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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끌모아 태산의 실현
새마을지도자반 제64기 김 귀 정
(부산시 서구 장림동 615-414)
저희 장림동은 시 중심지에서 20km 떨어진 낙동강 하구의 한가한 촌락이었으나, 지금은 전 주민이 협동과 단결로 부산시내의 동 중, 몇 번째로 손꼽히는 모범 동으로서 주민 모두는 긍지와 희망에 가득 차 있는 생동하는 마을입니다.
<가난이 원수다>
저는 충남 금산군 남이면 대양리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나 6.25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중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만, 제가 중학 1학년이 되던 해 어머님마저 과로에 지쳐 몸져누우시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하루, 이틀이면 완쾌되리라 믿었던 어머니는 찾아가는 병원마다 중풍으로 장기 치료를 받아야만 된다는 진단이었으나, 일가친척 하나 없는 저에게 그런 큰돈이 있을 리 없어 1년여의 병고 끝에 “귀정아 이 모두가 가난이 원수이다.”란 한마디를 남기며 운명하셨으며, 끼니를 굶어도 어머니 가 있어 배고프지 않았던 저는 하루아침에 천애 고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머님의 장례를 치른 다음날부터 저는 배움과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신문 배달을 했으며 외롭고 고달픈 때면 “가난이 원수라던” 어머님의 마지막 한마디를 되새기며 열심히 공부하여 중학교와 금산농업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부산 기계 공작창에 근무하다 1970년 정책 이주민과 함께 이곳 장림동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그동안 직장생활의 봉급을 절약하여 열심히 저축한 결과 조그마한 내 집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이웃 생각하며 지도자 자원>
제가 정착한 장림동 주민들은 내일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오늘만 살다 죽을 사람처럼 노동일로 힘들여 번 돈을 술만 마시며, 싸움질로 황금 같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니, 마을은 조용할 날이 없었으며,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정신을 불어 넣어 나태와 무지를 물리치고 잘살 수 있는 가를 생각하다 자식 키우는 저에게도 불안한 나날이 계속되어 나와 같이 가난한 이웃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하면 이 만큼 자립하게 된 나의 생활력을 경험으로 이제는 마을 주민과 함께 다 같이 좀 더 잘살 수 있도록 해 보자고 73년 자원하여 새마을지도자가 되어 남 먼저 일어나 골목을 쓸고 혼자서 하수구도 치며 제 어린 시절을 거울삼아 가난을 물리치기 위해 새마을 가꾸기 사업 등 나름대로는 물량 사업을 많이도 해 보았으나 전체 주민들의 가난을 해소하고 새마을 사업에 의욕적인 참여의식을 고취할 수가 없어 궁리 끝에 저축을 통하여 주민을 잘사는 길로 이끌어야겠다고 생각한 후 저축을 권유해 보았으나 그렇게 쉬운 일 만은 아니었습니다.
<저축만이 잘 사는 길>
그러던 중 76년 8월 새마을금고 중앙교육을 받고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이 다 같이 잘살기 운동인 새마을운동을 성공시킬 수 있는 지름길임을 확신하고 나의 젊음을 불태워 이 사업을 꼭 성공시키기로 다짐하면서 마을에 돌아왔습니다.
통장님과 부녀회 임원 30명으로 발기인회를 만들어 76년 9월 25,000원이란 적은 돈으로 창립총회를 갖고 제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창립만 해 놓으면 주민들이 저절로 적극 호응해 주리라 믿고 마냥 가슴이 부풀어 한 집, 한 집 찾아 저축을 권유해 보았으나, 주민들의 이해 부족으로 돈을 떼어먹고 도망가지나 않나 이렇다 할 재산도 없는 젊은 저에게 무엇을 믿고 돈을 맡길 것인가 하는 의아심 때문에 회원 가입을 권유하는 저를 오히려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이었으니 부풀었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고 실의와 절망감 뿐 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좌절할 수만은 없어 용기를 내어 이 궁리 저 궁리 생각 끝에 적은 돈의 저축은 부녀자들을 설득하는 것이 빠를 것 같아 안방으로 침투하기로 결심하고, 도시 새마을운동을 성공시킬 수 있는 지름길인 교육과 함께 집집마다 찾아 새마을금고의 필요성과 우리에게 돌아오는 고마움에 대해 두 번, 세 번 설명해 보았으나 대답은 하나같이 오늘 먹고 살기도 바쁜데 “저축은 무슨 저축이냐”는 냉대와 조소 뿐 이었습니다.
