'(fremdseelisches) 존재 이해 가능성에 대한 물음 같은 잘못된 물음을 애초부터 막고 있다.
4.1. 내용에 대한 관심이 해석의 동기가 되고 해석의 문제 설정 곧 방향을 제공한다. 만일 해석이 문헌 자체의 의도나 사건을 보도하려는 것으로 이것을 물을 때, 이를테면 내가 수학이나 음악에 관한 지식을 얻으려고 수학 혹은 음악책을 해석할 때는 해석의 방향 결정이 문제 되지 않는다.
4.2. 그러나 과학적 문헌이 과학사를 위한 증거물로 읽혀지면 그의 방향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자면 설화체 특히 사화체 문헌 해석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두 입장을 들 수 있다. 첫째는 그 문헌이 그가 보도하는 것을 위한 증서로 읽혀지지 않고 특히 그가 보도하는 시대에 대한 증언으로 읽혀지는 경우이다. 둘째는 사화적 문헌이 역사 즉 역사 과학의 역사를 위한 증인으로 해석되는 경우인데 여기에서는 문헌의 의도가 완전히 무시된다.
4.3. 철학 문헌의 해석은 순순히 이해된 것이려면 반드시 진리에 대한 물음에 의하여 움직여야 하는데, 이를테면 저자와의 대화에서만 이 해석은 진전될 수 있다는 말이다. 플라톤을 이해하는 자는 오직 그와 철학하는 자 뿐이다. 그 해석이 역사를 현재의 것으로 이해하는 대신 과거에 놓여 있는 사건으로 파악할 때는 참 이해를 상실하고 만다.
5.1. 시와 예술, 종교와 철학 문헌, 기념물 등을 위한 해석의 참된 문제 설정을 되찾아야 하는 이유는 소위 역사주의 시대에 지배적이었던 문제 설정이 위축된 때문이다. 실로 문헌을 사료로 취급하는 문제 설정의 정당성은 바로 참 해석에 봉사하는 데 있을 것이다. 모든 해석은 반드시 해석학적 순환을 이룬다. 즉 개체 현상은 그 시대에서 이해되는 반면 그 시대 자체를 이해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5.2. 이해하는 자는 '모든 역사에서 영혼(Seele)의 역사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관점에서 자기 개성을 '보충'하고 '이해하면서 자기 자신을 보는 방법'을 배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진술에서 보여주는 것은, 참 이해가 남의 개성 자체에 도취되어 관망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서 보여 주는 인간 존재의 가능성에 근거했다는 사실이다.
5.3. 이해의 과제를 결정적으로 명백하게 한 이는 하이데거이다. 그는 이해를 실존적인 것으로 증명, 해석을 이해의 완성으로 분석 특히 역사과제의 분석, 그리고 현존(Dasein)의 역사성의 해석 등으로 이 일을 이루었다.
6.1. 이해하는 모든 해석의 전제는 문헌에서 직접 간접 문제되고 논의의 방향을 정해주는 내용과의 선행적 생활 관계(Lebensbeh?ltnis)이다. 문헌과 해석자를 연결시켜주는 이런 생활 관계 없이 어떤 논의도 이해가 불가능하고 논의의 동기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또 모든 해석이 반드시 논의 혹은 문제의 내용에 대한 어떤 '전이해'에 의하여 수행된다는 것을 말한다.
6.2. 해석의 목적은 인간의 존재가 움직이며 그의 가능성을 얻어 성취하고 이 가능성에 대한 자각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얻으며 키우고 자기 자신 즉 특유한 가능성을 얻는 생활 영역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관심에서 제기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목적은 특유한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를 묻는 데서 얻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물음은 항상 인간 존재에 대한 하나의 잠정적 이해 즉 '하나의 특수한 실존 이해'에 의하여(von einem bestimmten Existenzverstaendnis) 유도된다. 이럼으로 '전이해'와 이것에서 온 물음이 없으면 문헌은 말을 못한다. 문제는 '전이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의식하게 하고 문헌의 이해에서 철저히 비판하며 검토하는 것이다.
6.3. 이러한 견해는 역사 현상 인식의 객관성 즉 해석의 객관성에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의혹적 물음의 대답이 되기도 한다. 자연과학적 의미에서 객관적 인식이라는 개념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역사 현상 이해와 무관하다. 역사 현상은 자연 현상과 다른 종류의 것이다. 과거의 사실이 역사적 현상으로 되려면 그것이 스스로 역사 속에 살며 역사에 참여하는 주체에 대하여 의미를 가지고 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 현상은 역사적 현상을 파악하는 주체에게만 이것을 행한다.
6.4. 문제 설정 자체를 주관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의미하다. 문제 설정 자체가 개인적 자의에 따른 것이 아니라 역사 자체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자가 자기 주관성을 침묵하게 하고 자기 개성을 말소함으로써 객관적 인식에 도달해야 한다는 요구는 가장 모순된 것이다. 이 점에서 '극단의 주관적' 해석은 곧 '극단의 객관적' 해석이 된다. 다시 말하면 자기 실존의 무제에 의하여 움직이는 자만이 문헌의 요구를 경청할 수 있다.
7.1. 성서적 문헌의 해석도 다른 문헌의 경우와 다른 이해의 조건에 지배되지 않는다. 첫째로 분명한 것은 그 옛 해석학적 규정 즉 문법적 해석, 문장 형식의 분석, 시대사적 조건을 따른 설명이 그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해의 전제가 원문과 해석자의 연결성, 바꾸어 말해서 해석자의 생활 관계 즉 원문에서 매개되는 내용과의 선행적 관계에 의하여 수립되는 연결성이 역시 해당된다. 즉 이해의 전제는 여기에서도 내용에 대한 '전이해'이다.
7.2. 그러나 성서 특히 신약이 말하는 내용은 어떤 전이해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것으로 자연적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선행적 관계를 가질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즉 바로 그의 행위에 의하여서만 그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보일 뿐이다.
7.3. 나는 반드시 역사적 가능성에 대한 '전이해'를 가지고 이 사건들에 의미와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성격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행위라는 사건에 관한 보도의 이해에도, 가령 인간의 행동 혹은 자연 사건들과 다른 하나님의 행위 일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전이해'가 전제된다. 의식된 신에 관한 현존적 지식은 어떤 식으로든 이미 해석된 것이다. 가령 "내가 어떻게 하여야 축복을 받으리이까?"(행 16:30)라는 물음이 의식되며 그 물음에는 '축복'에 관한 관념이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7.4. 그러므로 문제의 적절한 선 해석, 따라서 인간 실존의 적절한 선 해석 여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것을 찾아내는 일이 인간의 자각적 노력인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철학적 자각의 과제요 인간 존재의 실존적(existential) 분석의 과제이다. 이 일이 현실적(existentiell) 자명성을 직접 문제로 하는 신약의 말씀에 단순히 경청하는 데 대한 전제가 아닌 것은 자명한 일이다.
7.5. 해석자가 만일 성경 문헌들을 '사료'로 읽지 않고, 성서를 현재에 즉 현재의 실존에 말을 걸어 오는 능력으로 읽고 그 스스로 말하게 한다면 적절한 개념들에 대한 비판적 재고가 필요하게 된다. 해석의 목적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물음으로 표시한다면, 그것은 곧 인간 실존의 진실에 대한 물음을 의미한다. 그 때에는 그러나 해석은 실존의 실존적 이해의 개념성을 위하여 노력해야만 한다.
8.1. 바르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이 신조들은 모두 인간 실존에 관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들은 실존의 그리스도교적 이해를 가능하게 하고 근거를 주며 ― 여러 모양으로 ― 인간 실존을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본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본래 사람에 따라 다르게 사람을 만나는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 즉 성부, 성자, 성신의 존재와 행위를 밝힌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인간의 내적 생활에 관한 진술에 환원시켜서는 안 된다." 하지만 바르트는 실존에 대한 자기 생각을 포이에르바하에게서 받은 인간학의 개념에서 확인하고 인간의 존재를 역사적인 것으로 파악하려고 분투하는 헤르만에 그 책임을 전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8.2. 바르트는, 예수의 부활은 역사과학의 방법으로 파악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는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역사가들 자신이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더 확실하게 시간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또 하나, 시간과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면서도 역사과학적 사료와 방법으로는 파악되지 않는다는 사건을 주장하는 데 반하여 신앙을 고조하면 '신앙이 선사'되는(Glauben schenkens) 모양은 무엇일까? 이 사건들이 어떻게 믿는 자들의 시야에 들어오는가? 이러한 신앙이 지성을 희생한 맹목적 수납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신화적 세계상에서 타당한 의의를 찾는 일이 바로 신화에 대한 나의 실존적 해석의 목적으로 이것을 나는 방법론적으로 힘써 다루고 있으나 내가 바르트에게서 보는 것은 임의로 처리되는 주장 뿐이다. 그의 선택의 원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8.3. 주석하는 자더러, 예언자와 사도의 말을 책임지고 '받아들인' 후에 성서를 '해석'하라는 말인가? 이해하지 않고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말인가? 해석의 과제는 다름 아닌 이해의 과제라는 것을 알 것이다.
