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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떠났던 여인
왕하 8:1-6
1 엘리사가 이전에 아들을 다시 살려준 여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서 네 권속과 함께 거할만한 곳으로 가서 거하라 여호와께서 기근을 명하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년 동안 임하리라
2 여인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행하여 그 권속과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의 땅에 칠년을 우거하다가 칠년이 다하매 여인이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돌아와서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호소하려 하여 왕에게 나아갔더라
3 때에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 게하시와 서로 말씀하며 가로되 너는 엘리사의 행한 모든 큰 일을 내게 고하라 하니
4 게하시가 곧 엘리사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린 일을 왕에게 이야기 할 때에 그 다시 살린 아이의 어미가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왕에게 호소하는지라
5 게하시가 가로되 내 주 왕이여 이는 그 여인이요 저는 그 아들이니 곧 엘리사가 다시 살린 자니이다 왕이 그 여인에게 물으매 여인이 고한지라
6 왕이 저를 위하여 한 관리를 임명하여 가로되 무릇 이 여인에게 속한 것과 이 땅에서 떠날 때부터 이제까지 그 밭의 소출을 다 돌려주라 하였더라 (열왕기하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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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것은
자신이 자신 마음대로 자신을 주장하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환경에 따라서 산다고
쉽게 이야기 하지만,
환경이 사람을 못살게 구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에덴동산이 그립습니다.
에덴동산에는 환경들이 다 좋았고
고통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 살면서도
인간은 불만족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왜 저 선악과가
동산한가운데서 떡 버티고 서있어서
나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따먹지 마, 큰일나 !"
생각해봐요.
하나님이 뭔데 따먹지 말라고 하십니까?
당신이 뭔데 나를 간섭하나?
이런 생각이 안 들겠습니까?
한국 땅에도 많은 재벌도 있고
심지어 못산다는 인도에도
한국의 재벌들을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잘사는 재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고 풍족해도
사람을 못 살게 구는 것이
하나있습니다.
하나님이란 존재자체가
우리를 못살게 굴고
우리를 짜증나게 합니다.
당신이 뭔데 지옥을 만들어서
사람을 애 태우게 하느냐?
아예 지옥을 없애버리고
짧은 훈련기간만 수료하면
천국들어 갈수 있게 하면
그것이 자비로움이고
그것이 인자하심이 아니냐.
이렇게 대듭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형상대로 만들어 진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는
하나님 속에 있는 생각을 담아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그 속마음이 무엇이냐하면
지옥이 있고 천국도 있으며
천당 갈 사람도 있으면 지옥 갈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인간으로 하여금 구현해 내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지옥 갈 사람도 있고
천국 갈 사람도 생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은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자기마음대로 살지도 못하고
자기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자기를 만드신 분의 뜻대로
그분의 의도한 대로
존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
이해를 돕기위해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2장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어떤 말씀이냐 하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라고 합니다.
여기에 보면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분통을 터뜨립니다.
아브라함 입장이 되어서 봅시다.
하나님 자기가 뭔데 만들어 놓았으면
책임만 지면 되지
안정되고 편안하게 살고 있는 이 아브라함에게
왜 갑자기 부담되는 명령을 내리시느냐 하는 겁니다.
본토와 아비 집과 친척집을 떠나라고 합니다.
떠나면 무얼 먹고삽니까?
떠나면 혹시 하나님께서 미리
전령이라도 보내셔서 아브라함이 생활할수 있도록
준비해 놓으셨을까요?
과연 이들이 어떻게 살라는 말일까요?
우리가 아브라함이라도
짜증이 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걸음
하나님의 깊숙한 마음의 의중에 들어가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지고
어떤 자가 지옥 가고
어떤 자가 천당 가는가의
기준을 세우려고 하시는구나 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렇게 깊숙한 곳에 발을 담그면
여러분 얼마나 좋겠습니까?
