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듣던 일이 눈앞에 벌어지자, 휘성대공(輝星大公) 유비, 지성대공(地星大公) 조조, 하성대공(河星大公) 손권은 물론 황제의 곁에 있던 태제 유성까지도 그 자리에 있던 이들 중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 아름다운 새에게로 쏠렸다.
세 알의 오동나무 열매를 먹고 난 봉황은 땅으로 내려서더니 그 자리에서 꼬리깃을 세우고 빙글빙글 세 번을 돌았다. 순간 오색 안개가 땅에 깔리고 봉황이 있던 자리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봉황녀(鳳凰女)로 지어졌고, 뱃속의 아이를 유산하고 죽은 황후 대신 황제 유협은 그녀를 황후로 맞아들이고자 했다. 문제는 여기서 터졌다.
황제의 기대와는 달리 봉황녀는 자신의 배필을 유성으로 천명했다. 당황한 유협은 애원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며칠 동안 혼자서 술에 취해 방안에 틀어박혔다. 무서운 갈등이 그의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그즈음 해서, 황실의 족보를 관장해 온 종정경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의 죽음을 조사하던 관리들은 그의 집에서 발굴한지 얼마 안 되는 듯한 고서(古書)를 찾아냈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한나라 황실의 족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 책이 문제가 되었다. 지금까지 종정경이 관장해 온, 황실에서 보관하던 족보책에는 분명히 쓰여 있는 유성의 이름이, 그 고서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유협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유성을 폐위하고 철감옥에 넣어 버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전 중원이 통분하며, 거리마다 슬프게 훤화하는 소리로 떠들썩했다. 통칭 삼성대공으로 불리게 된 유비, 조조, 손권 등은 황제에게 탄원하였다. 그를 감옥에 넣어서는 안 된다고.
그러나 황제는 유성의 뒤에 버티고 있는 중원무림의 세력을 무시한 채 보란듯이 그를 철감옥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한철빙쇄감옥(寒鐵氷碎監獄)에 넣어버렸다. 신료들은 매일같이 회의를 열었고 황제를 달래보기도 했으나, 소용없이 세월은 흘러 백일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 회상 끝 -
유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나에게 바로 오지 않고……. 형님 폐하께 갔을까."
무슨 말일까?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말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정작 유성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그 고서(古書)가 날조된 것이라는 것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는 한 그는 열이면 열 죽을 목숨이었다. 현재로서는.
[하운. 거기 있는가?]
[예. 전하]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가……. 돌아왔네. 실종된 동안 마계와 명계를 떠돌았던 모양이야. 형님을 조종하고, 가짜 고서를 만드는 이유는 한 가지이지. 나를 다시 미스바로 데리고 가려는 게야]
[……]
[용족의 일원에 지나지 않았었는데……. 지금 그의 마력은 너무나 강해졌어. 순간이지만 그 환상은 나까지 속였으니까]
하운은 안타까운 듯 말했다.
[돌아가신다는 말씀은 결코 하지 마십시오. 주군은 영원히 저희들의 주인이십니다. 어떻게든 주군을 그곳에서 나오시게 해 드릴 것입니다]
[그는 내가 유일하게 사모했던 사람이다. 하운. 내가 여기서 무사히 나간다면 그는 어떻게 할지 모르겠구나]
[……]
[나는 그의 마음을 알고 싶어.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알아다 주게]
[……알겠습니다. 주군……]
하운에게 전음을 보낸 유성은 창살 틈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푸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8월의 하늘이었지만 가을처럼 새파란 하늘이었다.
"후우…….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로구나!"
유협은 방에 틀어박혀 나올 줄 몰랐다. 처리할 나랏일이 쌓이고 쌓여도 오로지 그는 방에서 나올 줄 몰랐다. 그의 손에는 은잔이 들려 있었다. 불과 백여 일 전에 누구보다도 사랑했고 의지했던 동생, 유성이 그에게 선물로 주었던 물건이었다.
"태평……."
자신이 지어주었던 그의 자(子)를 부르며, 그는 은잔에 또다시 술을 채웠다. 물론 다음 순간 그 술이 그의 목구멍 속으로 넘어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다.
"어째서……, 어째서 나는……? 그녀는 왜 너를……. 아니, 그보다도 왜 종정경의 죽음에서 너의 이름이 없는 황실의 족보가 발견된 것인가?"
대답은 없었다. 오로지 그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이 존재할 뿐.
"쾅!"
유협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의 손, 아니 그의 전신이 떨리고 있었다. 분노와 광기(狂氣)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면서……. 그는 미친 듯 중얼거렸다.
유협은 은잔을 내려놓고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색 창연한 빛을 뿜어내는 눈동자와 눈부신 적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희한한 인영(人影)이 햇살 속에 눈부시게 서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죽은 줄 알았던, 아이네스의 옛 패밀리어 미즈모르였다. 차원문의 균열로 헤어진 후, 패밀리어의 계약은 끊어지고 정령의 문으로 떠난 줄만 알았던 바로 그 존재, 미스바의 무성(武星)이자 대제국 드로아의 대공(大公)까지 지냈던 사람이었다.
그는 아이네스와 헤어진 후 어떤 세월을 살아 왔기에 그 맑던 눈을 잃어버리고 독사 같은 눈동자를 하고서 황제 유협의 곁에 오게 된 것일까?