3. 나가며
첫째, 본문에 대한 질문 없이 응답은 우리에게 다가올 수 없다는 불트만의 해석학적 발상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 실존 해명의 지평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이 박제화 되어버린 구태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 삶의 요청과 결단 속에서 그에 상응하여 새롭게 열린다는 것을 발견하는 단서이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오늘의 실존지평으로 끌어내리기 위하여,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묻고 결단해야 한다. 침묵의 대지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구출해야 하는 과제는 우리 신학적 실존의 가혹한 운명일런지 모른다.
둘째, 불트만의 해석학에 있어서 <전이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 인간 존재의 실존적 구성을 감행하는 계기에서 <전이해>는, 거부될 수 없는 명백한 최초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는 발제자에게 양가의 가치를 동시에 제시한다. 즉 긍정적인 면에서는, 인간 실존의 그 모호함과 무한히 열려 있는 낮선 세계에 대하여 실존의 자리인 아르키미데스 점을 확보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에서 볼 때, 우리의 모든 이해는 이미 전이해에 의해 구조지워졌기 때문에 인간의 유한성과 제한적 조건에 하나님과 말씀이 유폐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바르트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적 전선과 불트만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적 전선 사이에 흐르는 영원한 길항관계는 바로 이 지점에 기인한 것이다. 인간 실존에 의해 채색되어지고 조율되어지는 하나님이 아닌, 인간 실존을 통하여 온전히 사건화되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진정 가능한가?
셋째, 실존적 해석학이 간직한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실존과 존재 사이의 진동에 관심의 촉수를 기울인 나머지, 실존과 실존 사이의 놓여 있는 영원한 암흑과 같은 자리, 즉 동시성(contemporaeousness)에 대한 성찰이 부재한다는 점이다. 본인이 보기에 실존의 궁극적인 지향은 동시성의 여백을 실존의 방식 안으로 온전히 포촉하는 데 있다. 불트만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 '동시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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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
-불트만
20세기 기독교 실존주의는 신정통주의를 다루면서 거론되었던 많은 운동들 속에 그 출발점을 두고 있었다. 실존주의는 보편적 실존과 개인적 실존이 논리적으로 필요한 개념적 도구의 번주 안에서 합리적ㅇ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합리주의 개념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이다. 따라서 실존은 인간의 본성이나 인간적 가능성을 규정하는 고정된 인간 본질에 대한 어떤 관념도 배제하는 근본적 우연성과 자유로 표상된다.
Rudolf Bultmann(1884-1976) : 바르트의 관심이 하느님의 전적인 타자성과 하느님이 자신을 계시하시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인간이 하느님에 대하여 어떤 것도 인식하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데 집중하였고, 본회퍼는 오늘날의 인간에게 갖는 이 계시의 구체적인 함축적 의미들을 탐구하는 데 전념하였다. 불트만의 관심은 계시 그 자체에, 이 계시의 운반체인 성서에 집중되었다. 즉 성서의 메시지가 현대 세계에 이해되고 의미를 가지도록 성서를 해석하는 방식을 발전시키는 데 관심을 갖는다. 하느님의 계시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사용된 'thought patterns'은 시대의 상황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⑴역사비판적 자유주의 신학의 전통 :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비판적 정신 = 성서에 대한 학문적 비판적 작업과 그 지성적 솔직성, 지나간 신화적 초자연적 세계상과 대립하는 현대적, 자연과학적 세계상에 대한 문화 기독교주의적 긍정의 태도 ==> 자유주의 신학과의 결별 = "신학의 대상은 신이다.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난은 신에 관해서가 아니라 인간에 관해서 취급했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신인 신학은 그러므로 십자가의 말씀만을 그 내용으로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에 대해 거리끼는 것이다."(G.& V.I, p.2)
⑵바르트의 변증법적 계시신학의 영향 : 케리그마의 신학. 변증법적 계시신학 = "신은 인간의 전적인 지양이며 인간
의 부정, 인간에 대한 문제 설정, 인간에 대한 심판이다."(GV I, p.118) "직접적으로 신과 그의 나라에 관계될 수 있는 어떤 행위도 없다. 인간적 공동체 삶의 모든 양식은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든, 가장 나쁜 것이든지 간에 신의 심판 아래 동일한 방식으로 서 있다."(VG I, p.15) 계시는 모든 인간적인 것, 문화, 종교, 사상의 심판이고, 따라서 계시는 모든 인간적인 안일과 안주함에 대한 위기이다. 계시에 근거한 변증버벅 사고는 신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요, 모든 인간적인 신 이해에 강한 부정을 가하고, 오직 신의 계시가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신은 항상 그의 계시를 통해 그의 계시자들(Offenbarer)에게 접근한다. ... 계시 밖에서는 신은 결코 있지 아니하다."(VG I, p.142ff)
⑶루터의 개혁주의적 의인론 영향 : 계시사고는 모든 인간적 신인식을 무로 돌리고 싱의 계시 말씀에 대한 신앙행위와 이 신앙에 의한 인간의 칭의를 강조한다. / 실존적 신인식 = "우리는 신에 관해서 모르며, 우리 고유한 자신에 관해서도 모른다. 우리는 신과 우리 자신에 관한 인식을 오직 신의 은총에 대한 신앙 안에서 가진다."(VG I, p.37)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에 관해서 말하기 위해서는 실존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VG I, p.36) 신앙은 "우리가 정립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행위이며 새로운 순종이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시는 신의 은혜, 즉 오직 신에 관해서만 말하고자 하는 나를 의롭다고 하시는 신의 은혜에 대한 신앙으로만" 신앙은 확실하다. 이 신앙은 우리에 대한 "신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고 "결단"이다.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믿는다." 그러나 "신앙은 이해되어야 한다." / 비신화론화(Entmythologisierung) = 신앙의 이해를 강조함으로써 현존재에 대한 철학적 분석사고를 요구하고, 계시 말씀의 이해를 강조함으로써 자연과학적 세계상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의 성서 이해를 위해서 신약의 계시 말씀을 비신화화한다. 성서에 나타나는 신의 행위으 역사적 현상을 신화론적 세계상에 의해 각색된 것으로 간주하고 捨象해 버린다. "행위하는 신의 피안성과 은폐성"과 "신의 비가시성"은 신의 행위를 가시적으로 대상화하려는 모든 유혹을 거부한다.
신앙은 객관화하는 지식에 근거하는 어떠한 안주성도 가지지 않고, 오직 허공을 향해서 그의 실존의 "그럼에도 불구하고"(dendoch ; trotzdem)라는 결단을 통해서 돌입해야 한다. "비신화화론은 신앙의 의인론을 지식과 사고의 영역에서 극단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 실존론적 의인론(existentiale Rechtfertigungslehre) = 이는 신에 관해서 어떠한 가시적 지식이나 객관화하는 역사적 근거나, 관찰 내지 탐구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실존적 결단이다. "오직 선포된 말씀의 빛 속에서만"신앙자에게 신은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는 케리그마 신학과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 케리그마 신학(Kerygmatische Theologie) = 케리그마는 신의 구속사건에 대해서 "선포하는 부름"이며, 이 부름 속에서 계시는 인간에게 부딪친다. 이 부름을 받아들일 때 구속사건은 일어난다. 모든 신앙의 전제인 케리그마는 인간의 가능성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에서 유래한다. / 실존론적 해석학 = 케리그마의 인간학적 접촉점은 배제되지만 그 해석과 이해는 인간적 실존을 전제한다. 철학적 해석학에서 변증법적 계시 사고에 자유주의적 비판적 유산이 수용된다.
⑷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학의 영향 = "현상학적-실존론적 분석의 형식적 방법"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학(Sein und Zeit)은 불트만에게 케리그마를 이해하는 해석학적 착상을 주었다. 하이데거의 무신론적 입장은 불트만의 변증법적 신학의 신이해에 적합했다. 변증법적 착상에 의하면 인간에 의해서는 신은 결단코 인식될 수 없고 오직 신의 계시에 의해서만 인식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계시는 인간이 경험하고 이해하는 한에 있어서 계시로 성립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계시 이해에는 학문적으로 가능한 해석학적 작업이 수행되어야 한다. / 현존재는 "시간성"을 가진고 "근심"에 의해 규정받는 "죽음에의 존재"로서 이는 "비본래적"이다. 그러나 다가오는 죽음에 대하여 선구적인 결단을 초래하는 "양심의 부름"에 의해서 "본래적 존재"로 나아간다. / "내가 나의 실존을 어떻게 이해하며, 비본래성에서 본래성으로 어떻게 결단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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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불트만 : 양식사 비판
-목 창 균
서 론
불트만이 평생 과제로 삼았던 신학적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현대인에게 어떻게 해석되고 전달되어야 하는가 였다. 불트만은 두가지 접근 방법을 통해 이 과제를 수행하고자 했다. 신약성서의 비신화화와 실존론적 분석이 그것이다. 전자가 소극적 방법이라면 후자는 적극적 방법이다. 비신화화는 1세기 신화적 세계상과의 관계에서 신약성서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이 세계상이 신약성서에 포현된 실존에 대한 이해에 얼마나 불필요한가를 제시하는 것이다. 즉 신화적 표현이나 사고로 둘려싸여 있는 복음의 진리를 그것으로부터 벗겨내는 것이다. 실존론적 분석은 1세기의 개념, 언어, 의미들을 현대인이 이해하기 쉽고 안간 실존의 현실 상황에 일치하는 용어들로 전환하는 것이다.