앞에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직장이면 직장, 가정이면 가정,
사람은 그 직장과 그 가정이
나의 피붙이 같이 떠나기가 싫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떠나기가 싫다보니까
자연적으로 그런 환경을 조성하신
하나님이에 대한 반감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왜 원치 않는 환경을 만들어서
이렇게 주위에서 나를 괴롭게 만듭니까?
이런 짜증을 하나님께 돌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 동안 성경에 대해서
우리가 무지했구나.
성경에 아브라함도 안 그랬고
욥은 자식 열 명을 다 죽이고
재산을 다 없애고도 안 그랬으며
예레미야도 안 그랬는데
왜 나만 이렇게 평안해야하고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부리지?
우리가 성경에 돌아가서 들여다보면
택한백성들은 자신들이 원해서 간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천당 가고
어떤 사람은 지옥 가는지
우리를 표준으로 내 세우기 위해서
잠시 우리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도 자기 맘대로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자기 인생이라고 자기 인생을 함부로 평가할수 없는 것입니다.
남의 인생도 함부로 논해서 안되지만
내 인생 더럽다고 함부로 폄하하여,
낮추어서 얘기하지 말고
함부로 자기 인생을 저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욥은 자기인생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인생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함부로 내 인생 망가졌다 부셔졌다
나는 살 가치가 없다 이렇게 평가해서는 않되고
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 가치와 의미가 있는 지
하나님 판단 기준으로 보아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내 의미, 내 가치가 아니어서
속이 상하지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는
어쩔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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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들어가면 마찬가지입니다.
8장 1절에 보면,
"엘리사가 이전에 아들을
다시 살려준 여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서 네 권속과 함께
거할만한 곳으로 가서 거하라
여호와께서 기근을 명하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 년 동안 임하리라"
하나님께서 전에 아들을 살려 주었던
그 여인에게 오셔서
이제는 이 본토를 떠나라고 하십니다.
이곳에 큰 가뭄이 온다고
엘리사는 찾아와서 이야기합니다.
정말 제가 봐도
엘리사가 이 아주머니한테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괴롭힐 수 있습니까?
전에 이 아주머니에게 아들이 없는 것을
아들을 준다해서 그때는 굉장히 좋았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잘 해주니까
이렇게 복을 주는구나 라고 좋아하면서
그 아들과 재미있게 살고 있는데
그만 그 아들을 하나님께서 죽이십니다.
그때 혼이 난 것을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할 것입니다.
그 때 내 아들 죽은 것 생각하면
지금도 되새기기 싫은데,
그 아들 죽여 놓고
다시 살렸다 말입니다.
죽은 아들이 다시 산 것은
기쁘기는 기쁘지만
처음부터 아예 안 죽이시면
가슴이야 덜렁 내려앉는 일은
없을 것 않겠습니까?
그래서 아마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를 찾아오는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다닐 때
담임선생님께서 가정을 방문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미리 연락받게되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걱정이 앞섭니다.
내 개판 치는 것 아시고 주께서 이 목사를 보내셨구나. 아이구~ 가만히 있어도 내 잘못 아는데 구태여 주의 종 보내어 내 신앙생활 소홀히 하는 것 질책하는구나. 가슴이 덜렁 내려앉을까 싶어서 제가 먼저 심방을 안 하잖아요. 참 핑계는 멋있는 핑계입니다 만은 목회의 게으름을 저는 이런 식으로 핑계 댑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찾아온다, 하나님의 기적이 떨어진다? 여러분 좋아하지 마세요. 아구~ 가만히 좀 내버려줘요, 내가 어떻게 살던지 내 숨어살던지 내 무슨 짓을 하던지 하나님 나를 내버려두세요. 하나님은 눈도 밝아, 눈도 밝아요. 우째 알았노, 하나님이 진저리나.... 여러분 이런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성경에 나오는 이 아주머니나 모든 사람들이 똑같습니다. 흔히 천주교에서 마리아를 높이지만 여러분 마리아가 처녀 때 아기를 낳는 그 고통은 생각해 보았습니까? 과연 그 임신이 대문에 고추를 매달 정도로 자랑거리가 되었겠습니까? 칭찬할 입장이었겠습니까? 이것은 억울하게 당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자기 몸 속에 잉태한 다는 사실이 얼마나 창피스러웠겠습니까? 마리아의 창피스런 환경을 만드는 것은 그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가 나중에 사람들에게 창피스러운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앞당겨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창피스러운 십자가에 그 창피스러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에 예수 믿는 우리들도 동일한 운명 속에 하나님께서 집어넣어 버리십니다.
