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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의 도요 영(度遼營)과 광녕진(廣寧鎭)
○ 요수(遼水)는 수경 주(水經注)에 기록되어 있다. 수경 주(水經注)는 반도(半島) 또는 그 북방(北方)의 물줄기에 대해 기록한 것이 아니라, 대륙(大陸)에 있는 하천(河川)의 물줄기를 기록한 것이다. 편찬(編纂)자가 부록(附錄)편에 분명(分明)하게 명시(明示)하고 있음에도, “반도사관(半島史觀) 또는 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은 모르는 척, 미친 척하면서, 반도(半島)나 그 북방(北方)에 있는 하천(河川)의 이름으로 설명(說明)하려 한다. 보통 답답한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요동요서(遼東遼西)의 땅은 반도(半島) 북방(北方)과 현 요 녕 성(遼寧省) 서(西)쪽 지방과 하 북 성(河北省) 동쪽지방을 지칭하는 것이라며, 모든 역사해설을 그 좁은 울타리 안에 처박아 놓고, 해설하는 무지(無知)한 짓을 하고 있다.
요수(遼水)를 건너는 군대(軍隊)의 최고(最高) 사령관(司令官) 또는 책임(責任)을 진 장군(將軍)이란 뜻의 “도요장군(度遼將軍)”에 대한 설명(說明)은 이미 수차례에 걸쳐 한 바 있다. 이미 대륙(大陸)의 옛 역사서(歷史書)를 보고, 주석(註釋)을 한 분들 역시(亦是), 똑같은 설명(說明)을 하고 있는데, 유독 『반도(半島)의 학계에서는 이런 것을 팍 무시(無視)해 버리고, 자신(自身)들이 임의(任意)로 만들어 놓은 “요수(遼水)”만을 인정(認定)하는 웃기는 작태(作態)를 계속하고 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 분들은 알고 계실까? 대륙(大陸)의 동북(東北)공정(工程)에 동조(同調)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高句驪), 발해(渤海)를 자신(自身)들의 제후국(諸侯國)이라고 하며, 이곳을 그들의 땅으로 만들려 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닐 터?
언제까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계속 하실 건지, 참 답답한 노릇이다. 『도요장군(度遼將軍)』에 대한 설명(說明)을 또, 다시 한 번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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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전번역원의 문집총간> / 知 退 堂 (지퇴 당)集 / 朝天 錄 / 廣 寧 紀 事 【이정형(李 廷 馨) 1549년(명종 4) - 1607년(선조 40) 】
《皇 朝 廣 寧 鎭. 漢 代 渡 遼 營. : 황조(皇朝)의 광 녕 진(廣 寧 鎭)은, 한나라 때의 도요 영(度遼營)이다. 中 略》
○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의 영토(領土)를 설명(說明)할 때, 항상(恒常) 등장(登場)하고, 또 설명(說明)해야 하는 것이 요수【遼水 : 요하(遼河)】이다. 그만큼 조선사(朝鮮史)에서 큰 비중(比重)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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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주장(主張)는 요수(遼水)는, ㉠ 압록강(鴨綠江) ㉡ 심양주위를 흐르는 요수(遼水) ㉢ 하 북 성의 난 하(灤河) ㉣ 영정(永定)하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요수(遼水)에 관한 설명은 수경 주(水經注)에 있으며, 수경 주(水經注)는 반도(半島) 땅의 설명이 아니기 때문에 ㉠과 ㉡과 ㉢은 제외(除外)되어야 하며, ㉣의 영정(永定)하 역시 별도(別途)로 “영정(永定)하”를 설명(說明)하고 있기 때문에 해당(該當)사항(事項)이 될 수 없다.
○ 위의 글 제목이 말해주듯 연경(燕京)을 가는 여정(旅程)기로 “광 녕(廣寧)”에 관한 저자(著者)의 설명(說明)이다.
위 기록(記錄)대로 현 요 녕 성(遼寧省)에 있는 “광 녕(廣 寧)”이란 곳이 전한(前漢)시절의 “도요장군(度 遼 將軍)”이 주둔했던 “도요 영(度 遼 營)”인가 하는 문제를 알아보자는 것이다.
