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농(神農)의 후예
젊은시절 자식들 다 키워내고, 나이들면 돌아가겠다고 다짐해온 고향이고 농촌이었다. 그러나 바쁜 세월속을 살아오며 흙과의 그약속을 잊고 살았다.
고향! 그리고 농촌!
생각만해도 어머니의 품속같이 포근하고 아련하게 떠오르는 마음의 보금자리를 상징하는 단어였다.
나라를 위하여 늙은 어머니를 두고 누상촌을 떠난 유비, 여동생의 병을 핑계로 관직을 버리고 은둔한 도연명, 적은 녹봉 찌든삶 식구들에 오매불망해 하던 두보, 그들이 그리던건 고향이었다.
그러나 지금 고향 농촌은 우리가 그토록 그리웠던 그것에게서 점차 멀어져 가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럼에도, 지울 수 없는 그 푸르름과 소박함에 대한 마음빚이 있기에, 흙으로향한 그리움의 발길이 다가섰다.
■ 2010년 영농일지/歸去來辭(귀거래사)
[귀거래사(歸去來辭)/도연명]
歸去來兮 (귀거래혜) 자, 돌아가자.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奚而獨悲 (해추창이독비) 어찌 슬퍼하여 서러워만 할 것인가?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앞으로 바른 길을 쫓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實迷塗其未遠 (실미도기미원) 내가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직은 그리 멀지 않았다.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이제는 깨달아 바른 길을 찾았고, 지난날의 벼슬살이가 그릇된 것이었음을 알았다.
3. 28.
수익성 없음을 이유로 공동소유인 대규모 과수원의 배나무와 감나무들이 포크레인에 무참하게 뽑혀졌다.
자연에 탐욕많은 나는 그냥 두기가 아까워 일부라도 밭을 만들어 채소를 심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가로막는 것들, 제멋대로 자란 잡초, 드러난 나무뿌리 무더기, 괭이질에 손마디를 고통스럽게 하는 숨은 돌덩이들...
등산때 습관처럼 장갑도 끼지 않고, 삽과 괭이질을 해대니 손에 물집이 잡혔다.
잡초 무성한 덤불을 갈쿠리로 걷어내니 그속엔 땅의 부드러움도 있었다. 축복의 땅은 아니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땀을 흘린다.
이따끔씩 시원한 골바람이 내려 오지만 4월의 햇볕은 노동을 하기에는 너무덥다. 어째든 농사를 짓는데 잡초제거가 최우선이란걸 알아야 했다.
4. 24.
휴일을 맞아 시장 종묘사에서 씨감자를 구입하여 심었다. 멀칭을 하지 않아 매우 불안했다. 군인으로 복장을 갖추지 않고 전장에 나선 자식같아 가옆고 마음이 어두웠다.
오후엔 다른 모종도 사다 심었다. 한 구덩이 3개씩 모두 8구덩이니 수확예상은 3×8×3?=( )?
호박, 단호박, 그리고 흥부가 12새끼 모아놓고 마누라와 켰었던 그냥 박...구덩이에는 먼저번에 밑거름을 조금 해두었것다.
예전 부모님 세대엔 대소변 모아 호박구덩이에 주면 호박이 한아름이었다.
힘으로 해야하는 농사일, 누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순위매김이며,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란 달콤함으로 그들을 호렸을까? 아니면 농사철에도 뒷짐진 양반 대지주의 위세였을까?
5. 02.
신록의 5월, 나들이 하기에 좋은 날씨다. 마음이 급한 나는 서둘러 시장 종묘상에서 고추모종 두판을 사다 심었다.
밑거름이 없어 일단은 맛보기로 남은 복합비로를 주었다.
이랑 끝자락엔 강낭콩도 심었다. 동화처럼 줄기가 하늘까지 타고 오르는 꿈이 실현되기를...
들쥐굴이 많았다. 돌아오며 그들이 글을 알면 '쥐새끼 출입금지 주거침입 형사처벌'이라고 써 붙여 놓을걸 그랬다는 생각을 했다.
*후기 : 그때 심은 고추가 얼마나 잘되었던지 난생처음 그기쁨... 그러나 수안보 모임 중 비가 왔었고, 다녀오니 탄저병이 확산되어 수확을 포기해야했다.
9. 12.
밭에 심은 배추는 해충이 절반이상을 먹어 치웠다. 개씸한 녀석들...눈에 보이는 녀석들을 잡아 현장응징을 가했다. 죄가 장성한즉 사망이라...
애 엄마의 유기농 타령에 어쩔 수 없이 무농약 재배를 꿈꾸었던 결과다. 피해입은 배추를 보식하기 위하여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구입할 수 밖에 없다.
누구의 말투처럼 '내가 해봐서 아는데, 농약을 살포를 안하면 안된다'는 것을... 좋은걸 가려먹으려 지독히 애쓰는 소비자들, 그들이 알리가 없다.
★ 2010년 기후 특성 기상이변, 아열대기후성, 3월 초순∼5월 초순 한파계속, 5월 중순∼6월 중순 가뭄계속, 6월 하순이후 9월 말까지 잦은 비, 높은 기온이 계속되었다.
추석무렵부터 채소가격 폭등함(배추 1포기 15,000원까지). 10월이후 낮은 기온으로 계속 생육상태가 좋지않았고, 배추의 경우 강수량이 적고 기온의 변화가 심하여 결구가 잘 되지않았다.
■ 2011년 영농일지/苦盡甘來(고진감래)
2. 13.
평소 짐을들고 산비탈을 오르는 것이 힘들어 밭으로의 차량진입을 시도하였으나 경사가 심해 바퀴가 제자리를 돌다 말았다. 실패는 연속되기 싶다.
