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물, 특히 음식과 관련한 속담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오래전부터 우리 생활 속에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거나 깊은 연관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라는 말은 쓸데없는 간섭하지 말고 형편을 지켜보다 자기 잇속이나 차리라는 말이요, ‘그림에 떡’이라는 말은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차지할 수 없음을 뜻한다. ‘귀신도 떡 하나로 쫓는다’ 했으니 아무리 사나운 사람이라도 친절하게 대하면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는 뜻이요, ‘떡국 값이나 하라’는 말은 지금까지 먹은 떡국 값, 즉 나이 값이나 제대로 하라는 뜻이다.
‘귀신 듣는데 떡 소리 한다’는 속담도 있으니 그러지 않아도 좋아하는 것을 알려주는 바람에 더 좋게 되었다는 뜻이요,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말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던 차에 적절한 시기와 조건이 주어졌으니 당장 해치운다는 뜻이다.
떡바구니를 이고 장사를 나갔던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산중에서 만난 호랑이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라는 조건을 제시하고 떡이 다 떨어지자 결국 어머니를 잡아먹고 어머니 모습으로 변장한 호랑이가 집으로 찾아오자 호랑이를 피해 나무 위로 도망갔던 남매가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이 되었다는 전설 속 호랑이는 떡을 무지하게 좋아했던 떡 마니아였던 모양이다.
호랑이도 좋아했다는 떡, 그 역사와 종류 그리고 영양에 대해 알아보자.
밥보다 앞선 떡의 역사
우리 민족이 떡을 먹기 시작한 시기는 삼국시대 이전, 즉 고조선, 부여, 옥저, 마한 등이 있었던 부족국가시대부터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인 기원전 1000년경부터 이미 쌀을 비롯한 곡
물을 생산하고 있었고, 낟알을 가는 갈돌과 갈판, 찌는 기구인 시루 등의 유물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부족국가 시대의 제천의식에도 이미 시루떡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는 지금도 고사 의식에서 시루떡을 올리는 것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남해왕 사망 후(298), 다음 왕을 정하기 위해 유리와 탈해에게 떡을 입에 물게 해 이빨 자국을 많이 남긴 사람을 성스럽고 지혜로운 이로 보고 왕으로 선택해 왕을 ‘이사금’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남아 전해오니 왕위를 이어받았던 유리왕의 이빨 자국이 남을 정도면 당시에 사용한 떡은 절편 종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열전列傳 백결 선생」에서는 가난한 탓에 떡을 만들지 못하는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백결 선생이 거문고로 떡방아 소리를 냈다는 일화도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화랑 죽지랑竹旨郞이 친구들을 만나러 가면서 술과 떡을 들고 갔다는 일화도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떡을 만들어 먹었음을 전하는 유물과 기록이 곳곳에 남아 전해지고 있는데 솥으로 밥을 해 먹는 것이 정착된 것은 삼국시대 후기로 그 이후부터 밥을 주식으로 하고 떡은 의례용이나 간식으로 먹는 관습이 정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육식을 배제하는 불교의 영향으로 차 마시는 풍습이 유행하였고 이에 따라 차와 함께 먹기 적절한 떡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의 『목은집牧隱集』에 따르면 음력 6월 15일 유두일流頭日에 수단水團이라는 단자와 찰수수로 부친 전병에 팥소를 싸서 만든 차전병을 만들어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수광의 백과사전식 문헌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고려의 상사일에 쑥떡을 으뜸으로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각종 세시풍속과 관혼상제 의식이 세분화되고 관습화됨에 따라 다양한 떡을 이용하는 풍습이 정착되었으니 전보다 더욱 다양한 곡물을 이용해 떡을 만들게 되었고 꽃이나 열매 등을 사용하게 되어 색과 맛, 모양도 한결 다채로워졌다.
