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니체리...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친위대이자 외인부대.
그 어원은 새로만든 군대...란 투루크어라는데...
서역인들 조차도... 터키인들 스스로도 돌궐의 시원이 북동아시아라니...믿을 도리밖엔 없다.
그래서 그 구체적 원조시원지를 찾아본다.
역시나...바이칼이다.
시베리아 타이가지대의 중심중 중심...
바이칼 동부 예니세이 자체가 예니체리의 어원과 상통한다.
예니세이강의 어원이 서역 투르크족이 동진해 만들었을지도 모르나...
돌궐의 시원지가 북동아시아고...철륵이고...투구산에 시원한다 하니...
외몽골 북부 아르한가이산맥 여러 분화구산인 호르긴터고산들이 있는 자리의 투구산을 연결짓지 않을 수 없다.
투구산은...주변의 여러 화산분화구산인 호르긴터고(움푹페인 솥단지(동복))산들관 다르게...
그 주변평원에 동그란 무덤같이 솟이나 역시 안은 둥그런 솥단지마냥 움푹패인 산으로...
대표적인게 2개가 나란한데...
이건 화산분화가 아니고...그 형태상 유성이 떨어져 패인 함몰 구릉지형같다.
전에도 떠들었듯...
이 주변의 여러 호르긴터고산 칼데라호수중 하나인 차강노르,차강다랜(하얀호수,하얀바다)이 있는 산에서 발원하는 강 중 대표적인 강이...
철륵을 연상하는 촐루트강이다....이 촐루트(돌강)강이 동북으로흘러 바이칼로 흘러드는 셀렝게와 합류한다.
이게 원조 흑룡강이고...그 발원지인 흡스골호수가 흑수(黑水)여진의 근거지같다.
이 아르한가이산맥은... 거란국지도엔...조주(祖州)로 표기돼며...조주 남쪽이 목엽산(木葉山)으로 표기됀다.
그 서쪽의 알타이산은 불림(佛林)으로 표기돼고...그 서남부평원 타이가지대를 송림천리(松林千里)라 표기했다.
거란이 동으로 몰린 발해의 황룡부(현 외몽골 울란바타르 일대)를 마지막 타격하기 전에...
야율아보기와 그 왕비가 청우(푸른야크?)와 백마를 바쳐 천제를 지낸게 이 목엽산인 아르한가이다.
돌궐이던 거란이던 몽골이던...이 아르한가이는 성산이자 신산이다.
징기스칸도 몽고통일후 대칸즉위식을 이 아르한가이에서 발원하는 알란하(오론강)시원지에서 치뤘다니...
호르긴터고격인 차강노르에서였을 것이다.
북방 흉로들의 발원지자 성지가 여기저기 있는게 아니라...
아주 대표적인 성지가 바로 이 아르한가이 불칸산(불함산=천산)의 투구산일것이란 예상이다.
이 불칸산....몽골어로 브르한산(佛山)..즉, 부처,하느님산이란 명칭이다.
이게 원조 불함산의 지명유래지 싶다.
복드산(백두산=위대한 산)...불한산(불함산=부처의 산=천산)의 지명은...
여기출신 여러 민족과 그 왕조의 지역이동에 따라 여기 저기로 이동됐다 보인다.
다시 예니체리로 돌아와서...
돌궐이던 거란이던 말갈이던...상고대엔 부여(북부여)의 관할에 있던 종족으로...
북부여는 시원이 바이칼 브리야트족과 같다 보인다.
색리국의 동명왕이 남하하여 북부여를 세운다 함은...
바이칼 서부 예니세이강 이르크츠크일대 숙신,사카족의 동명왕이 남쪽으로 내려와 북부여를 만든단 얘기이고...
그 북부여출신 고주몽의 아비가...남부여격 금와왕의 신장성 천산유역 부여에 내려와 황천의 자손이라 설칠 수 있던 근간도...
남부여 자체가...이 바이칼 유역 북부여에 시원했고...바이칼의 북부여를 천자국격으로 받들었었기에 그랬다고 보인다.
