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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 선생 어록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일이기에 또 아니하고 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죽산 조봉암 선생이 남긴 말이다. 그의 무덤 앞에 있는 어록비에 새겨져 있다. 흔히 죽산은 비운의 정치가라 한다. 젊어서는 일제에 의해 신의주에서 7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데 이어, 마지막 가는 길도 서대문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일제 시기에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하며 3.1운동에 적극 참여 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여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으나1959년 이승만 정권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을 당하였다. 당시 그는 형 집행을 앞에두고 " 나는 이 박사(이승만)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대인의 기개를 엿보게 한다. 지난 2011년 죽산은 대법원의 무죄 판결로 신원이 복권되었다. 그의 사후 57년 만이다.
1958년 진보당 사건 관련 재판 당시 모습
1958년 대한민국 검찰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공소사실도 특정하지 못한 채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기소하고 양이섭의 자백을 근거로 조봉암을 간첩죄로 기소, 사형시킨 사건이다.
1956년 5·15정부통령 선거가 끝나자 조봉암은 진보당 결당에 박차를 가했다. 대통령 선거에서의 ‘바람’을 최대한 진보정당 창당의 동력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계산이었다.
그렇지만 서상일 등 원로들은, 당의 문호를 널리 개방해 광범위하게 혁신세력을 규합하자는 주장을 내세워 빨리 창당을 하자는 주장에 제동을 걸었다. 그뿐만 아니라 서상일 측에서는 조봉암의 2선 후퇴를 요구했다. 당의 강령에서도 평화통일이 너무 위험한 주장이니 민주 방식에 의한 조국통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봉암 측은 서상일 측에서 혁신계 규합의 명분을 내세워 계속 시일을 끌자 독자적으로 창당을 추진했다. 1956년 10월 초에 서상일·이동화·김성숙·고정훈 등이 이탈했다. 이들은 후에 민주혁신당을 조직했으나 정치적인 영향력은 미약했다.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 발당대회가 열렸다. 진보당추진위원회가 구성된 지 약 1년 만이었다. 조봉암은 개회사에서 자본주의 세계도 날로 수정되어 사회민주주의적인 전법을 쓰고 있고, 공산주의 세계도 날로 변해서 사회민주주의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수렴론을 펴면서 사회민주주의 사회로 가자고 호소했다. 그리고 ‘피해대중의 전위대’가 되자고 역설했다. 진보당은 21세기에 들어와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들어가기 전까지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진보정당이었다.
진보당은 강령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반공산당 입장을 천명한 1951년 프랑크푸르트선언에 기반을 둔 사회민주주의 정당임을 명시했지만, 진보당원의 대다수는 사회민주주의도 프랑크푸르트선언도 몰랐다. 일부 간부들은 용공세력으로 몰릴까봐 두려워했다. 그들은 조봉암을 지지하고 추종해서 참여한 것이었고 이념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점에서 우익과 별 차이가 없었다.
진보당은 위원장에 조봉암, 부위원장에 박기출·김달호를 선임했다. 간사장은 윤길중이었다. 진보당에는 통일문제연구위원회(위원장 송두한, 그 뒤 김기철이 됨)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당헌에는 특별(특수)당부를 둘 수 있었고 민주당처럼 비밀당원이 있었다. 청년학생들의 서클로는 여명회, 7인회 등이 결성되어 활동했다.
뭐니 뭐니 해도 진보당의 최대 특색은 평화통일에 있었다. 극우반공주의자들도 그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조봉암은 북진통일이 전혀 현실성이 없다고 지적하고, 두 번 다시 동족 간에 피 흘리는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는데, 대단히 호소력이 있었다.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것은 북진통일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긴장완화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진보당은 당사를 얻기도 힘들었지만, 지방당부 결성에서의 잇단 테러는 앞날을 어둡게 했다. 진보당은 1956년 12월 지지 기반이 강한 경남에서부터 지방당부 결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복경관 등의 침입으로 유회되었고, 경북당부 결성대회도 당 대표만 선출하고 산회했다.