애 엄마는 왜 처음부터 4륜구동차를 사지 않았느냐고 바가지 타령이다.
내가 언제 이곳에 살며, 산비탈에 농사지을 줄 알았냐고? 내 마음 유랑별되어 떠돌다 이러는 것을...하물며 닉네임을 부평초라 하였을까?
2. 19.
주말농장 현지모임을 갖기로 하였다. 모임의 이름은 중국 고대 삼황(三皇) 중 하나로 흔히 '염제 신농씨'(炎帝神農氏)의 이름을 따서 '신농회(神農會)'라하였다.
바쁜 일상으로 약속했던 회원들이 두어명 불참하고, 6명의 회원들이 참가했다. 모두들 기분이 좋아보였다. 야외로 나와 주말농장을 할 것이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보지 않아도 즐겁고, 먹지 않아도 배부르단다.
농장 아래 위에는 배나무 단지가 있어 목가적 분위기가 더하고, 입구엔 작은 대나무들이 여름철 그늘을 만들어 줄 것 같다.
우리들은 심오한(?) 영농계획을 논의한 뒤 삼겹살과 막걸리로 간단한 파티를 열었다. 대략 목운동의 선수들이었으니...따스한 봄볕이 내려쬐는 밭둑에서 삼겹살을 굽고, 막걸리잔을 기우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너무 마음편하고 살아있음에 대한 행복감을 느꼈다. 이 시간이 여기서 멈추어 머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누군가 술잔부터 멈추라는...)
나는 이곳을 도연명의 도피처 강서성 심양, 유비의 누상촌 도원결의 연분홍 복숭아꽃 광경을 떠올리며 '도화원'이라 이름 붙였다.
5. 07(토)
아침 일찍 시장 종묘상에 들러 고구마순을 사기로 하였다. 지난주엔 호박고구마 한꾸러미를 심었는데 밤고구마를 더 심어야겠다.
5일장 종묘상 주변에서 할아버지 한분이 고구마순을 팔고 계신다. 밤고구마가 세종류인데 한꾸러미에 7,000원씩이란다. 지난 주에 호박고구마순은 5,000원을 주었는데 값이 비싼것인지, 종묘가격은 알수가 없다.
그 중 한가지를 골라 10,000원을 드렸더니 6,000원을 거슬러 주신다. 그럼 4,000원? 아닌데...
내가 "7,000원이라던데요?" 하고 말했더니, 다시 계산을 해 주시면서 고맙다며 농사를 잘 지으라고 하신다.
에이그! 그걸 팔아 생활비라도 마련하시려 나선 농촌 할아버지의 모습이 짠했다.
8. 06(토)
아침숫갈 놓자마자 밭으로 향했다. 내일부터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 비가 온다니 병든 고추일망정 붉은 것을 따기 위해서였다.
밭에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랐다. 누군가가 고구마밭을 헤집어 놓았다. 여기까지...CCTV 안보아도 가해동물은 산돼지다. 재물손괴죄, 상대 변호인이 없네.
내가 좋아하는게 고구마다. 어릴적 먼 밭에서 커다란 고구마를 지게에 걸쳐오던...보릿고개시절 부모님 몰래 생으로도 먹던 구황식물이었다.
이제 밭농사도 다 지었구나! 하는 절박감이 생겨났다. 토끼에 이어 고라니, 그리고 산돼지까지 출몰하니...
읶은 고추를 골라 따고 고구마를 몇이랑 캐어보았으나 아직은 알맹이가 작다. 캐자니 그렇고, 놔두자니 산돼지 좋은 일시키니 진퇴양난이란 단어를 이런때 쓰는가 싶었다.
나야 그렇다치고, 농민들은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직접피해와 그땜에 미리 포기한 농사의 보이지 않는 손해들...
동물보호론자들에게 묻고싶었다. '식물은 생명이 아니고, 자신들은 고기 안먹나?'
식물들 입장에선 그들은 '보호론자'가 아니라, '편견론자'에 불과할 것 같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11. 04(금)
오후에 휴가를 내고 밭으로 향하였다. 배추밭을 들렀더니 배추벌레와 진딧물의 피해가 심했다.
마늘은 작년보다 더 높은 발아율을 보인다. 간단히 잡초도 뽑고 멀칭에 덮힌 싹의 창을 뚫어 주었다.
고구마밭을 살피니 한쪽만 산돼지가 파먹은 줄 알았더니 완전히 다 파먹었다. 이삭줍듯 고구마를 수확했다.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내년부턴 멧돼지가 먹을만한 농사는 짓지 말아야겠다.
이렇게 이득도 없는 농사를 지으라고...농사를 짖지 않으면 자경농지가 아니라고 세금을 많이 부과한다니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 정책이다.
예전 밭을 팔때 과세청과 자경운운 양도세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나의 항변은 "법은 어떻든 니들 같으면 농사짓겠니?"였다. 결론은 그런 이유로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무용담(?)이다.
말단공무원들인들 어쩌랴? 서류없이 크고 텅빈 책상 소유자나 맨날 싸움질하는 투사 정치인들이 이런 현실을 알리가 없을 것이다.
*이후 신농(神農)의 후예는 3명만 남았고, 우리들은 600평 비닐 하우스를 무상임대, 부추와 고구마를 심었으나 실패했다.
그래도 돌아보니 행복한 시절이었고, 젊은시절 흙과의 약속을 조금은 지킨셈이다. 나는 올해부터 아쉬운 마음 뒤로하고 흙묻은 손을 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