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은 없다가 생겨나고 있다가 없어진다. 상대세계의 만물 속에는 확실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수없이 많은 것들이 확실하게 있는 것 같은데 결국 없어질 것들이다. 백두산도 히말라야 산도 없다가 생긴 것이고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다.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하나’의 활동밖에 없다. 있고 없고를 넘어서 하나의 초점과 중심을 가지고 내가 나대로 나답게 있는 것이 하나로 있는 것이고 내가 나대로 나답게 하는 것이 ‘하나’의 활동이다. 또 있고 없고를 넘어서 전체가 하나로 되게 하는 것이 ‘하나’의 활동이다. 생성 소멸하는 만물을 넘어서 그 만물 속에서 내가 나답게 주체가 되고 전체가 하나로 되는 것만이 참된 실재이고 확실하게 있는 것이다. 나를 나로 되게 하고 전체를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의 활동이다. ‘하나’는 주체와 전체의 일치다.
다석은 우주만물 가운데 시간처럼 확실한 것이 없다고 한다. 시간을 순수하게 의식하고 시간 속으로 들어가 시간의 주인이 될 때 참으로 내가 나로 된다. 시간은 나를 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또 시간은 공평하게 만물을 없음과 빔 속에서 전체 하나 됨에로 이끈다. 시간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 어떤 영웅호걸도 시간에 쫓겨 죽음 속에서 없음과 빔의 평등세계로 내몰린다. 시간은 나를 나답게 하고 만물을 전체 하나 됨에로 이끈다는 점에서 ‘하나’의 활동이다. 시간은 ‘하나’를 순수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시간보다 더 확실하게 ‘하나’를 드러내는 것이 빈탕이다. 맛도 색깔도 없는 빈탕 허공이야말로 확실하게 ‘하나’를 드러내고 보여준다. 아무 매임도 거리낌도 없이 맘껏 내가 나로 자유로울 수 있고 나와 너와 그가 전체 하나로 되는 자리가 빈탕 허공이다. 빈탕 허공은 ‘하나’의 품이고 속이다. 주체와 전체가 하나로 되는 얼 나의 자리에서 보면 시간보다 확실하게 빈탕이 있다. 빈탕에 이르러야 하나에 이를 수 있다. -박재순
네 얼굴을 보라
내가 나를 좋아할 수 있어야 남도 나를 좋아할 수 있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이 남을 좋아할 수 있다. 하나님이 '나'를 딸처럼 아들처럼 사랑하셨고 예수님이 '나'를 목숨 바쳐 사랑하셨다면, 나도 나를 좋아하고 귀하게 여겨야 마땅하다.
먼저 내 얼굴과 내 몸을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 예쁘고 귀하게 여기자. 자주 거울을 보면서 내 얼굴에 친해지자. 함석헌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거울에 비치는 네 얼굴을 보라. 그것은 백만년 비바람과 무수한 병균과 전쟁의 칼과 화약을 뚫고 나온 그 얼굴이다."
생긴 그대로, 있는 그대로 스스로 기쁜 사람, 스스로 행복한 사람만이 남을 기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다. 남을 기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남을 움직일 수 있다.
-박재순, ‘삶의 씨앗’ 49쪽.
하늘을 본다
"야훼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창세기 2장 7절) 사람은 흙덩이면서 하나님의 숨결, 하늘 바람을 지닌 존재이다.
두 발로 서서 하늘을 보고 비로소 사람이 되었다. 보아도 보아도 끝없는 하늘(無限), 올라도 올라도 드높은 하늘(超越)을 보고, 철학이 생기고 믿음이 생겼다. 잡아도 잡히지 않는 하늘, 텅 비었으나 충만하다.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다. 빈 하늘에서 '없이 계신' 하나님을 본다.
세상살이에서 길을 잃은 이에게 하늘 길이 열린다. 길 없는 길이요, 죽어도 살고 살아도 살길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누구나 하늘을 가슴에 품고 산다. 하늘을 품고 사는 이가 가는 하늘 길을 막을 자는 없다. 하늘 길에는 막힘이 없다.
