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은 내가 가야 할 미래’라고 하면서도 그는 극렬한 저항시는 쓰지 않았다. 왜일까? 저항해야 할 것이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이미 물신화 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미 그는 세상의 부조리함을 인식했음은 물론 그에 저항하는 사람들조차 허위의식에 빠져 있음을 보고 있었다. 그에겐 이것이 종종 큰 슬픔이 되어 세상과 정면으로 대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때로는 그의 영혼은 주체할 수 없는 만신창이가 됐지만 끝까지 추스리면서 끝내 제 갈 길을 잃지 않았다. 노동의 희망과 자본의 억압적 지배에서 벗어난 삶의 진정성을 추구했다. 시대가 바뀌어도 그의 시들은 여전히 커다란 울림으로 우리의 가슴을 친다. 2010년 10월 28일 ‘인천지역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합동추모제’에서 한 노동자는 박영근시 ‘노동. 2’를 낭송하였다. 그 전문을 읽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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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탄식이 아니다
쇳가루 쌓여가는 폐질의 몸을 끌고가며
기다리는 죽음이 아니다
노동이란 돈에 팔려
밥덩이에 팔려 쇠붙이가 되어
노여움의 가슴을 파묻고
아아 죽음으로 잊어버리고
기계가 되어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고향집
무너진 돌담을 기어오르는
시퍼런 호박넝쿨을 따라
어린 시절 누더기 가슴을 헤치고
안전등도 없는 절단기 아래
손가락을 바치던 시절을
일으켜 깨우고
오를수록 피흐르는
노동의 캄캄한 골짜기
희망의 푸른 삽으로 찍어 오르며
쓰러진 친구들의 아우성 퍼올려
나아가면서
출렁이는 뜨거운 눈물로
그리움으로 상처투성이 온몸을 서로 씻어주는
공동체가 되어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노동이란
굶주림의 추억으로부터 사슬의 두려움으로부터
일어나
사람의 일을 하는 것이다
사람의 땅에 서는 것이다
(1987년 간행 두번째 시집 <대열> 수록)
나이 마흔 무렵 90년대 언제부터인가 박영근 시인은 울기 시작했다. 물질 만능의 시대에 빠져버린 세상에 절망했다. 변해버린 사람들의 가치 앞에서 절망했다. 그를 아는 많은 지인들이 그의 장취(長醉)와 눈물 앞에서 함께 취하고 울었다.
제5회 백석문학상을 심사한 선배 시인들은 박영근을 수상자로 뽑으면서 그의 시세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고백하건대 나는 ‘어머니’ ‘흰 빛’ ‘길’ ‘눈이 내린다’ 등을 읽으면서 몇번이고 속으로 울었다. 과연 최상의 시란 어떤 것인가, 가장 작은 말을 가지고 가장 큰 감동을 주는 것이 가장 좋은 시가 아닐까! “(신경림)
“결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은 그의 내성(內省)의 진정성이야말로 세기의 전환기에 우리 삶이 지불했던 역경과 도정의 쓸쓸함까지를 시적 성숙과 감동으로 이끌어낸 것이 아니겠는가.”(황지우)
눈물과 함께 박영근은 영원한 어머니의 품 고향을 찾기 시작했다. 97년 봄의 일이었다. 종로에서 초저녁부터 술을 마시던 그는 밤 12시쯤 술자리를 말도 없이 빠져나와 그길로 서울역으로 갔다. 서울역 앞에서 택시를 하나 잡아 타고 전북 부안으로 가자고 했다. 주머니 속에는 동전 두어닢이 달랑거렸을 뿐 오직 그의 지친 영혼을 거두어줄 고향은 말없는 옥녀봉과 깨북쟁이 친구 조찬준뿐이었다.
묘자리에 물이 날까 지관 어른은 남몰래 걱정인데
길게 흐르던 별똥별 하나 들판 끝으로 툭 떨어진다
상여엔 두레 울력도 노래도 없구나
이백년 묵은 당산나무가
그 텅 빈 몸통으로
간신히 잎을 피워올리는 봄밤에
(초상집’ 부분-97년 <녹색평론> 5, 6월호)
새벽에 찾아간 고향의 초상집에서 시인은 해체되어가는 공동체를 보았을 뿐이었다. 이후 박영근의 고향 방문은 계속 이어졌다. 부안읍에서 변산 가는 길에 해창을 지나며 그는 사라져버린 마을과 긴 방조제를 보았다. 건설자본의 폭압을 보았다.
