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景福34 제71차 文化遺産踏査; 雲峴宮-北村 韓屋마을(2-2); 北村 韓屋마을
서울 北村韓屋마을
서울 北村韓屋마을은 종로구 嘉會洞, 齋洞, 桂洞, 三淸洞 일대의 韓屋이 모여 있는 곳으로
景福宮과 昌德宮, 昌德宮 後苑 사이 北岳山 기슭에 있는 韓屋마을로 淸溪川과 鍾路의
북쪽동네라는 뜻으로 北村이라고 하며 高官大爵들과 王族, 士大夫들이 모여 거주해온
고급 살림집터로 한옥은 조선시대의 기와집이다.
黃玹의 <梅泉野錄>에 ‘서울의 大路인 鍾路以北을 北村이라고 부르며 老論이 살고 있고,
종로남쪽을 南村이라 하는데 少論 이하 三色이 섞여서 살았다.’고 기술하고 있듯이 北村이
權勢 있는 양반들이 주로 모여 살았던 데 비해, 南山 기슭을 중심으로 한 南村은 양반의
자손이긴 하나 몰락한 사람들이거나 科擧에 급제하지 못해 ‘남산골 샌님’, ‘남산골 딸깍발이’라고
놀림을 받았던 불우한 선비들과 下級官吏, 常人(平民)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北村韓屋마을은 일제강점기 말부터 韓屋을 많이 지었으며, 1992년 嘉會洞韓屋保存地區에서
해제되고, 1994년 高度제한이 풀리면서 일반건물들이 많이 들어섰다. 총 2,297동의 건물이
있는데, 이 가운데 1,408동이 韓屋이고 나머지는 일반건물이다.
북촌 거리에는 북촌양반생활문화전시관과 북촌 한옥촌 상징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으며,
주변에 景福宮∙昌德宮∙禁苑(창덕궁후원)∙三淸公園 등의 관광지가 있다.
北村韓屋마을에는 ‘北村八景’이 있으나 표지판이 없는지, 있어도 찾지 못했는지 제대로 보지
못하여 설명 내용은 다른 데서 찾아 본 자료를 참고하였다. 북촌마을 탐사길은 언덕길이 많아
오르내리기 힘들고 안내표지판을 제대로 찾지 못하여 ‘눈뜬 장님의 다리운동’을 많이 했다.
[북촌8경]
북촌1경 – 昌德宮全景
북촌2경 – 苑西洞工房길
북촌3경 – 嘉會洞 11번지 일대
북촌5경 – 가회동골목길(내림)
북촌6경 – 가회동골목길(오름)
북촌7경 – 가회동 31번지
북촌8경 – 三淸洞 돌계단길
北村韓屋마을 사진
(01) 제생원 터[濟生院址]
조선 초 庶民醫療機關이 있던 곳으로 極貧者 치료와 迷兒 보호를 맡았었는데 世祖 때
惠民署에 병합되었으며 朝鮮시대 말엽 이 터에 桂洞宮이 들어섰다.
(02) 계동궁터[桂洞宮址]
高宗 21년(1884) 甲申政變 때 古愚 金玉均 등의 강요로 昌德宮에서 景祐宮으로 居處를
옮긴 高宗은 近臣들이 開化黨에 의해 慘殺되는 광경을 목격하고 昌德宮으로 還宮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淸軍의 攻擊 時 防禦에 유리하여 경우궁보다 협소한 桂洞宮으로 다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祐: 복 우)
*景祐宮: 純祖의 生母 綏嬪 朴氏(正祖의 後宮)의 사당 (*綏: 편안할 수)
(03) 서울 관상감 관천대[서울 觀象監 觀天臺] -보물 제1740호-
世宗 16년(1434)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觀天臺는 書雲觀의
觀測臺로 小簡儀臺라고도 하며, 보통 瞻星臺라고 불렀는데
넓이 2.8m×2.5m, 높이 4.2m이다.