하늘은 하나다. 모든 것을 품고 모든 것을 놓아두고 자유롭다. 하늘은 모든 것을 다 보고 다 느끼면서 말이 없다. 그러나 하늘이 한번 입을 열면 세상이 뒤집힌다.
하늘은 땅과 교감한다. 땅과 어우러지면서 만물이 생성하고 소멸한다.
하늘과 땅의 울림과 느낌으로 생명의 춤과 노래가 시작된다. 흙(땅)과 하나님의 생기(하늘)로 지은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도 하늘과 땅이 울린다. 두 발로 곧게 서서 하늘을 보는 사람 안에서 하늘과 땅이 어우러지고 (人中天地一) 서로 울리며 서로 느낀다.
마음속에서 하늘이 열린다. 별들이 빛나고 달빛이 가득하고, 해가 높이 솟는다.
-박재순 ‘삶의 씨앗’ 35~6쪽.
< 갈보보다 더 더러운 것 >
짐승보다 더러운 것은 거지입니다. 먹다 남은 것을 빌기 위해 허리를 굽히기 때문입니다.
거지보다 더러운 것은 갈보입니다. 목숨이 아니라 쓸데없는 사치를 위해 몸만 아니라 마음을 팔기 때문입니다.
갈보보다 더 더러운 것은 정치입니다. 제 생각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생각을 위해 사람을 죽이면서 나라 일을 하노라고 스스로 속고 남을 속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깊어야 합니다. 가슴이 넓어야 합니다. 씨알 속에 우주가 들어야 합니다.
“얼음은 녹습니다”
함석헌 전집 8권 38~39쪽.
< 풀이 > 짐승은 자연에 속한다. 먹다 남은 것을 먹더라도 더럽다고 욕할 필요가 없다. 제가 먹을 수 있는 것을 제 스스로 먹기 때문이다. 거지는 남에게 허리를 굽히며 빌어먹는다. 사람이 먹이를 얻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것은 마음을 굽히는 것이다. 물질적인 먹이를 위해 물질이 아닌 마음을 굽히고 더럽히기 때문에 거지를 더럽다고 욕하는 것이다. 갈보는 사치를 위해 몸과 마음을 팔기 때문에 거지보다 더 더럽다. 몸과 마음을 파는 것은 몸과 마음을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치품보다 몸이 더 소중하고 몸보다 마음이 더 소중하다. 사치품을 위해 몸과 마음을 파는 것은 물질의 주인인 사람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돈(물질)을 위해 몸과 마음을 파는 갈보보다 더 더러운 게 정치라고 함석헌은 말한다. 1970년대 초반에 함석헌이 경험한 정치는 일제식민통치 시대의 군국주의정치, 남북분단과 민족전쟁을 초래한 이데올로기 정치, 군사독재에 빌붙는 정치였다. 이런 정치는 모두 제 생각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생각을 위해 사람을 죽이면서 나라 일을 한다고 권력을 휘두른다. 이런 정치는 스스로 속고 남을 속여 역사를 잘못된 길로 이끄는 정치다.
갈보는 제 몸과 마음을 더럽히고 말지만 정치는 서로 속이면서 나라 전체를 더럽히고 망하게 한다. 정치에 속지 않으려면 생각을 깊이 해서 가슴이 넓어져야 한다. 생각이 깊어지면 우주가 씨알의 가슴 속에 들어온다. 우주를 가슴에 품은 씨알은 정치에 속지 않고 역사를 생명과 평화의 길로 이끈다. -박재순
사과의 글
지난 5월 24일에 보낸 《씨알이 씨알에게》‘갈보보다 더 더러운 것’을 읽은 한 여성이 “성매매 여성에 대한 지독한 폄하와 차별의 글”이라고 항의하면서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사과를 요청하셨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글과 그 글을 풀이한 저의 글에는 ‘갈보’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쁜 의미로 쓰였습니다. 이 글은 물론 함석헌 선생님이나 제가 성매매 여성을 폄하하고 모독할 뜻으로 쓴 글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글에는 분명히 성매매 여성에 대한 폄하와 차별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지적해 주고 깨달음을 주신 분께 고맙게 생각합니다. 성매매 여성도 생명과 정신과 얼의 씨알을 지닌 존귀한 존재이고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주인과 주체입니다. 성매매 여성이 하늘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했던 예수의 말씀처럼 성매매 여성이 새 시대를 여는데 앞장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고 상처를 받은 여성들과 모든 성매매 여성들께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는 성매매 여성을 폄하하거나 차별하는 글을 쓰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다짐합니다.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이 보장되고 존중되는 사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 음식나눔(점심) : 지리산어탕국수(031-972-6736) 또는 굴세상(031-974-6480)
3. 6월 씨순길은 ...