햇빛이 비치자 그의 눈동자는 보랏빛으로 변하며 반짝 빛났다. 순간 유협은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아아……. 제발……. 나를 놓아다오……! 제발…….'
유성은 눈을 떴다. 별빛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어 검푸른 밤하늘이 마치 비단처럼 아름답게 그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려는 듯, 그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가 이내 닫혔다. 아름답던 모습은 몹시 수척해져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이 땅에 그 소리가 전해져 오려면 아직도 새털같은 나날이 지나가야 하거늘……."
그는 창살 너머의 하늘을 보다가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조그만 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한편, 바로 그 창살 밖에서는 하운이 무언가 쓰고 있었다. 그 필기구(筆記具)는 붓(筆)은 아니었다. 간간이 먹을 묻혀야 쓸 수 있는 것이 붓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날아갈 듯이 움직이고 있었고, 손에 든 종이뭉치도 분명 이 시대의 제책 방식이 아니었다.
열심히 뭔가를 쓰고 있는 하운의 머릿속에서는 생각들이 요동쳤다.
'전하. 당신의 말씀대로라면 이 땅에 그 소리가 전해져 오기까지 아직도 수없는 세월이 지나야 합니다. 그 때에 그들이 당신을 그분의 양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찌 하시려 하십니까.
당신의 명령이 아닌 일을 제 임의로 실행하는 일은 이 하운(河雲), 지금까지의 짧은 생애 동안에 처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당신께서 주신 선물을 이런 곳에 씀은 아시겠지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인비저빌리티(Invisibility)로 모습을 감춘 채, 창살에 달라붙다시피 하여 나직하게 들려오는(그에게는 결계가 소용이 없다) 희망과 위로의 말들을 받아 적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하운이었다. 그는 유성이 무엇에 의지하며 감옥 안의 생활을 견디고 있을지 잘 알았다.
모습을 감춘 채로 그의 힘, 그의 의지의 비밀을 적어 내려가는 하운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고 알아볼 수 없는 문자 - 유성이 가르쳐준 언어로 그는 적어가고 있었다.
'snsdmf emfdj qhfk. rmemfdl ek ahdu sjdprpfh dhsmslfk.'
그 때, 끼이익 소리와 함께 감옥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외우던 유성의 입술도, 빠르게 움직이던 하운의 손도 멎었다. 문이 열리자, 세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전하. 신들이옵니다."
유성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여인처럼 흰 손목을 묶은 쇠사슬과 아름다운 발목을 붙들고 있는 쇠고랑이 그를 제약하고 있었다. 그러나 찾아온 사람들을 보는 그의 얼굴은 밝았다. 그는 미소와 함께 몸을 숙여 예를 올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는 세 사람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들이 운명을 걸고 섬기고자 하였던 주군(主君)이 바로 유성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그는 쇠사슬에 묶인 채 힘겹게 그들에게 죄인으로서의 예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공 전하들께서 어쩐 일로 죄인을 찾으셨사옵니까?"
당황한 손권이 급히 그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마, 말씀을 낮추시옵소서. 전하. 소신들은……."
손권은 그 다음 말을 내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유성은 미소와 함께 다정스레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손권은 그런 유성의 손을 꽉 잡았다.
그들은 지난 적벽대전 이후로 깊은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데다가 손권은 한낱 제후, 유성은 황족으로 다음 보위를 이을 사람이었음에도 그들은 지난 번 그 날까지, 약 5개월 동안 친밀한 친구로 지내 왔었던 것이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사옵니다. 언제이옵니까?"
손권은 어떠한 전투에서도 떨리지 않을 것 같던 그의 무릎과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입은 열릴 줄을 몰랐다. 방금 한 말을 끝으로 그의 혀와 입술은 제 기능을 다한 것일까.
"저, 전하……!"
역시 어깨를 떨고 있던 유비는 끝내 눈물을 쏟았다.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무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심정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었다. 손권도 괴로운 신음을 토해내며 눈물을 흘렸다.
이를 악물고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조조는 말없이 품에서 약을 꺼내어 나신(裸身)인(유성은 하의만을 입은 채 묶여 있었다) 유성의 상체에 나 있는 상처에 바르기 시작했다. 아름답던 육신에는 온통 채찍과 태형의 자국들이 난무했다.
"언젠가……, 전하께서 저에게 이처럼 해 주셨지요. 기억하십니까?"
그는 저 화용도 위에서 동상과 화상에 시달리는 그에게 유성이 직접 치료를 해 준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의 행동에서 유성은 자신의 직감이 맞아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구태여 옛일을 떠올리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것이 지금 같은 상황이다. 조조가 그런 말을 한다면 - 자신의 사형은 확정된 것이다.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 소신들에게는 아직 힘이 없사옵니다. 폐하의 뜻이 워낙에 완고하신지라……."
"……그 때 일은 제게 참으로 즐거운 추억이었습니다."
이제, 유성은 지난 일을, 세 사람은 지금의 일을 서로 말하고 있었다. 손권이 문득 말했다.
"지금 전하께서 살아 계심도 소신들의 힘이 아닙니다. 천재(天災) 때문이지요."
그 순간 고통을 참으며 조조가 치료하는 대로 몸을 맡겨 놓고 있던 유성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천재라니요?"