書雲觀은 觀象監, 觀象所, 測候所로 바뀌었으며 신라의 慶州
瞻星臺(국보 31호), 고려의 開城 滿月臺의 첨성대, 昌慶宮 觀天臺(보물 851호)와
더불어 귀중한 자료로 1983년 解體∙復元하였으며, 1982.03.26 사적 제296호로
지정된 관상감 관천대는 2011.07.28 서울 觀象監 觀天臺로 명칭이 변경 되었으며,
2011.12.23 보물 제1740호로 승격되었다.
*안내판에는 보물로 승격 된지 6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사적 제296호’ 표기가
그대로 있는데 관리관청의 無誠意를 넘어 업무태만이 너무하다.
(04) 苑西公園의 소나무
(05) 現代社屋 쪽에서 보이는 昌德宮(史蹟 제122호)
(06) 開天節 行事 發祥地
1909년 大倧敎에서 음력 10월 3일을 桓雄이 지상에 내려왔다고 開天節로
정하고 이곳에서 첫 행사를 치렀다. 1949년 대한민국 정부는 양력 10월 3일을
국경일로 정했다. [*倧: 상고(上古) 신인(神人) 종]
*大倧敎: 檀君을 敎祖로 하고 민족 고유의 하느님을 신앙하는 종교로,
근본 敎理는 性∙命∙精의 三眞歸一과 止∙調∙禁의 三法이다. 대종교는 종교로
출발하였으나 그 시기가 바로 日帝가 한국을 强占할 때였으므로, 종교로서보다는
항일독립운동에 더 많이 공헌했다고 볼 수 있다.
羅 喆 등 10명이 종로구 齋洞에서 ‘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함으로써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 이후 700년간 단절되었던 國祖 檀君을
숭앙하는 檀君敎를 창시하고, 1910년 敎徒 數는 2만여 명으로 늘었으며,
敎名을 ‘大倧敎’로 개칭하였다.
(07) 창덕궁길, 오른쪽 돌담 안은 昌德宮이다.
(08) 北村1景 – 昌德宮 全景
주위에 건물들이 들어서 昌德宮 全景은 잘 보이지 않으나 法殿인
昌德宮 仁政殿(국보 225호)은 잘 보인다.
(09) LG 上南圖書館
苑西洞에 있는 과학기술전문도서관으로, LG그룹 명예회장인 上南 具滋暻이
LG蓮庵文化財團에 기증한 저택을 기반으로 1996년 4월 개관하였다.
(10) 隱德文化院
圓佛敎에서 문화예술공간이자 道場으로 운영하고 있는 한옥으로, 전은덕 大護法이 자신의
집을 기증하여 隱德文化院이라고 한다. 내부 건물은 法堂인 大覺殿, 사무실과 茶室인
洗心堂, 숙소 四恩堂, 교류장소로 이용되는 仁和堂, 차를 마시며 談論을 펼치는
문화사랑방 살롱 마고 등이 있다.
隱德文化院은 2013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圓佛敎: 1916년 少太山 朴重彬이 창시한 한국의 新 佛敎로 一圓相(O의 모양)의 진리와
함께 불교의 생활화, 대중화, 시대화를 추구한다.
*大護法: 圓佛敎의 正法을 크게 호위한 在家敎徒에게 드리는 法勳.
*法勳: 원불교 교단의 창설과 발전에 많은 공적을 쌓은 분에게 드리는 훈장.
(11) 멋진 돌담
(12) 曜金門. 昌德宮 西北門.
太宗 때 건립하였으나 扁額이 없었으며, 成宗 때 徐居正이 ‘曜金門’이라고 作名했다.
肅宗의 繼妃 仁顯王后 閔氏가 廢庶人되어 흰 가마를 타고 요금문을 나와 安國坊 친정
感古堂으로 돌아간 곳이다.