6월1일 토요일, 생태.환경과 호국.애국을 생각하며 한강 강서습지생태공원과 행주산성을 걷습니다.
임진란 3대첩은 통상 이순신의 한산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 권율의 행주대첩을 꼽습니다. 당시 국방의 준비가 없었던 조선의 오합지졸 관군은 왜란 직후 바로 괴멸되었으나 오로지 씨알의 저항(의병활동)으로 나라를 지켜 냈습니다. 행주라는 이름은 씨알 부녀자들이 행주치마에 돌을 날라 석전을 치뤄 승전했기에 일컫게 된 이름입니다.
방화역에서 강서습지생태공원을 관찰하고 행주대교를 건너 100년이 훌쩍 넘은 역사 속의 건물인 행주산성성당이 있습니다. 어염집 기와집을 개조한 작고 소박한 성당으로 최근 수리하고 주변을 정비했습니다. 여기를 지나 행주산성 대첩문까지는 약 7kM 시간반 정도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입니다.
행주산성의 충장사 대첩비 기념관 등을 참관하는 시간은 1시간여 필요합니다. 순례를 마치고 음식나눔 장소인 행주내동에는 수시로 운행하는 서울과 일산의 버스가 있습니다
만물은 없다가 생겨나고 있다가 없어진다. 상대세계의 만물 속에는 확실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수없이 많은 것들이 확실하게 있는 것 같은데 결국 없어질 것들이다. 백두산도 히말라야 산도 없다가 생긴 것이고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다.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하나’의 활동밖에 없다. 있고 없고를 넘어서 하나의 초점과 중심을 가지고 내가 나대로 나답게 있는 것이 하나로 있는 것이고 내가 나대로 나답게 하는 것이 ‘하나’의 활동이다. 또 있고 없고를 넘어서 전체가 하나로 되게 하는 것이 ‘하나’의 활동이다. 생성 소멸하는 만물을 넘어서 그 만물 속에서 내가 나답게 주체가 되고 전체가 하나로 되는 것만이 참된 실재이고 확실하게 있는 것이다. 나를 나로 되게 하고 전체를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의 활동이다. ‘하나’는 주체와 전체의 일치다.
다석은 우주만물 가운데 시간처럼 확실한 것이 없다고 한다. 시간을 순수하게 의식하고 시간 속으로 들어가 시간의 주인이 될 때 참으로 내가 나로 된다. 시간은 나를 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또 시간은 공평하게 만물을 없음과 빔 속에서 전체 하나 됨에로 이끈다. 시간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 어떤 영웅호걸도 시간에 쫓겨 죽음 속에서 없음과 빔의 평등세계로 내몰린다. 시간은 나를 나답게 하고 만물을 전체 하나 됨에로 이끈다는 점에서 ‘하나’의 활동이다. 시간은 ‘하나’를 순수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시간보다 더 확실하게 ‘하나’를 드러내는 것이 빈탕이다. 맛도 색깔도 없는 빈탕 허공이야말로 확실하게 ‘하나’를 드러내고 보여준다. 아무 매임도 거리낌도 없이 맘껏 내가 나로 자유로울 수 있고 나와 너와 그가 전체 하나로 되는 자리가 빈탕 허공이다. 빈탕 허공은 ‘하나’의 품이고 속이다. 주체와 전체가 하나로 되는 얼 나의 자리에서 보면 시간보다 확실하게 빈탕이 있다. 빈탕에 이르러야 하나에 이를 수 있다. -박재순
네 얼굴을 보라
내가 나를 좋아할 수 있어야 남도 나를 좋아할 수 있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이 남을 좋아할 수 있다. 하나님이 '나'를 딸처럼 아들처럼 사랑하셨고 예수님이 '나'를 목숨 바쳐 사랑하셨다면, 나도 나를 좋아하고 귀하게 여겨야 마땅하다.