예니체리...새로운 군대...
예니는 우리말 애(아이)와 같고...처음을 뜻하는 몽골어 애흐(아이흐)와 같다.
체리(세이)는 몽골어 졸릭(용감한)이 어원인 체릭(용사,군대)와 같으며...우리말 졸(卒)...그들이 입는 갑옷 철릭과 관계있다 보인다.
예니체리의 투르크어원은 "예니세린"이라고도한다.
고로, 예니체리는 예니세이와 상통하며...예니세이강은...
신출 돌궐전사를 의미하는 이름이며...
이는 바이칼과 이르크츠크 ...앙가라강과 예이세이강의 바이칼전설과 일맥상통한다.
옛날 바이칼이란 할아버지가 있었고...
그의 예쁜 외동딸이 앙가라였는데...바이칼은 이 앙가라를 이르크츠크란 용사에게 시집보내고 싶어했으나...
앙가라는 갈매기가 전해준 멀리있는 멋진용사 예니세이에 대해 전해듣고 흠모하여 도망치다...
바이칼이던진 바위에 깔려 죽었단 전설...
이를 실질적으로 해석하면...
옛날 원조 북부여(브리야트)족이 바이칼을 석권하고 있었고...
그 유일한 배출구인 예니세이강의 상류 앙가라강에...알거골부인 앵글로섹슨(앙골부+숙신부)부족이 부속돼어 있었는데...
부여의 통치내에 야락하(여진용사)...즉, 이르크+츠크(군대)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데...
돌궐의 예니세이(예니체리)에 기울어 망명했단 얘기로 해석돼며...
앙가라(앙거골,앙골)족은...예쁜 백인여자들이 많은 종족였었다 해석됀다.
예니세이의 "세이"는...물론 체리(체릭=졸릭)이란 용사의 의미도 있지만...
그 지역 백인계 실위족도 뜻한다고 보이며...이게 바로 슬라브의 어원이며...
러시아를 상징하는 슬라브도...역시 바일칼 예니세이 실위족에 있다 보인다.
신라(新羅)란 나라 자체도...
이 바이칼서 이동한 실위족(슬라브)혼혈이고...
그들이 서남쪽으로 이동해 알타이중심의 선비족에 통치당하는게...진나라에 살던 사로신라 유민들의 시원이지 싶다.
원조 북부여(브리야트)고...돌궐이고,거란이고,앵글로색슨이고...
그, 시원은 숙신이고...색리국으로...석가족을 이르는 색국이며...그게 바로 스키타이라 보인다.
이 색국(索國)의 명칭은...성인(사카)를 뜻하다 ...후대 그 국민...그 사람을 이르는 말이 돼어...
~스키"는 사람호칭에 쓰이고...그 어원에서 유리말 "~새끼"도 유래한다 보인다.
그저 농담의 우연이 아니라...러시아어의 "~스키"와 우리말 "~새끼"가 같단 것이다.
이들의 용사를 이르는 말...체리(체릭,졸릭,세이)는...~세린,~체린"이란...우리말 인(人)의 의미인 "ㄴ"바침이 붙어...
~신,~친(진)..으로 사람이란 말이 돼는데...
이는 현재도 러시아말 ~친...일본&중국말 "진(人)"과 상통한다.
현 영어의 맨(man)은...우리말 민(民)과 통한다.
여기서 게르만,노르만의 ~만이 나오며...이들이 자신들을 ~만(맨)이라 하기에...
한자문명은 이들을 만(蠻)...만(滿)등으로 표기했으며...
이들이 동남아 왜인들의 구역을 접수하면선...동,서남아제도 인들을 중원조선이 만(蠻)이라 했다 보인다.
숙신,식신,색슨은...진(辰.眞.秦,晉)등 여러 나라,종족의 명칭에 들어가는데...
여진(女眞), 대진(大辰=발해),진시황제의 진(秦)나라,로마를 뜻하는 대진(大秦)..모두 일맥상통한다 보인다.