1957년 4월에 열린 서울특별시·경기도당 결성대회는 유지광 등이 이끈 테러단의 침입과 정복경찰대에 의해 중지되었다. 6월 전북도당 결성에 임박해서는 간부들에 대한 테러가 난무했다. 그중 가장 잔인한 테러는 7월 전남도당 결성대회 때 발생했다. 도당추진위원회 조직부장 집에 권총과 단도를 가진 괴한들이 쳐들어와 조직부장 부부를 난자해 심한 중상을 입혔다. 다른 간부들도 집에서 칼질을 당했다.
진보당 도당 결성대회는 정부 측의 악질적인 테러도 문제였지만, 야당과 언론인도 여당·정부와 별 차이가 없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한다. 언론은 연이은 진보당에 대한 테러를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 짧게 다루었고, 이는 진보당의 김달호 의원의 발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김달호 의원이 국회에서 진보당 도당 결성대회에 대한 테러 사건을 보고하자 김준연 등 민주당 의원들과 여당 의원들은 그것을 무시한 채 김 의원의 평화통일 발언이 대한민국 국시를 도끼로 찍는 것과 같다는 등 평화통일을 공격했고, 김 의원을 조치해줄 것을 의장에게 요구했다. 국회 내무위원회는 테러 사건을 조사한다고 했으나 그해 12월까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진보당 테러에 대한 야당과 언론의 반응은 같은 시기에 발생한 장충단공원 강연회 방해 사건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야당의 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회가 주최한 이 강연회에서 조병옥이 연설을 시작한 지 몇 분도 안 되어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나타나 돌과 빈병 등을 던지고 연단 책상을 뒤집어엎는 등 폭력을 휘두르고는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유유히 사라졌다.
이들은 유지광의 화랑동지회 깡패였다. 이재학 국회부의장은 야당 분열로 일어난 일인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야당은 국회에서 여러 차례 대대적인 공세를 폈고, 언론들은 왜 깡패들을 잡지 않느냐고 추궁하면서 수개월 동안 머릿기사와 사설로 정부와 여당을 신랄히 비판했다.
보수야당은 왼쪽 눈은 감고 오른쪽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반쪽 자유민주주의자였다. 반 세기가 넘게 한눈팔이 민주주의를 외친 것은 극우반공 성향을 가졌으면서도 유권자의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슬픈 피에로라고나 할까.
테러가 몰아친 1957년 하반기에 조봉암의 주변은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가 1951년 신당을 결성하려고 하자 관계자들이 소위 대남간첩단 사건으로 일망타진되었다. 그의 선거사무차장 김성주는 헌병 총사령부 밀실에서 고문으로 죽었다. 1955년에는 조봉암을 서면으로 고발한 동해안 군반란 사건에 김준연이 연루될 뻔했으나 무사했다.
1957년 8월 정우갑 간첩 사건에 조봉암이 소환될 것이라고 보도되었다. 그 다음에는 김정제 간첩 사건에 오르내렸다. 11월에는 박정호 간첩 사건에 장건상과 함께 거론되었다. 한 신문은 줄 이은 간첩 사건 연루보도에 그가 허허 웃으며 원망하는 기색도 없었다고 보도했다.
당국의 혁신계 제거 작업은 ‘근민당 재건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여운형이 이끌던 근로인민당의 전 간부 장건상·김성숙 등이 거물간첩 박정호로부터 거액을 받아 근민당을 재건하려고 했다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일부 극우 언론이 당국과 짜고 여론몰이 재판을 했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었는데, 이는 곧이어 발생한 조봉암·진보당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당과 연관 있는 한 언론은 장건상의 사진까지 여러 차례 게재하면서 당국의 혐의 사실을 그대로 인정한 것처럼 보도하고, 심지어 전향서를 썼다느니 전과를 뉘우치고 눈물을 흘렸다느니 등의 허위 기사까지 썼다. 근민당 재건 사건은 1심과 2심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1958년 1월 12일 진보당 관련자들에 대한 일제 검거가 시작되었다. 그전에 피신을 권고받았던 조봉암은 13일 자진 출두하겠다고 말했다. 조봉암·진보당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미 1월 11일 조인구 검사는 진보당 평화통일론을 북괴 남침구호로 단정했다. 신문들은 매일같이 조봉암이 북괴지령문을 보고 불태웠다느니 아무개아무개 간첩과 접선했다느니 조봉암 집에서 김일성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견되었다느니 하고 대서특필했다. 동양통신사 정태영 기자가 쓴 강평서는 북에서 내려보낸 비밀지령서라고 크게 보도되었고, 정 기자는 북의 연락담당관임이 확인되었다고 보도되었다. 어느 것이나 근민당 재건 사건과 똑같이 사실이 아니었다.