시신화화론은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에 비견되는 파문을 신학계에 던졌다. 비신화화논쟁은 1941년에 독일 루터 교회 내부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세계대전 이후에는 유럽 대륙의 신학계에 널리 전개되었다. 1952년 독일 루터교회 총회는 그의 학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1950년대는 비신화화 논쟁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찬성과 반대를 둘러싸고 열띤 존쟁이 일어났다.
Ⅰ. 생애와 저작: 1884년 독일 올덴부르그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출생했다.
Ⅱ. 비신화화와 실존론적 해석
그의 신학적 발전은 자유주의 신학적 배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궁켈, 하르낙, 헤르만등 당대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신학자 맡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일어난 변증법적 신학운동에 참여한 이후에도 자유주의 신학의 합리적인 방법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하이데거 철학을 도구로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신학인 실존 신학을 형성했다. 불트만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현대인에게 어떻게 전달해야하는가 하는 문제를 신약성서 학자로서의 자신의 평생과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초기에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양식사 비판(form criticism)과 종교사적 접근 방법을 수용했으며, 이에 기초하여 후기에는 비신화화와 실존론적 해석 방법을 개발했다. 양식사 비판은 구전 전승들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문학 해석의 방법이다. 성서중에는 문학 양식과 고대 근동의 문헌들을 문학 및 역사적 비교, 검토하여 그 사상의 유래가 어디에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궁켈이 이 방법을 구약 성서 연구에 처음으로 도입했다 그는 근동 문화를 연구하여 창세기의 배후에는 당시의 이교문학이나 신화로부터 유래된 것이 많으며 시편 양식들이 종교 의식상의 특정 축제난 마술적인 제례에서 근원한다고 주장했다.
양식사 비판에 따르면, 복음서가 기록되기 전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대한 구전 즉 원래의 복음인 케리그마가 있었으며, 초대교회가 그것을 필요에 따라 가감하여 보존한 것을 편집한 것이 복음서였다는 거이다. 예를들어 예수를 인자(the sun of God), 메시아등으로 부르고 부활과 승천 사건을 첨가했다. 따라서 양식사 비판은 복음서 기록 배후에 있는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대한 구전 문학 양식을 연구하고 평가하는 방법이다. 그 목적은 초대 교회 교인들이 첨가한 내용과 재해석한 것들을 제거하고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구전의 원형태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이 불트만의 초기저서 「예수」에 반영되어 있다.
불트만은 신약성서 연구에 종교사적 접근 방법을 사용했다. 이것은 19세기 후반에 독일 괴팅겐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한 종교사학파의 방법이었다. 종교사학파는 성서학을 주로 한 학파로서 성서의 외적 환경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희브리종교와 고대 근동의 이방종교 및 헬라종교사이의 밀접한 관계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세계 모든 종교를 역사 발전과정에서 이해하려 했으며 기독교의 발전 과정을 역사적, 지리적 환경에 비추어 연구했다.
이 학파는 복음서에 나타난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과 같은 초자연적 요소들은 고대 근동지방의 여러 신비종교로부터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온 것이라 하여 제거하려 했다. 불트만은 신약성서 연구에 이 연구 방법을 도입하여 발전시켰다. 즉 그는 성경의 개념과 교훈을 고대 문화의 배경과의 관계성 속에서 해명했다. 기독교는 주변 정황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경에 영향을 받은 역사적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후기에 불트만은 비신화화와 실존론 적 해석을 통해 신약성서를 연구했다. 그는 신약성서가 신화로 구성되어 있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했다. 신약성서에는 케리그마라고 불리는 복음의 진수와 신화적인 성격을 가진 세계관이 있다.
신약성서의 신화적인 요소는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쩨, 하늘의 존재가 세상 속에 임재하는 극적 이야기이다. 초대 교회는 예수의 근본적인 의의를 설명하고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독교 이전에 있었던 영지주의의 “구원자 신화”를 수용하였다. 이것은 지상에 와서 계시를 전하기 위해 인간으로 나타난 하늘의 존재에 대한 극화 적인 이야기이다. 이 신화는 기독교의 역사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유래 한 것이다.
둘째, 과학 이전의 우주론이다. 신약성서 저자들의 세계관은 신화적이었다. 그들은 세계가 3층, 즉 하늘과 땅과 땅 밑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땅은 인간의 자연스런 생활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고 하늘은 하느님과 천사들이 사는 곳, 땅 밑은 음부, 즉 고통의 장소이다. 그들은 인간의 삶과 역사의 진행은 선과 악의 초자연적 힘에 의해 지매된다고 믿었다. 땅은 “초자연적인 하느님과 그의 천사들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사탄과 악마의 활동무대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불트만은 그리스도의 선재성, 죽음, 부활도 신화적인 세계관에 의해 표현된 것이라고 하였다.
셋째, 하느님을 인간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고 활동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표현한 것, 즉 저 세상 적인 것을 이 세상 적인 것으로, 신적인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불트만은 이런 신화적인 표현이 현대인에게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신화적인 개념은 신학적으로 지지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신화적인 세계관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 이전시대의 우주론이다.
불트만은 현대인이 신약성서의 케리그마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신약성서를 현대인의 과학적 세계관에 맞게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성서의 비신화화이다.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신약성서에 대한 해석의 방법이다. 그것은 초월적인 것을 이세상의 것으로 말하는 것이며, 성서의 진리에 대한 당시의 해석을 현세의 해석으로 고치는 것이다. 케리그마를 그 신화적 윤곽으로부터 벗겨 내는 것이다.
이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제 해석해야 한다고 하였다.
불트만이 신화를 재해석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실존적 해석이다. 신약성서의 사명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 즉 인간의 실존적 자기 이해에 있다. 따라서 불트만은 케리그마가 아닌 신약성서의 신화 역시 우리의 실존을 위해 어떤의미가 있는가 하는 측면에서 해석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신화의 본 의도는 객관적인 세계상을 제시하는데 있지 않고 자기가 살고있는 세계에서 인간의 자기이해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화는 우주론적으로가 아니라 마땅히 인간학적으로 또는 실존적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된다. 불트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과거의 사건이나 신화론 적 사건이 아닌, 영원한 현재적 사건으로 해석했다. 현재 우리들의 삶과 결정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가건인 것이다. 그는 대속 적인 속죄론이나 만족 설과 같은 전통적인 해석과는 달리, 세상에 대한 심판가 인간에 대한 심판과 구원을 십자가의 영원한 의미로 간주했다.
기독교의 부활절 신앙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구원 사건, 즉 실존적 체험으로서 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매일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실존론 적 해석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보다는 오히려 그 사건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 사건의 교리 적 내용보다는 오히려 인간 실존과의 관계성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결 론
불트만은 어떻게 하면 과학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성경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하는 관점에서 자신의 신학을 전개했다. 그것은 신앙과 이해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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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불트만의 인간 안에 있는 말씀된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 >
1. 신화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마9:1)" 예수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이러한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동일한 세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역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역사의 계속되는 진행은 '신화'를 부정해 버렸다. 종말론적 드라마의 개념이 신화적인 것 만큼 하나님 나라 사상도 신화적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기대의 전제들, 즉, 이 세계가 비록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할지라도 사탄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으며 사탄의 군대와 귀신들이 모든 악의 근원이며 죄와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이론은 신화론적인 것이다.