(13) 창덕궁5길, 오른쪽 건물은 북촌단청공방
*北村丹靑工房
北村 김익홍, 改金匠 백태남의 자녀인 김도래가 운영하는 불교미술 專門工房으로
공방이름은 故 김익홍의 雅號인 北村에서 따온 것으로 북촌집안의 家業인 불교미술의
온전한 傳承을 위해 설립하였다.
(14) 紅染匠 -서울무형문화재 제49호-
*紅染匠: 조선시대 紅色 染織物을 전문으로 맡아 하는 京工匠으로 尙衣院에 10명,
濟用監에 10명 등 도합 20명이 있었다.
*서울시는 '홍염장'을 서울시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하고 김경열(남, 59세)을 보유자로
인정 고시했다. (2017.04.13)
(15) 사단법인 宮中飮食硏究院 앞에서
(16) 궁중음식연구원
朝鮮王朝 宮中飮食을 傳授하는 기관으로 1971년 설립하였다. 궁중음식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음식문화를 연구하고 계승하는 데 앞장섰던 전통 食文化 연구의 宗家로 제1대
기능보유자였던 한희순 상궁 생전에 설립된 이래 傳授敎育과 이를 바탕으로 한
정기 발표회, 조리서 출간, 궁중음식 관련 문헌연구 등을 하고 있다.
한희순 이후 그의 제자 黃慧性이 뒤를 이었으며, 황혜성이 사망한 뒤 宮中飮食
기능보유자인 그의 큰딸 韓福麗가 원장을 맡고 있다.
*朝鮮王朝宮中飮食 -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1970.12.30)-
조선왕조궁중음식은 高麗王朝의 전통을 이어 온 조선시대 궁궐에서 차리던 음식으로
전통적인 한국음식을 대표한다.
(17) 苑西洞 빨래터
昌德宮 新璿源殿의 外三門 우측 창덕궁 담장 아래로 흐르는 개울에 마련된 빨래터이다.
宮內의 물이 궁궐담장을 통해 밖으로 흐르는 곳에, 너비 약 1.5m, 平橋形式
2칸의 다리[二間石橋]를 설치하고 그 위에 宮墻을 연결하였다. 이곳 빨래터로 통하는
물은 宮內의 水源이 풍부하여 사시사철 마르지 않을 정도로 많이 흐르고, 宮闕과의 경계인
담장 아래에 위치하여 궁궐의 宮人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구슬 선 *墻: 담 장)
조선시대 都城 안에는 이름난 빨래터가 여러 군데 있었으며 이곳은 淸溪川과 함께 오래된
전통의 빨래터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18) 昌德宮 新璿源殿 外三門(오른쪽)
창덕궁 서쪽 끝에 있다. 멀리 원서동 한샘 DBEW 연구소가 보인다.
*新璿源殿; 1921년 李王職에서 昌德宮 後苑 옛 北一營 터에 건립한 새 璿源殿으로,
太祖, 世祖, 元宗, 肅宗, 英祖, 正祖, 純祖, 文祖, 憲宗, 哲宗, 高宗 등 12 御眞이
봉안되었으며, 6∙25전쟁 때 釜山으로 옮겨졌다가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고, 英祖의 어진과
타고 남은 太祖, 文祖, 哲宗의 어진만 전한다.
(19) 원서동 한샘 DBEW 연구소
한샘 DBEW(Design Beyond East and West/東西洋의 디자인을 넘어서) 연구소
*전통의 한옥과 현대식 글라스 하우스를 융합시킨 한샘 DBEW연구소는 홈 인테리어기업
한샘의 창업주 조창걸 회장이 보유주식 260만주(약 4,400억원)를 出捐하고, 아키반건축
도시연구원 대표 김석철 교수의 設計에 4년, 건축에 2년 등 꼬박 6년이 걸려 2003년
완공하였다. (*捐: 버릴 연)
(20) 苑西洞 白鴻範 家屋 -서울민속문화재 제13호- -1910년대 건립(추정)
昌德宮 서쪽 苑西洞 기슭의 이 집터는 한때 尙宮이 살던 집터라고 하며, 이 건물의 이름은
文化財 지정 당시의 所有主 이름에서 딴 것이다. 이 건물은 별채에 해당하는 곳이며 원래
안채 자리에는 洋屋이 들어서 있다. (*鴻: 기러기 홍)
근래에 지은 안채와 별채인 한식 목조기와집 한 채, 동남쪽에 떨어진 작은 방 한 채로
구성되었으며, 건물 앞에는 넓은 마당이 있고, 서남쪽에는 정원이 있다.
