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푸른 언덕에 베낭을 메고
황금빛 태양 축제를 여는 광야를 향해서
계곡을 향해서
먼동이 트는 이른 아침에
도시의 소음 수많은 사람 빌딩 숲속을
벗어나봐요
메아리 소리가 들려오는 계곡속의 흐르는
물찾아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요
메아리 소리가 들려오는 계곡속의 흐르는
물찾아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요
굽이 또굽이 깊은 산중에
시원한 바람 나를 반기네 하늘을 보며
노래부르세
메아리 소리가 들려오는 계곡속의 흐르는
물찾아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요
굽이 또굽이 깊은 산중에
시원한 바람 나를 반기네 하늘을 보며
노래부르세
메아리 소리가 들려오는 계곡속의 흐르는
물찾아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요
여행을 떠나요 즐거운 마음으로 모두함께
떠나요
*
메아리 소리가 들려오는 계곡속의 흐르는
물찾아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요!
조용필 趙容弼, 1950. 3. 21 ~
경기도 화성군에서 태어난 70~80년대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로 군림했던 대중 음악가이다. 원래 기타 연주자였으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후 내놓은 앨범마다 신선한 음악으로 전국민의 인기를 한몸에 받은 가수로의 명성을 쌓았다. 한국 가요계 최초로 오빠부대를 끌고 다닌 가수이다. 첫 앨범 《창밖의 여자》는 한국 최초로 100만장 이상 팔린 단일 앨범이며, 그 자신 역시 한국 최초로 1000만장 이상의 앨범을 판매한 가수이다.
80년대에는 일본 가요계에도 진출하여, 1986년 일본 발매 앨범 《추억의 미아 1》 100만장 판매로 골든디스크를 수상하는 등의 성공을 거두었다. 조용필은 현재 '민족혼을 부르는 가수'라고 하거나 모든 세대를 아우르던 '80년대의 가왕'이라고 불리는 것과 달리 앞에 나서서 노래 부른 기억이 거의 없는 평범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그는 맹인가수 레이 찰슨의 「당신에 대한 사랑 멈출수없어」(I Can't Stop Loving You)의 목소리에 감명받아 팝음악광이 되었고, 내한공연을 한 벤처스의 「상하이 트위스트」「파이프라인」「불독」등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기타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음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염전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경기도 화성군의 송산 중학교 설립자로 교육자 집안에 연예인이 나오는 것을 몹시 반대했다. 그러나 반대가 심할수록 그의 결심은 굳어져갔다. 대입준비 대신에 음악학원을 드나들던 그는 졸업하자 마자 뜻을 같이한 친구들과 가출해 파주의 기지촌을 기웃거렸다. 오디션에 합격해 무대에 설 수있었지만 단 하룻만에 해고되었다. 열댓곡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것으론 어림없었다. 45분씩 하루 6차례이상 서야하는 무대라 100여곡이 준비되어 있어야 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대로 물러설수 없다며 연습에 열중한지 얼마지 않아 부모들이 찾아와 멤버들은 모두 흩어지고 만다. 혼자가 된 조용필은 다시 문산근처 기지촌에서 무명밴드에서 연주를 시작한다.그러다가 69년초 '파이브 핑거스'에 스카웃 돼 미8군무대에 서게 된다. '파이브 핑거스'밴드는 A클라스의 평가를 받고 있는 유명한 팀으로 실력있는 그룹의 집합장소였던 이태원까지 진출한 팀이다. 그러나 1년반동안의 활동은 집에서 형이 그를 찾아오는 것으로 마감됐다.
그러나 '파이브 핑거스'의 활동은 제임스 브라운, 윌슨 피케트, 템테이션 등 흑인음악에 심취하는 등 조용필에게 뮤지션으로서 커다란 전환점이 됐다. 이즈음 기타리스트로 연주하던 조용필이 가수로 변신하게되는 계기가 생긴다.다시 두번째 가출을 감행한 조용필은 친구의 부탁으로, 한 무명 밴드에서 대타로 노래까지 하게 되었다. 평소 주로 「점핑 잭 프레쉬」(Jumping Jack Fresh)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때」(When a Man Loves a Woman) 「아이 필 굿」(I Feel Good)등 소울풍 노래를 주로 불렀는데 어느날 한미군병사가 생일 축하곡으로 재즈뮤지션 바비 블랜드의 「리드 미 온」(Lead Me On)을 부탁해 노래를 불렀다.
