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에 자주 물주지 않아도 되는 화월나무와 인삼고무나무 화분이 있다. 수 년 째 분갈이를 해주지 않아 그간 두 나무에 좀 미안했다. 간밤에 쓰던 글을 퇴고한 일요일 새벽이었다. 날이 샐 무렵 아파트 정원으로 내려가 흙을 갈고 물을 주어 다시 베란다에 두었다. 일찍 잠깨다보니 종이신문 오지 않는 아침은 좀 허전했다. 바깥사람 출근시각 맞추지 않아도 되는 느긋한 집사람을 재촉해 아침밥은 겨우 얻어먹었다.
현관을 나서면서 집사람한테 여느 때와 달리 산으로 가지 않는다고 했다. 지난봄 어느 신문의 지리산 둘레길 기사가 생각났다. 위로 오르지 않고 옆으로 가는 여정이었다. 지리산 자락 남원과 함양에서 먼저 길을 내고 있었다. 산허리를 감싼 옆으로 난 길을 걷는 것이다. 가다보면 다랑이 논둑길이고 아픈 역사인 빨치산이 타고 다닌 길인 것이다. 지난여름 부부가 함께하는 어느 모임으로 그 지리산 둘레길 근처에서 서성였다.
나는 집을 나서면서 내가 사는 동네 둘레길 걷고 싶었다. 지도를 펼쳐 들고 나설 일도 아니고, 번듯한 자동차를 끌고 나설 위인이 아니다. 요즘 부쩍 화두에 오른 저탄소 녹색성장은 내가 먼저 실천한다고 자부한다. 내 이름이나 가족 이름으로도 자가용 승용차를 가지지도 몰지도 않는다. 집에는 에어컨을 비롯한 불요불급한 가전제품은 두지 않는다. 오십이 된 여태까지 세수하고 얼굴에 로션 한 번 찍어 바른 적 없다.
내가 사는 이웃 동네 반송아파트는 새롭게 재건축했다. 이름 그대로 명품인 트리비앙과 노블파크로 최고 상류 아파트다. 나는 그 아파트 부근 창원실내수영장 건너편에서 갯가로 가려고 216번 시내버스를 기다렸다. 전에는 이 버스가 한 시간 넘는 배차 간격이었는데 최근에는 자주 있다고 들었다. 창원 끝 대방동에서 또 다른 창원 끝 석교마을까지 가는 시내버스다. 배차 간격을 좁힌 데는 마창대교가 완공되어서기도 하다.
요즈음은 시내버스 정류장 전광판에 실시간으로 노선별 버스도착 시간을 예고해 주고 이어 승객은 참 편리하게 되었다. 십여 분 기다리자 온 216번을 탔다. 일요일 오전이라 버스승객이 많지 않았다. 나는 운전석편 좌석에 앉았다가 마음을 바꾸어 내리는 문 쪽으로 바꾸어 앉았다. 그 이유는 차창 밖 오른쪽 봉암동 갯벌과 마산만 바다를 창밖으로 바로 보기 위해서였다. 버스는 공단을 가로질러 양곡동을 둘러갔다.
차창 밖으로 봉암동 갯벌을 감상하다보니 금세 거뭇하고 흐릿한 합포만 바다였다. 건너는 마산수출자유지역이고 무학산 허리까지 집들이 다닥다닥한 마산의 도시경관이 한 눈에 들어왔다. 육중한 공장구조물과 산업부두인 두산중공업단지를 빠져나오니 돝섬이 보이고 바다는 멀리서 보기에 쪽빛이었다. 건너편 신라적 최치원이 다녀간 월영대는 도심건물에 가려졌고 가포해수욕장도 사라진지 오래고 매립공사 중이었다.
그간 삼귀해안을 몇 차례 다녀갔다만 모두 밤에만 왔다 갔다.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과 소주 한 잔 하려고 횟집을 찾았고, 친구네 제안으로 가족끼리 여름밤 나들이였다. 낮에 혼자 찾아오긴 처음인데 우람한 마창대교 교각과 상판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휴일을 맞아 여러 태공들이 가드레일 밖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내가 탄 버스는 마창대교 교각 아래를 지나 해안가 계속 돌아 종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삼귀마을 회관 앞에 내렸다. 밤에 왔을 적엔 잘 몰랐는데 주변 지형지물 살필 수 있었다. 그곳서부터 걸어 석교마을 버스종점까지 걸었다. 바닷물은 더 깨끗하고 우람한 마창대교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버스종점 이르니 둥치가 큰 해송이 짓는 그늘 아래 마을 노인 두 사람이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해군기지 때문에 길은 더 나아갈 수 없었지만 내 마음은 진해만까지 이어져 거제 앞 바다까지 가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돌아 나와 귀산 횟집 촌을 지나 갯마을과 용호마을까지 계속 걸었다. 자전거하이킹 족이 지나고 그럴싸한 오토바이를 탄 족속들도 붕붕거리며 때지어 달렸다. 귀산 앞 바다는 맑아 바다 밑 모래와 자갈까지 훤히 비치었다. 그래도 그 많은 태공들은 고기 한 마리 건져 올리지 못했다. 물때로 봐서 용왕이 만조백관을 불러 회의를 소집했지 싶었다. 높다란 마창대교 교각 아래로 육중한 컨테이너선 들어오고 있었다.
한참 더 걸어 어느 모롱이를 지날 때였다. 처음으로 태공이 고기 한 마리를 낚아 올렸다. 주둥이가 학처럼 생긴 고기였다. 투명한 바다 속에 몇 마리 학꽁치들이 유유히 헤엄쳤다. 그 곁에 세워 놓은 ‘삼귀애향비’를 읽어보니 창원에 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고기잡이하고 농사짓던 사람들이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그 마을 이름이 귀현, 귀곡, 귀산이었다. 지금은 맨 안쪽 귀산만 남았고 그 끝에 작은 석교마을이 있었다.
첫댓글 또 졸은 곳 안내하셨네요. 한 30년 전쯤 가 본 동네를 생생하게 묘사해 주셨군요. 그 어디 가근방 막걸릿집은 없던가요? 나도 함 가 보고 싶은 퍽 낯선 동에입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 계속 발품 드신 노고를 글로 올려 주세요. 염치 없이 읽고 있자니 마치 컨닝하는 아이들 마음이랍니다. 시간의 허리를 잡아매고 다니시는 주 시인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