"그것이……."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였다.
유성이 감옥에 갇힌 때는 5월 보름경이었다. 유협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동생이었고 다음 보위를 이을 사람이었던 유성을 감옥에 넣어버렸다. 죄목은 기군망상(欺君罔上).
그런데 그 날 이후 희한하게 비가 오지 않았다. 여름 같지 않게 날씨가 서늘하고 통 습기가 없어, 농민들은 불길한 징조라며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상 이변으로 난데없는 우박이 쏟아지고 메뚜기가 떼를 지어 창궐(猖獗)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그것도 동서남북 어디 할 것 없이 중원의 곳곳이 그런 재앙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황제 유협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민군(民軍)의 반란을 마주하게 되었다. 중원의 재앙은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천하를 자기 몸처럼 아끼는, 노자의 말한 바와 같은 가믈한 덕의 사람을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가두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며 전국의 백성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주동은 육일쌍성(六日雙星)이라 불리는 무림의 12명 선남선녀들과, 녹림맹의 팔괘성단들이었다.
또한, 남궁수혜와 천경호의 주재 아래 있는 중원의 모든 상계(商界)는 전면 파업에 들어갔고, 운조(運漕)는 움직이지 않았으며, 농토는 버려지고 대장간에는 불이 꺼져 모든 경제 활동이 마비되었다.
지방의 관(官)들은 백성들과 하나가 되어 반란에 동참하는가 하면 무인들 - 유성의 힘인 그곳에 가입하는 등 중앙 정부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
황제는 병부에 영을 내렸으나 병부는 움직일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형식적인 명령은 전혀 시행되지 않았고 황제에게 대책조차 올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황제는 병부의 수장을 벌할 수도 없었다. 그는 바로 유성의 호법 출신으로 옛날 황제의 곁을 오래도록 떠나지 않으며 지켜주고 벗이 되어 주었던 이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움직이려 하지 않는 한 아랫사람들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었다. 이미 병부의 인심이 그에게 있었고 한 치의 빈틈도 거기에는 없었기 때문에.
거기까지 듣고 난 유성은 벌떡 일어났다. 순간 그의 발목을 묶고 있던 쇠사슬은 맥없이 벽에서 뽑혀 나왔고, 당연히 그것을 본 세 사람은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유성의 맑던 눈에서는 불이 나오는 듯했다.
"민군의 반란이라니! 폐하께 반란이란 말씀입니까?!"
"그, 그러하옵니다. 전하."
"아니 됩니다. 절대로! 대공, 영상을 좀 불러 주십시오. 그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영상이란 삼상의 우두머리이자 삼성대공을 제외한 신료들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유성이 머리를 짜서 만들어 낸 삼상칠령제의 승상격인 자리로 - 황제는 삼상칠령제는 폐지하지 않고 그대로 두어 제국을 새롭게 운영하고 있었다 - 현재는 제갈량이 서른두 살의 약관으로 그 자리에 올라 제국의 사업을 스행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급히 감옥을 빠져나와 제갈량에게로 달려갔다.
제갈량도 마침 반란에 대한 일로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다. 이 반란은 무림인들이 일으킨 것이다. 말은 하지 않아도 저잣거리의 거지나 어린 아이들도 알 수 있는 사실, 전하께서는 무림지존이 아니셨던가! 그런 분이 황실의 감옥에 갇힌다는 것을 어찌 그 자존심 높은 무림인들이 두고 보겠는가?
그들은 전하를 하늘처럼 따르고 신봉(信奉)하는 자들. 어찌 그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황명(皇命)이다. 마땅히 따라야 하는 황명 - 그 명을 따라 그들을 정벌해야 한다. 그러나 정벌할 힘이 없다. 그들을 만나 볼 수조차 없다. 아무리 사신을 보내 보아도 쫓겨오니 어찌한단 말인가?'
그가 유비를 비롯한 삼성대공의 방문을 받은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아니, 세 분 대공들께서 어쩐 일로 이곳까지 납시셨습니까?"
유비는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전하께서 만나기 원하십니다. 영상은 어서 가십시다."
"전하께서 말씀이시옵니까?"
"그렇소이다!"
순간 제갈량은 튕기듯 달려나갔다. 물론 유성이 갇혀 있는 철감옥으로.
'어째서……, 일까. 반란의 소식을 들은 것일까. 사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가서 뵙고 싶어했던가. 그러나 나라를 생각하고 구태여 시간을 내어 오지 말라는 당부가 나를 붙들었다.
……어쨌든 기쁘군……. 나의 주군. 나의 친우(親友). 마지막 가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보지 않으면……. 나는 미치고 말았을 것이다……!'
유성은 그를 보자 이전과 별다를 것 없이 태연하고도 부드러운 미소로 반겼다.
"오랜만일세. 공명!"
"태, 태평……!"
온 몸이 상처와 흉터로 뒤덮인 유성을 본 공명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차라리 정신을 잃고 털썩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감옥에 갇힐 때, 하루에 수십 번이라도 찾고 싶었지만 나랏일에 주력하라는 신신당부를 하며 철감옥 속으로 사라졌던 그의 친구, 그의 군주 - 미칠 듯이 보고 싶었으나 참고 보지 않았던, 아니 보지 못했던 사람.
공명의 눈에는 당장에라도 흘러내릴 듯 눈물이 가득 고였다.