먼저 내 얼굴과 내 몸을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 예쁘고 귀하게 여기자. 자주 거울을 보면서 내 얼굴에 친해지자. 함석헌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거울에 비치는 네 얼굴을 보라. 그것은 백만년 비바람과 무수한 병균과 전쟁의 칼과 화약을 뚫고 나온 그 얼굴이다."
생긴 그대로, 있는 그대로 스스로 기쁜 사람, 스스로 행복한 사람만이 남을 기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다. 남을 기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남을 움직일 수 있다.
-박재순, ‘삶의 씨앗’ 49쪽.
하늘을 본다
"야훼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창세기 2장 7절) 사람은 흙덩이면서 하나님의 숨결, 하늘 바람을 지닌 존재이다.
두 발로 서서 하늘을 보고 비로소 사람이 되었다. 보아도 보아도 끝없는 하늘(無限), 올라도 올라도 드높은 하늘(超越)을 보고, 철학이 생기고 믿음이 생겼다. 잡아도 잡히지 않는 하늘, 텅 비었으나 충만하다.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다. 빈 하늘에서 '없이 계신' 하나님을 본다.
세상살이에서 길을 잃은 이에게 하늘 길이 열린다. 길 없는 길이요, 죽어도 살고 살아도 살길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누구나 하늘을 가슴에 품고 산다. 하늘을 품고 사는 이가 가는 하늘 길을 막을 자는 없다. 하늘 길에는 막힘이 없다.
하늘은 하나다. 모든 것을 품고 모든 것을 놓아두고 자유롭다. 하늘은 모든 것을 다 보고 다 느끼면서 말이 없다. 그러나 하늘이 한번 입을 열면 세상이 뒤집힌다.
하늘은 땅과 교감한다. 땅과 어우러지면서 만물이 생성하고 소멸한다.
하늘과 땅의 울림과 느낌으로 생명의 춤과 노래가 시작된다. 흙(땅)과 하나님의 생기(하늘)로 지은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도 하늘과 땅이 울린다. 두 발로 곧게 서서 하늘을 보는 사람 안에서 하늘과 땅이 어우러지고 (人中天地一) 서로 울리며 서로 느낀다.
마음속에서 하늘이 열린다. 별들이 빛나고 달빛이 가득하고, 해가 높이 솟는다.
-박재순 ‘삶의 씨앗’ 35~6쪽.
< 갈보보다 더 더러운 것 >
짐승보다 더러운 것은 거지입니다. 먹다 남은 것을 빌기 위해 허리를 굽히기 때문입니다.
거지보다 더러운 것은 갈보입니다. 목숨이 아니라 쓸데없는 사치를 위해 몸만 아니라 마음을 팔기 때문입니다.
갈보보다 더 더러운 것은 정치입니다. 제 생각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생각을 위해 사람을 죽이면서 나라 일을 하노라고 스스로 속고 남을 속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깊어야 합니다. 가슴이 넓어야 합니다. 씨알 속에 우주가 들어야 합니다.
“얼음은 녹습니다”
함석헌 전집 8권 38~39쪽.