이후 이곡은 조용필의 주요 레파토리가 되었다. 70년 말 조용필은 '에드훠' 출신 드러머 김대환과 이남이 등과 함께 '김트리오'로 활동한다. 그는 후에 김트리오에 합류한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과 투 기타 시스템으로 기타나 보컬면에서 선의의 경쟁을 하며 실력을 쌓아갔다. '김트리오'는 수준급 밴드로 인정받았고 이듬해 '사랑의 자장가','하얀모래의 꿈','님이여'등 6곡이 담긴 앨범을 출반했으나 발매가 되지않아 기념음반이 되었다. 이때 그는 프리재즈를 하던 강태환에게 '청음'(곡을 듣고 채보하는것)을 배우기도 했다.
72년 이미 세상은 고고취향으로 바뀌어 팀의 색깔과 다른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매니저격이던 김대환이 재즈를 하겠다며 손을 떼면서 팀이 해체된다. 그후 조용필은 브라스팝밴드였던 초기 '시카고'의 음악에 매료되어 처음으로 독자적으로 그룹을 결성한다. 그것이 트럼본 둘, 트럼펫 둘, 건반, 기타, 베이스, 드럼 등 시카고와 동일한 편성의 8인조로 이뤄진 '조용필과 그림자' 이다. '조용필과 그림자'는 서울 일류 고고클럽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군복무를 마칠때쯤 킹레코드사로부터 취입 제안을 받는다.그래서 발매된것이 76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이다.
이곡은 72년초 '김트리오' 시절 이남이와 함께 통기타를 연주하며 불렀던 곡이었는데 당시 4분의 2박자 '뽕짝'이었던 것을 젊은취향의 4분의 4박자로 편곡, 국내 최초의 트롯고고를 시도한 것이었는데 처음엔 반응이 시원찮았다. 그러다 서서히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마침 재일동포 모국 방문으로 그 인기를 더했다. 그렇게 부산에서의 인기가 서울로 올라오며 전국을 휩쓸었다. 조용필이란 이름이 유명해지기 시작하자 얼마지 않아 조용필이 대마초 가수라는 투서가 들어왔고 소문이 돌았다. 75년 12월 대마초 파동이 연예가를 휩쓸었을 때 조용필 역시 구속되었다.
과거에 뭔지도 모르고 피우다가 알레르기 반응이 생겨 곧 중단하긴 했어도 대마초를 몇차례 피웠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무명이었고 죄가 경미해 활동금지는 면했었지만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인기가수 대열에 서자 과거 경력이 다시 문제가 되었고 결국 다른 가수들처럼 79년 완전 해금까지 활동금지가수로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조용필은 '한 오백년'을 우연히 듣고는 그길로 그야말로 피나는 발성연습에 들어갔다. 반년 가까이 전국 각지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수차례 피를 토한 끝에 3옥타브 5음계까지 음폭을 넓혔고 진성에 탁성과 가성까지 겸비하여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창법을 개발했다.
득음의 단계에 이른 것이다. 과거에는 도저히 되지 않았던 허스키 보이스로 로드스튜어트의 노래를 맘껏 부를 수 있었고 흥보가의 한장면인 '흥부가 놀부에게 구걸하는 장면'도 원래 판소리보다 멋들어지게 불러제낄 수 있었다. 대마초 사건은 조용필에게 그의 음악인생이 끝난것이라는 생각으로 좌절하게 하였지만 음악적 수련의 시간을 마련해주었고 결국 그의 가수로서의 새로운 능력을 쌓게 하기도 했던 것이다. 78년4월 대마초 가수들의 활동 완화 조치가 발표됐다. 방송을 제외한 무대에 설 수 있게된 조용필은 바로 멤버들을 모아 클럽에서 활동하며 죽기살기로 연습에 몰입한다.
엄청난 연습에 지쳐 멤버 교체가 몇차례 있었고 대마초가수 이미지를 벗기 위해 외국곡만을 고집하는 그룹이었지만 꾸준한 연습으로 음악인들 사이에서 '완전한 그룹' 알려졌다. 그러나 79년 10.26이 터지고 계엄상황에서 야간 업소가 어려워지자 이들의 활동 역시 어려워 졌고 곧 멤버들은 흩어졌다. 혼자가 된 조용필은 그해 12월 해금을 맞는다. 그리고 얼마 후 동아방송 라디오 주제가 였던 '창밖에 여자'를 만들고 전속이던 지구레코드에서 앨범 준비에 들어간다.