간신히 뒤따라온 삼성대공들의 얼굴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태연한 것은 유성뿐.
"역시 친우의 얼굴을 보니 반갑고도 기쁘군 그래. 하하하……. 건강했나?"
"태평……!"
눈물을 쏟을 듯한 제갈량과는 달리, 유성은 처연(凄然)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흘렸다. 제갈량은 정신을 파괴시킬 듯한 지독한 아픔을 견뎌내야만 했다.
도저히 - 아니, 이 사람의 이런 모습은 정말이지 보고 싶지 않았다. 이성을 잃어버릴 만큼 그는 괴로웠다.
"어울리지 않아. 그렇게 울 듯한 얼굴 하지 말아. 공명."
"……이 사람……."
"부탁 하나 하고 싶은데……. 들어줄 수 있지?"
제갈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뭐라고 해도 좋다. 그는 나의 친우이다.
"말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유성은 기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수경 선생님과 방덕공께, 나의 전언을 전해 주게. 부왕들을 모두 모아 달라고."
"……뭐?!"
"그분들이라면 가능하시지. 그들을 진정시켜 달라고 하게. 내가 원하는 일이라고 전해 줘."
"!"
제갈량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뒤에 있던 세 대공들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저, 전하! 그런……!"
"어째서, 아니 어떻게……."
"그러시면……!"
그들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유성은 다시 말했다.
"자네도 알 수 있겠지. 이 대륙을 휩쓰는 반란의 물결과 그 근원을. 증거는 없지만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는 사실 - 빛과 어둠에 공존하는 나의 힘 중에서도 나의 검이자 나의 날개, 그리고 '힘의 상징'인 그들이 근원일세.
자네와도 적잖은 친분이 있으니 이 말을 전한다 해서 자네를 어찌하지는 않을 거야. 이란과 적영이 자네를 태사부님들께 데려갈 것이고. 열두 별과 여덟 별무리를 잠재우고, '힘의 조각'과 '힘의 일부'를 가라앉히는 것 - 자네만이 해 줄 수 있는 일이야. 내 말뜻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네이니까."
"……."
"물론 태사부님들께서는 말 한 마디로도 반란을 잠재우실 수 있는 분들이시지만, 무림의 일 - 특히 무림부왕회의 일에는 나의 말이 없으면 절대 부동을 고수하기로 하신 분들이니 이런 조치가 필요한 거야."
공명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유성은 이 말을 가장 해야 할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입으로 듣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반란군이 칼을 들이댄 상대가 바로 그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사람임에도, 그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형이라는 이유, 그가 황제라는 이유 때문인가.
제갈량은 소리를 칠 수 없었다. 유성의 마음,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기에 - 그의 마음은 지극히 평안했고 차분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 거대한 고요함에는 어떤 강한 무엇인가가 존재했지만 그는 아직 그것을 알 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일이야. 해 줄 수 있지?"
"……그런 모습으로 미소를 지어도,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
공명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유성이 다시 말했다.
"하하. 그래. 이런 상황에서 미인계란 통하지 않겠지. 그렇지만 공명 - 나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 내 운명은 이미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었는가? 남병산에서의 그 응답은……. 약속인걸. 이보다 더한 일이 일어났어도 나는 견딜 수 있었을 걸세."
"……! 그 응답을 신뢰하는 것인가? 그것이 자네의 그 고요한 마음의 힘의 원천인가 보군?!"
"맞았어. 역시 자네로군."
유성은 싱긋 웃기까지 했다. 제갈량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릿한 액체가 혀끝에서 느껴지고 있다. 가슴에서는 뜨거운 무엇인가가 솟구친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유성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보았다 - 그의 눈 속에서 빛나는 어떤 것을.
유성의 이어지는 목소리가 아련해지고 있었다.
"이미 하운에게 말했어. 이란과 적영에게 자네를 모시고 단계와 현산으로 찾아가도록 하라고……. 성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걸세. 나를 신뢰한다면, 내가 믿는 그분도 신뢰해 줘…….
자네니까,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제국을 회생시키고 전무후무한 발전을 이루는 것은 나의 목표였어. 내가 목표로 삼은 것은 흔들리지 않아. 앞으로도 역시 그럴 것이고. 이룰 때까지 나는 쓰러지지 않아. 그러니 내 말대로 해 주게."
공명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듣지 않는 체 대답 대신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런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네, 내가 자네를 한 대 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아는가?"
"으음……. 글쎄. 이마에 입이라도 맞추어 줄 것 같았는데? 아니었나?"
"……."
그는 말없이 유성의 이마에 입술을 살짝 갖다댔다. 유성은 빙그레 웃었다.
"자네가 내 마음을 완전히 이해해 준다면……. 지금 자네가 고통스러운 것을 잘 알아. 미안해 -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제갈량은 유성의 이마에서 입술을 떼며 무섭도록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태평……. 내가 자네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야. 그것이 자네가 하늘로부터 받은 마음이라면……. 나는 억겁의 지옥에 떨어져도 자네의 하늘을 저주할지도 몰라."
그 순간 유성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
"……지금, 뭐라고?"
"나는, 자네의 하늘을 저주할지도 모른다고 했어……. 무엇 때문에……. 앗!"