성경 말씀에 예수라는 이름 때문에 비난을 받으면 너희가 복을 받는다는 것이 왜 있습니까?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식사할 때 기도하는 것 때문에, 남한데 모독 받고 군에 가서 담배 안 피우는 것 때문에 우리가 무시당하고, 회식자리에서 우리가 술 안 먹는다고 폭탄주 안 마신다고 예수부터 때 서러움을 당하고, '예수 믿는 놈이 일을 그 따위 식으로 하나' 라고 하면서 갑자기 일 못한다고 하면서 욕 얻어먹고 이런 수모 속에 놓일 때 이 지경 그리고 이 신세가 바로 이 아주머니의 신세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똑 같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이 땅에 천당 갈 사람 따로 있고 지옥 갈 사람 따로 있는 겁니다.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어떻게 구별하는 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벌을 내린다고 하나님께서 축복과 저주의 기준으로써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세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런 점에서 의미를 찾아야 됩니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간에 이 아주머니는 낭패를 당하고 있습니다. 땅을 잃었습니다. 땅을 상실했습니다. 금방 결혼한 신혼부부에서 가장 서러운 것이 뭐냐하면 집 없는 것입니다. 빨리 벌어서 집 장만해야지. 쫓겨다니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정말 집 없는 서러움 안 당해보면 모릅니다. 도시에 가면 옆집이랑 비교를 하게 되지요. 남들처럼 살고 싶거든요. 넓은 아파트에서 골프 연습하는 것 보면 자기도 하고 싶다 말입니다. 사람이 그런 포부도 없이 살면 무슨 재미로 사나 이거거든요.
그래서 땅이 없고 집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하면 내 소유가 없다. 나만의 것이 없다 나의 것이 없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아비 친척집을 떠나라 했을 때 아브라함은 그 순간에 느끼는 것은 죽음입니다. 아... 이제 죽었다. 이제 내 힘으로 사는 것은 없다. 하나님이 인도해 주고 살려주면 사는 것이고 하나님이 너와 이제부터 같이 안 논다하면 그 순간부터 나는 죽음이다. 이러한 황당한 환경에다 내 몰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알다시피 성경에 보니까 세상에.... 없는 데서도 있게 하시고 죽은 데서 살리시는 그 기적과 기적의 연쇄고리로서 아브라함을 개 몰 듯이 몰고 있더란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이 있었습니까? 없는데서 있었잖아요. 아브라함이 외지에서 초죽음을 당할 때 갑자기 그쪽에 있던 추장들이 도와주잖아요. 남이 양을 쳐도 남지 않는데 아브라함은 양을 쳐도 수 천 마리 생산되잖아요. 소를 쳐도 그렇고 우물도 그렇고 한 자국 한 자국이 그저 하나님의 기적과 기적의 지뢰를 밟고 사는 것 같습니다. 지뢰를 밟으니 축복이고 밟으니 축복이며 모든 것이 기적이며 기적이고 그런 식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몰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은 별칭이 붙지요. 무어라고?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다' 라는 것입니다.