< 풀이 > 짐승은 자연에 속한다. 먹다 남은 것을 먹더라도 더럽다고 욕할 필요가 없다. 제가 먹을 수 있는 것을 제 스스로 먹기 때문이다. 거지는 남에게 허리를 굽히며 빌어먹는다. 사람이 먹이를 얻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것은 마음을 굽히는 것이다. 물질적인 먹이를 위해 물질이 아닌 마음을 굽히고 더럽히기 때문에 거지를 더럽다고 욕하는 것이다. 갈보는 사치를 위해 몸과 마음을 팔기 때문에 거지보다 더 더럽다. 몸과 마음을 파는 것은 몸과 마음을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치품보다 몸이 더 소중하고 몸보다 마음이 더 소중하다. 사치품을 위해 몸과 마음을 파는 것은 물질의 주인인 사람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돈(물질)을 위해 몸과 마음을 파는 갈보보다 더 더러운 게 정치라고 함석헌은 말한다. 1970년대 초반에 함석헌이 경험한 정치는 일제식민통치 시대의 군국주의정치, 남북분단과 민족전쟁을 초래한 이데올로기 정치, 군사독재에 빌붙는 정치였다. 이런 정치는 모두 제 생각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생각을 위해 사람을 죽이면서 나라 일을 한다고 권력을 휘두른다. 이런 정치는 스스로 속고 남을 속여 역사를 잘못된 길로 이끄는 정치다.
갈보는 제 몸과 마음을 더럽히고 말지만 정치는 서로 속이면서 나라 전체를 더럽히고 망하게 한다. 정치에 속지 않으려면 생각을 깊이 해서 가슴이 넓어져야 한다. 생각이 깊어지면 우주가 씨알의 가슴 속에 들어온다. 우주를 가슴에 품은 씨알은 정치에 속지 않고 역사를 생명과 평화의 길로 이끈다. -박재순
사과의 글
지난 5월 24일에 보낸 《씨알이 씨알에게》‘갈보보다 더 더러운 것’을 읽은 한 여성이 “성매매 여성에 대한 지독한 폄하와 차별의 글”이라고 항의하면서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사과를 요청하셨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글과 그 글을 풀이한 저의 글에는 ‘갈보’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쁜 의미로 쓰였습니다. 이 글은 물론 함석헌 선생님이나 제가 성매매 여성을 폄하하고 모독할 뜻으로 쓴 글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글에는 분명히 성매매 여성에 대한 폄하와 차별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지적해 주고 깨달음을 주신 분께 고맙게 생각합니다. 성매매 여성도 생명과 정신과 얼의 씨알을 지닌 존귀한 존재이고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주인과 주체입니다. 성매매 여성이 하늘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했던 예수의 말씀처럼 성매매 여성이 새 시대를 여는데 앞장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고 상처를 받은 여성들과 모든 성매매 여성들께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는 성매매 여성을 폄하하거나 차별하는 글을 쓰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다짐합니다.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이 보장되고 존중되는 사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 음식나눔(점심) : 지리산어탕국수(031-972-6736) 또는 굴세상(031-974-6480)
3. 6월 씨순길은 ...
6월1일 토요일, 생태.환경과 호국.애국을 생각하며 한강 강서습지생태공원과 행주산성을 걷습니다.
임진란 3대첩은 통상 이순신의 한산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 권율의 행주대첩을 꼽습니다. 당시 국방의 준비가 없었던 조선의 오합지졸 관군은 왜란 직후 바로 괴멸되었으나 오로지 씨알의 저항(의병활동)으로 나라를 지켜 냈습니다. 행주라는 이름은 씨알 부녀자들이 행주치마에 돌을 날라 석전을 치뤄 승전했기에 일컫게 된 이름입니다.
방화역에서 강서습지생태공원을 관찰하고 행주대교를 건너 100년이 훌쩍 넘은 역사 속의 건물인 행주산성성당이 있습니다. 어염집 기와집을 개조한 작고 소박한 성당으로 최근 수리하고 주변을 정비했습니다. 여기를 지나 행주산성 대첩문까지는 약 7kM 시간반 정도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입니다.
행주산성의 충장사 대첩비 기념관 등을 참관하는 시간은 1시간여 필요합니다. 순례를 마치고 음식나눔 장소인 행주내동에는 수시로 운행하는 서울과 일산의 버스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