이 문제가 왜 조선(朝鮮)의 강역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것인가는 바로 “遼 水【요수. 遼 河 요하】” 때문이다. 『“요수(遼水)”의 동쪽지방 즉 “요동(遼 東)”이 “조선(朝鮮)의 근간지지(根幹之地)”였다.』는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 때문이며, 이는 고려(高麗) 말 어지러운 정치(政治)상황(狀況)에서 “이성계(李成桂)”라는 신진(新進) 군벌(軍閥)세력(勢力)【몽고(蒙古) 여진(女眞)계】과 구(舊) 군벌(軍閥)세력(勢力)이었던 “최영(崔瑩)”과의 세력(勢力)싸움에서 “이성계(李成桂)”의 승리(勝利)로 인해 오백(五百)년 “왕(王)”씨 고려(高麗)가 망(亡)하게 되는 가장 큰 원인(原因)이었으며, 이때 “이성계(李成桂)”가 명분(名分)을 내세워 『지상명령(至上命令)』이었던 군주(君主)의 황명(皇命)을 항명(抗命)하고 군사(軍士)를 되돌려 고려조정(高麗朝廷)에 칼을 들이댄 사건(事件)에 등장(登場)하는 것이 “요동(遼 東)”이며, 고려(高麗)가 망(亡)하고 “새로운 조선(朝鮮)”이 탄생(誕生)된 후에도 이 “요동(遼東)”은 뜨거운 감자와 같은 존재였다. 이런 곳이 “요동(遼東)”지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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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漢)이라면 전한(前漢)과 후한(後漢) 모두를 합쳐 약 400 년간【왕망(王莽)의 “신(新)”기간을 포함】이다.
도요 영(度 遼 營)이란 『군대(軍隊)가 요하(遼河)를 도하【渡河 : 강을 건넘】하여 중원(中原) 서북방(西北方) 하(河) 북안(北岸)에 있는 “오원(五原)” 서북(西北)에 영【營 : 주둔(駐屯)지. 진지(陣地)】을 설치(設置), 이곳에 군대(軍隊)를 상시(常時) 주둔(駐屯)시킨 군사기지(軍事基地)를 말한다.
이는 당시(當時)의 요하(遼河)의 위치(位置)를 알 수 있으며, 요하(遼河) 주위에 있던 여러 주요(主要)지명(地名)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조선사(朝鮮史)를 공부(工夫)하거나 연구(硏究)하는데 필수(必修)조건(條件)이다. 【이는 본인(本人)이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를 주장(主張)하면서, 가장 먼저 주장(主張)한 많은 여러 내용(內容) 중 하나이다.】
당시의 대륙 사(大陸史)의 도요장군(度遼將軍)에 관한 기록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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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前漢(전한)시대 ;
전한서(前漢書) / 冬, 遼 東 烏 桓 反, 以 中 郎 將 范 明 友 為 度 遼 將 軍 ,〔一〕 將 北 邊 七 郡 (郡) 二 千 騎 擊 之. : 겨울, 요동(遼東)의 오환(烏丸)이 반하였다. 이에 중랑장(中郞將) “범 명우”를 도요장군(度遼將軍)으로 하여, 북변 일곱 개 군(郡)의 2천 기【騎 : 기마병(騎馬兵)을 말한다.】로 쳤다.
[一〕 應 劭 曰 : 當 度 遼 水 往 擊 之, 故 以 度 遼 為 官 號. ; <주석(註釋)> : 요수(遼水)를 건너 가 쳤으며, “도요(度遼)”는 옛 관호(벼슬의 이름)이다).
● 대륙 사(大陸史)인 전한서(前漢書)의 기록(記錄)이다.
(2) 후한(後漢)시대
㉠ 자치통감(資治通鑑) : 효 안제 영초 3년 (109년) ; 남(南) 선우(單于)가 美 稷【미 직 : 섬서(陝西) 북방】에서 중랑장(中郞將) ‘耿 种(경충)’을 포위(包圍)하고, 11월에 대사농인 ‘何 熙(하 희)’에게 거기(車騎)장군(將軍)의 업무(業務)를 대리(代理)하도록 하고, 중랑장(中郞將) ‘龐 雄(방 웅)’을 부관(副官)으로 하여, 오영(五營)과 변경(邊境)에 있는 군(郡)의 군대(軍隊) 2 만여 명을 거느리도록 하고, 遼 東(요동)태수 耿 夔(경기)에게 조서를 내려 鮮卑(선비)족과 여러 군(郡)의 군대(軍隊)를 거느리고 함께 이들을 공격(攻擊)하도록 하였다. ‘梁 槿(양 근)’에게는 度 遼 將 軍(도요장군)의 업무(業務)를 대리(代理)하도록 하였다.
㉡ 同 원초 3 년 (116년) ; 계유일(25일)에 『度遼將軍(도요장군) “鄧 遵(등준)”』이 남(南) 선우(單于)를 인솔(引率)하여, 靈 州(령 주)에서 零 昌【영창 : 서강(西羌)의 두 번째 왕(王)】을 공격(攻擊)하였는데, 참수(斬首)한 것이 800 여급이었다.