장차 예수 믿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예수 믿는 자도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고 예수 믿는 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천국가게 하는 하나의 인도하는 길이다라고 성경은 보고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광야로 몰아 넣습니다. 농사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수십만이 넘습니다. 어디서 양식을 구하며 어디서 물을 구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면서 때 따라 물을 주시고 때 따라 양식 만나를 주셨지요. 이것은 무얼 뜻하느냐하면 하나님은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믿음이란 것은 보이지 않는데서 믿는 것이 믿음이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물론 말 자체는 참 쉽네요.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여우도 굴이 있고 참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나는 굴도 없고 보금자리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으로 사셨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자체가 자신의 양식이 되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그냥 나는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까 마리아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여러분이 마리아 입장이 되어보세요. 신세 타령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나오지요. 그 아이를 누가 키웁니까. 기가 찰 노릇입니다. 물론 좋은 남편을 만나서 잘 이해해 주고 성령께서 잉태했구나 라는 말도 안 되는 것을 믿어서 도와주었습니다만 나중에 그 아들이 어머니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 입장에서도 이런 예수님 장성할 때까지 키워놓으셨는데 이제 며느리 봐서 호강하고 싶은 생각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 낙(樂)도 있어야 할텐데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십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정말 무책임하게 자식 노릇도 안 하면서도 남들보고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시니까 듣는 우리로서는 조금 헷갈리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어머니를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 나라는 내게 속하는 자들이다라는 이상한 말을 하면서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믿어서 어쩌란 말입니까? 우리도 부모를 버리란 말입니까?
이처럼 황당무계한 중국소설 같은 것이 오늘 본문에도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여자여 이 땅을 떠나라 친척을 떠나라 가뭄이 들어온다. 떠나거라. 자.....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그것은 인간의 근원을 다시 보게됩니다. 그것은 죽음 그 자체입니다.
저는 가끔 이런 마음을 가져 봅니다. 어떤 상대를 만날 때 내 나이 97이고 상대는 98인데 둘 다 방금 만났습니다. 서로 빌빌거리면서 하는 대화는 무엇이겠습니까? 내일 죽을지 모래 죽을지 모를 이 때에 말입니다. 상대방과 무슨 대화를 나누겠습니까? 여보게 우리 죽으면 어디가나? 죽으면 예수 믿으니 천당가지. 그렇지 너도 믿나? 벌써 믿었다. 나도 벌써 믿었다. 여보게 우리 기쁨의 춤이나 출까. 이것이 대화가 아니겠어요? 둘 다 같이 죽음의 공간을 근원으로 깔고 대화하고 있습니다. 이 때 도리어 죽음이 겁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는 가운데서도 희망의 대화를 끄집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슬픔이 달아나고 기쁨과 희망밖에 남지 않지요.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그리고 그것도 지금 두 시간 뒤에 죽는다고 한다면 목사라는 이 위치에 무엇을 연연하겠습니까? 이 세상에 살다가 죽음이라는 것을 중간에 마중에 나오기 마련인데 우리는 반갑게 맞이할 마음 준비를 늘 갖추어야 되지 않을까요? 그 때 오히려 인간은 최고의 기쁨에 도달한 순간입니다.
남이 볼 때에 이 아주머니는 최고의 낭패를 당한 것이지요. 땅을 잃었으니까요. 그러나 아주머니는 아들과 함께 삶의 공간을 떠나 그 죽음의 운명을 기꺼이 수용합니다. 즉 진짜 나의 본질을 접하면서 새로 사는 것이지요. 땅에서 빌어먹고 사는 것이 인간이기에 이 땅을 포기하는 것은 자기의 근원을 찾아 떠나는 새로운 인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 어차피 나는 죽도록 되어 있는 존재이다. 이제 그 나의 본질이 나를 찾아들었구나 그렇다면 진짜 나는 누구인가?