궁중과 양반가를 중심으로는 더욱 가짓수가 많고 화려하여 사치스러울 정도의 떡 문화가 발달하였고 근대로 접어들면서도 떡 문화는 면면히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찌고 치고 지지고 빚고
떡의 종류는 만드는 방법으로 분류하기도 하고 계절에 따라 먹는 것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만드는 방법으로 구분한 떡의 종류에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
찌는 떡 : 시루떡이라고 하는데 쌀이나 찹쌀을 물에 담갔다 가루를 만들어 시루에 안친 뒤 김을 올려 익히며, 찌는 방법에 따라 설기떡과 켜떡으로 다시 구분한다. 설기떡은 찌는 떡의 가장 기본으로 멥쌀가루에 물을 내려서 한 덩어리가 되게 찌는 떡으로 찌는 떡의 주재료는 멥쌀과 찹쌀, 그리고 멥쌀에 찹쌀을 섞는 방법에 따라 팥, 콩, 녹두, 깨, 밀, 녹말 등의 잡곡과 콩을 사용하였다. 과일과 견과류로는 밤, 대추, 감, 호두, 복숭아, 살구 등이 쓰였다.
치는 떡 : 곡물을 가루 상태로 만들어 시루에 찐 다음 절구나 안반 등에서 친 것으로 흰떡, 계피떡, 인절미, 단자류 등이 있다. 치는 떡은 주재료에 따라 찹쌀도병과 멥쌀도병으로 구분한다. 찹쌀도병의 대표적인 떡으로는 인절미가 있는데 표면에 고물의 종류에 따라 이를 다시 팥 인절미, 깨 인절미 등으로 부르며, 찐 찹쌀을 안반에 놓고 칠 때는 섞는 부재료에 따라 쑥인절미, 수리취 인절미 등으로 나뉜다. 단자는 찹쌀가루를 쪄서 친 떡으로 재료에 따라 석이단자, 쑥단자, 각색단자, 은행단자, 토란단자, 밤단자, 건시단자 등으로 부른다.
지지는 떡 :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모양을 만들어 기름에 지진 떡으로 떡과 부침개의 중간 형
태라 하겠는데 전병, 화전, 주악 등이 있다. 선사시대 유적지에서 간혹 편편한 돌을 나지막하게 고이고 불을 땐 흔적이 있는데 여기에다 지진 떡을 만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화전은 익반죽한 찹쌀가루를 둥글넓적하게 만든 뒤 꽃잎을 붙여 기름에 지진 떡으로 계절에 따라 봄에는 진달래전, 배꽃전, 초여름에는 자미꽃전, 맨드라미꽃전, 가을에는 국화꽃전 등이 있다.
빚는 떡 : 가루에 뜨거운 물로 반죽(익반죽) 하여 모양을 빚어 만든 떡으로 송편, 경단, 단자류가 있다. 송편은 쌀가루를 익반죽해 소를 넣고 조개 모양으로 빚어 솔잎에 켜켜로 얹어 쪄낸 떡이다. 경단은 찹쌀을 익반죽해 동그랗게 빚어 끓는 물에 삶아 건져서 고물을 묻힌 떡이다. 빚는 떡의 주재료는 찹쌀이며 잡곡 및 두류로 메밀, 마, 콩, 팥, 깨 등이 쓰였고 부재료로는 감, 잣, 유자, 깨, 밥, 호두 등의 과일과 견과류, 그밖의 재료로 생각, 계피 등이 쓰였다. 단자는 찹쌀가루를 익반죽하거나 쪄서 꽈리가 일도록 모양을 만들어 각종 고물을 묻힌 떡이다.
계절에 맞는 떡의 종류
설날에는 흰쌀로만 길게 뽑아낸 가래떡을 먹으니 이는 엄숙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삼월 삼짇날에는 진달래화전을 부쳐 삼신할머니께 집안의 우환을 없애고 소원 성취를 비는 신제를 지냈으며, 한식날에는 쑥떡을 해먹었다.
