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계의 선구자적인 인물 윤백남 출생/1888
소설가·극작가·언론인·영화감독. 본명 교중(敎重). 충청남도 공주(公州) 출신. 1905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를 거쳐 정경과에 진학하였으나 도중에 도쿄[東京]고등상업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하였다. 귀국 후 11년부터 보성전문학교 강사로 일하였으며, 13년에는 《매일신보》 편집국장이 되었다. 16년 반도문예사를 창립하여 월간지 《예원》을 창간하는 한편, 이기세(李基世) 등과 함께 극단 <예성좌(藝星座)>를 조직하였다. 17년 백남(白南)프로덕션을 만들어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감독하여 영화계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19년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수호지》를 번역, 연재하였고, 이때 한국 최초의 대중소설 《대도전》을 발표하였다. 소설에 이어 희곡 《국경》 《운명》을 발표하였고, 22년 민중극단(民衆劇團)을 조직해서 자신의 희곡 《등대지기》 《기연》 등과 번안극을 공연하면서 신극운동을 전개하였다. 34년 만주(滿州)에 건너가 《낙조의 노래》 《미수》 등을 썼고, 광복 후 귀국하여 53년 서라벌예술대학장을 지냈다. 54년 초대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그 밖의 작품에 《항우(項羽)》 《일대기》 《흑두건》 《봉화》 등이 있다.
소련, 스푸트니크 1호 발사/1957. 10. 4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함으로써 우주탐사의 시대를 열었다. 스푸트니크 1호는 83.6㎏의 캡슐이었으며 96분마다 지구 주위를 1바퀴씩 돌았다. 이 위성이 전송한 간단한 무선신호는 전세계의 과학자들과 무선사들이 수신할 수 있었다. 스푸트니크 2호는 최초로 생명체인 '라이카'라는 이름의 개를 태우고 발사되었다. 이후로도 8회에 걸친 스푸트니크호의 우주비행에서 우주선의 생명유지장치를 시험하기 위해 여러 동물 실험이 행해졌으며, 재진입 방법과 우주의 온도·압력·입자·복사·자기장 등에 대한 자료도 얻었다. 한편 미국은 스푸트니크 1호 발사 3개월 뒤인 1958년 1월 31일에 처음으로 익스플로러 1호를 궤도에 쏘아올렸다. 익스플로러 1호에 설치된 방사선 검출기로 2개의 밴 앨런 복사대 중 내대(內帶)를 발견했다. 소련과 미국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우주개발에서 서로 경쟁하며 발전해왔다.
김영삼, 국회의원직 제명파동/1979. 10. 4
1979년 10월 4일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가 야당인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 처분했다. 여당은 1979년 9월 16일자 <뉴욕 타임스>에 실린 김영삼 총재의 기자회견 내용이 사대주의라고 규정해 총재에 대한 징계동의안을 제출했다. 징계 사유는 "국회의원 김영삼은 국회법 제26조에 의한 국회의원으로서의 신분을 일탈하여 국헌을 위배하고 국가안위와 국리민복을 현저히 저해하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등 반국가적 언동을 함으로써 스스로 주권을 모독하여 국회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국회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으므로 국회법 제157조에 의해 징계를 요구한다"는 내용이었으며, 징계 종류는 제명이었고, 징계 시기는 정기국회 회기 중이었다. 10월 4일 이 동의안은 신민당 의원들의 국회 본회장 점거에도 불구하고 40초 만에 전격으로 날치기 통과되었다. 경찰의 차단 속에서 여당 의원들만의 비공개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 여당 의원 159명 전원 찬성으로 김영삼 총재의 국회의원직 제명이 가결되었다. 이에 대해 신민당 의원들은 전원 사퇴로 맞섰고, 끝내는 부마사태를 유발함으로써 박정희 유신정권의 말로를 재촉했다.
