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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원고경
민족을 위해 진실을 가르친 것이 잘못이냐
일제강점기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도모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합천경찰서에서 옥사(獄死)한 덕원고경(德元古鏡, 1882~1943)스님. 사명대사비가 있는 합천 해인사에 주석하며 주지와 강사(지금의 강주)로 후학을 지도한 고경스님의 삶은 지금까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지난 9월 해인총림 해인사(주지 선각스님)가 국가보훈처에 제출한 ‘항일독립 유공자 포상신청서’와 홍제암 종성스님이 수집한 자료를 참고해 고경스님의 행장을 복원했다.
“민족을 위해 진실을 가르친 것이 잘못이냐”
합천 해인사 거점으로 독립사상 전파 앞장
친일승려 밀고로 투옥되어 고문 받고 獄死
○…“그대가 이고경(李古鏡)인가?” 일제강점기 말기(1942년 11월)에 합천경찰서로 강제 연행된 고경스님은 일경(日警)의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순(耳順)을 넘긴 스님에게 일경은 잔인한 고문을 자행했다. 이유는 해인사 스님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는 것이다. 취조가 시작됐다.
“방인막도송저탑(傍人莫道松低塔)하라, 송장타일탑천저(松長他日塔遷低)는 시를 무슨 생각으로 학생(학인)들에게 일러 주었는가?” 일경은 “송(松)은 조선이요, 탑(塔)은 일본을 지칭한 것”이라며 자백을 강요했다. 하지만 고경스님은 묵묵부답. 고문은 도를 넘었다. 여기서 언급된 시는 정인홍(鄭仁弘)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24교구본사 선운사 승가대학장 법광스님은 이 시를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사람들아 소나무가 탑 밑에 있다고 이르지 마라 / 훗날 소나무가 자라면 탑이 밑으로 가노라.”
○…1942년 합천경찰서에 연행됐을 당시, 고경스님 외에도 4~5명의 해인사 스님이 구금됐다.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 스님들은 상상을 초월한 고문을 받았다. 친일승려인 변설호(卞雪)가 밀고하여 발생한 사단이었다. 당시 체포된 민동선(閔東宣) 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일경들은 연행한 스님들에게 ‘한 번 질문하고 열 번 구타’하는 것은 물론 물고문과 불고문을 자행했다고 한다. 민동선 스님은 “완전히 귀축(鬼畜, 아귀와 축생을 아우르는 말로 야만적이고 잔인한 짓을 나타낸다)의 세계요, 인간 상실의 세계였다”고 참혹한 상황을 증언한바 있다.
<사진>1926년 발행된 <불교> 25호에 실린 고경스님의 글.
○…일제 당국은 외침을 막은 ‘민족의 보물’ 팔만대장경을 소장한 한국을 대표하는 사찰인 해인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고 했다. 전대미문의 몰상식한 행패를 부렸다. 고경스님 등 해인사와 경남 지역 스님들을 강제 연행한 후 해인사 홍제암에 있는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진영(眞影)을 강탈했다. 이에 앞서 합천경찰서장 다케우라와 그 부하들은 홍제암에 있는 사명대사비를 동강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고경스님은 경찰서에 구금된 상태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일제의 입맛에 맞는 답변을 끝내 거부해 몸이 상하고 말았다. 온 몸에 피가 흐르고 상처가 깊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차디찬 감방에 스님을 방치했다. 생명이 경각(頃刻)에 도달한 후에야 합천읍내에 있는 한 여관(창성여관)으로 스님을 옮겼다.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스님은 허름한 여관방에서 입적하고 말았다. 당시 스님은 “민족을 위해 역사의 진실을 교육한 것이 잘못이냐”는 말을 되풀이 했다고 한다. “여관방으로 옮겨진 후 일주일 만에 가부좌를 한 채 의연하게 열반에 들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입적후 다비를 어떻게 모셨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고경스님의 투철한 민족의식은 일제 말기에만 구현된 것은 아니다. 스님은 1919년 3.1운동을 전후해 경성 불교중앙학림과 공주 마곡사에서 독립운동에 관여했다. 불교중앙학림은 지금의 동국대 전신이며, 마곡사는 백범 김구 선생이 출가한 의미 있는 도량이다. 스님은 해인사와 통도사에서 선교(禪敎)를 공부한 후 상경하여 청년승려와 젊은 불자를 양성하는데 앞장섰다. 조선의 미래를 이끌어 갈 젊은이들에게 부처님 가르침과 애국정신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1924년 부터 고경스님은 해인사에 주석하고 있었다. 당시 합천경찰서 정보부장인 일본인이 군홧발로 해인사 대적광전에 들어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소식을 전해들은 고경스님은 젊은 학인들에게 일본인 정보부장을 곧바로 끌어내 해인사 일주문 옆에 있는 영지(연못)에 빠트렸다. 이로인해 일본 경찰의 감시는 더욱 철저해 졌다.