중국 진나라 시절 나라가 망하자 산 속으로 들어간 개자추가 산불을 질러도 나오지 않고 불에 타 죽었는데, 이 개자추를 추모하는 의미로 찬 음식을 먹는 한식날에 쑥떡을 해먹는 것은 쑥의 강인한 생명력과 뿌리를 지키는 정신을 배우자는 의미가 있다.
곡우절에는 계피떡, 장미화전, 환병과 산병 등을 해먹었고 초파일에는 해모수의 탄생일로 해모수를 기리기 위하여 북방에서 신목으로 여기고 있는 느티나무의 이름을 딴 느티떡을 해먹었다.
이밖에도 단옷날의 수리취절편, 쑥인절미와 유두일의 흰떡수단, 유두편, 상화병, 밀전병 그리고 칠월 칠석날의 증편에서 섣달 그믐의 시루떡에 이르기까지 연중 절기마다 각기 다른 떡을 해먹어온 우리 민족의 떡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경지라 하겠다.
봄 떡은 들어앉은 샌님도 먹는다?
‘봄 떡은 들어앉은 샌님도 먹는다’는 속담이 있으니 봄에는 춘궁기가 있어 누구나 군것질을 반긴다는 뜻이다.
옛날 어른들은 봄이 채 오기도 전인 정월에 취떡을 해 드셨는데 취에 비타민C와 아미노산이 많음을 과학적으로 아셨을 것 같지는 않고 그냥 땡기셨던 모양이다.
취떡은 방앗간에서 반죽 상태로 가져와 손에 기름칠을 하고 가래떡 모양으로 길게 만들어 칼로 똑똑 자른 다음 고명을 묻혀 그 자리에서 먹곤 했다. 이렇게 봄이 오기 전까지 취떡을 꿀에 찍어 먹다보면 어느새 봄이 오고, 봄에는 고장마다 독특한 떡을 해먹었다.
당귀잎떡은 강원도 홍천 지역에서 집안에 큰 행사가 있을 때에 특별히 만들어 먹는 떡인데 채소가 귀한 이른 봄에 당귀는 은은한 향이 나 겨우내 잃었던 입맛을 돋워준다.
쌀을 물에 충분히 불려서 소금을 넣고 빻아 체에 내린 다음 설탕을 골고루 섞고 팥은 푹 삶아 건져놓았다가 쌀가루에 잘게 뜯은 당귀잎과 팥을 섞는다. 시루에 젖은 보자기를 깔고 쌀가루를 담아 위를 평평하게 하여 떡을 안치는데 김이 오르면 젓가락으로 찔러 보아 묻어나지 않으면 다 익은 것으로, 한 김이 나간 후에 그릇에 담아낸다.
쑥떡은 경상도 지역에서 즐겨먹던 향토떡이다. 쑥떡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멥쌀에 삶은 쑥을 섞어 빻아 쪄서 치대어 준다. 치대어 쫄깃해진 쑥떡을 조금씩 떼어내 얇게 밀어 볶은 콩가루를 묻혀준다.
또다른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쑥떡이 있는데 연한 쑥을 뜯어 메밀가루, 보릿가루, 고구마 가루 등에 각각 섞어 찌는 쑥떡이다.
이 떡은 위장병을 앓고 있거나 속이 안 좋은 이들에게 좋은 효과가 있다고 하여 일명 ‘약떡’ 혹은 ‘속떡’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쑥떡은 3, 4월에 아낙네들이 쑥을 많이 뜯어서 만들곤 하던 대표적인 봄 떡이다.
제주도에서는 속떡을 해먹었는데 속은 쑥의 제주 방언이다. 속떡은 크게 침떡(시루떡)과 치는 떡인 돌래떡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제주에서는 쌀이 귀하여 침떡으로 만들어 먹는 집이 많지 않았다. 극히 일부의 부유한 가정에서 일 년에 한 번 정도 별미 삼아 만들어 먹을 정도였고 치는 떡인 돌래떡은 굿을 할 때 만들던 떡이어서 봄에 굿이 있는 집에서 만들어 나눠 먹었을 뿐이다.