● 도요장군(度遼將軍) : 장군(將軍)의 호칭(呼稱)으로 북부변방사령관(北部 邊方 司令官)이다. “도요(度遼)”는 “요수(遼水)를 건넌다.”는 뜻이며, 전한(前漢) 소제(昭 帝)때 이 제도(制度)를 처음 실시했다. 범 명우(范 朋友)가 도요장군(度遼將軍)에 임명(任命)되어 遼東(요동)의 烏桓(오환)을 攻擊(공격)했고, 後漢(후한) 역시 이 제도를 답습하여 오원【五原 : 섬서(陝西) 서북(西北)방 내몽고(內蒙古) 황하(黃河) 북안(北岸)에 있는 지명(地名)이다.】에 주둔(駐屯)하고, 흉노(匈奴)의 공격(攻擊)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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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도요장군(度遼將軍)은 휘하(麾下) 기보(騎步)병들을 인솔하여, 현 섬서(陝西) 서북(西北)의 황하【黃河 : 당시엔 이 황하(黃河)가 요수(遼水)였다.】를 건너, 오원(五原) 서북(西北)지대에 있었던 소위 “도요 영(度遼營)”이란 군사기지(軍事基地)에 도착(到着), 주둔(駐屯)하면서 군사(軍士)들의 훈련(訓練), 정찰(偵察)활동(活動)들을 하였으며, 이곳에 주둔(駐屯)하여, 서북(西北)쪽 침략(侵略)세력들을 견제(牽制)하기도 했다.
이들은 감 숙성(甘肅省) 북방(北方), 하서회랑(河西回廊) 등지까지도 군사(軍士)들을 이끌고 침략(侵略)군을 공격(攻擊)하기도 했다.
㉡의 자치통감(資治通鑑) 기록을 보면, 요동태수(遼東太守)도 등장(登場)하는데, 이곳 황하(黃河) 동(東)쪽 지방이 바로 당시(當時)의 “요동(遼東)지방”인 것이다.
【 영하 성(寧夏省)을 남북(南北)으로 관통(貫通)하여, 동(東)쪽으로 꺾여 흐르는 하(河)를 말하며, 이 하(河)의 동(東)쪽인 영하 성(寧夏省)일부, 감 숙성(甘肅省)일부, 섬서(陝西)성, 내몽고(內蒙古)및 하투(河套 : ‘악 이 다 사’ 중심)지방 등이 요동(遼東)이며, 하(河)의 서(西)쪽 지방을 “요서(遼西)”지방으로 가늠할 수 있다. 】
만약 현 하 북 성 ‘난 하(灤河)’ 또는 심양(瀋陽)주위를 흐르는 현 ‘요수(遼水)’등을 전한(前漢) 또는 후한(後漢)시대의 “요수(遼水)”라 한다면, 이들은 서(西)쪽으로 진격(進擊), 적을 무찔러야 하는데, 반대(反對)방향(方向)인 동(東)쪽 지방으로 도주(逃走)해 버린 꼴이 된다. 그러나 “도요장군(度遼將軍)” 휘하(麾下)의 병사들은 령 주【靈 州 : 감 숙성(甘肅省) 북변(北邊)】주위에서 적(敵)의 목 800 여급을 참수【斬首 : 목을 베다.】했다고 전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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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 예를 든 것은 “전한서(前漢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 후한(後漢)” 편 일부(一部)이다. 예로 들 예문(例文)은 많으나 주요(主要)한 부분(部分)만을 간단하게 발췌(拔萃)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도요 영(度 遼 營)”은 분명(分明) 존재(存在)하였고, “도요(度 遼)”란 “요수(遼 水)”를 건넌다.』 라는 것이며 이곳은 『대륙(大陸)의 중원(中原) 서북(西北)방 내몽고(內蒙古) 황하(黃河) 북안(北岸)에 있는 “오원(五原)”의 서북(西北)쪽에 군대(軍隊)가 주둔(駐屯)하고 있었으며, 군대(軍隊)가 주둔(駐屯)하고 있던 진지(陣地)의 이름이 “도요 영(度 遼 營)”이다.』라는 것이다.