강재구 소령, 부하 구하고 순직/1965
1965년 10월 4일 오전 10시 파월을 앞둔 맹호부대 제1연대 10중대 훈련장에서 수류탄 투척을 연습중이던 사병 1명이 수류탄을 잘못 던져 1개 중대 병력이 있는 곳에 떨어지자 이를 본 10중대 중대장 강재구 대위가 스스로 수류탄 위에 몸을 던져 장렬하게 희생했다.
평소 의협심 많고 온순한 성품의 강 대위는 인천중학, 서울고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육사에 입교했다. 그는 63년 온영순씨와 결혼, 아들 병훈군을 슬하에 두었다. 그러나 부하를 구하려다 폭사한 강재구 대위의 다섯 유족은 15평짜리 집을 팔고 빚 20만원을 짊어진 채 인천시 부평동 256 단칸 셋방에서 꿀꿀이죽으로 연명하며 살고 있었다. 옹색한 살림을 펴보겠다고 파월을 지원한 강 대위를 말리다 못한 홀 어머니 김원춘씨 또한 한 달 전 9월 1일 뇌일혈로 숨진 터라 유가족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강 대위의 장례식은 8일 육군본부광장에서 육군장으로 거행되었고, 사후 강 대위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그 희생정신을 기려 소령으로 1계급 특진시키고 4등근무공로훈장(勤務功勞勳章)을 추서하였다. 육군사관학교에 그의 동상(사진)이 건립되어 있으며 모교인 서울고등학교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윤석양 이병 '보안사 사찰' 폭로/1990
1990년 10월 4일 보안사에 복무중 탈영한 윤석양 이병(한국외국어대 노어과 4년 제적)이 서울 연지동 서울기독교회관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국국보안사령부가 정치인-종교인-언론인-교수-재야인사 등 민간인 1300명을 대상으로 정치사찰과 동향파악을 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윤이병은 동향파악 대상자 색인카드 1,300여장, 개인신상 서류철 4개, 개인별 동향을 수록한 플로피디스크 30장 등을 증거물로 제시했다. 이 폭로로 정치권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전국적인 규탄대회가 이어졌다. 이에 정부는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고 이상훈 국방장관을 해임하고 조남풍 보안사령관을 대기발령하는 등 문책인사를 단행했고 윤이병이 근무한 보안사 서빙고분실은 그 해 말 폐쇄했다.
보안사 명칭도 이 사건을 계기로 1991년 1월1일부로 국군기무사로 변경했다. 윤씨는 2년 만인 92년 9월 체포돼 군사법원에서 2년형을 선고받아 94년 11월 만기출소했다.
한편 윤석양 이병은 KNCC인권위원회가 주는 '90년 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 서울 강남의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에서 팀장을 맡고 있다.
키턴 Buster Keaton
1895년 10월 4일 태어남 / 1966년 2월 1일 죽음
키턴은 1920년대 걸작 무성영화를 남긴 미국의 희극 배우이자 감독이다. 찰리 채플린의 연기가 인물의 감정을 풍부하게 드러내는 코미디였던 반면, 키턴은 ‘위대한 무표정’(Great Stone Face)이라고 불릴 만큼 인물과 상황의 충돌이 일으키는 효과에 집중했다. 그가 처음 출현한 영화는 <푸줏간 소년 The Butcher Boy>(1917)이었으며 희극의 스타 로스코(뚱보) 아버클과 함께 수많은 단편영화에 출연했다. 셜록 홈스 이야기를 이용해 영화 장치를 탐구한 <셜록 2세>(1924)와 슬랩스틱 코미디의 전형을 보여주면서도 새로움을 추구한 <장군 The General>(1926) 등은 영화사에 남을 걸작으로 꼽힌다. 영화에서 대사가 팬터마임을 대신하게 되어 한동안 인기가 떨어졌으나 1940년대말부터 이전에 그가 출연했던 영화가 재상연되면서 명성을 되찾았다.
