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들어 세 번째로 문경새재행을 했습니다.
초등학생들과 함께 한 1박2일의 행사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지만
오리엔티어링이 가장 좋았습니다.
적지 않게 문경새재에 가 보았지만 구석구석을 둘러보지는 못하였는데
오리엔티어링 하면서 포인트를 찾다 보니
처음 발견하게 된 노거수, 유적들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여행지에서 대충 훑어보지 않고 천천히, 차근차근
숨겨진 보물들을 찾는 재미를 많이 느껴보아야겠다 싶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니 따뜻한 국물 생각이 많이 납니다.
특히 술 마신 다음날이면 칼칼하면서도 시원한 국물이 많이 당기지요.
며칠 전 얼큰한 국물이 생각나기에 아내에게 얘기했더니
평소 면 종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내가 도개의 유명한 짬뽕 전문 중국집에 가자더군요.
저야 원래 면 종류는 몇 끼를 달아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면을 좋아하니
당연히 동의하고 따라 나섰지요.
네비게이터에 찍어 보니 25km나 되는 장거리였습니다만
맛집 탐방에 거리가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짧지 않은 거리, 아직도 반 이상 남은 단풍잎은 여전히 고왔습니다.
그런데 웬걸, 도착해서 보니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개인 사정이 있어 금일 휴업이라는데
아내의 말을 들어보니 소문에 주인이 노름을 좋아해서 밤샌 날이면 이렇게 쉰다더군요.
맥이 빠졌습니다. 장장 25km의 거리를 맛있는 짬뽕만 생각하며 달려왔는데...
그보다 더 짜증났던 것은 다른 이유도 아니고
노름 때문에 식당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주인이자 주방장의 불성실함이 거슬렸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맛있어도 여기 짬뽕은 두 번 다시 찾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돌아섰는데
배고프다는 아내 때문에 멀리, 도리사 입구 버섯매운탕과 전골로 유명한
별난버섯집까지 가자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던 중에 아내가 한 집을 골랐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집, 메뉴도 특별하지 않은 집이었습니다만
배가 고프니 콩나물비빔밥이나 육회비빔밥, 청국장 중 아무거나 먹고 가자기에
맞은편 도개버스정류장 옆에 주차를 하고 무작정 들어갔습니다. 기대 않고...
그런데 들어서는 순간 주방 스크린커튼에 인쇄된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우리 집은 산야초를 발효시킨 효소로 음식을 만듭니다.
맛이 없으면 주인에게 얘기해 주시고
맛이 있으면 주위에 얘기해 주세요.‘
자부심과 내공이 느껴지는 글이었습니다. 당연히 마음에 쏙 들었지요.
원래 목표하였던 얼큰한 국물과는 달리 육회비빔밥을 주문하였습니다.
음식을 장만하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니
스크린커튼마다 수묵화의 톤으로-물론 직접 쓴 게 아니라 프린트한 것이었지만-
좋은 글과 그림이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이 서산대사의 해탈시가 포함된 ‘인생’이란 글이었습니다.
보고 또 보며 눈에 담고 머리에 새겼습니다. 그리고 사진으로도 남겼습니다.
20여분 뒤에 차려진 밥상, 옹기그릇에 담겨져 나온 두 가지의 김치와 나박김치,
찐 후 양념에 무쳐 내온 몇 가지의 나물 반찬,
놋그릇에 담겨 나온 육회비빔밥은 보는 것만으로도 식욕을 자극하였습니다.
참기름이 과하게 들어간 것 말고는 밥과 반찬 모두 맛이 있었습니다.
맛도 맛이려니와 ‘산야초 효소’란 글귀도 한 몫 했겠지요.
어찌되었건 아내가 한 그릇을 다 먹어치우는 밥집이 한곳 더 는 게 기분 좋았습니다.
성주의 왜관식당에 이어 두 번째로 그릇을 비우는 집을 찾았으니 말입니다.
그 식당의 이름은 명가식당입니다.
앞으로 도개를 지나게 되면 짬뽕집이 아닌 이 식당을 찾을 것입니다.
맛있게 먹고 나오면서 서산대사의 해탈시가 포함된 ‘인생’이란 글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인생을 관조하는, 무소유를 은근히 내비치는,
그러면서도 삶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물 흐르듯 하는 사유의 흐름 속에서
잠시 자신을 잊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글과 제일 마지막의 7언 절구는 분명 연결된 내용이 아님에도
인터넷을 뒤지고 책을 찾아보아도 그런 근거는 보이지 않았기에
그냥, 서산대사의 해탈시로 그대로 올립니다만 조금 찜찜합니다.
정확하지 않을 수 있는 출전, 조합된 글을 모셔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찜찜함을 뛰어넘어 그냥 전체 글이 주고자 하는 의미만 새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연히 찾은 맛집에서 좋은 글을 접한 그 당시의 행복감은 어떻게도 표현하긴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날의 미각과 가슴의 공명을 즐거운 마음으로 찬찬히 되새깁니다.
인생(모셔온 글)===============================
근심 걱정 없는 사람 누군고.
출세하기 싫은 사람 누군고.
시기 질투 없는 사람 누군고.
흉 허물없는 사람 누구겠소.
가난하다 서러워 말고
장애를 가졌다 기죽지 말고
못 배웠다 주눅 들지 마소
세상살이 다 거기서 거기외다
가진 거 많다 유세떨지 말고
건강하다 큰 소리 치지 말고
명예 얻었다 목에 힘주지 마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더이다
잠시 잠깐 다니러 온 이 세상
있고 없음을 편 가르지 말고
잘나고 못남을 평가하지 말고
얼기설기 어우러져 살다가 가세
다 바람 같은 거라오 뭘 그렇게 고민하오
만남의 기쁨이건 이별의 슬픔이건 다 한 순간이오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산들 바람이고
오해가 아무리 커도 비바람이라오
외로움이 아무리 지독해도 눈보라일 뿐이요
폭풍이 아무리 세도 지난 뒤엔 고요하듯
아무리 지극한 사연도 지난 뒤엔
쓸쓸한 바람만 맴돈다오 다 바람이라오
버릴 것은 버려야지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 하리요
줄 게 있으면 줘야지 가지고 있으면 뭐하노
내 것도 아닌데
삶도 내 것이라 하지마소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일 뿐인데
묶어 둔다고 그냥 오겠소
흐르는 세월 붙잡는다고 아니 가겠소
그저 부질없는 욕심일 뿐
삶에 억눌려 허리 한번 못 펴고
인생계급장 이마에 붙이고
뭐 그리 잘났다고 남의 것 탐내시오
훤한 대낮이 있으면 까만 밤하늘도 있지 않소
낮 밤이 바뀐다고 뭐 다른 게 있겠소
살다보면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다 있는 것
잠시 대역 연기 하는 것일 쁜
슬픈 표정 짓는다하여 뭐 달라지는 게 있소
기쁜 표정 짓는다하여 모든 게 기쁜 것만은 아니오
내 인생 네 인생 뭐 별거랍니까
바람처럼 구름처럼 흐르고 붙다 보면
멈추기도 하지 않소 그렇게 사는 겁니다
삶이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오
죽음이란 한조각 구름이 스러짐이오
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
죽고 살고 오고 감이 모두 그와 같도다
生也一片浮雲起 (생야일편부운기)
死也一片浮雲滅 (사야일편부운멸)
浮雲自體本無實 (부운자체본무실)
生死去來亦如然 (생사거래역여연)
- 서산대사께서 입적하기 직전 읊었다는 해탈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