한국 소형주택의 전형적인 요소를 비교적 잘 지니고 있으나 現代手法이 각부에 사용된 것은
근래에 補修하면서 변한 것으로 보인다.
(21) 苑西洞 高羲東 가옥 -등록문화재 제85호- –일제강점기 인물기념시설
春谷 高羲東(1886~1965)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18년 직접 설계해 지은 목조
개량한옥으로, 春谷이 41년간 살았으며 後學들에게 서양화를 가르치면서 작품 창작활동을
한 곳이기도 하다. 대지 540㎡에 연면적 250㎡ 규모로 ㄱ자형 구조를 이루는 4동의
단층집이다. (*羲: 복희씨 희)
西洋과 日本 住居文化의 장점을 조화시켜 韓屋에 적용, 실용적인 주택으로 지은 이 가옥은
근대 초기 한국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登錄文化財: 開化期부터 6·25전쟁 전후의 기간에 건설·제작·형성된 近代文化遺産 가운데
보존 및 활용을 위한 가치가 커 지정, 관리하는 문화재.
(22) 창덕궁3길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昌德宮 後苑
(23) 성재전통건축자료관과 大東稅務고등학교(전 大東商高)
=誠齋 傳統建築資料館
한국의 전통건축의 造營에 관련된 자료를 기획, 전시하고 교육활동을 통하여 전통건축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높이고자 개관하였으며, 誠齋 申鷹秀 大木匠의 반세기 조영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고 하는데 誠齋는 光化門과 崇禮門 복구에 기여했으며, 건축자재 金剛松
문제로 매스컴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大東稅務高等學校 -종로구 桂洞에 있는 사립고등학교.
1925년 大東학원 창설, 1934년 대동상업학교 설립, 1944년 대동상업중학교,
1957년 대동상업고등학교가 되었다. 1987년 학교법인 高村학원에서 인수하고,
1997년 대동정보산업고등학교, 2007년 대동세무고등학교로 校名을 변경하였다.
(24) 여운형 집터[呂運亨 家址]
*夢陽 呂運亨(1886~1947): 경기 楊平에서 출생하였으며, 1919년 중국 上海에서
臨時議政院 議員으로 大韓民國臨時政府를 수립∙선포하고, 1936년 朝鮮中央日報社長
재직 때 마라톤 우승한 孫基禎 사진에 日章旗를 말소하였으며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 활동하다가 암살되었다.
(25) 서울 계동 배렴 가옥(桂洞 裵濂 家屋) -등록문화재 제85호- -1936년 건립
東洋畵家 霽堂 裵濂(1911~1968)이 1959년부터 生涯末葉까지 살던 집이다.
(*霽: 비 갤 제 *濂: 물 이름 렴)
裵濂은 경북 金陵 출신으로, 靑田 李象範을 師事하고 전통 水墨山水畵의 脈을 이었다.
裵濂이 살기 전에는 石南 宋錫夏(1904~1948)가 살았는데, 石南은 우리나라 최초의
映像民俗學者로 國立民族博物館을 설립하였으며, 1937년 이 집에 입주하면서
朝鮮民俗學會의 사무실로도 사용하였다. 이 가옥이 있는 지역은 대규모의 토지를 작게
분할한 宅地에 都市韓屋이 빽빽하게 들어선 곳이다.
이 집은 裵濂 死後에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었으며, 2001년 서울주택도시공사가
매입하여 2016년까지 게스트하우스로 사용했으며 현재는 문화예술공간으로 개방하고
있다.