앙가라를 차지하려던 예니세이와 이르크츠크...이를 관리한 바이칼의 신화는...
백인미녀들이 많은 앵글로색슨(安骨숙신)을 차지하려던...예니체리(예니세이)들의 돌궐과 슬라브...
천자국격 바이칼(북부여=브리야트)의 속령인 여진의 예락하(이르크츠크)의 갈등 역사며...
이 갈등끝에 돌궐과 슬라브...앵글로색슨은 서역으로 이동해...선비족의 통치를 받고...다시 서역으로 이동해...
현 슬라브민족과 앵글로색슨의 시원이됀다 보인다.
그게 또한 거란(키타이)이자 서쪽 부류인 카라키타이...그 서쪽부류인 게르만이라 본다.
현 터키는...돌궐제국의 최 서부 변경영토일 뿐...
그 중심은 절대 됄 수 없으니...터키에서 돌궐제국이 바이칼까지 점령하러왔단 얘기는 이치에 맞지 않다.
이들이 만든 빗살무늬토기...나무모양,사슴뿔모양의 금관...목곽분과 순장풍습...고인돌(풍장.조장)풍습...
단목(檀木)을 상징하는 솟대,톡(纛),장승,마르둑풍속...
이 모두는 바이칼에서 동서로 뻗어나간 북이(北夷)이자...숙신을 이은 색국(사카족=스키타이)과 부여의 문화라 보인다.
현 인류에게 지대한 문명충격을 일으킨 청동기와 철기의 신인류문명은...
바로 여기 시베리아의 성지인 바이칼에서 전 세계로 퍼진 문명이자...이들이 결국 현 인류문명 기득권들의 조상였다 보인다.
흉로도 여기서 시작돼어 서역을 지배한게 로마고...
중국이란 문명을 만든 이들도 여기서 이동한 환국과 환웅등의 숙신계 선비족이며...
북아아메리카 중앙아메리카 아파치,잉카등의 종족들도 여기서 이동한 황인종과 코가큰 대비달자들일까 한다.
모두 용(龍,뱀)이나 거북(현무,공룡)을 통치자의 상징으로 했으나...
후대엔 파충류의 라이벌인 새(특히 독수리,봉황)을 또하나의 상징으로한 것도 전세계가 똑같다.
조우관은 고구려만 쓴게 아니라...후대엔 로마군...명나라군...아랍군...투르크군...게르만유럽군...아메리카인디언...동남아 토인들...아프리카토인들...어디든 다 사용한 부적형식이라 할 수 있다.
시원이 어디냐인데...
역시 바이칼의 예락하(여진용사)들과 그들의 주인인 북부여(브리야트)가 시원일까 싶다.
아담과 이브가 아프리카에서 먼저 세게로 퍼졌는지 뭔진 몰라도...
그건 돌도끼와 뼈다귀를 연장으로 쓰던 무름이 덜 펴진 반 유인원식의 원시인류이고...
정교한 청동그릇(투구,동복,솥)와과 청동기,철기를 개발하고...길쌈과 수레바퀴...
초기 천문학을 득도하고 통치철학을 득도해 신인류의 조상으로 퍼진건...
바이칼을 중심으로 진화한 시베리아(사백력)출신 환인족의 남하로 시작됀 환국(桓國)이 역시 시원일까 싶다.
천해의 동쪽...총령의 주변이라 했으니...
알알해&발하쉬호의 동쪽...파미르의 주변이다.
현 신장성 천산을 중심으로...남북 5만리...동서 2만리의 초기 고대 문명이 있었고...
현 인류문명은 모두 이 환 문명의 지류일 뿐이란 주장을 해 본다.
그 직계가 역사시대까지 존재한게...
연(燕)의 북쪽에 있었단 오환(烏桓)족으로...신장성 천산 유역이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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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국지에 실린 거란지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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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는 본디 예(濊) 지역에 있는 북이(北夷)로, 북이의 왕자(王子) 동명(東明)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나라를 세운 것이다. 혹 북부여(北夫餘)라고도 칭하며, 지금의 봉천부(奉天府) 개원현(開原縣) 등지이다.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연(燕)은 북쪽으로 오환(烏桓), 부여(夫餘)와 이웃하고 있다.