【통전(通典)과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이 오원(五原) 북방(北方) 900 리에 옛 『“조양(造陽)성”이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서(西)쪽에서 동(東)쪽으로 옮겨진 지명(地名)이라는 근거(根據)가 있기 때문에 당초(當初)의 지명(地名)은 아니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앞으로의 연구(硏究)과제(課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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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本文) 서두의 <고전번역원의 문집총간> / 知 退 堂 (지퇴 당)集 / 朝天 錄 / 廣 寧 紀 事 【이정형(李 廷 馨) 1549년(명종 4) - 1607년(선조 40) 】
<皇 朝 廣 寧 鎭. 漢 代 渡 遼 營. : 황조(皇朝)의 광 녕 진(廣 寧 鎭)은, 한나라 때의 도요 영(度遼營)이다. 中 略 》 라는 설명(說明)에서 “광 녕(廣寧)”은 황하(黃河) 북방의 내몽고(內蒙古) 땅에 있었을 것이다. 황조(皇朝)란 황제(皇帝)의 조정(朝廷)이란 뜻이며, 이때의 황조(皇朝)는 전한(前漢)이나 후한(後漢)이 아닌, 조선(朝鮮) 곧 고구려(高句驪) 조정(朝廷)을 말하는 것이다. 황조가(黃鳥歌)는 폼으로 존재(存在)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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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내용은, <1549년(명종 4) - 1607년(선조 40)>의 것이고, 아래의 것은 <임진년(1832, 순조 32) 12월2일의 것이므로, 시차(時差)는 약 230년 정도(程度)이다.
㉠ 연원 직지(燕 轅 直 指) / 出 疆 錄 ○ 임진년(1832, 순조 32) 12월2일/ 주류하기(周 流 河 記)를 보면 : 《주류하는 일명 거류 하(巨流 河), 요수(遼 水)라고도 한다. 물의 동쪽은 요동(遼 東), 서쪽은 요서(遼 西)가 된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한(漢)나라 도요 장군(度 遼 將軍)이 여기에 주둔했었다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 후한서(後漢書) : 虔 人 羌 叛 , 攻 穀 羅 城 ,度 遼 將 軍 耿 夔 討 破 之. : 건인 ‘강’(羌)이 반란을 일으켜 곡 라 성【서하(西河)군 속(屬)으로 있었다고 함】을 공격하자, 도요장군(度遼將軍) ‘경기(耿夔)’가 이들을 쳐 깨뜨렸다.
㉢ 후한서(後漢書) :(詔)〔詣〕敦 煌 、隴 西 及 度 遼 營 ;〔一〕其 右 趾 以 下 及 亡 命 者 贖 , 各 有 差 : 『 돈 황(燉煌), 롱서(隴 西) 와 도요 영(度遼營) 에게 고하여 알리기를 : 그 우지 이하(以下)와 망명자들은 속을 바치되, 각각 차등(差等)있게 하라.』 하였다. 【속(贖) : 속을 바치다. 재물을 주고 죄를 면제받다.】
주석(註釋) : 〔一〕漢 官 儀 曰 「度 遼 將 軍 屯 五 原 曼 柏 縣」 也. : ‘한관의’에 따르면, 『도요장군(度遼將軍)이 주둔(駐屯)하고 있는 곳은 오원(五原) 만 백(曼柏)현』이다.
㉣ 자치통감(資治通鑑) 20 漢紀 12 / 世 宗 孝 武 皇 帝 / 元 鼎 五 年 : 五 原【五 原 ,即 秦 九 原 郡 ,帝 更 名 ; 唐 為 鹽 州】: 오원 【주석(註釋) : 오원(五原), 곧 진(秦)의 구원(九原)군인데, 제(帝)가 이름을 바꿨다. : 당(唐)의 염주(鹽州)이다.】
● 위에서 보다시피, 『도요 영(度遼營)은 도요장군(度遼將軍)이 주둔했던 진지(陣地)이며, 이곳은 황하(黃河) 서북(西北)안에 있는 오원(五原) 서북(西北)에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곳에 있던 『도요장군(度遼將軍)은 그 북방(北方)과 서방(西方), 서북(西北)방 면에서 쳐들어오는 적(敵)을 막기 위해 설치(設置)된 진(鎭)의 최고(最高)사령관(司令官)이며, 도요 영(度遼營)은 그 진지(陣地)였다.』 이들은 감 숙성(甘肅省) 북변의 하서회랑(河西回廊) 북(北)쪽 등으로 출정(出征)한 예가 많다. 이곳에 이민족(異民族)들의 침입(侵入)이 많았기 때문이며, 당(唐)나라 시절엔 감 숙성(甘肅省) 위수(渭水) 상류지방에 유주(幽州)절도사(총관)가 있었다.
이러한 형편에 『 5천리쯤 동(東)쪽으로 이동(移動)시켜, 하 북 성(河北省) 동쪽지방의 요수(遼水)라 한다면, 옛적에 “도요장군(度遼將軍)”을 역임했던 선인(先人)들과 그 휘하(麾下) 기병(騎兵)과 보병(步兵)들이 깜짝 놀라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다.”』
꿈속에서 헤매는 이야기를 하지 말고. 상식적(常識的)인 역사(歷史) 이야기를 해보자.
2012년 03월 13일 <글쓴이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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