유성의 눈에서, 그리고 공명의 뺨에서 불꽃이 튀었다. 짜악 하는 소리가 감옥을 다 울릴 지경이었다.
공명은 뺨이 화끈하다는 생각을 했다. 유성은 팔을 내리며 불을 뿜듯 외쳤다.
"공명! 날더러 자네를 죽이라는 거야? 왜 그런 소리를! 미쳤어?!"
"……무슨……, 말이지?"
공명은 당황했다. 유성이 그를 때린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성에게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유성은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기에.
"이 바보 같은 친구야……. 그런 말은……. 우리 율법에 따르면……. 돌로 쳐죽이게 되어 있단 말이야……. 다른 말은 다 해도, 제발 하늘을 저주한다는 말은 하지 말게. 제발……."
공명은 그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처음으로 유성에게 맞은 것보다도, 그의 눈물 때문에 더욱 약해지는 그의 마음을, 그는 어쩔 수가 없었다. 흐느끼던 유성이 다시 말했다.
"나를 화나게 한 대가야. 내 말대로 해. 처음으로 자네에게 내리는 지존령이야."
"하……. 웃기지 말아……. 나는 무림의 일원이 아니야. 자네의 지존령을 따르는 위치가 아니란 말일세."
어느 새 자신의 마음을 되찾은 제갈량은 생애 처음으로 유성에게 따지고 있었다. 눈물어린 얼굴, 고통으로 떨리는 어깨, 아픔으로 힘이 빠져버려 서 있기도 힘든 무릎을 하고서.
"내가 자네의 명을 따르게 하고 싶거든 내게 설명해 보아…….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자네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것인지……, 자네가 말한 천애(天愛)라는 것이 이토록 자네를 밑바닥까지 끌어내릴 수 있는 것인지……, 어둠 속으로 떨어뜨려도 되는 것인지 말이야."
"……공명."
"정말이지 자네는 너무해. 대체 내게 하려는 부탁이 그런 것이라니……. 자네의 하늘은 자네에게 무엇을 해주는가? 미혹에 홀린 바보처럼 그저 그런 모습만 보여주고! 이유가 대체 뭐야! 말해! 말해보란 말이야, 이 사람!"
공명의 입에서는 끝내 절규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눈물이 터졌다.
"이제 그만해……. 내가 힘들단 말야……. 이 바보야……. 내가 죽으면 미칠 거라면서, 나를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게 만들 수가 있는 건가……?"
유성은 부끄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래, 나의 친구여……. 자네를 잃으면 나는 그 즉시 어둠으로 떨어질지도 몰라. 자네의 괴로움은 곧 나의 아픔인걸…….
그렇지만 벗이여. 인간이 다른 사람을 위하며 산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무섭도록 위하는 것이라네. 다른 사람들을 이해해주고 높여주고 배려해 주면, 자신이 행복해지거든. 자네가 원하지 않는 모습이라고 한다면 내가 서운해지는 거야."
"……그런! 대체……."
"공명, 나는 말일세……. 태양과 달을 닮고 싶어. 흰 천에 흰 실로 이름을 수놓고 싶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빛을 발하고 싶어. 끝없는 하늘 가운데 동화되어 무한을 향해 날아가고 싶어. 인간의 굴레를 쓴 채라도, 해 보고 싶은 거야. 영혼은 변하지 않으니까."
"……."
뒷말은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지만, 공명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성은 그가 이해하는 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단 한 마디를 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결코 하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그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대계(大計)를 흔들리게 할 수는 없었다. 하늘의 뜻으로, 진천명으로 만방에 기치를 내걸었던 원대한 환상을…….
공명은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대로 유성을 끌어안고 울어 버리고 싶었지만……. 지금 그에게 더 이상 눈물을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더 이상 자네를 보지 않겠어. 한 번 더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미쳐 버릴지도 몰라. 자네를 사랑하지만……. 그렇기에 불가능한 것도 있어. 자네는 하늘의 영혼일지라도, 나는 인간이니까."
그리고 그는 떨리는 걸음을 천천히 옮기기 시작했다. 거북이라도 그를 앞지를 수 있을 만큼 느린 속도였다. 유성은 그의 뒤에 대고 다시 말했다.
"자네는 내 영혼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야. 자네는 결국 내 말대로 하게 될 걸세. 나는 자네를 믿어. 아무리 그렇게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말해도, 자네는 내 부탁을 들어줄 거야."
"그만하게!"
"자네를 믿겠어. 나는 이 땅에 더 이상은 피 흘림이 없기를 바라네."
'믿겠어……. 믿겠어……. 믿……, 겠어……."
제갈량은 숨이 멎어버릴 것 같았다. 대꾸도 하지 않고 돌아선 그에게, 잠자코 지켜보던 유비와 조조와 손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어깨의 떨림을 참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넘쳐나고 있었기에.
그는 지독한 갈등을 겪으며 옥문을 빠져나왔다. 어떻게 걸어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파공음(破空音).
유성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그의 귓전을 울리고 있었으나, 제갈량에게 그것은 공간을 파괴하고 정신을 찢어버리는 소리였다.
눈물을 흘리며 미친 듯 달리던 공명은 옥을 빠져나오자마자 한 사람과 마주쳤다.
"아니, 공명. 자네 이게 웬일인가?"
"중달(仲達)!"