《후한서(後漢書)》 부여열전(夫餘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삼국지(三國志)》 부여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여국은 장성(長城)의 북쪽에 있는데 현도에서 1000리이다. 사방이 2000리이며, 호구 수는 8만이다.
《진서(晉書)》 부여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여국은 현도에서 북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선비와 접하였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진나라 때 모용씨(慕容氏)가 요수(遼水)의 동쪽과 서쪽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남쪽으로 선비와 접하였다고 한 것이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여국은 지금의 개원현(開原縣)의 치소(治所) 경계 안이 모두 그 지역이다. 부여국의 왕성(王城)은 개원현성의 서남쪽에 있었다.
요(遼)나라에서 통주(通州)로 고쳤다. 살펴보건대, 《삼국지》를 보면, “부여국은 장성의 북쪽에 있으며, 현도에서의 거리가 1000리이다.” 하였는데, 지금의 도리(道里)로 계산해 보면, 부여에서 한(漢)나라 요동군(遼東郡)까지의 거리가 1천 4, 5백 리이며, 지금의 개원에서 요양성(遼陽城)까지의 거리는 겨우 300리밖에 안 된다. 그리고 적옥(赤玉)과 미주(美珠)가 지금의 흑룡강(黑龍江) 경내에서 산출된다고 한다. 그런즉 부여부(夫餘府)는 마땅히 변새(邊塞) 밖의 영고탑(寧古塔)이나 흑룡강 등의 지역에 있어야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는 지금의 흥경(興京) 지방에 있었다. 선비는 지금의 대요수(大遼水) 서북쪽 지역에 있었다.
-《후한서》를 보면, “선비가 동쪽으로는 부여를 물리치고 서쪽으로는 오손(烏孫)을 쳐서 흉노(匈奴)의 옛 지역을 모두 차지하였으며, 동쪽으로는 요동에 이르러서 부여, 예, 맥과 접경하였다.” 하였으며,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이르기를, “처음에 선비 막호발(莫護跋)이 비로소 새외(塞外)로부터 요서(遼西)와 극성(棘城)의 북쪽으로 들어와 살면서 모용부(慕容部)라고 하였다.” 하였다.- 읍루는 지금의 영고탑이다. 약수(弱水)는 흑수(黑水)를 가리키는 것으로, 《진서》에 ‘읍루는 북쪽으로 약수에 닿았다’고 한 것이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읍루는 동쪽에 있고, 부여는 서쪽에 있으므로 두 나라의 북쪽 경계가 모두 흑수가 경유하는 곳에 해당된다. 그리고 범엽(范曄)의 《후한서》에 이르기를, “부여에서는 적옥(赤玉)과 대주(大珠)가 산출된다.” 하였는바, 《성경통지》에 이르기를, “적옥과 미주(美珠)가 지금의 흑룡강에서 산출되니, 부여의 북쪽 경계는 흑수에 이른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부여의 사방 경계는 이를 미루어서 알 수가 있다.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발해가 부여의 옛 지역을 부여부로 삼았다.” 하였는데, 부여부는 지금의 개원현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발해조(渤海條)에 나온다.-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이르기를, “고구려가
장성(長城)을 수축했는데, 동북쪽의
부여성(夫餘城)에서 시작해 서남쪽의 바다에까지 이르니, 무릇 1000여 리였다.” 하였는데, 서남쪽의 바다는 지금의 여순(旅順) 앞바다이다. 여순에서 동북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은 개원 등지에 해당된다. 그리고 《요사(遼史)》 및 《성경통지》에 의거하면, 개원현에 부여의 왕성(王城)이 있었는바, 부여가 지금의 개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범엽의 《후한서》에는 이르기를, “부여는 현도에서 북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는데, 현도는 지금의 흥경(興京) 지방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부여는 마땅히 개원의 동북쪽에 있어야 하며, 개원은 변경 지역에 불과하다. 생각건대, 부여가 처음에는 현도에서 북쪽으로 1000리 되는 지역에 있다가 그 뒤에 다른 나라의 침입을 받아서 개원 지역으로 옮겨 온 듯하다. 《자치통감》에 이르기를, “부여는 처음에 녹산(鹿山)에 살다가 서쪽으로 연(燕) 지역 가까이로 옮겨 왔다.”라고 하였는데, 이 설이 그럴듯하다.