'루나3호' 발사, 세계최초로 달 뒷면 촬영/1959
1959년 10월 4일 소련이 우주선 '루나3호'를 우주에 쏘아올려 달 표면 관측에 성공했다. 지구에서 볼 수 없는 달의 뒷면을 촬영하기 위한 기구를 탑재한 루나3호는 10월 6일부터 달상공 7천km 궤도상에서 사진촬영을 시작했다.
탑재된 기구는 대물렌즈의 초점거리 200mm와 500mm의 카메라 2대와 자동현상장치였다. 촬영 후 루나3호는 47,500Km까지 지구에 접근해 영상을 송신했다.
소련은 달의 뒷면 약 70%가 촬영된, 예상보다 화질이 선명한 미지의 세계를 10월 26일 공개했다. 달이 항상 지구를 향해 똑같은 면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사진에 나타난 대부분의 지역은 처음보는 모습이었다.
이로써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 최초의 달 표면 탐사, 우주개발의 선두라는 3개의 위업을 달성하게 됐다.
제44차 세계성체대회,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개막/1989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주제로 한 세계성체대회가 1989년 10월 4일부터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개막됐다. 세계 108개국의 가톨릭 고위 성직자와 국내외 신자 65만명이 참석한 대회는 8일까지 5일간 열렸다. 폐막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참석, 장엄미사를 집전했다.
교황과 김수환 추기경이 방탄차에 탑승하고 미사장에 입장하자 신자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사회자의 선도로 '교황 만세' '비바 일 파파'를 합창했다. 교황은 미사 개회를 알리는 성호경을 또렷한 우리말로 시작, 강론을 뺀 전례일체를 우리말로 진행했다. 미사는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잔치답게 독서와 기도, 봉헌부문에 외국인들이 다수 참여, 독서는 중국인 여대생과 일본인 수사가 각기 자국어로 했고, 신자들의 기도는 불어-스페인어뿐만 아니라 필리핀의 고유어인 카갈로그어로도 올려졌다.
세계성체대회는 성체 속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성찬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행사로 4년마다 열려 '가톨릭의 올림픽'이라고 불린다. 이 행사는 본래 신심 운동으로 시작됐지만 지금은 교회공동체의 일치를 강조하는 성격이 더 강하다. 1881년 프랑스의 릴에서 처음 열렸다.
화가 렘브란트 사망/1669
Rembrandt van Rijn, 1606~1669
1606년 7월 15일 조이트홀라드주 레이덴에서 출생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17세기 유럽 회화사상 최대의 화가이다.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세 때 레이덴대학교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어릴 때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기 때문에 레이덴의 화가인 야콥 반 스바넨부르크에게 배우고, 이어 암스테르담에 나와 P.라스트만의 문하에 들어갔다. 1624년 레이덴으로 돌아와 이듬해부터 독립하여 아틀리에를 열었다. 1632년까지 완전한 독학으로 친척, 이웃노인, 성서에서 소재를 얻어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그의 노력이 열매를 맺어 1632년 암스테르담 의사조합으로부터 위촉받은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의 호평을 계기로 암스테르담에 정착하였다.
그 후 약 10년간은 생활이나 명성에 있어서도 가장 혜택받은 시기였다. 1634년 명문가문의 딸 사스키아 판 오이렌부르흐와 혼인하여 당시의 세계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암스테르담에서 첫째 가는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얻어 많은 수입과 제자를 모았다. 그러나 그의 회화가 성숙함에 따라 당시의 일반적 기호였던 평면적인 초상화 등에 만족할 수 없게 되어 외면적인 유사성보다는 오히려 내면적인 것, 인간성의 깊이를 그리고 싶은 생각이 절실해지면서 종교적(또는 신화적) 소재나 자화상이 많아졌다. 따라서 1642년의 명작 《야경(夜警)》의 제작을 고비로 갑자기 세속적 명성에서 멀어졌다.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 사수협회(射手協會)의 주문에 의한 단체초상화인데 렘브란트는 당시 유행하던 기념촬영적 단체초상화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특유의 명암 효과를 사용하여 대담한 극적 구성을 시도하였다.