(26) 서울 계동 배렴 가옥 내부
霽堂 裵濂은 이 집에서 生의 末年을 보내면서 그의 대표작들을 탄생시켰다.
주요 작품으로 <夏景山水圖>, <綠樹靑山>(1943), <富貴長春>(1943) 등이 있다.
(27) 유심당. 3∙1운동 유적지; 유심사 터
3∙1운동 당시 불교잡지 [唯心]을 발행하던 唯心社가 있던 곳으로
萬海 韓龍雲(1879~1944)이 이곳에서 佛敎界의 3∙1운동 참여를 主導했다.
(28) 석정 보름우물[石井 十五井]
서울에 상수도시설이 보급되기 시작한 20세기 초까지 우물은 주된 飮用水, 生活用水
공급원이었다. 北村주민들의 중요한 飮水源이었던 ‘석정 보름우물’은 보름 동안은 맑고,
보름 동안은 흐려진다고 붙은 이름이다. 물맛이 좋기로 소문나고, ‘이 우물물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俗說이 있어 宮闕의 宮女들이 몰래 떠다 마시며 아들 낳기를
祈願했다고 한다.
1794년 중국에서 鴨綠江을 건너 온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周文謨 神父가 1801년
새남터에서 殉敎하기 전까지 桂洞 최인길(마티아) 집에 숨어 지내며 朝鮮 땅에서 첫 미사를
奉獻할 때 이 우물물로 洗禮를 준 것으로 전하고 있다. 또한 1845년 한국인 최초의 神父인
金大建(안드레아) 神父도 이 지역에서 짧은 司牧기간 동안 이 물을 聖水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天主敎 迫害 당시 많은 殉敎者들이 발생하자 갑자기 물이 쓴맛이 나서
한동안 사용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29) 시민선방 백상정사[市民禪房 白象精舍]
市民禪房 白象精舍는 大韓佛敎曹溪宗 寶雲山 釋王寺의 桂洞길에 있는 서울布敎堂으로
杲山大宗師의 학문과 德望 그리고 사상을 널리 펴는 宣揚事業을 위해 설립된 재단법인
杲山文化財團과 (재)재외동포교육진흥재단, 사단법인 하얀코끼리가 있다. (*杲: 밝을 고)
(30) 中央中∙高等學校
*1908년 畿湖興學會가 漢城 昭格洞에 있는 옛 陸軍衛生院 건물을 빌려 私立 畿湖學校로
설립, 1910년 中央學會로 바꾸고 교명도 中央學校로 변경하였다. 그 뒤 財政難으로
경영이 어렵게 되자 1915년 仁村 金性洙가 중앙학교를 인수하고 1917년
桂山 언덕(지금의 종로구 桂洞)에 교사를 신축∙이전하였다.
1964년 학교법인을 중앙학원에서 고려중앙학원으로 변경하였으며,
1981년 本館·西館·東館이 각각 사적 제281호, 제282호, 제283호로 지정되었다.
(31) 북촌한옥청, 이종구 소반전 -북촌로 12길
종로구 嘉會洞에 있는 북촌 한옥청(韓屋聽)은 韓屋과 한옥지역의 역사문화적 가치와
관련된 전시·교육·포럼·지역행사 등을 위한 貸館 施設이다.
(32) 북촌로12길 -北村 三景 -종로구 嘉會洞
(33) 동림 매듭공방[東林 結工房]
전통매듭을 비롯하여 現代衣裳에 적합한 장식품, 벽걸이, 각종 액세서리를 전시 및 제작,
교육하는 곳이다.
(34) 취운정[翠雲亭] (*翠: 푸를 취)
韓屋호텔로 안방, 대청방, 별당채, 사랑채 등 4개의 방이 있다고 한다.
(35) 맹사성 집터[孟思誠 家址]
조선 초 世宗 때 정승을 지낸 淸白吏 古佛 孟思誠이 살던 집터로, 그의 이름을 따서
孟監事峴, 孟峴이라고 하며, 퇴청하면 이곳에서 피리불기를 즐겨 했다고 한다.