또 살펴보건대, 동사(東史)를 보면 부여(夫餘)가 넷이 있다. 첫 번째는
동부여(東夫餘)인데, 바로
금와(金蛙)의 나라이다.
-금와는 북부여(北夫餘)로부터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겨 와 도읍하였으니, 이것이 동부여(東夫餘)이다. 예전의 도읍지에는 해모수(解慕漱)라고 칭하는 자가 와서 도읍하였다. 그 뒤 한나라 명제(明帝) 때 동부여가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동부여의 지계(地界)에 대해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다.- 두 번째는 북부여인데, 바로 해모수가 세운 나라로, 중국사에서 부여라고 칭하는 나라이다. 세 번째는 졸본부여(卒本夫餘)인데, 바로 고구려로 주몽(朱蒙)이 세운 나라이다. 네 번째는 남부여(南夫餘)인데, 바로 백제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다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모두 예전의 칭호를 사용한 것이다.
○ 진(晉)나라 영화(永和) 2년(346)에 부여가 모용연(慕容燕)에게 멸망되어 부여의 땅이 고구려로 편입되었으며, 부여의 북쪽 지역은 뒤에 말갈(靺鞨)이 차지하였다.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나라 영화(永和) 2년이다. 당초에 부여가 녹산(鹿山)
-부여는 현도에서 북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데, 녹산은 바로 그곳에 있다.- 에 있다가
백제(百濟)의 침입을 받아
-삼가 살펴보건대, 백제는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서쪽으로 연(燕)과 가까운 곳으로 옮겨 갔는데, 연에 대해 방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慕容儁)을 보내어 부여를 습격하게 하여 부여 왕 현(玄)과 부락 사람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후위서(後魏書)》를 보면, 세조(世祖) 때 고구려의 지역이 남쪽으로는 소해(小海)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옛 부여에 이르는 것으로 되어 있고, 《당서》에는 이르기를, “고구려는 북쪽으로 말갈(靺鞨)과 이웃하고 있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말갈의 서쪽은 돌궐(突厥)에 속하고 남쪽은 고구려와 닿아 있다.”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부여의 옛 지역은 고구려로 편입되었으며, 북쪽 지역은 말갈에 편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 부여의 남은 종족들은 옛 부여국의 동북방으로 옮겨 가 살면서
두막루(豆莫婁)라고 칭하였는데, 이곳은 부여의 옛 지역이 아니다.
《후위서》 두막루열전(豆莫婁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두막루국은
물길(勿吉)에서 북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낙양(洛陽)에서의 거리가 6000리이며, 옛 북부여이다.
실위(失韋)의 동쪽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사방 강역이 2000리이다. 혹자는 본디 예, 맥의 지역이라고 한다.
《당서》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원(開元) 11년(723)에 달말루(達末婁) 수령(首領)이라는 자가 와서 조공하였는데, 달말루가 스스로 말하기를, “북부여의 후예인데, 고구려가 북부여를 멸망시키자 남은 사람들이 나하(那河)를 건너가 그곳에서 살았다.” 하였다. 나하는 혹 타루하(他漏河)라고도 하는데, 동북쪽으로 흘러서 흑수(黑水)로 들어간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달말루는 바로 두막루의 음이 변화된 것이다. 물길(勿吉)은 바로 읍루(挹婁)인데, 읍루는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고, 두막루는 또 읍루에서 북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다. 그런즉 그 지역은 부여의 옛 지역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를 옛 북부여라고 한 것은, 본부여(本夫餘)의 유종(遺種)임을 말한 것이고, 본디 예, 맥의 지역이었다고 한 것은 전사(前史)의 부여전(夫餘傳) 내용을 그대로 답습해서 쓴 것이다.
