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일기(53) - <밀양역>, 추억을 심다
1. <밀양역>, 이곳은 6개월의 단기거주 기간 중 가장 많이 방문한 역일 것이다. 하지만 밀양을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다. 밀양역에 온 이유가 이곳에서 김해와 양산 쪽으로 가는 열차를 환승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단기거주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밀양을 천천히 돌아보기로 했다. 밀양은 다양한 문화적 콘텐츠뿐만 아니라 수많은 역사적 문화재가 현재 도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멋진 역사문화의 고장이다.
2. 역시 밀양의 대표적인 문화재는 밀양강 곁에 우뚝 서있는 <영남루>일 것이다.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조선의 3대 누각으로 불리는 이곳은 누각 곳곳에 남아있는 선조들의 수많은 멋진 글귀와 함께 누각에서 바라보는 광활하면서도 청풍한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공간이다. 조선의 건축물은 건물 자체보다도 그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의 묘미가 우선이라는 말이 있지만, <영남루>는 건물의 세련된 웅장함과 경관의 시원스러운 풍요로움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최고의 장소였다. 한 30분 영남루 마루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기둥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여행의 피로를 씻어주면서 한순간의 여유를 선물로 주었다.
영남루 주변은 과거로 돌아가는 역사의 현장이다. 영남루 바로 앞에는 단군을 비롯하여 삼국시대의 시조들을 모시고 있는 <천진궁>이 있고, 공원 위쪽에는 밀양이 배출한 위대한 투사이자 협상가인 사명당 유정의 동상이 자리잡았으며, 좀 더 이동하면 밀양의 번성했던 과거를 인식하게 해주는 읍성과 동헌을 살펴볼 수 있다. 다양한 문화적 흔적이 현재적 의미로 살아나는 곳이 바로 밀양이었다. 유적의 아름다움보다도 더 흥미로웠던 것은 산 정상 가까이에 마치 궁궐처럼 솟아있는 <밀양여고> 건물이었다. 밀양의 모든 장소를 내려볼 수 있는 장소에서 밀양의 상징처럼 서있는 이 학교의 모습은 그 자체로는 장관이겠지만, 그곳을 오르내려야 했던 여학생들의 힘든 등학교 시간이 조금은 걱정스러워보였다. 누군가의 말처럼 밀양여고 학생들은 종아리만 보면 알 수 있다는 농담이 과장되어 보이지 않는다.
3. 동헌에서 조금 이동하면 밀양의 특별한 장소를 만나게 된다. 바로 밀양의 또 다른 위대한 투사였던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의 거리이다. 밀양은 한국 독립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했던 사람들은 투쟁방법을 두고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외교협상을 중시했던 그룹과 군대를 양성하려 했던 그룹 그리고 테러방식의 공격을 통해 일본에 위협을 주려했던 그룹으로 나뉘어졌던 것이다. 밀양은 그중에서도 실질적으로 일본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무장투쟁을 통해 공격을 해야만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3.1운동 이후 밀양의 김원봉을 비롯한 밀양인들을 중심으로 <의열단>을 조직하고 계속적으로 일본 침략주의와 투쟁했으며 나중에는 <조선의용대>를 설치하여 투쟁의 강도를 높이게 된다. 가장 치열하고 처절한 투쟁의 중심에는 ‘의열단’과 밀양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의열단 기념관’을 장식하고 있는 30명 가까운 독립투사들의 이름들은 밀양의 위대한 과거를 조명하고 있었다.
4. 하지만 현재 윤석열 정부의 이념적 편향성에 비추어 본다면, 김원봉과 의열단은 위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를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핍박하고 모멸하는 현 정부의 극우적인 태도는 ‘김원봉’에 대해서는 더 철저하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김원봉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고위직을 맡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의 혼란한 시기는 무엇인 옳고 적절한 국가의 형태인지에 대해 명확한 방향이 수립되지 않은 시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국가에 대해 고민하였고 시험하였던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민주주의’의 가치를 발견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오직 현재적 관점에서 과거의 행태를 일면적으로 인식한다면, 일제강점기에 투쟁했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였던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행위는 소멸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을 일본의 부역배들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독립투쟁’의 진정한 의미를 당시의 관점과 시대적 상황에 의해 판단하여야 하는 이유이다.
기념관 내부에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는 독립투사들의 얼굴들을 본다. 오직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 다시 위협에 빠져있다. 그것도 현재의 권력자들이 앞장서서 일본 극우파의 논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독립투쟁의 정당한 의미를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의 전개는 불행한 한국 사회의 현재를 증거해 준다. 밀양사람들, <의열단 기념관>과 김원봉 동상을 통해 김원봉과 의열단의 독립투쟁을 자랑스러워했던 밀양사람들은 현재의 윤석열 정부의 ‘사회주의 세력“의 독립투쟁에 대한 비판과 멸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의열단 거리의 한산함과 함께 ’씁쓸함‘이 배어나오는 듯하다.
5. 밀양역으로 다시 돌아왔다. 4시간 가까이 걸어서인지 조금은 피로했다. 역 앞은 쇠퇴하고 있다. 특별한 식당도 눈에 띄지 않는다. 작은 국수 가게에서 부추전과 막걸리를 마셨다. 소박한 즐거움이다. 밀양역을 떠나기 전에 꼭 방문하고 싶은 장소로 갔다. 과거 영화 <밀양>을 촬영했던 <카페 밀양>이다. <밀양>은 용서와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종교적인 시각과 인간적인 시각을 통해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주제가 던지는 무게와 함께 결코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었다. 그 작품을 통해 전도연은 2007년 칸느 여우주연상을 획득했다. 카페 외부에는 영화 포스터와 배우들의 사진이 장식되어 있었다. 카페에 들어가 딸기주스를 주문하고 몇 마디 나누었다. 오래전의 일이기에 주인들은 당시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밀양과 영화에 대하여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우연하게 <밀양>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다고 한다. 나 같은 사람들이 간혹 있는가 보다. 영화 뿐 아니라 ’밀양‘에 대하여 궁금했던 몇 가지도 물어보았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카페‘가 유지되기를 기원했다. 언제 다시 올지 몰라도 추억을 심은 장소가 남아있다는 그 자체로 그 장소는 언제든지 나에게는 특별한 장소를 남기 때문이다. 그렇게 ’밀양‘은 특별한 곳이 되었다. 그곳에는 ’추억‘이 심어져 있다. 장소와 사람들이....
첫댓글 - 지나간 시간들의 쓸쓸함과 아쉬움 그리고 허망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