고장에 관계없이 두루 해먹었던 봄 떡이 있으니 다름 아닌 쑥갠떡이다. 멥쌀가루에 삶은 쑥을 넣고 익반죽하여 둥글납작하게 빚어 찐 떡인데, 특히 봄에 나는 어린 쑥으로 쑥갠떡을 만들면 쑥의 향긋한 향기와 어린 쑥의 부드러운 섬유질이 씹히는 맛이 일품인데 흔히 이르는 쑥개떡은 쑥갠떡의 잘못된 표현이다.
백일상, 돌상 등 잔치상에 빠지지 않는 떡
잔치상, 특히 돌상에 올라가는 떡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백설기 : 설기는 장수와 정갈함을 의미하는데 돌에는 백설기를 푸짐하게 해서 이웃과 나눠 먹어야 아기의 장래가 밝다고 했다.
수수팥떡 : 수수의 붉은 기운이 귀신을 물리치고 액을 방지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어 떡을 해 동서남북에 한 조각씩 버리면 액운을 떨칠 수 있다고 했다.
오색송편 : 송편은 속이 빈 것과 채운 것을 함께 만들었는데 속이 빈 것은 마음과 생각을 넓게 가져 여러 사람에게 아량을 베풀라는 의미이며, 속을 채운 것은 알찬 사람이 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절미 : 인절미를 올리는 데는 끈기 있고 내실 있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가 담겨있는데 같은 의미로 인절미 대신 찰떡을 놓기도 하고 인절미의 콩고물 대신 계피를 입혀 계피떡을 올리기도 한다.
꿀떡 : 마음 속을 꿀처럼 값진 것들로만 채우기를 바라는 마음이며 속이 알찬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꿀떡을 올리기도 한다.
떡은 이처럼 좋은 일에 깊은 뜻만을 담은 것이 아니라 영양학적으로도 대단히 훌륭한 음식임이 과학적으로 규명되고 있다.
경기도 보건환경연구원은 떡에 대한 폴리페놀 함량분석 결과 떡100g당 18~73mg의 폴리페놀이 함유돼있다고 밝혔다. 특히 콩떡이나 영양찰떡류에는 폴리페놀 중 여성호르몬 대체 효과가 있는 제니스테인 성분이 다량 함유돼 있어 갱년기 여성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떡에 들어있는 폴리페놀은 100% 자연에서 생성된 천연성분으로 떡 제조과정에서도 거의 파괴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는데, 주로 야채나 과일 등에 함유된 항산화물질로 노화방지와 면역력 증진, 항암항균 알레르기 억제 등의 효과가 있어 최근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하니 이제부터 떡을 그저 심심풀이 주전부리 정도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
우리 세시풍속에 자기 나이만큼 송편을 먹는 일명, 나이떡 먹는 날이 있었다. 음력 2월 초하루로 머슴날, 노비날이라고도 한다.
이 날은 한해 농사일을 시작하는 날이자 한해 동안 수고할 일꾼들을 위로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날이었는데, 농가에서는 이날 정월 보름에 세워두었던 볏가릿대를 내려 매달아두었던 곡식의 싹을 보고 한해의 풍작을 점쳤다. 그리고 이 곡식으로 떡을 빚는데, 부잣집에서는 음식과 술을 마련해 동네 잔치를 벌여 일꾼들을 대접했고 일꾼들은 풍물을 울리며 하루를 즐겼다.
일단 음력 2월 초하루가 되면 ‘일하는 사람이 울타리 붙들고 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해의 고단한 일을 시작하는 날인만큼 일을 시키는 입장에서는 푸짐하게 대접해 노고를 위로하고자 했을 것이다.
또 자기 나이 수만큼 나이떡을 먹으면 무병장수한다는 속설도 전한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이 날 먹는 노비송편은 식구끼리는 나누어 먹지만 이웃과는 나누어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 날만큼은 떡이 반상의 구분을 허물고 공동체의 건강과 풍년을 기원하는 메신저 역할을 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