<홀어머니의 유언을 되새기며>
그러면 저는 좌절하기에 앞서 저의 가슴 속 깊이 한이 맺힌 약 한 첩 먹어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님의 얼굴을 되새기며, 가난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소득이 증대되어야겠고 도시민의 소득증대란 절약과 저축뿐이란 신념으로 찾아가고 몇 번이고 또 찾아가 설득과 이해를 시키는 한편 예비군 교육장과 민방위 교육시마다 제가 맡고 있는 민방위 정신 교육 교관 임무를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새마을금고에 미친 사람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이기주의적인 도시민이 협동 단결할 수 있는 길은 새마을금고 운동 뿐 이라고 역설하며, 또한 각종 친목계 날, 친목회마다 찾아가 회원 가입을 권유하며 특히 매월 실시하는 반상회 날을 새마을금고 날로 정하고 151개 반을 하나도 빠짐없이 순회 계몽을 하고 유인물로 마을금고 자산을 공개하며 전 주민이 운영 상태를 알게 하며 반상회 석상에서 출자도 받고 대부 신청과 대부금 상환도 받는 등 주민들의 편이를 도모해 주었더니, 마을금고에 많이 가입된 성과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눈만 뜨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만나는 사람마다 마을금고 가입을 입버릇처럼 권유하는 저를 보고 새마을운동에 미쳐 서울 교육에 갔다 오더니 이제는 완전히 돌아버렸다고 동정어린 눈으로 쳐다보곤 할 때도 이럴수록 이 사업을 꼭 성공시키고 말겠다는 저의 결심은 확고해 지기만 했습니다.
<티끌모아 태산의 실현>
현금 출자가 어려운 주민을 위해 폐품수집소를 만들어 부녀 회원들과 함께 손수레를 끌며 빈병, 폐휴지, 빈 상자를 거두어 들여 먼지를 뒤집어쓰며 다시 분류해 팔아 밤을 새워 통장을 만들어 갖다 주는 것을 잊지 않았으니, 그래야만 신용을 얻게 되고 신용을 얻어야만 마을금고를 성공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밤잠을 잊고 통장을 만드는 시간이 저에게는 가장 큰 행복한 순간이었으며 제 곁에는 언제나 남편 잘못 만나 고생만 해온 아내가 위로와 격려를 보내 주었으며, 우리 부부는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우리 마을의 미래를 꿈꾸곤 하였습니다. 폐품 수집도 수개월 하다 보니 주민의 인식이 달라졌으며 남편을 잃고 폐인이 되다시피 한 김 정순 아주머니는 3개월 간의 폐품 수집만으로 3만 4천여 원을 모아 이 돈을 밑천 삼아 구멍가게를 내어 완전 자립하게 되었고 마을 주민들에게 이 소문이 퍼져 한 두 사람씩 스스로 마을금고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더욱더 열심히 뛰었습니다. 부녀 회원들에게는 좀들이 절미통을 한 끼 한 수저씩 절약토록 하였더니 한 달에 한 사람당 7백여 원씩 출자하게 되었으며 동네 꼬마들에게는 어린이 창구를 개설하여 10원짜리 손님이라도 사탕 한 알을 주며 고맙다고 깍듯이 인사하니 사탕 준다는 소문에 동네 꼬마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여 어려서부터 근검, 절약하는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통장과 사탕을 주니 동네 어린이들의 군것질 값이 점차 마을금고 통장 속에 모였으며 길을 가다가 어린이들을 만나면 “저축 아저씨 간다.” “새마을금고 아저씨 간다.”라는 즐거운 별명도 붙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꼬마들이 앞 다투어 저축하고 작년부터는 초등학교 저축도 유치하여 이제는 어린이 예탁금만도 5천만 원이 넘는 큰돈이 되었으며, 우리 마을 어린이들은 돈이 생기면 먼저 새마을금고에 저축부터 한다는 정신이 앞서 하루에 네 번 다섯 번 오는 꼬마들도 평균 50명이 넘고 있으며, 지난 추석 절에는 3천여 어린이의 코 묻은 저금만도 91만 930원이 들어왔으니 이것이 바로 백 마디 천 마디 말보다 도시 새마을운동을 실천하는 산교육이 아닙니까?
<구두쇠 아빠의 심중>
여기에서 저는 “하면 된다.”는 신념과 의지를 다시 한 번 다짐하게 되었으며, 마을금고를 하루 빨리 성장 시키려면 독립 사무실을 지어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세발자전거 하나 사주지 않는다는 “욕심쟁이 아빠” “구두쇠 아빠”라는 원망을 들으며 피땀 흘려 번 내 돈 20만 원을 아까움 없이 내놓고 뜻있는 주민들의 협조로 50만 원을 드려 4평 남짓한 사무실을 작년 5월에 짓는 등 주민의 편에서 일하면서 필요할 때 간편하게 언제든지 돈을 빌려 쓸 수 있는 곳도 새마을금고임을 인식 시켰습니다. 이렇게 뼈를 깎는 노력과 시련 속에 시작된 우리 장림동 새마을금고가 지난 9월 말 현재 회원 수가 전 세대의 두 배가 넘는 9,349명이며 출자금 4억 원과 예탁금 및 적금 등 총 자산이 6억 3천만 원으로 창립 때 비하면 2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회원은 무려 310배 자산은 24,800배로 부산 시에서 자산이 제일 많은 최고 모범금고로 기적적인 성장을 보게 되었으며 이제는 22평의 아담한 사무실도 마련하게 되었으니, 바로 티끌모아 태산의 산 증거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습니까?
