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드라이브 길, 아르헨티나 Ruta 40
파타고니아 남부 아르헨티나는 끝없는 스텝지역이 펼쳐진다.
한여름에도 갈색의 풀들이 자라고 있으니 그야말로 준사막이라고 봐도 좋겠다.
같은 위도상인데 안데스 산맥을 넘었다고 이렇게 척박한 땅으로 바뀔 수 있을까
남태평양의 따뜻한 공기가 안데스산맥과 부딪히면서 공기는 압축되어 비를 쏟아낸다. 칠레쪽 파타고니아의 강수량은 연간 3000ml. 늘 안개에 휩싸이고 비가 많은 이유다. 이곳에 수분을 다 쏟아 냈으니 아르헨티나로 넘어오면 건조한 공기만 남게 된다. 결국 칼라파테는 연간 강수량 200ml의 척박한 땅. 메마른 땅에 바람은 성난 황소가 울부짖는 것 같다. 어떨 때는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다.
이런 스텝지역을 가장 잘 느끼고 싶다면 남북을 관통하는 40번 국도(ruta 40)를 내달려라.
40번 국도는 무려 5,244km. 아르헨티나 전체 24개 주에서 11개주를 관통한다.
그러니까 미국의 루트 66, 호주의 스튜어트 하이웨이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긴 도로로 손꼽힌다.
지금도 자동차나 오토바이로 이곳을 질주하는 이들을 볼 수 있다. 바람을 가르며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이 경이롭게 보인다. 심지어는 자전거로 달리는 이도 본다.
이 길을 달린 대표적 인물을 뽑으라면 체 게베라
그는 쿠바사람이 아닌 아르헨티나 사람이다.
우리로 말하면 서울대 의대를 나온 엄친아 쯤 될거다.
아르헨티나 의대를 이 40번 국도를 따라 오토바이 여행을 했는데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화려함이 아닌 황폐함 그리고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만난거야.
억압과 착취, 불평등 사회의 반감이 생겨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에 몰두하게 되지
멕시코에서 공산혁명을 했지만 실패하고 쿠바에서 혁명을 완성한다.
만약 이 길을 달리지 않았다면 불세출의 영웅 체게바라가 존재했을까?
길 위에서의 만남과 영감은 이렇게 소중하다.
버스는 레오나 휴게소에서 멈춘다.
녹색의 빙하물이 스쳐간다. 발을 담그면 온몸이 짜릿하다.
서울까지 1만 8천km. 이정표가 반긴다.
워낙 외떨어져 있어 신분을 숨기고 숨어 살기에 딱 좋은 장소
나치의 우두머리 아이히만이 15년 동안 은거장소로도 알려졌다.
유대인 축출과 6백만 유대인 학살 실무 총책임자였다.
패전 후 포로수용소를 탈출, 신분세탁을 하고 이곳에 숨어 살았는데 그의 손자가 여친에게 할아버지가 유대인 제거에 앞장 섰다고 자랑삼아 말한 것이 화근이다. 하필 여친이 유대인.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고하자 2년에 걸친 추적끝에 이스라엘 모사드는 아이히만을 이스라엘로 납치했다.
전범재판소를 열어 1962년 5월 31일 교수형에 처하고 시신을 화장해 바다에 뿌린다. 홀로고스트의 시신 소각을 그대로 복수했다. 손자의 자랑에 할아버지는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되는데 역사의 살인마는 절대 살아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사람이 거의 없는 은둔의 땅이 바로 엘 칼라파테다.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8번째로 큰 나라. 남한 27개가 들어가고 남는다.
넓은 땅은 도무지 사람의 흔적을 볼 수 없다. 대신 울타리가 있는데 이는 소, 양, 말을 키우는 곳이라 한다.
소 한 마리 값이 4백불 정도니까 50만원 정도.
소 팔아서 대학보낸다는 말은 통하지 않겠다.
꽃등심 1kg이 7~8불로
전 세계에서 소고기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다.
대표적 요리가 숯불구이 아사도
한국에는 일요일에는 짜파게티요리사가 등장한다면 아르헨티나는 아빠는 아사도 요리사
난 아르헨티나에서
소고기 원 없이 먹어본다.
이게 돈 버는 길이기 때문에
물론 한국에서는 김치만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