여러분, C F에 보면 "아버지 내가 누구에요? 나도 몰라" 라고 하잖아요. 여러분, 여러분이 누구냐 하는 것은 여러분이 죽는 순간에 압니다. 나는 누구냐? 너는 누구냐? 우리는 모두 죽어야 되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살려준다는 것은 공짜로 살려주는 것 외에는 우리는 죽음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살려준다면 우리는 횡재한 것입니다. 살려줌을 받았다면 우리는 땡 잡은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영생의 기쁨은 우리의 밑바닥을 죽음이라는 밑바닥에 설 때만 이것이 나의 본질로 스며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외의 것은 허상으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지긋지긋한 엘리사가 찾아와서 너 땅 없다 아브라함이 따로 있더냐! 너가 바로 아브라함이다. 예수가 따로 있더냐? 너가 예수다. 라고 독촉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그냥 스치고 지나갈 수 있는 말씀에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쫓으니라" (마 4:19,20)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쫓는 것은 곧 직장을 버려 두고 간 것입니다. 우리가 편하게 그냥 쉽게 읽기 쉬운 성경이었습니다. 남의 이야기라고 그런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얼마나 자주 대했던 말씀입니까? 그런데 막상 우리 자신이 이런 위치에 있다고 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느끼게 됩니까? 죽음을 느끼고 죽음을 느낀 동시에 인간은 무엇이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지요. 산다고 해서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이처럼 죽어 가는 자아와 이 자아를 누군가가 생명으로 배후에서 바쳐주기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죽음이라는 것을 나의 본질로 삼아 늘 새기고 또 새겨야합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가 인생의 모든 괴로움과 고통이 어디서 나오느냐하면 자기의 본질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자기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고민도 생기고 걱정도 생기고 불안도 생기고 괴로움도 생기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이제 하나님 밖에 없다 내가 나 자신을 살리는 식은 이제 없다 내가 나 자신을 위대하게 하는 것도 이제는 없다. 자... 하나님! 나를 죽이든 살리든 하나님 알아서 해주세요.
왜 우리는 예수님 제자 같은 이런 마음을 못 가집니까? 교회만 들락거린다고 신앙인입니까?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가지면 죽이든 살리든 내일이 내 것입니까? 오늘도 내 것이 아닌데 말이죠. 죽이 되든 밥이 되는 알아서 해주세요. 바로 이 아주머니가 가진 입장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제자들,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에게 끝이 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면 추방당하고 모든 것을 상실한 것 같지만 내용을 보니까 오히려 큰 것을 얻었습니다.
그 큰 것이 어디 있나하면 계시록 1장 12-17절에 보면,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도 요한은 우리가 알다시피 아비 집을 버리고 친척집을 버리고 모든 것을 버려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니 우리 같은 제 삼자가 보기에는 그 사람이 형편없는 실패자로 보이지요. 그러나 막상 사도 요한이 본 것은 감히 세상사람들이 감히 꿈도 꾸지 못한 것을 보았으며 그 분은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벌써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어냐 하면 영광스런 예수님의 자태였습니다. 그 영광스러움이었고 찬란함이었습니다. 정말 세상 부러울 것 없다 말입니다.
다시 얘기하면 제자들이란 모든 것을 상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맞습니다. 아비자기 집을 떠났어요. 맞습니다. 돈도 없어요. 맞습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누구하나 대우해 준 사람 없습니다. 맞습니다. 실패한 인간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세상의 천하보다 귀한 것을 쭉 모시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영광을 눈 부셔 가지고 하나님과 자기사이에 독대 하는데 예수님의 영광이 끼어 들면서 그 영광에 파묻혀서 감격스러워서 너무 좋아서 죽은 자 같이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굶어죽으려고 엎드려있는 것이 아니고 아무 것도 없기에 자살하고 싶어서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영광을 내가 알게 되었다는 것, 주님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이 사실 때문에 너무 좋아서 감히 얼굴도 못 들고 좋아서 지금 쥐 죽은 듯 엎드려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들 보기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지만 사실은 사도 요한은 천국을 몽땅 얻은 것이고 예수님을 몽땅 얻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 오늘 본문에 돌아가서 이 여자는 무엇을 얻었나 봅시다. 