... 일반적으로 신약성서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예수의 설교에서 전제되고 있는 전체 세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예수의 설교에서 전제되고 있는 전체 세계에 대한 이해는 신화론적인 것이다... 땅도 말하자면 자연적인 평범한 생활이 이루어지는 그러한 장소라기 보다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이 활동하는 곳이며 동시에 사탄과 그의 마귀들이 초자연적인 세력들이 사물의 생성 과정에 작용한다는 관념; 그리고 특히 초자연적 세력이 영혼의 내면적 생명 속으로 침투해 들어온다는 기적 사상; 사람들이 악마에 의해서 유혹받고 타락될 수 있으며 악령들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고 하는 관념 등, 이런 것들은 신화론적인 세계관인 것이다.(p.17-18)
2. 비신화화
그렇다면 불가피한 의문이 제기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설교는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가 예수의 윤리적인 가르침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그의 종말론적인 가르침을 포기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설교를 소위 말하는 사회복음이라는 것으로 축소해야만 할까? 그렇지 않다면 제3의 가능성이 있는가?... 우리는 종말론적인 설교와 신화적인 껍질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보다 깊은 의미가 있는지의 여부를 물어야만 한다... 신화적인 개념들 배후에 있는 보다 깊은 의미를 나는 비신화화라고 부른다. 비신화화의 목적은 신화론적인 진술들을 제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데 있다.(p.21)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자유란 진리의 인식으로만 만족하는 하나의 정신적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자유다. 성서가 증언하는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이며, 악으로부터의 자유 이다.(p.36)
비신화화가 성서의 해석학적 기준으로서 현대적인 세계관을 채용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비신화한다는 것은 성서나 그리스도교 메시지 전체를 버리는 것이 아니고 가끔 그리스도교 교의학이나 교회의 설교에서 보존되는 지나가버린 시대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는 성서의 세계관을 제거해 버리자는 것이다.(p.45)
성서의 세계관이 신화적이기 때문이 그 의식이 자연과학에 의하여 형성되어져 있는, 더 이상 신화적이지 않은 현대인들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3. 신앙적 실존주의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개인적 실존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위의 반론과는 전적으로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위에서 내가 간략하게 말한 그와 같은 반대는 영적 생활에 대한 하나의 심리학적 오해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하나님에 관하여 말한다는 것은 나 자신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진술이,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신앙이 단지 하나의 순수한 신앙적 사건으로만 해석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가 그와 같은 인생의 만남들 속에서 구체적 상황들과 결단들을 통하여 그 실제성을 소유하는 하나의 역사적 존재로서 인간의 의미를 진실되게 이해한다면 한편으로 하나님을 행동하는 분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실제가 아니라 하나의 환영에 불과하다고 결코 주장할 수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 신앙이 하나의 심리학적 주관적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다.(p.90)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확신이 객관적으로 입증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p.91)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마주쳤을 때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을 통한 자기이해에 적용될 수 있다. 신앙 안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이해한다... 신앙 안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새롭게 이해한다. 이러한 새로운 자기이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행위를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계속적인 응답에 의해서만 보존될 수 있다.
인간의 일상적인 삶에 있어서도 그것은 동일한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으로부터 발생하는 새로운 자기 이해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실제적인 관계가 계속적으로 유지될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날마다 새롭다"라는 이 말은 내가 그 사실을 매일 새롭게 인식할 경우에만 타당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사실이 하나의 수학공식처럼 무시간적 진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날마다 새롭게 될 때에만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p.96)
미래를 향한 자유로운 개방성은 우리가 미래에 대한 어떤 결단으로 말미암아 고통받게 된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하여 스스로를 책임지는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미래를 향한 자유로운 개방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신앙은 무와 관련된 불안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하여 스스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오직 신앙을 통해서면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미래를 향한 개방성으로서의 신앙은 과거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신앙은 죄용서에 대한 믿음이며 과거의 죄의 사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승리에 삼키운 바 되었다(고전 15:54)"는 표현을 통하여 바울이 의연히 외쳤던 '미래를 향한 자유로운 개방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말해지는 순간에만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무시간적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인간을 향하여 선포되는 하나의 구체적인 말씀인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그러나 이 영원성은 무시간성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지금 여기에서 현실이 되는 하나님의 현존성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p.9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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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트만 신학 이해와 비판
Oswald Bayer: Entmythologisierung? - Chritstliche Theologie zwischen Metaphysik und Mythologie im Blick auf Rudolf Bultmann: NZSTh Bd. 34, 1992.
*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표시이며, 앞의 괄호 뒤에 적힌 글 모두를 포괄한다.
* 각주는 본인의 견해와 보충설명이다. 두꺼운 글자체는 본인의 강조이다.
* 본문은 직역이 아니라, 요약 번역이 대부분이다.
* 이 글은 1991년 9월 7일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 50주년 계시와 신화"라는 주제의 모임에서 발표한 강연이다.
(출발)
바이어는 불트만의 신학적 사유와 기술이 명쾌하다고 평가하고, 그의 비판적 질문과 주관적 진리관은 이미 오늘날 높이 평가되고 있다고 본다.
불트만에게서 비신화화 작업은 다름 아니라, 바울과 루터의 칭의론을 따라 가는 것으로써, 이를 인식의 영역에 철저히 실행시킨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니라, 바울과 루터의 칭의론-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있는 신의 구원행위를 오늘날의 인간에게 이해되도록 하며, 불가피한 당혹감(Ärgernis, Skandal), 즉 십자가의 스캔달을 잘못된 위치에서 빼내어 올바르게 다시 놓고자 함에 있다 (109).
바이어 교수의 질문은 기독교 선포의 비신화화가 필수적인지, 아니며 불가능한 것인지를 살펴보는데 있다. 이를 위해 그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그리고 고대 교회의 근본결정으로 소급하여, 여기서 발견되어진 것을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에 대해 검토하면서 결실있게 만들고자 한다.(109-110)
I. Christliche Theologie zwischen Metaphysik und Mythologie
기독교 신앙이 그의 사유하는 책임을 위해 신학이라는 단어 사용에 관여하게 될 때, 기독교 신앙은 신화론과 형이상학 사이에 설정되어 있으면서 양자 모두에게 비판적으로 묶여 있는 질문 설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신학 Theologie<<이란 단어는 성서 언어가 아니며, 오히려 고대 그리스어이다. 이것의 직접적인 의미는 >>Rede von Gott<< 이다. 즉, 신들의 역사에 대한 노래와 이야기(Singen und Sagen)이다. 신학은 처음에는 입으로 구술되었고(mündlich) 그 후에 일정한 문서 약식으로 전달된 신들에 대한 이야기이다(Göttergeschichten). 신학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신들의 행위와 신들의 변형(Metamorphosen)에 대해, 그리고 한편으로는 다양한 형상으로 인간을 만나고 있는 그 당시의 신에 대해 이야기 한다(erzählen).
이러한 방식으로 다양한, 물론 모순적인 인간의 현존재의 경험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학", 신들의 이야기에 대한 노래와 전설은 본질적으로 다신적이며, 결코 일신적이지 않다.
신학이라는 용어는 플라톤의 [국가](379a)에서 말해 지듯이, 신화론으로 이해되며, 날카로운 비판을 경험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신화에 대해 비판적인 형이상학(mythenkritische Metaphysik)의 첫 번째 시기와 마주하게 된다(110).
A. Mythenkritische Metaphysik
1. Platon
플라톤은 시인들의 신들의 이야기도 진실한 것을 포함하고 있지만, 전체로서는 거짓이라고 생각한다(377a). 이 때 플라톤은 국가통치자들의 이 시들을 통해 성장해 간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신들의 이야기가 덕(Tugend)의 관점에서 구술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는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해 반드시 근본적 특색, 즉 Typoi(Grundzüge)에 따라서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것은 엄격한 언어규율(Sprachregelung)이다(111).
어떤 날카로운 근본규정들(Grundbestimmungen)과 처방들(Vorstriften)아래에 신학이 놓이게 되었는가?
플라톤에 의하면, 신은 선하고(a), 불변해야 한다(b) (gut und unveränderlich).
a) 신은 모든 선의 근거(Grund)이기 때문에, 모든 사건의 원인(Ursache)라고 말해져서는 안된다(379b; vgl. 617e und Theaitet 176 b/c). 신은 불행에 대해, 악에 대해 무죄하다. 이런 면에서 호모가 일리아스에서 제우스를 선과 악의 후원자(Spender des Guten wie des Bösen)라고 말한 것은 비판된다.
이 때 플라톤은 고난의 문제, 신정론(Theodizee)의 문제를 선한 근거와 목표의 통일성에 대해서만 말함으로써 넘어가 버린다. Das Leiden und das Böse ist letztlich nur Schein. Gott ist schuldlos(617 e)(111).
b) 신학을 검열하는 두 번째 특색은 신의 Unverwandelbarkeit이다.
Als vollkommender ist Gott ganz einfach und wird nicht von einem andern verändert und bewegt 완전한 자로서 신은 전적으로 단순하며, 다른 것에 의해 변형되거나 움직이지 않는다(380 d/e). 이런 면에서 제우스와 다르다. 신은 무시간적이며, 왜냐하면, 시간은 역사(이야기), 변형가능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색의 날카로움은 그리스의 신화론뿐 아니라, 신약성서의 빌립보서 2장에 있는 그리스도 찬가까지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112).
플라톤의 진리에 대한 질문 -그는 진리를 하나인 것, 선과 불변하는 것으로 인식했다-은 신학을 다음과 같이 엄격하게 규정했다: 신학은 움직이는 신들의 신화(Göttermythen)는 비신화화된 개념의 규정으로 만들어야 한다.
