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정 오공 묘갈명(僉正吳公墓碣銘)
지위는 낮으면서 성품이 강직하여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벼슬살이에 구차하게 연연하는 뜻이 절대로 없는 자는 바로 오윤주(吳胤周) 윤지(胤之) 공이다. 공은 해주(海州) 사람이니, 지중추부사 숙헌공(肅憲公) 휘 빈(䎙)의 손자요 현감 휘 두성(斗宬)의 아들이다.
현감은 양곡(陽谷) 충정공(忠貞公 오두인(吳斗寅))의 집안 친척이고, 외조부는 도정 함평(咸平) 이초로(李楚老)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여 문예가 일찍 이루어져 과장(科場)에 나갈 때마다 동류들을 압도하였다. 갑오년(甲午年,1714, 숙종 40) 감시(監試)에 응시하려고 했는데 과거를 보는 날 큰비가 내리자 공이 말하길,
“병이 생길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무릅쓰고 갈 수 있겠는가.”
하였다.
6촌형인 해창공(海昌公 오태주(吳泰周))이 감탄하며 말하길,
“윤지는 노유(老儒)에다 시에도 능한데도 과거응시에 연연해 하지 않으니 그 지조를 높일 만하구나.”
하였다.
공은 단지 생원시에 응시하고 마침내 회시에 합격하였다. 병신년(丙申年,1716)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고 차례로 전설사 별첨으로 승진하였으며 의금부 도사로 옮겼다가 의영고 주부에 오르고 또 전생서로 옮겼다. 외직으로 나가 석성 현감(石城縣監)이 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관찰사와 친척이라는 혐의로 체직되었다.
신축년(辛丑年,1721, 경종 1), 지금 성상께서 새로 세제(世弟)에 책봉되셨는데, 흉악한 무리와 역적 환관이 결탁하여 세제를 위협하니, 공은 근심과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지규(李志逵) 등 산관(散官)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철저히 조사하기를 힘써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을사환국(乙巳換局,1725년) 때 맨 먼저 봉화 현감(奉化縣監)에 제수되었다. 봉화현 근처에 태백산(太白山)이 있기 때문에 고을을 다스리는 자가 널감을 벌목하는 경우가 많아 백성에게 해를 끼쳤는데, 공은 자신부터 금령을 어기지 않고 남에게도 매우 엄격히 금하게 하였다. 송사를 판결하면서 상관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가 미움을 사서 파직되어 돌아갔다.
무신년(戊申年,1728, 영조 4), 익위사 위솔을 거쳐 영동 현감(永同縣監)에 제수되었다. 군정을 다스리는 데 마음을 두어 병장기가 일신되었기에 어사가 포상을 아뢰어 말을 하사받았다. 영남의 유생 정구(鄭構)는 공의 먼 친척이었는데, 그가 어떤 일로 관찰사 조현명(趙顯命)에게 죄를 지어 추포될 지경이었다.
정구(鄭構)는 궁지에 몰려 공에게 의탁하려고 하였는데, 영남 감영의 사람이 노상에서 정탐하다가 그를 잡아 꽁꽁 묶었다. 공은 가마를 타고 나가 고을 사람에게 그를 풀어주라고 꾸짖고 그를 데려갔다. 조현명은 매우 성이 나서 잘못을 나무라기를 그치지 않으니, 공은 회첩(回牒)하면서 말하기를,
“그 사람은 과연 우리 관아에 있습니다. 이미 큰 죄도 아닐 뿐더러 다른 도에 해당하니, 관찰사의 위엄을 두려워해서 친척의 손으로 친척을 잡아서 송치하는 일을 인정상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그날로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갔다.
조현명이 결국 장계를 보내어 공의 죄를 청했는데, 공은 심문을 받고 곧 풀려났다.
계축년(癸丑年,1733), 빙고 별제에 보임되고 공조 좌랑으로 옮겼다가 종친부 전부로 옮겼다. 외직으로 나가 마전 군수(麻田郡守)를 지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관찰사를 거슬러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다시 익위사 위솔이 되었다가 상의원 별제로 승진하였으며 사옹원 첨정에 올랐다. 계해년(癸亥年,1743) 8월 20일에 세상을 떠나니 공이 태어난 경술년(庚戌年,1670, 현종 11)으로부터 74년이 지난 때였다. 그해 10월에 양성(陽城) 강기리(康基里) 선영에 안장하였다.
공은 두 번 장가들었으니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감사 세익(世翊)의 따님이고, 연안 김씨(延安金氏)는 성명(聖鳴)의 따님이다. 통제사 이의풍(李義豐), 좌랑 송재항(宋載恒), 사인 이일증(李日曾)에게 시집간 딸들은 전배(前配)의 소생이다. 아들 유(𪼛)와 김흔(金炘), 이화섭(李華燮)의 아내가 된 딸들은 계배(繼配)의 소생이다.
공은 집안에서의 행실이 독실하여 부모님을 섬김에 낯빛을 온화하게 하고 뜻에 순종하였으며 사랑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였다. 선조를 받드는 일에는 더욱 정성을 다하였으니 전염병이 극성일 때도 한 번도 제사를 폐하지 않았으며, 종갓집이 꽤 멀리 있었지만 추위와 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반드시 가서 제사를 도왔다.
묘소와 묘비에 대한 일도 모두 정비하였다. 일찍이 조부를 위해 시호를 청하려고 장차 전답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려고 했지만 성사되지 못하자 죽을 때까지 항상 잊지 못하였다. 평소 충담함을 스스로 견지하여 좌중에는 잡스런 빈객이 없었으며, 벗과의 교제에서는 신의를 중시하여 모두 환심을 얻었다.
논의가 엄정하여 화복(禍福)이 갈리는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편안히 여겨 헌신짝 벗듯 관직을 버렸다. 집안이 평소 가난하여 때때로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태연하게 지냈다.
공은 자주 나를 찾아왔는데 조용히 말하기를,
“나는 참으로 공을 깊이 사모하니, 내가 죽거든 공이 나를 위해 명(銘)을 지어주십시오.”
하였는데, 지금 과연 유(𪼛)가 와서 내게 청하니 감히 병을 핑계로 사양할 수 없다. 명은 다음과 같다.
즐겁고 편안한 가운데 준열한 기운 있으니 / 樂易中有峻厲之氣
이 사람은 지조가 확고한 자로구나 / 斯其爲守之確者歟
내가 그 아름다운 덕을 모아서 / 我最其美
묘비에 나열하노라 / 列于陰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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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解]
[주01] 첨정 오공 묘갈 :
저자가 오윤주(吳胤周, 1670~1743)를 위해 쓴 묘갈문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