수평선 자락에서부터 눈 시리게 출렁이던 물이랑을 지우고
물길을 끊어버린 방조제 공사장을 나는 바라본다
뻘길은 평지가 되고 한 도시가 들어서겠지
보상금에 조생이 자루를 놓아버린 조개미 아짐은 또 취했나보다
다 떠나버린 마을 길에서 해장 술집을 찾는다.
(‘해창에서2’ 부분. 유고시집 <별자리에 누워 흐르다>에 수록)
2000년대, 세상은 더 화려해졌지만 속으로 어둠은 더 깊어갔다.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4번째 시집 97년 간행) 라며 어둠을 몰아낼 별들을 불러보았지만 사람들은 비겁한 자본의 일상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허위와 가식으로 치장한 ‘꽃들이 불편'(저꽃들이 불편하다. 2002)했다. 자정을 넘긴 깊은 밤 그는 외로움에 떨다가 택시를 타고 지인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낭만도 결기도 사랑도 연대도 정당한 분노도 사라진 각진 세상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송경동)
많은 사람들이 박영근 시인을 생각하면 술을 떠올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술과 멀어지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철산리 시절부터 2005년까지 그와 이웃하여 살아온 필자는 그의 부평4동 자취방에서 술병을 본 적이 없다. 퇴근 길에 들러 저녁식사를 하며 반주 한 잔 하자 해도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술을 즐기는 애주가는 결코 아니었다. 술에 취해있지 않은 박영근은 늘 쾌활했고 왕성한 식욕을 보였다.
필자는 2005년 들어 인천 부평에서 서울로 이사왔다. 그 후 그를 본 것은 병원에서였다. 그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폐결핵이 깊어졌건만 이를 감추고 한사코 병원에 가지 않으려는 것을 억지로 떠메어 왔다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소극적 자살’로 규정하기도 했다.
변산에서 열린 ‘박영근 시인 4주기 추모제’에 참여한 현기영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혁명은 타락하고 물질적 가치만 대서특필된 세상이 되었을 때, 압제의 어둠속에 빛나는 횃불을 들었던 시인들이 변화한 세상으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있었을 때, 많은 시인들이 부박한 세상에 편승하여 영혼이 없는 시, 하루 동안 살기도 어려운 하루살이 시를 쓰고 있었을 때, 시인 박영근은 절망했고, 아마도 그 절망이 그를 나락으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그의 순수한 영혼이 살 수 없었던 이 세상에 우리는 궁색하게도 살아남아 있다.”
안치환이 불러 널리 알려진 민중가요 ‘솔아 푸른 솔아’의 가사는 박영근의 시에에서 나왔다. 절창인 후렴구를 비롯한 핵심 대목을 ‘솔아 푸른 솔아 – 백제 6’에서 가져왔을 뿐더러,
시퍼렇게 쑥물이 든다는 비유법과 불어오는 바람, 갈라진 세상, 어머니의 눈물과 울음 등의 시상은 ‘취업 공고판 앞에서’ ‘고향의 말 4’ ‘들잠 – 백제 3’ ‘서울 가는 길’ 등 그의 작품 곳곳에서 또렷하게 발견된다.(김이구)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창살 아래 네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샛바람에 떨지 말고 살아서 만나자던 박영근, 노래만 남고 시인은 갔다.
*박영근 시인(1958~2006) 약력
– 1958년 전북 부안 변산면 마포리 출생
– 1981년 <反詩>6집에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 1984년 첫시집 <취업공고판 앞에서> 간행
– 1987년 두번째 시집 <대열> 간행
– 1993년 세번째 시집 <김미순傳> 간행
– 1994년 제12회 신동엽 창작기금 수혜
– 1997년 네번째 시집 <지금도 그별은 눈뜨는가> 간행 -창작과 비평사-
– 2002년 다섯번째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간행 -창작과 비평사
– 2003년 제5회 백석문학상 수상
– 2002~2005년 인천민예총 부지회장
– 2002~2006년 민족문학작가회의(현 작가회의) 이사
– 2004~2005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시분과위원장
– 2006년 5월11일 타계