첫댓글 부여의 역사는 남당박창화 선생의 "추모경"을 참조하면 많은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네. 대부여님이 올리신 그 글들을 시간 나는대로 정독해 보겠습니다.
궐한님! 거란지도에 부처불자 써진 산은 알타이 산인가요? 알타이가 동북삼선위로 옮겨졌기에 거란지도에 나오는 불짜 써진 산은 우랄 알타이로 보입니다 만,,,, 분녕하게 파악이 안되는군요
저 지도로만 보면...황하가 고비사막으로 벋쳐올라간 정북에 불림(佛林)이란 산이 있는데...
이는 현재의 알타이보다 훨씬 동쪽위치입니다.
그러나 목옆산과 몽고산 북해(바이칼)의 위치로 보아...목옆산이 아르한가이산맥&불한산맥...그 서쪽이 불림이니 불림은 러시아와 몽골 중국 카자흐가 교차하는 지점의 고르니알타이정도로 보입니다.
고르니 알타이라! 살펴보겟습니다 답변 감사드립니다
거란은 그 한자에 단전호흡의 의미가 들어있고 숙신 이니 식신도 모두 호흡수련 하는 의미의 글자 입니다 그리고 북방불교의 부처들은 앞머리카락을 땋아 늘어트렸는데 이는 거란의 헤어스타일입니다
조선말의 종교론에 의하면...불교도 도교중 묵가에 속한다 돼어 있으니...
정신적으론 명상수련...육체적으론 운기조식...물질(육신과) 정신(신명)의 소통은 율려라고 하던가요...?
그건 주문,기도,음악,춤...이게 모든 종교의 기본일까 합니다.
제 생각에도...서방불교의 삭발유풍은...거란의 영향이 지대하다 보이고...그게 서역 이집트지역으로 가선...
아주 심한 곱슬머리들이라 완전삭발이 기본이 됀 서방불교로 발전한다 봅니다.
그러나 원조불교는 오리엔트유물과 인도의 붓다상들에서 모두 그렇듯...큰상투(주먹상투)을 틀은 동방식이라 봅니다...전 그걸 북부여의 시원지인 브리야트(불리,불내)지역인 바이칼지역에 시원이라 봅니다.
천신에 소통하는 무속(巫俗)이...점점 체계화돼고 각 지역화 돼면서...현 인류들의 도교,유교,불교,기독교,이슬람교 힌두교&라마교가 됐다 보여집니다.
거란의 고뷸교 내지 북벙뷸교 의 불화를 보면 삭발이 아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머리를 땋아 내린 헤어스타일이 거란식이라는 거지요 텡화를 시기적으로 보면 탱화의 주변인물들은 변함이 없는데 중심에 있는 주존불이 시기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는 예술이고 조상님 제사에서 무교 나오고 무교에서 모든 종교로 발전한것도 사실입니다 거란지도에 나오는 불림산 거기서 원시 고불교가 나오고 고불교에서 주술밀교가 나오고 주술밀교에서 주술도교와 배화교가 나온거라고 생각합니다
조상님의 제사는 무교에서 나온 게 아니라 도교에서 나왔죠.
사람이 수련을 통해서 신이 된다는 가장 기본교리가 도교입니다.
도를 닦아 승천을 하면 양신, 죽으면 음신 곧 귀신을 말하는 거죠
이 내용은 '부도지'의 제8장 내용과 비슷합니다.
청궁씨는 동쪽 운해주로가고 백소씨는 서쪽문 월식주로가고,흑소씨는 남족문 생성문으로가고,황궁씨는 북쪽문 천산주로가니 춥고 위험한땅이다.이는 스스로 위험과 고통을참아서 본성을회복코저하는맹세였다..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