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선수 최희암’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휘문중 1학년때 키가크다고 농구부에 들어갔으나 177cm에서 더 이상 크지 않았다. 휘문고 졸업때는 뽑아주는 대학이 없어 연세대 체육교육과에 시험을 보고 입학해 농구를 계속했다.
물론 수비전문 선수였다. 현대 창단 멤버로 들어가서도 1년만에 밀려나다시피 해병대에 입대. 제대후 현대에 복귀했다가는 이라크 건설현장 근무를자원했고, 1년만인 86년 모교의 부름을 받았다.
31세의 최연소 무명 대학감독. 하지만 그는 내리막 길을 걷던 팀을 3년만인 89년 대학농구 4관왕에 올려 놓았다. 중앙대의 6년 독주에 제동을 걸고연세대의 시대를 연 것. 94년 3월에는 농구대잔치서 사상 첫 대학팀 우승의 신화를 엮어냈다. 당시 TV 농구드라마 ‘마지막 승부’의 방영과 맞물려 연세대팀은 폭발적 인기를 누렸고 최희암감독은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등과 함께 오빠부대의 우상이 되었다. 그리고 3년후 또 96~97 농구대잔치를 제패했다.
어린 대학선수들이 기아 삼성 현대등 기라성 같은 실업팀의 스타들을 꽁꽁묶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최씨에 옥니, 곱슬머리로 독종의 3대 조건을 모두 갖춘 감독의 근성과 집념이었다.
그러나 채찍만으로 선수들을 움직일 수는 없는 것. 최감독은 외국서적과NBA경기 비디오를 통해 선진기술을 끊임없이 습득해 실전에 응용하는 학구파이자 작전의 귀재이기도 했다. (최감독은 99년 미국연방체육대학원에서‘한국프로농구 관중의 만족도’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이론적 밑바탕은 이미 대학시절 이루어졌다.
동기생 신선우 박수교 장봉학과 1년후배 신동찬 박인규등이 모두 대표팀에 나가 있는 동안 학교에 남은 그는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대학 선수출신인 단 스미스 코치로부터 1년간 천금같은 기술들을 전수받았다. 프리징 플레이(freezing play) 페이크 스위치(fake switch) 트래핑 디펜스(trapping defense)등.
또 그가 국내 농구인중 가장 이론과 실제를 겸비했다며 존경하는 방열 감독(현 경원대교수)의 지도도 큰 도움이 됐다. 방열감독은 하나를 배우면열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었다. 정덕화(SBS) 유재학(인천 SK), 신선우(KCC)도 기아 또는 현대에서 방열감독에게 배워 성공한 현역 프로감독이다.
최희암감독은 연세대를 맡은 후 동계훈련을 가면 새벽 5시 영하 10도가 넘는 추위속에 선수들을 산속 개울에 몰아넣는가 하면 20km구보를 거르지 않았다. 평소 선수가 다리가 아프다면 훈련시간 내내 팔굽 펴기와 윗몸 일으키기를, 팔이 아프다면 운동장 돌기를 시킬만큼 철저했다.
선천적으로 강인한 체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도 훈련을 통해 체력과 정신력을 충분히 배가 시킬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고교시절 부상위험 때문에 강도 높은 체력훈련을 못해 하체의 근력이 부족했던 서장훈은 강훈과 꾸지람을 못 이겨 농사를 짓겠다고 잠적하고, 우지원은 농구에 자신이 없다며 팀을 이탈하기도 했다.
93년 12월 대학연맹전에서 3위로 떨어진 후에는 감독을 따라 삭발한 선수들을 대낮 교내 백양로에서 오리걸음을 시키는 정신훈련을 실시한 후 농구대잔치 20연승으로 우승을 이루어냈다.
연세대 농구팀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면서 선수 스카우트에는 별 어려움이없었다. 그러나 스카우트는 거의 포지션별로 격년으로 뽑아 우수선수를 데려다 죽이는 경우는 없었다고 자부한다.
당시 선수들은 놀아도 이길 수 있다는 분위기에 ‘효율적 훈련’을 요구했다.
그러나 “스포츠의 가치가 무엇이냐. 노력이 없는 결과는 가치가 없다. 특히 스타는 남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 며 불호령을 내렸다.
최감독은 “선수들을 깨끗하고 순수하게 키우려 애썼다. 비신사적 플레이는 삼가고 경기에 지더라도 승복할 것을 강조했다. 프로에 가서 손가락질받는 제자가 없고 조직에 잘 적응하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또 ‘농구를 끝내고 사회에 나가서 남에게 속고 살지 않을 정도로는 공부해야 한다’며 자기계발 특히 대인관계와 언어구사 능력의 배양을 강조하고, 무조건 용돈의 10%는 문화생활에 쓰도록 했다고.
그의 제자들은 서장훈(4억3,100만원) 이상민(3억원) 문경은(2억7,000만원)이 지난 시즌 연봉순위에서 1,2,4위를 할 만큼 프로에서 돋보이는 활약을하고 있다.
NBA 진출을 계획하고 있는 대학 최고스타 방성윤(3년)은 그의 마지막 제자이다.
프로행은 나태해지는 자신에 자극을 주기 위한 모험이기도 했다.
대학에서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선수를 뽑아 썼는데 프로에서는 선수구성에서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선수를 마음에 들게 만들려면 시간이 필요하지만 성적이 안 나면 기다려 주지 않는 게 프로이다. 대학에서는 상대팀에 아무리 좋은 선수가 있더라도 몇 년 후 졸업하면 역전시킬 수 있지만프로는 다르다. 외국 용병 2명이 거의 승부를 결정하는 현상도 난감한 문제이다.
모비스를 맡은 후 13명중 10명을 바꾸었다. 기량보다는 목표의식이 뚜렷한선수들을 뽑았다. 우지원(30) 전형수(25) 김태진(29) 오성식(33) 정인교(34)등. 전 소속팀에서는 소위 팽 당한 선수들. 쓴 맛을 본 선수들이라 강한 의지가 있었다. 지난시즌의 플레이오프 진출은 선수들이 뭉친 결과라고본다.
그러나 코트에서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모르는 선수도 많아 답답했다. 때로 기본을 가르치며 ‘백지가 쉬우냐, 남이 그려 놓은 그림을 고치는 게쉬우냐’ 고민해 본다. 프로선수는 굳은 완성품이라 고치는 게 어렵고, 그렇다고 신인을 마음대로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가끔 힘들 때 대학감독 시절이 그리워 지기도 한다. 하지만 새로운 시련과도전에 젊어지는 기분이 들어 만족감이 더 크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프로필] 55년 전북 무주생 74년 연세대 체육교육과 입학 78년 현대농구단 창단멤버로 입단 79년 해병대 입대 81년 해병대 전역 85년 현대건설 바그다드 지사근무 86년 연세대 농구감독 부임 88년 연세대 체육학 석사 유니버시아드 감독 99년 미국연방체육대학원(USSA) 박사 2002년 울산모비스 감독
첫댓글 저도 최희암 감독을 넘 좋아하는데 해병대출신인줄은 몰랐네요...필승 해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