좌상 사마의였다. 황도에 올라와서 만난 그는 사마휘 사숙에서 사귄 친구들보다도 끈끈한 우정을 가지게 된 소중한 벗이었다. 사마의는 빙긋 웃으며 자신의 유일한 라이벌이자 둘도 없는 친구인 공명에게 친근하게 말했다.
"울고 있군 그래. 웬일로 집무실을 벗어나 울면서 달리고 있는가? 아이처럼……. 그러다 부딪치면 어쩌려고."
"아아……!"
공명은 갑자기 안겨들듯이 사마의의 품으로 쓰러졌다. 심하게 떨리는 그의 어깨를 본 사마의는 깜짝 놀라 말했다.
"왜 그러는가? 진정하게. 이 사람아."
공명은 말을 잇지를 못했다. 순간 사마의는 머릿속을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자네, 혹시 전하를 뵙고 왔나?"
"……그렇다네."
간신히 눈물을 그친 공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반란을……, 잠재울 계책을 받아왔지."
"!"
사마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간해서 놀라지 않는 그의 마음이 크게 동요했다.
"자네, 지금 반란을 잠재울 계책이라고 했나?!"
"그렇다네. 태사부님들께 전언을……. '그들'을 주관하도록……."
"……!"
"근위대의 이란과 적영 두 부장을 붙여주시겠다고……. 태사부님들을 곧 뵈러 가야 하네. 함께……. 좀 가 주겠나."
사마의는 기가 막히다는 듯 멍하니 있다가 물었다.
"……태사부님들이라면, 수경 선생님과 방덕공 어른?"
"맞아."
"그렇군……. 하지만 그렇게 되다니……. 좋아, 공명. 함께 가세. 하지만 그 전에 한 잔 하고 갔으면 하네만……?"
"나는 술에는 약하지만, 오늘은 마셔보고 싶구먼. 그리하세."
두 사람은 당장에 황도 거리로 나가 작은 주루에 올랐다. 몇 각이 채 되지 않아 그들이 앉아 있는 자리로 오가는 시비(侍婢)들의 발걸음이 지쳐 보였다. 그들은 어울리지 않게 벌써 열 병에 가까운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 마시던 사마의가 문득 말했다.
"난 그분을 이해할 수가 없군."
"나도 마찬가지야."
"당신이 돌아가시게 될 예정이라는 것은 알고 계시는 것인가?"
"이미 대공 전하들께서 말씀을 하셨을 테니, 알고 계시겠지."
"결국……. 하지만 친형제도 아니신데……."
"그런 분은 다시없을 걸세."
제갈량은 긴 한숨을 쉬며 다시 술잔을 들이켰다. 사마의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명, 전하께서……. 돌아가시게 될까?"
"아니. 전하께서는 돌아가실 수 없어."
그의 어조는 단호했다.
"나는 아침의 약속을 받았고, 그분께 내 생명을 걸기로 했어.
나의 맹세를, 일곱 개의 하늘이 마흔 아홉 번 자리를 옮기고 시간과 공간이 이지러져서 혼란이 세상을 덮는다고 해도 천상과 지상과 지하에서 그분과 함께 하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했던 그 맹세를 받아들이신 이상……. 전하께서는 절대 돌아가실 수 없어.
무엇보다 전하께서는 남병산에서 구하셨던 응답을 받으셨네. 절대로……. 돌아가실 수 없어. 아니 돌아가시지 않아."
"대단한 맹세를 드렸구먼…….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는가?"
"이 일을……. 단지 잠깐의 시련으로 보시는 것 같아."
"……! 그렇다면, 반란을 잠재워도 전하께서는 어차피 살아나신다는 것?"
사마의는 조금 놀랐다. 공명은 취기가 오른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될 거야. 그것에 기대를 걸고……. 전하의 명대로 해 보려고……."
사마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일생의 운명을 결정짓는 거대한 의미의 말을 꺼냈다.
"전하께서 지니신 그 믿음에……. 우리도 참여하면 되겠군."
그 순간 공명은 사마의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파장'이 확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믿음에 참여한다 - 그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믿음에 참여한다……. 좋은 말이군……. 그래, 전하께서는 외롭게 그 믿음을 지키고 계시니……. 우리가 함께 해 드려야지……. 그게 도리겠지……."
그들은 힐끗 주루의 벽 한 곳에 걸린 책력을 쳐다보았다. 보름 남짓 남은 중양절(重陽節) - 그 날이 유성의 사형일로 정해져 있었다.
사마의는 돌연 창 밖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전하의 믿음이……. 응답을 받아야만 해."
제갈량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전하의 영대로 이 반란을 잠재울 것이야. 나는……. 그럼에도 만약 하늘이 침묵하고 계신다면, 그것은 공경받을 하늘이 아니야……. 당신의 종을 돌아보시는지, 나는 하늘을 시험하겠어……."
사마의는 취기가 도는 정신을 바로잡으려 애쓰면서 말했다.
"……후……, 자네 말에는 공감하지만, 말을 좀 조심하게……. 전하께서 들으셨다면, 야단을 치셨을 것이야."
"훗……. 그렇겠지."
"……공명, 단계에 다녀오면……. 주랑도 불러서……. 우리 세 사람, 기도하러 가세."
"어디로……?"
"남병산……. 그 곳의 돌제단으로……."