1958년 2월 25일 오재경 공보실장은 진보당 등록 취소를 발표했다. 그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진보당은 국법과 유엔 결의에 위반되는 통일방안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진보당 간부들이 밀파간첩, 파괴공작조와 항상 접선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공산당 비밀당원을 의원으로 당선시켜 대한민국을 파괴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황당무계한 거짓이고, 두 번째도 재판에서 입증이 안 되었다. 첫 번째 유엔 결의에 어긋나는 통일방안을 주장한 것은 다름 아닌 이승만 정권이었다.
조봉암·진보당 사건은 2월 28일 양명산이 조봉암과 북의 연락책이라는 사실이 발표되면서 전기를 맞았다. 조봉암은 상해 시절 알고 지냈던 양명산이 만나자고 하여 만났고, 그이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물론 양명산이 간첩이라는 것은 몰랐다고 주장했다. 4월 3일 정식 기소된 문제의 인물 양명산은 나중에 알려졌지만 특수부대인 육군 첩보부대(HID)의 대북첩보공작원이었고 북과 접촉하면서 남북 교역으로 돈을 벌었다. 그런 그가 법정에서 피고인이 되어 간첩으로 조봉암에게 접근했고 자금을 건넸다고 공소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1958년 6월 검사는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중형을 구형했다. 7월 2일 유병진 판사는 불법 무기 소지 등으로 조봉암에게 5년을, 양명산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5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진보당 간부들한테는 무죄를 선고했다. 조봉암·진보당에 대한 주요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판결 3일 후인 7월 5일 ‘반공청년’이라는 괴한 3백 명이 법원에 난입했다. 그들은 “친공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자”, “조봉암을 간첩죄로 처형하라”라고 외치며 시위했다. 처음 있는 법원 난입 사건이었다. 자유당은 산하 단체들로 하여금 친공판사규탄대책위원회를 구성케 하여 사법부를 위협했다.
이 사건에서도 김구 살해 사건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승만을 떠올렸다. 이와 관련해서 국무회의 회의록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승만은 1958년 1월 14일 국무회의에서 “조봉암은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라고 지적했다.
1심 판결 후 처음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은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자 홍진기 법무장관이 차분하게 “제1심에 비하여 고법, 대법원의 판결이 검찰에 유리하게 될 것이 예상되는 차제에 공연히 판사들을 자극하는 것은 득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2심 재판은 월남하여 사상검사로 활동한 오제도 등의 주선으로 판사가 된 김용진이 맡았다. 그는 1심과는 반대로 양명산이 혐의 사실을 부인했는데도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진보당 간부들에게도 실형을 선고했다. 대법원 주심은 김갑수였다. 이 판결이 있기 전 홍 법무장관은 국무회의에서 김갑수 대법관 등은 신국가보안법에 대한 견해가 우리와 같고, 정부로서 그에 대해 특별한 대우를 해왔고, 본인으로서도 그를 설득시킬 자신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국무회의 기록에 쓰여 있다.
1959년 2월에 있은 대법원 판결은 특이했다. 진보당의 평화통일 주장은 합법이지만, 조봉암은 이중첩자 양명산을 통해 간첩행위를 했다고 하여 사형을, 진보당 간부들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미국은 이 사건을 주시했다. 다울링 주한미대사는 이기붕을 만나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1980년대에 전두환·신군부가 김대중 사형 판결에 대해 보인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소극적이었다. 조봉암은 미국한테 아무래도 위험한 인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뛰어난 현실정치가였으나, 민족을 냉전보다 위에 놓고 냉전을 타넘고 가려고 했기 때문에 역풍(逆風)의 정치가라는 말을 들었다.
재심을 청구했으나 상고심을 맡았던 재판부가 이를 다시 맡아 1959년 7월 30일 기각되었다. 변호사들은 다시 재심을 청구하려 했지만, 다음 날인 31일 조봉암은 전격적으로 처형되었다. 4월혁명을 8, 9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그는 형장에서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출처] 진보당 조봉암 사건, 1958년|작성자 현대사스토리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