신적인 것에 대한 철학적 로고스와 신들의 신화의 관계에서는 연속성 보다는 단절이 더욱 크다(112).
2. Aristoteles
플라톤이 규정해 놓았던 신적인 것 -자기 동일성 das Göttlich als mit sich zusammenstimmend, ja als mit sich identisch-, 이러한 경향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완성된다(112).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화론에서 신학이란 단어를 빼어내고, Theologik이란 단어로, 직관하는 betrachtende, 이론적인 학문, 즉 철학의 최고봉을 표시하였다.
시적 학문(Die poietische Wissenschaft)는 인간의 poiesis를 통해 발생하는 것들의 근거와 원인들을 안다(vgl. Metaphysik 981 a 24 -b 2)
실천적 학문은 인간생활의 현장(menschliche Lebenspraxis)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선을 대상으로 하며, 그것의 원동자(Urheber)로서의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다(113).
praxis 와poeisis가 우연적인 것-이렇게 또는 다르게 될 수 있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반면, 이론적 학문, 철학은 필수적인 것(was notwendig ist)과 관련된다. 철학은 무엇이 그렇게 있는대로 있어야만 하는지를 사유한다. 이것이 학문과 지혜의 최고의 영역이다(Metaphysik 1025 b, 1064 a; Nikomachische Ethik 1139 b-1140 a).
이론적 학문, 철학은 세 부분으로 분류된다. 자연과학, 수학, 신학(Theologik) (Metaphysik 1026 a, 1064 a/b).
자연과학이 현실적인 것(das Wirkliche)을 다루지만, 그러나 움직이는 것(das Bewegliche)을 다루는 반면, 수학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다루지만, 비현실적을 다룬다. 현실적인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을 다루는 것이 신학(Theologik)이다(113). 이것은 우선적이며 원래적인 원칙 (als das erste und eigentliche)으로서 신적인 것 (das Göttliche)을 향해 있다. 즉, 현실적인 것과 항존적인 것, 불변하는 것, 신뢰할 만한 것, 동일한 것의 정수와 보증을 향해 있다. 그것은 그 자신의 순수한 현실과 활동 안에서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지만,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 자신은 움직여지거나 자극받지(affiziert) 않는다. 그것은 부동의 원동자이다(der unbewegte Beweger)(Meta. XII; vgl. 1026 a). 또한 그의 부동성과 독립성 안에서 그는 전적으로 원칙(das Prinzip)이며, 통치자(Herrscher)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리아스의 말을 인용하여, 단일군주적 원칙을 신의 질서인 세계질서에 적용하였다. (Er überträgt damit das monarchische Prinzip auf die Weltornung als Gottesordnung).
아리스토텔레스가 신적 세계원리를 불변하는 일자(als unwandelbar eines)로 생각함으로써, 그는 실제상 플라톤의 두가지 특색(신은 선하다. 신은 불변한다)을 의심없이 유효하게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학문의 이름을 이전 전통이 써 오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동일하게 부르고 있으면서도, 신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역사(이야기, Geschichte)로부터 떼어내어서, 이를 철학적인 개념에다 붙여 놓았던 것이다(113).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Theologie)는 결코 신화나 이야기를 구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영원하고, 움직이지 않는 그리고 감각적인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동떨어진 존재로 말해진다(sie sagt vielmehr ein ewiges, unbewegliches und vom sinnlich Wahrnehmbaren abgelöstes Sein aus) (Meta 1073 a) (113-114).
신학은 더 이상은 결코 신화론이 아니다. 신학(Theologie)은 신논리학(Theologik)으로서 이제는 완전히 형이상학이다: 철학의 시작과 끝이다(114).
3. Stoa
스토아 학파의 사람들(Stoiker)의 노력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급진적으로 실행한 비신화화의 노선에 서 있다. 이들은 신학을 신화적 신학, 정치적 신학, 자연신학으로 나누어 놓고, 신의 참된 본질을 다루는 신학을 theologia physike(theologia naturalis)라고 불렀다(114).
4. Augustin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에서(Gottesstaat), 신학의 이러한 구분과 자연신학의 개념을 바로(Varro)로부터 받아들여서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 하나님께 봉사하는 종교, 그러므로 참된 자연신학을 대표하는 종교로서의 기독교 변증론 안에서, 바로가 신화적 신학에 반대하여 내세운 철학적 사유(die philosophischen Bedenken)는 또한 동일한 예리함 안에서 모든 정치신학에 대항하여 설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도시국가에서는 잘못된 견해들이 등장하고, 실제로는 세상에 있지도 않으며 세상 밖에 존재하지도 않는(existieren) 신들이 숭배되거나 믿어지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비그리스도인들과 대화를 위해 마련한 발판은 자연신학이다. 물론 이때, 신과 세상이 서로 바뀌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어거스틴이 신화적 신학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신약성서에는 이미 신화에는 진리가 없다고 말해지고 있다(디모데전서 1,4; 4,7; 디모데후서 4,4; 디도서1,14; 베드로후서 1,16).
Die christliche Theologie eines Augustin stellt sich, mit der Philosophie, gegen die unwahren Mythen und fragt nach Gottes wahrem Sein. Ist sie damit Metaphysik?
어거스틴의 기독교 신학은 철학과 함께, 그러나 참되지 않은 신화에는 반대하여 설정하고, 하나님의 참된 존재에 대해 질문한다. 이것은 그러므로 형이상학인가?(114)
바이어 교수는 형이상학과 신화론 사이에 머물러 있으면서 동시에 상호 비판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기독교 신학의 위치를 불트만의 신학에서 증명해 보이려고 한다. 그러나 먼저 이러한 주장을 종결짓고자 한다(115).
B. Das Christusdogma zwischen Metaphysik und Mythologie; Gottes Sein und Kommen.
칼케톤 공의회는, 신의 영원한 존재(Gottes ewiges Sein)와 그의 시간 안으로 오심(sein zeitliches Kommen)을 서로 "섞이지 않으며, 혼합되지 않으며, 나누어지지 않으며, 분리되지 않는다"(unvermischt und unverwandelt, ungetrennt und ungesondert)라고 표현함으로써, 신의 영원한 존재 자체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의해서 접촉되지 않은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Gottes ewiges Sein selbst ist von Jesu Tod am Kreuz nicht unberührt.)
1. 이로써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 형이상학의 무감정의 공리(Apathieaxiom)- 이에 의하면 신은 부동의 원동자이며, 그의 불변화성 안에서 고난받을 수 없다-를 부셔뜨린다.
2. 또 한편에서, 신화 비판적으로 볼 때, 마치 신성이 인간성으로 변화했다든가 또는 신이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 안에서 신이 되기를 포기했다든가 하는 변형(Metamorphose)의 사유를 거부했다(115).
십자가에 못 박힌 신의 이야기(역사)는 결코 신화에서나 익숙한 상상력의 자유를 허락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그의 시간적, 공간적 규정안에서 일어난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형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중요시된다. 그것은 본래적으로 그 안에 작성된 채 머물러 있다(115). 그것은 유일회적(唯一回的)으로 일어난 것이지, 계속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의 종말론적인 성격은 잃어버리게 된다(115-116).
II. Bultmanns Theologie zwischen Metaphysik und Mythologie
바이어는 불트만의 철저한 비신화화에도 불구하고, 신화적인 언설이 부활하신 십자가에 못박힌 자에 대한 해석에서 "하나님의 행위 Gottes Tun"라는 형태로 남아있다고 지적한다.
다른 한편, 불트만과 형이상학의 관계의 측면에서 볼 때, 불트만은 현대적인 형이상학, 즉 신의 본질에 대한 고대적 형이상학적 질문설정을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설정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실존형이상학Existenzmetaphysik (117).을 전개했다(116-117).
이러한 그의 질문설정은 칸트의 인간론에 대한 이원론적 질문형식에서 넘겨받은 것이다. 인과율의 카테고리 안에 있는 인간에게서 '인간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구출해 내는 칸트의 도식을 불트만은 앞에 놓여 있는 객관화시키는 표상들(objektivierende Vorstellungen als Vorhandene)과 자유로운, 참된 역사적 실존 (die freie, wahrhaft geschichtliche Existenz)의 도식으로 옮겨놓았다(117-118).
"Im Ansatz und Einsatz seines Denkens trennt Bultmann Naturhaftes und Geschichtliches....und kommt deshalb zu der These, mit der er sowohl die Notwendigkeit wie die Legitimität seiner Entmythologisierung des Neuen Testaments begründet" (118).
"Das Wort vom Kreuz ist für ihn im entscheidenden nichts anderes als die Aufforderung,....das alte Selbstverständnis.....preiszugeben und allein aus der vom Kerygma gebotenen Möglichkeit, d.h. aus der Zukunft zu leben" (119-120).