그룹이름도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어두운 이름 대신 '위대한 탄생'으로 바꾸먀 이미지를 쇄신하고자 했다. '위대한 탄생'은 완벽한 레파토리를 구사하는 록그룹의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지옥훈련과도 같은 연습을 하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현악기나 관악기를 배제하고 신세사이저를 적극 사용했던 그룹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진보된 사운드에 세상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 가 들어간 1집은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하며 대히트를 하고 완벽한 조용필의 시대를 연다.
1980년 조용필은 무명의 그림자를 지우고 위대한 탄생을 하게 된다. 조용필은 80년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를 통해 사람들이 갈망하던 바로 그 노래들을 선보였다. 사람들은 그 이전에 듣던 노래와 전혀다른 80년대를 예감케하는 그 소리들에 열광했다. 그리고 그 노래들은 80년대를 열었다. 조용필은 그가 원하던 최고의 가수가 되었지만 그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음악의 약점을 알고있었으며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얻기위해 과감히 록으로 전환했다. 그는 자신이 목표로 하는 최고의 사운드를 얻기위해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서도 끊임없이 노력한다.
결국 5집에서 조용필은 그가 원하던 사운드와 메시지를 얻어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것은 외국 그룹이나 음악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판소리 창법 등 한국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 서양의 록을 친숙한 록으로 만들어갔다. 록을 듣으면서도 누구나가 이질감 없이 즐길 수 있는 한국적인 것으로 하기까지 조용필은 엄청난 노력을 한것이다. 흔히들 한국 가요의 미래를 이야기하며 서구 지향을 극복하고 '한국적인 음악'을 해야한다고 한다. 바로 그것을 조용필은 80년대 초반에 이루었다. 그는 명백히 5집에서 한국적인 서양음악을 만들었으며 그 음악으로 모든 세대를 하나로 묶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얻었다고 자만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 시점에서 새로운 자신만의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 또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조용필은 80년대에는 그 시대에 맞는 록사운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80년대의 감성을 얻기위해 최고의 멤버로 작업했고 7집에서 그것을 완성한다. 7집의 사운드 그것은 바로 '조용필 사운드' 이다. 7집에서 완성한 그 음악들은 이후 시대에 따라서 변화하기는 하지만 조용필의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바로 그것이되었다.
조용필은 7집의 위대한 탄생이 없었으면 자신은 없었다고까지 얘기한다. 그 이후 조용필은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한다. 8집에서 성인가요들이 대 히트한 이후 그에게 닥친 개인적 불행과 맞물려 그의 록넘버들은 힘을 잃었고 젊은 세대보다는 기성세대에 어필하는 곡들이 인기를 이어갔다. 그가 부진을 보이기 시작하던 80년대 말은 들국화, 시나위, 그리고 발라드와 신진 댄스 가수들이 물밀듯이 가요계에 들어오던 시기였다. 그것은 젊은 세대 진영이 조용필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것을 알고있는 조용필은 지구와 결별한 후 당시 최고의 유행 스타일인 팝발라드와 자신의 주요 스타일인 록을 바탕으로 다시 시대의 선두에 서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시대를 대표하지 못했으며 80년대의 선두자리에서 이제는 한 걸음 물러서고 있는 자신을 지켜봐야만 했다. 조용필이 다시 14집으로 선두를 노리고 있던 92년 초 서태지가 등장한다. 세상은 온통 테크노, 하우스, 힙합 등 랩댄스뮤직의 물결 이었다. 시대가 또 한번의 세대교체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조용필은 그가 가야할 방향들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자신의 길을 가야했으며 그의 선택은 발라드였다.
그러나 시대는 그를 더욱 멀리 밀어냈으며 위대한 탄생 멤버에게 일임한 15집의 참패로 그는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진다. 그 후에 조용필은 16집 '바람의 노래'와 17집 '친구의 아침' 으로 우리 곁에 다시 다가왔다. 비록 시대를 대표하진 못했지만 90년대에도 많은 히트곡이 있었다는 것은 그가 언제나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용필 그는 80년대 척박한 가요계에 누구도 다가서지 못할 만큼의 앞선 음악을 하며 시대를 이끌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슈퍼스타나 트로트 가수라는 이미지에 가려 올바로 평가받고 있지 못하다. 이제 그의 위대한 음악이 재평가 되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음원출처:http://www.monasft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