더욱이 이 해에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가 죽음으로써 인기와 아내를 동시에 잃은 그의 생활은 차차 고통스럽게 되었으나, 정작 그의 위대한 예술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사스키아의 유아(遺兒) 티투스의 성장과, 1645년경에 맞은 마음씨 착한 둘째 부인 헨드리키에의 내조는 그의 예술을 더욱 원숙하게 하여, 오늘날 대표작이라고 하는 대부분은 1640년대 이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생활은 날로 어려워졌으며, 1656년 파산선고를 받아 일찍이 사스키아와의 행복한 생활을 위해 구입한 저택도, 예술적 영감을 한없이 자극하던 여러 가지 미술품도 모두 그의 손에서 떠나게 되었다. 1662년에는 헨드리키에가 세상을 떠나고, 1668년 티투스마저 죽자, 그도 이듬해 10월 유대인 구역의 초라한 집에서 임종을 지켜보는 사람도 없이 죽었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이 발견되기까지는 10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현존하는 렘브란트의 작품은 유화·에칭·소묘로, 종교화·신화화·초상화·풍경화·풍속화·정물화 등 모든 종류에 걸쳐 있으며, 중년 이후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혀졌으나, 17세기 네덜란드 회화는 직접 또는 간접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 더구나 그의 예술은 시대를 훨씬 초월하고 있다. 그는 그 나름의 깊은 빛과 그늘을 창조하였다. 즉 그의 작품에 있어서 색이나 모양이 모두 빛 그 자체이며, 명암이야말로 생명의 흐름이었다. 종교적 소재에서도 렘브란트만큼 마리아나 그리스도의 모습을 네덜란드의 시정생활에서 구한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에 높은 종교적 정감과 깊은 인간 심정의 움직임이 표현되어 있는 것은 그 특유의 명암법 때문이다. 그의 마음 속에는 인간애 정신이 넘치고 있어, 그가 그리는 작품은 한없는 따뜻한 애정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렘브란트만큼 많은 자화상(약 100점)을 그린 사람도 없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에 대하여 겸허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가 설혹 유화를 한 점도 그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에칭만으로도 유럽 회화사상 최대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을 수 있다. 에칭의 모든 기술은 렘브란트에 의해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밖의 작품으로 《엠마오의 그리스도 Christ at Emmaus》(1648 사진) 《야곱의 축복》 《유대인 신부(新婦)》(유화) 《세 그루의 나무》《병자를 고치는 그리스도》《3개의 십자가 The Three Cross》(에칭) 등이 있다.
프랑스 화가 베르나르 뷔페 자살/1999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프랑스 화가' 베르나르 뷔페(71)가 1999년 10월 4일 프랑스 투르투르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비닐봉지를 얼굴에 덮어쓰고 질식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파킨슨씨병을 앓아 왔고 "삶에 지쳤다"는 말로 자살을 예고했다고 측근이 전했다.
국립미술학교(아카데미 데 보자르)에서 수학한 뷔페는 1946년 화단에 등단하면서부터 주목받아, 이듬해 프랑스 최고 권위의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50여년 활동기간 중 8000점 이상의 작품을 그려 '다산작가' '재벌 화백'으로 불렸고, 그의 그림은 한 점당 50만프랑에 팔릴 정도로 고가였다. 외국, 특히 일본ㆍ러시아ㆍ이탈리아에선 '프랑스 현대예술의 교주'로 추앙받았지만, 막상 국내에선 대접받지 못했다. 파리 퐁피두 센터 미술관은 그의 작품을 하나도 사들이지 않을 정도였다. 음울한 잿빛과 날카로운 선. 그의 작품은 주로 비극적인 내용이 화폭에 가득했다.