불트만이 현대인을 위해 신약성서의 케리그마를 이해시키려고 할 때, 현대인이란 칸트의 이원론으로 규정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불트만이 hüllenlose Wahrheit (덮개없는 진리)를 추구함으로써, 사태 자체로부터 어느 특정한 시간동안 유효했던 언어적, 감각적 Hülle(덮개)를 제거하려고 했던 칸트의 도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또한 하이데거를 따라 불트만은 로마서1장 16절의 하나님의 능력 (dynamis theou)으로서의 말씀을 여전히 현실화되어야하는 가능성으로 이해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가능성의 형태 (die Modalität der Möglichkeit)를 현실성의 형태 (der Wirklichkeit)보다 존재론적으로 앞세웠다 (ontologisch vorordnet) (121).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실존분석이 중립적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자기이해라는 존재적 시행을 신학의 선험적 조건 (das formale Apriori aller möglichen ontischen Vollzüge menschlichen Selbstverständnisses)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불트만과 슐라이에르마허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121-122), 불트만이, 순수한 형식적 존재론적 실존분석 (reine formal-ontologische Daseinanalyse)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전혀 주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슐라이에르마허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러한 자의식의 출처(Woher)로서 직접적인 자의식(unmittelbare Selbstbewußtsein) 안에 이미 항상 함께 개입되어 있으며,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이것을 알아야 한다(122).
기독교 신학이 형이상학과 신화론 사이에서 행해질 수 밖에 없다고 할 때, 기독교 신학은 더욱 형이상학에 대해 비판적으로 (metaphysikkritischer), 동시에 더욱 신화에 대해 의식적(mythologiebewußter)으로 되어야 한다(122-123). 이런 면에서 불트만의 신학은 형이상학에 너무 많은 공간을 할애한 셈이며, 신화에는 덜 할애한 셈이다(123).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1. 어떤 형이상학비판적 자세도 형이상학적 요구를 부인할 수는 없다. 이성을 가진 인간에겐 이 요구가 근절될 수 없도록 스며들어 있다. - 칸트는 형이상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Metaphysik, wie sie wirklich in der Naturanlage der menschlichen Vernunft gegeben ist (Prolegomena zu einer jeden künftigen Metaphysik, die als Wissenschaft wird auftreten können, 1783, $ 60, erster Satz; PhB 40, 1957, 130).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지에 의해 우리 안에 살아있다. 그것이 우주에 대한 관심이든 또는 자기자신의 실존에 대한 관심에서든.
우주Kosmos와 실존Existenz을 분리하려고 하는 형이상학적 요구는 불트만에게서는 Entweltlichung으로 등장하는데, 이것은 극단적인 추상일 뿐이다. 따라서 불트만에게는 "순간"의 종말론을 제외하고는 창조론과 종말론이 없다.
2. 불트만이 기초하고 있는 칸트의 기초미학(elementare Ästhetik)에 의하면,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행위의 자기화 (die Zueignung des stellvertretenden Handelns Jesu Christi für uns in sinnlicher Zusage geschieht)가 감각적 동의로써 일어날 수 없으며, 신앙의 본질적인 향유로써 경험되지도 못하기 때문에, 신화를 의식한 신학자로서의 불트만은 하나님의 행위, 그 분의 구원행위와 이를 전하는 말씀인 케리그마를 유효화하고자 했으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III. Zusammenfassung
Der christliche Glaube hat sich zu seiner denkenden Verantwortung auf den Gebrauch des Wortes Theologie eingelassen und damit seine Theologie zwischen Metaphysik und Mythologie gestellt - so, daß sie mit beidem bleibend kritisch verbunden ist (123-124).
이를 불트만은 실존론적 해석을 통해 수행했으나 칸트의 이원론에 의지하였기에, 신화를 의식하는 점에도, 형이상학에 대해 비판적인 점에도 충분하지 못했다. 불트만은 칸트의 이원론을 실존적 결단의 순간 안에서(im Augenblick der existentiellen Entscheidung) 포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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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트만의 신학적 주석문제
R. Bultmann, Das Problem einer theoogische Exegese des Neuen Testaments. in: J. Moltmann(Hg) Anfänge der dialektische Theologie II. Chr. Kaiser 1962.
S. 47.
<문서 또는 성서에 대한 이해>
1. lutherische Orthodoxie
-독자와 직접적인 관련성.
-이론적인 지식보다는 자신을 해명해 주고 자신의 삶을 규정.
2. ältere Rationalismus
- 일반적인 진리 또는 이성의 진리의 빛에서 이해, 이성이 Instanz가 되고 문서의 유용성을 결정
- 비이성적인 것은 다시 해석하거나 시대사적으로 제약되어진 것(zeitlgeschichtliche Beschränktheit)으로 간주함.
48.
3. 불트만의 비판: 이로인해 moderne zeitgeschichtliche Erklärung이 발생하고, die ewige Vernuftwahrheiten와 zeitlgeschichtliche Beschränktheit의 대립이 사라짐.
=> 개별적인 것을 보편적인 법칙성의 하나( das Individuelle als Fall einer allgemeinen Gesetzlichkeit)로 이해.
<다양한 관점들: 역사와 인간이해에 대해>
1.관념론적 이해
헤겔, 튀빙엔학파: 목적론적 역사이해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이념들이고, 이념들은 절대정신의 자기전개의 계기들이다.(die Momente der Selbstentfaltung des absoluten Geistes)
이념들은 개별적인 현상들을 통해 거쳐가는 구체적인 과정 안에서만 실재 Wirklichkeit를 가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절대정신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다.
2. 자연주의적 이해(인간이해)
역사의 법칙은 인과론이다. 역사는 인과적인 힘들에 의해 움직여 지고, 인간은 그 관계의 산물로 여겨진다. 따라서 시대적인 또는 개인적인 사상, 이념, 제도들은 발전의 결과로서 설명되어진다.
3. 생물학적 인간이해와 역사이해.
인간은 지, 정, 의의 다양한 기질들을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존재로 이해되고, 역사는 바로 이러한 기질들의 전개 안에 놓여있다.
시간사 Zeitlgeschichte 가 자연사 Naturgeschichte로 바뀌고, 역사적 운동의 실현을 위해 경제학적, 사회학적, 정치적인 필연성에 놓여있는 충동이 필요하다.
49.
기독교의 역사는 사회학이 되고, 생물학적 인간이해에서 개인은 종(Gattung)으로서의 인류로 이해되었다.
4. 심리학적 관점.
역사의 운동을 간과해 버리고, 종교사적인 주석에 이용됨.
-성서의 가르침보다는 그 뒤에 있는 체험과 분위기를 강조.
-경건이 역사의 주제가 됨.
-의식, 신비, 그리고 이런 것들의 기원에 관심을 가짐.
역사의 인과율 대신에 현상학으로서의 개선된 심리학을 수용
5. 인과법칙과 심리학적 인간이해와 역사이해에 반대하여, 미학적 관점에서는 인간을 형상(Gestalt)으로 이해, 즉 창조적인 샘, 능력의 중심이 전제되고, 그로부터 원초적인 체험과 계속적인 체험들로 인해 형상이 성장된다.
50.
<불트만의 평가>
위의 경우에는 루터 정통파에서 보여지던 독자에 대한 텍스트의 요구라는 근본적인 태도가 포기되어졌다.
- 텍스트가 독자와 거리를 두고 보여지게 되었다.
- 고유한 입장표명없이도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는 전제에서 출발.
- tua res agitur(사태가 너에게서 일어난다)의 관점이 아니라, 중립적인 태도로 주석이 이루어짐.
- 말해진 것의 의미와 요구에 대해 반성하려고 하지 않음.
- 개별적인 것들을 역사의 인과율아래 두었고, 역사를 거대한 관련성으로 이해함.
<tua res agitur와 Betrachtungsweise>
- tua res agitur의 관점: 해석하는 주체가 역사에 귀속됨. 즉, 해석하는 주체가 역사적인 운동 안에 영의 객관화인 개별적인 역사현상에 참여함으로써 영의 본질과 자기 자신에 대해 명확성을 확보한다.
- Betrachtungsweise(중립적인 관찰방식):
모든 개별적인 것을 발전의 법칙에 종속되는 특별한 경우로 취급.
이 때는 새로운 것을 보지 못함.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권위있는 것을 만나지 못하고,
다만, 자기 자신만을 역사 속에서 발견하게 됨.
51.
<결정적인 질문>은 우리가 역사와 마주함으로써 우리에 대한 역사의 요구 즉, 역사가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인지 하는 것이다.
52-3.
<시간사적 주석과 내용주석(die zeitgeschichtliche Exegese und die Sachexegese)>
- 시간사적 주석은 역사전체를 동일한 평면에 두고서 전체 역사로부터 개별적인 지점들을 인식하려고 함으로써 말해진 진술들을 시간사적으로, 상대적인으로 파악.
여기서는 텍스트의 단어, 언어를 중시하고, 말해진 것(was ist gesagt)을 개인적인 표현으로 취급.