(36) 北村 東洋文化博物館
北村 東洋文化博物館은 문화, 예술, 역사,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과거, 현재, 미래를
共感하기 위하여 古佛 孟思誠 집터에 설립했다. 건물 내부 전시관 외에 야외전시관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제작된 기와, 瓦當을 전시하고 있으며, 北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전망대가 있다고 한다.
(37) 古佛書堂
北村 東洋文化博物館 경내에 古佛 孟思誠의 雅號를 따서 지은 서당으로 무형문화재,
조각예술가 등 전문가들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38) 북촌생활사박물관 -북촌로 54길
北村生活史博物館은 북촌에서 수집한 옛 생활물건들을 전시하면서 유물에 얽혀있는
都市庶民들의 삶의 역사를 되짚어보고자 설립하였다. 몇 백 년 전부터 불과 몇 십 년 전까지
代를 이어 사용하다가 급격한 産業化에 밀려 사라져버린 조금은 촌스럽고 유치하면서도
한없이 정겨운 북촌사람들의 손때 묻은 생활용품들을 통해 지나간 시절의 추억과 情趣를
맛보는 기회가 되는 곳이라고 한다.
(39) 북촌에서 본 仁王山(338.2m)-白岳山(北岳山, 342m)
(40) 삼청동돌계단길, 북촌 제8경
自然岩盤을 쪼아 계단을 만들었다.
(41) 三淸路
종로구 中學洞 東十字閣에서 성북구 城北洞 삼청터널에 이르는 길이 2.9㎞,
너비 12∼35m의 왕복 4차선 도로이다.
(42) 다락정[多樂亭], 午餐場所
(43) 다락정에서
(44) 다락정에서
(45) 커피숍, 海松 동문이 회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46) 國務總理 公館 -서울 미래유산(2013년 지정)
종로구 삼청로 95(삼청동 106-11)에 있는 국무총리의 관저로, 조선시대 太和宮 자리였다가
일제강점기에는 閔奎植 자택, 京城電氣株式會社 관사로 쓰였다. 光復 후 국회의장공관으로
사용하다가 1961년부터 국무총리공관으로 쓰고 있으며, 垈地 14,990㎡이다.
(47) 감고당 터[感古堂址] -德成女高 構內
感古堂은 肅宗 妃 仁顯王后 閔氏(1667~1701)가 1689년 王妃 지위를 잃고 廢庶人 되어
궁궐에서 나와 살던 집이다. 감고당 건물은 1761년 英祖의 친필 편액을 달았으며 1959년
강북구 雙門洞 덕성여대로 옮겼다가 2006년 경기 驪州 明成皇后 생가 터로 移轉,
重建하였다.
(48) 감고당길
‘감고당길’은 栗谷路 3길로 肅宗의 繼妃 仁顯王后의 친정 感古堂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경기 驪州로 移建하여 없어졌으나 鍾路區에서 感古堂의 이름과 역사를 국내∙외에
관광객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명예 도로명 ‘감고당길’로 지정하였다.
(49) 감고당길
(50) 안동별궁터[安東別宮址]
조선시대 초부터 왕실의 거처였다가 마지막 황제 純宗의 嘉禮處로 사용되었던 궁터로
현재 安國洞 豊文女高 경내에 있었다. 안동별궁이 있던 자리는 전부터 역대 왕실의 저택이
있던 곳으로, 高宗 18년(1881)에 지은 別宮으로 그 소재지가 북부 安國坊의 小安洞에
있다고 安東別宮으로 호칭하게 된 것이다. 일부 문헌에는 ‘安國坊 別宮’이라고도 하였다.
1899년부터는 美國獨立史, 波蘭國末年戰史, 法國革新戰史 등 新刊書의 판매처 역할도
했으며, 그 부지가 개인에게 팔리면서 학교와 주택 등이 들어서게 되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