"그래……, 의인을 위하여……. 그 오른손을 펴시도록……."
그리고 두 사람은 술에 못 이겨 쓰러졌다.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
다음 날, 유성은 하운으로부터 이란과 적영이 제갈량과 사마의를 호위해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직후, 그는 뜻밖의 면회인을 맞았다.
"진혼(鎭魂)……? 지금, 분명 진혼이라고 했습니까?"
"그러하옵니다. 전하."
진혼은 유성에게 큰 절을 올렸다. 유성은 가만히 그 절을 받으며 말했다.
"당신들은 나를 알고 있지요?"
"예, 전하."
"그런데…….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습니까? 내가 당신들을 얼마나 찾았는지 아시오?"
"송구스럽습니다. 저희들은 태제 전하를 지켜보면서 사랑의 왕국이 이루어지는가를 생각해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빛의 대리자' 님을 지켜보고 있었지요."
"빛의 대리자……. '라디언스 디아코노스' 인 나를 말입니까?"
놀랍게도 진혼은 그의 또 다른 이름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부르며 존대를 했다.
"예, 디아코노스님. 그리고 저희들은 디아코노스님을 돕기로 했습니다."
유성은 그를 날카롭게 보며 물었다.
"당신들의 꿈이 무엇이기에?"
"사랑의 왕국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 말이옵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사랑은 무엇인가? 차별적인 사랑인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자기중심인가?"
진혼이 디아코노스라는 말을 내뱉은 순간부터 그의 말투는 변해 있었다.
디아코노스 - 대리자의 이름은 그만큼 지고한 것이었다. 그 지위는 치천사의 대군주 메타트론과 비기는 것, 대리자의 권위는 모든 천사장에게 명을 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진혼이 그를, 미사엘을 디아코노스로 본다면 그는 진혼에게 극존대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고도 남았다.
"우리의 사랑은 겸애(兼愛)입니다. 차별적인 사랑이란 저희 가운데 존재하지 않습니다."
"……."
"저희들은 디아코노스님께서 하늘사랑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동안 저희들이 양육한 자병(慈兵)은 백화랑의 운조와 표국에 뒤지지 않을 만큼 중원에 깔려 있습니다. 저희들은 디아코노스님의 힘이 될 것입니다."
유성, 아니 미사엘 라디언스 디아코노스는 비웃듯 웃음을 날렸다.
"누군가의 힘이 된다면, 조건부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힘을 사고 싶지 않아."
"다른 조건은 필요 없습니다. 저희들에게 하늘사랑에 대해 가르쳐주시겠다고 약속을 주십시오. 디아코노스님. 그것이 저희들의 마음을 얻으시는 길이 될 것입니다."
미사엘은 가만히 진혼을 보다가 대뜸 물었다.
"자네의 마음은 누구의 것인가?"
"……! 제 마음은……!"
진혼은 말을 다 하지 못했다. 유성은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사엘님……."
"유성으로 부르게. 이 땅에서 처음으로 자네가 내 진실의 이름을 불러주는군."
진혼은 떨리는 목소리로 힘들게 말했다.
"……현신한 모습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훗……! 욕심이 많은 아이로군. 그건 아직 안 돼."
"미사엘님……."
"그보다 내 질문에 답을 아직 하지 않았는데, 진혼?"
진혼은 멈칫했다. 유성이 다시 말했다.
"거자(鋸子)의 지도력은 그대들 묵가(墨家)의 자병(慈兵)을 디아코노스에게 예속시킬 수 없을 만큼 약한가? 그대는 머리인가, 꼬리인가?"
"머리……, 입니다."
"내가 현신을 하지 않고도 자네의 마음을 내 것으로 할 수 있을까?"
"……예, 미사엘님……."
진혼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유성의 손을 잡고 아직도 하얗고 아름다운 손에 입을 맞추었다. 유성은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묵가는 제자 백가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아 역사의 그림자로 사라져 갔지……. 드러나지 않는 상황이라는 약점을 지닌 채 오랜 세월을 지내왔어."
"그렇습니다. 미사엘님."
"디아코노스는 자네들을 이끌 수 있는 역량이 충분하다. 그대들은 나와 나를 보내신 분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예, 미사엘님."
"좋아, 언제고……. 자네들의 꿈 속으로 찾아가겠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게."
"예, 미사엘님."
"자네의 면회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야. 하지만 다음 번에는 하운과 함께 오도록. 나를 보러 혼자 와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내가 부르겠다. 아니면 미리 말을 해 줘."
"그렇게 하겠습니다."
진혼은 깊숙이 예를 올렸다. 유성은 빙긋 웃으며 그를 가까이로 끌어당겨 앳된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고맙다. 내 작은 별빛. 지금으로서는 오로지 너희들만이 내 곁에 있어주는 듯 싶구나."
"……."
"반란을 진압시키라고 공명에게 말을 했는데……. 너희가 태사부님들을 도와드렸으면 좋겠구나. 가능하겠지?"
미즈모르는 강한 암흑의 기운을 내뿜어 유협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유협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내더니 눈동자 가득 검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북해의 얼음처럼 차가운 미즈모르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그의 주변으로 가득히 깔렸다.