프랑스 바르비종파의 화가 밀레 출생/1814
Jean-Francois Millet, 1814~1875
노르망디 지방 그레빌 출생. 1833∼1836년 셰르부르에서 그림공부를 하다가 1837년 장학금을 얻어 파리로 진출하여 P.들라로슈의 제자가 되었다. 루브르미술관에서 푸생, 르냉, 샤르댕 등의 영향을 받았으나, 도미에의 작품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1848년 살롱에 출품한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루브르미술관 소장)은 그 후 농민생활을 그리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1849년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대지와 맺어져 있는 농민생활의 모습과 주변의 자연풍경을 그렸다. 이 시절에 T.루소, C.코로 등과 친교를 맺고, 빈곤과 싸우면서 진지한 태도로 농민생활에서 취재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여 독특한 시적(詩的) 정감과 우수에 찬 분위기가 감도는 작풍을 확립, 바르비종파(派)의 대표적 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과는 달리 풍경보다는 오히려 농민생활을 더 많이 그렸다. 그런 가운데 어딘지 모르게 풍기는 종교적 정감이 감도는 서정성으로 친애감을 자아내고 오늘날까지 유럽 회화사상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만년에는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아 화가로서의 영광을 누렸으며, 1868년 프랑스의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주요작품 중 《씨뿌리는 사람》(1850) 《이삭줍기》(1857 사진) 《걸음마》(1858) 《만종》(1859 사진) 등은 발표 당시부터 주목을 끌었으며, 만년의 가작 《봄》에는 빛의 효과에 있어서 인상파를 예고하였다.그 밖에 《우유 짜는 여인》 《저녁기도》 《실 잣는 여인》 《괭이 가진 남자》(사진) 《젊은 어머니와 아기》 등이 있고, 소묘와 판화 등의 작품도 많다.
그밖에
2001년 러시아 시베리아항공 소속 투폴레프-154 여객기, 흑해 추락
1999년 월성원전서 22명 방사능 피폭
1998년 페르난두 엔리케 카르도수 브라질 대통령 재선
1996년 헌법재판소, 영화사전심의 의무조항 위헌판결
1995년 PKO 육군공병대대 앙골라 파병
1993년 옐친 러시아 대통령, 최고회의 의사당에서 농성중인 보수파 의원을 무력 진압
1993년 한중 경협회의 서울에서 개최
1991년 한국-부룬디 국교 수립
1989년 '자유지성 3백인회' 창립
1989년 택지소유상한에 관한 법률 등 4개 토지공개념 법안 의결
1983년 한국-아일랜드 국교 수립
1982년 한국, 아세안(ASEAN)경협세미나 개막
1980년 건설부, 광주~대구간 도로를 '동서고속도로'로 명명
1978년 국토개발원 발족
1977년 소련, 신헌법 공포
1969년 중국, 최초의 지하핵실험 및 수폭실험 공식발표
1966년 바스틀랜드,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레소토로 개칭
1965년 동독서 반공폭동 발생
1965년 남아공 더반시서 통근열차 탈선사고로 750명 사망
1963년 이준 열사 유해, 서울 수유리에 안장
1961년 미국 AID 발족
1960년 부산 국제시장에 큰불, 150여개점포 소실
1956년 미국, 마라링카서 제2의 원폭실험
1955년 4년제 육사 11기 첫 졸업
1950년 동사무소에서 피난민증 발급
1950년 AFKN 첫 전파발사(TV방송은 1957년 9월15일)
1949년 에콰도르, 대한민국 정식 승인
1947년 금은등록제 실시(금값폭등)
1940년 히틀러와 무솔리니 부렌넬에서 회담
1935년 우리나라 첫 발성영화 '춘향전' 단성사에서 개봉
1929년 영국-소련 국교회복의정서에 조인
1913년 루즈벨트 미국대통령 범미주의 고취
1895년 울릉도에 '도감(島監)'을 설치
1884년 '아가씨와 건달들'의 작가 러니언 출생
1853년 크리미아전쟁 발발
1822년 미국의 제19대 대통령 헤이스 출생
1413년 호패법 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