시간사적 주석이 제기하는 물음은 비록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das Gemeinte)에 대해서라고 하더라도 "전체 역사는 동일하게 하나의 평면, 하나의 종이 위에 그려져 있다"(52)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 내용주석은 시간사 저쪽 편에 서 있는 빛을 포착하고, 무엇이 의미되었는지(was ist gemeint)를 파악하려고 함. 사건들의 관련성 저편에 서 있는 사실적인 내용(Sachverhalt)을 만나려고 함. 여기서는 "텍스트의 말"(das Wort des Textes)을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시간사적 해석이 동일하게 텍스트의 말을 추구할 때, 이 해석은 항상 이 말을 "말하는 개인"에게 귀속시킨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텍스트의 말"을 해석하지 못하고, 다만 관찰방식의 원리에 의해, 말해질 수 있는 것의 모든 가능성을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처분가능한 것으로 취급해 버린다.
- 여기서 텍스트의 말이란, 말하는 자의 밖에 놓여 있는 어떤 사태( Sachverhalte)를 지시하는 것으로, 청자에게 사건이 되어지는 것이다. 이는 단지 화자로서의 개인(das redende Individuum)이란 심리적 또는 시간사적으로 규정된 주체로 이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의 언설을 초주관적 사태(seine Aussagen als Hinweise auf transsubjektive Sachverhalte)에 대한 지시로 이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53).
<관념론적 주석과 내용주석>
1. 관념론적 주석: 진술을 개인적인 것을 넘어서 있는 내용으로 파악하나 청자에게 결코 사건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음. 오히려 내용은 이성의 체계, 이성적 정신의 본질이며, 사전에 해석자는 이성적 주체로 규정됨.
2. 내용주석: 말씀의 근원적이고 참된 의미와 함께 말씀을 진지하게 취하며, 그러한 가운데서 말씀을 사실내용의 지시로서 이해함(53).
<Sachkritik und Sachexegese>
1. "내용주석(Sachexegese)은 말의 근원적이며 참된 의미와 함께 <말>을 진지하게 취급함으로써 말을 사실내용에 대한 지시로서 이해하려고 한다."(53)
이러한 내용주석의 성격은 말해진 것과 의도하는 바 사이의 차이를 발견하는 비판, 즉 내용비판(Sachkritik)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통해 더욱 잘 규명될 수 있다.
2. 시간사적 해석은 그것이 내용비판을 행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형식적 논리"나 "내재적 발전의 관점"이 척도로 놓여 있으며, 무엇이 말해졌는가, 즉 내용(Sache)이 척도는 아니다 (54). 그러므로 이러한 주석은 어떤 권위도 없이 다만 상대적인 가치만을 언급할 뿐이다.
3. 내용주석과 함께 요구되진 내용비판은 그의 척도를 텍스트를 통해 이끌어진 주제로부터만 얻을 수 있다 (nur aus der durch den Text erschlossenen Sache)(54).
4. 내용주석은 실제로는 말해진 것을 통해 의도되어진 것을 추구하고, 이제는 말해진 것을 의도되어진 것 안에서 잃어버림으로써, 내용주석은 결코 결과적으로, 일반적으로 가치있는 문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살아있는 운동 안에 놓이게 된다(54).
S. 55.
<주석가의 이해가능성>은 그가 어느 정도 인간을 위한 가능성의 영역을 위해 개방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 즉, 인간가능성으로서의 실존가능성을 위해 주석가가 어떤 개방성(Aufgeschlossenheit)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텍스트의 이해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된다.
<자연과 역사에 대한 불트만의 입장>
-자연은 거리를 두고 사고할 수 있지만, 역사는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역사 안에 서 있고, 역사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해 우리가 하는 말은 반드시 우리 자신에 대한 말이다.
<불트만의 해석학>
- "진실로 중립적인 주석은 없다. '여기에 무엇이 있다'라는 식의 주석은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텍스트의 해석은 항상 주석가의 자기해석(Selbstauslegung des Exegeten)과 함께 손에 손을 잡고 나아갈 뿐이다."
S. 56.
- 관념론적, 심리학적, 낭만주의적이든, 모든 해석은 사실상 진정한 자기해석에 근거하고 있다.
- 종래의 해석: 주석자가 말해진것의 가능성에 대해 또는 의도되어진 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처분가능하다는 출발점에서 시작. 따라서 텍스트의 말씀은 그에게 사건이 되지 않았고, 텍스트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말하는 권위있는 것으로 대면되지 못했다.
이 때, 인간실존은 처분가능한 것으로, 안정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 인간실존은 일반적인 것, 즉 종(種)의 표본으로서 이해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개별적인 생 안에서, 시간성 내에서 유일하고 반복되지 않는 그 자신의 순간들과 함께, 그의 사건들과 결단과 함께 움직여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우리의 실존은 우리에게 처분가능하고 확실한 것이 아니라, 불확실하고 문제가 있는 것이며, 우리가 말씀을 말씀으로 듣는 준비가 되어야 하고 또 질문-우리에게 결단을 의미하는-을 듣고, 텍스트의 요구를 권위있는 것으로 듣는 것을 의미한다.
S. 57.
<시간성의 문제>
- 일반 해석에서는 시간성(Zeitlichkeit)을 오해하여, 발전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개별적인 시간계기의 중요성을 전체 안에 해소시켜 버렸다.
- 그러나 실존의 시간성은 보편적인 것의 하나(Fall)가 아니며, 무시간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미래로 이끌어가는 결단의 순간이다.
<주관성과 객관성의 문제>
-방법론을 통해 주관성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새로운 주관성에 빠진다. 왜냐하면, 방법이라는 것은 다만 인간실존에 근거지워 있는 해석으로부터 뛰따라 나오는 관찰의 방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 주석의 객관성은 역사의 현실성이 말씀으로 올 때에만 즉, 텍스트가 현실성으로서 주석가에게 영향을 미칠 때에만 유일하게 보증된다.
- 해석의 객관성은 방법론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권위에 있다. 즉 텍스트는 죽은 거울이 아니라, 실존적인 생동감을 가지고 있다.
57-8.
<텍스트에 대한 주석가의 태도>
1. 자신의 실존이해를 위한 노력이 요구
2. 텍스트의 말씀을 말씀으로 듣고 결단하며, 이 결단을 통해 말씀은 사건이 된다.
3. 사건은 객관적으로 관찰되어질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실존적으로 살아가는 청자를 위해서만 있다.
<해석과 판단기준>
- 주석할 때 역사의 현실성이 언어화 되리라는 보증은 역사의 현실성을 통해서만 스스로 주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언제 그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조종할 수 있는 어떤 기준도 없다.
S.62
<텍스트 이해>
-역사에 대해 마음대로 제어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그러나 실존의 질문에 의해 움직여지는 우리의 주석은 우리의 상황을 분명하게 만들어 준다.
-이해 그 자체는 활동이다. 자유로운 활동으로서 그것은 항상 나의 처분능력 밖에 서 있고, 결단 안에서 스스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나는 그와 동시에 서 있거나 그것을 조정할 수 없다.
S. 64.
<방법론에 대한 비판>
☞ 방법론의 비판에서 핵심 단어는 역시 역사와의 실존적 만남이다. 우리는 역사를 마음대로 처분하거나 관망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지 못하다. 다만 우리는 역사와의 만남의 가능성을 열어가야 한다. 더 나아가 불트만에게 명시화되진 않았지만, 여기서 방법론이란 소위 객관성 확보를 위해 요청되는 것으로 자연과학의 객관성 확보를 위해 사용될 수 있을지 모르나, 성서를 이해하는, 보다 넓은 차원에서는 역사를 이해하는데에 적용될 수는 없다.
1. 신약성서의 주석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방법론의 선언이 아니다. 방법은 현실적인 역사를 파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근본적으로 처분가능한 대상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해석이란 실제로 텍스트를 제3자에게 중재하는 것이어야 하며, 이 때 텍스트는 내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 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방법론을 통해 규정된 결과를 산출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2. 그렇게 할때, 역사는 죽은 역사가 된다.
3. 시간성의 성격을 잃어버리게 되고, 역사와의 실존적 만남의 길을 제3자에게 차단하게 된다.
4. "텍스트이해의 가능성은 언제나 그렇게 좁게 한계 지워질 수는 없다. 오히려 그 가능성은 마치 나와 너의 만남에서 자라나는 가능성처럼 고갈될 수 없는 것이다."(64)
S.66-7.
<신약성서와 신앙의 요구>
- 신약성서는 주석가 스스로가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으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식은 신앙하는 주석의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석은 질문 자체가 되어야만 한다. 물론 이 때, 질문이 올바른 질문이 되려면, 신앙의 질문이 되어야 한다.
- 신앙의 질문을 위한 준비라는 것이 주석가에게 전제되어야만 하는가?