"아이네스는, 비록 나는 천계의 강아지에 불과하고 그는 대천사장의 신분이라 하지만, 아이네스는 내 아내다. 이 땅에 있을 사람이 아니야. 네가 감히 나의 그녀를, 내 군주이자 내 마스터인 아이네스를 빼앗으려 해? 절대 허락할 수 없다.
너는 그녀를 죽여야 하고, 모두의 눈에 죽은 것으로 비쳐진 그녀는 영원히 나와 함께 우리가 시작했던 곳으로 사라질 것이야. 알겠는가?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나는 몰라. 그녀는 이 땅에 필요가 없어. 그녀는 미스바로 돌아가서 나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유협은 몸부림을 치며 외쳤다.
"……왜……?! 왜 그러는 건가? 그는 나의……. 내 소중한 동생인데……. 왜 빼앗아 가려는……. 크아아아악!"
유협은 이를 악물며 항거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고통뿐이었다. 미즈모르가 말했다.
"그 책을 보고서도 그녀가 너의 동생이라고 생각하나?"
"……하지만. 그건. 당신이……!"
"닥쳐라! 네가 뭐라 하든 나는 아이네스를 데려갈 수 있어. 그러나 이런 방법을 쓰는 것은 그래도 그녀가 이 땅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너무 큰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
"명심해라. 유협. 아이네스가, 내 아내이자 내 군주인 그녀가 나와 함께 가지 못하게 한다면, 너는 죽는다."
"……."
"나는 약속했다. 그분을 나에게 내어준다면 너에게 현군(賢君)이 되게 해주겠다고. 아이네스가 네게 이루어 준 모든 것을 네가 오래 유지시키도록 만들어 주겠노라고. 그 사실도 잊지 말아라. 나는 그녀를 데려가고 말 것이야."
"……."
유협은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그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미즈모르의 눈이 보랏빛으로 다시 빛나는 순간, 유협의 정신은 다시 그 육신을 떠났다. 잠시 동안…….
한편, 유성은 하운의 전음을 들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들이 모두 전하의 뜻에 순복하고 반란을 끝냈습니다]
[고맙다고 전하게. 정말 고맙다고……]
[다들 전하를 사랑합니다. 전하께서 저희들을 사랑해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전하의 그분께서도 전하를 그처럼 사랑하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역사의 금제(禁制)상 지금은 그 이름을 내 입술로 말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슬프네. 결계를 치고 말하거나 전음으로만 대화해야 하니 말일세. 그보다, 내 처형일이 중양절 축제날이라고 했나?]
[그러하옵니다]
[그분은 나를 잊지 않으실 것이다. 너무 걱정말고]
[예, 전하. ……하오면 이만 물러가옵니다]
[하운!]
[예]
[고맙다. 정말……]
[……물러가옵니다, 주군]
전음을 마친 유성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 때 감옥문이 열리며 제갈량과 사마의, 주유 세 사람이 들어왔다. 유성은 일어서면서 역시 죄인으로서의 예를 하며 말했다.
"오오, 삼상께서 다 함께 오시다니 반갑습니다. 반란은 진정되었습니까?"
주유와 사마의는 유성의 모습을 본 순간 입을 딱 벌렸다. 처참한 것이다. 공명이 끄덕이며 말했다. 그는 부러 태사부들에게 그의 말을 전하자마자 남병산으로 달려가 사흘 동안을 부르짖고 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전하의……. 덕분이시지요."
"폐하께서는 건강하십니까?"
"……방에서 나오실 줄을 모르고 계십니다. 오로지 술만이 들여질 뿐이지요."
"안타깝군요……."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사마의가 애써 마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사형일이……. 열흘 뒤로 다가왔습니다. 전하."
"그래요?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애잔한 미소가 깔렸다. 공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처럼 말했다.
"전하, 돌아가시면 아니 되십니다."
"하하하……. 사람이란 언젠가 한 번 쯤은 반드시 죽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 죽는 것이 뭐 어떻기에 그러십니까?"
공명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전하! 소신과의 약조를 잊으신 것이옵니까?"
유성은 공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언의 부정이었다. 물론, 자신의 약속을 잊을 그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공명이었지만, 지금 그로서는 그것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치세를 이뤄주시겠다는 약속 말씀이옵니다! 전하께서 가시면 이제 이 제국은 누가 이끌어야 한단 말씀이시옵니까?"
주유도 한몫 거들듯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황후마마께서는 서거하시고 폐하께서는 서른이 넘으셨으며 슬하에는 적자도 서자도 없으십니다. 폐하께서 돌아가시면 누가 그 뒤를 잇겠습니까?"
"그렇겠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살려면……. 내 형제의 피가 흘러야만 하지 않습니까. 내 피가 내 형제의 피보다 붉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그것은 일찍이 유성 자신이 조조에게 보낸 편지에 쓴 말이었다. 사마의가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유성은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하오나, 전하……."
"나는 일찍이 지성대공에게 써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또다시 천하를 위해 피가 흘러야 한다면, 그 때는 내 형제 내 백성의 피가 흐르게 할 것이 아니라 나의 피를 흘릴 것이라고. 그나마 참형이 아닌 교형(絞刑)이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가 사랑한 사람들 앞에서 죽어가는 것만도 다행이지요."
"전하!"
"여러분께는 언제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자,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이제 찾아오지 마세요. 다만, 폐하를 잘 도와드려서 인군(仁君)이 되게 하세요. 그것이 나의 부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