이 여자가 7년 동안 바깥에 나갔지요. 하루는 임금님이 엘리사의 사환을 불러서 이야기를 합니다. 너의 선생 엘리사가 대단하다던데 도대체 무슨 무슨 일을 했나? 임금님! 임금님은 상상도 안 될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죽은 아들이 살아났다 구요. 그 정도로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믿기 어려운데 ....아무리 하나님의 사자라지만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아난다 말이냐. 이렇게 하고 있을 때 마침 어떤 여인이 찾아와서 호소를 합니다. 임금님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내 땅을 나두고 다른 나라 블레셋 땅에 7년 동안 기거하다가 마감하고 오니 내 땅을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데 그 땅, 내 땅으로 돌려주세요 라고 합니다. 그때 게하시가 하는 말이 이 여인이 하나님의 일에 있어 죽은 아들을 살렸던 그 아들의 어미입니다 라고 소개합니다. 그럴 때 임금님이 하는 말이 그 말을 확신하고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이다 라고 외칩니다. 무슨 말이고 하면 그 여인의 땅만 은혜의 땅이 아니고 이 땅.... 내가 딛고 있는 이스라엘, 통째로 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있는 땅이다. 이 땅이 그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셨기에 내 땅이 된 것이다. 없는데서 생긴 땅이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그저 주신 땅이다. 이 그저 주신 땅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상실한 이 여인이 다시 이 땅으로 되돌아왔다. 이런 차원을 깨달은 왕은 그 여인의 땅을 돌려주기 위해 특별히 관리를 임명하면서까지 업무를 전담시키면서 본 땅을 돌려주고 7년 동안 소출 한 것도 소급하여 돌려주라고 합니다. 임금님이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이지요.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아는 자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어떤 사람은 천당 가고 어떤 사람은 지옥 간다고. 여러분을 내세워서 기준을 삼는다고. 여러분 어떤 기준을 보여 줄 것입니까? 지금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이런 마음이 있어야지요. 다른 사람은 무시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네가 은혜를 제대로 아는구나. 네 속에 죽음에서 다시 살리심을 주시는 주님의 생명이 약동하는 구나. 너는 은혜가 무언지 아는구나.
은혜가 출렁이는구나.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재미고 성도가 사는 이유가 아니고 무어겠습니까? 그 여인은 소유를 버렸다고 했지만 본디 사람이란 소유로 인해 우상을 만듭니다. 그 소유가 내 것이라고 하는 그 순간부터 그 소유된 것이 우상처럼 버티고 있기에 은혜가 은혜로서 들어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좁은 방에 있는데 엉덩이가 커다란 사람이 앉아 버리면 우리들이 앉을 자리가 없어지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속에 나는 죽는 것은 나의 본질인데 내가 산 것은 몽땅 은혜다 라고 해야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자만심 때문에, 이건 누구한테도 양보 못하는 내 것이다 이것은 누구한테도 양보 못하는 나의 영광이야. 나도 자존심이 있는 거야 하고 차지해버리면 일이 조금만 꼬여도 하나님께 원망,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안되어도 하나님께 짜증, 남이 나를 안 알아 주어도 하나님께 분노, 이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아이구~ 천당 가는 사람 저렇게 해 가지고 천당가나? 천당 가는 사람이 저래가지고 가느냐 말이야. 너 고집과 자존심을 세워놓고 천당 간다고? 무슨 자존심이 그렇게 세노. 이렇게 빈정대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여러분들이 천국의 문을 가로막는 일이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아주머니처럼 되더라도 내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고 해야합니다. 제가 처음에 이야기 한 것처럼 내 인생 내 마음대로 못한다고 내 인생 내 마음대로 못해요, 하나님께서 무슨 장난을 치려는지 아무도 장담 못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한평생 살면서 아프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씁니까? 그러나 아픈데 어쩝니까? 우리가 건강할 때 아픈 사람 얼마나 빈정대고 놀렸습니까? 아이 못 난 사람아, 그래 감기 한번 못 이겨 가지고 ..그러나 언제 감기바이러스가 와서 감기 들련 지 우리도 장담 못합니다.
장담 못할 우리 인생, 그것이 무엇 자랑스럽다고 내세웁니까? 그 자만심만 쥐고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 다 까먹고 지옥 가서야 되겠습니까? 아주머니 만세 입니다. 아무 것도 없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그런 제2의 아주머니 제3의 아주머니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주님의 찬란한 영광이 꽉 차여져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