○…고경스님이 일제에 맞선 구체적인 활동 가운데 하나가 조선불교유신회(朝鮮佛敎維新會)에 참여한 것이다. 일제가 만든 사찰령을 폐지하고, 조선불교의 개혁운동을 목적으로 한 유신회에는 고경스님 등 15명의 스님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22년 3월26일 대표적인 친일승려인 강대련(姜大蓮)을 경성 시내 한복판에서 명고축출(鳴鼓逐出, 이름을 써 붙이고 북을 치고 다니며 잘못을 널리 알리는 것)한 것도 조선불교유신회였다. 또한 고경스님은 만해 한용운 스님의 뜻에 동조한 청년승려들이 조직한 항일운동비밀결사체 ‘만당(卍黨)’에도 참여했다.
○…1929년 고경스님은 경성 법륜사(法輪寺)에서 봉행된 대승원교화엄경산림(大乘圓敎華嚴經山林)에 참석해 법문을 했다. 당시 산림의 최초 법문은 보담스님이 했고, 이후 고경스님을 비롯해 포명(抱明).보운(寶雲).구봉(九峰).서응(瑞應).설하(雪河) 스님이 법을 설했다. 법륜사는 금강산 유점사의 경성포교당으로, 고경스님이 법문을 한 1929년에 창건된 도심도량이다.
<사진>사명대사의 비. 해인사 홍제암에 있다. 일제에 의해 동강난 상처가 지금도 남아있다.
○…고경스님이 1933년 10월에 펴낸 <해인사약지(海印寺略地)>에는 ‘(해인사) 강원의 유래’ 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에는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강점기 해인사 강원의 역사와 강당 장소, 역대 강사 명단이 상세히 수록돼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00년부터 혜옹(慧翁).금파(坡).만성(晩聖).동은(東隱).월제(月霽).만응(萬應) 스님이 홍제암에서 강론(講論)을 했다. 이어 1907년에는 만암(曼庵)스님이 사운당(四雲堂)에서, 1908년부터는 혼허서응(渾虛瑞應).고경(古鏡).설호(雪).초월(初月).혼원(混元).일우(日宇).보해(寶海) 스님이 궁현당(窮玄堂)에서 강(講)을 했다. 1918년 강원은 문을 닫고 극락전에 지방학림(地方學林)을 개설했다. 1923년 학림이 폐지되고, 1925년 다시 강원 문을 열었다. 이때 동산(東山).고경 스님이 지도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고경스님은 해인사에서 강사(講師)로 후학을 양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조선불교월보>와 <불교>에는 고경스님의 기고문이 다수 실려 있다. 1912년 <조선불교월보>에 실린 ‘주지제씨에게 진정’이란 글을 제외하고는 모두 1926년과 1927년 <불교>에 게재된 것이다. <불교>에 글이 실린 시기는 고경스님이 해인사에서 소임을 볼 때로, 지방에 있었지만 경성에서 발행된 잡지에 투고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 어록 ■
고경스님은 1912년 <조선불교월보>에 실린 ‘주지제씨(住持諸氏)에게 진정(進呈)’이란 제목의 글에서 승가의 화합을 강조하고 있다. ‘주지스님들에게 드리는 글’이란 뜻으로 전문은 국한문혼용체이다. 일부 내용을 요즘 말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마음으로부터의 화합이 제일 시급하다고 감히 말씀 드립니다. … 각자의 마음을 화합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살펴보면 사찰간의 화합은 고사하고 한 절에서도 일부 승려가 화합하지 못합니다. 각자 마음이 다르니 6000명의 승려가 서로 달라, 그 어떠한 급한 일이 눈앞에 전개되어도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그러한즉 6000명의 각자 마음을 합하여 화합을 이루는 것은 900여 본말사 주지 스님들의 손에 있으니, 각별한 주의를 기하여서 3000년을 이어오는 우리 불조의 혜명을 승계하여 부처님의 도량(불국토)을 이루는데 막중한 책임을 버리지 마소서. …
나의 좋고 나쁨이 대중의 좋고 나쁨이요, 대중의 좋고 나쁨이 나의 좋고 나쁨입니다. … 모든 대중이 힘을 합친 후에 청년의 교육.포교.개혁.건설.참선.강학을 차근차근 실행하면 조선불교 사원(寺院)의 중흥이 가능할 것이니 진중하게 받아들여주소서.”