<이젠 주민 복지사업도>
이렇게 모인 돈이 전세방 얻을 돈이 없는 회원에게 방을 얻어주어 생활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고, 병원 입원비, 학자금, 고리채 정리, 내 집 마련자금, 구멍가게 운영 자금 등 마을 주민의 이익을 위해 6억 원이 넘는 큰돈이 쓰이기 시작하여 4천여 세대의 소득 증대 및 생활환경 개선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게 되어 주민들의 협동과 주민 총화의 밑바탕이 되어 모두가 더 잘사는 내일을 위해 한 덩어리로 똘똘 뭉쳐 제가 새마을지도자가 된 후, 4년 전까지만 해도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던 우리 마을 골목골목 29,599m가 말끔히 포장되고, 작년부터는 골목 안에 꽃나무와 화단을 조성하여 푸른 마을이 되어가고 있으며, 하수구 설치, 하천 정비 등 그동안 7억 원의 사업비가 투자된 71건의 새마을사업도 모두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습니다.
마을금고가 이렇게 성장하게 됨에 따라 이웃과 이웃이 서로 돕고 돕는 풍토가 조성되었으며, 관내 동인의원과 자매결연을 하고 회원들이 통장을 들고 가면 진료비 30%로 감면 조치 해주어 회원이면 돈이 없어 수술이나 진료를 받지 못하는 회원이 없도록 주민의 복지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회원들의 집을 찾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대부금으로 해결해 주는 등 마을금고가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것임을 인식시켜 마을 주민들의 협동심을 일깨워 이리시 이재민 돕기, 수재민 돕기 마을 안 불우 이웃돕기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설 수 있었으며 또한 제 어린 시절처럼 돈이 없어 공부하고 싶어도 공부하지 못하는 후배를 돕기로 결심하고 우선 2명을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성심껏 돌보고 있으며 그 중 삼성중학교 2학년 재학 중인 이승제군이 전교 1등의 성적표를 가지고 와 고맙다고 인사할 때는 둘이서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지난봄에는 우리 마을금고에서 돈이 없어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는 장림 초등학교 23명의 어린이들에게 여행비를 보조 해주어 전원이 웃으면서 여행을 다녀오게 한 보람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을금고는 운영하면서 가장 보람된 일은 작년까지만 해도 10여 평짜리 불량주택이었던 300여 동을 새마을금고에서 대부받아 자력으로 2층, 3층의 스라브 집으로 말끔히 개량하는 파급효과를 가져와 한 동안에 4~5백만 원 하던 집들이 천만 원을 넘게 되어 간접적인 소득증대를 이룩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남은 일 한 가지 진입로 확장>
이와 같이 모든 주민이 단합하다 보니 우리 주민의 숙원사업인 마을 진입로 90m가 폭 10m로 주민과 차량 통행에 불편이 너무 많아 4차선으로 확장하기 위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당국에 건의했으나 예산 사정으로 불가능하다는 회신을 받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만 있을 수 없다고 결론짓고 자력사업으로 확장하기로 주민의 총의를 모아 도로에 편입되는 시가 2억 원이 넘는 대지 1,400여 평을 3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박창수씨 외 39명의 지주들을 몇 번이고 찾아가 새마을정신을 일깨우며 끈질긴 설득 끝에 1,300여 평을 희사 받을 수 있었으니 말이 쉬워 1,300평이지 도심지방 1평이 농촌의 논 한마지기와 거의 맞먹는 금싸라기 땅을 희사 받을 때까지의 어려움과 고통을 어떻게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명년 봄에는 대망의 도로 확장공사를 착공할 수 있도록 더욱더 노력하겠습니다. 저는 결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지금이 시작이란 생각으로 이제 겨우 불붙기 시작한 새마을 금고를 위해 더 뛰고 달려 금년 말 까지는 8억 원을 돌파하고 내년에는 15억 원까지 기어이 달성하고 더 많은 학생들이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 조성을 위한 사업으로 전기제품 판매소, 구판장, 부업센터 등을 저의 전 재산을 들여서라도 설치 운영하여 주민의 복지 향상과 소득증대를 도모하여 사회적, 경제적 지위향상을 위하여 더욱더 노력하겠습니다. “배고픈 자에게 한 개의 빵을 줄 것이 아니라 빵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라”는 말이 있듯이 보다 잘 사는 장림동, 풍요한 장림동을 만들기 위해 주민과 더불어 땀과 노력을 쏟아 바쳐 도시 새마을운동의 일꾼이 될 것을 굳게 약속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