신약성서의 과제는 교회의 말씀 전통 안에 서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내가 밖에서 보았을 때, 시간사적 개인으로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내 실존과 함께 말씀의 전통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면 신앙의 질문을 위한 준비라는 것은 있기 마련이다.
- 순종의 행위는 주석의 전제이다. 순종의 행위는 내가 취하고자 하는 입장에 놓여지지 않고, 오히려 행위되어진 것 안에서만 실재하는 자유로운 행위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내 실존의 전체를 요약한다.
S. 68.
<신학은 하나님에 의해 규정된 인간실존에 대한 개념적인 진술이다>
Theologie bedeutet die begriffliche Darstellung der Existenz des Menschen als einer durch Gott bestimmten.
왜냐하면 신학은 하나님에 대해서나 실존적 인간에 대해 마음대로 처분하지 않기 때문에, 신학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언설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언설이나 인간에 대한 언설이 될 수 있을 뿐이다.....그러나 신학이 항상 기억하는 것은 그러한 언설은 죄인된 인간의 언설이라 사실이다. 따라서 이 언설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언설이라고 주장할 수 없으며, 제한된 인식 안에서 옳다 인정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
성서신학은 말해진 것에 의해 시간사적 서술이나 신약성서 저자의 의식이나 현상에 대한 복합적 확정이 아니다. 오히려 성서신학은 역사의 현실과 실존적인 만남의 실행이다.
-조직신학은 하나님을 통해 규정된 인간 실존에 대한 개념적 해명 Explikation을 직접적인 주제로 설정하는 반면에, 역사신학은 그것을 간접적으로 실행하게 될 것이다.
☞ 여기서 조직신학은 교의학 뿐이 아니라, 신학에 대한 조직적인 서술을 의미하고, 역사신학은 교회사가 아니라, 역사적 서술방식을 의미한다.
이처럼 신학은 언제든지 학문적인 시도 ein wissenschaftliches Unternehmen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념적 사유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개념화시킨 내용이 합리적인 원천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해야한다는 요구에 대해 고통을 겪을 필요가 없다. 신학의 두가지 애매모호한 상황이 신학에게는 이러한 상황 속에 있는 다른 역사학에 대해서 보다 더욱 분명하다. 왜냐하면 신학은 결코 추상적 인간의 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학과 선포>
한편 신학은 직접적인 말씀 선포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학문적인 작업으로서 신학은 비교적 유용성에 의해 그것을 실행하는 반면, 말씀 선포는 자신의 문장이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확정적 주장이 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진술은 일반적이고, 무시간적 진리가 아니라, 계시가 사건이 되는 그 행위 안에서만 실재적이라는 사실로부터 자라 가는 운동성은 신학과 선포의 공통점이다.
S.71.
<주석 신학의 과제>
1. 주석학은 신약신학이 되어야 한다. 즉, 성서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날 수 있다는 전적인 동의에서 출발해야 한다.
2. 이 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말하여진 감추어진 말씀이다. 즉, 성서 안에 놓여 있는 계시 즉 감추어진 계시이다. 그것은 성서 안에서 언설로 우리와 만난다. 우선 하나님에 대한 언설과 인간에 대한 언설로서 제공되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영역에서 말해졌기 때문이다.
- 나와 너 사이에는 어떤 직접적인 만남도 있지 않으며, 다만 무엇인가에 표현이 그것의 성격과 함께 말 안에 감추어져 있듯이, 어떤 직접적인 계시도 있을 수 없으며, 다만 인간의 말Wort 안에 감추어진 계시만이 있을 뿐이다.
☞ 아직 불트만은 인간의 언어 Sprache와 신학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해서는 주제화하지 못했다. 다만, 불트만 은 성서신학자로서 성서와 성서 안에 놓여 있는, 사건화의 준비과정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언어, 인간의 사유와 하나님의 계시 사이의 관계에 대해 불트만이 산파의 역할을 했지만, 이 관계를 깊게, 넓게, 지속적으로 신학화하지는 못했다고 볼 수 있다.
3. 따라서 내용비판이 요구된다. 즉, 말해진 것 뿐 아니라, 말해진 것을 통해 의미되어진 것을 추적해야 한다.
☞ 불트만이 신약성서의 신화적 표현을 본질적인 의미해석을 위한 껍질로 이해하는 후기의 해석학적 발전형태의 단초가 바로 여기, 표현과 의미 사이의 날카로운 분리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텍스트는 특정한 관점에서 기록되었고, 이를 해석하는 자도 고유한 상황에 서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5. 쓰여진 언어와 문맥파악을 위해 역사적, 문헌학적인 연구가 요구된다. 그러나 역사적 주석 때문에 신학적 주석을 등한시 할 수는 없다. 실제 주석의 과정에서는 역사적 주석과 신학적 주석이 분석될 수 없는 연관 속에 같이 놓여 있다. 왜냐하면, 참된 역사적 주석은 역사와의 실존적인 만남에 의존하고, 또한 신학적 만남이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6. 모든 실존적 만남은 모험으로 감행할 수 있는 것이나 그런 식으로 방법론적 문헌학적 역사적 해명 안에 혹은 그 뒤에 자신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72).
☞ 불트만은 바르트와 이점에서 차이를 확보하려고 한다. 바르트에게 역사적 주석과 신학적 주석은 로마서2판의 서문에서 뚜렷하게 구분되고 분리되었지만, 불트만에게서 이 둘은 성서의 사신과의 실존적 만남의 길 위에서 함께 병행된다.
<나의 문제제기>
** 불트만은 조직신학의 과제가 하나님에 의해 규정된 인간실존에 대한 개념적인 진술이라고 했다. 불트만에게서 신학이 인간학이 되어버렸다는 비판은 이런 의미에서 아주 적당하다. 불트만은 자유주의신학자들이 취했던 역사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방식에 반대하면서, 역사와 실존, 하나님과 인간 양자 사이의 객관적인 거리둠이나 양자를 포괄하는 객관적인 관찰점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진정 역사보다는 역사 안에 놓여 있는 실존을, 하나님 보다는 하나님 앞에 있는 인간을 중심주제로 택하고 있다.
이는 신학의 고유한 대상을 인문학적 과제로 떠넘겨버린 무책임한 처사이다.
** 성서는 인간실존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가?
성서는 인간실존과 관계하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으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물론 인간실존과 무관한 세계와 미래가 아니라, 인간실존과 맞물려 있다. 그러나 인간실존으로 해소되어 버리지는 않는다.
** 불트만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언설방식, 표현방식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신학사의 중요한 과제를 던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신학은 자신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애시당초 하나님에 대한 모든 사유가 언어와 결부되어 있으며, 언어는 이 사유활동과 함께 있다는 근거에서 불트만의 관찰을 중요하다.
불트만은 인간의 말들로 기록된 성서 안에 하나님의 계시가 놓여 있다는 역설을 신약성서신학을 가능케 하는 신학적 근거로 설정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언어활동전체를 깊이있게 문제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인간의 사유와 언어활동과 계시와의 관계가 스쳐 지나가는 듯하게 스케치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정 인간의 언어 안에서 말해지며, 인간의 사유 속에서 형상화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 바깥에서가 아니라, 인간 안에, 인간과 함께 활동한다는 사실은 성육신의 원리에서 기독교 신학의 근거로 설정될 수 있다. 신학은 이 엄청난 죄인된 모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신학의 모험 속에서, 신학은 인간의 언어와 사유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말해야 하며, 동시에 인간의 언어와 사유자체를 하나님 언설의 부정적 요소로서 끊임없이 지적하면서, 자기비판과 순화의 과정을 스스로 감당해 내야 한다.
인간의 언어와 사유 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와 사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방해물이다. 이 두 표현은 신학작업의 기초이다.
따라서 신학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시적 표현이며, 상징적 언표이다. 신학은 언제나 새로워지기를 기다리며, 자신의 회개를 준비하고 있다. 동시에 신학은 이 그리움 안에 자신을 만나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표현이다.
신학은 소풍을 즐거워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소풍에 대한 기대감이 뿜어내는 자랑과도 같이 미래를 현실화하며, 진리의 기다림을 시간적으로 앞당겨 그려준다. 그러나 언제나 진리의 도래에 대한 설레임을 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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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용 소개) 불트만 소개--->루돌프 불트만(1884-1976)의 신학사상--->불트만의 생애와 사상--->불트만의 역사이해(終末論 理解와 그 批判 )--->Bultmann, Das Problem einer theoogische Exegese des Neuen Testaments--->불트만의 비신화화--->불트만과 실존주의--->불트만의 실존주의적 종말이해--->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
--->루돌프 불트만의 인간 안에 있는 말씀된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와 신화)--->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불트만의 논문 <Das Problem der Hermeneutik>에 대한 고찰 --->실존주의--->루돌프 불트만 : 양식사 비판 --->루돌프 불트만의 인간 안에 있는 말씀된 하나님--->불트만 신학 이해와 비판 --->불트만의 신학적 주석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