■ 행장 ■
1882년 11월20일 충남 부여군 상서면 가천리(지금은 부여군 옥산면 안서리)에서 부친 이광회(李光會) 선생과 모친 전주 이 씨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이고경(李古鏡). 1882년은 개항 이후 전개된 최초의 반봉건.반외세 투쟁인 임오군란이 발발한 해이다. 출가 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대강백 보담스님 제자
교학 율장 소임 ‘눈길’
승적에 따르면 1904년 3월13일 해인사에서 강백(講伯)인 보담보하(寶潭寶河)스님에게 사미계를 받고 득도(출가와 같은 의미)했다. 이때가 22세. 법명은 덕원(德元), 법호는 고경(古鏡)이다. 비구계는 1909년 해인사에서 남전(南泉, 1868~1936)스님에게 받았다. 남전스님은 만해(卍海)스님과 교분이 깊었던 선지식으로, 석주(昔珠)스님의 스승이다. 은사는 일하법린(日荷法璘,?~?) 스님이고, 법사는 경산경식(擎山擎植, 1870~1907) 스님이다. 고경스님은 일하스님의 맏상좌이며, 경식스님의 첫 제자이다. 남전스님이 비문을 쓴 경산스님 비는 해인사에 있다.
1910년 2월 10일 대선법계(大禪法階)를 품수(稟受)하고, 1914년 5월2일 대덕(大德)으로, 1916년 3월10일 대교사(大敎師)로 승급했다. 해인사에서 도첩(度牒)을 받은 것은 1914년 5월 2일. 1911년 7월 15일 양산 통도사에서 하안거를 성만했다. 강원 이력은 다음과 같다. 사집과(1904년), 사교과(1906년), 대교과(1908년), 불교사범과(佛敎師範科, 1909년).
<사진>고경스님이 주지를 지내며 독립의식을 전파했던 해인총림 해인사 전경.
승적에 기록된 주요 이력은 다음과 같다. 해인사립(寺立) 해명학교(海明學校) 불교과 강사(1910년), 통도사 금강계단 갈마아사리(1912년), 해명학교 교감(1913년), 남해 화방사 주지(1914년), 함남 안변 석왕사 포교당 포교사(1916년), 경성불교중앙학림강사및 학감(1918년), 공주 마곡사 불교전문강사(1919년), 경성불교학원 학감및 강사(1922년), 해인사 불교전수강당 강사(1924년), 해인사 금강계단 교수아사리(1924년), 해인사 경리위원(經理委員, 1925년), 해인사 법무(法務, 1926년), 해인사 감무(監務, 1928년).
이력을 살펴보면 교(敎).율(律)에 관련된 소임을 주로 보았으며, 신구학문과 내외전에도 식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해인사 사중(寺中)의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스님은 1933년 9월 8일 해인사 주지로 취임했으며, 1943년 1월 21일 합천 경찰서에서 왜경(倭警)의 가혹한 고문을 받고 옥사(獄死)했다. 스님이 펴낸 책으로는 1933년 발간한 <해인사약지(海印寺略誌)>와 1938년 경성 만상회(卍商會)에서 펴낸 <불교와 예수교>가 있다.
해인사=이성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